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
2014-11-13 22:44:27
구원에 대한 고전적 가르침은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고 그 구원은 영원한 보증이 되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와 구원에 대하여 과거적 입장에서는 구원은 내가 믿기로 작정한 과거에 이미 확보된 것이므로 지금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고전적 구원론이 가진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 전통적 구원론은 구원을 주로 과거형으로 이해하고 과거의 사실은 변하지 않으므로 이미 받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구원론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은 고전적 구원론이 가진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
고전적 구원론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고전적 구원론은 구원을 주고 과거형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은 구원을 과거형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가야할 과정이고 미래에 성취해야 할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구원 과정에서 탈락될 수 있고 따라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유동적인 상태에서 지금 구원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 된다. 둘째, 고전적 견해는 믿음의 전인격성 혹은 총체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인 삶속에서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완성에 대하서는 이렇게 불확실성이 존재하는데 과거에 믿었다면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되었으니 확신하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잘못되 근거 두 가지가 나타난다. 첫번째는 입으로만 하는 신앙고백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신앙 고백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두번째는 큰 능력을 행하고 무언가 많은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한 사람의 전인격적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이지 어떤 능력적 행동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극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이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설령 그것이 진정한 체험이었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현재 삶의 모습이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 믿음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구원을 보장해줄 수 없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도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고 열매 맺기전의 잠정적인 과정을 가지고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종말론적 구원론은 절대적 의미의 구원의 확신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없이 불안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믿음의 참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한 상당한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의 열매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열매맺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이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은 내가 믿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이미 확정된 것이라는 그런 확신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며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구원에 이른다는 확신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원의 확신은 조건적이고 동시에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산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믿음을 견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비로서 구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확신도 현재적으로는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과거적인 구원 확신이 아니라 앞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미래적 확신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성장과 더불어 점점 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