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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

메르시어 2023. 5. 7. 10:51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과 우리” -논문 발표회기사

2014-11-03 14:44:38


 

 2014년 2월 10일(월)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신반포중앙교회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과 우리”라는 주제로 한국성경신학회 제33차 정기논문발표회가 있었다. 이번 정기논문발표회에서는 김진수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구약학)가 “아브라함 카이퍼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박태현 박사(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실천신학)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소고”, 조무성 박사(고려대학교 교수, 공공행정학부)가 “카이퍼와 공적신학의 영향: 한국교회의 발전적 적용”, 이승구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조직신학)가 “카이퍼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하였다. 발표회에 앞서 김성봉 목사(신반포중앙교회)의 인도로 진행된 개회예배에서는 박형용 목사한국성경신학회 회장,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가 히브리서 12:1-3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박 목사는 설교를 통해 “우리를 얽매고 방해하는 것을 벗어버리면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갈 것”을 권면하였다. 이후 장세훈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구약학)의 사회로 발표회를 시작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김진수

 

김진수 박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의 사역』(Het werk van den Heiligen Geest) 1권에서 다루는 구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탐구하여 발표하였다. 김 박사는 카이퍼의 성령론을 삼위일체, 창조, 재창조, 성경과 관련하여 분석하였다. 카이퍼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향적 사역에서 창조, 구속, 성화는 성부, 성자, 성령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외향적 사역에서는 창조는 성부, 구속은 성자, 성화는 성령께 돌려진다. 카이퍼는 고린도전서 8:6, 로마서 11:36에 근거하여 성부는 모든 것의 근원, 성자는 만물을 조성하시는 건축자, 성령은 만물을 정해진 의도에 맞게 발전시키고 완전케 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카이퍼는 창조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와 함께 창조사역을 주관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별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와 재능을 주시는 분이다. 재창조에 있어서는 택자들을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이끌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게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 이전의 성령의 사역은 크게 교회를 위한 구원의 준비와 구약 성도의 중생과 성화로 나눌 수 있다. 아울러 카이퍼는 성경을 하나님과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성령께서 준비하여 교회에 주신 책으로 이해한다. 성령께서는 성경기록을 위해 개인, 가정, 국가를 택하셨으며 구원의 말씀에 이어 구원의 사실이 뒤따라오게 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내용, 배열, 구성, 단어 등에 있어 인간 저자들의 활동에 깊숙이 개입하셨다. 겉보기에 영감의 결과로 보기 어려운 요소들은 믿음의 훈련을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소고 / 박태현

 

박태현 교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신자들의 종교적 영역인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주장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든 불신자든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할 것을 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를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와 연결지었다. 일반은총론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는지 구체적인 원리와 지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카이퍼가 『일반은총론』(De Gemeene Gratie)을 저술한 이유는 첫째, 칼빈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한 일반은총 교리가 신학적 발전을 온전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 죄 많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이 신자를 능가하여 행하는 선행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카이퍼는 죄의 법이 다스리는 세상 가운데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힘을 깨뜨리는 은혜의 법이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일반은총론을 지배하는 사상은 ‘하나님 주권사상’이다.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죄를 억제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물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며 인간의 삶을 고통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넘치도록 무장시키고 내적으로 풍성하고 충만하게 발전시키신다. 카이퍼는 이러한 일반은총 교리가 창세기 9장의 노아언약에서 그 모습을 갖추었으며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에도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 카이퍼에 따르면 특별은총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제한되는 반면 일반은총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살아가는 영역에 확장된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이 둘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일반은총이 없이는 특별은총은 존재하지 않으며, 특별은총이 없이는 일반은총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카이퍼와 공적신학의 영향: 한국교회의 발전적 적용 / 조무성

 

  조무성 박사는 공적신학(Public Theology)을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교회의 안팎의 사람들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공동의 관심과 문제에 대해 서로 소통하고 학제적 접근을 추구하는 실천지향적 신학”으로 정의하고 이를 카이퍼의 삶과 사상과 연결지었다.  발표에 따르면 카이퍼는 자유주의자에서 개혁주의로 돌아선 사람으로서 기독교 정체성의 확립을 활동의 근거로 삼아 일반은총론을 바탕으로 신자와 불신자간 공통 관심사와 소통에 천착한 사람이다. 이런 카이퍼의 관심은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신학과 윤리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어 학제적 접근을 배아를 마련해 놓고 있다. 카이퍼 자신도 목사, 교육가, 언론가, 사회개혁자, 정치가 등 계속해서 문제와 이슈에 대하여 끊임없이 대안을 추구해 가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적신학을 위한 카이퍼 연구소’(Abraham Kuyper Institute for Public Theology)가 설립되고 꾸준히 학술대회를 열고 상을 수여하고 있다.  조 박사는 이러한 카이퍼의 삶과 사상을 한국교회에 적용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적용점을 제시하였다: 첫째, 자신의 철저한 개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삶, 둘째, 교회개혁을 위한 전인목회, 셋째, 문화개혁을 위한 샬롬커뮤니티의 형성, 넷째, 공적신학의 관점에서의 건강도시운동 전개, 다섯째,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로 말씀을 먹는 삶을 살 것. 특별히 샬롬커뮤니티와 건강도시는 공공행정학부 교수인 조 박사의 관심과 연구가 반영된 것으로 주거, 생태, 지역사회, 시민사회, 기본욕구, 문화, 의료 등 여러 구체적인 부분에서 적용하기 위해 제시하는 실천적 제안이다.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승구

 

  이승구 박사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통해 “모든 기독교적 활동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이 박사는 “카이퍼에 대해 언급할 때 스킬더와(Klass Schilder, 1890-1952)의 논쟁 등 화란의 복잡한 교회적 상황에서 나온 논쟁을 가지고 후대에 쉽사리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칼빈과 카이퍼는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생활을 열심 있고 바르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건전한 신앙 형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 박사는 카이퍼를 통해 일반은총을 강조하였지만, 그러면서도 특별히 신앙적 전제에 입각한 학문을 강조하였다. 이 박사는 오늘날 네덜란드의 자유대학교를 두고 “오늘날 과연 자유대학교의 모든 교수님들이 철저한 성경적 원리에 따라 성령님께 의존하면서 각 학문 분과를 연구하며 학문하고 있는가를 질문하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박사가 강조한 기독교적 활동의 기초는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이다. 정말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가를 점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박사는 이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중생의 필요성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음, 둘째, 십자가 구속의 절대적 필요성을 믿음, 셋째, 성경 영감의 무오성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절대성을 믿음, 넷째,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이룬 몸 된 교회의 지체 의식을 가짐, 다섯째,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구현하는 적극적 활동을 함.  이 박사는 기독교 학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생자의 학문적 작업으로서의 기독교 학문’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인정되고, 성경의 내용과 세계관에 정합성을 가지는 학문이 기독교 학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기독교 학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을 의존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특별히 이 박사는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오늘날 학문의 전제와 방법론을 비롯한 학문의 패러다임이 비기독교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조소와 비판에 대립하여 기독교적 학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박태현

2014-11-03 14:50:23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이 유명한 선언은 1880년 10월 20일 카이퍼가 암스테르담 새교회(De Nieuwe Kerk)에서 신설 자유대학교 개교연설에서 전한 메세지의 핵심이다. 

 

  이 선언은 그의 뼛속 깊이 뿌리 박힌 성경적 사상, 즉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이 세상 삶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교육 등에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유감없이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날은 아마도 카이퍼 인생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날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카이퍼 자신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추구해 왔던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삶의 전 영역에 증거하려는 이상(理想)의 구체적 실현이요 실질적인 도약의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날은 네덜란드 역사와 개혁주의 교회 역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날로 기록될 것이다. 판덴 베르흐(F. Vanden Berg)는 이 날이 “화란 칼빈주의자들에게 희년”이었으며, “화란기독 역사상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개교 연설이 보여준 영역주권 사상은 당시의 교회 안팎으로 도전해 오는 세력들에 저항하여 칼빈주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밖으로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으로 표출된 합리주의, 이신론, 자연주의, 그리고 유물론이 시대 사상을 휩쓸고 19세기 전체를 지배하여 한 마디로 인본주의의 거센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교회 안으로는 에라스무스를 승계하는 기독교 인문주의의 흐로닝언 학파, 개혁파 정통주의를 부정하는 드 라 쏘쎄이(D. Cha. De la Saussaye)와 훈닝(J. H. Gunning)이 주도하는 윤리신학파, 그리고 레이든 대학의 스홀턴(J. H. Scholten)을 중심으로 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이 성도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과 등을 지고 교회의 울타리 속에서만 안전을 추구하는 이원론에 빠진 “재세례파적 고립주의,” 혹은 분파주의적 경향이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카이퍼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는 개혁주의 정신에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뒤로 물러나 나라의 운명과 교회의 종말을 가만히 지켜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더 높은 기준에 따라 기존의 환경에 굴복했더라면, 어떻게 이 사역을 착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부드럽게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착수하는 일에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고백과 더불어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확실한 저항이 담겨있습니다. ... 우리는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 배경에 머무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앞장서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편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했고, 우리는 반드시 행동해야 했기에,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노선은 사람들의 호의나 적대감과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우리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규정됩니다.

 

하지만 자유대학교 설립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판또오레넨베르헌(J. J, van Toorenenbergen) 박사와 브론스펠트(A. W. Bronsveld) 박사는 자유대학교 설립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퍼는 특유의 필치와 헌법적, 역사적, 철학적 논리로 그들의 비난을 철저하게 논박하여, 그 이후론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동시에 실제적인 어려움으로서 학교운영을 위한 재정조달과 종합대학에 걸맞는 교수요원의 초빙,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다 할지라도 법적인 자격을 부여하는 공적 효력(effetus civilis)이 없는 대학교에 그 누가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와 그를 협력한 사람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왜 칼빈주의 대학 설립을 원하였을까? 당시 국립대학이었던 레이든(Leiden), 흐로닝언(Groningen), 우트레흐트(Utrecht) 대학은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 사상에 흠뻑 젖어 국가와 교회의 삶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회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전 영역에 무신론적 인본주의 세계관을 심는 전도자들이었다. 따라서 카이퍼는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 무장된 대학을 설립하여 세상과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판덴 베르흐(F. Vanden Berg)는 카이퍼가 원했던 대학의 모습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소개한다: 온전하고, 자유로운, 칼빈주의적 국가대학. 

 

카이퍼는 (1) 당시 종합대학처럼 5개 학부-신학, 법학, 의학, 자연과학, 교양학부-를 갖춘 온전한 대학, (2) 국가와 교회의 간섭을 배재하고 스스로 학교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유로운 대학, (3) 도르트(Dordrecht) 총회의 결정에 따른 ‘일치를 위한 3개의 고백서’, 즉 네덜란드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 도르트신조(1619)를 신학교육의 토대로 삼는 개혁주의적 대학, 그리고 (4) 마지막으로 장차 국가의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국가에 봉사하는 대학을 원했다. 브라트(J. D. Bratt)는 카이퍼에게 있어서 대학교 설립이 갖는 세 가지 중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일, (2) 전략적으로 사회와 문화를 성경적 기초 위에 재구성하는 일, (3) 사회적으로 일반 서민들의 자기 존중과 삶의 기회들을 높이는 일. 한 마디로 말하면, 카이퍼는 “교육의 개혁 없이는 교회도 세상도 바로 세울 수 없다”는 확고한 소신으로 불타 있었다.

 

‘자유대학교’라는 이름 역시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이 그 명칭에 잘 반영되어 있다. ‘자유대학교’의 자유란 국가의 간섭과 교회의 독단적 전횡과 지배를 받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대학을 의미한다. 네덜란드 고등교육법(1876)에서 나타난 것처럼, 국가가 신학을 종교학으로 바꾸는 국가적 간섭이나 갈리레오(Galileo)의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교회의 감독 이미지는 학문의 자발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환경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카이퍼의 영역주권 개념에서 ‘영역’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다양한 창조세계로서 국가, 교회, 문화, 학문, 예술 등의 일상적 사회 생활의 범주를 의미한다. 동시에 ‘영역’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카이퍼의 용어사용의 모호성이 드러나고 기독교적 세계관과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대결과 반제(Antithesis)를 보여준다.

