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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백성에 관한 연구- 김용주

메르시어 2023. 5. 6. 20:16

하나님나라 백성에 관한 연구- 김용주

2014-10-08 14:21:05


하나님 나라 백성에 관한 연구 - 초대교회가 인식한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 

 

성서신학 전공 김 용 주 1 9 9 3 년 

 

 

목 차 

 

Ⅰ  서 론 

A. 연구의 목적과 동기 ---------------------------- 1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 3 

Ⅱ  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한 이해 

A.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 ------------------- 4 

1. 구약에 있어서 Melek과 Malkut -------------- 5 

2. 구약에 있어서 백성 -------------------------- 9 

B. 신약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 -------------------12 

1. 신약에 있어서의 Basileia ------------------- 14 

2. 신약에서의 백성 -----------------------------19 

Ⅲ  초대교회가 인식한 하나님 나라와 백성 

A. 비유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백성 ------------21 

1. 씨뿌리는 자의 비유 --------------------------22 

2. 가라지의 비유 -------------------------------26 

3. 겨자씨의 비유 -------------------------------29 

4. 누룩의 비유 ---------------------------------31 

5. 감추인 보화의 비유 --------------------------33 

6. 값진 진주의 비유 ----------------------------35 

7. 그물의 비유 ---------------------------------37 

B. 산상수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백성 ----------40 

1.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41 

2.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44 

3. 화평케 하는 자의 복 ------------------------46 

4.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의 복 --------------47 

Ⅳ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A.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51 

B.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55 

Ⅴ  결 론 -------------------------------------59 

참고 문헌 ----------------------------------------62 

 

 

Ⅰ  서 론 

- - 

 

A. 연구의 동기와 목적 

 

“하나님의 나라”는 성서 전체의 맥을 이어온 몇가지 중요사상중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의 하나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시가서와 예언서들에서 예비되어, 신약성서의 이미 초두에 구원의 위대한 선포의 내용으로서 등장하는데, 먼저는 세례 요한이, 이어서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막1:15)는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특별히 공관복음서의 기조를 이룬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유들에서 핵심적인 주제를 형성하며, 그의 전 사역과 메시지의 중심이다. 리델보스 외,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 오광만 역(서울;풍만 출판사, 1989), p. 62. 

 

신약성서의 복음서에 수록이 된 예수의 교훈중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설교 주제였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가 비유를 사용 하였을 때에도 그 비유의 촛점은 언제나 천국이었다(마13:11,24,31,44,45,47,52; 18:23;20:1).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헤어지실 때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요14:3)고 말씀 하셨다. 그 처소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거할 공간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으로 부터 소원(疎遠)하여 있지 아니하고, 세상과 광범위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끝까지 그의 백성을 찾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그것은 또한 누룩과 같이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내강성이라고 한다. Ibid., p. 73.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성서의 처음 부터 마지막 까지 하나의 맥을 유지하며 흐르고 있다. 오늘날도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과열된 관심으로 비 정상적인 이론과 비 정상적인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에 대한 바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본 논문의 연구 동기는 성서의 중심적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을 초대교회가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이해하는데 있다.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줄 것이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연구는 복음서의 교훈들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해 초대 교회가 어떻게 인식했는가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한 원초적 개념의 탐구를 위해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성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이어서 신약성서에서 예시해 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개념을 예수의 교훈들 속에서 찾아 볼 것이다. 

특별히 예수와 함께 활동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초대교회 공동체가 인식하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를 살펴 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개념을 도출하는 방법을 채택 한다. 

제 3장에서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인식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에 관한 개념을 예수께서 주신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과 산상 수훈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그리고 제 4장에서는 비유들과 산상수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현재적 개념과 미래적 개념으로 나누어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 통일성과 상호관계에 있어서 긴장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하나님나라 백성에 대한 이해 

 

A.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신약 성서에 집중되어 있고 더우기 구약성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낱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신약성서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급진적으로 발전시키셨으나, 신.구약성서 전체에 편만한 하나님의 나라는 장구한 역사를 타고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해 왔으며, 또 지금도 발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존 브라이트, 「하나님의 나라」, 김철손 역(서울:컨콜디아사,1990), p. 18. 

그래서 바드(Otto Baod)교수는 “비록 천국(하나님의 나라)이라는 어휘가 구약 성경에 없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개념을 형성하고 있는 기초적인 사상이 구약 성경의 각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바드, 「구약 성서 신학」, 박대선 역(서울;기독교서회,1964), p. 204.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출15:18;민23:21;신33:5;사43:15)과 온땅의(왕하19:15;사6:5;렘46:18;시29:10;47:2,9;96:10;97 :1;99:1-4;145:11) “왕”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어진다. 다른 성서 구절들은 그가 왕이 되어 “자기 백성”들을 다스릴 날을 언급하고 있다(사24:23;33:22;52:7;스바냐3:15;오바댜21;스가랴14:9).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왕권의 개념에 대한 이 간단한 일별(glimpse)이 전체 구약 성서의 개관을 마련해 준다. 하나님이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신 반면에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현된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고 온 세계에 의해 충만히 경험될 날을 소망하고 있다. 우리의 주요 관심은 “소망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다. G.E.래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이태훈 역(서울;도서 출판 엠마오, 1985), p. 64. 

 

 

1.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Melek과 Malkut 

 

Melek( 왕,왕국)는 동사 Malik( 지배하다)라는 술어에서 유래한 일상적인 셈어이다. 이 용어는 구약성서에서 욥기18장 14절에서와 같이 가끔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R. 키텔, 「왕, 왕국」, 고영민 역(서울;월간 목회사,1976년 10월호별책), p. 19. 

말쿠트( Malkut)는 고대 히브리어에 속한 소수의 추상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이 용어는 우선 “왕된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용어가 권력의 구체적인 영역에 대해 언급하는데 사용될 때에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약간 벗어나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Malkut란 용어는 대부분 정치적인 왕국의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 되어진다(삼상20:31;왕상2:12). 그런데 이 용어를 시대적으로 고찰할 때 중요한 특징은 다니엘 이전의 종교 사상에서는 이 개념이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니엘 이전 시대에는 야웨를 Melek으로 묘사하는 것에 유추하여 그의 능력의 범위는 때로 “그의 Malkut”라고 불리운다(22:2 9,103:19,145:11,13;단3:33). Ibid, pp. 27-28. 

그런데 “Malkut (나라)”라는 용어는 우리의 선입관념처럼 다스려지는 어떤 “영역”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 Malkut라는 용어가 하나님에게 적용 될 때 그것은 근본적으로 왕권(royal power), 통치권(roign)을 의미하는 개념을 갖게 된다. L.Keohler, W.Baumgartner. ed.,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Michigan;Eerdmans, 1951), p. 531. 

