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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기- 솔로몬과 분열 왕국

메르시어 2023. 5. 6. 20:35

왕정기- 솔로몬과 분열 왕국

2014-10-17 19:03:50


  신약에서 예수님은 솔로몬을 두번 인용하셨다. 첫번째는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에서이고 그 다음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다. 이 두번의 인용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강성과 영화를 누렸던 솔론몬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냉정하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들에 핀 백합화 꽃 하나만 같지 않았다거나 또 솔로몬의 지혜가 유명하다 하지만 그 지혜보다 더 큰 지혜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솔로몬을 낮추어 평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외적인 부강함은 솔로몬 시대에 정점을 이르렀으며 이후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솔로몬의 시대의 부강함은 다윗의 덕도 있겠지만 아뭏든 솔로몬의 시대는 다윗의 시대보다 훨씬 더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를 이르었던 나라로서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나라는 솔로몬이 통치하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이 다스리던 나라였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정기 최초의 세습왕이 었다. 그래서 그는 다위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택을 받지도 않았고 다윗처럼 아무 것도 없는 미천한 상태에서 출발하지도 않았고 다윗처럼 무수한 고난을 겪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왕권은 외적으로 가장 강력헸고 그 화려함도 절정에 이르렀다. 아마도 솔로몬은 다윗에게 물려받은 왕권을 강화하고 견고히 하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경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왕이 되기전에 왕권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더욱 왕권을 유지 강화하는 일에 부심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부터 이방의 왕정을 닮아가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솔로몬은 주변국들과 수많은 결혼 동맹을 맺었으며 왕실의 기강과 위엄을 견고히 하기 위해 성전과 왕궁도 건축하였다. 참으로 그의 나라는 강성해졌지만 과연 강해진 것일까? 

 

  솔로몬은 왕에 오르자 마자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꼭 숫자적으로 일천번 번제를 드렸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솔로몬이 무수히 드렸던 수많은 번제를 의미할 것이다. 이후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보면 솔로몬이 이렇게 왕이 되자마자 번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있어서 였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무엇을 구하는가 물으셨을 때 가다렸다는 듯이 솔로몬이 대답하였을 것이다. 솔로몬은 최초의 세습 왕으로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야했을 것이다. 다윗에게 물려받은 나라를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길 것인가 하는 문제로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자신이 출입을 할줄도 모르는 작은 아이라고 고백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 듣는 마음"을 구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백성들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솔로몬에게 맡겨진 수많은 백성들의 형편과 처지가 다 다를 것이니 그들을 올바르게 재판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귀 기울이는 맏음 곧 듣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였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의 지혜의 본질은 똑똑함이나 지식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듣는 마음"이었다. 솔로몬의 이 지혜를 사용한 첫 재판의 사례가 창기의 문제인 것은 흥미롭다. 그 일은 왕에게는 비천한 두 여인의 사사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다스림의 본질은 바로 그런 백성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 주고 분별해주는 일임을 이 사건은 보여준다.

 

  솔로몬에 대한 기록중 성전 건축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인다. 사실 성전 건축은 다윗이 거의 준비하고 솔로몬이 실행에 옮긴 것으로서 이스라엘 왕정기의 초기에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성전은 곧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왕정의 근본이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전은 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에 나타났듯이 성전은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이 아니라 성전에서 예배되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능력이시며 구원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친 때에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성전이 존재하는 의미가 하나님의 봅도와 율례를 지키고 순종하는데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과도 일치한다. 다윗은 솔로몬이 어어갈 왕권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순종여부에 달려있음을 분명히 유언으로 당부한 것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릴 듣는 마음을 구하였고 하나님의 그 요구를 기뻐하셨지만 솔로몬에게 더욱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백성들의 형편을 듣고 분별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다스리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진행되는 솔로몬의 통치를 보면 이 점에서 솔로몬은 실패하였던 것 같다.

 

