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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신학적 위기- 이광호

메르시어 2023. 5. 7. 11:21

한국교회의 신학적 위기- 이광호

2014-11-16 18:44:30


세속화된 한국교회의 신학적 위기

 

이광호 교수

 

1. 서론

 

   근대이후 활발해진 이성주의는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악영향은 한국교회에 가운데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신학의 위기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고 있음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서는 누구나 하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생소하지 않으며 더이상 놀랄만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위기는 과연 어디서 부터 오게 되었는가? 학자들은 그에 대한 이유를 다양한 측면에서 찾는 것이 사실이다. 다수는 목회자의 도덕성 상실, 물신주의, 개교회주의, 세속적 가치관 등 나름대로의 이유들을 꼽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교회의 위기 원인을 이성주의로 인한 신학의 변질 및 부재에서 찾는다. 신학의 변질은 결국 신학자들의 잘못된 성경관에서 시작되며, 그들의 세속적인 학문 자세와 오염된 연구에 기인한다. 그것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교회론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시대는 이미 정통적인 신학의 규범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 각각 다양한 형편과 환경에 따라 상이한 신학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런 논리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상대화 할 수 밖에 없으며 객관적으로 옳은 신학이 없다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신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신학으로 전락할 때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필자는 한국교회 가운데 역사적 정통성을 띤 참된 신학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회를 위한 신학’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와 더불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온전한 신학 교육을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땅에 참 교회가 굳건히 서게 되고 성도들이 그 가운데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수 있게 된다. 모든 신학자들이 그 일을 위해 힘쓰는 풍토가 조성될 때 한국교회에 진정한 희망이 보일 것이다.

 

2. 신학과 신학의 목적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신학이란 학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학문들 가운데 하나에 그치는 것인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성경의 내용을 분석하여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참된 신학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진정한 신학이 아니라 일반 학문의 방법론을 동원한 학문적 신학일 따름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진정한 신학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학문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개념을 지녀야 한다. 세상의 학문들이 인간의 이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신학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즉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여 연구업적을 쌓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정리하여 교회 가운데 제시하는 고백적 학문이어야 한다.

 

신학의 내용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알아가는 본질적 의미가 존재한다. 즉 신학은 단순히 학문적 이론을 확립해 가는 과정속의 학문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도의 성령에 의한 성경해석에 의존해야만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는 성경해석을 통하지 않고는 진정한 신학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해야할 바는 신학이 일반 학문화 되어 갈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교회를 세상으로 부터 보호해야 할 신학자들이 도리어 세속화의 대열에 서게 됨으로써 신학이 인간의 업적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빙자한 인본주의 신학의 길을 틔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학은 학문적 발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비록 변천하는 세상 가운데서 진리에 의한 반응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것을 신학적 발전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신학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동일한 개념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가지는 신학적 개념은 상이하지 않으며 발전하거나 발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학이 신학 자체의 세속화와 인본주의화를 방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진정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학 연구에 임하는 신학자들의 기본적인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경청함에 있다. 신학자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 혹은 이성을 배경으로 하는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귀 기울여 반응해야 한다.

 

(2) 신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학자들은 변천하는 세상의 현상과 가치들을 경험하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시대적 교회를 향한 분명한 잣대를 제시해야만 한다. 즉 신학의 목적은 우리가 상속받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은 새로운 가치들을 끊임없이 뿜어냄으로써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고자 한다. 세상의 가치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하지만 주님의 교회가 소유한 진리는 시대와 지역성을 초월하여 절대적 의미로 존재한다. 시대를 따라 변천하는 세상은 가치변화를 필히 동반하게 된다.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 역시 가치 변화가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마치 파도치는 바다를 헤치며 항해하는 배와도 같다. 배의 내부는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만, 파도치는 외부의 환경으로 인해 배는 심하게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 중심을 잘 잡아야만 한다. 배가 중심을 잃어 파선하거나 침몰해서도 안되며 그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 중심을 잡지 못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신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학의 본질적인 기능은 교회가 세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회 내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하는 동시에 세상의 위험한 풍조와 가치변화를 민감하게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은 변화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냉철하게 해석하면서 그것이 교회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방어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의 파도를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교회를 온전히 지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각성할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 곧 신학이며 신학자들이 감당해야할 몫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회를 유지 보존하는 것이다. 즉 신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는 신학이 단순히 학자들의 주관적인 지적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한 교사여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신학자들이 일선 목회자들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신학자들은 교회 가운데서 매주 예배를 주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공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에게 구체적인 신학적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를 위한 신학자의 기능과 매주일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보살피는 목회자의 일반적인 상호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올바른 신학적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신실한 보조자 역할을 하는 직무를 태만히 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자들이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지상의 교회는 속히 변질되거나 부패하게 된다. 신학자들의 직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실하게 이행될 때 교회가 온전히 서 갈수 있다. 그것을 위한 것이 곧 우리가 이해해야할 바 신학의 목적이다.