 

이와 같이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은 왕으로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왕권의 두가지 면은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이해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그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치하시고 주장하시는 줄 믿었으며, 그 민족의 번영과 안전은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라고 믿었다. 조선출, 「그리스도교 사전」, (서울;대한 기독교서회,1972), p. 1131.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를 지배하시며 역사 안에서 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으로 믿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신앙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 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면서 부터 선민으로서 새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그들은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다. 브라이트, op. cit., p. 27. 

일무이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수여된 십계명 속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신5:7)고 명하시고 다른 아무것에도 절하지 말라고 하셨다(출20:5;신5:9). 이 유일신 사상은 가나안 사람들과 계약을 맺을 때 제 1조건으로 내 세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것과, 다른 어떤 권세에도 복종하지 말 것과, 비 실재적인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금지령은 유일신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상은 창세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창2:4이하). 하나님은 아무 것도 의존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로 이 이름은 창조의 기능을 가고 계시다는 뜻이다. Ibid., p.28.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은 이처럼 유일하신 분으로 인식 되어졌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은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Ibid. 

 대 근동의 이교도들에게서는 이러한 특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제 2계명(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에서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금지 명령”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반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세째, 하나님께서 현 역사안의 모든 사건을 지배하신다는 사상이다. Ibid.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과 구원의 능력을 계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들의 체험속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출애굽사건에서, 시내산에서, 가나안 입성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디에나 계시며 -하늘 높은 곳에만 계신 분이 아니고 땅 어느 좁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백성을 도우시려고 찾아 오시며 그가 원하시는 곳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생생한 경험적인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신으로 부터 분리된 삶을 살게 했고 주변의 다신론의 이교들과는 대조된 유일신의 사상을 유지하게 했다. 

 

2. 구약성서에서의 백성 

 

구약 성서에서 “백성”을 나타내는 단어들로는 암(‘am), 르옴(l 'om), 고이(goy)등이 주로 사용된다. 이 단어들 중 암(‘am)이 압도적일 만큼 가장 많이 나오고(약 2,000번), 르옴(l 'om)과 고이(goy) 가 다음으로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 다양한 용어들은 그 효능상으로는 거의, 또는 전혀 의미상의 차이 없이 사용 된다. 이들 중 얼마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 사용 되었다. 성서백과 대사전 4권, (서울;성서교재 간행사,1991), p.709.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하고 막연한 신관을 갖지 않고 자신들과 하나님을 밀접한 관계로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그들과 교제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섬겼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완전히 인격적인 관계로 인식했다. W.포로스터, 「신 구약 중간사」, 문희석 역(서울;컨콜디아사,1981), pp. 225-256.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되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은 하나님이시요(출1:18;시5:2,47:7,93:1,96:10,97:1,99:1;사24:23;겔2:33),백성은 선민인 이스라엘이라는 증언들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구약 성서에서의 구원은 공동체 생활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체험으로, 풍성한 삶의 길로 안내하는 현관이다. 구원이 목표하는 공동체는 좀 특별한 공동체, 즉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6:7상)하는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계약 백성”(a covenant people)을 뜻한다. 엘머 A.말텐스, 「하나님의 계획」, 김의원 역(서울;아가페 문화사,1991), p. 91. 

 

학자들 사이에서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는 문장을 일컬어 “계약 공식”이라고 한다. 이 공식의 다양한 형태가 성경 전체에 걸쳐서 25회 나오고 있다. 그 첫번째 출현이 바로 출애굽기 6장 본문의 핵심이다. 그러나 일찌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일과 관련해서 단편적인 형태가 나오고 있다. 거기 보면 계약에 대한 논의와 후손, 즉 한 민족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8)고 선언 하신다. Ibid., pp. 92-9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을 내 세울 때에 신앙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윤리를 조건으로 하였다. 그러나 윤리적 조건만으로는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할 것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나라의 수호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나라나 물질을 가지고 예배한다고 해서 그 나라와 혈연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와 도덕적 행동으로 하나님을 선택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기계적으로 체결된 것도 아니고 항구적으로 체결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서로 흥정으로 체결된 것도 아니다. 쌍방이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계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의 행위 였으나 계약을 체결했으면 쌍무 계약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한에 있어서 그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다. 브라이트, op. cit., pp. 33-34. 

 

분명한 것은 계약의 한 부분에 요구(demand), 책임(obligation)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 한 백성으로서 너희를 택할 것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 그 “백성”이란, 목표로 삼고 있는 특별한 종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과 체결한 계약을 지키는 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았다. 이 계약은 때때로 파기 되기도 하고 새롭게 다시 체결 되어지기도 하였다. 

 

B. 신약성서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 

 

히브리 -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로 그 소망을 표현하였다. 성서적 소망은 헬라 시인들이 꿈꾸어 왔던 것과 동일한 범주 가운데 있지 않고, 계시 종교의 참된 본질 가운데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은 구약 성서에 깊이 뿌리 박고 있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이스라엘을 통하여 성취 시키려 하는, 인류를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신 영원하시며 살아 계시는, 한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확신에 근거되어 있다. G.E.래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이성수 역(서울;한국 기독교교육 연구원,1989), pp. 12-13. 

이런 까닭에 선지자들은 다같이 평화롭게 살게 될 날을 선포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시2:4) 하셨다. 그 때는 인간 사회의 제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인 환경에 내재하는 악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서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나라는 나사렛 예수의 선포의 핵심으로서 “회개하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막1:15)라고 전파하면서 부터 더욱 구체화 되어 갔다. 하나님 나라 도래라는 이 주제는 예수의 선교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마5:20,7:21), 예수의 위대한 사역의 의도한 바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었다(마12:28).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마13:11). 

신약 성서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에 관한 단어가 100회 이상 나타난다. 그중 복음서에는 80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36번, 마가복음에 14번, 누가복음에 32번, 그리고 요한복음에 2번 나온다. 이 밖에도 바울 서신에서 이러한 용어는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라는 단어는 주로 예수에 의해서 사용되어 졌다. 이 용어들을 예수께서 직접 사용하신 횟수는 마가복음에서 13회, Q자료에서 9회, 마태복음에서 27회, 누가복음에서 12회,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2회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 「신약 신학」, 정충하 역(서울;새순 출판사,1992), p. 63. 

