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문학(욥기, 잠언, 전도서)
지혜 문학(욥기, 잠언, 전도서)
2014-11-21 21:08:29
욥기, 잠언, 전도서 이 세 권의 첵을 가리켜 지혜문학이라고 부른다. 세 권의 공통된 주제가 지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지혜라는 말은 다양한 경우에 사용된다. 애굽의 점술사들과 마술사들을 지혜로운 자라고도 하고 다니엘서에는 꿈을 해몽하는 능력을 지혜라고 하고 성막에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가리켜 지혜롭다고도 말한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박학다식한 지식 역시 지혜로 여겨진다. 지혜로운 자들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대처해 나갈 수 있게 하며 사람을 둘러싼 많은 경험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는 점에서 "삶의 기술"이란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지혜를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에게도(잠언 30:24-28) 그리고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에도 있다고 말한다. 열왕기 4장 29-34에는 솔로몬의 지혜가 동방이나 애굽사람들 보다 위대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근동에서 지혜의 기준으로 동방과 애굽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성경의 지혜문학은 이런 일반적인 지혜를 여호와 신앙의 틀 내로 융합시키고 있다. 여호와 신앙 안에서 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끌어 가시는 패턴을 아는 것이다. 잠언 1장 1-7절은 지혜와 훈계의 목적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호와 경외란 단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주의하는 것이고 그의 말과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성경의 목적에 대해 언급하는 디모데후서 3:15-17과 비슷하다. 묵시에도 지혜적 차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정의와 공의를 따라서 살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지혜는 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지혜는 삶에 있지 앎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제임스 크랜쇼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 형식의 측면에서 볼 때 지혜는 격언문장이나 가르침, 논쟁, 지적인 반성 등으로 이루어지며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지혜는 인간복지를 위해 삶을 다스리는 것에 관해서 취급하는 자명한 직관들, 무죄한 고통에 대한 삶의 비밀을 추구하는 일,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고민, 창조질서 안에 감추이고 지혜안에 드러난 진리를 추구하는 일 등으로 구성된다."
지혜는 이런 특성상 매우 함축적이고 인상적으로 전달된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혜문학에서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동의 평행법이나 반의 평행법 그리고 은유 직유 비유 등의 수사법이 동원된다. 따라소 이와 같은 수사적 언어들은 그 의미에 대해 독자들이 개입할 여지를 많게한다. 명확하게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함으로써 독자의 상황에 따라 이해나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게 된다. 이렇게 의미 전달이 모호하게 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사법을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의 불명료성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는지도 모른다. 이 불명료성의 공백을 채우는 상상과 해석이 필연적이게 되니 문학적 상상력이나 해석의 다양성은 신앙에 필수적일 수 있다.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구약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지혜문학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지혜문서들과 구약의 지혜서에는 두드러진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고대 근동의 지혜와 구약의 지혜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지혜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특징적 요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달리말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지혜의 영역안에 없다는 것인데 이는 지혜문학이 단지 이스라엘적인 현상이 아니라 국제적인 공통현상이라는 점과 연관될 것이다. 그러나 지혜문학이 진술하는 모든 지혜의 뿌리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와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험이 지혜가 다루는 삶의 기본전제이다. 그런 점에서 지혜문학은 여호와 신앙에 입각한 삶을 비종교적이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지혜의 규칙은 긍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관점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대한 추구를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잠언의 지혜는 인과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잠언이 말하는 인과율은 숙명적 인과율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그 질서에 겸손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를 일러준다. 잠언은 지혜를 의인화시켜 지혜가 정의(쩨다카)의 길로, 공평(미쉬파트)의 길로 가운데로 다닌다고 말한다. 잠언은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리고 지혜는 삶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러준다. 이 점에서 잠언의 첫머리와 마지막은 서로 대칭이 된다.
한편 욥기와 전도서는 이런 인과율(응보의 질서)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관해 증언한다. 욥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욥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그에게 임한 부당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탄식하며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욥의 탄식과 시편의 탄식은 달리 욥의 탄식은 항변으로 이어진다. 욥의 친구들의 말은 한결같이 인과 응보의 원칙을 강조한다. 그러나 욥의 문제는 이런 원칙이 욥의 상황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욥의 항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욥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길다란 수사의문문 표현을 통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욥과의 무한한 간격을 보이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무한한 간격은 욥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욥의 친구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인과응보의 원칙에 의거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판단한 것은 정당치 못하며 우매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인과율이라는 경험적 지혜는 욥의 현실에서 더는 타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법칙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단지 새로운 지식이 주어졌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행동의 원칙을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주장에 대해 적절히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은 고난의 문제가 얼마나 다루기 힘든지를 보여준다.. 욥기는 우리의 삶과 세상에 대해 참으로 무엇을 질문하시는 분, 세상을 창조하고 지탱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 분의 뜻에 맞추어 순종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전도서의 히브리어 성경 제목은 "코헬렛"이다. 코헬렛은 아마도 회중(카알)모임의 인도자였을 것이다. 히브리 성경은 전도서를 다섯 두루마리(룻기, 아가서, 전도서, 애가, 에스더)중 하나로 위치시키고 있다. 솔로몬이 저자임을 보이는 구절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전도서의 저작 시점을 주전 4세기 후반에서 3세기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솔로몬의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일 수도 있다. 전도서의 핵심 단어는 "헛되다" 라고 할 수 있다. 전도서가 주로 다루는 문제는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욥기와 마찬가지로 전도서는 사회에 가득한 부조리와 불의를 고발하면서도 도무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사람이 알 길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전도서는 모든 일이 헛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은 염세나 인생 혐오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사람이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 절망이나 체념을 하지 말고 주어진 삶의 시간과 상황을 누리고 기뻐하라고 명하는 것이다.