 

카이퍼는 국가의 절대권위와 국민의 절대주권에 대항하여 “사회의 모든 주권은 궁극적으로 창조주의 절대 의지에 기초한다”고 확신하였다. 카이퍼의 영역주권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고 그 고백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생활 전반에 적극적인 참여와 행동을 요구하는 선언이었다. 단지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기관, 단체의 조직적인 참여인 동시에 단지 교회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예술과 학문 등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클랍베이크(J. Klapwijk)가 카이퍼를 ‘문화 해방의 챔피언’(a champion of the emancipation of culture)으로 명명한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카이퍼는 영역주권을 단지 이론으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몸소 실천했던 행동가요 실천가였다. 교육가로서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정치가로서 반혁명당을 이끌었으며, 네덜란드 수상(1902-1905)으로서 국가를 섬겼으며, 수십 년 동안 두 개의 신문(De Heraut, De Standaard) 편집장으로서 기독교인들에게 개혁주의 정신을 고취시켰고, 목사로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웠으며, 교단 분열과 통합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신학자로서 2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들을 남겼다.

 

Bratt가 솔직하게 고백하듯이 ‘영역주권’은 아마도 카이퍼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글인 동시에 가장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글이 확실하다. 카이퍼의 ‘영역주권’은 과연 타고난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는 상징적 언어들과 다양한 이미지들을 포함한 언어적 기교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환경이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19세기 말 유럽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건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글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카이퍼의 ‘영역주권’이 가장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까닭은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인본주의 세계관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기독교 신앙마저 부정하고 상대화시킨 시대에 오직 성경에 확고한 기초를 둘 뿐만 아니라 존 칼빈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는 성경적 사상을 담대하게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카이퍼의 하나님 영광과 주권을 높이려는 개혁주의 사상의 정수를 보여주는 ‘영역주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많은 학자들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을 보아온 필자는 두 번에 걸쳐 신학지남에 번역하여 기고하고자 한다. 카이퍼가 자신의 개교연설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마친 것처럼, 번역자 역시 카이퍼의 ‘영역주권’한글 번역이 칼빈주의 신학의 발전에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드린다. 

  

카이퍼는 신설 대학 자유대학교가 네덜란드 국가에서 감당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유대학교가 지닌 학문적 목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대학교가 지닌 개혁파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단 하나의 개념인 영역주권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카이퍼의 개교연설인 영역주권은 그의 문학적 필치와 다양한 수사적 표현들로 인해 번역이 쉽지 않고, 또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때 카이퍼의 의도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금번에는 카이퍼가 말하는 영역주권의 세 가지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국가적 의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세상의 위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핵심적으로 주권자 메시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주권자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 메시아가 구원의 진리냐 아니면 원초적 거짓이냐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최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인간에게 위임하였고 또 여전히 위임하고 있다면, 이런 주권의 위임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 주권이 나뉨이 없이 단 한 사람에게 위임되었는가? 라는 중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둘로 나뉘는데, 그것은 특별계시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따른다. 특별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할 수 있는 한 나뉘지 않으며, 또한 모든 영역을 관통한다고 주장한다. “할 수 있는 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까닭은 초자연적인 것, 자연과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각각의 영역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영역, 즉 사람들의 생활, 권리, 양심, 심지어 신앙조차 통제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결국 헤겔의 체계 속에서 국가가 현재적 신()’으로서 정교화된다.

 

그와 반대로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최상의 주권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나뉘어지지 않고, 또한 중단되지 않은 채 죄 없으신 인간-메시아에게 위임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메시아의 절대적 주권은 사람들의 삶을 각자 자신의 주권을 지닌 고유한 영역으로 나눔으로써 죄인들의 절대적 주권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도전하였다.

 

가시적인 물질적 삶과 그 배후의 비가시적 영적인 삶을 지닌 인간의 삶은 무한히 복잡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여 개인은 집단 가운데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가는 범위는 도덕적 영역, 가정의 영역, 사회적 삶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더 확대시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연의 범위, 삶의 범위, 사유의 범위, 양심의 범위, 그리고 신앙의 범위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영역들은 자신들의 톱니바퀴로 서로 맞물려 있기에 하나의 영역이 다른 인접한 영역을 침해하는 위험도 발생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국가의 특별한 권위 영역이 등장하여 다양한 영역들 사이를 조화롭게 만들고, 집단에 의해 억압받을 수 있는 개인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은 개인을 보호하고 가시적인 삶의 영역들에서 상호 정당한 관계를 규정하는 권세로서, 명령권과 강제력으로 이 모든 영역들 위에 탁월한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이 국가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른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국가와 상관 없이 하나님에게서 내려 온 것으로 국가에 의해 부여된 권위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인정된 권위다.

 

결국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자들과 인정하지 않는 자들 사이의 두 개의 신앙 고백이 상호 예리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자들은 모든 주권은 하나님 안에 기초하며, 이 주권은 절대적 의미에서 그리고 나뉘지 않은 채 인간 메시아에게 부여되었으며, 이 메시아 아래에서 국가와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들은 메시아에게서 파생된 고유한 영역 주권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특별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주권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의 주권 외에 다른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신앙고백은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갈라 놓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두 개의 반정립(反定立)으로서 다른 사람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영역주권은 국가의 주권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는데, 이 주권은 국가의 주권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창조 질서 속에 존재했었다. 하지만 한 번 등장했던 국가의 주권은 삶의 고유한 영역 주권을 무시하고 하나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이때 왕으로 오신 주권자 메시아는 가이사(Caesar)에게 저항하여 초월적, 믿음의 능력으로 고유영역의 주권을 다시 창조하셨다.

 

이것은 국가 주권에 대항한 네덜란드 역사에서 잘 드러나는데, 공화국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몰락, 군주주의의 등장 등의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다가, 단일 주권이 다른 주권들을 위협할 때 그 시대를 구원한 것은 세상의 다양한 학파나 정신이 아니라 주권자 메시아였다. 주권자 메시아의 부흥을 통해 도덕적 힘을 지닌 고유한 영역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는데, 지배가 아닌 섬김을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학교, 양심, 가정, 교육, 그리고 영적인 영역의 주권이 위협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하기 위한 지식을 길러내야 하는데, 이 같은 집중적인 지식은 오직 대학의 성격을 지닌 학교에서만 길러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대학교는 비록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에 부적합한 작은 배에 지나지 않지만, “왕이신 예수의 주권 아래 특허를 받아 모든 지식의 항구에 영역 주권의 깃발이 세워지기까지 항해해 나가야 한다.

 

2. 학문적 목적들

 

인간 삶 전체를 둘러싼 영역들 중의 영역인 국가는 지상에서 최상의 권력을 쥐고서 고상한 의미에서 모든 영역을 위하여 하나의 영역이 다른 영역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저지시키고 무산시킨다. 인간 삶의 영역들이 자유롭게 번성하느냐 아니면 국가의 압제 아래 신음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그 영역들 자체에 의존한다. , 각 영역이 지닌 도덕적 장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힘이 된다. 만일 죄로 인하여 도덕적 생명력 혹은 장력을 잃게 되면, 그 영역은 국가에 의해 축소되고 자유가 침해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주된 범인은 의무를 망각한 시민 자신으로서 국가에 의해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를 보존하도록 부여하신 저항의 수단들 가운데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학문이다. 학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내 주신 빛의 천사로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 인류를 위한 하나님을 숙고하며, 모든 시대를 포함한 인류의 삶을 파악하는 선명한 의식이다.

 

이 학문은 자기 영역의 주권자로서 국가의 보호나 교회의 감독 아래 그 성격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학문은 진리의 영역에서 삶을 형성하는데, 어떤 환경에서도 그 삶의 법칙이 위배되거나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학문에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스피노자는 이 학문의 영역주권이 침해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첫째, 교회는 자신의 수위성 혹은 우월성을 학문에 부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학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허용된 영역 주권을 주장하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문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오만의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학문이 지닌 정당한 영역을 존중해야 하는 반면, 학문은 국가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시녀가 된 학문은 도덕적인 것들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한 비천한 창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 국가의 간섭을 떠나 대학교에서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면 번성하고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일부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재정후원으로 설립되고 유지되는 자유대학교는 기부자들의 관대함과 수혜자들의 강박감에 의해 조금씩 진행하는데, 이것은 삶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기부자들의 재정 속에는 단순히 화폐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가 숨어있는데,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 수고의 땀방울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3. 개혁파 원리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고귀한 밑바탕으로서의 영역 주권 개혁파의 원리로서 자유대학교가 지향하는 원리이다. 굳이 개혁파라고 말하고 기독교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로마교적인 것이나 항변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네덜란드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개인이 아닌 교회 공동체의 합법적인 판단에 의해 도르트신조를 고백하는 개혁파라는 명칭으로 보다 더 순수한 성경적 원리를 추구한다.

 

개혁파의 원리는 성경의 요구와 칼빈의 전례를 따른 하나님의 주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영역 주권은 진실로 성경의 핵심과 개혁파 삶의 보고(寶庫)에서 나온 것으로, 성경의 유기적 신앙원리를 깊이 살펴보면 환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시민의 자유, 가정의 평화, 시민 공동체의 자율이 가장 잘 보증된 것은 칼빈 후예들의 영토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학문의 영역에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개혁파 정신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원리에서 살아가는 학문과는 중립성 협약을 맺어 동일한 대화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원리를 갖는 학문은 각자의 원리를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음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그리스 학문, 아랍의 학문, 스콜라적 학문, 그리고 중세 이후의 카톨릭 대학과 비카톨릭 대학은 각각 그 원리에 따라 구별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주체나 객체를 강조하는 경향에 따라 서로를 배제하는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고(思考)의 영역에서 다른 원리를 가진 사람과 협력이 불가능하다면, 삶의 영역에서 영역 주권은 더 더욱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원리는 역사적 사실, 즉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의 반대자들이 우리의 원리를 자기기만이라고 부를지라도,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기 때문에(29:7)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 사이를 구별하는 경계선은 객관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없고 주관적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따라서 학문적 원리의 출발점과 방향이 다른 자들과 결코 동거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학문은 자유롭지만 원리에서 분리되거나 떠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원리의 기초 위에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배내기 장식으로 삼아 학문의 전당을 확립하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에 대한 우리들의 소원은 단지 신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학과 법학, 자연과학부, 문학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학문에서 생각하는 주체인 동시에 생각하도록 만드는 객체로서 되돌아 온다. “아 우리의 사고 세계 가운데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들로부터 물샐틈없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외침에 응답하여 우리 앞에 놓인 힘겨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멸시와 모욕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촉하며 격려하시기에 우리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전진해야만했다. 작은 학교로서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기조차 부끄럽고, 재정과 학문적 인재가 부족하고 사람들의 호의조차 받지 못하지만, 자유대학교의 설립은 거룩한 개혁파 원리를 거듭 상기하며 모든 역경의 파도를 헤쳐 나왔다. 혹시라도 누구든지 우리의 힘이나 학문적 중요성을 마음껏 경멸한다 해도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그리고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칼빈주의적 신조가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청하는 단 한 가지는 우리를 감동시킨 열정만큼은 존경의 찬사를 바라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절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증거요 그리스도는 여러분 선조들이 경배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혹시 여러분이 믿는 신조에 따라 성경은 끝장났고 기독교는 정복을 당한 하나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독교가 여러분이 보기에도 역사적으로 수치스럽게 무너지고 불명예스럽게 쓰러지기엔 너무도 위압적이고, 너무도 장엄하며, 너무도 거룩한 현상이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골고다에서 메어 온 깃발이 과연 원수의 손아귀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저의 결론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결코라는 말에서 자유대학교는 태어난 것이다.

 

카이퍼는 이와 같이 자유대학교 설립의 주요한 원리인 영역 주권을 세 가지로 설명한 후에 개교기념식에 참여한 정부의 대표, 암스테르담 시장과 시의원, 국회의원들, 기독교연합회 운영자들, 언론계 대표자들, 이사회 위원들, 동료 교수들, 외국의 축하 사절단, 말씀의 봉사자인 목회자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와 협력을 요청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대학교 개교 선언에 앞서 매우 인상적인 기도를 올림으로써 마친다.

 

우리의 심장을 시험하시고, 오 또한 우리나라의 재판장이며 배움의 학교들을 판단하시는 심판자시여, 만일 이 기관이 언젠가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십자가 안에 있는 이 주권적인, 자유롭고 능한 은혜를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도하거나 언젠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이 기관의 벽들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면전에서 그것들을 파멸시키소서! 주여, 주 하나님이여, 우리의 모든 도움이 당신의 이름 안에, 오로지 당신의 이름 안에만 있게 하소서! 아멘

 

자유대학교 개교연설- 아브라합 카이퍼(번역: 박태현)

2014-11-03 15:35:14


 

  필자(박태현)는 지난 신학지남 2014년 봄호(318)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의의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그리고 이 영역주권이 선명하게 제시된 카이퍼의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1880)의 앞 부분을 한글로 번역하여 게재하였다금번 호에서는 개교연설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번역하여 게재함으로써 번역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국왕 폐하의 장관 각하! 