 

이들 두 단어중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국한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 까닭은 마태복음이 유대적 기독교의 특징을 가지는 책으로서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여러가지 대용어들을 사용하였다. “하늘”이란 낱말은 이런 대용어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세상의 어떤 것 보다도 존귀하시고 접근하기 어려운 왕적 위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유대인의 관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게할더 보스, 「하나님 나라」, 정정숙 역(서울;한 개혁주의 신행협회,1981), p. 29 

 

공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유사한 뜻을 갖는 용어들이 있다. “나라”(thy Kingdom, 마6:10,8:12,25:34;눅11:2,12:32), “그의 나라”(his Kingdom, 마6:33;눅12:31), “천국”(the Kingdom, 마4:23,9:35,13:19,38,24:14), “자기 아버지 나라”(the Kingdom of their Father, 마13:43), “내 아버지의 나라”(my Father's Kingdom, 마26:29)등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동일한 의미로서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귀절에서는 “나라”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표현 된다. 성서 백과 대사전 4권, (서울:성서교재 간행사,1991), p. 123. 

 

 

1.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basileia 

 

일반적인 용법에서의 바실레이아(basileia)는 “왕국”이나 “나라”로 번역 되는데 이 말은 왕의 존재나 본질, 상태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에 대한 언급이므로 먼저 그의 “영예”나 “권력”에 대해 말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둘째의미는 왕의 영예는 그에 의하여 지배 받는 영역에서, 즉 그의 나라에서 표현 된다. basileia 에 있어서 이 둘의 의미는 계시록 17장 12절과 17장 17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에 이 이중의 뜻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키텔, op. cit., pp. 46-47. 

신약 성경에서 “나라”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의미는 “왕국”이나“백성” 보다 “통치”의 개념이다. 최근에 이 주제에 대하여 비평학자들에 의해 많은 관심이 모여졌으며, basileia의 뜻으로 “왕국” 혹은 “백성” 보다 “왕의 능력,권세”란 개념이 더 기본적이라는데 실제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조지 래드는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보통 왕국, 나라로 번역되는 basileia라는 말은 모든 다른 용례 보다 먼저 왕의 지위, 성격등을 지칭한다는 것은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왕에 관한 말이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위엄, 그의 권세를 말한다” G.E.래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 역 (서울;성광 문화사,1992), p. 84. 

라고말한다. 

신약성서에서 basileia의 의미는 이 세상의 basileia와 그리스도의 basileia 그리고 하나님의 basileia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basileia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a. 그리스도의 basileia 

구약성서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에서 참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basileia를 생각해야만 한다.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며 그들은 εκ τηs βασιλεια αυτου (그의 나라로 부터) 모든 유혹하는 자와 악행하는 자들을 모을 것이다(마13:41). 예수는 그와 함께 서 있는 자들 중 어떤 자가 그들이 εν τη βασιλειαs αυτου (그의 왕권을 가지고) 인자가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마16:28).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τηs βασιλειαs αυτου (그의 나라에는) 마지막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진다(눅1:33). 이 왕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εν τη βασιλεια μου (내 나라에서) 먹고 마시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눅22:30).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도적은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메시야 왕에게 그가 ειs την βασιλειαν σου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눅23:42). 이 왕국의 양식에 대하여 예수는 η βασιλεια η εμη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요18:36). 

그리스도의 사도는 그의 출현과 그의 지배를 증언 한다(딤후4:1). 사도는 그가 주께서 그를 하늘에 있는 그의 나라로 구출해 주실 것을 알고 있다(딤후4:18). 우리들 크리스챤들에게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주어진다(벧후1:11).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basileia는 또한 하나님의 basileia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언급은 여러곳에 나타나 있다. 에베소서 5장 5절에서 불신자는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ου χριστου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언급하고, 요한계시록11장15절에서도 마지막 때에 βασιλεια του κοσμον (이 세상의 나라)는 του κυριου ημων και του χριστου αυτου (우리의 주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나라가 되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하나님이, 또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가 언급 된다. 

한편 하나님의 basileia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basileia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예수 자신의 말씀에 의해 입증된다.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셨다”(눅22:29)고 했다. 우리를 εισ τηs βασιλειαν του υιου τηs αγαπηs αυτου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골1:3). 이와같이 예수는 아버지로 부터 basileia를 받으신 후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는 그것을 아버지께 돌려 보내신다(고전15:24). 그는 다만 그에게 속한 것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신약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에 이르게 된다. R.키텔, op. cit., pp. 50-51. 

 

 

b. 하나님의 basileia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자기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역사적인 현재 속으로 돌입했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구속적 축복의 새 영역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G.E.래드, 「신약 신학」, 신성종외 역(서울;대한 기독교 출판사,1992), p. 75.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모든 선교를 함축하고 있다. 만일 신약의 멧세지 전체가 복음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나라의 언어적 용법에는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나님 나라)와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하늘의 나라)와의 병행,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basileia, 부가어, 수식어에 의한 서술 또는 동의어 등이 있다. 앞에서 정의한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는 같은 의미이다. 많은 귀절들은 아무런 부가 없이 basileia에 대해 말하고 있다(마4:23,9:35,13:19,24:14;행20:25;히11:33;약2:5). 따라서 이 말은 절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 모든 귀절들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언급된다는 것은 입증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문이나 특별한 부가어, 수식어에 의해 명백히 보여지기 때문이다. 키텔, op. cit., p. 53. 

 

그러므로 basileia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내지 지배이다. 하나님께서 왕의 권세를 가지고 그의 원수들을 궤멸시키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를 지칭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한데 모여 그의 통치의 축복을 영위하게 될 미래적인 구원의 영역을 지칭할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와 대치되어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래드, 「신약 신학」, op. cit., p. 75. 

 

 

2. 신약성서에서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의 나라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일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주로 “나라의 아들들”(υιοι τηs βασιλειαs,마13:38), “나라의 상속자”(κληρονο μουs τηs,약2:5)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눅12:32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부여하신다고 되어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여하심으로 인해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도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 했다(막16:19).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믿는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데그 나라는 강팍한 유대인으로 부터 취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마21:43).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크리스챤들을 그의 나라와 영광에로 부르시며(살전2:12),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를 우리들에게 주셨다(골1:13). 그래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되었다(살후1:5). 마7:21절에서는 “주여, 주여!”라고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들어 간다고 하였다. 어쨌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된 고려는 가장 진지한 결정, 다수로 부터, 소수자의 진지한 선출을 의미 한다(마22:14). 키텔, op. cit., p. 66. 

 

예수는 여러 곳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마5:20,7:20,18:3,21:31,23:13;막9:47,10:15,23-25). 여기에 언급된 모든 귀절들은 미래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조건들은 현재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조건이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요(마7:21), 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고(마5:20), 그리고 방해나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소유물이라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와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막9:47,10:23-25,10:15). 성서 백과 대사전 12권, op. cit., p. 132. 

