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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에 관한 톰 라이트의 해석 비판-김원호

메르시어 2023. 5. 6. 11:54

칭의에 관한 칼빈과 톰 라이트의 해석의 차이-김원호

2014-10-04 01:04:12


1. 톰 라이트

 

1) 톰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시작되며 칭의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완전한 극치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을 받는다는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2)

 

2)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생각하고 있던 칭의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에 의하여 미래와 현재에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3)

 

3) 톰 라이트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안에 속하여 있느냐의 자격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4)규정하고 있는 것이다.5)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성경 교리의 다른 중심축과 연계되어있지 않다.

 

5) 톰 라이트는 칭의를 개인 차원의 주제가 아닌 공동체적인 성격에서 규정하고 있다.

 

2. 칼빈

 

1)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로 믿는 자에게 전가됨으로 인하여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6)

 

2) (톰 라이트 못지않게 1세기 유대자료를 많이 연구하였던)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좋게 받으시는 수단으로서의 칭의를 말한다. 이러한 칭의는 죄를 사해주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7)

 

 

 

 

3) 칼빈은 의가 필요한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다.8)

 

4)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성경의 다른 주제의 중심 축과 서로 연계되어있다.

칼빈은 구원론과 거듭남, 믿음, 죄, 회개, 그리고 성화등을 칭의와 연계시키고있다.9)

 

5) 칼빈은 톰 라이트와 달리 개인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에 대한 강조가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지나치게 강조되지는 않는다.10)

 

3. 종합적인 소견

 

1) 톰 라이트는 언약을 근거로 한 칭의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칭의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그가 말하는 칭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톰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언약을 중심으로 정의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도 언약을 중심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분모가 되는 “의(Righteousness)"를 언약의 개념을 기초로 정립하고 있기에 의롭다고 인정되는 개념인 "칭의(Justification)"는 언약을 떠나서는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11)

 톰 라이트가 의로운 상태라고 말하는 언약 백성으로 있기 위한 조건은 믿음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않아도 되고 다만 백성의 일원으로서 율법을 지킴으로서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혹시라도 율법을 어기게 되면 율법 안에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회개를 하고다시 율법을 지키면 언약 백성 안에 있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유지 될 때 종말론적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다.12)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의의 전가와 더불어 더 이상의 요구 조건이 필요 없는13)완성된 상태14)인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완성의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미래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 이는 믿음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됨으로서 칭의가 완성된 상태와 비교되는 미래적인 개념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현재 상태만으로는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 톰 라이트의 칭의 개념은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와 같은 맥락이다.

 

 톰 라이트는 여러 가지 출판물이나 인터뷰를 통하여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종말론적 개념의 현재적 칭의이다. 이는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구원을 약속받았다는 것을 전재로 언약 안에 있는 상태를 의롭다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 시대인 현재에도 이방인인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개념의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 백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율법이 언약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방인과 구별을 두기 위한 법으로 규정하듯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언약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시며 예수님은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의가 빠진 칭의 개념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 의의 전가(Imputation) 대신에 언약 백성으로 있기만 하면 된다.15)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전가가 필수요소이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기에 예수님의 역할은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조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 되는 것이다.16)

 

4)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다르다.

 

 톰 라이트의 칭의 개념이 칼빈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의 의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나온 개념이다. 행함이 전제가 되는 개념의 의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행함을 통하여 언약 안에 머물러야할 것이 요구된다.17)

 

 

5) 톰 라이트의 칭의는 자격(Identity)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속해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마치 회원이냐 아니냐와 같이 그 사람의 본질의 변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비 조건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하며 세례와 더불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수반되어야한다. 톰 라이트는 세례의 행위를 로마카톨릭과 같이 일종의 자격(Identity)을 얻는 행위로 보고 있다.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부터 시작된 세례 행위를 통한 자격 획득의 개념은 로마 카톨릭에서 정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같은 개념에서 자격 획득의 수단으로 세례를 말하고 있다.18)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세례는 자격 획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고 의인이 된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행위로서 새관점이나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례와는 개념이 다르다.