 

고귀한 신사, 이 도시의 시장, 시의원, 그리고 비서관 여러분! 

 

학식이 많으신 신사, 시립대학의 학장과 비서관 여러분! 

 

존경하는 신사, 국회의원 여러분! 

 

존경하는 신사, 그리고 형제 여러분, 지도자와 이사회 위원으로서 이 학교를 운영하거나, 설립자, 회원 

그리고 지역구 대표자로서 이 학교의 설립을 도우신 여러분! 

 

학식이 많으신 신사, 암스테르담의 두 대학의 교수 여러분! 

 

고귀하고 학식이 많으신 신사, 학문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역하는 박사 여러분! 

 

귀하고 학식이 많으신 신사, 말씀의 봉사자 여러분! 

 

고귀한 신사, 나라의 비기독교화를 막는데 우리와 동일한 목적을 지닌 연합회 운영위원 여러분! 

 

고귀한 신사, 다양한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여러분! 

 

존경하는 신사, 여론의 주간지 혹은 일간지 기관에서 사역하는 여러분!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이름이든 어떤 나라든 이 예식을 빛내기 위하여 여기 오시어 참석하신 여러분! 

 

매우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매우 바라마지 않는 청취자 숙녀 여러분! 

 

 이 학교기관을 운영하는 이사회는 저에게 고등교육을 위한 학교를 정부와 국민의 공공 생활영역에 소개하여 개교하도록 영예로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호의적인 경청과 정중한 판단을 너그러이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교수직 취임사를 전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학장직 이임사를 발표하는 것도 아니지만, 제가 맡은 임무가 그 성격상 과학적 탐구의 조용한 은신처에서 나와 울타리마다 쐐기풀이 쏘고 발걸음마다 가시들이 찌르는 공공(公共) 생활의 위험천만한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숙고한다면, 이러한 저의 요청의 심각성을 여러분 스스로 인식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사역을 하게 된 까닭은 메세나들(Maecenaten)처럼 추상적인 학문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즉, 이런 사실은 숨길 수 없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속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제넘은 시도라 말할 수 없는 이런 위험천만한 시도를 하게 된 것은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반드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국민과 우리 나라를 위한 더 숭고하고 더 거룩한 관심에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전적으로 천진난만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깊이 확신하는 바, 이 학교기관이 설립되기 전에 이미 좋고 나쁜 소문을 통해 온갖 방식으로 예견되었던 관심, 그리고 이제 이 기관의 개교함에 따른 관심, 이 두 가지 관심은 우리 개인의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네덜란드가 국가의 미래에 그 자취를 남길 수도 있는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는 일반 대중이 받은 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더 높은 기준에 따라 기존의 환경에 굴복했더라면, 어떻게 이 사역을 착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부드럽게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착수하는 일에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고백과 더불어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확실한 저항이 담겨있습니다. 비록 건방진 모습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른다 할지라도, 이러한 생각은 이미 당황스럽고 주저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불쾌감을 줄 수 있고,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서둘러 여러분에게 보증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와 대치한 과학의 권세와 영향력, 그리고 금권력을 바라보든, 수치심으로 우리 자신의 사소함과 무능력을 생각하든) 오만한 망상이 아니라, 단지 조용한 겸손이 확고한 우리 말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 배경에 머무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앞장서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편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했고, 우리는 반드시 행동해야 했기에,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노선은 사람들의 호의나 적대감과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우리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규정됩니다. 여러분은 제가 소개하는 학교가 네덜란드라는 정원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 왜 창 끝에 있는 자유의 모자를 흔드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도 개혁파 종교의 책을 주시하는지 듣고 싶어할 것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영역주권”이라는 단 하나의 개념을 통해, 우리 학교기관의 국가적 의미, 학문적 목적들, 그리고 개혁파적 성격의 특징을 보여주는 영역주권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로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I. 국가적 의미

 

그래서 제 연설의 첫 부분은 우리 기관의 국가적 의미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신사 여러분, 이 끔찍한 시대에 우리 나라 역시 위기를 겪고 있는데, 이 위기는 다른 모든 연관된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으며, 사유(思惟)하는 인류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위기입니다. 이제 모든 위기는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삶은 질병 같은 과정을 통해 젊음의 갱신이 예고되거나 죽음에 의한 파멸로 위협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묻는 바, 여기서 이 영향을 받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나라에 있어서 이 위기의 중요한 이슈는 무엇입니까? 투쟁이 진보인가 보수인가, 단면적인가 다면적인가, 이상인가 현실인가, 혹은 가난인가 부요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과거에 답변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누가 여전히 반복하겠습니까? 이것을 위한 이런 각각의 진단이 갖는 불충분, 불균형, 피상성은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 이슈가 마치 영적 영향력의 잘못된 사용 혹은 영적 영향력의 정화(淨化)에 해당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성직파”(clericaal) 자유파”(liberaal)가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선도적 예언자들이 먼저 파악한 이해, 즉 현존하는 세상의 위기 가운데에서 우리의 관심은 미묘한 차이나 관심, 주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 관한 이해가 중심에서부터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었을 때 결국 이 휘장은 모욕적으로 걷혔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했으며, 주권적 왕이라는 주장 때문에 골고다에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 주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가장 너그러운 나사렛 사람, 우리의 거룩한 영감의 고취자, 영감을 고취시키는 이상(理想), 완벽한 경건의 천재!”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칭송이 그 나사렛 사람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으로서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다름 아닌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그러므로 모든 왕들 가운데 주권자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은 그의 조용한 선언이자, 유리처럼 투명한, 신인(神人)적 의식의 선언이었습니다. 믿음의 용사가 아니라, “영예로운 순교자가 아니라, (Melek, rex), 유대인의 왕, 즉 주권을 지닌 자라는 글귀는 오만한 죄목으로서 왜 그가 죽어야만 했는지 십자가 기둥의 죄패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권에 대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자의 권세의 유무(有無)에 대해 처음 3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유하는 정신들과 지배적인 권세들, 관련된 나라들은 격렬하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의 왕은 모든 민족이 아멘이라고 말하는 구원하는 진리이거나, 혹은 모든 민족이 반대하는 원초적인 거짓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권의 문제로서, 이 문제는 일찍이 나사렛 사람의 피를 두고 논의했던 것처럼, 이제 또한 우리의 모든 정신적, 인간적, 국가적 존재의 세계를 다시 갈라 놓았습니다.

 

주권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제가 주권을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모든 저항을 쳐부수고 복수하기 위한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권세를 발휘하는 권위로 묘사하는데 동의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본래의 완전한 주권은 그 어떤 피조물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위엄과 일치해야 한다고 당신 안에 내재한 뿌리 깊은 민족의식이 말하지 않습니까? 만일 당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물의 기획자와 창조주, 조성자와 계획자로 믿는다면, 당신의 영혼 또한 반드시 그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권자로 선언해야만 합니다. 만일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바- 이 최상의 주권자가 자신의 권위를 인간에게 위임하였고 여전히 위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사실상 지상의 가시적 사물들 가운데서는 결코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만나지 못하겠지만, 인간의 한 직분에서 드러나는 주권적 권위는 언제나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직분 가운데 놓여있다는 사실로부터 매우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어떻게 이런 위임이 이루어지는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 하나님의 주권이 나뉘지 않은 채 단 한 사람에게 위임되었는가? 아니면 지상의 주권자라 불리는 자가 단지 제한된 영역, 즉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주권자로 있는 다른 영역들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 하나의 영역에서만 복종을 강요하는 권세를 갖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당신이 계시의 영역 안에 서 있느냐 아니면 밖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특별 계시에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 자들은 옛날부터 이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나뉘지 않으며, 또한 모든 영역을 관통한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왜냐하면 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범위 밖에 있으며,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으며,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 것에 대해서는, “영역주권과 상관없이 긍정적입니다. 국가권력은 무제한적으로 명령하고, 사람들의 생활, 그들의 권리, 그들의 양심, 심지어 그들의 신앙조차 통제합니다. 당시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 결과, 연합된 힘이 더 강력하다(vis unita fortior)는 것을 통해, 단 하나의 무제한적 국가가 신()들의 나뉘어진 힘보다 더 위압적이고, 더 위엄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이사(Caesar)로 구체화된 국가는 결국 그 자신이 신()이 되었습니다. ()이었던 국가는 자기 외에 그 어떤 다른 국가들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열정을 품었습니다. 예배로서의 제국주의(Caesarisme)를 지닌 성인 아우구스투스(Divus Augustus)! 사유하는 의식에 있어서 매우 죄악된 개념은 18세기가 지나서야 현재적 신()”(gegenwartigen Gott)으로서의 국가라는 헤겔(Hegel)의 체계 속에서 정교화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여호와께서는 메시아적 예언의 해석들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외치셨습니다: “이 주권은 할 수 있는 한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나뉘어지지 않고 중단되지 않은 채 위임되었다!” 그리고 이 인간-메시아는 하늘의 권세, 자연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등장하였으며, 모든 민족에 대한 권세를 주장하고, 모든 민족 가운데, 양심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도 권세를 가지고 등장하였습니다. 심지어 그가 순종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어머니와 자녀 사이의 관계조차 물러서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에 대한 절대적 주권이 한 사람의 손에 놓여졌습니다. 왕국들 중에 한 왕국이 아니라, 유일한(het) 절대 왕국입니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18:3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 “모든 원수들이 네게 복종할 것이요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다![cf. 14:11].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주권인데, 이것은 일찍이 선지자가 공포했으며, 나사렛 예수가 주장했고, 사역의 초기에 기적을 행하여 보여주었으며, 그의 사도들에 의해 묘사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신들의 권위에 의지하여 나뉘어지지 않은 채 위임된 것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혹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다시 환원되도록 취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완벽한 조화는 오로지 주권이 메시아에게서 만유 가운데 만유”[고전15:28]가 되실 하나님 자신에게로 되돌아 갈 때 획기적으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기 영광스런 자유의 개념을 보십시오! 죄 없으신 메시아의 절대적 주권은 동시에 지상의 죄 있는 사람의 모든 절대적 주권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도전합니다! 그리고 이 주권은 삶을 각자 자신의 주권을 갖는 고유한 영역으로 나눔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 삶, 즉 전면에 나타나는 가시적인 물질적 삶과 배후에 있는 비가시적인 영적인 삶을 지닌 우리의 인간적 삶은 단순하거나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복잡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개인은 오로지 단체로 존재하고 그 단체 안에서만 전체가 드러날 수 있도록 복잡하게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이 하나의 거대한 기계의 부분들을 자신의 용수철로 자신의 차축을 돌리는 톱니바퀴들, 혹은 각자가 자신의 긴장된 생기로 충만한 영역들이라고 명명합시다. 하늘의 수 많은 별자리들처럼, 삶 가운데 온갖 다양한 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이름이나 모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주변 영역은 중심점인 고유한 원리에서 시작된 일정한 반경에 의해 그려집니다. 즉 사도적 훈계인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고전15:23]. 우리가 도덕적 세계,” “학문적 세계,” “상업적 세계,” “예술적 세계를 말하듯, 우리는 더 정확하게 각자 고유한 범위를 지닌 도덕적 영역,” 가정의 영역,” 사회적 삶의 영역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범주 안에서 고유한 주권자를 지닌 자신만의 범위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주권자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물질에 대해 능력을 행사하는 자연의 범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또한 개인적인, 가정적인, 학문적인, 사회적인, 그리고 교회적인 삶의 범위도 있는데, 이것들은 자신의 삶의 법칙에 복종하고 모두 고유한 통치권 아래 존재합니다. 또 그 어떤 법칙도 지배할 수 없고 오직 논리(logica)만이 지배할 수 있는 사유의 범위, 거룩하신 분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주권적 명령을 할 수 없는 양심의 범위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로지 개인 자신만이 주권자로서 신앙을 통해 자신의 가장 본질적 존재를 헌신하는 신앙의 범위가 있습니다.

