로마서- 톰 라이트
새 왕에 대한 좋은 소식(1:1-7)
2015-02-06 22:03:15
바울은 특별히 좋은 소식(the good news) 혹은 복음(the gospel)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복음이란 단어는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의 저변에 짙게 깔려있다. 여기서도 바울은 복음이 실제로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자신이 이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온 세계가 왕이신 예수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로마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이며, 또 자칭 공식 직함이 신의 아들인 로마 황제의 본거지인데, 바울이 예수가 로마는 물론 온 세상의 왕이 라고 하니 말이다. 바울이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로마 황제를 의식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가 말하는 복음은 이스라엘의 예언서와 시편의 깊고 풍부한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왕에 대한 계시였는데, 이제 바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심으로 온 세상의 왕이 오셨다.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고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그 왕은 자신이 오신 좋은 소식을 전할 대사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이 대사를 사도라고 부르는데 이는 보냄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대사, 곧 사도라고 말한다. 바울이 전하는 좋은 소식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이다. 그 사건을 통해 세상이 달라졌다. 그 좋은 소식이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며 동시에 세상의 주이신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소식이다. 바울 복음이 던지는 도전은 로마 황제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황제와는 아주 다른 누군가가, 황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을 행사하는 누군가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로마 교회를 보고 싶어하는 바울(1:8-13)
2015-02-06 23:08:34
초기 기독교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 간 적이 있었다.(행12장) 아마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마침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보내셨고, 이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세상의 주가 되셨음을 로마에 알린 첫 번째 사람일 것이다.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꽤 큰 유대인 공동체에 그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선교하지 않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의 입장은 약간 미묘한 것 같다. 바울은 그들에게 결함이 있음을 내비치려 하지 않고 그들과 서로 격려가 되는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싶어한다. 나아가 바울은 서 지중해를 돌아서 스페인까지 죽 이어지는 선교의 새로운 국면을 위해 로마가 전초기지 역할을 하기 소망한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로마교회가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최대한 온전히 이해하기를 원했고 이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였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6-8년전에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분쟁이 있었는데, 이 분쟁은 그 도시의 유대인 집단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옴으로 야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분쟁으로 인하여 당시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해버렸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만난 처음 친구들중 몇몇은 이때 로마를 떠난 사람들이었다.(행18:2) 그러다 주후 54년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들은 귀환을 허락받았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추방된 이후 로마 교회는 클라우디우스 재위시에 전적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기독교는 유대인을 떠나 전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왔고 로마교회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돌아왔다.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는 바울의 가까운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바울의 확고한 복음을 로마교회에 전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유대 율법을 완성하셨으며 또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이방인을 유대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시키신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교회의 이런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소식, 구원, 하나님의 의(1:14-17)
2015-02-06 23:34:25
바울은 자신이 왜 로마에 가고 싶어하는지 말하면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복음의 효력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의 전령으로서 로마에 가고자 하는데, 이는 그가 맡은 직분의 일부이며 또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복음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 곧 세계와 인류를 바로 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오랜 계획을 드러냄으로써 구원을 성취한다. 사실 바울 복음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된 것은 그의 복음이 유대교의 성경과 전통에 뿌리는 두었으면서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장벽을 돌파하여 한 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과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유효하다고 선언한다는 점이다. 이점이 바로 로마서 전체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을가? 바울 당시에는 한 도시(로마)와 한 인간(황제)에게 집중된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로마 교회도 그 문화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들은 사적으로만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가? 물론 바울이 의도한 행동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는 "왕들 앞에서 거침없이 주의 교훈을 말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한 시편 119:46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또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고(빌2:10)고 썻는데, 거기 모든 사람에는 로마 황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시대적 배경일 것이다.
바울은 이미 4절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분을 참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또 다른 능력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주로 선포할 때 어디서든 효력을 나타내는 그런 능력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세상의 주로 공표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 일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을 때 탄생한 새로운 세계를 통해, 듣는 이들의 마음과 생각, 삶의 방식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실한 선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결과는 구원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죽어서 하늘에 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타락과 부패에서 구출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영광스럽게 살 수있을 것이란 의미이다. 물론 구원의 완전한 영광은 미래에 나타나겠지만 바울은 자주 이 구원이 단지 미래의 일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구원은 현재를 향하면서, 사람들을 죄의 상태에서 구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로움과 박해에서 구출한다. 구원은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의 실제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이 사람들의 삶으로 침입할 때, 그 구원은 그들이 되돌아 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이 된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구원받고 있으며, 구원받을 것이다.
이 구원은 모든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 즉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메시지를 믿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님이 실로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의미한다.(참고 로마서4:24, 10:9)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 첫번째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따르는데, 그것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게 된다는 약속이다. 이러한 선고는 마지막 심판 날에 앞서, 지금 즉각적인 효력을 발생한다.(3:21-31) 이것이 바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동등한 조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자격을 얻는 일이 가능한 이유이다.
예언서와 시편에서 정의(justice)와 의(righteousness)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셨고 지금도 통치하신다면 세상의 악과 불의에 하나님은 어떻게든 대처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로우시며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한 가족을 부르셨고 그들과 구속의 협약, 곧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그 언약은 하나님이 그들만 사랑하거나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나머지 사람들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들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정의 혹은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펼치고 바로잡기 위해 택하신 방법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수단으로 삼아 온 세상을 악과 부패와 죽음에서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과 약속을 지키시며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온 세상에 가져오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의 정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모든 개념을 포괄하기 위하여 그 단어를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God's covenant justice) 혹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God's covenant faithfulness)으로 번역했다.
바울은 복음이 공표되면 그 복음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 언약적 정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밝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고 우리를 또한 바르게 바꾸실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유익을 누리려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과 약속에 신실하셨다. 따라서 이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우리의 신실함, 곧 믿음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언약적 목적과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식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러한 신실하심이 자신에게도 미쳐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타락한 자들(1:18-23)
2015-02-07 00:10:38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구원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이 복음이 긴급하게 필요한 이유는 온 세계가 사람의 전적인 부패로 언제 망하게 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사람은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반드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못하면 세계 전체가 망가지는 것이다.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는 언제나 건강하고 풍성한 인간의 삶을 위한 길이었으며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문제는 인류는 모든 차원에서 창조자에게 반항을 해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께 영화와 감사를 돌리는 대신, 이 진리를 막는 길을 택했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막으면서 사람에게는 뒤틀린 사고와 어두워진 마음이 생겨났다. 이것이 사람의 치명적인 질병이다.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이 질병을 감출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리석으면서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주장할 수 있다.
뒤틀린 사고와 어두워진 마음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삶 전제로 퍼져가는 죽음의 첫번째 표지는 바로 예배의 실패이다. 인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형상을 품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실재와는 한참 동떨어진 우상을 만들어 냈다. 바울은 우상 숭배를 저지르는 어떤 개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일부를 숭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위로부터 나타난다. 불경건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는 것인데, 불경건의 뒤를 신속하게 뒤따르는 것이 불의이다. 불의는 망가진 인간의 삶과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불경건과 불의의 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anger)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와 인간 피조물에 대하여 대단히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계와 인류를 더럽히고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불의가 영원히 지속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더러운 정욕, 욕된 몸(1:24-27)
2015-02-07 01:04:46
바울은 여기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거역해 왔는지 설명한다. 그는 단순히 인간 역사의 특정 시점에 주어진 율법을 위반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창조 질서의 구조를 어떤 식으로 위반해 왔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창조 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생각한 창조 질서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이외의 다른 피조물을 돌보는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남녀가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세계가 품고 있는 그 풍부하게 번성하는 능력을 찬양하고 누려야 한다. 또한 인간은 동산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세계에 펼칠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바울이 인간 생명의 타락을 예시하는 첫 사례로서 동성애 문제를 거론한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바울이 동성애라는 특정 행위를 인간이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목록의 맨 위에 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가 말하려는 요점은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진 창조 목적과 다르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창조자의 의도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 세상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 곧 인류전체가 본성을 왜곡하는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동성애 관행을 인간 세계 전체가 고장났음을 보여주는 표지로 본다. 바울은 이러한 고장의 원인이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피조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정욕이 이끄는대로 내버려두신 결과라고 말한다. 이런 큰 맥락에서 볼 때에만 우리는 바울의 생각에 깊이 깔린 근본적인 요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셨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책임을 주셨다는 것은, 말 그대로 확실한 책임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일 뿐 아니라 인류의 선택이기도 한 우리의 선택에 대해,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선택의 결과를 따라가도록 허락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시어, 회개하고 방향을 바꿀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만일 우상숭배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인간성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 우리의 인간성 또한 상실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을 경배할 때, 우리는 그 형상을 더 밝게 반영함은 물론 더 완전하고도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두워진 마음, 어두워진 행위(1:28-32)
2015-02-07 01:05:43
바울은 이 단락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고 단언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사고까지 모두 해체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내어 버려두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반영한다. 악은 정신이 정상에서 벗어나서 뒤틀리고 욱체가 거기에 편승할 때 찾아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만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하는 것이다. 이 모두는 결국 결정적인 선언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말 그대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하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결은 창조 구조속에 내장되어 있어서 악행은 본래부터 파괴적이고 죽음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같다.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미래의 죽음이 현재속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등골이 오싹한 장면을 본다.
모든 자에게 차별없이 임하는 심판(2:1-11)
2015-02-07 22:07:01
바울의 글 중에 최후 심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로마서 2장이다. 흔히 신약은 구약과 달리 하나님의 자비만 나타나고 심판은 구약의 개념이라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순전히 허구이다. 물론 신약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강조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거부한다면 다른 도리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창조주로서 세상을 바로 잡는 일에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선으로 돌아올 기회가 충분하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악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재앙을 구하는 셈이된다.