 

6) 톰 라이트는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은 죄인이 아닌 약속된 의인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죄의 문제가 언제 해결 되었느냐는 주제에 대하여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전혀 다르게 보고있다.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 사건 이전에는 모든 인류가 죄 안에 있었던 상태이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속죄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백성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톰 라이트는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아담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전재로 하고 있다. 즉 언약 백성으로 있는 상태 자체가 의로운 상태이고 칭의의 의미는  이러한 의로운 상태가 종말까지 이어졌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아직 의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의가 전가 되어 의인이 되는 과정 즉 구원의 과정 이후에 칭의를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시점에 있는 반면 톰 라이트의 칭의는 의로운 상태가 완성되는 종말에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톰라이트는 어떻게 언약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 것인가가 관심의 주제라면 칼빈은 어떻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 구원 받은 백성이 될 것이고 의로운 자로서 마땅한 도리로서의 성화의 차원에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로 인하여 톰 라이트는 행위를 칼빈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행위냐 믿음이냐 이것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칼빈의 이론을 따르는 전통적 개혁주의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커다란 시각 차이로 인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교리는 자연스럽게 구원론에 관한 논의를 모두 건너뛰고 있다는 것이다.19)

 

 

 

6) 칼빈의 교리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이다.20)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의 칭의는 오직 성경의 한 부분만을 이루고 있을 뿐인데 반하여 칼빈의 칭의론은 창세 전에 시작된 구속 언약에서부터 창조 언약, 은혜 언약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전체 구도 가운데 중요한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톰 라이트에게 개인 구원에 관한 칭의에 대한 주제는 공동체적 구원에 관한 언약백성의 주제보다 덜 중요하기에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칭의는 톰 라이트에게 불편한 주제일 따름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언약 백성이라는 의로운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의로움의 상태는 개인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백성이라는 공동체적인 속성에 있기에 톰 라이트의 의로움에 대한 개념은 공동체가 1차적이고 개인은 1차적 공동체의 2차적 결과물인 것이다.

 반면에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공동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에 의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달된 개인에 국한된 것이며 교회는 다만 일차적으로 칭의 된 자들이 모이는 이차적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결론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개혁주의와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해석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게 하라”는 개혁주의와 달리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이미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내려진 결론21)을 도입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으로 해석되어진 새관점은 모든 내용을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반하여 개혁주의는 새관점과 달리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결과는 아담의 죄의 문제의 해결 시점과 방법, 율법의 의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월절 만찬의 의미,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 승천, 다시 오심의 모든 의미가 달라지게 되며 이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가게된다.

 만약 톰 라이트의 해석이 옳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자 즉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마틴 로이드 존스, 메이첸등 개혁주의 신학자와 신앙인 모두 다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톰 라이트가 틀렸다면 톰 라이트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와 개혁주의의 상반된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이 둘 다 옳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누구를 옳다고 인정하고 수용 할 것이냐는 우리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기에 결코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닌 것이다.

1)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를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2) Wright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God’s declaration that a person is part of His covenant people and that this is primarily tied in with the ultimate eschatological vindication of the people of God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p10/22)

3) Wright defines justification in the following manner: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Wright, Paul, p. 119.]

4) 톰 라이트의 칭의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전재로 하고있다. 이러한 완성의 개념은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세미 펠라기우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공로로 구원이 완성되어진다는 개념이다.

5) Wright’s definition speaks of identity—who belongs to the covenant—or in other words, Wright speaks from ecclesiology. (P10/22) 

 

6) Calvin, on the other hand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the actual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believer through faith.

7) Calvin, on the other hand, defines it a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Calvin, Institutes, 3.9.2, p. 727.]

8) Calvin, on the other hand, speaks about sin, the need for righteousness—or in other words, Calvin speaks from soteriology.(p11/22)

 

9)It is important that we notice that Calvin’s treatment of justification rotates on an entirely different axis than that of Wright.  Notice how Calvin connects matters of soteriology, regeneration, faith, guilt,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to justification.  Moreover, Calvin emphasizes the individual believer whereas Wright does not. (p12/22)

10) Calvin does not 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11)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칭의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해석을 아브라함 언약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율법을 잘 지켰다면 예수님의 성육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13)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행위적 공로가 추가되어야하는 반펠라기우스(semi-pelagius) 개념과 대립되는 차원에서의 완성이다.