 

이 모든 영역들은 이제 자신들의 톱니바퀴로 서로 맞물려있으며, 정확하게 이런 영역들의 서로 밀치고 당기는상호 작용을 통해 풍부하고 다면적이고 다양한 인간의 삶이 생성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 가운데 하나의 영역이 다른 인접한 영역을 침해하는 위험도 역시 발생합니다. 하나의 톱니가 덜커덕거리게 만들고, 톱니가 하나 둘 연이어 다른 톱니를 비틀어 망가트려 전체적인 작동을 멈추게 합니다. 이런 연유로 국가의 권위 가운데 특별한 권위 영역이 등장해야 할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이 권위는 이런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삶을 위한 것으로, 다양한 영역들이 가시적인 건전한 상호작용에 따라 물러나도록 만들고, 공의의 경계선 안에 머물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 권위는 개인의 삶이 집단에 의해 억압받을 수 있으므로, 그 영역의 통제에 대해 그 개인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주권자는 성경에 의해 핵심적으로 표현되듯이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한다”(28:4). 왜냐하면 공의가 없이는 스스로 넘어지고 파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의 주권은 개인을 보호하고 가시적인 삶의 영역들에서 상호 정당한 관계를 규정하는 권세로서, 명령권과 강제력으로 이 모든 영역들 위에 탁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이 주권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는 국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국가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인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영역들의 상호 관계를 올바르게 규정함에 있어서 국가의 주권은 자신의 뜻이나 선택을 행동지침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국가는 이런 영역들의 존재 목적과 성격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뜻에 매여있습니다.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듯이, 국가는 반드시 그렇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삶을 억압하거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의 운동이 각각의 영역 안에서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국가의 고상한 주권자를 손짓하여 부르는 이상(理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개의 신앙고백이 상호 예리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영역으로부터 사는 자(그리고 그 결과 이 영역 안에서 사는 자)가 스스로 고백하는 바, 모든 주권은 하나님 안에 기초하며 따라서 단지 그분으로부터만 흘러나올 수 있으며, 이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나뉘지 않은 채 인간-메시아에게 부여되었고, 주권자로 기름부음 받은 이러한 인자(人子) 아래에서 국가와 더불어 각각의 다른 삶의 범위 역시 그 분으로부터 파생된 수위권(首位權), 즉 고유한 영역의 주권을 인정받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안전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그와 같은 특별한 계시 영역의 실재를 감지하지 못하고 결국 부정하는 자들은 주권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의 주권 외에 그 어떤 다른 주권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숭고한 주권의 개념이 지속적으로 더 순수하게 최상의 국가 속에 구체화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그들은 국가가 무()능력에서 허용하거나 온전한 능력에서 부여한 수 많은 권한보다 더 관대한 자유를 그 외의 다른 삶의 영역들에게 부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선언들을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들을, 체계들(stelsels)이 아니라 삶의 확신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들을 갈라놓은 틈은 개념들을 다르게 가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들을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가 사역하시며, 주권자로서 그분은 여러분이 여기 성단소(聖檀所)의 비석들 위에 앉아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와 반대로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이것을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골치 아픈 자기 기만(欺瞞), 재난을 초래하는 교리, 어리석은 망상으로서 의문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상호 정면으로 모순되는 고백들은 소심하고 냉담하여 일련의 광범한 혼합 체계들 배후로, 이것은 많게 저것은 적게 혼합되거나 혹은 각각이 동일한 정도로 혼합된 체계들 배후로 거듭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들은 이러한 잿빛에 그 기본 색조를 제공한 원초적 신앙고백들로서 위기의 시대에 항상 분노 가운데 투구의 면갑(面甲)을 열어 다시금 결투를 신청하는 이런 원칙 없는 경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이 고백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갈라 놓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두 개의 반정립(反定立)으로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지럽히고,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역주권 국가의 주권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합니다. 이것은 이미 메시아적 주권이 선포되기 이전에 나타난 세상 역사의 짧은 경과입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의 왕자는 이 영역 주권을 자신의 방패로 보호했지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주권은 옛날부터 존재했습니다. 이 주권은 창조의 질서 속에, 우리 인간 삶의 계획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주권이 생겨나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등장한 국가의 주권은 삶의 영역들의 고유한 주권을 자신의 끊임없는 대적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영역들 자체 내에서 자신의 삶의 법칙을 어김으로, 즉 죄로 인하여 자신의 저항 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역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어떻게 끈기 있는 투쟁, 때때로 영웅적 투쟁 후에 고유한 영역의 자유가 소멸되고 국가권력이 제국주의(Caesarisme)가 되어 확고한 지반을 차지했는지 치욕적인 광경을 보여줍니다. 독이 든 잔을 마신 소크라테스(Socrates), 가이사(Caesar)의 심장을 칼로 찌른 브루투스(Brutus),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과 섞었던 빌라도(Pilatus), 이 모든 일들은 종국에 제국주의의 철장 아래 무너진 자유로운 유기적 삶에 대한 거칠고 영웅적인 경련들입니다. 고대(古代)가 서둘러 종국에 이르렀을 때,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민족들도 없었고, 더 이상 영역들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단 하나의 국가의 주권적 뜻 아래 하나의 영역, 하나의 세계 제국이 되었습니다. 치욕에 빠진 인류는 오로지 쾌락을 잃기까지 술에 취해야만 진정으로 그 치욕스런 상처를 잊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영역들은 이제 자신들의 톱니바퀴로 서로 맞물려있으며, 정확하게 이런 영역들의 서로 밀치고 당기는상호 작용을 통해 풍부하고 다면적이고 다양한 인간의 삶이 생성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 가운데 하나의 영역이 다른 인접한 영역을 침해하는 위험도 역시 발생합니다. 하나의 톱니가 덜커덕거리게 만들고, 톱니가 하나 둘 연이어 다른 톱니를 비틀어 망가트려 전체적인 작동을 멈추게 합니다. 이런 연유로 국가의 권위 가운데 특별한 권위 영역이 등장해야 할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이 권위는 이런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삶을 위한 것으로, 다양한 영역들이 가시적인 건전한 상호작용에 따라 물러나도록 만들고, 공의의 경계선 안에 머물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 권위는 개인의 삶이 집단에 의해 억압받을 수 있으므로, 그 영역의 통제에 대해 그 개인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주권자는 성경에 의해 핵심적으로 표현되듯이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한다”(28:4). 왜냐하면 공의가 없이는 스스로 넘어지고 파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의 주권은 개인을 보호하고 가시적인 삶의 영역들에서 상호 정당한 관계를 규정하는 권세로서, 명령권과 강제력으로 이 모든 영역들 위에 탁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이 주권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는 국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국가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인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영역들의 상호 관계를 올바르게 규정함에 있어서 국가의 주권은 자신의 뜻이나 선택을 행동지침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국가는 이런 영역들의 존재 목적과 성격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뜻에 매여있습니다.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듯이, 국가는 반드시 그렇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삶을 억압하거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의 운동이 각각의 영역 안에서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국가의 고상한 주권자를 손짓하여 부르는 이상(理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개의 신앙고백이 상호 예리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영역으로부터 사는 자(그리고 그 결과 이 영역 안에서 사는 자)가 스스로 고백하는 바, 모든 주권은 하나님 안에 기초하며 따라서 단지 그분으로부터만 흘러나올 수 있으며, 이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나뉘지 않은 채 인간-메시아에게 부여되었고, 주권자로 기름부음 받은 이러한 인자(人子) 아래에서 국가와 더불어 각각의 다른 삶의 범위 역시 그 분으로부터 파생된 수위권(首位權), 즉 고유한 영역의 주권을 인정받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안전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그와 같은 특별한 계시 영역의 실재를 감지하지 못하고 결국 부정하는 자들은 주권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의 주권 외에 그 어떤 다른 주권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숭고한 주권의 개념이 지속적으로 더 순수하게 최상의 국가 속에 구체화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그들은 국가가 무()능력에서 허용하거나 온전한 능력에서 부여한 수 많은 권한보다 더 관대한 자유를 그 외의 다른 삶의 영역들에게 부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선언들을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들을, 체계들(stelsels)이 아니라 삶의 확신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들을 갈라놓은 틈은 개념들을 다르게 가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들을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가 사역하시며, 주권자로서 그분은 여러분이 여기 성단소(聖檀所)의 비석들 위에 앉아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와 반대로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이것을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골치 아픈 자기 기만(欺瞞), 재난을 초래하는 교리, 어리석은 망상으로서 의문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상호 정면으로 모순되는 고백들은 소심하고 냉담하여 일련의 광범한 혼합 체계들 배후로, 이것은 많게 저것은 적게 혼합되거나 혹은 각각이 동일한 정도로 혼합된 체계들 배후로 거듭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들은 이러한 잿빛에 그 기본 색조를 제공한 원초적 신앙고백들로서 위기의 시대에 항상 분노 가운데 투구의 면갑(面甲)을 열어 다시금 결투를 신청하는 이런 원칙 없는 경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이 고백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갈라 놓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두 개의 반정립(反定立)으로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지럽히고,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역주권 국가의 주권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합니다. 이것은 이미 메시아적 주권이 선포되기 이전에 나타난 세상 역사의 짧은 경과입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의 왕자는 이 영역 주권을 자신의 방패로 보호했지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주권은 옛날부터 존재했습니다. 이 주권은 창조의 질서 속에, 우리 인간 삶의 계획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주권이 생겨나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등장한 국가의 주권은 삶의 영역들의 고유한 주권을 자신의 끊임없는 대적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영역들 자체 내에서 자신의 삶의 법칙을 어김으로, 즉 죄로 인하여 자신의 저항 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역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어떻게 끈기 있는 투쟁, 때때로 영웅적 투쟁 후에 고유한 영역의 자유가 소멸되고 국가권력이 제국주의(Caesarisme)가 되어 확고한 지반을 차지했는지 치욕적인 광경을 보여줍니다. 독이 든 잔을 마신 소크라테스(Socrates), 가이사(Caesar)의 심장을 칼로 찌른 브루투스(Brutus),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과 섞었던 빌라도(Pilatus), 이 모든 일들은 종국에 제국주의의 철장 아래 무너진 자유로운 유기적 삶에 대한 거칠고 영웅적인 경련들입니다. 고대(古代)가 서둘러 종국에 이르렀을 때,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민족들도 없었고, 더 이상 영역들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단 하나의 국가의 주권적 뜻 아래 하나의 영역, 하나의 세계 제국이 되었습니다. 치욕에 빠진 인류는 오로지 쾌락을 잃기까지 술에 취해야만 진정으로 그 치욕스런 상처를 잊을 수 있습니다.

 

 II. 학문적 목적들

 

영역 주권은 이제부터 또한 우리의 학문적 목적들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 역시 실제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메마른 학문이 아니라, 확고한 원리, 심오한 통찰력, 선명한 판단이며, 한 마디로 보다 강한 힘으로 우리 인간 삶 가운데 그리고 인간 삶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력으로서의 거룩한 사고의 힘입니다.

 

모든 국가 권력은 자유를 불신의 눈으로 멸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한 삶의 영역들은 국가의 영역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간이 공간을 제한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가 그들의 경계선을 법으로 정하지 않는다면, 가시적으로 하나의 영역이 다른 영역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오로지 광범하게 우리 인간 삶 전체를 둘러싸는 영역들 중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고상한 의미에서(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위하여) 자신의 팔을 강력하게 만들고, 이제 이 강력한 팔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여 더 넓은 지경을 차지하려는 모든 야심을 저지하고 무산시키려 시도합니다.

 

 

이제도 다시금 그러합니다. 단지 시대의 표적들을 살펴보십시오. 심지어 몸센(Mommsen)조차 자신이 묘사했던 용감한 가이사(Caesar)의 모습 속에서 가이사가 제시했던 제국주의 노선으로의 회귀를 우리 시대의 정치적 지혜를 위한 표준으로서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에게 있어서 독일의 수상이 자유를 사랑하는 인물입니까? [프랑스의] 스당(Sedan)에서 이 수상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멸시를 받았던 사람이 자유를 사랑하는 인물입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것인가 폭력을 사랑하는 것인가? 국민회의가 프랑스 수도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스당(Sedan)의 그 사람을 대체시킨 것에 대한 당신의 인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덕적 활력의 쇠퇴로 자신의 자유를 굽혀야 했던 비겁하고 힘없는 나라들에 대한 징계의 수단과 치료약처럼 반드시 그래야 했습니다. 국가는 이제 다시 지상에서 최상의 권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주권자에게 정의를 행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국가보다 더 큰 지상의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박한 권력욕에서든, 공공의 유익을 위한 고상한 염려에서든, 모든 국가는 본성상 통널들의 신축성이 허용하는 한 그 통널들이 물에 뜨도록 쇠줄로 튼튼하게 묶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삶의 영역들이 자유 가운데 번성하느냐 혹은 국가의 압제 아래 신음하느냐 하는 것은 그 영역들 자체에 의존합니다. 그 영역들이 도덕적 장력(張力)을 갖고 있다면, 밀려들어갈 수 없으며, 위축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종의 근성이 노예의 족쇄에 매이게 되면, 심지어 불평할 권리마저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고통이 숨어 있습니다. 자유가 국가권력에 의해 각 영역의 경계선에서 위협을 받듯이 죄로 인해 각각의 영역 내부에서도 최소한 동일한 정도로 위협을 받습니다.