 

 

Ⅲ  초대교회가 인식한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 

 

A. 비유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백성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비유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 주고 있다. 바클레이(Barclay)는 비유를 “천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지상의 이야기(an earthly story with a heavenly meaning)”라고 정의 한다. W.바클레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희숙 역(서울;종로서적,1990), p. 7. 

비유들을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의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한적한 곳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해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력을 증진시켰다. 이렇게 교훈되어진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초대교회의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에 관한 개념을 형성하는데 지배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수의 비유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살펴볼 때 초대교회가 인식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모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나는 비유들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3b-9) 

 

(3b)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4)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a) 본문의 배경 

비유에 있어서 마태는 예수께서 공개적 장소에 계시게 한 다음 일반적으로 마가에 의존해 , 2절에 소개되는, 그리고 13장의 전반부를 위한 주요 무대적 배경을 구성하는 예의 대 군중을 창출 한다. J.D.킹스베리, 「예수의 비유」, 김근수 역(서울;도서출판 나단,1991), pp. 44-45. 

군중들은 해변에 서는 반면에, 예수께서는 앉으신다. 그렇다면, 2절에서의 마태의 의도는 예수께 존경을 돌리고, 단순히 랍비적인 교사로서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신적인 존엄(dignity)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려는 구도를 갖고 있다. Ibid., p. 45. 

 

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 비유를 갈릴리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에 그들은 실제로 10월에 가까운 들판에서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보곤 하였다. 물론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이 비유를 가르치실 때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고 있을 때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s.키스트메이커, 「예수님의 비유」, 김근수,최갑종 역(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1989), p. 37.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는 밭에 뿌릴 씨앗을 목에 메는 주머니에 담았다. 농부는 이 씨앗 주머니를 가슴에 차고 율동적인 걸음으로 밭고랑을 따라 씨를 뿌린다. 그때 농부는 밭길에 다소의 씨앗이 떨어져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얼마의 씨앗들이 흙이 별로 없는 돌짝 사이에 떨어지거나 봄이 오면 되살아나서 곡식을 죽일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져도 안타까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농부는 하루종일 그같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Ibid., p. 38. 

 

이러한 배경속에서 예수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전파하게 된다. 

b) 본문의 해석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비유이다(막4:3-8;마13:3-9;눅8:5-8). 특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비유군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며, 그 의도를 보이는 면에 있어서도 우선권이 있으므로 나머지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박형룡, 「씨 뿌리는 비유의 연구」(신학지남 44권 2집, 1977), p. 85. 

 

윌리암 레인은 이 비유에 있어서 핵심은 “여러 종류의 토양이 아닌 행위, 즉 파종하는 행위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 비유에 있어서 중심 요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며, 하나님이 행동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W.레인,「마가복음 상」, 이상훈 역(서울;생명의 말씀사,1983), p. 200. 

 

펜테코스트는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씨를 뿌려도 그 결과는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고 그 결과는 씨를 뿌리는 자나 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자 즉 밭에 달려 있다고 주장 한다. J.D.펜테코스트, 「예수님의 비유」, 서울 서적 편집부 역(서울;서울서적, 1985), p. 54. 

 

래드는 이 비유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 나라의 도래를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강한 권능이 행해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며 모든 나라들이 그들을 섬기며 복종하게 될 것이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예수는 비유에서 그 나라는 이미 인간들 사이에 도래하였으며 그 목적은 악을 멸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선포하셨다. 지금 이 나라에는 불가항력적인 전혀 도발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 나라는 마치 씨를 뿌리고 있는 이 한 명의 농부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래드, 「신약 신학」, op. cit., p. 134. 

 

킹스베리는 마태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이해 했다고 한다. “씨 뿌리는 자는 예수이시다. 한때는 그는 자신의 메세지를 개인적으로 전하셨다. 부활절 후에는, 그는 존귀한 큐리오스로서 그의 교회를 통해 말씀 하신다. 씨 뿌리는 자의 행위는 말씀 전파의 그것이다. 뿌려져 왔거나 전파되어 온 것은 그 말씀이다. 파종꾼이 씨를 아낌 없이 뿌려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은혜에서 모자람이 없으시고, 그 말씀 또한 이스라엘 안에서 후하게 선포되어 왔다. 그것의 먹힘이나 햇볕에 탐이나 숨이 막힘으로 인해 그 씨중에서 낭비의 양이 많았던 것으로 입증되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 대한 말씀 전파에서의 실패율도 또한 컸던 것으로 입증돼 왔다. 그러나 양토에 떨어져 좋은 수확을 내고 있는 그런 씨들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의 선포에 수용적이었고,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 거해 왔으며, 그들 가운데서 풍부하게 계속 결실을 맺고 있는 그 제자들, 혹은 교회도 있다”. 킹스베리, op. cit., pp. 63-64. 

 

학자들에 따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에 관한 비유이다. 비유에 나타난 것과 같이 씨앗이 뿌리워진 밭은 백성의 마음이다. 씨앗인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수확을 거두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말한다. 

 

2.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 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a) 본문의 배경 

이 비유의 배경은 “그의 밭”(24b절), 즉 “그 집의 주인”의 소유인 그 밭이다(27a절). 마13:38절에서는 그 “밭”이 “세상”으로 해석 된다. 그러나 거기서(13:36-44)의 상황은 여기서(13:24-30)의 그것과는 다르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그 집에서 교훈적으로 제자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계신다. 여기서는 그가 호수가에서 변증적으로 유대군중들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계시고, 24절과 28절 사이에 13장의 전반부 결론이 놓인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그 문맥은 그 밭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시사하는데, 우리는 그 밭을 지리적 지역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한다. Ibid., p. 113. 

 

비유에 나타나는 농부는 유능한 농부이다. 그에게는 하인들이 있었고 추수하는 자들을 적절한 시기에 고용하였다. 다른 유능한 농부들과 같이 이 지주는 좋은 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가라지 씨가 뿌려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키스트메이커, op. cit., p. 55. 

 

가라지는 좋은 씨와 유사하여 이른 시기에는 분별하기 쉽지 않았다. 주인의 종들이 이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는 뽑아내기에 합당한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가라지와 함께 곡식이 뽑힐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13:29). 주인은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b) 본문의 해석 

가라지의 비유의 해석을 키스트메이커는 “해석에 있어 원수가 모든 사람이 잠든 틈에 온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곡식과 가라지가 자라고 성숙해 가는 면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고 곡식을 곡간에, 가라지 단을 불 속에 모으는 점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예수님께서 그의 해석에 있어 하인들에 대하여 설명함도 생략하셨다. 아마 예수님은 그의 촛점을 비유의 보다 깊은 중요점에 두었을 것이다. 선과 악의 대결, 하나님과 사단 - 이 대결에서 사단은 전쟁에서 졌다. 이와 같이 농부와 그 하인에 대한 대화는 이 비유의 해석에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대화의 설명은 가라지를 뽑아 불에 태우는 결론의 방법의 방법으로 강조되어짐에 나타난다”(마13:40).고 하였다. Ibid., p. 57. 

