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율법- E.P.샌더스
바울과 율법- E.P.샌더스
2015-01-11 19:32:09
1. 율법은 입교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바울 사상을 이해하려면 철저하게 알아야 할 주제일 뿐 아니라 기독교과 유대교가 분리되는 것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우리는 이 주제에 관해 바울이 언급한 수 많은 진술을 가지고 있지만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들을 해석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 글은 율법에 대해 바울이 말한 것이 서로 다른 이유는 제기된 질문과 문제가 달랐기 때문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각각의 대답은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 다 바울의 중심적인 관심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다양한 대답들이 전체적으로 논리있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바울은 율법이란 용어를 최소한 두개의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 받은 자들의 단체에 들어가는가를 논하는 문맥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논하는 문맥이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제기된 질문에 따라 결정된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심판날 인간이 선한 행위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만큼 공로를 쌓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는 조건에 대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유대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조건으로서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반대하였다. 바울은 행위를 반대하고 믿음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이방인에게 요구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주장을 반대한 것이다. 우리는 은혜와 공로라는 신학적 쟁점에 너무 민감해 있으므로 종종 갈라다아서 논쟁의 실제적인 주제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선한 행위로 구원얻을 공로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유대교의 특징이라고 믿고 그래서 바울의 주장이 유대교를 반대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논쟁의 핵심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려면 유대교 율법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이다. 바울은 믿음이 유일한 입교 조건이라고 주장하고 반대자들은 믿음에 더하여 할례와 모세 율법의 수용을 요구하였다.
바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견해를 취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범죄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또 이것을 율법의 행위를 배제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제시하지도 않았다. 바울의 관점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었다. 믿음과 율법은 구원의 역사에서 각각 자리를 할당받는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하면 의가 율법에서 나지 않고 믿음에서 난다는 것이다. 의가 믿음에서 나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렇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의를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이 무의미해지므로 의가 율법에서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의라는 긍정적인 진술이 율법에 대한 부정적 진술에 근거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이 오직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율법은 입교 조건이 아니라는 원칙을 바울이 유대인에게도 적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주장의 주된 강조점은 이방인의 동등성을 옹호하고 유대인의 특권을 반대하는데 있다. 바울은 유대인도 역시 죄 아래 있고 그들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율법을 따름으로 의를 얻을 공로를 쌓으려는 노력이 인간의 죄를 형성하며 그래서 율법을 반대한다는 견해를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범례적 모형으로 세우는데 아브라함의 사례는 하나님이 할례자를 대하시는 것과 동일한 토대에서 무할례자를 대하실 것을 입증한다. 즉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약속은 율법과 관련되지 않고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유대인이 아니라 믿음을 갖는 모든 자를 포함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 의가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면 그릇된 태도에 이르기 때문에 율법이 실패했다거나 자기 의를 반대하기 때문에 의가 율법으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기 의라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관심을 둔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분명히 진술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차별없이 미치게 된다.
바울이 인간의 보편적 죄악을 진술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에 의한 의를 반대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런 진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주장에 인간의 보편적 죄악에 대한 진술이 근거를 둔 것이다. 율법을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주장을 바울이 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율법을 이룰 수 없다거나 혹은 유대인이 그릇되게 율법을 이루려 했다는 근거로 바울이 율법을 반대했다는 해석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전통적인 해석은 자기 의에 대한 반대가 기독교 신앙의 일부이며 바울은 틀림없이 자기의를 반대했고 유대교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율법주의적 종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반대한 것은 자기 의라는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닌 율법을의지한 것이다. 자기 의는 율법으로 나는 의이며 유대인에게 독특한 의이고 그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기는 하나님의 의라는 새로운 계시로 말미암아 자기 의는 그릇된 것으로 드러났다. 바울이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한 의미는 율법이 의를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나타난 계시에 의하면 참된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
의가 율법이 아니고 믿음에서 난다는 주장은 유대교가 말하는 구원계획과는 다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바울이 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의 주장은 사람이 선민이 되기 위하여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는 이미 성경에서 나타난 것인데 무엇보다도 율법과 관계없이 선택받은 아브라함에 의하여 입증된다. 사실상 이런 주장은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과 언약을 받아들이는 것을 동일시하는 유대교의 전통적 이해에 대한 공격이었다. 바울 사상에서 두드러지는 두가지 주장은 첫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믿음로 구원하시려는 것이므로 구원은 율법에서 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 주장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둘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교 수단으로서 유대교 율법은 아예 배제된다. 명백하게 이 두 주장은 빈틈없는 통일체를 이룬다. 율법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근거로 구원받은 자의 몸에 들어가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2. 율법의 목적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주장을 한 후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지 묻는다. 바울이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출구는 율법과 죄를 관련지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율법을 부정적인 위치에 두는 것이었다. 바울은 율법이 부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의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진술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으로 본다.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근본적 사실을 거듭하여 말한다. 