욥기와 전도서는 세상에 가득한 불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탄식을 담고 있다. 이런 탄식은 예레미야, 하박국 ,시편을 비롯하여 구약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런 소리는 구약 신앙의 주변부가 아니라 구약 신앙의 본질적 핵심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여호와를 섬기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구약 곳곳에서 울리는 이 탄식 소리는 그 근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찬양은 탄식과 부르짖음으로도 드러난다. 욥기와 전도서는 전통적 지혜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혜를 탐구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지혜는 처세술이 아니라 사람의 본분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야 말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즉 의로움이라는 점에서 지혜문학 곳곳에는 정의를 행하는 삶이 강조되고 있다. 지혜는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으며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깨닫고 발견하는 것이다. 이 지혜는 자연의 질서나 사회 질서로 나타난다. 잠언은 이 질서에 순종할 것을 권면하며 욥기와 전도서는 이 질서가 뒤집힌 것 같은 현실을 말하지만 그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질서를 모색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혜는 사람이 완전히 다가가기 어려운 신비이다. 지혜가 가장 필요한 상황은 아마도 고난일 것이다. 욥기와 전도서는 우리 인생이 정답으로 가득찬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손쉬운 위로를 주기보다는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
지혜문학의 신학
2014-11-28 14:00:40
구약 지혜문학의 특징은 그 안에 이스라엘 신앙의 본질적 부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약 시대 신앙고백의 기둥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출애굽 사건, 율법, 약속의 땅,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지혜문학에서는 이런 이스라엘 신앙의 골간이 안 나타난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구원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얘기다. 율법이 언급되긴하지만 시내산 언약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삶의 지혜로서 율법을 언급한 정도이다. 이런 특징은 지혜라는 장르 자체가 구약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라는 이유와 연관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지혜의 출처는 언제나 야훼신앙에 기초한 것이었으므로 지혜의 출처는 달랐지만 지혜 자체는 언제나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구약에서 지혜문학은 변두리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구약에서 늘 십자가와 연관성을 찾으려는 보수적인 신학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지혜 문학이 정경에 3권이나 존재하고 예언서나 시편에도 지혜문학적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볼 때 지혜문학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성경에서 놓치는 책도 많게된다. 지혜문학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모두 해당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가르침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마디로 요약하셨고 또 이것을 '누구든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는 한 마디로 말씀하셨는데 이 한마디는 이게 교회의 가르침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이고 잠언의 지혜와 대단히 유사하다. 이 한마디는 율법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구약을 총괄하여 잠언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여호와 신앙이 안드러난다는 점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이야기이다.
신앙의 표현에서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빼기 어렵고 또 신앙을 윤리 도덕과 분리시키기 쉬운데, 지혜문학은 신앙적 표현없이 신앙을 윤리 도덕과 결합시키고 있으니 이것이 지혜문학이 가진 자신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지혜문학의 자신감을 가지고 구약진리의 보편진리를 통해 세속사에 폭넓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지혜문학은 일반적인 사람들 이야기를 두루 다루고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 한다. 분명히 기반은 야훼신앙에 두고 있지만 그 신앙을 인류 공통의 보편가치로 표현을 한다는 점에서 지혜문학은 대단히 현대적이라 할 수 있다. 야훼 신앙이라는 특수한 기반을 가지면서도 보편 가치를 말하는 것이 현대 교회가 가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지혜문학은 고난에 대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삶의 현실을 설명하지만 정답을 말하지는 않으면서 까닭 모를 고난과 허무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말하고 있다. 지혜문학은 지혜는 하나님의 질서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질서가 깨어진 속에서도 질서를 추구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인간이 가진 모든 의문과 궁금함 그리고 문제제기 자체는 정당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의 지성의 모자를 벗고 그 한계를 인정할 때 지혜의 신비를 얻을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잠언
잠언은 시작부터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혜가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마지막 장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데 현숙한 여인 역시 지혜가 의인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잠언은 지혜로 시작하여 지혜로 끝나는 인클루지로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잠언의 주제는 지혜인 것이다. 이렇게 잠언은 지혜를 말하며 또 지혜를 얻은 자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평행법적으로 묘사하면서 지혜란 우리의 일상적 삶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31장에서는 르무엘 왕에 대한 지혜로운 경고가 나타나는데 구약에서 왕의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에 가깝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대행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왕적 존재이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이런 왕적 존재로 묘사하며 다윗 왕을 이스라엘의 대표로 내세운다. 이런 점에서 잠언 31장에 왕의 행동의 지혜로움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지혜로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잠언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인과율의 원리인데 이것은 잠언이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칙이다. 인과율은 구약뿐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모든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지혜로서 하나님이 조성해 두신 통치 원리를 사람들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과율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이고 질서이니 이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믿음이란 이름으로 수고하지도 않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인과율을 깨려는 잘못된 태도이다.
