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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 챨스 F 파이퍼 著, 조병수 譯

메르시어 2023. 5. 6. 20:26

신구약 중간사 - 챨스 F 파이퍼 著, 조병수 譯

2014-10-13 23:24:37


찰스 F 파이퍼 著, 조병수 譯

「신구약 중간사 」노트정리

 

제 1 부 페르시아 시대

 

1 장 고레스와 페르시아 제국의 흥기

 

1. 기 원

1) 페르시아 제국은 한 사람 고레스의 노력의 결과로 등장하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모친은 미디아 왕의 딸이라고 한다. 이는 고레스를 미디아 왕계에서 나온 합법적인 군주로 등장시키려는 꾸밈인 것 같다. 고레스가 역사에 처음 나오는 것은 주전 559년이었다. 40세의 나이로 메데 제국의 속국인 안산(Anshan)을 상속받았다.

2) 메데와 바빌론은 동맹국이었다. 주전 612년 그들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Nineveh)를 침공하였다. 나보폴라살의 아들이며 지휘관인 느부갓네살이 서방으로 진격하여 앗시리아에 속해 있던 여러 영토들을 병합시켰다. 앗시리아의 멸망은 고대 근동국가들의 세력 배열에 영향을 끼쳤다. 이 모든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역시 영향을 주었다.

3) 주전 587년경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였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바빌론 유수로 말미암아 유대인들 사이에는 그들의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다. 포로생활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불순종한데 대한 징계인 것처럼 보였다. 성전 대신에 회당이 예배장소로 받아들여졌고, 신성한 토라(Torah)가 읽혀지고 설명되었다. 토라는 실례와 가르치으로 교훈을 주었으며, 예레미야의 예언들이 진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선지자들”의 말이 수집되었다.

4) 고레스가 안산의 왕위에 올랐을 때, 바빌론에서는 나보니두스가 인기 없는 왕으로 있었다. 주전 550-549년에 고레스는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아스티아게스가 자기 아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던 하르파구스는 고레스에게 투항해 버렸다. 아스티아게스가 직접 군사를 이끌었지만, 군대가 돌연 반란을 일으켜 그를 고레스에게 인계했다. 고레스는 관대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대다수의 메데 관리들은 그대로 제 자리에 남았다. 이 관대한 정책은 근동의 정치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고레스 통치의 특징이었다.

 

2. 고레스와 리디아

1) 리디아 왕국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주전 660년 아수르바니팔이 리디아 왕 “룻디의 기게스”에게 조공을 요구했을 때이다. 리디아 왕국은 소아시아에 있는 할리스 강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였다. 기게스의 손자 알리아텟스가 57년동안 통치하는 가운데 리디아는 강대국이 되어갔다. 후계자 크로에수스는 에베소와 밀레도를 복속시켰다.

2) 메데를 정복한 후에 고레스 제국의 국경은 할리스 강의 동쪽 제방까지 확장되어 리디아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크로에수스는 애굽, 바빌론과 동맹을 맺었고 스파르타는 함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크로에수스는 두 번의 참패 끝에 도망을 쳤다. 결정적 전투에서 고레스는 크로에수스의 유명한 기병대를 대면하여 전렬에 낙타를 배치하였다고 한다. 낙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들은 놀랐고 전투는 참패로 끝났다. 이전에 그렇게 부요하던 리디아 제국이 이제는 페르시아 총독이 다스리는 사데 관구가 되고 말았다.

 

3. 고레스와 그리이스

고레스는 소아시아의 해안 도시들이 자기의 종주권을 인정해 주기를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거절하였고, 페르시아는 이들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밀레도 시는 약삭빠르게 고레스에게 장래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항복하였다. 조만간에 페르시아는 그리이스 본국과 싸울 참이었다. 그러나 최종 대결을 하기에 앞서 동방에서 다른 중요한 정복을 해야만 했다.

 

4. 고레스의 동방 정복

1) 느부갓네살의 통치 하에서 바빌론은 진취적이고 실력있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살의 통치 하에서 행해진 독직과 악정은 거의 기아상태를 초래시켰다. 구바루는 느부갓네살의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의 한명이었으나, 고레스에게 투항하여 바빌론의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일 먼저 고대 도시인 우룩,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에렉에 공격을 가하였다.