 

 

만일 통널들을 쇠줄로 묶어 띄우기를 원한다면, 그 통널들 몸통 안에 불을 붙이면, 몸통 내부의 불은 그 통널들을 망치로 두들기는 것보다 더 수축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불꽃이 타오르는 정열의 불길은 각각의 삶의 영역 중심에서 끓어 오르고 연기를 내뿜습니다. 이 불경하고 사악한 불은 도덕적 생명력을 침식시키고, 각 영역에서 활력을 약화시키며, 마지막으로 가장 단단한 통널들을 구부러트립니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모든 성공적인 공격에 있어서 국가는 단지 공범자일 뿐입니다. 주된 범인은 의무를 망각한 시민자신으로, 죄와 감각적 쾌락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근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하였습니다.

 

 

국가의 중심부가 건강하고, 자신의 영역들 가운데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가는 민족 가운데 그 어떤 국가도 정의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습니다. 혹은 그 민족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도덕적 저항으로 거기에 반대합니다. 징계가 떠나가고 번영이 사그라들고 죄가 뻔뻔스러워질 때 비로소 이론은 약해진 것을 구부릴 수 있고,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낡은 것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께서 현대철학이 말하듯 원자들로부터 동력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억압을 통해 이런 무기력한 삶의 영역들 속에 반복적으로 활력을 부으시지 않았더라면, 마지막 고유한 영역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졌을 것이며, 자유에 대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그 묘비에 그러므로 [자유가] 덧없이 지나갔다”(sic transit)라는 글귀 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상한 민족들에게 그들의 자유를 보존하도록 부여한 저항의 수단들 가운데 또한 학문이 존재하는데, 이 학문은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성령의 해석자들 가운데 다소의 사람은 학문적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의 자유를 묵상적 요한도 실천적 야곱도 아니라, 바울적 정신적 보물로부터 취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학문이 자유를 배신할 수 있고 한 번 이상 배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학문의 거룩한 사명 때문이 아니라 그 거룩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배신했던 것입니다. 학문의 진정한 모습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학문을 빛의 천사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미치광이, 바보, 술주정뱅이에게서 그의 인간적 존엄을 강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선명한 의식의 부재가 아니겠습니까?

 

 

단지 자신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 밖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선명한 의식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참된 학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그리고 우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해 그분을 숙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포함하는 인류에 대한 존재의식과 삶의 의식입니다! 존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의 의식 속에 반영된 것을 우리의 이성 가운데 요약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조치입니다. 지혜를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신적인 흔적입니다.

 

 

진실로, 지혜와 지식의 능력은 심지어 멀리까지 미쳐 사물들의 경로는 주로 실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실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개념들이 대수롭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이 개념들은 여론을 형성합니다. 이 견해는 정의의 관념을 형성하고, 이 관념에 따라 정신적 삶의 경향은 녹거나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원리들에 대한 영향을 염두에 두는 자는 감정에 머물러 표류할 수 없습니다. 그 어느 것도 환상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종교적] 고백을 가졌다 할지라도 단지 중간까지 밖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가 또한 사유세계에서 힘을 얻었을 때, 그리고 그가 자신을 내적으로 몰아가는 충동, “우리 안에 있는 신”(Deus in nobis)을 자신이 감지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이 아는 것으로 옮길 수 있을 때, 비로소 대중을 장악하게 됩니다.

 

제가 확고하게 견지하는 바, 이 학문은 여전히 자기 영역의 주권자이며, 국가의 보호나 교회의 감독 하에서 그 성격이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학문은 진리가 주권자인 자신의 삶의 영역을 형성하고,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 삶의 법칙이 위배되거나 침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침해하는 행위는 단지 학문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내면의 있는 거울과 같고, 그 거울 속에 이미지들은 세 개의 세계들로부터 반영됩니다:

 

우리 주변의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의 존재 세계로부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들의 세계로부터. 이제 이성이 요구하는 것은 (1) 각각의 세계는 자신들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 그 이미지들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 혹은 , 즉 관찰 그리고 지각(知覺). (2) 반영된 이미지들을 순수한 눈으로 수용하는 것, 혹은 , 즉 우리가 이해하기까지 그 이미지들을 보는 것. (3) 따라서 수용한 것을 조화롭게 요약하는 것, 혹은 그노시스, 즉 이렇게 본 것을 그 연관 속에서 필연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통찰하는 것. 그러므로 사색(思索, bespiegeling)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의 숙고(熟考, afspiegeling)입니다.

 

지혜롭게 만드는 학문. 삶을 위하여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Spinoza)는 이 학문의 영역 주권을 붙들었고,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잣대에 따라 경탄함으로 스피노자의 인격을 높게 평가하듯이 에라스무스(Erasmus)의 겁 많은 인격을 낮게 평가합니다. 스피노자의 [감각] 기관(organ)과 지각이 불완전하였고 따라서 그의 결론은 거짓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았던 것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것처럼, 그는 학문의 영역 주권의 침해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참된 개혁파 신자는 이 사실을 비난하지 않고, 흔들리고 확고하지 못한 것보다 훨씬 탁월한 것으로 여깁니다.

 

스피노자가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았던 여러 사람들은 흔들리고 확고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원칙 없는 타협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결코 자신의 수위성을 학문에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학문으로부터 손상을 입게 되는 매우 본질적인 위험을 벗어나기 위하여 교회 자신은 오히려 학문이 시녀가 되지 않은 채 자신에게 허용된 영역 주권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과 더불어 사람들이 마귀의 교만에 빠지고 학문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오만함에 미혹되는 사단적 위험이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째 높은 뾰족탑은 결코 바로 옆에 놓인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위험 없이 단번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 국가의 폭정에 관하여 잠시 후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사실은 여기 학문의 폭정에도 적용됩니다. 학문의 폭정은 교회가 먼저 영적으로 가라앉지 않고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시금 영적 각성을 통해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징계했던 학문을 다시 올바른 경계선 안으로 되돌아 가게 만듭니다.

 

전적으로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거의 동일한 것이 국가에 대해 언급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똑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여전히 학문의 영역을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학교의 모습으로 가시적인 유기체를 형성하는 순간, 자신의 정당한 영역을 규정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단지 이 국가의 권세가 해제되는 것은, 이 권세가 경계를 넘어 학문의 영토로 진입할 때 공손히 자신의 신발을 벗고 그 영역에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주권을 내려 놓을 때입니다. 마치 [황제를 위한] 지벨리네(Ghibellijnen) [교황을 위한] 구엘프(Welfen)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프랑스의 관료정치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악용하며, 독일의 반응이 괴팅겐(Gottingen)의 치욕 가운데 조성하기를 추구했던 것처럼, 국가의 시녀로서의 학문은 도덕적 영향에 대한 모든 설득력 있는 주장을 상실한 창녀화된 자기 비하입니다.

 

하지만 비록 국가가 우리 권위의 영역들처럼 더 고상한 품격으로 고무된다 할지라도, 비록 우리 나라에서와 같이 학문이 매우 교만하여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할지라도, 만일 학문이 대학교 생활에서 다시금 자신의 뿌리에서 싹이 돋고 자신의 삶 속으로 성장하여 국가의 보호를 벗어난다면, 학문은 우리의 영토에서 번성하고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들 한 가운데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의 학교와 예루살렘에 지혜의 학교가 자유롭게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에 고대 철학자들의 학교들이 자유롭게 등장했고, 그들을 모방한 것들이 로마에 등장했습니다. 그와 같이 자유롭게 초기 기독교 학자들의 학교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볼로냐(Bologna)와 파리의 고대의 대학교들이 자유롭게 등장했습니다. 이것들은 국가라는 하나의 틀 속에 지식을 쏟아 붓기 위한 국가 체제의 형태들이 아니었습니다. 학문은 생활 가운데 등장하여 그 삶 속에서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대학교는 이런 자유로운 형태 가운데 종교개혁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지난 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형태의 대학이 기관으로서 국가에 부속되었을 때, 이 자유로운 체제는 정부의 한 분과속에 절묘하게 소속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개인적인 독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건들의 압력에 의해, 민족들의 무기력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갑자기 국가로 하여금 대학 세계에서 그 손을 떼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히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중들은 학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으며, 지상의 부자들은 관대함이 거의 없고, 졸업생들에겐 위험을 무릅쓸 의지력이 거의 없습니다. 현재로선 당분간 국가가 반드시 지원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장하는바, 우리의 노력이 단지 해방을 향한 길로 나아간다면, 학문은 영역 주권을 다시금 자신의 이상(理想)으로 붙들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학교가 이런 더 좋은 방향으로 작은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 비과학적입니까? 국립대학에서 수 많은 반대들이 공평의 저울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돈이란 돈을 주는 자에게 권세를 부여하고 그 돈을 받는 자에 대해 권세를 만든다는 사실은 여러 번 반복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음악을 제외한) 예술은 황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유를 결코 지속적으로 고양시킬 수 없습니다.

 

국가의 기금으로 또르벡커(Thorbecke), 스홀턴(Scholten) 혹은 옵조우머(Opzoomer)와 같은 인물의 일회성 임명이 국가의 운명과 학문의 진로에 미쳤던 영향을 누가 측정할 수 있습니까? 가장 결정적인 고등 학문들을 위해 국가로 하여금 유력한 선택을 하도록 지도할 수 있는 영적 기준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사실상 개신교 신학부이자 반드시 그렇게 지속되어야 할 신학부에 유대인과 로마 카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강제로 기여금을 지불하도록 명령한다면, 정의의 개념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한 어떤 것이 그 속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일 국가법이 우리 자신의 기관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 나라의 주권이, 방금 들었던 것처럼, 정의의 영역에서 우리의 자유로운, 부담 없는 기관을 포함한다면, 국민 자체에 의해 지지되는 대학 기관 안에 학문뿐 아니라 국민의 삶을 위한 아름다운 예언이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여기 사람들이 30년 가까이 야간학교라고 얕잡아보았던 단체가 있는데, 오늘날 이 단체는 학문적 목적을 위해 그 힘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국가의 일부 무지한 출신의 가장 존경 받지 못하는 자들이 쟁기와 반죽그릇을 뒤로 하고 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재정을 모금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어디에선가 사람들은 위로부터 오는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그 지식을 국민에게 전달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학문이 번성하도록 쾌락을 절제하는 일부 국민 가운데 더 나은 어떤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식을 유기적 삶과 연결시키는 문제에 대한 더 실제적인 해결책이 존재합니까?

 

이러한 국민의 돈으로 살아가는 학자들이 백성과 함께 성장해야 하지 않으며, 메마르고 추상적인 것에 대해 혐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도, 주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 아닙니까? 돈과 거리를 두는 것이 도덕적 능력을 형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 소중한 기관을 통해 우리 국민에게 유익을 끼치는 도덕적 자산을 누가 측정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인격의 결핍에 대해 불평하지만, 그와 같이 경각심을 지닌 시민들의 자유로운 주도권 외에 다른 무엇을 통해 인격이 형성될 수 있습니까? 어디에선가 대학의 수레바퀴는 수혜자들의 강박감과 기부자들의 관대함으로 인해 조금씩 굴러가는데, 우리는 이것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life)이며, 바로 이 투쟁 속에서 가장 영광스런 헌신의 힘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정 속에는 측량 가능한 금속의 가치와는 다른 더 높은 가치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황금 속에는 기도가 함께 하고, 사랑이 함께 하고,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함께 합니다.