이 본문은 바울이 의기양양한 이방 도덕가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은 부도덕을 미워하며, 그런 부도덕을 행하는 자들과 다르며, 사람이 조금만 교육을 받고 의지력이 있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이 열망하는 덕스런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지 몽매한 영혼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있지만, 그들 역시 은밀하게 같은 부도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지금까지 현명한 사상가들은 그들 자신이 도덕법을 반복적으로 깨뜨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나 철학 어디에도 최후 심판에 대한 교리는 없지만, 유대교에서는 이 교리가 아주 중요하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세계에 책임을 지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세계를 바로 잡으실 것이며 그리고 엄격한 정의에 입각하여 전혀 차별없이 심판하실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 신학자로서 유대교의 이런 근본적 신앙 가운데 어느것도 취소하지 않는다. 실제로 최후의 심판이 있을것이고 그 심판은 각 사람이 영위해 온 삶 전체에 부합하게 내려질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의한 칭의" 라는 바울의 교리를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을 폐지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차별없는 심판이 임하는 방식(2:12-16)
2015-02-08 22:33:18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유대 율법인 토라, 곧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의미한다. 이 율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율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반 도덕법을 지칭하는 의미로 율법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3장에서 등장하는 "믿음에 의한 칭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의 주로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선고를 이미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이미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로 확정되어 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면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형성한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바울이 가르치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의미이다. 그것은 실로 놀랍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미래의 심판에 앞서 누가 진짜로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현재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며 우리 죄를 진짜로 용서받았음을 현재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믿음에 의한 칭의가 현재에 대한 진리임을 망각한다. 다시 말하면 원래 하나님은 행위에 따른 심판을 계획하셨지만 사람이 아무도 그 심판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다른 대안을 마련하신 것이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과 믿음에 의한 칭의 사이의 대조는 원래 하나님이 행위에 따른 심판을 계획하셨는데, 그 대안으로 믿음에 의한 칭의를 마련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에 따라서 미래에 이루어질 심판과 그 판결에 대한 현재의 기대(믿음에 근거한 기대) 사이의 대조이다. 현재적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미래의 심판은 한 사람이 영위해 온 모든 삶을 기초로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지금 현재적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심판 날에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유대인이 율법을 소유했다고 심판에서 유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들이 가진 조건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율법 밖에 있는 이방인은 율법 밖에서 심판을 받고, 율법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율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율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주장과 문제점들(2:17-24)
2015-02-08 22:34:02
바울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나머지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는 표지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자랑했을 것이다. 바울은 회심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부르심을 자신이 굳게 붙들 수 있는 반석으로 여겼을 것이다. 만일 메시아가 이방인과 싸워 승리하며, 또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순종하라고 가르쳤디면 바울이 가진 유대적 세계관에 잘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당한 사람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바울에게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옛 약속을 그런 방식으로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바울은 이스라엘 전체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한두 번 실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과제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고발은 모든 유대인들이 도둑질이나 신전 물건을 훔쳤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 유대인이라도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이는 한 민족으로서 세상의 빛이고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를 이방에 드러내야 하는 이스라엘의 자부심을 전적으로 약화시켰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고발은 복음의 계시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자들의 말이 실현되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폐허가 되고 유배를 당했다. 비록 일부 유대인들이 본토로 귀환했지만, 이방인인 로마의 지배가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유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바울의 요점은 이스라엘은 실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율법은 실제로 한분이신 참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명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부르신 백성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부르심에 여전히 신실하셨는지를 말하려고 한다. 그 유일한 해결책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그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실패한 결과를 몸소 담당할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식이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어깨에 짊어지고, 새 언약을 세우실 것이며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의 율법을 쓰실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새 언약 가운데 내면에서부터 변화될 것이다.
표지와 이름과 의미(2:25-29)
2015-02-08 22:35:27
바울의 요점은 유대인이 율법을 어기면 그가 받은 할례는 결과적으로 무할례가 된다는 것이다. 몸에 새긴 할례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의 진짜 위치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무할례가(이방인)가 율법의 요구를 지킨다면 그들도 할례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할례자이면서도 율법의 요구를 지키는 이방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영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을 지닌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6장의 예언을 반영하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압도적인 영적 체험과 일맥상통한다.
바울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언약을 갱신하셨으며 이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민족적 배경, 그리고 할례와 같은 외적 표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이셨다고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율법의 참된 완성을 이루신다면 이방인도 유대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선언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인데, 이것은 구약에서 말한 바, 사람 내면의 기이한 작용, 곧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다. 언약 갱신이 하나님의 영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일어났는데, 바울은 갱신된 이 새로운 언약을 하나님이 자신의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신 행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해한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3:1-8)
2015-02-09 17:18:30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계시를 위탁받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 분의 메시지를 맡으라는 책임을 받았다. 유대인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함으로써, 유대인의 하나님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그들은 위탁받은 메시지를 단순히 자기 민족을 위한 특권의 징표로 여기고 전유해 버렸다. 이스라엘은 옛 예언자들의 말대로 신실하지 못하고 무익한 메신저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원래 계획에 신실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않다고 하여 그분의 신실하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임무를 수행할 신실한 이스라엘을 몸소 마련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새로운 언약백성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유대인과 할례자로 부르게 하셨다면, 실제로 유대인이 되는 것 혹은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주셨을 때 분명한 의도가 있었고, 이제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 언약을 지키셨으며, 또 성령으로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과 세상,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모두 이런 믿음에 기초한다. 결국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분의 원래 계획에 충실한 방법을 발견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이스라엘이 드려야 했지만, 드리지 못했던 신실한 순종을 드리셨고, 그 메시지를 최종적으로 전달하는 신실한 메신저가 되셨다는 것이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도 유죄다(3:9-20)
2015-02-09 17:19:30
바울은 이미 모든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임을 보여주었다. 이제 유대인도 피고석에 앉은 이방인과 합류하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창조자 앞에 온 인류를 모아들여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유죄 판결을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도 유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 모두가 죄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이다. 죄는 그저 잘못된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상명력을 지진 하나의 권세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한 개인에게 유죄의 책임이 있는 특별한 죄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용된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듯이 유대인도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사랑을 반영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된 구약 본문들은 악인에 대한 고발이 약속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며 또 고발 다음에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행동하시며 악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을 구출하신다는 약속이었다.
이 문제를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20절에서 율법문제로 되돌아가는데, 그는 여전히 유대인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율법 자체는 죄를 알게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율법에 대한 본격적인 논증에 대한 예비적 언급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요점은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받을 최후의 심판에서 호의적인 판결을 얻기 위한 근거로 윮법의 행위에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악한 세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어진 율법을 의지해 왔는데, 정작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그 율법이 그들을전혀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가 드러남(3:21-24)
2015-02-09 17:20:16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피고석에 앉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실패한 것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위대한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이 모든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명백한 언약적 의무를 다하실 수 있는가? 이 대목에서 바로 하나님의 의 , 하나님의 정의 혹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란 주제가 등장한다. 바율은 이미 1장 17절에서 복음이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세상이 악하지만 이스라엘은 올바르게 행동했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위임을 받았지만 신실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이 났고, 그들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복잡해진다.
언약,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 및 그 가족과 맺으신 구속력 있는 협정이 애초부터 인간의 악과 그 결과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시고 창조의 원래 계획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잘못에 빠진 세상을 고치시려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을 통해 모든 것이 바로잡히도록 하나님은 의도하셨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에 진실하실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대를 완전히 저비렸고 그들도 세상과 한 통속으로 잘못되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에 대한 문제다.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진실하실 것인가?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의 복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셨는지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메시아의 신실한 죽음을 통해,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언약에 신실하셨는지, 그리고 이로써 잘못에 빠진 세상과 좌와 죄책감으로 길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해답을 제공하셨는지가 밝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새로운 계시가 율법과는 별개로 나타났음은 물론,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것을(새로운 계시를) 증거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새로운 계시가 율법과 별개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울법안에 있는 사람들, 곧 유대인만 그 계시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계시가 유대인들에게 별 유익을 주지도 뭇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계시는 율법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한 것이므로 율법과는 별개로 나타나야 한다. 이 새로운 계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언약 계획을 파기하고, 다른 어떤 방편을 이용하여 다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이스라엘이 드려야 했으나, 드리지 못했던 신실한 복종을 하나님께 드릴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이(곧 메시아) 나타나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했다.
이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이 비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신 메시아 예수이시다. 그 메시아가 자기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에게 해당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해당하고 또 그 백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메시아에게도 해당된다. 이 근본적인 원천에서 바울의 모든 사상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22절을 그냥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문맥상 예수님의 믿음 혹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언약으로 부르실 때 염두에두신, 구원의 목적에 대해 예수님이 신실하셨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8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신실함과 복종은 동일한 것을 이루는 두가지 방식이다.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위임령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역할을 부각하다면 복종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을 부각한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는 24절의 구속(redemption)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23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듯이 모든 사람은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하셨던 일(출애굽의 해방)을 이제 예수님 안에서 온 세상을 위해 하신다. 예수님은 구속, 곧 죄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바울이 구속이란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실로 새로운 출애굽이기 때문이다. 이 구속은 단순한 죄의 사면이 아니라 의롭다는 평결을 말한다. 바울은 그들이 단지 방면된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지위까지 얻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마지막 날에 있을 대평결 보다 훨씬 앞선, 현 시점에서 이미 의롭다고 선고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를 드러내는 예수의 죽음(3:25-26)
2015-02-09 17:21:08
3:25 하나님은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예수의 피로써 예수를 속죄소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전에 지은 죄를(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지나치심으로 자신의 언약적 정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26 이는 바로 지금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다는 것과, 예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고 선고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언약적 정의를 나타내기 위함" 이라는 거의 동일한 구절을 두번 언급하는데, 첫번째는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신다는 것,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게된 새로운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구속하신 것, 곧 종살이에서 구출해 내신 것에 대해 말했다. 이제 그는 성전과 희생제사의 언어로 촛점을 옮긴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성전 기구중 하나인 속죄소로 세웠다고 말한다.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는 하나님이 그곳에 새겨진 그룹천사들 사이에서 은혜와 용서 가운데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던 장소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속죄소로 세워졌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리이자 수단이라는 의미이다. 곧 죄의 용서는 예수님의 피틑 통하여 효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으심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한복판에 있다.
바울은 전에 지은 죄를 지나치심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적 정의를 나타내신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결국 죄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말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요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행동하시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속죄소(혹은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떠맡는 자리에 예수님을 세우시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 날이 역사의 중간으로 미리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 곧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예수에게 떨어진 것이다. 역사의 중간으로 미리 들어온 판결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마지막 결과를 포착할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를 처리한 하나님의 행동에 나타난 그분의 언약적 정의는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은혜로운 선언속에 현재적으로 나타났다. "믿음에 의한 칭의" 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진실로 장차 무죄를 인정받을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칭의"에 담긴 법정적 의미이다. 또 이 선언에는 언약적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는 미래에 하나님이 누구를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라고 선언하실지 현재 시점에서 안다. 그리고 이 선언에는 에수님 안에서 현재 속으로 들어오는 미래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바울이 제기한 어려운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언약에 신실하시면서 동시에 죄에 대해 정의롭게 판결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이 한편으로 죄인을 심판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죄인들을 구출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그 질문에 대답하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공정하게 죄를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분으로, 동시에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드러난 수단이었으므로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를 믿는 사람들 역시 지금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정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그분의 복음을 신뢰하는 우리도 의롭다고 하신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3:27-31)
2015-02-09 17:21:5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인 토라를 주셨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다, 토라를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미래에 누가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지 현재 시점에서 식별하는 방법은 그들이 지금 율법의 행위를 준수하는가 여부이다. 이것이 그들이 달고 있는 표지, 곧 그들이 미래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라는 현재의 표지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유대인에게 국한된 문제였다. 그들은 토라를 소유했으므로 이론적으로나마 그들만이 토라를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미래의 심판에 앞서 현 시점에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확정하는 문제는 보통 이스라엘 내부에만 국한되었다.
바울은 이 모든 것, 곧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자랑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은 자랑을 자랑을 배제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그 대신에 바울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제시한다. 이것은 예수의 복음을 믿을 때, 마지막 날의 판결이 어떨지를 하나님이 미리 선언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사람은 언약 가족 즉 죄를 용서받은 백성이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가족이며 메시아 백성의 일원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셨지만 그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일을 더 쉽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장벽을 낮추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더욱 분명하고 확고하고 긴박한, 실로 충격적인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이 특별한 메시지를 믿고,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현재 시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칭의를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칭의를 얻는 공적이 아니라, 사람이 이제 진실로 언약에 속할 수 있도록 복음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다는 확실한 표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선포된 메시아의 말씀에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이 현재 시점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을 확정하는 유일한 표라면 유대인과 이방인이나 동등한 입장이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자랑할 것이 아예 없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유대 종교의 핵심인 유일신 신앙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의미는데 바울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차별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면, 이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동등한 자격을 얻도록 초대받을 때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을 폐지할 것인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을 휄씬 더 훌륭한 곡조, 곧 하나님이 몸소 율법을 위해 만드신 곡조에 맞출 것이다. 율법은 바리새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시도했던 대로 "행위로" 완성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9:30-10:4을 보라) 율법은 언제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곡조에 맞추어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바울이 율법에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율법이 행위를 통하여 완성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이므로 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은 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곧 믿음을 통하여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말하려는 핵심이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4:1-8)
2015-02-10 16:08:30
여기서 바울은 왜 갑자기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그러나 3장으로 돌아가서 본문의 방식대로 읽어보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칭의는 사람이 언약가족으로 입양되었다는 하나님의 선고이다. 그리고아브라함은 언약 가족, 곧 현재의 신자들이 속한 가족의 시조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언약 가족은 어떤 종류의 가족인가?