 

 3. 현대 한국교회 신학의 문제점과 대응방안

 

(1) 성경과 정통신학을 떠난 신학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정통신학이라는 말이 의미없게 되어버렸다. 모든 신학자들이 제각각 자기 형편에 맞는 신학을 정립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에 있어서 정통성 있는 교회들의 역사적 전통을 이해해야만 한다. 신학의 내용은 결코 걸출한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결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 전통 가운데 있어왔던 신학에 대해서도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지상 교회의 신학적 결정이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참된 교회들의 신학을 기준으로 삼아 건전한 성경해석과 더불어 진리를 향해 매진해 나가야만 한다.

 

우리 시대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문학적 관점에서 보려는 악한 시대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일부 교회들 마저 그에 편승하고 있는 실정이며 다수의 신학자들이 그 논리에 앞장서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에 허락하신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형편들 가운데서 인간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산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교회 전통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진정한 신학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올바른 신학이란 성경을 통한 객관성이 있어야만 한다. 개별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있어서도 그 점은 중시되어야 한다. 즉 21세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과거 정통성있는 교회와 상이한 별도의 신학을 추구하거나 확립할 수 없다. 나아가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건전한 교회들로 부터 동떨어진 별개의 신학을 창출하려 해서도 안된다. 만일 과거의 정통신학에서 벗어나게 되고 현재 세계에 흩어진 건전한 교회들의 신학에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단을 향한 노정에 있는 위험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명력 상실

참된 신학의 본질은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타락한 이 세상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만 있을 따름이며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사망에 갇혀 있다. 따라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참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신학의 임무는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며 지키는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를 향해 세상에 대한 대응 방침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이 신학과 신학자들이 해야 할 임무인 것이다. 그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건 투쟁을 동반하게 된다. 사망의 세력은 진정한 생명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생명을 삼키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신학은 그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본질적 사명을 거의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속화된 신학이 교회의 생명을 지키기는 커녕 도리어 세상에 굴복함으로써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세속화된 다수의 신학자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세상과의 타협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 시대의 신학은 거의 박제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신학교라고 하는 거대한 유리관 속에 신학이 박제된 채 희미한 모습을 부분적으로 드러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학문적 이론일 뿐이며, 교회에서는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실천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정도의 형편이라면 우리시대의 신학은 생명을 상실한 죽은 신학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죄와 세상의 헛된 가치관을 찔러 쪼개는 신학의 예리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말씀의 검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을 예리한 진리를 제시할 수 있는 힘을 상실당한 신학은 더 이상 생명력 있는 신학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명력 있는 참된 신학이 회복되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3) 건전한 토론 부족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자가 없다. 신학의 기초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학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성경을 통한 교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신학자들 간에 지속적인 토론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을 배경으로 하는 건전한 신학적 토론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참다운 신학을 추구한다고 해서 모든 학자들에게 획일적인 사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참된 신학은 성경을 통한 조화를 추구하며 전체적인 획일화를 꾀하지 않는다.

 

신학적 획일화는 학자의 양심을 마비시킬 우려가 따른다. 나아가 거기에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에 의해 진정한 고백을 잠식시킬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성경의 교훈에 조화되는 신학의 동질화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만일 신학과 신앙의 동질성을 보유하고 있는 신학자들이라면 성경을 경외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의 자유로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개별 신학자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훈을 공동으로 확인하는 방편이다. 거기서 불가피하게 대두되는 것이 성경 해석의 문제이다. 누구나 자기의 성경 해석방법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가지는 한계이다. 그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성숙하게 극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학자들은 개별적 신념을 견지하되 다른 신실한 신학자들의 말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진리에 더욱 가깝게 접근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신학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진지한 신학적 토론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안타까운 점 가운데 하나는 신학자들이 다른 학자들의 주장에 관심을 두지 않고 건전한 비판마저 두려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갈급함 보다 자신의 고매한 삶을 위해 현실에 안주하려는 인간적 본능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런 안일한 자세는 결국 건전한 토론의 길을 막아버리게 되며, 학자들을 신학적 자기 아성에 가두어 버리는 역기능을 하게 된다.

