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은총에 대한 짧은 소고-황범진
일반은총에 대한 짧은 소고-황범진
2015-01-03 18:28:05
개혁신학에서 일반은총론은 개혁신학을 여타의 신학과 차별화시킨다. 개혁신학에서 일반은총은 당연히 칼빈이 그 기초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칼빈의 일반은총론은 역사적으로 약 200년간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하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한 신학자는 구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하지가 조직신학의 한 부분을 할애하여 일반은총을 신중히 다루었고, 그 후 1894년 헤르만 바빙크가 깜번신학교의 교장 취임연설에서 일반은총론을 설득력있게 설파하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일반은총론을 가장 철저하고 포괄적인 연구를 수행한 신학자가 아브라함 까이퍼일 것이다.
까이퍼는 칼빈의 일반은총론의 사상위에 서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까이퍼는 칼빈의 사상을 그의 일반은총론의 기초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발전된 일반은총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과의 공통성도 있지만, 차이점도 보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까이퍼를 일반적으로 신칼빈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까이퍼가 칼빈의 일반은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봐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까이퍼는 칼빈의 일반은총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이퍼는 칼빈의 일반은총과는 다른 차이점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칼빈의 일반은총을 먼저 살펴보고 까이퍼의 일반은총을 살펴보고 그 공통성과 차이점을 다루고자 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일반은총론을 다루고 있다. 칼빈의 일반은총을 두 가지 측면으로 말할 수 있는데, 적극적인 측며과 수동적인 측면이다. 수동적인 측면에서 칼빈의 일반온총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죄의 파급을 억제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죄가 온 세상에 파급되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전적으로 파괴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 즉 사랑의 행동을 일반은총으로 부른다. 즉,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섭리로 본성의 사악함을 억제시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으시는 것이다. 이 때 양심의 수치심과 율법을 그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반면에 적극적인 측면에서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창조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성과 지성의 보편적인 이해력을 주셨다. 그리고 선천적인 재능을 주심으로 인해서 예술과 과학활동을 할 수 있게 초자연적인 은사를 부여해 주셨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일반은총을 단지 어떤 시민적 삶을 공정하게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 상식정도로만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은총은 성령의 특별적인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이다.
까이퍼도 일반은총을 첫 번째 국면에서는 칼빈과 동일하게 죄의 파괴를 억제하는 행동으로 본다. 즉 칼빈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까이퍼는 이 활동의 특징을 두 가지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첫째, 이 일반은총은 보편적이다. 둘째, 일반은총은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인 이 세상과 사회를 향하여 열려있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명백히 죄를 억제하는 일반은총의 기관이다. 두 번째 측면은 일반은총을 예정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창조는 단순히 현시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은총은 구원과는 관련이 없지만, 특별은총이 전개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그의 이러한 이해는 자연적으로 그의 일반은총론이 구원론과도 연결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일반은총을 예정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모든 만물의 구속(완성)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분명 칼빈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칼빈은 일반은총의 영역을 구원론과 연결시켜서 구원을 만물의 구속의 차원에서 보는 것에서 약화되어 있다.
