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
2014-11-06 15:14:58
바울이 믿음이니 은혜니 하는 말로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바울을 해석하지만 문제는 그 촛점이 정확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맥락이 맞지 않게 된다. 바울이 많이 사용한 믿음, 은혜라는 단어가 낱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똑 같지만 바울이 사용하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로마서 5장 2절에서 바울은 은혜에 믿음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은혜를 들어가서 서있는 공간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은혜라는 공간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공간은 삶의 양식,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그 공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 이것을 바울은 은혜의 통치라고 말한다. 죄가 통치하는 공간에서 그 통치의 결과가 죽음이었듯이 은혜가 통치하는 공간에서 그 통치의 결과는 영생이라고 말한다. 영생은 은혜가 통치한 결과인 것이다. 로마서 5장 15절은 죄가 통치하는 공간에서 은혜가 통치하는 공간으로 옮겨간 것이 하나님의 은사요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바울은 은헤를 통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능력이란 말을 은혜와 비슷하게 사용한다.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알아야 그 단어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은혜가 의를 통하여 왕노릇 한다(다스린다)고 말한다. 로마서 6장 14절도 죄의 지배와 은혜의 지배를 대조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은혜는 우리에게 그저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공간안으로 들어가 통치를 받는 통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주기도문과 산상보훈에서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라고 또 하나님께 예물을 올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역설적인 교훈이다. 용서받는 은혜가 아니라 용서하는 은혜를 가르친 것이다. 은혜라는 말로 빠지기 쉬운 위선을 경계한 것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도 마친가지다. 그 비유에서 종의 행실은 은혜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다. 은혜가 통치하지 않는다면 은혜가 아니다. 은혜가 통치하고 있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은혜는 통치하는 것이란 개념이다. 통치하지 않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부른다.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며 믿음으로 은혜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이란 죽은 자를 살리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이것이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란 단어의 용례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부활에 대한 교훈에서 은혜를 하나님의 능력과 비슷한 용례로 사용한다. 15장 10절을 보면 은혜라는 말과 능력이란 말이 거의 동일한 의미도 사용된다. 갈라디아서 2장 7절에서도 내게 주신 은혜는 곧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한다. 로마서 15장 19절에도 하나님의 표적과 능력을 은혜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역사로서 표적과 능력 나타남은 은혜가 통치한 결과라는 것이다.
은혜에 대한 오해가 문제이다.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섬뜩한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되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의미를 그 용례를 통해서 파악하여야 한다면 은혜의 지배는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고하며 심는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강조한다. 이사야 55장 11절도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다고 말한다. 복음서의 씨뿌리는 비유나 히브리서 6장 8절의 가시떨기와 엉겅퀴의 경고도 동일한 교훈을 가르친다.
복음서가 강조하는 것은 은혜의 지배는 우리 삶에 구체적인 결과를 나타내며 그 마지막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의 현실이 은혜가 지배하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 은혜의 지배는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학력, 외모, 재물, 지위와 같은 육체와 이생의 자랑들)을 이기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그냥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기초이고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통치는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은혜를 삶의 원리로 삼아 흘려 보내는 은혜의 유통이다. 뭃을 흘려 보내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흘려 보내야 흘러 들어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머무르지 않고 순환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바울이 말하는 은혜,. 믿음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삶의 목표는 은혜의 통치를 가시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은혜의 통치를 받는 삶이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대충 살 수 없는 삶이고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편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내적, 외적인 거짓, 불의, 죄악과 투쟁하는 삶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바울의 삶이었다. 고린도 전서 1장 10절에서 언급한 분쟁의 원인은 육체를 따라서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를 따라 부르시지 않는다.(26절) 오히려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신다.(27절) 이것은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역사이다(29절) 하나님은 절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자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한다. 그래야 서로 재고 경쟁하지 않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는 서로 판단하고 경쟁하는 공동체에 대하여 이 세상의 가치를 이기는 은혜의 지배를 가르친 권면이었다. 야고보서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구체적은 상황도 교회안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빈부, 학벌, 외모, 지위로 차별하는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안에도 판을 치는 상황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었다.
