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구원관
종말론적 구원관
2014-10-24 20:27:32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이 보증된다는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알미니안주의는 한 때 믿음을 고백하여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여도 후에 믿음의 삶을 지속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칭의와 성화를 둘러싸고 두 세력은 오랫동안 대립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성경신학의 발전은 성경의 메시지가 아 둘중의 어느 한편의 주장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고전적 견해는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의 세단계로 구분하고 이 중에 칭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칭의가 구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믿음으로 칭의를 받으므로 구원을 과거완료의 사실로 보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칭의에 비해 성화는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구원관에서 성화는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이후에 상급을 결정짓는 요소가 될 뿐이다. 이런 관점은 신자의 윤리적 삶을 격려하거나, 믿음을 가졌다가 중간에 저버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데 난점을 갖게된다. 이런 난점을 보완하려고 나타난 것이 수정적 견해인데 이 견해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고전적 관점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믿음을 가졌다가 중간에 저버린 사람들의 믿음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수정된 관점은 성화의 삶이 믿음이 진정성 여부를 증명해주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견해도 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중간에 믿음을 저버렸다고 해서 그 이전의 믿음이 전부 가짜였다고 단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전적이거나 수정된 견해이거나 모두 구원을 과거 완료형으로 본다.
이런 기존의 구원관과 달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라는 확신을 인정하지 않는 구원관이 종말론적 구원관이다. 이 관점은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고 구원은 과거에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구원을 완성하려면 성화의 삶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성화의 삶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거의 믿음은 구원의 과정을 시작한 것이고 이후에 얼마든지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견해는 지난 수백년동안 주류신학을 지배해왔으며 지금은 고전적 견해의 난점을 보완하려고 수정적 관점이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 교파를 떠나서 성경을 메시지를 좀 더 충실하게 반영하기 위하여 등장한 견해가 종말론적 구원관이다. 종말론적 견해는 칭의를 폭넓게 정의한다. 전통적 관점은 칭의를 과거의 사건으로 불변하는 법정적 판결로 이해하였고 그래서 의롭게 되는 것을 과거완료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종말론적 견해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 곧 칭의를 종말론적으로 생각한다. 바울도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미래 시제로 표현하며(로마서 2:13) 야고보는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믿음 자체가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야고보서 2:24)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 역시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로마서 5:9-10) 결국 종말론적 구원관에 의하면 현재적 칭의는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궁극적인 칭의는 믿음을 증명하는 삶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말론적 견해는 믿음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전통적 견해보다 타당성을 갖게 된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전인격적이고 총제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믿음을 신실함(faithfulness)으로 이해한다. 신실함은 삶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은 미래적일 수 밖에 없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을 증명하려고 아브라함을 예로 돌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의 진실성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증명되었다고 말한다.(야고보 2:22-23) 야고보는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을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으로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이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갖게된다. 종말론적 견해가 종교 개혁의 근본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다만 야고보는 믿음을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이라고 재정의한 것이다. 이는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행위가 수반되는 전인격적인 것으로 교정한 것이다.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믿음도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통로일 뿐이다. 다만 종말론적 견해는 그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는 진정한 믿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견해는 믿음으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했더라도 참된 믿음의 증거를 행위로 나타내지 못하면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바울의 감람나무 비유(로마서 11:17-24)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구원의 과정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또 히브리서도 과거의 믿음의 삶을 시작했지만 믿음이 퇴보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완전히 타락하여 회복 불가능핸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히브리서 6:1-12) 이신칭의를 강조한 바울도 믿음으로 선한 삶을 지속하여야 과거에 시작한 믿음을 완성할 수 있다는 교훈을 많이 하고 있다(로마서 2:7, 10 ;빌립보 2:12) 또한 성경은 계속 믿음에 붙어 있지 않으면 탈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로마서 8:13 ; 히브리3:12-13 ; 히12"14-15 ) 이 경고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화의 삶은 선택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데 필수적이라고 성경은 말하며 구원의 탈락을 경고한다. 이것을 단순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실제로 믿음을 버리고 타락한 사람으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거명한다.(딤전 1:19-20)
