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제임스 던
이신칭의- 제임스 던
2015-01-16 22:52:35
바울신학의 새관점
루터가 이신칭의를 재발견한 결과들은 단지 신학 및 교회에서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학, 문화에 미친 영향력에도 극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칭의가 기독교의 주된 교리라는데 모든 신학자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 불트만과 케제만이 칭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에 힘입어서 이 주제가 바울 신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런 강조의 부정적인 측면은 불행하게도 지나친 반 유대교 경향이었다.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유대교를 반대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날카롭게 대립시켰던 근대 신약학의 초창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기독교 신학에서 이신칭의에 관한 논의는 중교개혁 및 이에 따른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논쟁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논쟁의 배후에는 그런 논쟁에 의해 가려진 좀 더 근본적인 문제였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 특히 바울의 신학과 그의 조상들의 종교의 관계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신칭의라는 주제에 대한 카톨릭과 기독교의 해묵은 논쟁 상황은 제2 바티칸 공의회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고 이후 바울연구는 침체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샌더스가 제시한 새관점으로 인하여 침체 상태에 있던 바울 연구는 활력을 얻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이전의 어떤 항변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개신교의 왜곡된 묘사들을 찾아내었다. 샌더스에게 유대교의 종교패턴을 설명하는 핵심 어구는 언약적 율법주의였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인간의 지위가 언약의 토대위에 세워져 있고 언약은 그 명령들에 대한 순종을 인간의 합당한 응답으로 요구하는 한편 범범에 대한 속죄 수단을 제공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순종은 그 언약안에서 그의 지위를 유지시키지만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얻지는 못한다. 유대교에서의 의는 택함받은 집단 안에서의 지위와 유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이다. " 샌더스의 연구가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 나아가 바울의 신학과 그의 유대교적 유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논의의 한복판에 떠오르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신칭의 교리가 선행에 의한 칭의를 가르쳤던 유대교의 한 형태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전통적 가르침과 달리 이 교리는 이방선교와 관련하여 어떻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었다는 소수설이 수 세기에 걸쳐 끈질기게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바울이 대응한 유대교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얻어진 바울에 대한 새관점은 이런 소수설에 신선한 추진력을 제공해주었다. 신약학에서 가장 격렬한 쟁점인 이것은 복음을 정의하고 바울신학을 시험하며 기독교의 유대교적 뿌리와 유산을 재평가하는데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의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라는 어구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이 어구는 바울의 복음을 정의하는데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라는 용어는 헬라어 형태보다는 히브리적 배경에서 그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는 용어의 좋은 예이다. 전형적인 헬라식 세계관에서 의는 개인 및 개별 행위의 척도가 되는 이데아 또는 이상인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히브리적 사고에서 의는 좀 더 관계적인 개념이다. 즉 상호 관계속에서 관계 상대방을 향한 관계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히브리적 사고의 의라는 개념이다. 성경에서 의라고 표현된 사상 체계가 그 성격상 철두철미하게 히브리적이라는 인식은 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는데 핵심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고 특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심으로써 스스로 짊어진 언약적 의무들의 성취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런 개념에 근본적인 것은 창조 및 택하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인식이었다. 하나님의 의를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신원해야 하는 하나님의 계약상의 의무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은 바울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을 복음의 주제로 선포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하나님의 의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며 바울이 알지 못하는 로마교회도 이런 실제적인 공리를 더 이상의 설명없이 인정하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고 바울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의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로 당연히 여긴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이스라엘의 언약 신앙으로 부터 받은 유산을 기독교에 직접적으로 할용하였다. 바울의 이신칭의의 핵심은 모든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서 하나님의 의와 그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 사이에 역동적인 상호작용이었다.
의가 관계적인 성격이라는 인식은 바울의 칭의 이해에 본질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이후 칭의 논쟁의 많은 부분들을 제거하고 불필요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의가 주격적 속격이냐 대격적 속격이냐 혹은 동사 디카이오오(dikaioo)가 의롭게 만든다는 것이냐 아니면 의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냐와 같은 논쟁들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둘 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가진 관계적 역동성은 그런 분석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
더 절박한 쟁점은 바울의 칭의 신학이 유대교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과 단절이었느냐는 문제이다. 바울의 칭의신학이 성격상 히브리적이었다면 바울은 무엇에 대응하여 이런 변증적인 가르침을 제시한 것인가? 우리가 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과 그의 유대교적 유산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 문제는 더욱 절박해진다. 요컨데 바울은 무엇에 대항하여 이신칭의를 선포한 것인가? 율법이 바울의 관심사가 된 것은 주로 경계를 정하는 율법의 기능 즉 이방인들로 부터 유대인을 구별하는 기능때문이었다. 즉 이신칭의는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따라서 유대인 신자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출현하였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말하면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와 대립시킨다. 개신교 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어구를 의를 얻기 위하여 시도하는 선한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으로 보면 이 전통적인 견해에 문제점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의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 유대교의 전형적인 가르침이었다는 주장은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라는 말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율법이 의무러서 부과하는 행위들을 가리키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한 순종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이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길이었다. 이렇게 이해된 율법은 이스라엘의 특권 의식을 강화시키게 되었고 이방인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배타적 표지가 되었다.
