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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계몽주의

메르시어 2023. 5. 7. 11:24

18세기 계몽주의

2014-11-19 01:33:01


  16세기 종교개혁이후  17세기에는 장기간의 종교전쟁을 경험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러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나타난다. 그것이 계묭주의와 산업혁명의 등장이다. 계몽주의 탄생의 근원은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그리스적 인간관이 복구되면서 인간 존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이라는 사조가 유입되었다. 그래도 15, 15세기의 르네상스는 기독교적 틀안에 머물러 있었던데 반해 18세기의 계몽주의는 기독교의 계시나 믿음을 공공연히 부인하지는 않지만 내적인 사상으로는 종교의 권위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의 철학적 사조는 이성을 중시하는 데카르트의 관념론과  감각을 중시하는 로크의 경험론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종합한 칸트의 철학이었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기존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던 것을 이성적 추론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로크는 감각밖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하여는 외부 정보를 포착하는 오감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감각을 통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나중에 칸트는 데카르트와 로크를 종합하여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제시하였는데 그는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순수이성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칸트는 신비와 초월의 영역은 감각으로 포착이 안되므로 철학에서는 신적 담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전에는 종교와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는데 칸트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한 것이다. 또한 칸트는 신천이성에서는 윤리와 도덕을 다루었는데, 그는 우주에 자연법이 존재하듯이 인간에게는 신이 부여한  도덕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과 달리 주체적 사고를 하므로 도덕법을 따라서 살지 않는 경우가 있으므로 인간으로 부터 도덕적 삶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신이 요청되는데 이것이 실천 이성의 한계내에 있는 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성의 한계내에서의 파악될 수 있는 종교는 윤리와 도덕이라고 하였다.

 

  중세에는 사람의 이성과 감각이 타락하였으므로 신뢰하지 않았지만 계몽주의는 이성과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계몽주의에서 이성과  경험은  그 시대의 에토스였으며  세상을 움직이는 두 축이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나아가 산업혁멍을 일으키는 기술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그들은 이전 시대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억압하여 이성의 빛이 사라진 암흑의 시대였는데 암흑의 시대에 빛을 비추는(ENLIGHTENING) 것이 계몽주의라고 말한다. 인간의 합리성과 경험성이 중시되면서 계시와  믿음의 자리를 이성과 경험이 찬탈한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가 강타하자 이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신학적 변증과 부흥운동이었다. 신학적 변증으로 이신론이 대두하였고 신학이나 교리보다는 예배와 도덕적 삶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사람들이 유니테리언이었다. 이들은 이신론적 우주관을 가지고 합리성을 중시하면서 비합리적 교리를 거부하여 삼위일체론과 제한속죄론을 반대하여 단일신론과 보편구원론을 주장하였다. 부흥운동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두 나라에서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것이 특징이다. 미국 뉴저지에서는 화란개혁교회 출신이 프레링후이젠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인 길버트 텐너트를 중심으로, 코네티컷의 노스햄프턴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와 휫필드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존웨슬리는 이신론의 이성의 종교(religion of reason)에 반대하여 심령의 종교(religion of heart)를 주장하였다. 이성이 아니라 체험을 종교의 본질로 본 것이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을 바탕으로 언덕위의 사회(city upon a Hill)라는 신정사회를 꿈꾸었다. 그들은 칭의와 더불어 중생을 강조하면서 중생의 체험을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자격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후세대로 가면서 중생을 처험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신정사회를 꿈꾸던 뉴잉글랜드 교회는 침체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설교는 이전의 비전을 제시하던 설교에서 책망과 탄식의 설교로 바뀌었는데 시기에 대표적인 설교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에서 이신론을 공격하면서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영국에서도 당시 산업혁명의 부작용이 만연하고 성공회는 교회당이 텅텅 비어있을 정도로 침체하였는데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대각성운동이 일어난다. 웨슬리는 중생 이후의 완전한 성화의 삶을 강조하면서 명목적 신자(nominal christian)와 참 신자(real christian)를 구별하였다. 특히 조지 휫필드는 설교에 달인이었는데 원고없는 즉흥설교 및 노상설교를 시도하였다.

 

  일반적으로 종교학에서는 종교에는 사고 중심형(thought out)과 체험 중심형(danced out)이 있는데 이 둘을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험을 중시하는 영미권울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은 체험울 중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복음주의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한편 대륙을 중심으로 한 합리주의 전통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게 되는데 결국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나 대룩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은 모두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교회의 대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