 

가라지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래드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더 분명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래드는 “이 비유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관련해서 해석될 때 분명해진다. 그 나라는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고 역사 속에 들어 왔다. 그 나라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그 축복에 참예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이 세대 속에 살며 악인과 함께 섞여있다. 분리는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때에만 있을 것이다. 세상속에 현재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그 나라는 이제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선인과 악인이 섞여 사는 사회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악한 자들은 거두어낼 것이고, 의로운 자들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래드, 「신약 신학」, op. cit., p. 104. 

 

가라지 비유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세상이라는 밭에 뿌리워진 좋은 씨 곧 천국의 아들들로 표현되어 진다(13:38). 그들은 세상 끝 곧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면 의인들로서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자들이다(13:43). 그러나 그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는 악한자의 아들들(가라지)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3. 겨자씨의 비유(마13:31-32) 

 

(31)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a) 본문의 배경 

겨자는 일년생 식물로 10피트에서 12피트까지 높이 자라지만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중에 하나이다. 겨자나무는 팔레스틴 지방이면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식물이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작은 씨가 정원에 심기워져 자라난 겨자나무의 엄청난 성장을 예수님은 간결하게 표현하고 계신다. 분명히 씨의 작음과 나무크기의 차이점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신다. 

예수님 당시는 모든 자들이 그들의 정원이나 채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성직자라 할지라도 그의 채전에서 나는 양념, 곧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마23:23). 모든 정원에는 겨자씨를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이 겨자는 밭 가장자리에 심겨졌는데 그 이유는 이 식물은 넓은 공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키스트메이커, op. cit., p. 63. 

 

사실 겨자씨는 씨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겨자씨가 “모든 씨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하였다. 겨자씨는 씨중 가장 작은 것의 모형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었다. 바클레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op.cit., p. 55.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장차 큰 나무가 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 세계속에서 작고 보잘것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예시해 준다. 

b) 본문의 해석 

겨자씨 비유에 관하여 트랜취( Trench )는 겨자씨가 극히 작다는 점과 후에는 씨에 비해서 굉장히 크다는 점에 주목한다. R.C.트랜취, 「주님의 비유」(서울;생명의 말씀사,1990), p. 56. 

마태는 천국을 한 알의 “겨자씨”에 견주어 말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비유를 시작한다(31b). 천국을 예증하기 위한 한 대상물로서는 겨자씨가 두가지 이유로 안성맞춤이다. 첫째로, 기술적인 면으로 말해서 겨자씨가 비록 실제로“모든 씨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32a)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역시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양 중에서 가장 소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둘째로, 기타의 어떤 작은 씨도 충분히 자란 수목이 겨자나무의 크기까지 이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킹스베리, op. cit., p. 131. 

 

유대인들은 하님의 나라를 열방들이 피난처로 삼을 만한 큰 나무일 것으로 기대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통치의 출현과 분리시켜서 이야기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래드, 「신약 신학」, op. cit., p. 105. 

 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작은 씨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큰것이 될것이라고 하셨다. 

겨자씨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그 시작이 작은 것에 불구 하지만 나중 완성은 크고 웅장한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비유 속에는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나중에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보여주고 있다. 

 

4. 누룩의 비유(마13:33) 

 

(3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a) 본문의 배경 

누룩은 당시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빵을 만드는 재료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율법과 의식, 종교적인 교훈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러므로 누룩의 비유는 청중들에게 친숙감을 주는 비유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친숙한 소재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b) 본문의 해석 

누룩의 비유를 사용한 예수님의 의도는 누룩이 해롭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누룩의 개념을 사용하시는데 이는 누룩이 숨겨진 힘이 있 기 때문이다. 이스트와 누룩은 밀반죽을 전부 부풀게 한다. 그러나, 이 이스트와 누룩은 밀가루 속에 들어가 반죽되면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키스트메이커, op. cit., p. 67.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의미 한다. 

이 비유의 요점은 누룩과 같이 보이지 않은 가운데 성장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장에 있다. 누룩은 눈에서 숨겨져 있으나 그의 영향은 모든 이의 눈에 현저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 능력과 현존을 오늘날 세계에 입증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각 개인 개인이 또한 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고백한다. 그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룬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적용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함으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알려지고 인식되어지는 하나님 왕국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가르치심(누룩)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삶의 영역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다. Ibid., p. 68.

 

겨자씨 비유와 함께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 성장의 비유이다. 겨자씨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말하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그 나라의 내적인 성장을 말하고 있다. 누룩이 밀반죽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점점 부풀어 오르듯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도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되지만 그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모두가 알 수 있게 된다.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비밀스럽게 침투하여 확장되고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점진적 트랜취, op.cit., p. 60. 

이고내적인 성장을 말하고 있다. 

 

5. 감추인 보화 비유(마13:44)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a) 본문의 배경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전쟁이 매우 잦았으며 이에 따르는 혁명 때문에 많은 부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3분하여 일부는 영업을 하거나 생계를 유지하는데 쓰고 일부는 쉽게 휴대할 수 있는 보석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땅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Ibid., p. 62.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보화를 그들 집보다 밭에 숨겨두었다. 집에는 도둑이 이를 찾아낼 것이다. 보화는 밭에서 더 안전하였다. 그러나, 그 주인이 전쟁에 죽게 되면 이 비밀은 영원히 그와 함께 묻히게 되고 그 보화가 어디에숨겨졌는지 아무도 모르게 된다. 키스트메이커, op. cit., p. 70. 

 

이런 이유로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오늘날까지도 동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정경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클레이, 「마태복음 (하)」, 황장욱 역(서울;기독교문사, 1973), p. 138. 

그러므로 예수님의 감추인 보화 비유는 듣는 이들에게 더 깊은 이해를 주었을 것이다. 

b) 본문의 해석 

이 비유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고용인이거나 소작인일 것이다. 그는 평생 이런 귀한 보화를 결코 보지 못했다. 키스트메이커, op.cit., p. 70. 

보화를 발견한 자는 그것을 다시 감추어 두고 집으로 돌아가 자기의 소유를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 그리하여 이 보화는 합법적으로 발견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소유를 위해 희생의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천국의 귀중한 가치를 소유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그 사람이 보화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노력이나 계획을 세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보여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병세,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고신대학 논문집 14집(부산;고신대학 출판부,1986), p. 132. 