확실히 바울은 율법이 죄라거나 육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죄 아래 있는 자나 육신 아래 있는 자는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며 죄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율법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과 동일시한다. 율법을 인간의 보편적인 곤경과 연결할 때는 바울은 율법이 의롭다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보다 율법에 대해 더 나쁘게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초로 하여 율법이 의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율법에 부정적인 역할을 줌으로서 그 딜레마에 대응하고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 그리고 죄를 연관시키는 다른 두가지 진술이 더 있는데 첫째는 율법은 선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주어진 것인데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율법을 이용하여 범법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고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있는데 이 법이 범법함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진술에서 바울은 율법과 죄의 적극적 연관을 부순다. 바울이 직면한 핵심 논제는 율법과 죄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하는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율법에 관한 바울의 다양한 주장에서 가장 일관성 있으며 연대기적으로 앞선 요점은 하나님을 율법을 기초로 구원하지 않고 믿음이라는 동일한 근거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율법 그리고 죄의 긍정적 연관을 철회함으로써 율법을 선한 편에 서게 하고 이리하여 하나님의 책임이 면제된다. 하지만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없는 것과 아울러 인간이 율법을 성취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지나치게 말한다. 이런 극단적 입장은 바리새인이었으며 사도인 자신의 체험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지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나온다는 이 두가지를 바울이 모두 주장하려고 하였을 때 그가 처한 딜레마를 보게된다.
죄와 구원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인간 조건에 대한 체계적이고 경험적인 설명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공통적인 기초위에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같은 상황에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은 구원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사람의 공통조건인 죄와 연관되며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배타주의적 기독론으로 인하여 율법에 부정적인 기능을 돌렸고 결국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생긴 결과를 하나님의 뜻과 분리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돌린 부정적인 기능을 통합하려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하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줄기차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지 본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모든 진술들은 논리적으로 전체로 조화롭게 결합되기 어렵지만 각 진술은 율법에 대한 바을의 핵심 확신을 다양한 문제에 적용한데서 생긴 것으로이해될 수 있다.
3. 율법은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죄와 육신과 연관되어 있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거나 죄를 심히 죄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의가 율법으로 나지 않고 믿음으로 난다고 길게 주장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혹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전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견해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율법을 이룬다는 견해사이에는 긴장이 느껴진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없는 자이지만 동시에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바깥에 있지만 율법을 이룬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부분에 대하여 구분을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의 할례법, 음식법, 절기법을 수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할례와 안식일과 음식법이 공통적으로 다른 율법과 구별되는 점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사회적 구분을 만든다는 점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같은 근거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했으므로 이 확신에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할례와 안식일과 음식법을 반대한 것이다..
바울이 유대교 율법의 어떤 부분을 배척하였을 때 그는 당대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율법이나 성경을 버리거나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니다. 반대로 바울은 율법을 굳게 세우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실제로 이룬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율법은 하나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래적 견해와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일한 지반위에 서있다는 확신을 통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더 나아가 바울이 권하거나 명령하는 행위의 몇몇 측면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의미로 부터 나온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인을 인도하려고 하는 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임을 지적해야 한다.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논리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성령으로 사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따라오는 것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규율하는 율법과 모세의 율법을 이론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적용에서 두가지 점이 다른데 첫째는 바울의 모든 권고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둘째는 할례, 절기, 음식 관련 규례를 제거하거나 의무적이 아니라고 주장한 점이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주되심이라는 계시에 의하여 율법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수정된 것이다.
바울은 율법은 인용하여 그것에서 행동 규칙을 이끌어 내는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순종에는 형벌이, 순종에는 상급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행동관은 율법으로 작용한다. 구원받은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행동하는 문제가 쟁점일 때 바울은 믿음과 율법을 전혀 대립적으로 보지 않았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한 행동을 논의할 때 바울이 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을 이루는 것 사이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행동을 논할 때 믿음이 율법을 이루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계명을 행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논할 때만 믿음과 율법의 명백한 대립이 나타난다. 주목할 점은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말했던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문제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두개의 의에 대하여 말하는데 하나는 율법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에 터를 두고 있는 하나님의 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유대인이 율법에 터를 두고 추구하는 의이다. 이 두가지 의가 가진 차이는 공로와 은혜의 구별이 아니라 두 직분의 구별이다. 율법으로 난 의가 있지만 이제 새로운 직분인 하나님의 의 때문에 그 의는 전혀 가치가 없어졌다. 율법으로 난 의를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구속사의 구체적 사실이지 은혜가 공로보다 우월하다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이 두 직분에 관하여 말할 때 그의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더 큰 가치에 지배된다. 그리스도에 비추어 볼 때 율법은 그 영광을 완전히 잃어버린며 율법 아래 있는 의는 유익에서 해로움으로 바뀐다. 바울이 율법에 부정적인 역할을 준 것은 바로 이런 사고방식 때문이다.
