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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더의 대안 공동체 신학윤리 -신원하

메르시어 2023. 5. 7. 10:48

요더의 대안 공동체 신학 윤리가 바라보는 공공신학-신원하

 

2014-10-31 17:24:28


존 하워드 요더의 대안 공동체 신학 윤리가 바라보는 공공신학

- 신원하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I. 들어가면서

1. 왜 이 시점에 공공신학 논의인가? 기윤실 운동 방향에 대한 이론적 모색

 

 

2. ‘공공신학’은 미국에서 쓰인 최근 단어

Max Stackhouse, Ronald Thieman

19-20세기 화란 Abraham Kuyper가 지향한 신학적 입장,

미국 Calvin 신학교의 조직신학자 John Bolt의 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2001)에서도 이 public theology 표현

 

 

3. public theology는 좁게 말하면 political 또는 social theology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에서 공통된 일상의 삶, 의미, 가치들을 다루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H. Richard Niebuhr가 분류한 주류 개신 교회 즉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왔었다.

 

4. 그러면 이에 대한 다른 신학적 윤리적 성향을 갖고 있는 대체 공동체 교회 전통과

존 하워드 요더와 그와 유사한 신학자들은? 이들의 다른 교회론, 사회윤리론, 그리고 공공적 삶에 대한 이해, 공공적 이슈에 대한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얻는 유익이 있을 것이다.

 

II. 신약성경이 세상/국가 그리고 교회의 성격과 삶의 방식을 어떻게 보는가?

 

1.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들여오셨고 그 나라의 새 질서를 전파하시고 살아내셨다.

 

2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셨고 그 나라를 확장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

 

3. 하나님 나라의 질서 규범, 가치 통치방식 등은 이 세상/국가와는 다르다.

 

4. 열심당원들이 전쟁, 혁명을 통해 지배권력, 식민통치세력을 뒤엎고 그 땅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고, 새 정권을 목표로 살았다.

 

5. 예수 제자들 가운데도 열심당원들이 있었고 예수는 이들과 접촉이 있었고 이들의 방식을 취해 목적을 달성하라는 정치적인유혹을 받았으나 결코 그 방식에 영합하지 않았다.

 

6. 예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고, 군중들을 먹임으로 군중들의 지지와 힘을 업고, 정치 지도자로 새 나라를 땅에서 실현하라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과 제의를 거부했다. 베드로와 같은 칼을 휘두르는 방식, 열두 군영의 천사동원을 통해 현 정권을 뒤엎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소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십자가의 길과 세상의 권력 쟁취하는 방식을 동시에 선택하지 않았다.

 

7.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택한 것은 세상 국가 권력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고 그 방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8. 국가 권력과 그 방식은 예수의 길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걸아가야 할 길이 아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맡기셨다. 이교도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국가의 악을 억제하는 기능, 강제력을 동원하여 악을 재제하는 기능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이것은 비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놓여있다.

 

III. 국가/정부의 기원과 기능과 한계에 대한 신학적 정리

 

1.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잔인, 이기심, 폭력을 통제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인간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 악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즉 국가와 정부는 기본적으로 이 땅에 악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통제 불능의 상태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하나님은 악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에게 강제적인 폭력 사용권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폭력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허용되어진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사용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이교도들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폭력은 그리스도의 완전성 밖에 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함께 갈 수 없다.

 

2. 국가와 교회는 결코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교회와 철저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신양성경의 증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늘 핍박과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기준과 삶의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가 점점 기독교화 된다는 것은 진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약성경의 메시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일어난 국가의 기독교화는 기실 복음의 진보라기 보다는 기독교와 교회의 속화를 의미한다.

 