4장에 시작되는 질문은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 하겠는가? 라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현재 아브라함의 가족에 입양되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과 민족적, 육신적으로연관이 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인다. 이 질문을 한 이유는 아브라함과 언약을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브라함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4장의 중추를 이루는 바울의 설명은 주로 창세기 15장에 근거한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그에게 특별한 가족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좋게 여기셨다.(창15:6)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의롭다는 것을 가리키는 그러한 믿음이었다. 하나님께 의롭다는 것은 언약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거의 같다. 사실 창15:6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는 그때 세워진 언약의 기초였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선고하기는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브라함이 행한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었다.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를 지켰으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진정한 언약 가족은 율법의 행위를 이행하는 자들, 곧 유대인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결론을 일체 거부한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선고하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신뢰했다는 바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은 전형적인 이방인이었으며, 부르심을 받은 시점에도 여전히 경건치 못했다는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언약으로 부르셨다. 이 언약은 불경건은 물론, 불경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인간의 모든 불의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와 동일한 지점, 곧 이방인이며 비유대인으로 출발했고 하나님은 바로 그 지점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셨다. 그러므로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도 이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믿음을 통하여 언약의 신분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바울은 두번째 논증으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다. 바울이 설명하는 의미에 다르면 언약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죄가 처리된 사람이다. 언약이 죄를 처리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되, 그들의 죄를 합산하거나 죄로 산정하지도 않는 것이 복되다고 노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의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고 덮고 산정하지도 않으시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 가운데 단연 최고의 영광일 것이다. 다윗은 갈보리 사건이 있기 천년전에 이미 그 영광을 찬미했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영광이 나타났고 영구히 견고한 터위에 섰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 영광을 찬미해야 하겠는가!
무할례자와 할례자 모두의 조상 아브라함(4:9-12)
2015-02-10 16:09:3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 관계를 시작하시면서 일종의 결혼 반지와 비슷한 것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라는 표이다. 창세기 17:11에서는 할례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표" 로 선언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할례를 일컬어 "아브라함이 믿음에 기초하여 의로워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와 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의로워짐" 혹은 "의"를 언약에 속한 신분(membership in the covenant)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여기서는 "할례의 표"를 "언약의 신분이라는 지위를 나타내는 표와 인"으로 번역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할례와 무할례의 문제를 계속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논쟁 배후에 있는 커다란 문제였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주장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논증은 갈라디아서와 다르다. 바울의 주장은 간단히 말해서 이렇다. 창세기 15장(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 일)이 창세기 17장(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일)보다 앞선 때이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을을 의로 여기면서 그와 언약을 세우셨을 때, 아브라함은 무할례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하는데 할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4:1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중요한 대답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방인 회심자들이 아브라함과 민적적이나 육신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할례 받지 않았을 때에도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므로 이방인 회심자들 역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할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기초로 언약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바울이 무할례자인 이방인만 아브라함 가족의 구성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자란 단순히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두가지 방식으로 재정의하였다.. 하나는 복음을 믿는 이방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인데 모든 유대인이 아니라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유대인들이다. 오직 이 두가지 방식으로만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바울의 취지는 유대인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믿음을 기초로만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분명 4장 마지막에서 상세히 설명한 믿음, 곧 예수님과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 갱신 행위인 예수님의 부활에 촛점을 마추는 그런 믿음을 말한다.
모든 믿는 자의 조상 아브라함(4:13-17)
2015-02-10 16:10:26
아브라함과 그 가족이 "세상을" 상속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바울의 말은 대단히 놀라운 발언이다. .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가나안 지역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물론, 신약성경 전체에서 나머지 나라들과 구분되는 특정 영토라는 의미의 성지 개념은 사라졌다. 그 대신 땅에 대한 변화된 개념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성지라고 부르시며.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그것을 상속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표준적인 유대인의 사고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꾼 것이다. 이는 이방인 회심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결정만큼이나 중요하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출생과 마찬가지로 지리적 특권 역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는 언제나 온 세상을 바로잡으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이시며 심판자로서, 바로 그 일을 하셔야 할 자발적 의무를 가지고 계시다. 그러므로 4장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의 가족이 어떻게 다민족의 구성체로 변화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이나,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실 때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온 세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은 더 큰 목적과 약속에 대한 일종의 선 은유(advance metaphor)였던 것이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이 할례를 기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또한 유대 율법을 기초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율법과 관련된 주요 문제는 율법의 기능이 죄를 드러내고 처리하는데 있는 것 같다. 바울은 3:20에서 율법을 통해서 얻는 것은 죄를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 4:15에서는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만일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있기 위해서는 무율법 지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무용지물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사실상 폐지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방인이 유대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려면, 그럴 수 있는 공간, 즉 유대 율법으로 한정되지 않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약속은 아브라함의 온 가족에게 유효해야지 , 일부 가족에게만 유효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믿음에 의해, 혹은 은혜를 따라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에 약속하신 다민족 가족을 그에게 주시려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아비로 삼았다고 말씀하신 창세기 17:5을 인용하면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궁극적인 가족은 결코 한 민족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결부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바울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력이 달려있다고 선언한다.유대인의 회심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삶(생명)을 의미한다면 이방인의 회심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생명을 주시는 창조자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의 새 가족을 만드셨는데, 이는 동등한 조건에서 믿은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으로 구성된 가족이다. 아브라함이 다민족 가족이라는 개념은 신약에서 중요하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4:18-25)
2015-02-10 16:11:12
아브라함의 믿음은 명백히 불가능한 것을 약속하신 다음에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단지 아브라함이 보여준 굉장한 신뢰를설명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류의 타락에 대한 바울의 설명과 대조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와 같은 종류의 믿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인간은 다시금 한 가족으로 연합되어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창조자 하나님을 무시했지만(1:20,25), 아브라함은 창조자 하나님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었다(4:17) 인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으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았지만(1:20),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능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다(4:21) 인류는 하나님께 마당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았지만(1:2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4:20), 인류는 하나님 아닌 존재들을 예배함으로 자신의 몸을 욕되게 했지만(1:24), 아브라함은 새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죽은 것 같은 몸에서 다시 힘을 얻었다.
하나님은 새 소망의 하나님이시며 새 열매를 맺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새 출발과 새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류의 죄를 무효화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길고 굴곡진 역사를 거쳐 마침내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그 목적지에 도달했다.
바울은 1-4장 전체의 대단원에 담긴 논의를 4장의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무리하는데 이것은 또한 5-8장에서 말하려는 내용을 예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의 논의 전체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그리고 바울의 모든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고 그 힘이 무엇인지를 다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사람들 손에 넘겨지셨다. 달리 말하자면, 세계를 망가뜨린 인간의 엄청난 죄악이 함께 몰려와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법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리되셨다.(3:25, 8:3) 또 예수님은 우리의 칭의를 위해 곧 우리가 의롭다는 선고를 받게 하시려고, 우리가 언약의 구성원이라는 확정을 받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다.
로마서의 첫 단원(1-4장)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로 그 막을 내린다. 예언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마침내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율법이 다 이루어졌으며, 사람의 우상숭배와 죄와 죽음은 결정적인 도전에 직면했고,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이스라엘의 신실한 대표자인 메시아로 보내셔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셨고, 복음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믿는 사람들이 새 언약의 백성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단일한 세계 가족으로 편입되게 하셨다.
평화와 소망(5:1-5)
2015-02-12 00:04:42
이 본문은 로마서의 중심 단원(5-8장)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1-4장에서 기초를 세운 바울은 이제 그 위에 구조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예전에 약속하신 모든 것이 실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리고 있다. 로마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이 본문에서 바울은 모둔 불화를 종식시키는 궁극적 화해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의롭다는 선고를 받았으므로 이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평화을 누리는 것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는 자연스럽겠지만 우리편에서는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행동이나 사고 그리고 심정이 반항과 우상숭배로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은혜에 "들어간다" 고 한 표현은 성전 용어인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 결과 은혜의 상태에 있다. 은혜의 상태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대하심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편하고 자연스럽게 은혜로 호흡하는 자리로 초대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음받은 목적이고, 참된 인간 실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크고 엄청나고 상상하지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생각만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어떠 놀라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두려워 떨기보다는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과 기쁨을 들이마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방영이자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자가 되는 길로 초대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이 영광은 우상숭배와 죄로 말미암아 잃어바렸던 영광이다.(3:23)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이 영광을 상속받을 때, 모든 피조물이 타락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찾은 자유, 곧 참된 자아에 이르는 그런 자유를 누리게 된다.(8:21)
이어서 바울이 고난중의 기쁨을 언급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여전히 타락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는 우리가 거쳐갈 수 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우른 고난을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기뻐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임재하시고 사랑을 주실 때와 똑 같은 방법으로 어떤 과정속에서 고난을 사용하심을 본다. 그 고낭은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도록 변화시키며 그 과정에서 인내에서 섬품으로, 성품에서 소망으로 발전된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면에서 세상의 시류를 거슬러 헤엄치라고 요구하는데, 고난은 세상을 거슬러 헤엄치는데 반드시 따라온다.
그렇게 할 때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마찬가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소망이므로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망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이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설명한 새로운 가족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가족이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이제 이것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에게 현실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5장부터 시작되는 단원(5-8장) 전체에 걸쳐 예수님께 속하는 사람들이 참된 언약 가족임을 밝히며 이 언약 가족 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약속과 모든 명령이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어/?덯게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며 그분께 믿음의 순종(1:5)을 드리는 사람으로 확정되는제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최종 구원의 보장(5:6-11)
2015-02-12 00:06:03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일어난 화해에 대해 계속 탐구하면서 그런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셔야만 했던 일의 의미를 철저하게 검토한다. 메시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행동하시는 사랑을 보게된다. 살아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는 성육신(enfleshment)이 없었다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메사아의 죽음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준다면, 이는 메시아가 완전한 인간 존재,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바로 그 안에서 완전히 현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바울의 모든 편지 속에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특별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하나로 묶어준다. 어떤 면에서 로마서 5-8장은 온통 소망에 대한 얘기이다. 그 소망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은 최후의 구원을 확신한다는 견고하고도 분명한 소망이다. 바울은 2장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고, 이 심판은 전적으로 의롭고 공정하고 차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3"21-4::25 에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믿을 때, 사람들은 현재 시점에서 이미 언약 가족에 속한 것이며, 언약 가족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미 의롭다고 판결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바울이 5-8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현재 받은 판결이 미래에 재확인되는 그런 소망으로서,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에 확고하게 기초하는 것이다. 우리가 악하고 무력한 죄인이었을 때(6,8절) 메시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그분이 다가올 심판 날에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9절) 이 말은 하나님이 어려운 일도 하셨는데 쉬운 일은 더욱 더 수월하게 행하실 것이란 의미이다.
아담과 메시아(5:12-17)
2015-02-12 00:06:45
하나님이 한 사람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신 일은 단순히 인류가 죄가 오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점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우는 정도로 그치시는게 아니라 훨씬 더 큰 일을 행하신다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지금 아담과 메시아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요점은 지금까지 줄곧 주장한 것처럼, 인류의 원죄 곧 죽음을 초래하고 진정한 인간성의 붕괴와 부패에 이르는 우상숭배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일이 미래의 소망이란 관점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았다(5:1-11).