마카베오 시대의 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민의식 및 이스라엘의 구별됨을 수호하는데 필수적이라 여기는 몇몇 특정한 율법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다. 마카베오 문서들이 잘 보여주듯이 갈등의 초점이 된 율법들은 특히 할례, 정결에 관한 율법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라는 어구는 일반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 곧 언약적 율법주의 전체를 가리키지만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들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마카베오 시대의 유대교에서는 특히 할례 및 음식에 관한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행위는 의를 이루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언약적 의 특히 이방인들과 구별을 유지하기 위하여 준수해야 하는 율법의 계명들이었다. 요컨데 바울이 일관되게 경고한 행위는 언약의 율법이 요구한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이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런 잘못된 이해는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계약상의 특수성을 유지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요구 조건을 따르게 하려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시도에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났다. 이런 잘못된 이해는 결국 하나님이 유대인 및 이방인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오해를 의미하였다.
바울은 유대교의 자력으로 얻는 의를 반대하여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문제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듯한 본문의 해석에서 이스라엘의 율법 행위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일반화시켜서 하나님이 인간을 받으실 때의 조건으로 바꾸어 놓았다는데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 나오는 본문들을 그 유대적 모판에서 출현한 바울의 선교라는 맥락속에서 읽게 되면 그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이런 맥락속에서 바울의 본문을 읽으면 우리는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전제, 곧 하나님의 의는 오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면 유대인이 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기초한 독특한 의무사항들 곧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해야만 가능하다는 전제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역력하게 보게된다.
오직 믿음으로
바울이 정확히 무엇에 맞서서 경고하였든지 간에 그가 적극적으로 주창한 것은 개인이 복음에 응답하여 복음이 주는 축복에 참여하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이신칭의를 단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근본적으로 진술하는 방식으로 설명해 나간다는 점이다. 이로 보건데 믿음에 대한 바울의 강조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강조에 함축되어 있는 제한성과 싸우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모든 믿는 자라는 강조된 표현속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모든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의미하는데 바울은 이 점을 일관되게 강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들의 특권적인 지위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한다는 유대인의 전제를 거부한 것이다.
바울에게 인간의 의는 처움부터 마지막까지 피스티스(pistis), 곧 믿음/신실함의 문제였다. 바울은 율법이 어떤 식으로든 누가 아브라함의 유럽을 이을자가 될지를 결정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모든 관계의 가장 근볹벅인 원칙이 분명히 드러났는데 그것은 율법에 속한 이스라엘이든지 율법과는 상관없는 이방인이든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한 아브라함의 유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한 믿음이었는데 바로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공유함으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진 믿음이 바로 복음에서 요구하는 동일한 믿음임을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가 의미하는 바로서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개념이었다.
믿음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피스티스에 대한 바울의 모든 언급들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의 믿음을 언급하는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피스티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라는 어구를 그리스도의 믿음,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자원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린 신실함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속격 구문의 형태만으로 그것이 속격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을 이 구문이 문맥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해석이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런 해석은 핵심본문들의 문맥에서 떠난 것이다. 이 어구에 대한 해석을 떠나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복음은 죄와 죄의 세력을 단번에 처리해 버린 하나님의 신실함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이고 또한 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사법 절차의 오용이나 법적 허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의에 대한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의 차이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두 당사자의 관계속에서 상호의무에 관한 문제라면 침해를 받은 당사자는 상대방의 신의 위반으로 인하여 그 관계를 끝낼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때 적용한 것이 바로 후자의 경우이다. 여기서 법정 은유는 통하지 않는다. 또한 바울의 속죄교리는 단순한 대속의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죄인들을 대표한 죽음이라고 가르치고 그러므로 그의 복음을 믿은 죄인들이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전체적인 개념이 보여주듯이 칭의는 하나님의 단번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회복된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회복된 이후에 그 관계는 하나님이 계속하여 심판과 무죄 방면의 최후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시지 않는다면 유지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죄 없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범죄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의를 지속적으로 행사하지 않으면 구원과정은 중단되고 만다. 이것은 죄인이면서 의인이라는 루터의 고전적 정형으로 표현된다. 칭의가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면 칭의는 또한 하나님이 이전에 원수되었던 자들에게 화평의 축복을 수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평은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히브리어 개념인 살롬을 반영하는데 샬롬의 기본적 개념은 사회적 화합과 공동체적 선을 포함하는 안녕이다. 인간의 모든 관계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상호관계는 인간의 다른 모든 관계들의 기초이다. 결국의롭다 하심을 받은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간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제임스 던의 율법관
2015-01-14 01:08:09
제임스 던의 율법관
그의 책 바울신학을 중심으로
바울이 통상적으로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바울은 죄와 마찬가지로 율법도 죄이고 무서운 세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가르침 아래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신학인 복음/율법의 변증법이 성립되었다. 복음과 율법은 정면으로 대립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서로 다른 가르침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주제는 분명히 중요하고 쟁점들은 민감한 사안이다.