세 번째 측면은 일반은총은 잠재된 것의 발현으로서 문화이다. 그에게 있어서 일반은총의 영역은 인간역사의 발전과 맞춰서 한층 세련된 형태로 진보하게 된다. 단순한 정신적 진보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기술, 예술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종말론과도 연결되어진다. 그에 의하면, 현세에서 학문이나 예술활동을 통하여 이룩된 문화의 일부분이 영광의 나라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 땅에서의 문화활동이 영원에서 그대로의 가치를 갖는다거나 영광의 나라, 즉 새 하늘고 새 땅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화적 산물이나 발전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현세의 것 혹은 현세의 질서가 영광의 나라로 편입될 때에는 전혀 다른 질서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형식이 보다 영광스럽게 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이퍼의 이해는 분명 칼빈과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현세의 것에 대해 부정적이고 그것은 단지 임시적인 것으로서 종말에는 사라질 것이고 까이퍼가 말한 것과 같이 문화가 영광의 나라에로 편입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까이퍼의 이러한 일반은총의 이해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낳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 반해 칼빈은 미래에 대해 부정적이다. 즉 까이퍼는 일반은총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까지 보고있는 반면에 칼빈은 일반은총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물론 일반은총에 있어서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둘 다 동일한 입장이지만 구원론적인 측면과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있어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칼빈이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론적인 측면과 세상에 대한 무시와 지나친 집착에 대한 포기를 말하고 있다면, 까이퍼는 구원을 전우주적인 것으로 보고, 세상문화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까이퍼의 일반은총의 견해는 저의 학부때의 은자이신 서철원 박사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반적으로 까이퍼의 신학이 서박사님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지만 일반은총의 견해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철원 박사는 일반은총을 하나님께서 죄있는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시는 호의라고 정의한다. 그도 까이퍼의 견해에 따라서 일반은총을 죄를 억제하는 기능과 문화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창조가 역사적인 발전에 따라서 계발되고 문화가 발전한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까이퍼의 견해를 따라간다.
이상 일반은총에 있어서 칼빈과 까이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일반은총은 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다른 신학과의 차별성을 줌과 동시에 개혁주의 안에서의 구원론과 종말론의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임을 이 간단한 소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더 많은 공부를 통해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가까운 일반은총론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글을 마친다.
일반 은혜(Common Grace)
2014-01-06 13:21:23
Ⅲ. 보통 은혜(Common Grace) (2) 구원론 / 조직신학
2. 개념
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의 구분은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하나님에게는 두 종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종류의 은혜만 있다. 하나님의 한 가지 은혜가 상이한 은사와 사역들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이 자연적 복들을 상실했고 사형 선고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현세에서 인간에게 부어주시는 자연적 복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나타난다.
보통 은혜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인류 전체에게 공통적인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지만, 선택받은 자든 선택받지 못한 자든 복음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공통적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보통 은혜를 언급할 때 다음 두 가지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1)심령을 갱신하지 않고 일반 계시와 특수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¹ 죄를 억제하고, ² 사회 생활에서 질서가 유지되며, ³ 시민적 의가 증진되도록 하는 성령의 일반 사역, (2) 햇빛과 비, 먹을 것과 마실 것, 주거와 의복 등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분여하는 일반적인 복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의 차이점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1) 특별 은혜의 범위는 선택의 결정에 의해 결정된다. 특별 은혜는 선택받은 자에게 제한된다. 하지만 보통 은혜는 이와 같은 제한이 없고, 모든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허용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받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분량의 보통 은혜를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2) 특별 은혜는 죄책과 죄의 형벌을 제거하고, 인간의 내면적 삶을 변화시키며,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을 통해 죄의 부패로부터 점차로 그를 정화시킨다. 특별 은혜의 역사는 항상 구원을 야기시킨다. 반면에 보통 은혜는 죄책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인간 본성을 갱신할 수도 없으며, 단지 죄의 부패력을 규제하며 죄의 결과를 어느 정도 완화시킬 뿐이다.1)
(3) 특별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이것은 강제적인 뜻이 아니라,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이 구원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영접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서 보통 은혜는 저항할 수 있다. 보통 은혜는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하므로 구원을 일으킬 수 없다.
(4) 특별 은혜는 영적이고 채장조적 방식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본성 전체를 갱신하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며,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통 은혜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인간이 진리를 보다 수용하도록 하며, 의지에게 동기를 제공하고, 인간의 자연적 열망들에 호소하는 등 단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만 역사한다. 따라서 특별 은혜는 직접적이며 초자연적인 반면, 보통 은혜는 간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C. 보통 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카이퍼 박사는 일반 은총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의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보통 은혜의 발현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보통 은혜의 근원은 창조의 중보자요,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그리스도다. 이는 보통 은혜의 복들이 창조 사역에 기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호의와 은혜(창조의 복)를 베풀어 줄 수 있는가? 선택 받은 자들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기된 자에 대해서는 (1) 그들에게 주어진 보통 은혜가 죄책을 제거하지 못하고, 따라서 용서를 포함하지는 않지만, (2) 보통 은혜가 정죄 선고를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집행을 연기할 뿐이라는 사실이 그들이 받는 보통 은혜의 복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D.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의 관계
1.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본질적으로 다른가? 아니면 양적으로 다른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충분한(보통) 은혜 외에 복음적 순종의 은혜를 인정하지만, 이 두 가지 은혜는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선언한다. 모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원론적이라는 것이다. 보통 은혜는 인간이 회개하고 신앙할 수 있게 하지만, 특별 은혜는 의지와 협력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신앙할 수 있게 한다.