이제 바울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6-8장에서 하나님의 새로워진 백성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발전시킬 것이다.
바울은 인간을 바로잡는 것은 단순히 아담의 죄와 그 결과를 뒤집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죄의 결과인 죽음과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대등한 수준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죄에 따른 부정적 판결, 곧 정죄는 이미 행한 일에서 나온 직접적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밖에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인류가 황폐하게 만든 바로 그곳으로 오셨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당신의 피조물을 처음 만드셨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나은 어떤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죽음의 지배와 대조되는 생명의 지배를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바울은 한걸음 더 나가 언약의 신분 곧 의로워진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지배를 말한다. 하나님나라 곧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는 부활하신 주 예수니을 통해 현재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나라를 완전히 구속받은 사람들을 통해 미래에도 시행될 것이다. 이들은 의로워진 지위, 곧 언약의 신분이라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미래의 완전한 구속이 현재에서 확정된 사람들이다.
은혜의 승리와 은혜의 지배(5:18-21)
2015-02-12 00:07:39
본문에서 두 부류의 사람이 대조되고 있는데 첫째로 "한 사람"은 아담과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세상에 죄와 불순종을 가져온 사람이다. 죄는 정죄를 가져왔고 죄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운 부류의 "한 사람"이 메시아 예수의 의로운(upright) 행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실패했던 신실한 순종 모두를 보여주는 화신으로 행동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셨을 때, 이 언약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세계를 오염시킨 악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었는데 이제 메시아 안에서 이 언약의 목적이 실현되었다. 예수님의 행위의 결과로 새로워진 인류는 현시점에서 이미 의롭다는 선고를 받을 뿐 어니라 미래의 생명도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18절에서 말하는 의(justification)와 생명, 그리고 19절의 의로운(in the right) 신분의 의미다. 이 본문은 또 아담의 죄의 보편성과 예수님의 구원 행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이유를 말하는데 그 요점은 율법이 이스라엘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부류의 시작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옛 부류의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율법은 죄에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율법 그 자체로는 죄를 먼추게 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는 하나님이 율법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으로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죄가 죽음 안에서 세상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대안적 인류가 가진 힘과 새 생명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냉혹하고 정적인 죄의 지배 대신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득한 역동적 지배, 곧 은혜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은혜의 지배는 그 목표점 곧 오는 새대의 삶을 향해 신속히 나아간다. 오는 시대는 곧 하나님께서 모든 악행을 바로잡으실 새로운 창조의 도래를 말한다. "오는 세계"(통상적으로 영생이라고 잘못 번역됨)는 하나님의 백성이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이 부패와 타락에서 현재 세계를 해방하심으로써 오게 될 새 땅과 새 하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류가 가진 이 놀라운 새 생명이 어떻게 성취된 것인가?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정의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부류의 인간 존재가 나타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분의 언약 곧 세계를 바로잡으시려고 계획하신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 주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이 단원의 모든 단락이 그렇듯이 5장의 마지막도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신 일이 모든 것을 일으키는 동력임을 일깨워준다., 특히 5장에서는 예수님이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5:8)을 실천하는 행위, 그리고 순종의 행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메시아의 순종으, 행위를 통해, 언약 안에서 언제나 계획되었던 대로 죄와 죽음이 패배를 당하고 그 대신 은혜와 생명의 비밀이 드러나며 드디어 신 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세례를 통해 죄의 상태에서 떠남(6:1-5)
2015-02-12 13:20:04
6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의 물을 통과하여 노예의 땅을 뒤로하고 자유로운 새 삶으로 들어서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7장에서는 시내산에서 일어난 시간과 그 결과로 발생한 문제와 씨름하면서 율법의 기이하고도 새로운 성취가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이어서 8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셔서 그들이 받은 상속, 곧 구속받은 창조세계 전체로 판명난 상속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조망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것과 같은 불평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8:15)
바울이 이야기를 이렇게 진행해 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신 일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창세기 15장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얼마간 종살이를 한 다음에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라고 약속하셨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6-8장에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고, 언약의 궁극적 성취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사실 바울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은 새 출애굽, 즉 이스라엘을 압제에서 해방시킬 하나님의 위대하고 새로운 행동을 기대했다., 바울은 이런 기대에 동의했지만 그것이 단순히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궁극적 해방, 곧 온 우주의 죄와 타락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그리고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은 이스라엘이 품은 소망의 참된 성취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1절의 예사롭지 않은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한 부류의 사람에서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는 원래 방식대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바울은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메시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곧 메시아가 자기 사람들을 대표하시기 때문에, 메사아께 해당되는 것은 그들에게도 해당된다. 이것이 바로 바욿이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혹은 "메시아와 함께"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하는 이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시작인 세례 행위에 그리스도인이 메시아와 함게 죽고 산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면 메시아와 함께 죽었다가 메시아와 함게 세로운 생명으로 살아난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머물지 않지만, 은혜가 우리를만나 곳은 바로 그 죄의 자리다.(5:8, 5:20) 바울의 요점은신분의 변화에 따라 살려면, 그 변화를 인정할 뿐 아니라 새 사람에 맞는 실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삶(6:6-11)
2015-02-12 13:21:03
이 본문에서 바울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닫고 배우도록 가르친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곧 아담 안에 있는 사람과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삶을 시작했고 아직도 아담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처럼 느낄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아담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옛 아담 혹은 옛 사람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이 이 본문에서 명백히 진술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분명히 말한다. 일단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 죄가 그를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바울은 우리가 지금 메시아 안에 있으므로 메사아에게 참인 것은 우리에게도 참이라고 주장한다. 메시아에게 참이란 것은 예수님이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을 품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뚫고 죽음 건너편으로 가서 죽음이 미칠 수 없는 새로운 몸의 생명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우리가 메시아 안에 엤다면 메사아에게 참인 새 생명이 우리에게도 실제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우리는 아직 몸으로 다시 살아나지는 않았다. 몸의 부활은 미래를 위해 남겨진 일이다. 미래의 몸의 부활은 안전하고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부활은 미래를 위해 남겨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는 예수님의 인격과 성취 가운데 미래가 현재로 미리 들어왔다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그러한 미래의 현실을 미리 맛본다. 우리는 아담 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가 이제는 영원히 살아 계신 메시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터 위에 확고히 서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렇게 여겨야(calculate) 한다고 선언한다. 바울이 여겨야 한다(혹은 산정해야 한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장부를 계산하고 손익표를 산출하는 등 회계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계산이 하는 일이란 실제로 시실이었던 것을 사람이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한번 상세히 따져보라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무모함을 발휘하여 실제로 죄가 없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새로운 믿음의 비악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눈을 감고 불가능한 것을 믿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믿음은 눈을 뜨고 예수님의 실제와 예수님이 대표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바라봄은 물론, 자신이 세례받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사람들, 곧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속한 구성원으로 서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11절에서 던지는 도전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에 부응하여 행동할 수 있다.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6:12-14)
2015-02-12 13:21:42
그리스도인이 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주인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삶의 모든 면에 대한 기독교 뵥음의 급진적 요구는 보지 않고 기독교 복음을 그저 새로운 종교적 삶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 본문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현재 누구이며 어디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상기하고 계산해 보고 분명히 이해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이미 강을 건넜고 더 이상 옛 땅에 속해 있지 않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들이 옛 주인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새 주인에세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 특별한 전투에서 그들이 소유한 무기는 세례와 믿음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상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강 건너편으로 건너간 사람, 곧 죽었다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전부 하나님의 사역에 바칠 때, 우리가 현재하는 일은 부활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부활할 때는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할 때, 우리가 현재 한 일 곧 새주인을 섬기느라 한 일은 단지 우리의 현 존재만이 아니라 새 주인이 만들어 내실 새로운 세계의 일부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그래서 바울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하지 않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살던 옛 장소를 떠날 때 또한 "율법이 지배하는 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아낌없는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 사는지를 일깨워주는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지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을 내세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은 바로 은혜, 곧 아낌없는 사랑이다.
두 가지 유형의 종살이(6:15-19)
2015-02-12 13:22:32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의 종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물리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에서 해방된 자들로 여긴다는 말을 듣고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 구속을 벗어버렸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가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새로운 자유에는 언제나 세로운 틀이 따르게 마련이서 새로운 틀은 어떤 종류의 자유를 강화하기 위해 다른 종류의 자유를 억제한다.
바울은 새로운 종살이를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이러한 의미의 새로운 틀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도적적 진공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심으로 사신 것이다.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 충성하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두가지 유형의 종살이를 나열한다. 죄에 대한 순종은 죽음에 이르고 순종에 대한 순종은 2:1-16에서 처럼 정당성, 곧 마지막 심판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다.
여기서 의롭다는 판결에 해당하는 단어는 의(righteousness) 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언약적 목적과 언약적 정의로 변역했다.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해 기본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을 혼돈으로 부터 바른 질서로 돌려 놓으시고 사람들을 바른 형상과 창조자와의 바른 관계로 인도하시는 창조자의 선한 목적이다. 세로운 삶의 목적, 곧 새로운 행동 기준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 잡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새로 탄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삶은 물론이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섬김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그들이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또 이를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세 계명이 외적으로 던져지는 그런 문제도 , 또 그 계명에 순종하려고 애써야 하는 그런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17절)는 것이다.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내면에서부터 변화된 사란이라는 관점에서 본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가르침"을 기꺼이 따르려는 근본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과 행위의 틀이나 실천 규범에 대한 가르침과 도덕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미 변화된 의지가 있었기에 바울은 이에 대해 하나님게 감사한다.
두 길이 이끄는 곳(6:20-23)
2015-02-12 13:23:17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규칙과 지침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유익하건 말건 혹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건 말건, 단지 그들을 특정한 틀로 밀어넣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궁극적 죽음아라는 위협과 궁극적 생명이라는 약속이 당근과 채찍의 원리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규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탓일 것이다.
"오는 시대의 생명" 은 흔히 영생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목적지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요약해준다. 그것은 구름위에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다. 바울은 주후 1세기의 유대인의로서 두 시대 곧 현 시대와 오는 시대가 있다고 맏었다. 현 시대는 악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이고, 오는 시대는 하나님의 지배가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메시아 예수님이 이루신 성취로 말미암아 이러한 오는 시대가 현 시대 한복판에 들어왔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미래의 빛 가운데 현 시대속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미래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러 오신 미래이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 유리된 하늘 나라가 아니라 새 창조에 대한 그런 비전을 지닌다.
죄를 지으면 그 댓가를 버는데 그 댓가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 때는 오는 시대의 생명을 버는 것이 아니다. 오는 시대의 생명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가 받을만 하다고 보는 어떤 것 보다고 훨씬 크다. 6장에서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구체적 교훈을 주지는 않지만 기독교적 윤리가 왜 중요한지 또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제공한다. 그것은 교회가 진정한 기독교적 거룩함이라는 심각하고도 필수적인 과제로 복귀하라는 도전이다.
