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언약의 피

메르시어 2023. 5. 7. 11:28

언약의 피

2014-11-24 15:18:13


 

  "이르시되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유명한 말씀은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에서 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에도 동일한 구절이 나오는데 마태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많은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약의 피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이 흘리는 피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언약의 피란 무엇인가? 왜 예수님이 흘리는 피가 언약의 피라고 표현한 것인지? 왜 그 언약의 피를 흘림으로써 많은 사람이 죄사함을 얻게 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언약의 피"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24장 8절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는 장면인데 일종의 언약을 체결하는 예식으로서 모세가 짐승의 피를 가지고 반으로 나누어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그 피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 라고 말한 대목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약의 피라고 말한 것은 언약을 맺을 때 피로 상징되는 생명을 걸었다는 것이고 만약 언약을 배반한 당사자는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맹세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언약의 피"란 말은 언약 배반에 따른 결과로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시내산 언약에서 피를 반으로 나누어 제단에 뿌리고 또 백성에게 뿌림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두 목숨을 걸고 언약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시내산 언약은 결국 아브라함 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갱신된 것이 시내산 언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없이는 시내산 언약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에는 언약의 피가 없었을까? 당연히 언약의 피가 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을 때도 고대 근동의 언약맺는 방식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동물을 반으로 갈라서 그 갈라진 가운데로 언약 당사자가 걸어가는 방식이다. 이 때 당연히 동물의 피가 흘려지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을 배반하는 당사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맹세하는 언약의 피였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타는 횃불이 동물의 갈라진 가운데를 지나감으로써 하나님도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할례를 명하심으로써 사람도 언약에 피의 맹세로 참여하도록 요구하셨다.

 

  일차적으로 보면 아브라함 언약은 이스라엘과만 상관되는 언약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볼때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을 이스라엘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준비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준비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이 하나님의 창조역사까지 거슬러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언약이 아니라 온 인류의 언약이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을 통해서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창조 역사를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으나 선약과 금령으로 상징되는 순종의 의무를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속에서 언약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 자로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약적 의무를 저버렸을 때  즉 언약을 배반하게 되면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간의 관계는 창조시부터 생명을 담보로 한 엄중한 언약 관계였던 것이다. 이것을 창조 언약이라고 부른다면 아브라함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이나 모두 이 창조 언약에 뿌리를 두고 그 언약적 성격이나 내용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이 선악과 금령을 범하게 되면 즉 언약을 배반하게 되었을 때,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죽음이 경고되었다. 그러나 실제 첫 사람은 즉각적인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물론 성경은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고 모든 사람은 사망의 지배를 받게되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흙에서 취함을 받았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사망을 매우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망의 선고 직후에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아담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지만 그 죽음이 즉각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과 가죽옷은 어떤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아담의 죽음을 대신하여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언약에도 언약의 피가 흘려진 셈이다.

 

  창조 언약에서 언약의 피가 흘려졌다면 그 피는 아담이 흘려야 할 피를 대신한  대속적 피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에서 나타난 언약적 피도 대속적 성격을 가진 것은 동일하다. 구약의 제사제도하에서 흘려진 동물의 피들은 모두 대속적인 언약의 피였던 것이다.  언약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려야 할 피를 동물들이 대신 흘린 것이다.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그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언약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한 바로 그 의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언약 배반의 책임을 대신 뒤집어 쓰고 흘리신 언약의 피이며 많은 사람이 흘려야 할  언약의 피를 대신 흘리신 대속적 언약의 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