바울 복음에서 은혜란 무엇인가?
2014-11-12 00:58:44
바울 복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6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다고 말하는데 은혜를 행위의 반제로 이해하는 전통적 관점과 바울이 은혜란 말을 사용하는 용법은 다르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행위 없이"가 아니다. 의롭다하는 것은 당연히 죄의 용서를 포함하는 말인데 죄지은 자의 죄를 용서하면서 행위를 보고 용서하는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색하다. 바울이 "은혜로" 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 없이"가 아니라 '아무 조건이나 차별이 없이'란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이 은혜를 말하면서 율법을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몇가지 율법의 행위들(할례, 절기법, 음식법)을 가지고 유대인의 외면적 정체성에 집착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 어떤 인간적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인간적인 조건의 다름은 있을 수 있지만 그 다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차별인데 은혜는 차별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조건의 다름에 가치를 부여하고 경쟁하고 싸우는 세상속에 울리는 복음은 그런 세상의 가치를 무시한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조건도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을 부르심, 이것이 은혜로 부르신다는 의미이다. 1세기 사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만큼 큰 차별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반대한 율법의 일차적 의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는 외적인 율법행위들이었다. 하나님은 세상이 중시하는 외적인 가치들을 무력화하신다. 그래서 세상적인 가치를 못가진 사람들을 오히려 부르시는데 이는 그런 가치들이 무의미함을 입증한다. 그런 가치들은 생명을 주는 진정한 가치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공동체는 그런 가치를 부인하고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차별은 죽음에 이르는 행동이다. 세상의 거짓 가치를 부인하는 신자 공동체는 사회시스템에 동조하지 않는 반사회적 존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거짓 가치관에 저항하는 것이야 말로 은혜의 효과이다.
갈라디아서 5장 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껍데기 가치들의 지배로부터자유를 주셨다는 의미이다. 헛된 가치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2절에서 할례라는 헛된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런 헛된 가치로 부터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정말 할례를 중시한다면 할례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다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 정작 율법은 지키지 않는 자들임을 지적한 것이다. 세상의 헛된 가치에 지배를 받고 사는 삶은 결코 자유롭지 않은 삶이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재물이라는 거짓된 가치관에서 해방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한다. 세상의 가치로 부터 해방된 그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것이다. 경쟁하고 싸울 수 밖에 없는 세상적 가치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사랑을 할 수 없다. 세상 가치로 부터의 자유는 경쟁 시스템으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교회에 만연한 세속성은 교회가 이 세상의 가치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바알을 숭배하는 것이다. 바알의 세계관의 배후에는 풍요의 신학이 있으니 오늘날로 말하면 번영신학인 셈이다. 학벌, 돈이라는 세상의 가치에서 벗어나야 은혜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은혜의 공동체를 경험하기 힘들다. 자유를 얻어야 사랑으로 섬기는 은혜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은혜를 입음으로 자유를 얻은 자들이 누리는 사랑, 이것이 은혜 공동체를 이루는 동력이다.
교회의 회복은 하나님이 만물을 회복하는 구원 사역의 첫 걸음이다. 사랑이 교회 회복의 가시적 증거이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세상 가치를 전도하는 행위이다. 주인이 종을 섬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발 씻기를 거부한 베드로는 세상 가치를 고수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명하시고 새계명을 주시는데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은혜로 얻는 자유 그리고 이 자유에서 나오는 사랑 그리고 이 사랑으로 이루는 공동체는 이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흉내내지도 못하는 사랑의 공동체요 은혜의 공동체이다.
사실 은혜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나 탕자의 비유는 모두 은혜 개념이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우리의 싸움은 은혜의 공간을 넓혀가는 싸움이다. 은혜의 원리를 삶의 자리에 적용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사실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나 세상의 제도와 싸우기는 쉽지 않다. 우리를 세상의 가치관에서 해방하는 은헤는 또한 우리를 욕망에서 해방한다. 바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한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것으로 욕망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 누림은 거짓 가치관을 추구하는 욕망포기로 나타난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라는 공간, 은혜의 공동체, 은혜의 통치를 통해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