 

 

III. 개혁파 원리

 

그러므로 우리는 영역 주권이 어떻게 우리의 기관이 태어나게 된 열망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영역 주권이 장차 융성하게 될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고귀한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이 숨김없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단지 우리의 논쟁적 주장을 호소하는 일만 남아 있는데,  영역 주권이 우리의 원리,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개혁파 원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명칭을 언급함에 있어서 나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해를 지체없이 잘라내고, 우리 편에서의 개혁파를 참된 순수 기독교와 다른 어떤 것 혹은 조금 모자란 것을 의미하는 모든 추측을 내던져 버립니다. 상인이 순수한 무게를, 금화 주조자가 순도 높은 금을, 은세공사가 품질보증서를, 성경이 순전한 나드(nardus)를 말하고, 어떤 신문이 [네덜란드의 한 지역] 스파르너(Spaarne) 자신에게 참으로 의로운”(de Oprechte)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처럼, “순수한 기독교, “순도 높은 기독교, “순전한 기독교, “참된 기독교의 탁월성을 발휘하려면, 우리 역시 품질보증서를 지닌 기독교에 대해 그릇되지 않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이상한 용어들과 결별하고 언어습관과 역사적 요청에 따라 차라리 개혁파를 언급합니다. 이로써 모방한 것과 가짜, 그리고 잘 자라지 못한 것을 기독교로부터 예리하게,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별하게 됩니다. 단지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교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항변파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현대인도 기독교적 명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한 자들에게 영광이 비치고, 그들이 비기독교화된 학교 정문 위에 기독교적이라는 거짓된 깃발을 매달던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 반드시 무슨 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언어 혼란은 결코 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한 영적 영역에서도 영역 주권이 적용되므로, 개인이 원리들의 이름을 짓거나 이 원리들을 정의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런 권리는 단지 권위를 지닌 기관(organ), 즉 이 영역에서 역사적 삶을 지니 기관에만 부여됩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 없었고, 우리의 원리를 임의적으로 고백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지녔던 개혁파의 명칭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우리가 판단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합법적으로 판단한 것을 의미한다. 즉 다시금 용감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도르트신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루터파 형제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얕잡아 보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보기에 더 순수한 것을 덜 순수한 것과 바꾸도록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며, 무너진 개혁파 신전을 순수한 개혁파 스타일에 따라 다시 세우도록 우리에게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할 뿐입니다.

 

나는 이 연설에서 그것을 추구하고, 따라서 성경의 요구와 칼빈의 전례를 따라 하나님의 주권을 전면에 내세울 것을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이 주권만이 삶의 뿌리까지 자극하고, 인간에 대한 모든 두려움, 사단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역 주권이 진실로 성경의 핵심과 개혁파 삶의 보고(寶庫)에서 나온 것인지 묻는다면, 저는 그에게 요청하기를, 제일 먼저 성경의 유기적 신앙원리의 깊이를 측량하고, 더 나아가 다윗의 대관식을 위한 헤브론 족장들의 법을 주의하며, 아합의 폭정에 대한 엘리야의 저항, 예루살렘의 경찰 규정에 대해 양보하지 않은 제자들의 거부를 유의하고,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과 가이사에게 속한 것에 대한 동전담화를 그들 주님의 입술로부터 들으라는 것입니다.

 

 

개혁파 생활에서, 여러분은 칼빈의 하급관료”(magistratus inferiors)를 알지 못합니까? 영역 주권이 전적으로 장로교 교회정치의 기초가 아닙니까? 거의 모든 개혁파 국가들이 동맹국가의 형태로 기울지 않았습니까? 시민의 자유는 바로 개혁파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풍성하게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가정의 평화, 지방분산, 그리고 시민 공동체의 자율은심지어 오늘날 여전히 칼빈의 후손들(issus de Calvin)의 영토에서 가장 잘 보증되었다는 사실이 부인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고유한 학문적 영역에서 우리 자신의 원리인 주권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혁파 정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원리에서 살아가는 학문과의 중립성 협약을 맺어 동일한 대학의 식탁에 앉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비기독교 정부 안에도 높으신 하나님과 그의 정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심지어 이방 폭군들의 경우에도 칼빈이 경의를 표했던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경건한 특성은 기껏해야 지붕이나 창문도 없는 벽 하나가 세워진 기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여러분이 더 정확한 모습을 원한다면, 뾰족탑, 따라서 편종연주와 시계와 풍향계, 요컨대 탑이 세워진 이유인 이 모든 것이 없다면 건설된 탑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부가 다름 아닌 연단이 구비된 강의실, 더 나아가 박물관과 실험실을 제공하고, 모든 학자들이 등단할 수 있는 권리와 모든 영역이 학자들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거대한 단일 국립 아카데미에 대한 다른 제안이 더 수용될 법합니다. 모든 선로들이 한 점에 모이는 학문적 중앙역과 같되,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방향과 자신의 고유한 통치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 주권을 갖는 모든 원리에 대한 고귀한 권리는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역사는 학문이 자신의 원리를 갖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취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때 그리스의 학문, 아랍의 학문, 스콜라적 학문이 존재했었는데, 비록 우리가 이것들에 친숙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고유한 영역에서 지속되었고 거대한 사상가들에 의해 숙고되었습니다. 그 사상가들은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들의 그림자 안에 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세 이후에 학문은 로마 카톨릭 대학교들과 비로마 카톨릭 대학교들에게 쉽게 구별되는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칸트와 더불어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한 일련의 철학자들은 주체나 객체를 강조함에 따라 상호간에 서로를 배제하는 학파들을 형성했습니다. 일원론자(monist)와 원자론자(atomist)를 여러분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한 원리의 힘이 그렇게도 강력하고 지배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듯이 헤겔의 사고력은 신학과 법학과 물리학, 진실로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고유한 체계를 산출하였고, 따라서 헤겔 학파에서 형법(刑法)을 그리고 헤르바르트(Herbart) 학파에서 민법(民法)을 배우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정의의 감각을 혼동시킬 것입니다.

 

똑같은 옷을 함께 협력하여 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사고(思考) 원리의 차이에서 드러난다면, 삶의 원리에 있어서 영역 주권의 필연성은 얼마나 더 강력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피히테(Fichte)의 실례가 보여주듯이, 단지 사고의 원리만이 개입하는 한, 처음에 거부했던 것을 되돌아가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삶의 원리에 있어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사실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적 원리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뿌리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등장은 세상 한가운데, 세상 역사의 중심점에서, 또한 세상 사고(思考)의 중심에서 하나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이 살아있는 사람, 그리스도에게 질문하고, 단지 그의 권위있는 해석자들에게 질문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배웁니까? 나사렛의 랍비가 자신의 지식을 세상 현자들의 지식과 결합했다고 선언했습니까? 예루살렘(Jeruzalem)이나 아테네(Athene)에서의 대학원 수업이 당신을 점차 자연스럽게 그의 고상한 지식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사도들이 당신에게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이 랍비는 자신의 보석 같은 지혜가 지혜자들과 명철한 자들에게 감추어졌고, 오히려 젖먹이 아기들에게 계시되었다고 당신에게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배운 학문과 이제 자신에게 심겨진 삶의 원리 사이에 아주 넓고, 깊고,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을 그은 후, 반복해서 한 원리의 사고 영역을 어리석음으로, 다른 원리의 삶의 영역을 지혜로 불러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신적 자의식이 전적으로 다른 뿌리에서 싹이 돋는다고 확실하게 선언한 것을 우리가 단 하나의 뿌리에서 함께 기를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습니까? 신사 여러분, 우리는 그런 모험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한 원리를 갖고 시작하고, 따라서 어떤 고유한 것이 자신의 원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고려해서, 우리의 원리와 우리 반대자들의 원리를 위해 우리는 사고 영역 전체에서 고유한 주권을 견지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자신들의 원리로부터, 자신들의 원리에 적합한 방식을 따라,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우리를 유혹하지 못하는 학문의 집을 세우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우리의 원리로부터, 우리 원리에 상응하는 방식을 따라 고유한 줄기가 자라 그 가지와 잎과 꽃이 자신의 고갱이의 수액(樹液)으로부터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반대자들이 자기기만이라고 선언한 것을 참된 것으로 발견했다고 다시금 주장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29:7]는 잠언기자의 복창(復唱)을 그만 둘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어리석은 자들로 여겨지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그가 우리보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우리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로 확립된 것을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따라서 우리 영혼의 의식이 붙잡은 것을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객관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없고 주관적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 바로 여기에서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은 지적 확신에 근거하고 우리의 지식은 단지 신앙에 기초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신 자신의 자아로부터 출발하든지, 혹은 당신의 이상(理想)을 확실히 붙들든지 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즉각적으로 자신 앞에 확립된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사고를 위한 출발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사고의 출발점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어떤 것을 학문적으로 탐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지은 건물 옆에 바깥 뜰, 창문들을 통한 전망, 우체부처럼 생각의 교류를 유지시키는 신문 외에 공통된 것 없이 건물을 짓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론 인정하는 바, 사고의 투쟁이란 거듭해서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다름 아닌 출발점과 방향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출발점과 방향이 정해져서, 당신이 바르게 당신의 선을 긋는다면, 당신의 선의 모양이 그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며, 당신을 향해 제기된 모든 논쟁은 설득력을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기적 사상가는 정당하게 원자론적 허식(虛飾)을 조롱하는데, 마치 성장하는 각 사람이 반드시 모든 체계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모든 고백들을 탐구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할 수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위해 이용 가능한 시간도 사고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어리석은 사람만이 자기 자신이 그것을 했거나 다른 사람이 했다고 혼자 공상할 수 있거나, 혹은 지식이 없는 자스스로 다른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언급된 모든 체계들의 견본은 단지 피상성을 키워주고, 사고하는 것을 파괴하며, 성품을 부패시키고 두뇌를 그와 같은 실질적인 작업에 부적당하게 만듭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당신의 건축 지식을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집들을 대충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잘 지어진 집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주의깊게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문은 원리에서 분리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메마른 땅 위에 있는 물고기의 자유이며, 화분의 흙에서 뽑힌 꽃의 자유일 것입니다. 혹은 자신의 시골 마을에서 떠나 갑자기 낯선 거리나 해변에 놓여진 드렌트(Drent) 일용근로자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고한 가정 질서 가운데 모든 가정 생활이 가장 번성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우리 자신의 집에서 확고한 생활 규칙을 엄격하게 그리고 혹독하게 지켜 나갑니다. 결국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온건한 자유는 다름 아닌 떠나고자 하는 자에게는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은 당신 집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며, 또한 각 사람이 자신의 원리의 기초 위에 자유롭게 자신의 고유한 방식대로,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배내기 장식으로 삼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우리의 이 개별적 학문의 발전의 소원이 단지 신학만 아니라, 또한 모든 학문을 위한 것인지도 질문할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기독교 의학 기독교 논리학을 멸시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미소를 참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대에 대한 우리의 답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시가 마치 일그러졌다가 다시 본래 모습을 회복한 것처럼, 우리가 이 계시를 우리 노력의 출발점으로 고백하여, 단지 신학자로서 이 원천으로부터 이끌어내되, 더 나아가 의사와 판사, 그리고 언어학자로서는 이 수맥(水脈)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작은 방으로 칸칸이 나누어져 독립된 전문지식에 걸맞은 학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사람들은 의과(醫科)를 말합니까? 의학이 위생상 도움을 주기 원하는 것은 병든 포유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사람을 도덕적 존재요, 더 고상한 운명을 지닌 영혼과 육체요,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침묵할 것인지 알려줄 것인지, 해산하는 여인에게 마취를 추천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예방접종을 강요할 것인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것인지, 성미가 급한 청년에게 자기절제의 의무를 말할 것인지 방종에 내버려 둘 것인지, 말투스(Malthus)와 함께 어머니의 수태 능력을 저주할 것인지 성경과 더불어 축복할 것인지, 혹은 여러분이 정신병 환자를 심리적으로 지도할 것인지 신체적으로 마취시킬 것인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화장(火葬)을 좋게 말할 것인지, 생체해부를 무조건 허용할 것인지, 가장 끔찍스런 모든 의학적 검사 수단을 통해 권위를 업신여기고 인간 존엄성을 손상시킴으로써 사회에서 매독의 확산을 막을 것인지 말입니다.

 

법학(法學)에 대해 무엇을 말할까요? 사람을 발전하는 자연의 산물로 보느냐 선고 받은 죄인으로 보느냐, 법 자체를 기능적으로 발전된 자연적 기관으로 보느냐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내려온, 하나님 말씀에 매인 보석으로 보느냐에 따라 형법은 다른 목적을 취하고, 국제법은 다른 지침을 선택하지 않습니까? 이미 학문과 상관 없이 기독교적 양심이 지배적인 정치 경제학, 유행하는 상업 관습들, 그리고 약육강식의 사회적 관계들을 반대할 때, 그리고 시민 생활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역 주권을 통해 지방분권으로의 복귀를 촉구할 때, 그리고 우리의 헌법에서 심지어 3 1로 독립된 기독교 학교들이 등장했을 때, 이런 모순된 원리들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단 하나의 법학의 강단을 언급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 자연과학부가 엄격하게 측정과 측량에 한정된다면, 원리라는 쐐기가 최소한 그 대문을 뚫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합니까? 어떤 자연과학자가 가설 없이 실험합니까? 측정기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면서, 자신이 보는 것을 주관적 렌즈를 통해 보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동그라미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언제나 주관적 견해를 따라 점으로 그리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인쇄된 종이와 인쇄하는데 소비된 잉크 방울 가격을 계산하는 자가 당신이 출판한 책, 당신의 소책자, 당신의 노래모음집을 고상한 의미에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자수품의 가치가 사용된 명주실과 캔버스 가격으로 매겨질 수 있습니까? 더 좋게 표현하자면,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의 황홀한 회화(繪畵)처럼 모든 자연과학자의 눈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진실로 이 장엄한 예술 작품은 그림을 둘러싼 황금 액자, 그림 밑 캔버스, 그리고 그림에 사용된 물감에 의해 평가될 것입니다!