2) 고레스는 비록 문화는 없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동방의 땅들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제국의 경제력의 터전은 서방이었지만 고레스는 방위를 위하여 동방을 지배해야 했다. 그는 동방으로 계속 진군하여 드라기아나, 아라코시아, 마르기아나, 박트리아 등을 페르시아에 병합시켰다. 그는 옥수스 강을 건너 약사르투스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북동쪽 변경에 요새를 쌓았다.

 

5. 바빌론 함락

1) 고레스는 바빌론으로 눈을 돌렸다. 바빌론의 신인 마르둑의 제사장들은 고레스를 기쁨으로 환영했다. 나보니두스는 고고학자였으며 내심으로는 신비가였다. 애굽의 아켄나톤처럼 그는 천성이 통치자로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의 여러 도시로부터 신상들을 수입해 들여왔다. 지방 사당 관리인들은 그 사당들이 빼앗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2) 주전 539년 10월 초순에 고레스는 메소포타미아 저지대를 침공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그는 저지를 받지 않고 전진할 수가 있었다. 오피스에서 최초로 교전한 후에, 10월 11일 전투도 치르지 않고 시팔을 획득하였다. 구바루는 그달 말경에 직접 바빌론에 입성하여 바빌론의 모든 백성들에게 평화를 선포한 고레스에게로부터 바비루쉬라는 새로운 행정구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다.

3) 고레스는 바빌론의 제반 업무에 있어서 “정상회복”의 가치성과 필요성을 감지했다. 나보니두스의 통치는 비정상적이었지만 그러나 마르둑 신은 스스로 고레스라는 의로운 통치자를 제공하였다. 마르둑 신의 제사장들이 불만을 가진 것이 나보니두스가 망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고레스는 신년 대축제에서 제정된 의식을 완전히 행사함으로써 바빌론의 제사장들과 협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레스는 나보니두스가 바빌론에 들여 놓았던 신들에게 그들의 사당을 돌려주기로 결심하였다.

4) 바빌론인들은 여러 민족을 그들의 본국에 옮겼다가 바빌론 왕들의 감시 하에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앗시리아가 행하던 것이었다. 앗시리아의 영구 추방정책은 추방된 북쪽 지파들에게 옛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끊어버린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바빌론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바빌론 강가에 거주하던 유다의 포로들은 시온을 회상하며 끊임없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였다. 이러한 귀환은 고레스의 “정상회복” 정책 중의 하나였다.

 

6. 고레스와 유대인

1) 포로된 신들과 포로민들의 귀환 정책은 고레스와 그의 계승자들이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국가들의 것보다 우수한 것으로 존경하던 종교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적용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성공을 하였으므로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다니엘은 남아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에스더서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유대인들의 영향과 시련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

2) 주전 537년에 약 오만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고레스의 축복과 도움으로 그 조상의 땅으로 돌아갈 기회를 맞이하였다.(스 5:16) 귀환된 포로들에 대한 통솔권이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에게 이양되었다. 고레스의 칙령대로 그들은 번제단을 쌓고 매일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기 시작했다.(스 3:3) 귀환한 지 2년 되던 해에 그들은 큰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전 지대를 놓았다.(스 3:12) 그러나 고레스의 생전에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스 4:5)

3) 귀환 초기의 즐거워하며 열심이던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침울한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스 4:1) 파레스타인 북부 지방에는 앗시리아의 정복자들로부터 추방된 포로들 곧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이 붙혀진 포로들의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돌아오는 순례자들으르 열광적으로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4) 이들은 성전 재건사업에 협력하겠다고 말했지만(스 4:2)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스 4:3) 따라서 “그 땅의 거민들”은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 사업을 방해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술책을 사용하였다.(스 4:5, 11-16) 대적들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약 18년동안 재건 공정에 거의, 아니 아무런 진척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고레스는 죽고 캄비세스와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7. 고레스의 최후

1) 애굽 정벌 계획은 아들 캄비세스에게 맡기고,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동쪽 국경에서 일어난 유목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다. 별로 크지도 않은 전투를 치루면서 고레스는 부상을 입었고 카스피아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초원의 나라에서 그는 사망하였다.