3. 이 세상과 국가는 정사, 권세, 등 메시야의 원수(시편110편)에 속하고 그에 조종된다. 물론 국가도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아래에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선한 피조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원수와 연관되어 연동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결코 기독교화가 될 수 없고, 예수가 제시하신 새로운 질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지향해나가야 할 질서를 구현해 나갈 수도 없고 나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대적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기독교 질서를 구현해 갈 수 없다. 그러기에 국가는 비기독교의 규범과 방식에 따라 운영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미국사회에 적용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의 경제체제와 또 정치 사회 문화의 제반의 현상들이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멀다고 생각하면서 미국의 정치 경제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것’, 다르게 말하면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미국을 변화시키는 것은 급진적인 방법, 즉 미국 정치 경제 제도가 지닌 문제의 근본에 도전하고 현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미국의 정치, 경제, 제반 영역에서의 현상은 성경이 제시하는 질서와는 동떨어져 있고 그와 배치되는 정치와 법과 제도가 횡행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별로 소망을 두지 아니한다. 미국은 물질주의, 자본주의적 경제, 개인주의에 의해 움직이면서 총체적으로 도덕적인 무능력과 타락으로 점철되어 있는 마치 성경의 바벨론과 방불한 이교국가라고 이해한다. 이는 미국 사회가 짜여 있는 체계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즉 미국 사회 속에서 자행되는 불의, 빈곤, 도덕적 해이와 같은 문제는 특정한 사회 정책,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부의 방책과 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체계(system)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 체계는 표면적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적인 영역에서 힘 있는 집단들에 의해 움직이는 강자들의 동맹주의(corporatism)에 좌지우지 되고 있으며, 주요 정책들은 이런 집단의 힘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궁극적으로 이들의 이익과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재의 미국의 모든 문제가 배태된다고 보고 있다.

 

2. 이들은 정부가 사회 기금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을 비롯한 약한 자들에게 복지혜택을 베풀고 또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나가는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인 강제력과 정부 주도의 행동을 통하여 결코 정의로운 사회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힘과 강제력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는 정부는 기본적으로 힘을 극대화하려고하고 또 이것은 인간의 부패로 인해 또 정사와 권세의 조종을 받기에 결국 전제적인 힘을 행사하고 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정부는 부패하고 전제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국가는 결코 가치와 법의 궁극적인 출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출처임을 명심하면서, 정부의 힘을 최소화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진정한 방법은 이 사회의 삶의 방식과 다른 대안적 삶의 방식을 가진 공동체를 이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하고도 궁극적인 기독교적 사회변혁방법이라고 주장한다. ((( 출처: 신원하, “사회변혁모델의 다양성과 일치를 향한 신학적 모색: 복음주의 진보파와 급진적 좌파의 신학적 사회윤리 비교 연구,” 『기독교사회윤리』 제 7집 (2004): 171-206. )))))

 

4. 경찰국가론: 국가의 본질적 기능은 질서유지이다. 그런데 현대 국가는 신약성경의 묘사와는 조금 다르게 즉 강제적 폭력이라는 칼을 사용하는 기능 외에 행정기능과 복지기능을 떠맡고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이러한 기능직까지 거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무책임하지 않는가?

 

IV. 세상에 대한 “책임”에 대한 요더의 시각

 

1.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고 그 나라의 Agent이고 그 나라의 질서를 구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할 자이다. 그러나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와 세상에 대해 무관한 삶을 사는 자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

 

2. 기독교 공동체는 “mission"을 지닌 자이다. 이 이 사회에 또 사회를 위해 보내진 자들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담지하고 전해야 할 소수자들의 모임이다. 그러기에 어디서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무책임한 자들이 아니다.

 

3. 그리스도인의 우선적 사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선교사요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 모델로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덕,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 우선적인 소명이다. 콘서트를 할 때 무대 위의 artist의 역할과 밑에서의 안내인의 역할이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4.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와 봉사를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5. 세상/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한 논의는 유무의 차원이 아니라 “how"의 차원이다. 기독교인이 예수가 보이시고 가르치신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고, 산상수훈의 방식으로 살고, 고난받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면 오히려 정부관원이나 다른 시민들보다 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런 식으로 국가에 대한 책임을 행한다.

 

V. 요더의 대안 공동체 신학과 공공 신학의 대화

 