14) 톰 라이트는 의의 완성 즉 칭의를 종말론적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칼빈은 칭의를 현재적 완성으로 보고 있다.

15) 톰 라이트는 율법이 언약 백성으로 있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고 보고 있다.

16) 새관점의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의 주체가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주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신 것이다.

17) 톰 라이트는 의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닌 행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펠라기우스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18) Justification: Understanding the Classic Reformed Doctrine. J. V. Fesko p10

 

19) What makes the critic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Wright virtually by-passes all discussions that pertain to soteriology effectively divorcing it from other doctrinal considerations.(p12/22)

20) Calvin recognizes that doctrine as a whole is organic.(p12/22)

21) 톰 라이트는 1세기의 고대 문서를 분석하여 내린 결론 즉 율법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결론을 성경해석의 전제로 도입하였다. 

 

마이클 호튼이 말하는 바울과 언약적 율법주의- 김원호

2014-10-04 01:11:16


마이클 호튼이 말하는 바울과 언약적 율법주의

 

(의역 주관적 편집)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논하면서 E.P.Sanders는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는 그동안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바와같이 "꼭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말한다.

전통적 개혁주의가 말하는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지키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상태로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이미 의로운 상태이므로 따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게 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 다음은 순종의 문제로서 토라나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만약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다는 개념에 대하여 말하였다면 이는 (바울이)유대주의를 잘못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같은 새관점 신학자들은 샌더스가 1세기 유대주의를 (의를 얻기 위한)율법주의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옳다고 동의하면서 더 나아가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보는 바울에 대한 해석에 반하여 바울(이 말하는 유대주의)을 "언약적 율법주의"와 일치 시키는 작업을 시도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보통 유대인이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회개를 하거나 율법에 새롭게 복종함으로서 언약 안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지켜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순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의 종교라고 샌더스나 그 밖의 새관점 신학자들이 말하는 이유는 율법이 범죄를 허용하고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개혁주의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것을 말하기에 이와 대조로 은혜를 적용한다.)

우리는 샌더스가 주장하는1세기의 유대주의가 개혁주의들이 부정하고있는 중세 신학과 얼마나 다른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확신한 것은 바울시대의 유대주의는 단순히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는 펠라기우스주의는 아니다.또한 후기 중세의 로마카톨릭의 가르침도 그렇게 액면 그대로의 펠라기우스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아무리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초기 유대주의와 후기 중세와는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에 대하여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즉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우리의 순종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샌더스의 요약 즉 초기 유대주의는 "은혜 안에 들어가서 순종으로 머문다"는 것이고 이는 " 우선 세례를 통하여 의롭게 되지만 은혜가 증가하여 최종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협력에 달려있다"는 중세 카톨릭의 관점과 평행을 이룬 닮은 꼴 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명확하고 단순한 명제가 중세의 틀 안에서 보았을 때는 개혁주의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논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그 자체가 장점이 될 수가 없기에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에 부족한 것이다.

후기 중세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아직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믿는 자들이 덕스러운 자세로 행하였을 때 이를 받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엄격한 시나이 율법을 유하게 만들고서 이를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중세 신학자들은 행함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아무도 얻을 수 없는 엄격한 공로( strict merit)와 다른 하나는 구원을 얻기에 유용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한 일에 해당되는 인정해주는 공로(proposionate merit)로 둘로 나누었다.

이를 쉬운 말로 표현하면 "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구원의 근거로 인정을 하여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은혜로 들어가서 순종으로 머문다"는 개념이고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공격한 구원 개념이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반발의 풍부한 근거가 되고있다.

바울의 서신들,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샌더스와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근본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으로 1세기 유대주의를 보고 있다면 이러한 말이 옳을 수있다고 말한다.

설령 1세기 유대주의가 완전한 율법주의가 아니라 " 언약적 율법주의"가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다음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 이단들에게 반대하고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라디아서 3:1-4 )

이러한 혼동은 실제로 개혁주의자들도 직면하고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산을 받는데 있어서 교회 역사를 통하여 성경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율법과 복음, 충성과 믿음을 혼동할 때 나타나게 된다.