 

본문에 나타난 보화의 비유에 있어서 강조점은 보화를 발견한 자의 역동적인 태도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려는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처럼 귀한 것이다. 자기의 가진 모든 소유들 보다 더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이다. 비록 보화를 발견하는 것은 노력에 있지 않지만 보화를 발견한 자 중에서는 자기의 소유와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사는 자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도 자기의 것을 내어 놓고 하나님의 의를 찾는 자이다. 

 

6. 값진 진주의 비유(마13:45-46)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a) 본문의 배경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인데 반해서 진주의 비유에 있어서 주도적 등장인물은 대규모 사업을 운영 하는데 익숙한 부유한 “상인”이다. 킹스베리, op. cit., p.180에서 Jeremias의 글 재인용. 

진주의 비유에 나타난 상인은 값진 진주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 다니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구약시대에는 진주가 분명히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있어서 진주는 부자의 신분을 입증하는 신분이 되었다. 이 때에 진주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좀 더 크고 나은 진주를 찾기 위해 여행을 하였다. 키스터메이커, op. cit., p. 71. 

 

본 비유에 나타나는 상황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아주 값진 진주를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이 상인도 좀 더 크고 귀중한 진주를 찾아 다니는 사람 중 하나로 이해 할 수 있다. 

b) 본문의 해석 

본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모든 소유 보다 귀중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다 팔았다고 해도 그는 그 나라를 위해 작은 댓가를 지불한 것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중에 예기치 못한 형태로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 비유는 피상적인 평가와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사실을 중심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면적인 표시나 가시적인 영광은 없지만,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현재한다. 따라서 그 나라는 가치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주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 나라를 소유하여야 한다. 래드, 「신약 신학」, op. cit., p. 108. 

우리는 예수님을 우연히 만날 때도 있고 이같이 애써 찾아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 보다는 발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애써 찾아도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만났다는데서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전경연, 「마태복음」(서울;대한 기독교 서회,1969), p. 216.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우리는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차지해야 한다. 

 

7. 그물 비유(마13:47-50)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a) 본문의 배경 

당시 팔레스틴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였던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비유는 이해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그들의 배와 그물을 버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물 비유를 말씀 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그 이야기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키스터메이커, op. cit., p. 75. 

 

예수님 당시에 여러 가지 고기 잡는 방법이 있었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은 그물을 사용 하는 것이었다. 이 그물의 높이는 대략 2m 정도이고, 길이는 100m 정도 되는 것이었다. 그물의 윗부분은 콜크로 만들어진 부분에 의해서 지탱되었고, 밑부분은 무거워서 밑으로 잠기게 되어 있었다. Ibid., p. 75. 

그물에 잡히게 된 고기들이 해변으로 인양되고나면 그 비유에서 묘사되는 대로 선별 된다. 킹스베리, op. cit., p. 189. 

기에서의 선별 기준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곧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 된다. 이와 같은 정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그물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말씀 하신다. 

b) 본문의 해석 

이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요소를 덧붙이고 있다. 두 비유들은 모두 예수님의 사역이 처해 있는 삶의 정황과 관련해서, 즉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적인 분리를 경험하지 않고, 이미 이 세상에 들어 왔으며 혼합된 사회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이해 해야 한다. 그물의 비유는 이 사실을 하나님 나라의 활동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까지도 종말론적인 분리가 있을 때까지 순전한 공동체일 수 없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래드, 「신약 신학」, op. cit., p. 109. 

 

이 비유에 있어서 천국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잡는 그물을 비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러 내려가는 전적인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그물 비유에서 어부는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아 모으고, 고기를 선별 한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천사가 와서 의인으로 부터 악인을 갈라서 골라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어부들도 천사들이 이삭을 줍듯이 악인을 골라내는 그 무리에 속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분명히 악인들은 의인의 무리로 부터 따로 골라내어 제거 된다. 키스터메이커, op. cit., p. 78. 

 

이 비유의 강조점은 “구별”에 있는데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별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태우실 것을 알게 하는 비유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지만 마지막 때가 오면 둘은 분리될 것이다. 그물 비유는 이 때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타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현재 주어진 위치에서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B. 산상수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백성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상수훈은 크리스챤 신앙과 생활의 핵심이다. W.바클레이, 「산상수훈 강해」,이희숙 역(서울;종로서적, 1988), p. 6. 

산  설교중에서도 마태복음5:3-12절 까지의 말씀을 축복의 말씀이라 부른다. M.헨리, 「마태복음(상)」, 고영민 역(서울;기독교문사,1978), p. 179. 

여덟가지 축복의 말씀은 산상 설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바클레이, 「산상수훈 강해」, op.cit., p. 6. 

축복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간직할 성품을 다루고 있다. 이 성품들의 특성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어떤 특수한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갖는 성품이다. 둘째로, 이러한 성품들은 어떤 것은 있고 다른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세째로, 여덟가지 성품중 어느 하나도 천성적으로 소유된 성품이 아니다. 네째로, 세상사람과 구별되는 성품이다. 다섯째로, 외형적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성품이다. 

필자는 마태복음5장 3-12절의 말씀 중에서 네가지의 복의 선언을 해석해 나감으로 그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이해를 살펴 볼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마5:3)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첫번째 복에 있어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로 되어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 심령이란 말을 더한 것은 예수님 말씀의 근본 뜻을 밝히기 위하여 더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전경연, op. cit., p. 83. 

 

여기서 사용된 가난이란 헬라어는 프토코스(Ptochos)인데 신약성서에서 총 34회 사용되었으며 프토소오(Ptoso) 에서 왔다. 프토소오 는 얼굴을 가리운다는 뜻으로 거지 생활을 할 때 얼굴을 가리우고 손만 내미는 것을 말한다. 프토코스는 직장도 없고, 집도, 돈도 없어서 전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의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찬, 「목회자를 위한 산상수훈」(대구;두레마을,1990), pp. 25-26. 

 

구약성서에서는 헬라어인 프토코스에 해당되는 아니(ani)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다. 대개 이 말은 가난하다(poor)라고 번역된다. 이 말은 히브리어 의미 발전의 네 단계를 거쳤다. 바클레이, 「산상수훈 강해」, op.cit, p. 15. 「마태복음 상」, 박근용 역(서울;교문사,1971), p. 126. 

 

제1단계는 본래 이 말은 문자 그대로 가난하다를 의미했다. 제2단계는 가난한 사람은 세상 사람의 공격과 모욕으로 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할 힘, 위세(prestige),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제3단계는 이러한 사람이 이와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한쪽 구석에 몰리우거나 압제를 받거나 짓밟히게 된다. 제4단계는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많은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신앙과 성실성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세상과 함께 번영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낮아지는 것이 좋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아니(ani)라는 말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지상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또 그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헌신하는 사람을 기술하는데 사용되었다. Ibid., p. 16. 