4. 결론: 바울과 율법
우리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다양한 진술이 율법 자체에 관한 이론적 사유가 아니라 바울이 가진 여러가지 확신에서 나온 것임을 거듭 관찰하였다. 바울의 율법 논의가 진행되는 주된 노선들은 기독론과 구원론 그리고 기독교적 행동에 의하여 규정된다. 구원론에 관하여 얘기할 때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율법으로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율법 준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입교 조건으로 설정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자신의 본래 확신을 유지하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구원하시고 따라서 율법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확신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율법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에서 차지하는 기능을 설명해야 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여러가지 진숧을 했지만 그 어떤 진술도 바울의 모든 시도를 말끔하게 통합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율법과 죄를 하나님의 목적에 종속시킴으로써 율법을 죄와 연결시켰다. 하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죄와 율법의 관계가 바뀐다. 바울은 율법은 선한데 죄가 하나님의 목적과 반대되게 율법을 이용한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해결책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심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율법에 대한 이런 진술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데 하나는 죄를 하나님의 통제권 밖에 두어 죄를 자율적 권세의 위치로 올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과 죄의 긍정적 연관을 부수고 육신을 하나님의 통제권 밖에 둔다는 점이다.
율법에 관한 바울의 사상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특징은 또한 그가 옳은 행동을 논의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해 죽는다고 말할 때의 율법과 성령안에 있는 자들이 성취하는 율법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전자는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받는 무리속으로 들어가는가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일단 들어온 다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바울은 입교 조건에 관한 논쟁(율법은 의롭게 하지 못한다)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한 다양한 설명으로 나아간 것이지 율법의 다양한 기능을 먼저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율법은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입교 논쟁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주지 않는 율법의 세가지 부분(할례, 안식일,음식법)을 배제하거나 선택적으로 본 것이다. 율법에 관하여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통합하는 내적 통일성을 찾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모든 진술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단일한 통일체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이 몇몇 전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주제에 적용할 때 율법에 대하여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에 대한 바울 사상의 원천을 탐구할 때 주된 관심은 언제나 율법에 대한 부정적 진술에 있었다. 특별히 율법은 죄와 육신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이 벗어난 옛 질서에 속하므로 율법을 순종해도 의에 이르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진술이 그것이다. 어떻게 바울은 율법에 대한 이런 부정적 판단에 이르렀는가? 율법에는 전통적으로 두가지 주된 설명이 붙어 있는데 하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순종하면 자기 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바울이 말한 적도 없고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자기 의에 이른다고 흠을 잡은 경우도 없다. 만일 이런 관찰이 사실이라면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진술이 생겨난 원천을 율법 체계 자체속에서 발견하려는 모든 입장은 제거된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바울의 결론은 율법을 옹호하려는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 같이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음이 틀림없다는 선행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다양한 진술들 가운데 어떤 것도 율법에 관한 바울 사상의 원천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율법이 대립적인 점을 고찰할 때 우리는 바울 사상의 핵심이며, 율법에 대한 그의 부정적 진술이 생겨난 원천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메시아일뿐 아니라 우주의 구주와 주이시다. 만일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위한 것이라면 율법은 아무리 잘 행하더라도 상관없으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내적 태도와 상관 없이 구원은 율법을 통하여 나지 않는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나며 율법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확신을 출발점으로 할 때 우리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다양한 진술들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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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에서 센더스의 핵심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샌더스는 바울은 자신이 받은 유대교의 유산을 결코 포기하거나 수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 새롭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도 말하고 긍정적으로도 말했는데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율법이 입교의 조건으로 거론될 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공히 모든 믿는 자에에 하나님의 구원이 미친다는 계시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특히 반대한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짓는 의식법인 할례, 음식법, 절기법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라는 새 로운 계시로 인하여 이런 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입교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준칙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라는 측면에서는 바울은 율법을 매우 긍정적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의 용도를 생각나게 한다. 칼빈은 율법은 부정적 용도로는 죄를 깨닫게 하여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준칙으로서 작용한다고 말했고 이것을 율법의 제3의 용도라고 말하며 이 용도야 말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본래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언약안으로 들어오며 율법은 언약 백성이 언약안에 머무르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듯이 이 근본원리는 신약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곧 성령의 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다는 것이고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어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온 천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행위가 아닌 은혜,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구약의 율법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만 그리스도의 계시의 빛 아래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 선교의 차원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짓는 의식법을 반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