반면, 개혁파 신학은 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의 본질적인 차이를 주장한다.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이며 영적이다. 이는 죄책과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 선언을 해제한다. 반면 보통 은혜는 자연적이다. 보통 은혜의 일부는 구원 은혜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보통 은혜와 일반 은혜는 현세에서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들은 양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보통 은혜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
2. 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에 있어서 어느 것이 우선적인가?
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어느 것이 우선하지 않다고 답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이 세계 안에서 작용할 때 특별 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 우선성은 특별 은혜에 두어야 한다.
3. 보통 은혜는 독립적인 목적이 있는가?
보통 은혜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목적이 있다. 보통 은혜는, 선택 받은 자의 삶과 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하도록 보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 외에도 보통 은혜는 인류를 위해 자연의 숨은 힘들을 발견하고 개발하며, 인류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재능을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하위 피조물에 대한 지배를 증대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독립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4.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각기 서로 구별된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양자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자연계와 현세에 관련된다고 하면, 특별 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과 관련된다. 어떤 의미에서 특별 은혜는 조직된 교회 내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통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그것도 교회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은혜는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보통 은혜의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 아래 둠으로써 이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
E. 보통 은혜가 역사하는 수단들
1. 하나님의 계시의 빛
2. 정부
3. 여론
4. 하나님의 징벌과 보상2)
F. 보통 은혜의 열매
1. 선고 집행이 유예된다.
2. 죄의 억제.
3. 진리, 도덕, 종교의 보존
4. 외면적 선과 시민적 의의 수행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선행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선행들로서 질료적인(material) 관점에서 볼 때는 선하지만, 이러한 선행은 올바른 동기3)에서 유래하지 않고 올바른 목적4)을 지향하지 못하므로 공식적인(formal) 관점에서는 선이라 명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성경은 중생하지 못한 자의 선행5)이 선하고 의로운 행위라고 반복해서 언급한다.
5. 자연적 복들
G. 개혁파 신학의 보통 은혜론
1.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보통 은혜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통 은혜6)를 구원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이해한다.
2. 때때로, 보통 은혜에 관한 개혁주의 신학적 교리가 보편 속죄 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알미니우스 진영에 속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 도르트 신조는 제한 속죄를 가르치고 있지만, 동시에 복음의 보편적 선포를 요구한다. 성경은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하셨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 한편에서는 복음적 부르심이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확장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만약 신앙과 회개를 조건으로 하는 무차별적이며 신실한 구원의 제공은 제한 속죄의 교리와 완전히 조화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된다면, 우리는 어떤 교리의 진위가 성경의 다른 교리와 조화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답변함으로써 이를 인정할 수 없다. 7)
3. 보통 은혜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이 교리가 하나님께서 유기된 죄인들에게도 호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적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호의를 공유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4. 재세례파는 보통 은혜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자연계에서의 선한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근본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사물의 새로운 초자연적인 질서를 확립하였고, 중생한 이들이 이제 이 질서에 속하였기에 이제 구원 은혜 이외에 다른 은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 우리는 보통 은혜로부터 죄에서 우리를 일으키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죄를 억제하는 긍정적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2) 보통 은혜는 현세에 있어서 인간의 불의에 대한 벌을 주고, 하나님의 법에 외면적으로 일치된 행동에 보상하는데, 이러한 섭리적 도구들은 현세에서의 악을 억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3) 감사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5) 영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선을 의미한다.
6) 외적 부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