2) 어떤 세계 정복자도 고레스만큼 높이 평가된 적이 없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리이스 사람들은 그를 스승이며 입법자로 간주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도굴된 고렛의 무덤을 복구시키라고 지시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레스는 바빌론 유수를 종식시키고 이스라엘 역사의 새 시대를 연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고레스는 그 신민들에게 페르시아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그리고 인디아의 고대 문명들을 종합하는 일을 했다.

 

 

2 장 캄비세스와 애굽 정복

1) 페르시아의 관습을 따르자면 왕은 외국과의 전쟁에 출전할 때 무방비한 상태로 그 나라를 떠나서는 안되었다. 고레스는 동쪽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캄비세스의 섭정을 인정하여 “바빌론의 왕”이란 칭호를 사용할 권리를 주었다. 고레스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페르시아에 이르자 전국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났는데, 이 소요들은 일반적으로 바르디야가 캄비세스의 왕위권에 대하여 도전을 시도함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캄비세스는 그의 아우를 살해했지만 후에 바르디야라고 자처하던 의 반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2) 왕위 계승문제가 해결되자 캄비세스는 장기적인 애굽 정복 계획을 마음대로 착수하였다.(캄비세스 4년) 이때 애굽의 위대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 과거가 되었지만 파라오들은 여전히 환상에 빠져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굽의 아마시스는 고레스와 페르시아의 군대가 흥기있는 것을 보면서 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모스의 군주 폴리크라테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이스 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에 도전하려는 아마시스의 결심에 하나의 희망이 되어주었다.

3) 그러나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가 아마시스를 등지기로 결심하였고, 파라오를 돕던 그리이스의 유수한 장군 가운데 한 명이 캄비세스에게 투항하여 애굽의 방어 비밀을 죄다 폭로하였다. 이리하여 55마일의 사막을 눈깜박할 사이에 통과하여 캄비세스는 그리이스의 보병대들이 아마시스의 아들, 사메티쿠스 3세의 명령을 받은 펠루시움 성벽에 접근을 하였다. 펠루시움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난 후, 사메티쿠스와 그의 군대는 멤피스로 도주를 하였다.

4) 이때 애굽의 저항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잠시 동안 멤피스의 함락이 지연되었지만 결국에 가서 그 성은 캄비세스의 손에 떨어졌고 애굽 땅은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캄비세스는 선량한 애굽인이 되기로 작정했다. 합법적인 주권자로 파라오의 왕위에 즉위하기로 결심했으며, 애굽 왕의 풍속을 받아들이고 태양신 레(Re)의 아들임을 공식 발표했다. 애굽 통치를 공교하게 한 후, 캄비세스는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을 침범하여 자기의 영토에 복속시키기로 결심했다.

5) 5만명의 지상 원정군이 애굽의 서부, 암몬의 오아시스를 정벌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이 원정군에 관련된 그리이스의 자료에 의하면 이 원정군이 모래폭풍을 만나 삼킴을 당했다고 한다. 캄비세스는 이 원정 중에 자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캄비세스의 동생 바르디야라고 자처하는 자가 왕위를 찬탈했던 것이다. 캄비세스는 회군하기로 마음을 먹고, 델타의 동편에 있는 다프네와 수도 멤피스 그리고 나일강의 첫 번째 폭포에 있는 엘레판티네에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엘레판티네 수비대는 특히 중요하다. 그 수비대는 유대인 보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제 나름대로 신전을 세우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같은 종교인들과 서신을 교환하였기 때문이다.

6) 캄비세스는 본국에 이르지 못하였다. 헤로도투스는 그의 죽음이 마상에서 우연히 입은 부상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말년에 그는 정신이상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캄비세스가 죽은 후에도 그의 군대는 그가 대표하던 정부에 충성을 다했다. 두달 후에 그 사칭자 가우마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인 다리우스가 다음 페르시아의 군주가 되었다.