욥기
잠언이 테제라면 욥기는 안티테제일 것이다. 욥기에서 3-31장에 이르는 긴 부분에는 욥의 탄식이 나오는데 그것은 인과율이 맞지 앟는다는 불평이었다.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서 욥은 인과율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욥의 세친구들은 한결같이 인과율을 주장하고 있다. 28장에 대한 해석이 좀 애매한데 여기서 욥의 무지와 하나님의 알고계심이란 잠정적 결론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28장은 욥의 말이라기 보다는 이제까지 논쟁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나올 해결책을 암시하는 저자의 글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9-31장에서 욥의 최후 진술이 끝난 후 32-37장에 엘리후의 연설이 나오는데 엘리후의 말에 대해 욥의 반발이 없고 엘리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도 엘리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대답을 미리 보여준 것인 듯하다. 엘리후의 연설이 이렇게 긴 이유는 의인이 받는 고난이라는 욥의 질문에 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신정론에 대한 답은 정말 어렵고 정답이 없다.
38-41장에는 욥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인데 하나님의 대답 역시 욥에 대한 질문형식으로 나타나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께 질문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문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질서의 오묘함을 아느냐고 욥에게 물으시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욥과의 무한한 간격을 강조하신다. 욥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기기 보다는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 욥의 문제 제기가 정당함을 인정하신다.
구약에서 신정론이 나타난 본문은 시편 73편, 에례미야 12장, 하박국, 욥기인데 여기서 대답이 다 다르고 원칙적으로 동문서답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불의한 현실에 대한 사색과 묵상의 결과는 정답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신정론에 구약은 답을 주지 않지만 신약에는 당연히 답이 있고 아예 묻지 조차 않는다. 그러나 신정론을 가지고 씨름하는데 구약의 가치가 있다. 구약은 신정론에 정답을 주지 않으시면서 인간이 어떻게 신정론을 극복해 가는지 보여준다. 이런 과정없이 신약의 정답으로 바로 가는 것은 야훼 신앙의 풍부한 자산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잠언의 인과율이란 삶의 원칙이 욥기에서는 깨진다. 욥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인과율로만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고난받은 의인,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실존이다. 인과율의 원칙이 깨어진 대표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니 여기에 욥기와 신약의 접점이 있다할 것이다. 욥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대답이 아니라 욥의 탄식이니, 여기에 또한 신약의 고난과 욥기가 만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전도서
코헬레트는 부르는 사람이든지 설교자이든지 회중의 인도자이든지 결국 사람이다. 전도서는 전도자가 솔로몬 왕이라고 말하고 이후에는 왕에 대한 암시가 없다. 그러나 저자가 솔로몬 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도서의 언어 자체가 포로기 이후 문서처럼 아람어의 영향을 받고 있고 유대인 사회에서 재물을 모으고 가난한 자를 억합하는 일은 헬레니즘 시대에야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전도서의 작성시기는 아마도 포로기 이후에서 알렉산더 치하의 헬레니즘 시기인 주전 4세기에서 2세기 정도일 것이다.
전도서는 헛되다는 말로 시작하여 헛되다는 말로 끝나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전도서의 핵심은 '헛되다' 일 것이다. 전도서는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관찰한 후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을 내린다. 잠언이 인과율이라는 순진하고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욥기가 제기하는 신정론도 기본적으로 잠언의 인과율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에 전도서는 인과율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헛되다는 좀 냉소적인 결론을 내린다. 전도서는 현실에 개입하기 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12장 9절 이후는 헛되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헛됨이란 문제 제기로 끝나는 전도서에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나중에 덧 붙여진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가 8절로 끝나지 않고 9절 이하로 끝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만사가 헛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허무함을 인정하면서도 절망으로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도서가 내세를 희망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전도서의 결론은 허무가 아니라 인생의 허무를 이기는 길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