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의 교회 이념의 형성
카톨릭의 교회 이념의 형성
2014-10-02 15:25:53
이 글은 스터어링 p. 렘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
바울과 어거스틴 사이의 약 4세기에 걸친 기간에 중세 기독교 왕국의 형성기가 있었다. 이 시대를 보통 교부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때 등장한 교부들이 유스티노스, 터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키프리아누스, 아타나시우스, 암부로시우스, 예로메 같은 사람들이다. 교부 시대의 현저한 업적은 교회를 카톨릭이란 조직으로 형성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기독교도들의 가장 긴급한 문제는 종교적 신념의 통일, 도덕적 실천의 통일, 조직의 통일이었다.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류의 통일은 조직의 통일이었다. 왜냐하면 일단 조직이 통일되면 다른 것의 통일도 쉽기때문이다. 카톨릭의 교회이념의 형성은 북 아프리카의 두 위급한 교회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노바티아누스 사건이다. 기원후 250년 데시우스 로마 황제는 로마 제국의 다신중의 하나로서 황제 자신에데 희생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그 명령이 카르타고에서 강행되었을 때 박해가 일어났고 이 박해애 굴복한 일부 기독교도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이탈자라고 불렀다. 박해가 사라지자 이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기를 원하였는데 이들의 복귀를 반대한 사람이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인 노바티아누스였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주교 코넬리우스는 이탈자들의 복귀 승인을 권고하였으며 코넬리우스의 주권하에 있는 종교회의는 노바타아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하였다. 키프리아누스는 코넬리우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교회의 공식적인 이념으로 여겨지게 된 원리를 형성하였다. 교회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의식을 통하여 약간의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들이는 구원의 방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분열은 최대의 죄이니 그것은 알려져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수단인 교회로 부터 분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주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진리와 은총의 유일한 분여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교 없이는 교회가 없으며 교회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키프리아누스의 입장에서 암암리에 표명된 의미는 교회는 그 안에 들어오는 개인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개인들에 앞서는 것이며 다른 것에 의존치 않고 그 자체로서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나타난 사건이 기원후 301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 일어난 도나투스 사건이었다. 또 다시 황제를 숭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카르타고에서 박해가 일어났으며 역시 이탈자들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더 심각해 진 것은 이탈자중에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해가 사라지자 다시 성직자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허락을 받고자 하였다. 도나투스를 중심으로한 일파들은 불완전한 인격의 성직자는 유효한 예식을 주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재임명을 거부하였다. 이데 반하여 다른 일파에서는 성례식의 효과는 그것을 주재하는 성직자의 인격에 따라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임명을 찬성하였다. 313년에 이 사건은 로마에서 심리되었고 강경파인 도나투스는 유죄 선고를 받았다. 도나투스를 중심으로 분리된 분파는 이후 백여년 동안이나 북아프리카에 존속하였다.
노바타우스와 도나투스의 패배로 인하여 교회의 이념이 발전되었고 카톨릭 교회의 행정적 통일을 위한 지적인 정당화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교회 이념에는 이후 세기를 거듭하면서 탐구된 심오한 형이상학적 및 인식론적 의미가 추가되었다. 이 카톨릭의 교회 이념에 의하면 교회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우연히 아무때나 그 구성원이 되는 개인들의 덕택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교회는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그것의 기시적 표현들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 교회의 공직은 그 자리에 앉는 사람들의 인격이 어떠허든지 간에 신성한 것이다. 교회의 성례의 효력은 교회의 신성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성례를 주재하는 성직자의 성스러움의 정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