 

 

3 장 다리우스와 페르시아 제국의 개조

다리우스는 자신이 캄비세스의 합법적인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그는 찬탈자로 보였다. 베히스툰 비문에 보면 다리우스가 아케메네스가(家)의 후예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대단히 애를 쓴 흔적을 볼 수 있다. “나의 부친은 히스타페스이고....우리는 고대인들의 자손인데 고래로 우리 가문은 왕족이었다. 내 앞에 여덟명의 조상이 왕이었으며 나는 아홉 번째의 왕이다”

 

1. 페르시아 제국내의 반란

1) 엘람과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두달이 못되어 페르시아의 군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이 자리를 얻기 위해서 앗수르바니팔과 같은 앗시리아 왕들의 잔인함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엄격한 정책을 도입하였다. 그는 반역자의 코와 귀와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족쇄를 채워 왕실 법정에 둠으로써 반역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경고를 백성들에게 보여준 것을 자랑하고 있다.

 

2. 베히스툰 비문

1) 다리우스는 후손들이 자기의 승리를 기억해주기를 바랬다. 그는 또한 그의 동시대인들이 자기의 힘을 존경하기를 원했다. 자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파라오들과 근동의 왕들이 하던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중에 그 누구도 다리우스의 베히스툰 비문처럼 거대한 규모로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던 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업적을, 불멸의 돌에 기록하기 위하여 산 한 면을 택하였다. 바그다드와 테란 사이에 있는 주요 약대로 중에 하마단에서부터 65마일 떨어진 해발 500피트 지점에 가면 지금도 길이가 58피트 6인치 되는 비문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어, 바빌론어, 엘람어로 쓰여 있다. 이는 애굽의 로제타석과 비교될 수 있다. 로제타석이 샹폴리옹에게 해석되었듯이. 베히스툰 비문은 로린슨과 그 후의 설형문자 학자들에게 바빌론의 설형문자 해독에 열쇠를 제공하였다.

 

3. 다리우스와 유대인

1) 고레스의 최후와 캄비세스의 통치는 귀환된 유대 포로들에게 각성과 정리의 시간을 주었다. 이 백성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일에 동의하였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학 1:2) 그러나 다리우스 제 2년에 유다에 예언을 하기 시작한 두 선지자 곧 학개와 스가랴에게는 이러한 패배감이 없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징후와 약속은 낙망에 차있던 유다에게 일할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재건 사역이 본젹적으로 시작되었다.

2) 이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의 충동질로 “강 서편”의 총독 닷드내가 유대인들의 사업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레스의 명령이었음을 호소하고 서적 곳간을 조사해보라고 제안했다. 에크바타나(악메다)에 있는 곳간에서 그 조서가 발견되었다. 다리우스는 그 조서가 유효한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다리우스 6년에(주전 516년) 그 전은 완공되었다.

 

4. 다리우스 산하의 민사 행정

1) 다리우스의 통치가 시작되자 중앙행정이 독립적으로 강하지 못하면 불안정이 촉진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리우스는 총독제도(Satrapy)를 발전시켜 그의 온 제국에 확산시켰다. 다리우스가 체계를 잡은 정부에 있어서 왕은 최고의 절대자였다. 그러나 그의 권한에는 어떤 제약이 있었다. 중대사가 생기면 여섯명의 귀족들과 의논을 해야 했다. 법에 관한 문제는 종신직인 일곱 재판장과 협의해야 했다. 왕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도 구속을 받았다. 이것은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단 6:8, 14-15; 에 1:19, 8:8)라는 속담투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2) 스룹바벨이 유다의 행정관이라는 자리에서 자태를 감춘 것은 다리우스가 행한 민사 재편성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간단히 성서에서 제명된 사실로 보아 다리우스가 시작한 정책 변경이 그의 해임을 초래한 것 같다.