율법에 대해 죽음(7:1-6)
2015-02-13 21:08:25
바울은 하나님이 모세 율법을 주셨고 거기에 복음 증거가 담겨있다고 믿지만(3:21), 지금까지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에서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으며(5:20)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점을 반복하여 시사했다. 이제 7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율법이 실제로 어떻게 했는지 설명하고 싶어한다. 그 일은 이제 새로운 의미에서 메시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성취된다. 동시에 바울은 유대인이나 유대 그리스도인이 시도하는 그 어떤 제안에도 반대하며 율법이 그 약속한 생명을 주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통해 이루어진 깊은 차원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그 변화는 곧 율법으로 규정된 언약가족으로 부터 메시아와 성령으로 규정된 언약 가족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점을 이해해야만 비로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 또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소망과 생명을 나눈다는 것이 지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여전히 두 부류의 사람 곧 아담과 메시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바울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이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다. 그리고 율법의 역할은 아담안에 있는 사람과 그들이 결혼한 옛 사람 혹은 옛 아담 사이의 유대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 4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6:6과 동일한 사실을 말한다. 6:6에서는 옛 사람이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우리가 죄와의 연대에서 구출받을 수 있었다. 바울은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을 때, 율법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아담 사이에 결합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울이 죄의 정옥이 율법을 통하여 왔다는 진술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 역시 아담 안에 있다고 게속 상기시킨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궁지에서 꺼내주지 않고 단지 그들이 궁지에 빠져있다고 알려줄 뿐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따라서 율법이 우리를 옛 아담과 연대하여 묶었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옛 아담과의 연대 가운데 산다는 것, 곧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로 산다는 것은 율법 "조문" 아래서 옛 사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메사아와의 연대 속에서 새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담에게 있는 모든 면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힘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성령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7장의 논의 이후에는 성령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7장을 쓴 가장 주된 목적은 율법이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율법이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는 일(8:3)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7장은 사람의 문제가 얼마나 깊으며, 또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율법이 이르렀을 때(7:7-12)
2015-02-13 21:09:29
이 본문은 바울 자신에 대한 회고록이 아니다. 여기서 바울 개인이 율법과 씨름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일인칭 단수를 쓴 것이라고 생각할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고대 사람들은 좀 더 일반적인 것을 지칭하려고 할 때 흔히 일인칭 단수인 "나"를 사용한다. 여기서 바울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별히 이스라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부터 율법을 선물 받았지만 이 선물을 악용하려고 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죄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속하기로 작정하셨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한 가족을 그분의 대리자로 부르셨는데, 그 가족도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경신학이 다루는 문제의 핵심이다. 이스라엘 역시 아담 안에 있었다. 결국 이것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나타난 죄의 결과에 난처해하고 괴로워했으며, 바울은 선택받은 백성 곧 육신으로는 자신의 친족들 안에서 나타난 죄의 지속적인 결과에 대해 슬퍼하였다.
바울은 아담이 동산에서 계명을 받았던 때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이르렀을 때롤 묘사한다.(5:13-14, 5:20)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을 때 이스라엘이 그것을 어김으로써 아담을 따라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저에는 아담과 같은 죄가 이스라엘에게 내내 잠복해 있었으므로 거룩하고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율법를 어기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요점이 깔려있다. 바울의 결론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선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7장에서 이스라엘의 파탄에 대한 책임이 율법에 없음을 밝히는 동시에 율법에는 율법이 약속한 것(생명)을 줄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하여 탐심에 대한 경고를 받자 오히려 탐심이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한다. 토라가 아무리 생명을 약속했다 할지라도, 죄의 존재와 위력으로 보아 율법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란 하나님의 창조에 본질적으로 거스리는 힘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간, 구속의 대리인으로 부름받은 선택된 백성을 망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율법 아래 사는 삶을 뒤돌아봄(7:13-20)
2015-02-13 21:10:25
앞에서 바울은 과거에 토라가 이스라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아담의 죄를 모방하듯이 율법을 범하는 일을 되풀이 했음을 설명하였다. 이제 바울은 현재 시제로 전환하여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처한 실제 상황을 설명한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후 율법 아래 살려고 애썻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바울은 이스라엘이 토라를 품고 토라를 생활 방식으로 삼으려 한 것은 옳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법을 품는 옳은 일을 더 많이 할수록, 율법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정죄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영적인 반면에 이스라엘은 육신에 매인 존재로서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아담 편에 속하므로 율법을 통해서는 그 문제에서 빠져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율법은 그 문제를 더 부각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율법은 물론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나" 역시 무고함을 밝힌다. 율법을 어기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는 죄라고 말한다. 바울은 나에게 죽음을 가져온 책임이 있는데 율법은 바로 이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또 죄가 계명을 통해 실로 심한 죄가 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5:20절에서도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고 갈3:22에서는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으로 죄가 최고조로 더하게 될 것을 아실뿐 아니라, 실제로 죄가 그렇게 자라게 하려고 율법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신 것인가? 8:3에서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율법을 통하여 죄가 최고조로 더하게 하심으로써, 그 죄를 일거에 모두 처리하고 정죄하시며 징별하시려던 것이었다. 그란데 그 죄는 이스라엘 곧 하나님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부르슨 바로 그 백성 안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는 이스라엘의 대표자이신 분 곧 메시아 안에서 죄가 한 지점에 집약되어 일거에 모두 정죄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7장은 개인의 도덕적 무능에 대한 탄식같지만 사실은 십자가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진술을 위한 준비 단계인 것이다.
두 개의 법과 비참한 나(7:21-25)
2015-02-13 21:11:09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법은 일반적인 진리라는 의미의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토라 곧 모세 율법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바울의 논의 전체가 율법, 하나님의 법, 모세 율법에 대한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에 대해 자신이 발견한 바가 이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바울이 율법에 대해 발견한 바가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이 둘로 나니워 그로인해 그가 지금까지 말해 온 "나"의 안에 커다란 긴장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육신에 따라 사는 이스라엘과 율법 아래 사는 이스라엘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이다.
율법을 즐거워하는 이스라엘의이 행동에는 아무 잘못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살아내냐 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율법은 이스라엘이 죄인임을 부각시킨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정죄할 뿐 아니라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율법이 죄와 한 통속이 되어 나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점이다.
이와 같은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편에 가담했지만, 죄는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는 아담의 인간성을 통해, 이스라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법에 대항하여 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세상에 빛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또한 그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사이에서 엄청난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런 긴장속에서 "나"는 누가 나를 구출해 주겠느냐고 물은 것이며, 우리 주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구출하실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24절) 메시아는 육신을 따르는 이스라엘과 구출하러 오시는 하나님 모두를 자신안에 집약하신다는 것이 8:3-4 그리고 9:5의 요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롬4장, 갈3장)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조상"이라고 말할 때, 그 조상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뜻한다. 만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예수님보다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큰 가족의 일원임을 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나무뿌리에서 잘라내는 셈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 이전의 이스라엘과 기독 교회 사이에 어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지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을 추진하시기 위하여 토라를 주셨다. 이 목적은 단순히 세상에 더 휼륭한 도덕 기준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출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의 토라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영을 보내심으로써, 마침내 토라가 원했지만 토라만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다.
메시아와 성령안에서 하신 하나님의 행동(8:1-4)
2015-02-14 23:44:35
지금 이 본문에는 바울 사상의 핵심에 해당하는 강력한 주장이 담겨있다.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게 바울적인 큰 그림이 나타나 있으며 십자가에서 성취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가장 명확한 진술 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유대교 율법에 대한 바울의 비판과 율법이 복음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기이하게 성취되었는지에 대한 바울 관점의 근거가 함께 나타난다. 여기에는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영광스러운 그리고 전형적인 바울의 소망이 있다.
바울은 메시아 예수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으로 부활의 생명을 주실 때 율법의 의도(생명을 주려는) 최종적이고도 영광스럽게 성취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은 복음에 담겨 잇는 "그러나 이제(BUT NOW)" 의 비밀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앞에서 바울이 말한 결론의 기초가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만일 이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인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에 직면하여 있을 것이다.
현재 본문과 다음 본문(8:5-11)은 로마서 7장의 결론이자 동시에 로마서 8장의 서론으로 자리잡는다. 8장 1절은 지금부터 8장 마지막에 이르기가지 바울이 전개하려는 중요 요점이 무엇인지 예고한다. 그런데 바울이 "그러므로" 라는 말로 본문을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7장 마지막에서 한 말로 보건데 그런 승리의 외침은 거의 생각할 수 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러므로 엄청난 절망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1절의 대선언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2-11절의 내용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죄를 정죄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과 성령 안에서 행하셨기 때문이고, 두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는데 우리는 성령의 유형이기 때문이고, 이 두 유형이 각각 죽음과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 때문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이 본문에 나오는 법이란 단어가 율법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도 법은 일반 원리나 체계가 아니라 토라, 하나님의 법이다. 성령은 율법이 하고 싶었던 일(생명을 주는 일, 곧 현재에는 도덕적 생명을 주고 미래에는 부활의 생명을 주는 일)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일 하셨다. 성령을 통해서 율법이 하려고 했던 일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가 정죄받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선고가 내려질 뿐 아니라 처형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죽을 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선언한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전체에서 메아리쳐 울리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속죄 신학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여디서 자기 아들은 단지 메시아 예수만이 아니라 또 하나님 자신임을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달리 말하면 메시아는 7장의 문제가 밝혀진(7:14, 7:25) 바로 그 지점에 이르신 것이다. 죄는 율법을 통해 극심한 죄가 되었다.(5:20, 7:13) 엄밀히 말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세상이 저지른 죄악의 무게가 이스라엘에게 집중되었고,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의 무게가 메시아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음 메시아의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 이사야의 말대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 우리가 병이 나았다"(사53:5)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정죄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구약의 속죄제사로 설명한다. 구약에서 속죄제란 알지 못하거나(잘못이란 사실을 모른채) 혹은 본의 아니게(잘못이란 것은 알지만 그럴 의도가 없이) 죄를 저질렀을 때 드리는 제시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곤경을 이런 범주의 죄로 인식하였다.
성령의 일(8:5-11)
2015-02-14 23:45:43
우리는 바울이 여전히 유대교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율법은 율법이 약속한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살 때 율법의 정당한 판결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바울은 앞서 7:14에서 울법은 영적인 반면에 나는 육신에 매인 존재로서 죄아래 팔렸다고 말했다. 이것이 율법이 생명을 주지 못하는 이유이다. 달리 말하면 율법은 그 존재 자체가 육신적이지 않고 영적인 존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육신적이란 것과 영적이란 것은 무슨 뜻인가? 육신(FLESH)으로 번력된 단어는 세상의 타락성과 멸망할 운명을 공유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유대인에게 창조 질서, 곧 물질 세계는 그 자체로 선하다. 단지 오용되고 타락하고 더렵혀질 때에만 악하다. 육신은 그런 오용, 타락, 부패를 가리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은 보통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 육신을 특징으로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율법을 따르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을 특징으로 하는 생각은 실제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 법을 성취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논의는 결말에 이르지 않고 단지 암시할 뿐이다. 바울은 10:5-9에 가서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믿음 자체를 율법의 완수로 이해하는지, 또한 13:8-10에 가서야 사랑의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실제로 토라의 도덕적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비로서 설명한다. 이 논의는 부활의 약속, 곧 우리가 마침내 죽음 자체의 타락과 썩어짐에서 구출 혹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메시아와 성령을 번갈아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이라고 말한 다음에 "메시아가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에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일으켰을 때, 하나님은 메시아를 일으키신 것이다. 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분이므로, 메사아에게 일어난 일이 백성에게도 일어난다. 성령은 이것을 보증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로마서 전반부에서 남은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를 최종적으로 풀어주는 수단이다.