바울신학에서 율법의 가장 분명한 기능은 로마서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바, 죄와 범죄를 정의하고 측정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로마서만큼이나 율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은 율법의 이런 기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율법의 이 기능은 너무나 당연해서 이미 전제된 것이고 아마도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점을 언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율법의 이 기능을 다른 논증들을 전개하여 확고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하나의 공리 즉 근본적이고 이미 합의된 것으로 전제한다. 율법의 이 기능은 바울이 의문을 제기하거나 폐기하고저 한 기능이 아니었으며 메시아 예수를 믿는 그에게는 하나의 공리와 같은 것이었다. 율법의 이 기능은 바울과 유대인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쟁점이 아니었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 걸쳐 십계명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척도로서 율법은 순종을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한다. 로마서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율법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보편적인 심판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이렇게 율법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긴 하지만 바울에게 율법은 무엇보다 모세의 토라를 의미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갈3:19)라고 질문하고 대답하는데 그 대답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여기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대체로 부정적으로 표현하는데 3장 19절에서 율법은 범법함을 위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율법이 범법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범죄를 처리하기 위해 더하여졌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범법에 의해 야기된 문제에 해법을 제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을 이루었던 희생제사 제도에 대한 규정 속에서 율법의 주된 기능을 암시하고 있다. 3장 23절은 율법 아래 매이고 갇혔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갇혔다는 것은 구속이나 억압이 아니라 보호를 위한 후견을 의미한다. 또 24절에 율법을 초등교사로 묘사하는데 율법의 이 역할도 교정하고 보호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동안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 대표적인 구절들을 사실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의 역할을 자세히 제시하고자 한 이 중요한 구절에서 바울이 대답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죄를 억제하며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가르치고 훈육하는 긍정적인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율법 자체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의 관계는 부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바울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단지 잠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율법의 역할이 믿음의 도래, 약속된 자손의 도래,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과 율법의 관계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종말론적 비판과 관련되어 있다.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근본적인 특징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이방인이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비판은 유대인들이 이 약속의 성취가 약속된 자녀와 함께 도래하였음을 깨닫지 못한 것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도 율법에 대한 첫번째 비판은 율법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메시아가 온 후에도 율법 아래서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종말론적인 때의 구분에서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경륜의 새로운 단계가 존재한다면 이스라엘과 관련된 율법의 역할은 이전 단계에 속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과 관련하여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바울신학에서 율법이 죄 및 사망과 삼각체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자칫 또 다른 삼각체제인 율법이 생명 및 사망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이 또 다른 삼각체제의 상호작용은 이스라엘과 관련된 율법의 기능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다. 바울이 로마서 8:2에서 죄와 사망의 법과 아울러서 생명의 성령의 법도 말하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언약신학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들려주는 레위기 18:5의 의미는 분명히 율법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삶을 규율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지속적으로 생명을 확보하고 언약의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순종을 통해서 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생명을 얻는다는 생각은 거기에 내재되어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것임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지만 그러나 생명은 선물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언약 및 그 지속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생각되고 있다.
율법이 하나님 백성 내에서의 삶을 규율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그 역할은 이차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율법의 역할은 이차적 단계, 즉 이미 하나님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들의 삶을 규율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다. 바울의 지적은 유대인들이 그러한 이차적 단계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율법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율법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천명한 것은 율법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 안에서 믿음과 율법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는 천명이다. 율법의 역할은 이전에 없었던 생명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여된 생명을 규율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율법이 약속들을 거스리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율법에 대해 더 부정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이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5:20)이라 하였고 이어지는 율법과 은혜의 대비(롬6:14-15)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계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을 정립하기 위한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율법에 대한 평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 처럼 보인다. 율법에 대한 훨씬 더 부정적인 뉘앙스는 롬7:4-6에 나오는 결혼 비유에서 등장하는데 첫번쩨 혼인은 죄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역사하여 사망을 낳은 육신에 있는 삶에 해당한다. 바로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서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롬7:7)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율법이 죄라는 추론이 바울 자신의 논증에서 도출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질문은 율법에 대한 변호를 하는 단원(롬7:7-8:4)에 대한 바울의 수사적 도입부라는 것이다. 이 변호의 주된 요지는 인간의 실패는 율법의 흠이 아니고 진짜 주범은 죄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들어온 것을 범죄를 더하기 위함이라고 한 바울의 말의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논증에서 율법이 시행된 결과는 실제로 계명을 범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변호는 분명하다. 잘못은 율법에 있지 않다. 죄를 정의하고 측정하는 율법의 역할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죄와 사망의 권세와의 동맹에 관한 한 율법은 바울에 의해 단죄되기 보다는 옹호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척도 및 심판의 잣대로서 율법의 역할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에 의해 사용되고 인간의 연약함에 의해 배반당했다고 해서 율법 그 자체가 죄인가?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롬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