 

제가 문학에 대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글 읽기를 배우는 것과 단어들의 어형 변화는 메시아에 대한 찬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더 나아가 여러분에게 헬라스(Hellas) 예술 궁전을 열거나 로마의 권력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면, 제가 그리스도의 영을 추방하기 위해 민족들의 영()의 복귀를 부르거나, 아니면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 아래 두는 일은 인간적 평가와 신적 평가 모두에 따라 중요하지 않습니까?

 

셈족 언어의 연구는 제가 이스라엘을 절대적 계시의 유일한 민족으로 보는가, 아니면 기껏해야 천재적 경건을 지닌 백성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까? 철학이 건너편에서 이상적 존재를 추구하든 혹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성육화된 이상으로 고백하든 철학은 여전히 동일한 것입니까? 세계 역사가 십자가를 소크라테스(Socrates)의 독이 든 잔과 동일시하든 모든 역사의 중심점으로 보든 상관없이 세계 역사는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까? 더 이상 언급할 것도 없이, 우리 조국의 역사가 프라인(Fruin)이나 나이엔스(Nuyens), 혹은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 -, 그가 여전히 살아있었더라면! -에 의해 그 영웅적 아름다움 가운데 펼쳐졌던 것처럼, 청년들의 가슴에 똑같은 불을 지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달리 될 수 있겠습니까? 신사 여러분? 타락한 죄인 혹은 발전하는 자연존재의 이중적 모습을 지닌 인간은 모든 학과,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연구자에게 생각하는 주체로서 혹은 생각하도록 만드는 객체로서 돌아옵니다.

 

, 우리의 사고 세계가운데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들로부터 물샐틈없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만 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외침을 들었으며, 오로지 이 외침에 응답하여 우리의 힘에 버거운 이 사역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이 비극적 무능을 한탄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자신들의 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자신들의 영광스런 원리에 비례하는 힘으로 그 원리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한숨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은 부끄러운 자기비하 가운데,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목자들이 돌보며, 선지자들이 영감을 주도록 기도하기를 다시 배웠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바,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와 같이 멸시와 모욕 아래 짓밟히도록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우리 영혼의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므로 반드시 그의 이름으로 다시 건설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작은 힘을 보거나, 상대방의 막강한 힘을 보거나, 그러한 앞뒤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시도를 보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불은 우리의 뼈 속에서 계속 타올랐습니다. 우리보다 강하신 분은 우리를 재촉하며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형제들 중 일부는 아직 우리의 건물을 지을 단계가 아니라고 충고하면서 인본주의와 더불어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무언의 수치를 일으키는 매우 고통스런 원인이었으나, 단지 내적인 욕구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그런 사람들의 망설임은 우리의 삶의 원리의 미래에 대한 더욱 심각한 위협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작은 학교는 태어났고,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운 대학의 이름으로 등장했습니다. 재정이 빈약하고, 학문적 인적 자원이 매우 미약하며, 사람들의 호의를 받기는커녕 많은 지원이 끊겼습니다. 이제 이 학교의 가는 길이 어떠하며, 그 생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 학교의 미래와 연관된 수천 가지의 질문들이 이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여러분의 의심과 불안 속에 파고들 수 없다니! 단지 우리의 거룩한 원리를 거듭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삼켰던 모든 파도가 지난 후 우리는 다시 용감하게 피곤한 머리를 물 위로 들었습니다. 만일 이 일이 야곱의 전능자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과장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학교의 설립을 감행하는 것은 거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 학자들의 세계, 한 세기 전체, 엄청난 매혹의 세기에 거슬러 진입하여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의식(自意識)이 허용하는 한, 우리의 사람들, 우리의 힘, 그리고 우리의 학문적 중요성을 자유로이 경멸하십시오.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칼빈주의적 신조(credo)는 당신이 그렇게 하는데 전적인 권한을 부여합니다. 저는 단지 이 한 가지만을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비록 당신이 우리의 가장 지독한 대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감동시킨 열정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찬사를 거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금 먼지를 털어낸 고백은 일찍이 짓밟힌 나라의 영혼의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는 성경은 절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일찍이 여러분 자신의 세대의 슬픈 자들을 위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기관에서 그 이름을 존경하는 그리스도, 그는 여러분 자신의 선조들의 영감자(Bezieler), 택함받은 자, 경배받는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서재에서 기록되고 시련의 용광로에서 메아리쳤던 것에 따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신조(credo)에 따라 성경이란 본질적으로 끝장이 났고 기독교란 정복을 당한 하나의 입장이라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저는 여전히 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독교가 여러분이 보기에도 역사적으로 수치스럽게 무너지고 불명예스럽게 쓰러지기엔 너무도 위압적이고, 너무도 장엄하며, 너무도 거룩한 현상이 아니었습니까? 혹은 노블레스 오빌리주(Noblesse oblige)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골고다(Golgotha)에서 메어 온 깃발이, 가장 극심한 시련이 아직 남아있는 한, 단 하나의 화살이 아직 화살통에 남아있는 한, 그리고 골고다를 통해 왕위에 오르신 분의 경호원이 얼마나 적든 상관 없이 이 상속된 나라에 아직 살아있는 한, 과연 원수의 손아귀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신사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 그리고 이것으로 저는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우리 영혼 속에 울려 펴졌습니다. “결코라는 말에서 이 기관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코라는 말에 의지하여, 저는 모든 애국자의 심장이 더 높은 원리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서 응답의 메아리를 요청하며, 그 응답이 아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이 예식을 마치기 전에, 이 대강당에 함께 모인 다양한 그룹들에게 드릴 말씀이 아직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 허락하신다면, 먼저 왕을 보필하는 장관, 각하에게 친히 참석해 주신 영광에 대해 정중하게 감사드리고, 이 나라 정부의 너그러운 은혜 가운데 개교된 기관을 겸손히 추천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76년에 우리의 존경하는 국왕께서 그의 법에 이미 48년에 승인된, 고등 교육의 자유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쓰셨습니다. 국왕께서, 그리고 각하께서 만족하게 여기셔서 이미 4년 후에 그 법이 필요 없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국민들은 이 자유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 법을 변호했던 국왕 폐하의 장관께서 1876 3 11일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암스테르담(Amsterdam)이 자신의 시립대학을 위해 공적 효력을 지닌(cum effetu civili)’ 박사학위 수여권을 획득한다면, 다른 도시들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문제가 반드시 제기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동일한 권리를 허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저에게 허락하신다면, 당신께 대한 저의 존경을 기도함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면, 이 말로 표현된 것보다 더욱 공명정대하게 당신께서 왕실 자문위원들 가운데 지도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 도시의 고귀한 시장, 시의원, 그리고 비서관 여러분, 당신들께도 저의 존경을 표합니다. 특히 이 도시의 수장(首長)이신 당신! 시장으로서의 전직 교수를 환영하는 것은 가장 무모한 것을 감히 바라지 않는 고등교육 기관 개교자에게 매우 드문 특권입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사서 당신의 선임자에게 주어졌던 옛 팔라스 아테네(Pallas Athene) 옆에 이제 미네르바(Minerva)가 값없이 돈 없이 한 어린 딸을 얻게 된 것을, 우리가 당신을 기꺼이 그렇게 부르듯이 시민의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스런 암스테르담을 위해 환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암스테르담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연스레 이렇게 역사적인 기관을 위한 가장 적합한 도시였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일상적 운영이 더 나아가 이미 여기서도 등장하고, 아주 놀랍게 보여주었던 우리의 성향을 부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도시의 대학 교수, 학장, 그리고 비서관! 옛날부터 문학계(respublicalitterarum)에서 서열을 가리는 투쟁, 학과들 안에서가 아니라 학교들 사이에서의 서열투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작고 어린 학교의 학장으로서 어떻게 제가 여러분에게 더 오래된 학교의 탁월한 지도자로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 대학교를 부르는 외침이 수 년 전에 이미 여러분의 교수회의실에서도 울려퍼졌던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우리의 몰(Moll)이 언젠가 동일한 암스테르담에서 시립대학과 나란히 우리가 선택한 기초 위에 설립되리라고 일찍이 추측했었습니까? 그리고 질투를 일으키지 않고 설립된다고? ,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작습니다. 여러분의 의도가 더 지역적이면 지역적일수록, 우리의 의도는 조국 전체에까지 더욱 확장되는 것입니다. 고전적으로 형성된 것의 영광이 우리가 바라는 이해를 보존하고, 또한 다양한 원리에서 비롯된 삶에 있어서도, 진리의 의미에 대한 사랑, 학문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저는 국회, 연합회, 그리고 신문사의 사회적 생활의 해석자들에게 정부와 정부의 협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국회의원 여러분, 여러분의 지칠줄 모르는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가 이제 설립되는 학교입니다. 우리 국민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나선 여러분은 특히 교육 부분에서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힘찬 말은 학술원들(Academien)의 자유를 위해서도 쉴새없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러분의 국민의회는 지도자이신 하나님 아들을 의지하여 이제 이미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삶에서 현저한 전환점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관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은 자신들의 심장의 피로 여러분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여러분의 국민이 앉은 한 가운데, 수많은 신실함, 수많은 헌신에 대해 모든 시선이 전하는 감사의 존경 가운데 여러분에게 의미심장한 보답을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 연합회 운영위원 여러분,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기관은 여러분과 함께 나라의 비기독교화를 막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으로서 여러분을 이 생일 축하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예절, 더 나아가 사랑을 보여주신 여러분의 참석을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 투쟁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을지라도, 동일한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모두가 메시아께 전쟁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 우리 국민, 그리고 이 국민 가운데 위로자 그리스도(Christus Consolator)를 각 사람이 자신의 방식대로, 겸손과 사랑으로 봉사하고, 우리의 명예로운 투쟁이 그의 이름을 위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언론계 대표자들이여! 하나의 권세가 여러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옛 학술원(學術院)들이 알지 못했지만, 어린 대학교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고려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또한 저의 전통들을 떠나지 않고, 따라서 저는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Prinsterer)의 제자로서 또한 신문을 나라의 힘으로 존경합니다. 흐룬(Groen)이 스스로 여러분의 횡렬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여 처음으로 틀에 박힌 관습을 깨뜨렸다면, 저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대열에 진입하는 것을 저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학교의 학장으로서, 하지만 또한 옛 전우로서, 저는 새로 설립된 기관을 위해 여러분의 영예로운 기사(記事)의 거수경례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작은 영역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이 기관에 보다 개인적으로 연관된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형제 사랑의 감사를 드립니다. 존경하는 형제들, 이 학교의 지도자들이여! 또한 학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존중하셨던 학문을 위하여, 살고, 열심을 내고, 헌신하는 것은 예로부터 암스테르담상인 도시의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지방 지도자들과 지방 비서관들로서 전국 출신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그러한 학교의 통치 가운데 암스테르담의 이런 사회적 상태를 본다는 것은 위로를 주고, 감명을 주며, 기분을 돋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국민의 친절함이 여러분의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과업을 가볍게 해 주시고, 교사와 학장으로서 저는 여러분의 신뢰가 부끄럽게 되지 않으며, 또한 여러분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을 섬기길 바랍니다!