3) 광범위한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을 손쉽게 하기 위해서 다리우스가 고안한 또 하나의 계획은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달시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우편제도에 관한 헤로도투스의 유명한 말이 뉴욕 우체국 건물 정면에 횡으로 새겨져 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눈, 비, 더위 그리고 어두운 밤 그 어느 것도 각기 맡은 바의 임무를 신속하게 수행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111개의 우편역을 수사로부터 사데와 에베소에 이르는 1,677마일의 도로를 따라 배치하였다. 대상(隊商)들이 이 도로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행하려면 90일이나 걸렸지만 우편 역에서 싱싱한 역말을 사용할 수 있는 왕의 급사(急使)들은 일주일 만에 그 길을 주행했다.

 

5. 다리우스의 군사 전략

1) 다리우스가 거느리고 있던 상비군은 놀랍게도 소규모이다. 그의 친위대는 기병 2,000명과 귀족 출신 보병 2,000명 그리고 메대와 페르시아인에서 징병된 “불사신들”(immortals) 10,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사시에는 메대 혹은 페르시아의 귀족들로부터 보충병을 소집할 수가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랫동안 단지 소규모의 전투만을 치루었기 때문에 군사훈련도 그 정도에서만 적적하게 계획되었다.

2) 주전 512년에 다리우스는 스키토족을 공략했다. 그리이스의 자료에 의하면 스키토 족을 원정하기 위해서 다리우스가 일으킨 군대의 병력은 무려 70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은 아시아와 유럽의 첫 번째 군사 접촉이었다.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그 원정은 처음부터 길조를 보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배로 다리를 놓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 트라키아를 정복하였다. 군대는 흑해의 해안선을 따라 다뉴브강 입구까지 진군하여 교각을 건설하였다.

3) 그러나 스키토족들은 싸우려 들지 않고 “초토전술”을 사용하여 점령지에서 군비공급을 예상했던 페르시아 군대에 치명타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스키토 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트라키아를 정복하여 페르시아의 국경은 그리이스의 북방과 접하게 되었으며 마케도니아는 다리우스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리이스 본토만을 제외하고 다리우스가 그리이스 세계의 통치자가 되었다.

4) 다리우스가 고용한 그리이스의 제독 스킬락스는 30개월 동안 인더스강, 인도양, 홍해 등을 탐험하였다. 다리우스가 탐험에 관심을 둔 것은 애굽과 페르시아 제국의 나머지 부분들을 연결시키고 싶은 마음때문이었다. 스킬락스는 홍해, 페르시아만 그리고 인도양이 연결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전 518년 다리우스는 애굽에 머물면서 더 쉽게 그리고 더 곧장 인도로 가는 길을 가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새로운 운하를 파도록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붉은 색의 화강암으로 된 다섯 개의 돌기둥이 그 운하의 제방을 따라 세워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다리우스는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인이다....내가 명령한 대로 이 운하가 건설되었고....선박들이 이 운하를 통하여 애굽에서 파르사로 다니게 되었다”.

 

6. 그리이스의 항거

1) 다리우스는 결코 그리이스 본토를 페르시아에 병합시킬 수 없었다. 다리우스에게 도전하는 유럽의 그리이스 사람들의 용기가 페르시아의 신민이었던 이오니아 사람들의 반란을 발화시켰다. 이오니아 동맹이 재결성되고 유럽의 그리이스는 후원을 약속하고 선포하였다. 페르시아는 그리이스 본토에 실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하였다. 6백척이나 되는 함대가 소아시아를 출항하였다. 그러나 아토스 산에서 불어오는 풍랑을 만나 함선 절반과 약 20,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잃고 말았다.

2) 두 번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메대 사람인 다티스 제독은 에레트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신전을 불태우고 마을을 파괴하고 그 주민을 수사(Susa)에 노예로 파는 등 실수를 저질렀다. 다리우스는 마라톤에서 패배를 했고 애굽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그리이스 정벌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마라톤 전투가 끝나자 애굽은 공개적으로 다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다리우스가 요구하는 조공과 세금이 엄청났으니 그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너무나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7. 다리우스의 종말

애굽의 반란이 진압되기도 전에 다리우스는 사망하였다. 민사행정의 조직자로서 그를 필적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건축한 왕궁은 위대한 고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다리우스는 잔인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절대군주로 군림하였다. 조직면에 있어서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의 통치 하에서 그 능력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미 붕괴는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