종말론적 견해에 의하면 구원은 과거형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형이자 현재 진행형이며 동시에 미래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구원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순종의 삶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구원의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의 과정에서 탈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셨다. 이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아 우리는 구원의 과정에 들어왔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는 과정은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끊임없이 거룩하게 되려는 노력을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성경은 각 사람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어 소망을 이루라고 권고한다.(히6:11 ; 벧후1:10-11 ; 야고보 1:12)
질문1
종말론적 견해가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의 특징은 칭의를 법정적 개념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을 통하여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견해는 칭의를 법정적으로 혹은 의가 전가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신자 안에서 의가 성취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대답) 법정적 개념은 칭의의 한 부분이고 전부는 아닙니다. 칭의에는 법정적 개념뿐 아니라 관계적 개념이 있습니다. 칭의의 법정적 개념이 하나님이 심판석에서 사람을 무죄하다고 선언하는 것, 즉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 선언이라면 관계적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전제하고 사람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관계적 의무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칭의에 대한 전통적 개념인 법정적 개념은 사실 종말론적 구원관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무죄선언은 종말론적으로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칭의의 관계론적 측면은 종말론적 구원관을 잘 지지해 준다고 봅니다. 왜냐햐면 관계라는 것 자체가 종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과거, 현재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미래에 까지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론족 구원관은 의의 전가와 의의 성취가 서로 다르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다른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질문2.
칭의의 개념을 넓게 보는 종말론적 견해에 의하면 과거의 칭의는 행위없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현재적 칭의나 미래적 칭의는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는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대답) 성경에서 믿음과 행위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성경의 이신칭의가 행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믿음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3
칼빈주의의 구원관은 법정적 칭의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예정론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견해는 예정론을 반대하는 것인가요?
대답) 종말론적 구원관이 예정론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종말론적 구원관은 하나님의 예정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된다 혹은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요. 예정론의 가르침은 이미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니 사람은 구원을 위해서 이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문제는 예정을 사람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예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에 이르기 까지는 누구도 예정을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질문4
야고보는 이신칭의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으로 재정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믿음이 행위로 증명된다면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세워지기는 어렵다고 보입니다. 믿음을 입증하는 행위의 표준이 무엇인가? 이것이 종말론적 견해의 난점이 아닐까요?
대답) 사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한국 교회가 특히 취약한 부분입니다. 흔히 믿음이 좋다는 것을 경건이라는 말로 종교적이나 영젹 영역에 국한시키기 쉬운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일상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바른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바른 행동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부분에서 한국 교회는 대단히 취약합니다. 결국 바른 행동이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공동체적으로 연구하고 분별하고 가르치며 실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할 수 도 없고 틀림없음을 보장하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이 그런 애씀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공허하고 위선적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질문5
한국 교회의 문제가 구원론에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칭의나 성화같은 구원의 방법에 대한 논란 이전에 구원 자체에 대한 오해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교회는 구원을 죄의 용서나 형벌의 면제와 같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범주로 이해함으로써 구원의 총체적 차원을 잏어버린 것이 아닌지요?
대답) 구원론에 대한 문제와 구원 자체에 대한 오해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죄의 용서나 형벌의 면제로 국한하고 또 그것을 과거의 일회적 사건으로 주로 생각하는 것인 서로 상관이 있습니다. 구원을 그렇게 부정적인 측면에세 주로 이해하기 때문에 또한 구원을 과거의 일회적 사건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구원의 긍정적 측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침된 백성, 하나님의 뜻에 진실로 순종하는 의로운 백성으로 만들기 위래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정적 측면을 생각하면 당연히 구원은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고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6
전통적인 견해도 믿음의 진정성은 선한 행위로 입증되고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진정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급하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란 표현이 전통적인 구원관을 바르게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대답) 물론 전통적인 견해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믿음과 선행이 함께 역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견해에서 선행은 구원에 감사하는 사람의 보답 차원이지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관은 사람의 선행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구원이 믿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통적 구원관은 분명히 구원을 과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며, 또 믿음과 행위를 대립적 개념으로 본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