 

바클레이는 이 축복 속에는 삶에 대한 온전한 태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속에 삶에 대한 세가지 기본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Ibid., p. 16. 

 

첫째, 이것은 무력감을 깨닫는 것을 통하여 힘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승리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죄의 시인과 고백을 통하여 선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축복이 하는 두번째 일은 부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이 축복은 참다운 부가 재물의 소유에 결코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축복이 가르쳐주고 있는 세번째 교훈은 의존을 통하여 독립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며, 또 복종을 통하여 자유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축복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으로 가장 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자기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그 결핍은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을 내 맡길 때에만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것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Ibid., p. 17. 

 

여기에서 중요한 한가지 사실은 여덟가지 축복들 각각은 긍정 뿐 아니라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축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한 다음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약속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천국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고 그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권세와 영광으로 충만해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천국의 시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며, 그의 전적인 통치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이러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천국은 바로 이들의 소유가 된다. 

 

2.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Μακαριοι οι καθαροι τη καρδια  οτι αυτοι τον θεον οψοντοι  

청결함을 의미하는 헬라어 낱말은 카다로스(Katharos)이다. 이 말은 때가 묻은 더러운 옷과 비교된 깨끗한 옷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즉 흠이 없고 이물질과 섞임이 없는 순수한 것을 가리킨다. Ibid., p 94. 

원래 이 말은 단순히 청결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옷을 깨끗이 세탁했을 때 사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보통 이 말은 키질하고 체로 쳐서 모든 겨를 깨끗이 제거해 버린 곡식에 사용되었다. 또한 물을 타지 아니한 순수한 우유와 포도주에 사용되고 합금되지 아니한 금속에 사용되었다. 카다로스(Katharos)의 근본적인 의미는 “비 혼합, 비 화합, 비 합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클레이, 「마태복음 상」, op. cit., p 145. 

 

예수께서 말씀하신 청결함은 첫째로 외면적인 것이 아니고 내면적인 것이다. 바클레이, 「산상수훈 강해」, op.cit., p. 62. 

예수님은 외면적이고 의식적인 청결함에 몰두해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눅11:39)고 했다. 예수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자요(마5:22),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가 이미 간음한 자(마5:27)라고 하셨다. 두번째로 청결하다는 뜻은 두 마음이 아니고 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세번째로 깨끗한 마음의 뜻은 언어가 정직하다는 말이다. 

마음을 깨끗케하는 방법에는 첫째는 내적인 마음의 청결이 없음을 애통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음이 깨끗해 질 수 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보혈의 능력을 이해할 때 깨끗해진다. 세째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네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이다. 

이 축복의 약속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Ibid., p. 63. 

 나님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곧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경험을 뜻한다. 8절 본문에 있는 “볼 것임이요” 하는 말은 미래형으로 오직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3. 화평케 하는 자의 복(마5:9)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μακαριοι οι ειριηνοποιοι οτι αυτοι υιοι θεου κληθησονται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긍휼의 태도를 취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뿐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역할을 함으로써 평화가 임하도록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 에이레네(eirene)는 모두 88번 나온다. 이 말은 히브리어의 샬롬(shalom)이다. 

샬롬(shalom)은 두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Ibid., p. 67. 

이낱말은 완전한 복지, 평온, 번영, 그리고 행복을 기술하고 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평화는 완전하고 온전한 적극적 행복의 조건이다. 둘째로 샬롬은 바른 인간관계를 기술한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친밀성, 친교, 중단되지 않는 호의를 기술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화평이란 말에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없다. 화평이란 언제나 인간의 최고의 선을 이루는데 공헌하는 모든 것을 의미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복은 화평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만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있나니”의 의미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요 이다. 바클레이, 「마태복음 상」, op. cit., p. 148. 

 

성서는 하나님을 평강의 근원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시29:11;사9:6;롬15:13,16:20;고전14:33;고후13:11;빌4:9;딤전5:23 ...). 하나님은 평화를 이루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그분은 죄인된 인간들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막힌 담을 헐어 주셨다. 아들은 그 아버지를 닮고 따라가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화평의 본을 배우며 지켜 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의 복(마5:10-12)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μακαριοι οι δεδιωγμενοι ενεκεν δικαιοσυνηs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μακαριοι εστε οταν ονειδισωσιν υμαs 

και διωξωσιν και ειπωσιν παν πονηρον καθ υμων ψευδομενοι 

ενεκεν εμου χαιρετε και αγαλλιασθε οτι ο μισθοs υμων πολυs 

εν τοιs ουρανοιs ουτωs γαρ εδιωξαν τουs προφηταs τουs προ 

υμων                   천국을 소유할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의를 위하여(ενεκεν δικαιοσυνηs)는 의로 말미암아, 의 때문에로 옮길 수 있다. 핍박을 받는 자들(οι δεδιωγμενοι)은 핍박을 견디어 낸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뜻은 그들에게 핍박이 닥쳐올 때 이것에 기꺼이 복종하였다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4: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히11:26)등에 나타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발견 될 수 있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박해를 받아들이고 참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는 확신이 흐르고 있다. 바클레이, 「산상수훈 강해」, op.cit., p. 95. 

베 로전서 2장 21-24절에는 과분한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요 또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임을 언급하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는 믿음과 충성이 초래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마태복음 5장 3-12절을 시작하면서 주어졌던 복(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이 마지막 여덟번째의 축복에서 다시 주어진다. 이것은 팔복의 전체적인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이루어지는 현재적이고도 미래적인 변혁의 선포라고 볼 수 있다. 사실상 팔복에서 복이 있다고 하는 대상들인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 핍박 받는 자등은 세상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전혀 복이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에 대한 궁극적 보상은 아주 명백하다. Ibid., p. 96. 

하나님 나라와 함께 그들의 상태는 뒤바뀌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하는 자에게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핍박에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χαιρετε και αγαλλιασθε)에서 “기뻐 하라”는 명령어이고 마음에 넘치는 희열을 말한다. 즐거워 하라는 표정까지 넘쳐 나오는 최상의 기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핍박은 늘 있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운데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 왔다. 

 

Ⅳ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A.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신약성서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제로 말하여 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과 같아서 미래가 아닌 현재에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고 있다(막4:3이하).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과 기대가 자기 안에서 성취 되었다고 선언 하였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이 이처럼 현재적 실체로 성취된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 했다고 선포하셨다. V.케리 인만, 「당신의 천국개념은 전통적인가,성경적인가」,이길상 역(서울;나침반사,1991), p. 53.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적인 능력의 행하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 활동과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들로 이해되어 진다(눅11:20;마12:28,13:). 그런데 이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눈으로 부터 숨기워져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은 분명하고 뚜렷하게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 

그리하여 존 브라이트는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현존한다 브라이트, op.cit., p. 291. 