어떻게 하나님은 마지막에 있을 판결을 정확히 예상하면서 복음을 믿는 자가 의롭다고 현재 시점에서 선언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이렇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에서 일하시면서 복음 선포를 통해 믿음을 일으키시고, 생명을 일으키시며, 새로운 몸의 생명울 주시기 위해 죽음 저편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는 궁극적인 이유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닥칠 미래의 판결이 현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유다. 영이 언약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된다(10절)고 말할 때, 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물론 메사아 안에 있는 자들의 언약적 신실함 또한 포함될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8:12-17)
2015-02-14 23:46:32
바울은 우리는 육신에 빚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육신은 우리에게 베푼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육신에 갚을 빚이 없다. 만일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결과로서 죽음을 불러들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원하다고 하는 온갖 것들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우리를 육신의 세계로 끌어 내리는 것을 죽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이름 값도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으로 여행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 본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여행하던 광야와 같이 육신의 유혹이 여전히 강력하다. 그리스도인은 광야의 이스라엘 처럼 투쟁을 포기하고 종살이 하던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대신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인 성령을 받았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소명을 받아들여 "양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한다 성령이 오셔서 사람의 마음에 내주하실 때, 그 첫째 표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제자도의 핵심은 성령의 음성을 인식하고, 그 음성을 듣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실로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이 입양하신 아들딸 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직 중요한 요소가 남아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는데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반영되어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세계, 곧 모든 창조세계가 메시아와 그 백성에게 양도될 것이란 의미이다. 결국 그들의 정당성이 입증되고 부활이 나타나면서 모든 창조 세계는 타락과 부패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메시아의 영광스런 세계 통치에 참여할 것이란 뜻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빚진 자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면 약속으로 받은 땅 곧 종국적인 세로운 창조 세계로 돌아가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빚진 자다. 그것을 상속받았기에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께 빚진 자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결국 빚진 자에게는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고 말하면서 게으르게 누워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과 소명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세상의 변혁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빚진 자이므로 특별한 방식, 곧 창조세계에 대한 통치인 하나님의 영광을 고대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종국적으로 메시아와 공유할 영광이다. 그러나 현재에서 그것은 고난을 의미할 것이다.
다시 새로워진 창조와 인내하는 소망(8:18-25)
2015-02-14 23:47:35
이 본문에서 부터 창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전체가 놀랍도록 분명하게 나타난다. 잠시라도 이 경관을 본다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전통 속에서 개인의 칭의와 구원에 관한 이론들 혹은 도덕적 교훈과 새로운 성령 체험에 열중하느라 로마서 독자들은 대개 이 지점을 서둘러 지나쳐 버렸다. 이 본문은 지금까지 이어진 편지 전체의 절정인 동시에 8장에서도 절정에 가깝다. 또한 이 본문은 바울의 사상 중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바울은 앞 단락에서 고난을 언급하다 말았는데 이제 이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혹독하다 할지라도 장차 우리를 위하여 나타날 영광에 비할 수 없으리라는 약속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우리 안에서" 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나타날 것이란 표현에 주목하라. 그 영광의 핵심은 영광스럽고 주권적인 다스림, 곧 세계에 대한 메시아의 구원의 다스림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 세계가 고대하는 것이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면 창조 세계는 마침내 그 진정한 통치자들을 볼 것이며 마침내 자신이 타락에서 구출 받을 때가 왔음을 알 것이다.
창조 세계의 현재 모습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상황과 비슷하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며 여전히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담고 있지만, 그 현재 모습은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언제나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통해 나타난대로 언젠가는 온 세계를 바로잡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맡았지만, 반역하고 하나님 대신 창조 세계를 경배함으로써 창조 세계는 망가졌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가 이렇게 종노릇하도록 내버려 두셨는데 그것은 창조 세계가 원해서가 아니라,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세계를 원래 계획대로 바로잡으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 원래 계획이란 인류가 창조주를 경배하고 세계에 대한 영광스런 청지기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창조세계가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영화롭게 될 때, 그로부터 입을 놀라운 혜택이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실 영광, 곧 지혜로운 통치와 청지기직을 주실 때,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해방을 누리기를 학수고대한다. 그 영광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었다. 창조 세계에 대한 이런 관점을 통해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위한 궁극적 미래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그것은 실체 없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이다.
바울은 이런 미래에 비추어 곧바로 하나님 자녀의 현재 위치를 깊이 고찰한다. 바울은 신자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구속을 받을 때, 곧 우리에게 약속된 부활의 몸을 받을 때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약속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신음하고 한숨짓는다. 이 긴장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지만 아직 우리의 완전한 갱신이라는 과제가 완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래서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기를 갈망하면서 진통 중이다. 교회는 그러한 고통과 소망을 나누도록 부름 받았다. 교회는 세계의 고통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세계가 고통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소명, 곧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우리의 고귀하면서도 기이한 역할의 한 부분이다.
기도, 자녀의 신분, 하나님의 주권(8:26-30)
2015-02-14 23:48:33
바로 앞 본문에서 바울은 세상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산고를 겪으면서 탄식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데, 교회는 이 고통에 동참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는 “이미”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존이라는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과 교회의 고통에서 떨어지지 않으시고, 성령의 인격과 권능 안에서 그 고통 가운데 내주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바울의 성령 이해는 새롭고도 인상적이다.
바울은 초월하신 창조자가 자기 백성의 마음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끊임없이 교통하심을 말한다. 여기에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도전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기도의 과업을 기꺼이 짊어짐으로 우리가 성부와 성령 사이의 사랑과 탄식과 구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화로운 주권이 실제로 현시대에서 나타나는 모습니다. 기도는 새로운 창조에 앞서 더 넓은 세상을 책임지는 것이며 또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탄식 가운데 우리가 기도로 참여할 때,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탄식소리를 들으실 것이다. 이것은 곧 메시아의 본을 따르는 고난이며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따르는 것이 사실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세상은 여전히 탄식하고 있고 우리도 세상과 함께 탄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탄식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것으로 선을 이루실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모든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바울의 진술로 절정에 이른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그분과 함께하는 교제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신 예수님의 행동 양식과 모범을 본받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참 사람이신 그분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면서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대로, 현재 자기 아들의 형상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을 부르셔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촉진하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두시는 것이다. 이 과업을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정하신 사람들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부르셨다.
바울이 사용하는 “부르심”은 복음 선포가 누군가의 삶에서 강력하게 작용할 때 벌어지는 일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복음 선포는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고 세례를 받도록 촉구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넘치게 한다. 복음이 이렇게 믿음을 일으킬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일컬어 하나님 가족의 참된 일원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칭의”이다. 그리고 이 “칭의”의 목적은 그들이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메시아의 주권적이고 구속적인 다스림에 참여하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8:31-39)
2015-02-14 23:49:53
이 본문은 실질적으로 5-8장의 전체 주제에 대한 요약이다. 이 본문은 단계적인 논증이 아니라 감격에 찬 수사적인 진술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 메시아가 하셨고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하고 계시는 일을 보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전파된 강력한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려고 많은 것들이 사방에서 위협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감격스런 어조로 말한다.
지금까지 로마서가 강조한 것은 결국 “칭의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믿는 사람을 누구나 의롭다고 선고하셨고, 하나님의 이런 판결을 뒤집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믿음에 의한 칭의”는 확신의 근거지 칭의 자체의 근거는 아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교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주이심을 믿는 것이다. 칭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칭의가 아니라 확신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가족의 참 구성원으로 선언하셨으니 우리를 결코 내쫒지 않으실 것이다. 이 본문은 2장에서 그리기 시작한 큰 원을 완성하면서 마지막 심판 날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믿음을 기초로 이미 선포하신 판결을 재확인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본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편지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메시아가 하시는 사역의 한 차원이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이 현재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자기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의 복음을 따라 합당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고난 가운데서도 커다란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의 고난을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백성의 고난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메시아의 고유한 성취에 덧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고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더 확증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우리는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통하여" 최종적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왕이신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특권과 비극(9:1-5)
2015-02-17 20:01:16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이 여전히 결합하기 어려워하는 두 가지를 결합하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유대인을 참으로 선택하시어 그들을 세상을 위한 자기 백성으로 구비시키셨다는 사실이고 또한 나사렛 예수는 과거나 현재나 참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두가지 사실을 강력히 확언하고 싶어한다. 사실 후자는 전자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믿지 않는다면, 메시아에 대한 의미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권 목록을 열거하면서 그 절정에 메시아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이 가진 이전의 모든 약속과 특권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정점으로서 오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는데, 동료 유대인들 대부분은 그러한 믿음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바울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바울은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바울은 자신이 택한 길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바울의 이런 생각을 모른다면 우리는 바울이 어째서 그토록 슬퍼하는지 또 어째서 필사적인 가도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열거한 이스라엘의 특권은 로마서 8장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이다. 바울은 메시아에게 속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의 약속은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제 정당하게 그들(메시아에게 속한 자들)의 것이 되었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하셨으므로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은 이게 거기에서 유익을 얻는다. 그들은 유대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의 백성으로 규정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을 상속받는다.
바울은 이 본몬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그분의 옛 약속을 에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성취하시는지, 또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룬다. 메시아는 육신을 따라, 즉 혈육상의 정체성으로 보면 유대인에게서 나셨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으로서, 모든 족속과 나라의 충성을 받으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갈등점이며 바울의 논증이 딛고 설 단층선이다.
아브라함의 두 가족(9:6-13)
2015-02-17 20:01:53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족장들의 옛 이야기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 위해서이다. 이 이야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처움부터 자신의 기이한 목적을 이루시고자 온 인류로 부터 한 가족을 선택하심은 물론, 택하신 가족 안에서도 계속 선택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선택 행위, 곧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행위가 야곱을 넘어 이스라엘 이후 역사에서도 계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홀로 짊어지셨던 바로 그 지점까지 계속되었다. 바울은 9-10장의 핵심구절인 10:4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에서 바로 그 지점을 적시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악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역사 가운데 행동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이스라엘을 사용하여 이루시려고 하였고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메시아가 출현하셔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몸소 담당하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원리, 곧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택해 그분의 계획을 진척시키시는 원리는 그들의 도덕성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두번째 주장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이 자신들의 어떤 특별한 것이나 우월성에 있다고 당연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자랑하고 교만하며 민족적 우월 의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선택을 받은 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정의(9:14-24)
2015-02-17 20:02:41
토기장이와 진흙의 이미지를 통해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이스라엘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말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 곧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새 창조의 말씀을 모든 민족에게 전할 백성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마치 토기장이에게 대들면서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망가진 진흙 덩어리와 같았다. 그릇이 망쳐질 경우 토기장이는 당연히 그릇을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빚을 권리가 있다. 반복적으로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새로운 그릇으로 빚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여 그 약속에 신실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지속적으로 진척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항하고 교만한 사람들 속에서 조차 훨씬 더 영광스러운 구원 사역을 가져오시기 위해 일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던 일, 곧 애초에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궁극적 목적이란 관점에서 뿐이다.
모든 사람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약속에 신실하실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논의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시 빚으신다는 지점까지 전개된다. 그리고 바울은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불러 유대인과 완전하고도 동등한 구성원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한 가족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바울 당시의 유대인 세계에서 통상적으로 통하던 이스라엘 이야기와는 과격할 정도로 새로운 관점이었고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하게 다른 관점이었다.