 

(4) 신학의 지나친 세분화

우리 시대에는 신학이 학문적으로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서 가져야 할 통합성을 해치고 있다. 즉 부분적인 학문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함으로써 성경과 신학의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위험성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세분화된 특정한 학문 분야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은 전체적인 의미를 소홀히 여기는 역기능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배 안에 타고 있으면서 의자 아래 있는 자그만 나사못 하나만 들여다 보며 그에 대한 연구에 몰입해 있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되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승객들과 자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외부에서 얼마나 위험한 파도가 치고 있는지, 그리고 갑판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처럼 자기가 연구하는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간과한 채 학문적 자기 업적 쌓기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신학의 전공분야가 지나치게 세분화된 것은 결국 신학적 균형을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 정통성 있는 교회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전공 분야를 위한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살피며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탐구했던 것이다. 신학은 다른 학문 분야와 달라서 여러 학자들의 조각난 연구 결과물들을 모아 하나로 조립하는 학문이 아니다. 신학은 자동차 부품을 만들듯이 세부 전공자들의 연구 결과물을 모아 하나의 세련된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한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여러 기술자들이 만든 부품들을 모아 조합함으로써 하나의 자동차를 생산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학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현대 신학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신학 연구 방법이 일반 학문의 영향을 받아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내용을 다각화 함으로써 도리어 진정한 신학을 해체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런 영향이 고착되면, 신학을 통한 전체적인 교훈이 제시되지 않으므로,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며 목회하는 목사들은 제각기 어긋난 조각 맞추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 전공의 지나친 세분화에 대한 역기능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잘 인식하고 있다 할지라도 현대의 모든 신학자들은 그 풍조에 노출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분명히 함으로써 역기능을 최소화해야만 할 것이다.

 

(5) 진지한 학문의 자유 결여

신학을 위한 학문의 자유는 신학자들에게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학문의 자유란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학문의 자유란 신학자들에게 거침없는 모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성경을 해체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난자질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진정한 자유를 능멸하는 불신자들의 무례한 방종이다. 신학적 학문의 자유는 어떤 세속적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교회 가운데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심각한 위협과 억압이 있다 할지라도 신학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통해 성경의 교훈을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신학자들의 진정한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박탈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두려운 일이다.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교회법은 신학자들의 진정한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장로교 헌법에서 양심의 자유를 맨 앞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거기서 말하는 양심의 자유는 자기 욕망이나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한 진리의 깨달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한국교회의 신학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방종에 빠져 있다. 다수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를 드러내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오염된 신학 세계를 확립하는 오만한 방종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신학적 인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학문적 취향에 빠져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자들이 신학과 교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성도들 가운데 주어진 참된 신학의 자유를 통해 성경의 교훈을 좇은 영원한 진리가 풍성하게 표현되기를 소망한다.

 

(6) 사변적 신학의 고착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知的) 놀음이 되어서는 안된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교회당의 종탑에 얼마나 많은 천사가 올라갈 수 있느냐에 대한 불필요한 사변적 토론에 빠짐으로써 교회를 병들게 했다. 신학자들이 엉뚱한 문제를 내세워 거기에 관심을 가지게 함으로써 교회 가운데 존재해야 할 진정한 신학적 운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그와 유사한 일들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요구하시는 교회의 삶과 연관이 없는 신학은 사변적이라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이 학문 자체를 위한 목적으로 인해 다른 학자들의 서적을 뒤적이며 연구에 몰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교회를 위해 진리를 제시하는 학문이 아니라 개인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도구로서의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교회와 상관이 없는 것을 애써 연구함으로써 그에 연관지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리게 되면 신학은 사변화될 수 밖에 없다. 신학이 사변화 되면 진정한 신학은 사변 속에 매몰당하게 된다. 참된 신학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실천을 동반해야만 한다. 그것은 행동적인 실천이 아니라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고백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신학은 엉뚱한 것들을 교회 중심에 가져오게 하며, 그것은 고백과 실천을 밀어내고 사변화를 유도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한 진리 탐구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연구에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연구가 일반 목회자들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사변적 이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통한 진리 탐구가 아니라 다른 학자들의 선행된 연구 자체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다면 곤란하다. 도리어 모든 신학자들의 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끊임없는 건전한 비판(Criticism)이 동반되어야 한다. 나아가 일반 목회자들과 교회가 신학자들의 연구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연구가 교회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개인의 학문적 업적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7) 전통적 정통신학의 포기