1. 요더의 교회론은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공공을 향한 증거이다. 교회는 결코 public과 세상을 등지고 거절하는 그러한 퇴각적인 분파적 집단이 아니다. 그 존재 자체가 공공을 향한 것이고 그 공동체가 전해야 할 질서와 가치도 기실 공공을 향하여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공공 신학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삶과 사회의 공공적 문제와 가치들에 대한 기독교신앙과 윤리가 공감되고 이해될 수 있도록 의도된 신학이다. 그런데 그것을 향하는데 있어서 Stackhous처럼 변증적 방법으로 할 것이냐 Theimann처럼 다소 고백적인 방법으로 할 것이냐고 하면, 요더는 다분히 고백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독교 신앙과 이야기의 particularity를 희생하지 않고, 미련하고 무력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일반 세상의 강하고 지혜로운 듯한 것을 부끄럽게 하는 것을 믿고 공공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 한편으로 요더나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하고 통용될 수 있는 윤리라고 생각하는 시각에는 생각을 달리한다. 이런 인식은 기독교 윤리란 우리가 인간과 역사를 자세히 살피면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요더는 전통적으로 개신교회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런 태도를 즉 natural law 그리고 common grace를 중시하고 인간의 합리성과 역사로부터 기독교인들의 규범을 가져올 수 있다고 이해하는 태도를 취해오면서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의 사회윤리적 성격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적 성격의 핵심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Hauerwas, Peaceble Kingdom, 63; Yoder, PoJ, 1장).

 

VI. 요더의 대안공동체 신학과 윤리적 조명과 건실한 공공신학 모색

 

1. 요더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적 primary 책임과 의무는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즉 messianic community를 만드는 것이다. 메시야 공동체를 만들어서 국가와 사회에 하나님 나라 질서를 증언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가 말하든 제사장적 왕국이고, 교회 그 자체가 하나의 성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어진 공동체로서 제사장의 기능을 해야 한다.

 

2. 요더는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살고 사회와 공공에 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제시한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준 사명이 바로 그것이고, 또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a.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들이 그 바벨론 성읍과 거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29:7절에 나타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기는 그것ㅇ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백성은 비록 포로였지만 지배국의 살고 있는 그곳의 화평을 구하고 도모하기를 요청받았다. 비록 바벨론 사람들이 평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또 인지하든 하지 않던 관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샬롬을 그 도시에서 추구해야 한다고 예레미야는 강조했다. 이것은 좋은 모델이 된다.

 

b. 예수가 들여왔던 복음의 질서는 초대교회가 구현했고 이것은 사회질서의 좋은 모델로 제시되었다.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적 태도를 가졌는데 이것은 남자나 여자, 노예나 주인, 모두 세례를 통해 한 몸의 일원이 되었다. 세례가 시사하는 바는 사회적 평등이다. 그다음은 사회주의이다. 초대교인들은 한데 모여 먹었다. 가난한 자, 못 먹는 자들이 없게 했다. 성찬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셋째 용서하는 삶이다. 넷째 예배하러 모이게 되면서, 이들은 누구나 은혜 받은 자가 자유롭게 나가서 말씀을 나누었다. 직업적, 위계서열이 없었다. 주어진 은사에 따라 자기의 은사를 발휘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했다. 이런 것들은 공공을 위해 큰 메시지로 작용했다.

 

3. 약간의 의구점: 소위 스택하우스 식의 공공신학은 이런 위험은 없는가? 예수의 권위와 다른 권위들의 관계, 성경의 권위와 다른 통찰력의 관계 (계시와 이성), common sense와 그리스도의 권위. 공공신학이 civil religion의 theology처럼 상식과 이성이 성경과 같은 source가 되어가고, 예수의 주인 되심이 옅어지는 신학이 되어갈 것이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시민종교의 빠졌던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지? 국가의 이데올로기, 비기독교적 통찰력에 타협하고 세뇌된 신학 , 이둘 사이의 imcommensurability를 희석시키는 위험은 없을지.

 

4. 요더는 오늘 기독교회와 제자 공동체가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것은 예수님을 너무 많이 따랐기 때문이 아니고, 너무 적게 따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대신 지역적 신학, 인종적 신학, 교파적 신학에 너무 천착하고, 고집하고, 신약성경의 증거를 예수의 모범에 따라 철저하게 사는 자들의 공동체를 조성하는데 소홀했고, 그에 대한 신약성경의 증거를 점점 경시하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사회적 외면을 자초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철저히 힘과 폭력을 배제한 방식, 약하고 힘없는 처지를 수용한 예수의 방식대로 행하게 되면 그 약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룬다는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인들은 public discourse에서도 전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 출처 : 공공신학(Public Theology) 전문가 집담회 3

-일시 _ 2007. 12. 3(월) 오후 7시~9시

-장소 _ 명동 청어람 1실

-주최 _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출처] 존 하워드 요더의 대안 공동체 신학 윤리가 바라보는 공공신학 |작성자 e_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