남은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9:25-29)
2015-02-17 20:03:39
이 본문은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그 전반적인 흐름은 분명하다. 그것은 대부분의 유대인이 하나님의 새 백성 밖에 머물러 있고, 새 백성 안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이 머물러 있는 바로 이 상황이 구약 예언서에서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고 도리어 유대인에게는 너무도 불편하게 실현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신가? 아니면 불의하신가? 이스라엘은 심판받아 마땅한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임할 때 그들이 불평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보편적 죄성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를 구출하시며 긍휼을 베푸셨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 편지의 앞부분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바울은 이미 3장에서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않음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하신 계획을 틀림없이 추진하시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신실한 이스라엘로 보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다. 또 바울은 7장에서 죄가 율법을 통해 어떻게 이스라엘 안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는지, 그리하여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가 어떻게 정죄를 마침내 받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이 두 본문의 내용은 9장의 방향과 통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아주 이상한 역할로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계획이 진척될 수 있으려면 이스라엘은 제거되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제거되는데서 절정에 달한다.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메시아(9:30-10:4)
2015-02-17 20:46:22
바울은 이사야서의 두 본문(28:16, 8:14)을 결합하여 이제 하나님의 건축물의 기초가 놓였다고 말한다. 그 기초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공동체의 인간 주춧돌이신 메시아다. 그러나 그분을 믿지 않는, 곧 기초이신 메시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주춧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나 선교 사역이 이루어지는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이런 불신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한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의 생각이 바뀐 것도 아니며, 오하려 그분이 줄곧 계획하신 것이지만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성취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 가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반면에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잘못된 방식으로 반응하였고, 결국 참된 언약 가족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바울은 3:21-4:25에서 아브라함의 참 가족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가족 구성원의 유일한 표지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정의, 세상을 바로 잡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7:1-8:11에서 율법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의도적인 함정으로 꾀었는지를 설명한다. 율법이 이스라엘의 죄를 초고조로 증가하게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죄의 무게를 자신의 죽음으로 몸소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그 죄를 단번에 정죄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앞선 본문에 이어서 9-11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메시아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에서 그 절정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이방인, 곧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던 민족들이 언약 가족으로 몰려 들어온 기이한 사실을 설명한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가족인 유대인은 부르심에 등을 돌렸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자격을 굳히는데 사용하던 수단인 율법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이다.
이 편지에 나타난 주요 전문 용어 가운데 하나가 9:30에 "언약의 신분"으로 번역한 단어다. 이것은 10장에서 "언약의 신실함"으로 또 "언약의 지위"나 "언약의 신분"으로 다시 등장한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의" ,"올바름", "정의" 로 번역하는 단어가 실제로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단어를 통해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실제로 언약에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역사에 일어난 일, 특별히 메시아의 오심과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반응은 하나님이 줄곧 마음에 품고 계셨던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그러한 오해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 가족에 속한 신분,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백성에 속한 신분은 유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정해진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이방인을 아브라함 가족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섯째, 바울의 동료 유대인들은 율법을 언약적 신분의 표로 사용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임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은 그 돌, 곧 참된 가족의 기초이신 메시아에 걸려 넘어졌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과, 하나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심으로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셨다는 사실을 여전히 몰랐던 것도 역시 그런 까닭이다.메시아가 율법의 마지막 목표가 되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행동이 한결같이 지향하는 지점이다.
언약의 성취(10:5-13)
2015-02-18 20:07:34
바울은 신명기 30장을 인용하고 있다. 신명기 30장 앞에는 이스라엘이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지만 계명을 어기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30장에는 새로운 약속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의 요점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돌이키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이르기 위해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고 율법을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다. 율법이 와서 그들을 찾을 것이고 그때 바로소 유배가 끝나고 저주가 취소되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모습은 어떤 것일지? 바울 시대에 앞서 수 세기 동안(제2 성전기) 유대인 들은 이런 질문을 두고 고심하였다.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은 신명기 29장의 저주가 여전히 임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신명기 30장의 언약 갱신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언약 갱신의 약속이 실현될 때, 유배(이방인의 지배)라는 저주에서 최종적으로 풀려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갈망하던 그 언약 갱신이 예수 안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선물이며 최초의 율법과 같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주신 선물이다. 여기서 바울은 10장에서 제기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신명기 30장에 나타난 위대한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적 계획은 이제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 대부분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하였다.
그렇다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밝히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그러나 새로운 방식으로 가져오셨다. 이제 율법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복종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이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믿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미래에 자기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바, 예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과 신명기의 약속을 연결시키기 위해, 구약의 다른 두 본문을(이사야 28:16과 요일2:32) 인용한다. 신명기 30장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강력한 복음이 메시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그리고 "마음의 할례"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전복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과 부합한다.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믿음으로 가시회된 이런 변화된 마음은, 어떤 사람이 새로워진 기족, 곧 신명기 30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백성의 구성원이라는 표지이다. 바울은 구약의 구원 교리를 설명하면서 그 구원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은 구원을 갈망했고 하나님은 구원을 제시하셨는데 누가 그 구원에 참여할지 현재 시점에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에 참여할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그 마음과 입에 유일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복음은 요점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동등한 조건으로 이 새로운 언약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메시아 안에서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그들은 메시아 안에서 재규정된 언약 가족의 범주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세상을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실패(10:14-21)
2015-02-18 20:08:38
구원의 좋은 소식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된다.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셨고, 그 일이 일어나리라고 이스라엘에게 실제로 경고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들고 이방인에게 나아간 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을 성취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사야 52:7을 인용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바로 자신의 이방인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좋은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바울은 이사야 53:1을 인용하면서 이것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말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조용하고도 강력하게 지진처럼 모든 창조 질서를 관통했다. 그것은 탈락과 죽음이 전복되었고 세계에 새로운 창조가 출범했다는 메시지였다. 바울은 복음이 창조 세계를 향한 그분의 지속적인 계획과 긴밀한 참여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이 복음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이런 상황 역시 이미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라는 기본적인 약속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그 약속에 의지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약속이 다른 민족이 아니라 오직 자기 민족만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머지 세상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 나름의 잘못된 해석에 매달리면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약속을 놓치는 반면에 이방인 약속을 상속받을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이방인들의 구원을 연결시켜 주었다, 이방인 역시 한분 하나님의 창조에 속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은 온 세계를 위하여 하신 일과 즉각적으로 연관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줄곧 기다렸던 바로 그것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을 때, 한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등을 돌린 것이다. 그들은 믿기를 거부하며 참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분 말씀에 반대하고 있다.
은혜로 남은 자들(11:1-6)
2015-02-18 20:21:16
바울은 메시아(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기 위해 수고하고 고난을겪었다. 이는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고, 온 세상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라는 이스라엘의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복음에 반항했지만 이 복음 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전통은 성취되고, 이 복음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정적이고도 극적인 은혜로 손을 내미셨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분명히 복음을 믿는 일에 전적으로 실패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방향을 바꾸셔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신 것인가?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고, 유대인의 오만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교회에 속할 자격은 물론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나치의 사악함과 그런 분위기를 태동한 유럽의 과거 반유대주의 역사를 기억한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셔야 하는 의무와 죄악된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세상을 처벌해야 할 의무 사이에 갇히신 것 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메시아 안에서 자신의 구원 계확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드러내셨다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약속하신 신실함의 대상이자 통로였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 신실함을 행사하실 것인가? 바울은 이이 대하여 하나님이 남은 자를 준비하셨다고 대답한다.
남은 자는 구약의 핵심 개념으로 대재앙 후에 살아남은 사람을 말한다. 이스라엘을 실패했고 그래서 대심판이 떨어지지만 더러 생존자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쓰러진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는 거룩한 씨(사6:13)인데, 그 뿌리에서 새순이 자랄 수 있다. 바울은 성경의 이 개념을 택하여 바벨론 유대시에 일어났던 일(대부분 이스라엘은 영원히 유배상활을 했고 소수만이 돌아와서 다시 시작한 일)이 지금 메시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최대의 사건앞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대부분은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일부는(남은 자)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운 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신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지속되고 발전된다는 것이다. 결국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목적이 있는 이스라엘의 실패(11:7-15)
2015-02-18 20:22:22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은 형의 입장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소수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동생의 입장이다. 그 이야기의 배경에서 형은 동생을 시기한다. 바울은 이 시기심이 동기가 되어 유대인 가운데 일부가 믿음과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이 애초에 그런 일(시기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다는 주장까지 한다. 그러나 믿음이 아닌 다른 통로로 이스라엘이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바울은 이모든 것이 그 자체로 필요한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형들의 악한 의도를 사용하셔서 선을 가져오셨다고 설명하는 요셉처럼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걸림돌을 사용하셔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몰려들게 하셨다고 설명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메시아 안에서 행하신 일을 통하여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재확인하였을 것이고 이방인은 영원히 이급 시만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언제나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한 지위를 지닌 가족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우주적 주권과 자비를 나타내셨다.
바울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이 시기하는 상태에 있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믿는다. 메시아를 통해 갱신된 언약의 복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이 복은 유대인들의 특권이건만 이제는 이방인도 그것을 누리게 되었고 오히려 유대인은 잔치 자리 밖에 머물게 된 것이니 유대인들이 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이방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과 사역을 알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동료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학게 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돌이켜 믿음과 구원으로 나아오길 기대한 것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이 메시아에게 일어난 일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메시아가 비천하게 오심으로써 세상은 높이 올라갈 수 있었고 메시아가 세상의 화해를 위해서 버림받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분을 통하여 살아날 수 있었듯이 이스라엘의 실패와 피폐로 이방이 풍요롭게 되었고 이스라엘을 버림으로 화해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메시아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이라는 더 큰 역사 속으로 써 넣으신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려면 메시아 예수에게 나타난 패턴을 보아야 한다.
두 올리브 나무(11:16-24)
2015-02-18 20:23:14
대부분의 유대인이 메시아의 복음을 거부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단념하셨다는 뜻인가? 바울과 일부 소수의 유대인이 은혜로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라면, 더 이상의 유대인은 구원받을 수 없단 말인가? 하나님은 이제 비유대인 곧 이방인에게만 관심을 집중하시는가? 바울은 제사하는 곡식가루와 올리브 나무 비유를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잘려나간 가지인 유대인을 향하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을 대체한다거나 교회는 이제 이방인만의 가족이라거나 하나님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택하셨다거나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방인 그리스도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특정한 민족 집단에 국한된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신분의 표는 민족정체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뿐이다. 만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들도 하나님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셨던 것 처럼 제하여 버리실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한가족, 곧 이제는 메시아 예수를 중심으로 재정의되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확정되는 아브라함의 자녀로 본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유대가족으로 남아있는데, 비유대인이 이 유대 가족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가족인 유대인 안으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나 혈통상의 유대인이 자동적으로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오직 믿음으로만 진정한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가족이된다는 이 원리는 신약에서 갑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진리였다.
모든 사람에 대한 긍휼(11:25-32)
2015-02-18 20:24:05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유대인을 대체했다고, 그래서 뒤바뀐 특권을 구축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방인을 유대인에 편승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온 이등시민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동일하게 믿음으로 하나의 가족이 되었으며 메시아의 몸에 속한 형제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바울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믿음과는 관게없이 유대인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인가?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와 주로 믿지 않고도 돌아오는 길이 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없다. 믿음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짐으로 이방인들이 메시아의 가족으로 들어올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온 이스라엘이란 모든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유대인은 물론 믿는 이방인으로서 아브라함의 참 가족이 된 참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메시아의 가족으로 들어올 시간을 허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새로운 관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진했던 관점을 계속 검토하며 요약하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자신들에게 복음을 받을 자격이 언제나 있었다고 생각하기 쉬웠을 것이고,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하나님나라의 이등시민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늘 주장하는 것은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도 죄인이므로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힘입어서만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올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한 백성 곧 문제 해결을 담당한 백성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문제의 일부인 백성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실 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최종 결론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유대인들이 완악하게 된 일) 그래야만 창조자 하나님이 창조에 진실하실 수 있으며,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정의로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용한 구약본문들은(이사야 59:20, 예레미야 31:33-34, 이사야 27:9)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성취를 통해 이방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구절들은 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야곱에서 불경건한 것을 돌이키시고 그들의 죄악을 없애시며 새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믿지 않는 유대인이 복음을 반대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유대인의 이런 완악함이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여전히 유대인을 사랑하시며 그러한 원래의 관계는 결코 빼앗기거나 부인될 수 없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그래서 이방인이 들어올 공간이 생겼다. 이방인이 은혜로 긍휼함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이 긍휼을 받은 지금, 유대인은 이방인을 시기할 것이고 유대인도 믿음으로 돌아서면 더더욱 긍휼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믿음이다.