 

존경하는 형제들, 이사회 위원들이여! 동일한 기도로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학자들로서 도르트레흐트(Dordrecht)의 설립헌장을 지닌 학교를 학문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갈망하고, 고통을 받는 것이 박사학위증보다 더 나은 것이며, 용기와 도덕적 헌신의 고귀한 특징으로, 이에 대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이 학교가 여러분을 존경하며, 우리 국민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유용한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큰 은혜를 통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모든 학문 역시 기도의 열매입니다. 존경하는 동료들, 사랑스런 형제들이여! 여러분과 더불어 이 건물을 위한 첫 돌을 놓는 은혜가 저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이것은 주로 우리의 노동에 부응하는데, 왜냐하면 이 노동의 열매를 위해 이 밭이 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우리가 수용한 엄청나게 힘든 과업을 생각할 때 때때로 나와 함께 놀라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도 더 높은 의무에 대한 충동, 본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단 한 가지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학과들의 흑사병인 서열투쟁의 위험은 우리들 사이에서 영구히 단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주관적 의도들은 객관적인, 역사적인, 권세를 덧입은, 공식적으로 선언된 말의 위엄 가운데 포로가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이곳에 오신 존경하는 신사 여러분, 형제들이여! 저는 우리 기관 전체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놀라운 형제간의 신뢰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스코틀랜드, 독일, 심지어 미국으로부터 동감의 표시를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찍이 모든 개혁파 국가들이 참석했던 도르트레흐트(Dordrecht)를 생각나게 합니다! 개혁파 고백은 학문처럼 국가적 경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렇게 될 것입니다. - 우리 가운데 와서 환영하고 모국으로 향하는 길에 여러분의 형제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드리는 행운의 소원, 평화의 인사, 축복의 기도를 가져 가시길 바랍니다!

 

귀하고 학식이 많으신 신사 여러분, 말씀의 봉사자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또한 여러분이 여기 아주 넓은 대열에 앉아 계신 것은 축제일의 기쁨을 적지 않게 증진시켜 줍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van) 사람도 아니요 교회를 위한(voor)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학문적 삶은 우리로 하여금 고유한 주권을 지닌 한 영역을 형성하고 따라서 독립적인 삶을 형성케 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회들로부터 그리고 다시 이 땅의 교회들을 순수하게 만들게 될지 결정은 우리가 아니라 교회의 왕에게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보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장님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분의 신분을 높이 존경하고, 여러분의 용기가 우리를 상쾌하게 하는 것을 고백하며, 여러분의 공적인 호의를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결국 여러분 또한 신학자들이며, 대중의 지도자들이며,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자들로서 우리를 도와 봉사해 주십시오. 국민의 지도자들로서 여러분의 추천으로 도와주시고, 제사장적 기도자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이 기관을 위한 기도로 도와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 기관을 위한 설립자들, 회원들, 기부자들, 지역구(地域區) 대표들로서 여러분이 자신들의 황금, 시간, 노력을 바치려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존재는 여러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가는 여정에 필요한 소요경비를 보게될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성장 가능성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기엔 아직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때문입니다. 교수들의 숫자가 최소한 반드시 세 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과 헌신의 노력도 반드시 세 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학교의 세목에 따라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완성될 것입니다. 진실로, 이 희망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대담무쌍하게 비치든지 간에, 우리는 감히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것 때문에, 이미 수많은 형제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 무한한 신뢰 때문에, 여성의 눈에서 반짝이는 이 거룩한 사역에 대한 열심 또한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한 가지 더! 공동 설립자로서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계신 한 분을 보고 계시는데, 흐룬(Groen)의 소중한 친구에게 저의 마지막 말씀을 드립니다. 통찰력 있는 눈과 언제나 친절한 눈을 지닌 존경스런 백발의 노인, 고귀한 엘라우트(Elout), 당신을 의미합니다. 역사의 한 장()은 당신의 짧은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섬긴 왕실 귀족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지쳐있으나, 당신의 머리 위를 휩쓸고 지나지 않은 폭풍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에 참석하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의 기부금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아버지 같은 축복의 말씀을 일러주시고, 만일 이 기관이 계획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를 축복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최소한 공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 개혁파 국민이 이 땅의 위대함에서 단순한 시민으로 내려가는 이러한 형제다움을 존중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역사적인 국민이, 당신과 같이, 이미 우리 앞서 무덤에 내려간 두 세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인물들에게 애착을 느끼는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게다가 성경과 함께 성장하고 이 성경과 함께 죽기를 원하는 우리 국민이 어떻게 거룩한 성경말씀에 대한 겸손하고 신실한 고백 가운데 당신의 지위, 당신의 삶의 지혜, 당신의 연수를 지닌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즐거워하는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여러분의 기도로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끝났으므로, 저는 또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저의 조용한 끝맺음의 말은 이제 전능자에 대한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의 근본이요 모든 참된 지식의 원천이시며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떠나 헤매는 당신의 피조물은 영혼의 어두움 외에, 침체 외에, 속박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께 가까이 나아가며, 당신의 생명 속에 우리를 담그고, 빛이 우리를 둘러싸고, 힘이 우리의 정맥 속에 고동치고, 신앙의 자유가 복된 환희 가운데 펼쳐집니다.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영원하신 주재여, 은혜로 이 기관을 내려다 보아 주십시오. 이 기관의 황금, 능력, 그 모든 지혜가 당신께로부터 나오기를 빕니다. 당신의 거룩한 말씀보다 결코 못한 것, 결코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심장을 시험하시고, , 또한 우리 나라의 재판장이며 배움의 학교들을 판단하시는 심판자시여, 만일 이 기관이 언젠가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십자가 안에 있는 이 주권적인, 자유롭고 능한 은혜를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도하거나, 언젠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이 기관의 벽들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면전에서 그것들을 파멸시키소서! 주여, 주 하나님이여! 우리의 모든 도움이 당신의 이름 안에, 오로지 당신의 이름 안에만 있게 하소서! 아멘.

 

이것으로써 나는 이 예식을 마치고 자유대학교가 개교됨을 선언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 이상웅

2016-09-26 15:42:10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common grace, gratia communis)]

이상웅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개혁 교회에 선명하게 부각시킨 신학 주제중 하나는 일반은총론(gemeene gratie 허메이너 흐라치)이었다. 이 주제에 대하여 하단에 첨가한 참고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아래의 글은 불완전한 소개글이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에 대한 포괄적인 글은 뒤로 미루어둔다.

카이퍼는 자신이 편집하는 주간지 De Heraut지에 일반은총에 대한 기사를 1895년 9월부터 1901년 7월까지 무려 6년 가량이나 연재하였다. 후에 세권으로 출간된 방대한 이 저서의 1권은 일반은총의 역사를 추적하는 성경신학적 연구로서 노아의 언약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성경을 총망라하여 다루고 있고, 교리적인 부분인 제2권은 일반은총과 창조, 예정, 세계역사,교회,섭리,재앙,문화등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으며, 제3권은 실제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정부나 교회 그리고 국가,가정,사회와 같은 영역에 일반은총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최홍석.『교회와 신학』,서울:총신대학출판부,1991, 120].

카이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택자들 만을 위한 구원하는 은총인 특별은총이외에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물들에게 베푸시는 일반은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비신자들도 비록 그 자체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은 베르까워(G. C. Berkouwer 1903-96)교수의 평가에 의하자면 개혁파 교리의 필수적인 교리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카이퍼나 혹은 그의 후임자 H. 바빙크의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모든 개혁신학자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H . Bavinck, Algemene genade(Kampen:Zalsman,1894). 이 책은 바빙크의 학장 이임연설문으로서 소책자이다. 차영배교수에 의해 『일반은총론』(서울:총신대학출판부,1979)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사실 이 주제 때문에 금세기 초반의 화란개혁교회(GKN)와 그 영향하에 있는 칼빈신학교와 CRC(기독개혁교단)는 교단 분열이라는 큰 진통을 겪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미국 개혁 교단내에서 잘 알려진 헤르만 훜스마(Herman Hoeksema)와 헨리 단호프(Henry Danhof) 목사등은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 하였으며, CRC교단은 1924년 총회에서 이 문제를 숙의한 끝에 세가지 요점을 발표하였다:

1) the existence of a general and common grace of God that is shown to all,
2) a restraint of sin by the general work of the Holy Spirit,
3) the ability of unregenerate persons to perform civic good though they are unable to perform any saving good
[Fred H. Klooster,"Louis Berkhof",in Handbook of Evangelical Theologians, ed. W. Elwell(Grand Rapids: Baker, 1993 ),103-104; H. Zwaanstra,"Louis Berkhof",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ed. D. F. Wells, (Grand Rapids: Eerdmans, 1985),162.]

당시 칼빈신학교의 교수였던 루이스 벌코프(1873-1957)도 이와 같은 결정이 개혁 신학적인 것이라고 추천하였다.그러나 이와같은 총회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고, 마침내는 교단 분열에 이르게 되었다. 훜스마와 단호프는 개신교 개혁교단(Protestant Reformed Church)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화란 내에서는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몇가지 신학적인 사상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의 화살을 퍼부은 사람은 헤르만 바빙크-안토니 호너흐 교수 라인을 이어서 깜뻔 신학교의 교의학 교수가 된 끌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라는 사람이었다. 물론 개혁파 교단에서 자라난 그는 안티 카이퍼리안은 아니었다. 카이퍼나 바빙크의 신학적인 라인에 서 있으면서도 카이퍼의 치우친 신학사상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스킬더는 일반은총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가 지속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중생자들 속에 죄를 억제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없다. 또한 일반 은총교리는 인간의 타락에 관해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약화시키며 그 결과 두 영역개념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 즉 타락된 세계와 병립하여 일종의 중립적인 영역이 존재하게 되며 그 안에선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반립(antithesis)이 부인되게 된다는 것이다

[최홍석,전게서,122. J. Douma, Algemene Genade,119-204].

 

이와같은 스킬더의 반론에 대항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의 아들인 H. H. 카이퍼 교수와 바빙크의 자유대학교 후임자였던 V. Hepp 교수 등을 주축으로 하는 총회파들은 1940-1943어간에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타락한 세상을 오래 참으심으로 보존하시고 모든 인류에게 선을 베푸신다.
2) 비록 구원을 위해서는 그 빛이 불충분하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속에 창조시에 부여하신 원래적 은사의 작은 조각들과 어떤 본성의 빛을 보유케 하신다.
3) 이러한 남은 조각들과 은사들은 현실적으로 죄를 억제하는데 작용하며 따라서 원래 창조시 부여된 가능성들이 여전히 죄악된 세상속에서 발전될 수 있다.
4)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과분한 선을 베푸신다. 그러나 그것은 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구원하시는 은혜와 구별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에 불복한 스킬더와 유명한 성경주석학자 흐레이다너스(S. Greijdanus) 교수등은 마침내 정직당하였으며, 이에 대해 항의하는 수 많은 무리들이 소위 또 하나의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이 교단은 고신측과 교류하고 있다).


* 일반은총론에 관한 주요 참고문헌

Bavinck, Herman, Algemene Genade(Kampen:Zalsman,1894) = 차영배역,『일반은총론』(서울:총신대출판부,1979,2002)

Daane, James. A Theology of Grace: An Inquiry Into and Eval!uation of Dr. C. Van Til's Doctrine of Common Grace(Grand Rapids: Eerdmans,1954)

Douma, Jochem. Algemene Genade: Uiteenzetting, vergelijking, en beoorfeling van de opvattigen van A. Kuyper, K. Schilder en Joh. Calvijn over 'algemene genade'(Goes:Oosterbaan & Le Cointre,1966)(Diss.) 다우마 교수가 칼빈, 카이퍼, 그리고 스킬더의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깜뻔 신학교에서 쓴 박사논문이다. 다우마 교수는 모교에서 윤리학 교수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수 년 전에 은퇴했다.

Engelsma, David J. Common Grace Revisited : A Response to Richard J. Mouw's He Shines in All That's Fair (Grandville, MI, :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2003)

Kuiper, Herman. Calvin on Common Grace(Goes:Oosterbaan & Le Cointre,1928) 칼빈의 일반은총론에 대한 자유대학교 박사논문, 헤르만 카이퍼는 후에 칼빈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Kuyper, Abraham. Gemeene Geratie,3vols.(Kampen:Kok,)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은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하지만 화란 중고서적상에서 쉽게 그리고 싸게 살수 있는 책이다. 내 기억으로는 25길더(약 12,500원)주고 샀다.

Masselink, William, Common Grace & Christian Education 1951)

_________,General Revelation and Common Grace(Grand Rapids:Eerdmans,1953)


Mouw, Richard J., He Shines in All That's Fair : Culture and Common Grace (Grand Rapids:Eerdmans,2001)

Van Til, Corneilius, Common Grace and the Gospel(Nutley:Presbyterian & Reformed, 1972) 밴틸의 이 책자는 마우나 엘겔스마의 책을 제외한 앞선 논의들 대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유용한 입문서 구실을 한다.

헨리 밴틸,[칼빈주의 문화관],이근삼역(성암사,1977) C. 밴틸의 조카인 헨리 밴틸의 종합적인 입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