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복음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성서가 그 나라에 관하여 언급할 때 이미 시상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 났다. 구약성서의 미래 시상(“보라 그 날이 오리라”)이 현재 시상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라는 선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약속과 성취”의 구조를 실현시키고 있다. 

신약성서는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눅11:31-32), 아니 성전과 율법보다 더 위대한 이(마12:65-8)가 여기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종의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나타났다(눅4:17-21).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의 활동을 볼 수 있게 되었다(마11:2-6). 이것은 과거의 모든 사람이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한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눅10:23-24). 이제는 더 이상 그 나라의 긴박성의 징조를 급박하게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여러분 가운데”(눅17:21) 있기 때문이며 Ibid., p. 282. 

예수님의 오심과 동시에 실재로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12:28절의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는 매우 강한 어조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말씀하고 있다. 이 본문의 마지막 말은 완료형인 ‘임하였느니라’(has come)로 번역해야만 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 본문은 전 문맥, 특히 마태복음에서 따르고 있는 전 문맥 가운데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더러 귀신들의 대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내었다고 비방하는 것에 대한 대답에서 사탄과 그의 왕국과 적대되는 것이 하나님과 그의 임의대로 하시는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의 능력과 그것의 현존이야말로 예수께서 귀신들 위에 권세를 가진 것의 설명이 된다. 리델보스, op. cit., pp. 102-103. 

 

래드(Ladd)는 이와 더불어 성경은 말하기를 사탄은 이미 패배했고 그는 이미 떨어졌으며(눅10:18) 그것은 이미 결박되어졌으며(막3:27), 그의 권세 아래 졸개들은 이미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굴복되었다(막1:27-39,3:11)라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류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새 시대가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곧 하나님의 권능이 그 기적속에 현존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마귀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는 사탄의 왕국을 쳐부수고 마귀세력에서 승리하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행한 능력있는 일들을 통하여 사탄의 나라는 파괴되고 하나님의 권능은 이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는 실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지배권이 작용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이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태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의 이적과 사탄을 물리치심뿐 아니라 그의 설교 가운데서도 메시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도래가 성취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누가복음 16장16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언급한다. 여기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대와 대조되어 등장한다. 다른 말로 말해서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자들에게는 오로지 대망만 되었던 것이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복음의 전파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임하였다는 증거이다. Ibid., pp. 116-117. 

 

이 밖의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쿨만(Cullman)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래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생활 속에 임하였다고 한다”고 했다. 

스튜어트(Stewart)는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천국”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상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민족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성격이다. 둘째, 세상적이 아니라 영적인 성격이다. 세째, 이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이상용,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연구」(서울:총신대학 신학대학원,1984), p.33에서 재인용 

 

풀러(Fuller)는 절박한 종말론적 왕국과 실현화된 종말론을 인정하며 결론짓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앞에 적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예상적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흔적속에 들어오고 있으나 결정적 사건은 미래이지 과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Ibid., p. 35. 

 

구약시대에 예언되어졌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 되었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미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적으로 현재속에 임하였다. 앞 장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예수님의 비유(마13장)와 교훈(마5장)들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다음으로 미래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B.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복음서의 교훈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현재와 미래, 양쪽에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현재와 미래, 양쪽에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그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재의 영역과 미래의 영역, 이 양쪽 모두를 창조한다. 래드, 「하나님 나라의 복음」, op. cit., p. 27. 

 음서 자료는 그 나라의 미래적 종말론적 측면을 단순히 현재적 측면에 부수하는 것이 아닌 우선적인 시제적 교훈으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래드,「하나님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op.cit.,p.71. 

 

산상 설교는 현재적 의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은 현 세상을 사는데 필요함보다 그 미래적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전제로서 이해된다. 그 나라는 왔던 나라가 아닌, 사람이 지금 스스로 그것의 도래를 예비해야만 하는 나라이다. Ibid., p. 72.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그 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낼지라도 그것의 충분함과 완전함은 현존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시대의 완료때 까지는 함께 그 나라 밖으로 내어 쫓기지 않으며 오직 그 때에 가서야 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13:38-43). 하나님 나라는 현시대의 완료시에 선과 악이 분리되기 까지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마13:47-50). Ibid., p. 73.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그날’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그날(즉,미래의 심판일)로 언급하였다. D.거스리,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사역」, 이중수 역 (서울;한국 성서 유니온,1989), p. 316. 

 것은 미래의 사건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6장 29절에는 또 하나의 ‘그날’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여기서 예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실 때까지는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Ibid., p. 317. 

 

이 밖에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다”(마21:43)등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비유들 중에서도 ‘달란트 비유’, ‘열 처녀의 비유’등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몸의 부활 등에서 확실히 앞으로 올 천국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나라임을 확신한다. 예수의 오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씨중에 가장 작은 씨가 성장하여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져 간다. 완성된 그 나라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이 때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영광의 모습으로 그의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신약성서의 주된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백성에 대한 고찰을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나 국토의 의미 보다는 통치의 개념이 지배적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의 일종이었다. 

신약성서의 맥락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성육신을 통하여 역사 속에에 들어왔다. 공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하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두가지로 나타난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 보다 “하늘 나라”의 개념을 더 선호 한다. 이것은 유대적 기독교의 특징으로써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용어는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교훈하신 비유들 속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에 속한 백성들을 살펴보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지상의 이야기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비유를 사용 하였다.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의 원리와 숨겨져 있는 비밀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5장 3-12절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지녀야할 성품과 생활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 성품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고난에 대한 궁극적 보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주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한 개념은 마태복음 5장 3-12절의 말씀속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성품과 유사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성과 미래성의 양면성으로 나타내는 것이 신약의 신학이다. 예수의 이적과 사탄을 추방하심 그리고 말씀의 선포를 볼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 그 나라는 파루시아 즉 재림과 함께 그 날에 완성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와 미래성 사이에 존재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들에게 구약성서를 통하여 예시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특별한 윤리적인 삶을 요구 한다. 그 요구된바 특별한 윤리적인 삶은 고난 받는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통하여 실체화되는데, 그것은 긴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사랑과 희생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조건을 현재적 삶에서 충족시켜야 한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현재의 생활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모형은 이미 초대교회의 공동체에게 주어졌다. 이 땅에서 예수의 비유와 교훈들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윤리를 지키는 자는 분명 그 나라의 백성된 자격을 부여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본질적으로 같은맥락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선교대명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지속적으로 관련이 있는 명령인 것이다. 이 명령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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