한국 신학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신학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은 한국 교회 스스로 창출한 것이 아니다. 즉 한국 교회가 맘대로 한국적 신학을 만들었다가 적당한 시기에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구약시대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온전히 세워졌다. 그 교회가 역사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속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참된 신학은 이미 구약시대와 신약의 사도시대 때 부터 줄곧 확립되어 왔다. 교회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신학은 항상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사적 정통성 있는 신학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적 교회의 고백문서들을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있으며,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등 교회적 고백문서와 교육문서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우리는 그 고백 문서들이 역사적 교회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 사도 교회 시대 이후 세상에 노출된 채 존재해 온 지상의 교회를 인도하시며 간섭하는 과정에서 성경적 고백과 교육 내용이 담긴 문서들을 선물로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대소요리문답서를 교회적 교육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신앙고백 문서들과 교육문서들을 성경과 가장 잘 조화되는 문서들로 받아들인다. 적어도 교회법에 의한 형식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형식과 달리 실질적으로는 그 문서들을 고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고백과 실천은 항상 고백문서와 교육문서들을 근간으로 하여 확인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그 문서들이 역사적으로 객관성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를 지키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담긴 내용들을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신학자들이 입으로 나오는 그들의 형식적 고백과는 달리 그 문서들에 담긴 고백적 내용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있는 내용을 올바르게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그 내용들을 다시금 검증함으로써 교회 가운데 그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없다면 일반 목회자들의 그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것은 분명하며 일반 성도들은 그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속의 정통성 있는 교회들의 신앙고백문서와 교육문서들을 온전히 이해함으로써 전통적 정통신학을 확립해 갈 수 있도록 애써야만 한다.

 

(8) 실용주의 신학의 보편화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소위 번영신학이 번창하고 있다. 기독교의 덩치가 커지고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며 재정이 풍족해지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인 양 생각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질과 관계없는 외형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갈라놓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바는 다수의 신학자들이 그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런 것이 비성경적이라면 신학자들은 그 잘못된 사고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 역사속의 정통성 있는 교회의 신학을 통해 무엇이 잘못인지 마땅히 지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문제점을 올바르게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무언으로 동조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다수의 신학자들은 미래의 교회를 상속하며 그 중심에 서게 될 신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목회에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가? 멋들어지게 호감을 살 수 있도록 설교하는 방법을 가르치는가? 어떻게 하면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가르치는가? 단언하건데 그런 가르침들은 실용주의적 발상에 의한 것이다. 신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며 그 진리가 후배들에게 전수되어야 한다. 올바른 진리를 깨닫고 있다면 나머지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것이 신학적 원리이다. 이는 마치 자녀들에게 효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정교육이 되면 자연스럽게 효자가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효자가 아닌 상태에서 효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만큼 위험하고 가증스런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효성이 전혀 없는 불효자가 효도하는 형식과 방법을 익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실행한다면 그것은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여 부모와 이웃들을 속이는 위선 밖에 되지 않는다.

 

(9) 교권주의의 위험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는 어느 누구도 특별한 권력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행사할 수 없다. 그것은 개별적으로도 그렇지만 집단적 의미에서도 동일하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아는 바는 모든 능력의 원천은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험란한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들에게는 항상 어떤 유형의 힘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신학과 신앙이 원숙한 자들은 그 세속적 힘에 저항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교권은 항상 원리를 적용하기 보다 빠른 방법을 선택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기다릴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학을 교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교권주의자들은 자기의 종교적 행위가 옳다고 말해주는 학자들을 찾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올바른 말씀선포, 올바른 성례의 시행, 정당한 권징사역의 이행은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를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즉 그 요건들이 올바르게 잘 갖추어져 있으면 참된 교회이지만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거짓교회이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영향력이 있으며 훌륭한 일을 많이 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위의 요건들이 충족되지 있으면 이미 참된 교회가 아니다. 나아가 교인들 간에 사랑이 많고 선교를 열심히 하며 구제 사업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위의 요건들이 결여되었다면 그 교회는 거짓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종교사업이나 사회사업을 위한 종교 단체일 뿐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고백 속에 포함되어 있다.

 

교회가 만일 그런 잘못된 상황으로 기울어진다면 신학자들은 마땅히 그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힘이 없는 신학자들은 교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교권주의자들의 힘이 자신의 목숨을 유지해 주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나약한 신학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입을 다물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신학은 교권의 시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신학을 교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교회를 위한 도구인 신학이 개인의 교권 확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다. 참된 신학은 항상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진리를 위한 투쟁의 대열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10) 교회를 떠난 신학자들

한국의 신학자들 가운데 자신이 교회를 떠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을 지탱해 주는 소속 기관이 과연 어디인지 확인해 보면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한국의 신학교수들은 대개 자신이 세속정부에 속해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즉 교회에 속한 신학자가 아니라 세속 국가에 속한 신학자임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자들이 교회를 떠나 세속정부에 예속되었다는 점을 더욱 중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분별없이 스스로 세속 정부에 속해 있음을 당연시하는 동안 교회의 신학은 점차 죽어가고 있다. 신학자들이 세속국가와 교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 거기에서 배우는 신학생 마저 거기에 물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그것은 한국 교회의 현실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 스스로 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신학자들이 먼저 세속에 함몰됨으로써 모든 신학이 세속에 의존하는 처참한 형국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그런 형편 가운데서도 세상의 값어치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신앙적 몸부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학자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 말은 그들이 교회의 교수임을 본질적 의미로 생각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진정한 자부심을 회복해야만 함을 의미하고 있다.