  솔로몬이 결혼 동맹으로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삼고 그들이 섬길 신전을 허용한 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린 것이며 이스라엘의 존재의 근본을 뒤흔든 일이었다. 왕권을 견고히 하는 것은 결혼 동맹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임을 솔로몬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 당시의 국제적 교류는 이방 종교와 이스라엘 종교의 혼합을 가져왔다. 솔로몬은 강력하고 안정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외적으로는 결혼 동맹과 국제 무역, 내적으로는 대규모 건축 공사와 중앙집권화 군사력의 확보를 이루었지만 참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다른 나라와 같이 되고 있었다. 무수한 세금과 강제 노력으로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고 마침내 여로보암이 주동이 된 반란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영구히 분열하게 된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런 시대를 열었지만 그 영광은 궁극적으로 들에 핀 백합화에 견줄 바가 못되었다.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가운데 이뤄지는 평화와 진리의 세상이지 세상에서 강력하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는데 있지 않음을 솔로몬 시대는 보여준다.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그 일이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은 기적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상황속에서 일어난다. 솔로몬의 권력집중을 통한 왕권 강화의 정책은 지파동맹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거스리는 것이었고 결국 그 억압 정책은 북쪽에 속한 지파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옛 지파동맹의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원로들 (아마도 지파동맹의 전통을 기억하는 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자들(지파 동맹을 알지 못하고 왕정의 중앙집권적 힘만을 아는 자들)의 말을 따르게 됨으로 결국 남북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되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북쪽 열지파의 왕으로 세우셨다. 이렇듯 그의 시작은 하나님의 인정과 약속으로 따라 이루어졌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재건하여 수도로 삼는데, 세겜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모아 언약을 갱신하였던 장소로서 지파 동맹의 전승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점에서 여로보암의 행동은 북왕국의 정통성과 독립을 확립하기 위한 매우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그가 착수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과의 단절이었는데 이것도 전적으로 자신의 왕권 확립을 위한 정치적인 조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기 위하여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두어 북왕국 자체적 성소를 세우고 레위인들 대신에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전통적인 절기도 변경하여 남왕국과의 모든 종교적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가 시행한 일련의 조치들은 열왕기 역사가에 의해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범죄케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규탄되었고 북왕국은 멸망하기까지 여로보암의 죄악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로보암의 짓은 어떻게 종교가 체제 유지에 이용되는지를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신앙과 예배가 이용된 것이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뚜렷하다. 언약에 대한 순종은 형통과 화평과 축복을 가져오고 불순종은 환란과 추방이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서 저자들에게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기록은 단순히 한 왕의 통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라는 틀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역사서 저자들은 분열 왕국이후 각 왕들에 대하여 엄정한 가치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이러한 판단의 중요한 기준은 다윗과 여로보암이다. 다윗을 언약에 순종한 기준으로, 여로보암은 언약에 불순종한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남왕국 왕들 20명의 경우 히스기야와 요시아만이 다윗의 길을 따라 바르게 통치한 왕으로 기록되었고 여섯 왕들(아사, 여호사밧, 아마샤, 웃시야, 요담)은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산당들을 제거하지 않은 왕으로 지적되었으며 나머지 열두 왕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들로 평가되었다. 여로보암으로 시작된 북 왕국 열아홉 왕들 대부분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른 것으로 평가되었다. 주목할 점은 남왕국의 경우 다윗의 왕권이 끊어진 적이 없으나 북왕국은 항상 역성 혁명이 일어나 왕권의 세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추기] 2014. 10. 24

 

  솔로몬이후 세습 왕권이 가진 한계는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역사적 진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권력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그 체제가 비판에 대해 열려있어 권력의 교정이 가능해야 하는데 세습 왕권에는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특히 북왕국의 출발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여로보암의 통치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왕이 된후에 두가지 성격의 일을 벌렸는데 하나는 정치적인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개혁이었다. 전자는 세겜과 부누엘을 재건하여 세겜을 정치적 수도로 삼은 일이었는데 특히 세겜은 여호수아가 언약을 갱신한 장소로서 의미가 깊은 곳이고 브누엘(아마도 창세기에 나오는 브니엘과 같은 곳)도 족장 전승을 가진 곳으로서 여로보암이 자신의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추축할 수 있다.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은 종교적 악을 저지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는 절기에 북왕국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 벧엘과 단에 성소를 선택하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레위인 아닌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도 새롭게 변경시킨다. 금송아지는 숭배한 것이라기 보다는 법궤를 덮는 두 그룹의 역할처럼 하나님의 발등상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야훼신앙을 대체한 것이라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하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금과 송아지의 결합이 상징하는 것은 풍요와 다산이었으며 야훼신앙을 금송아지로 표현한 것이 문제였다. 열왕기서는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야훼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문제지만 구약역사에서 쟁점은 야훼를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섬기지 않는 것이었다. 여로보암은 종교를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인데 이렇게 종교가 세속 권력에 종속되어 수단화된 것이 여로보암 시대만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상 권력과 종교의 유착이 항상 문제가 되었다.

 

  산당은 원래 고대 가나안 족속이 자신들을 신을 섬기려고 높은 것에 지어놓은 건물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중앙성소가 세워지지 전에 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사무엘이나 다윗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고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기브온도 산당이었다. 산당이란 것이 가나안족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던 곳이란 점에서 산당 제사는 야훼신앙이 이방종교와 혼합될 위험이 있었지만 산당제사가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솔로몬 통치 후반부터 산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타났고 이후 왕들의 시대에도 이어진다. 아마도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위한 산당을 지어준 것때문에 산당에 대해 보였던 중립적 입장이 부정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심지어 북왕국에서는 산당이 이방신전으로 전락한 모습도 나타난다. 남유다의 왕들 중에 산당제사를 폐지한 왕이 히스기야와 요시아가 유일하다. 아사, 웃시아, 여호사밧은 긍정적으로 평가된 왕들이지만 산당은 폐지하지 않은 왕이었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특징이 산당제사를 철저하게 폐지한 것인데 그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은 아마도 신명기였을 것이다. 신명기에는 12장에 중앙성소법이 나오는데 아마도 요시아가 산당을 적극적으로 폐지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당제사는 제사제도를 지방분권화하고 신앙을 일상화하는 긍정적 요소도 있었을 것이지만 신앙셍활에서 제의적 요소가 너무 넘쳐나게 만드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신앙에서 제의적 요소가 넘쳐나자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앙의 형식적 측면에 치우치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배의 문제는 제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것이었다. 열왕기하 18장 22절의 랍사게의 연설은 히스기야 시대에 산당을 폐지하는 일에 지방 토호들의 반발과 저항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질문: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자 한 것은 정치적인 고려 이전에 신명기 12장의 중앙성소법을 의식하여 중앙성소를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중앙성소가 세워지지 이전에는 산당 제사가 용인되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고 부터는 산당 제사에 대해 점차 부정적인 입장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