이것은 불순종하는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시기로 작정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기로 결심하셨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피조물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고 부르시는 일에 몸소 참여하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시려고 스스로 메시아의 인격 안에서 인간 역사의 무대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주어지는 긍휼이 특권이나 권리가 아니라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도 불순종하는 가운데 가두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은혜가 은혜가 되고 인간의 모든 교만이 낮아지며 하나님의 긍휼이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이 미지막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큰 그림이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인간의 보편적인 죄, 그러나 깨질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딜레마를 바울보다 더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모든 것 위에 계신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아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영광을(11:33-36)
2015-02-18 20:24:48
바울이 펼쳐놓은 하나님의 계획에는 놀라운 단순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계획과 성취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깊고 크다.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에서 인간의 보편적 우상숭배와 불순종, 죄 그리고 그 결과로 모든 피조물이 빠지게 된 타락을 다루었으며 그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어떤 저작보다도 로마서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이라는 견지에서 바로 이런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이 피조물과 언약에 모두 신실하셨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가 시작부터 그 마지막을 볼 수 있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새 창조라는 계획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건축가는 이미 설계를 마쳤고 그 기초는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다. 작업은 이미 잘 관리되고 있고 최종 완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규모와 범위를 보고 더없는 경외심과 숨이 멎을 듯한 경이로움에 휩싸이며, 설계자이자 건축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산 제물(12:1-5)
2015-02-20 21:10:57
바울은 지금 현 시대가 그 틀에 우리를 우겨 넣지 못하게 하라고 호소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현 시대의 요구에 맞추지 말라는 말이다. 도리어 우리는 변화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러면 마음을 새롭게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주도권을 잡고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러면 주변 문화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1세기의 유대인들처럼 바울도 역사를 "현 시대"와 "오는 시대"로 나눈다. 현 시대가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그로 인한 타락과 죽음을 특징으로 한다면, 오는 시대에는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실 것이다. 이 '오는 시대'가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 가운데 최고조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바로 바울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오는 시대'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변 세계의 방식대로 좌지우지 되지 않으면서 이미 침입한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생각과 행동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현 시대의 방식대로 따르는 것이 더 쉽고 더 나을 것이라는 유혹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오는 시대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속한 시대인데, 예수 안에서 "오는 시대" 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오는 시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마음(MIND)의 변화이다. 성령의 설득으로 마음이 새롭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마음의 변화없이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기준에 부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헛되다. 주변 문화의 얄팍하고 어리석은 행동 방식을 아무 생각없이 모방하는 것은 미성숙한 상태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중심에는 깨어있고 명료한 지성이 있어서, 왜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한다. 결국 성숙으로 자라가는 길은 그런 것이다. 바울은 마음과 몸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로 기능해야 한다고 본다. 마음을 새롭게하는 것과 몸을 드리는 것은 완전히 동일한 사건이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인간의 전 자아이다. 바로 이 몸을 성전 희생제물 처럼 제단에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항과 죄, 죽음에 빠진 우리를 만나려고 한없는 궁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두를 기꺼이 드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세상이 강요하고 행동하게 하는 뒤틀린 생각 대신에 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곳이 바로 교회임을 강조한다. 바울은 교회가 다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연합체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몸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메시아 안에서 한 몸, 이것이 바로 바울이 교회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메시아는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참 인간이시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사람들이다. 몸과 지체라는 이미지는 우연한 설명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 앞에서 살고 본을 제시해야 할 새로운 인간의 삶을 말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바울은 메시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됨에 근거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호소한다. 이 하나됨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각 그리스도인에게 부활하신 메시아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동일한 믿음을 주셨다. 기질,배경, 소명, 능력이 아무리 달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믿음을 공유한다. 이 믿음이 바로 그들의 연합과 협력의 기반이다.
메사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12:6-13)
2015-02-20 21:11:33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복음 사역에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도 이런 은사에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은사는 또한 은혜의 문제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이미 있던 능력과 성향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때로는 성령이 한 사람의 삶을 장악하면서, 자신을 물론 그 누구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은사가 드러나기도 한다. 교회가 이런 다양한 은사를 인식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일환으로 그 은사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세상과 더불어 사는 삶(12:14-21)
2015-02-20 21:12:18
복수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악이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악을 가벼이 여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악은 실재하며 악은 상처를 입히고 악은 중대한 문제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훼손하거나 망치는 모든 것은 악이다. 그렇다면 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은 하나님이 악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라는 지점에서 이 문제를 시작한다. 그 핵심은 바울이 5:6-11에서 한 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메시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인간의 악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죄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심으로 죄를 도말하시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길을 완전히 열어놓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이다. 바울이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더 큰 공적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앞 본문에서 교회의 내적 행동에 대한 규범이 제시되었다면 여기서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행동 원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악에게 지지 말고 악을 이기되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이며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애통하는 것이다.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뜻(13:1-7)
2015-02-20 21:13:21
성경의 많은 본문들이 그렇듯이 문맥을 무시하고 뽑아낸 구절들은 위험할 뿐 아니라 진실을 호도할 수 있다. 이 구절들을 현 문맥에서 살펴보면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보이게 된다. 바울은 예수님을 세상의 참 주(LORD)로 믿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더 작은 주들(lords)과 불필요하게 다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들은 실로 혁명 공동체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폭력이라는 일반적인 유형을 택한다면 그들은 제국과 제국의 방식으로 다투는 셈이 되고 말 것이며 결국은 분명히 패배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도 패배할 것이다. 바울은 세상 권세에 굴복하라고 말하면서 세상 통치자와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선언한다. 스스로 신이라고 칭하고 권력을 자신의 권리로 믿는 로마황제에게 바울의 이런 주장은 웃음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크고 작은 세상 권세가 존재하는 것은 한 분 참 하나님이 세상에 혼돈이 아니라 질서가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권세들이 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불법하거나 불공정한 행동을 할 때 지적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정치사상이라는 오래된 전통은 복구될 필요가 있다. 이는 현대 세계에서 흔히 가정하듯이 정치를 좌우 스펙트럼으로 안이하게 구분하면서 복음을 어느 한편으로 몰아버리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삶이란 그보다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다. 올바른 기독교 정치사상을 확립하기 원한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두가지 사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가 적절한 법으로 다스려지기 원하신다는 사실과 또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최고의 주로 이미 세워졌다는 사실에 대해 긴급히 숙고하여야 한다.
사랑,율법 그리고 다가오는 날(13:8-14)
2015-02-20 21:55:26
낡은 세계 곧 현 시대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낡은 세계의 방식과 습관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가 이미 들어섰고 시작되었으며 곧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따라 살라는 명령을 이미 받았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그러한 새 시대의 출범을 알리신 분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지만 그 날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낡은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 살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의 윤리"라고 부르는 내용의 핵심이다. 새로운 세계가 여기에 있고 예수에게 속하는 사람은 거기에 속하므로, 그들은 현 사회의 기준이 아니라 새 세계의 기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이 세상이 곧 끝날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단순히 역사를 마치기 유ㅟ해서가 아니라 역사속에서 다가오는 큰 외침을 생각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 바울이 말한 세로운 세계는 현 세계의 폐지가 아니라 현 세계로 부터의 해방이 었다. 바울 이후 그리스도교 교사들은 줄곧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동터오고 있다고 말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바울 시대나 바울 작후 시대에 새 세계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바울을 바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했던 것은 구원의 마지막 날이 짧은 시간 안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란 관점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날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그 날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이미 출범하였다. 중요한 것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고 깨아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하기 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는 때는 또한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자격을 얻기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삶의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사랑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개념을 사용한다. 바울은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가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 신약 저자들이 아가페라고 부른 사랑의 핵심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연약한 자와 강한 자(14:1-6)
2015-03-01 23:38:13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안에 민족과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 간에 세워진 벽을 무너뜨리려고 애쓰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인들이 민족과 태생을 보지 말고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 같은 주를 따르는 제자로 서로 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교리가 미치는 직접적인 결과다. 에수님을 믿는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등하게 환영받는다.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일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고 그들은 에수님을 주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주를 섬기는 종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라 절기 준수도 그랬다. 유대인의 주요 절기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쪽으로 결정하든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강하다고 전제하는 것 같다.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지칭한 사람들이 경건하지 못하거나 기독교의 핵심을 어설프게 안다거나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은 아니다. 바울의 요점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귀결을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이해했던 것 만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마지막 심판(14:7-12)
2015-03-01 23:38:52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들이 다를 수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한 시시비비가 있을 수 있다. 각자는 모두 진리의 한자락을 붙잡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외없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더 힘차게 붙들고 살아가야 할 진리가 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주가 존재하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흥망성쇠가 그분, 오직 그분 앞에만 놓여 있다는 진리이다. 바울이 이 단락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이것이고 교회는 이 교훈을 반복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사고 중심에 있는 원리를 다시 보게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자로 임명하셨고 언젠가는 그 심판으로 모든 남녀노소의 삶 전제를 드러내어 시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약 어디서도(믿음으로 거저주시는 은혜의 원리도, 믿음의 말미암는 칭의도,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도) 이 원리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반복하여 강조한다.
최후심판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바로잡는 일에 진력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정죄하시고 예수님을 일으키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사건과 함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사건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그 빛 가운데 드러난다.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지도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주께 달려있다. 주는 우리가 섬기는 분이며 언제가는 책임을 물으실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이 권면하는 상호존중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교리에서 아주 중요한 측면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미래에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 예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사신 주 메시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이고, 의로우며 하나님의 새로워진 백성에 속한다고 이미 선언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현재 일상에서 현실화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든 저사람이든 믿는 자는 모두가 그분의 백성에 속한다고 이미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만드신 분, 그리고 자신의 주가 되신 분 앞에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존중하는 법을, 또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이 뜻하는 바를 실제로 살아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과 평화의 길(14:13-23)
2015-03-01 23:39:33
바울은 서로 판단하지 말되, 굳이 판단해야 한다면 서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 선에서만 판단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합당하지만 그리스도인마다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관점들)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그런 결정을 내릴 때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우리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선하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양심의 문제에 걸려 고심할 수 있다. 십중팔구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소외시키거나 적대시 하지 않도록 그들의 행동방식을 제어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유대 율법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메시아 가족에 속하는 신분을 강화하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시도에 경고했던 것과는 반대의 입장이다. 아마도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교도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다름 아닌 메시아의 죽음을 무효로 돌리게 만드는 일이라고 바울은 경고한다. 그것은 우선권이 역전되어 하나님나라의 주요하고 탁월한 실재인 정의, 평화, 기쁨 대신 먹고 마시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는 일이 될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세우시는 집을 무너뜨리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