 

(11) 신학자들의 그릇된 신학 독점화 양상

한국교회의 신학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학자들이 신학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숙한 모든 성도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신학적 이해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신학 교육을 담당하고 실질적인 연구에 임하는 성도는 신학자들이지만 그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학이 약화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일반 성도들이 신학에 대한 관심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신학은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며 일반 성도들은 그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풍조가 형성되게 한 책임은 신학자들과 일반 성도들 모두에게 있다. 신학자들은 일반 성도들이 신학적 이해를 해야 함을 교회를 통해 일깨워 줄 의무가 있었으나 그 일을 태만히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자들이 점차 신학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일반 성도들은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말씀에 무지해져 갔다.

 

이는 건강을 의사만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과 유사하다. 건강에 대한 연구와 진료는 의학자들과 의사들이 하지만 각 개인은 건강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의학자들과 의사들이 건강에 대한 문제를 독점하기 위해 건강 문제는 자기들이 책임질 것이므로 일반 시민들은 건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의학자들과 의사들이 자기 분야에서 신실한 자세로 연구와 진료에 임해야 하며, 일반 시민들이 건강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 역시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알고 그에 따라 대처하는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전반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하다. 신학자들은 올바른 신학 연구에 임해야 하며 목회자는 그것을 통해 성도들을 올바르게 일깨워 주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참된 신학적 이해를 굳건히 가지게 될 때 교회가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는 전반적인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일반 목회자들이 허약하게 되었으며 전체 교회가 병약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4. 결론: 신학자들의 각성이 요구되는 시대

 

21세기는 특별히 엄청난 가치 변화를 겪고 있는 시대이다. 예를 들어 어제까지 동성애는 범죄행위였지만 지금은 동성애를 범죄행위라 말하면 문제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 풍조는 교회 안에도 이미 깊숙히 들어와 있다. 유럽에서는 동성결혼을 한 목사 아닌 목사가 생겨나는가 하면 성전환 수술이 별것 아닌 듯이 인식되고 있다.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자들이 각성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정의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주님의 진리가 약화되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는 우리의 시대를 한탄할 수 있는 자세를 회복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일한 길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펼쳐놓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한 교회의 신학자여야 한다.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할 신학자들이 세속 국가에 속해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 부끄러움을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는 것 만큼 무지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다. 필자는 모든 신학자들이 지금 그곳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는 진정한 교회의 신학을 기대할 수 없으며 그런 터 위에서는 교회를 온전히 세워갈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일반 성도들 역시 그 대열에 참여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다수의 지도자들은 특별한 기구를 만들고 제도개선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본다. 또한 소문난 기도회를 열고 부정직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며 정의 회복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과연 그렇게 한다고 교회가 새로워질까? 과연 인간들이 나서서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개혁해 갈 수 있을까?

 

필자는 그에 대해 부정적이다. 결코 그렇게 해서 교회가 새로워 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들의 자기 열정에 의한 종교적인 방법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변화들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적인 변화일 뿐 거기에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 참된 교회의 회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 앞으로 돌아감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들의 지혜나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붙잡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들은 제도를 새롭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자 애쓴 성도들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제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설령 순수한 신앙적 노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인간적인 능력이나 힘의 논리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백처럼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온전해 질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을 비롯한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아이디어와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해야만 한다. 신학자들이 할 수 있는 자그만 일은 교회로 하여금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채근하는 일이다.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령을 떠난 모든 노력은 도리어 바벨탑을 쌓는 행위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을 기대하기 때문에 신학자들 간의 진지한 토론이 있어야 하며, 신학교에서 그런 진지한 모습을 보일 때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정신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진리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그 사상에 빠져있는 신학자들은 성경의 교훈마저 상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주님의 교회 가운데 참된 신학을 세우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신학적 이론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교회 가운데 이미 존재해 왔던 신학을 점검하고 확인함으로써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나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앙의 선배들의 아름다운 고백적 유산들이 남아 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는 그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많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