 

 

(참조출처)

Paul and Covenantal Nomism

Michael S. Horton

 

In advancing what has come to be called "the new perspective on Paul," E. P. Sanders argues strenuously that the Judaism in Paul's day was not "legalistic," as traditional Protestant readings maintain, but that it was characterized by "covenantal nomism." Legalism claims that we can become righteous simply by choosing to obey God's commandments. Covenantal nomism holds, in contrast, that righteousness is a matter of being part of God's covenant people, which is initially a matter of grace-"getting in" to God's covenant is a matter of God's "electing" or choosing-but then becomes a matter of obedience-"staying in" God's covenant requires obeying the stipulations that come with it, which make Torah, God's law. Sanders concludes that if Paul was in fact reacting against legalistic works-righteousness, then he was wrong to take Judaism as his target. Other "new perspective" theologians, such as James D. G. Dunn and N. T. Wright, think Sanders is right about first-century Judaism not being legalistic, but they then attempt in varying degrees to reconcile Paul with "covenantal nomism" against the classic "Reformation" reading of Paul.

Covenantal nomism also holds that the average Jewish person may sin and yet remain in the covenant through repentance, renewed obedience to the law, and (according to some major rabbinical sources) the "merit of the fathers"-the faithful deeds of the patriarchs. The condition for remaining in the covenant is not, then, successfully fulfilling all of God's commandments-it is not legalistic perfectionism-but freely intending to obey them. The fact that covenantal nomism provides for transgressions and does not require perfect obedience means, for Sanders and others, that it was after all a religion of grace.

It is unclear how such "covenantal nomism" i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e medieval system that the reformers rejected, even if we grant many of Sanders's points about first-century Judaism. To be sure, the Judaism of Paul's day was not simply pull-yourself-up-by-your-own-bootstraps Pelagianism; and it has been a travesty of Protestant interpretation to suggest as much. Yet late medieval Roman Catholic teaching was not such a raw Pelagianism, either.

However great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early Judaism and late medievalism shared a similar hunch about how salvation works: God's mercy is not absent, but it is conditioned upon our obedience. Sanders's summary of early Judaism as "getting in by grace, staying in by obedience" parallels the medieval view that "first justification" through baptism is by grace alone while increase in grace and final justification depends on human cooperation. No one can be "saved by works," plain and simple, according to the medieval scheme of things, contrary to the popular but ill-informed polemics of many Protestants. For human works are never truly meritorious in and of themselves, and thus they are always insufficient to gain God's favor. Yet God has provided a covenant, say the later medieval theologians, in which he promises to accept as meritorious the believer's virtuous attitudes and actions. This softening of the strictness of the law at Sinai ("Do this and you shall live") is called "good news."

These medieval theologians developed a distinction between merit de condigno (strict merit), which no human being can attain after the fall, and merit de congruo (proportionate merit), which involves good works that God accepts as if they merit salvation. The common saying was this: "God will not deny his grace to those who do what lies within them." So while my works cannot earn salvation in the strictest sense, God will accept them as meritorious if, after all, I do my best. This is "getting in by grace, staying in by obedience;" and as such, it was precisely the view of salvation that the reformers attacked on biblical grounds. Galatians was a gold mine for such resistance.

Paul's letters-and specifically Galatians-show that Sanders and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re basically right in their identification of first-century Judaism as "covenantal nomism." But even if we grant that covenantal nomism rather than perfectionistic legalism was the broad consensus formula for first-century Judaism, it is precisely this that Paul opposes as the Galatian heresy: "O foolish Galatians! . . . Let me ask you only this: Did you receive the Spirit by works of the law or by the hearing with faith? Are you so foolish? Having begun by the Spirit, are you now being perfected by the flesh?" (Gal. 3:1-4). This confusion is substantially the same as the one the Protestant reformers faced. It crops up throughout church history whenever Scripture's clear distinctions between law and gospel, faithfulness and faith, get confused concerning the way we receive the inheritance promised to Abraham.

 

1 [ Back ] Michael Horton's citation of E. P. Sanders comes from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For more recent exploration along these lines, but with some variations, see also James D. G. Dunn,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and What S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The literature of the new perspective is vast and still gro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