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헌터의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제임스 헌터의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서평- 심현준
2014-09-29 14:40:00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를 읽고...
* 요약 및 논평 : 심현준(‘삶을 위한 독서 클럽’ 회원)
* 이 글은 서평이라기보다는 책을 구하기 어려운 분들까지 감안해 핵심요약에 주력한 글이어서 내용이 다소 깁니다(A4지 12장정도). 1~11번 글은 책의 1부, 12~19번은 2부, 20~26번은 3부에 해당합니다. 11, 19, 26번에서 각 부 내용에 대해 간단히 논평한 뒤 다음 부 내용으로 연결해 넘어갑니다. 이미 책을 읽으셔서 내용을 숙지하고 계신 분들은 이 세 글만 참고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글 읽는 것이 결코 책 읽는 것을 대신할 수 없겠지만, 행간을 조금 상상하시며 읽으신다면 헌터가 주장하는 내용의 대지 파악에는 도움이 되리라 예상합니다. 아무래도 일독 후 읽으신다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제1부: “기독교와 세계변혁]
1. "솔직히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하면 60여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놓아요. 그러면 저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정말 죄송스러워요. 제가 한 거는...여기 이 (트로피) 여자 발가락 몇 개만 떼어 가면 제 꺼 같아요."
2. 윗글은 2005년 제 26회 청룡영화제에서 <너는 내 운명>이란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영화배우 황정민의 수상소감 일부입니다. 많이 회자되었던 이 말은, '영화'라는 한 문화상품을 감상할 때 주연배우의 연기력에만 주목하기 쉬운 대중들의 시선과 생각을 조연배우들과 많은 스태프들의 잘 드러나지 않는 수고로 향하게 했지요. 물론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이런 종류의 수상소감을 말하지만, 황정민의 '밥상 소감'은 상당히 인상 깊었기에 아직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3.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이하 헌터)가 이 책 1부에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배우 황정민이 그의 수상소감을 듣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비슷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자면, 황정민의 소감은 어떤 의미에서 '한 영화가 여러분들께 감동을 드리는데 있어 주연배우의 인기와 역량 말고도 (어쩌면 그보다 더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진장 많습니다.'라는 뜻이고, 헌터의 메시지는 '기독교가 세상(특히 문화)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개개인 신자들의 신실함과 역량 말고도 (어쩌면 그보다 더 실질적으로) 투자하고 힘을 쏟아야 할 것이 무진장 많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4. 먼저 헌터는 1부 1장에서 주요 성경내용에 대한 간략한 주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본성'(p.15)이 우리를, '심판과 지옥을 향해 침몰하는' 세상을 포기하는 '구조선 신학(lifeboat theology)'의 추종자가 아닌, '세상을 만드는 자(world-maker)'로서 '세상에 관여하고, 그것을 형성하고, 마침내 그것을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열정'으로 살아가게 만든다고 주장하며(p.16), 그것이 창조 명령에의 순종임과 또한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실제적 유산이 '영감'과 '회개'의 양면성을 갖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순종이 여전히 필요하고 또 순종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밝힙니다(p17~18). 그러나 헌터는 자신의 논지전개를 위해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가?"(p.18)라는 회의적 질문을 던집니다. 현재 (미국 기독교인 대부분이) '문화와 문화적 변화에 대해 생각하는 지배적 방식들이 틀렸다'(p.19)는 것이 그의 단호한 문제제기입니다.
5. 그래서 헌터는 2장에서 (미국에서) 문화를 변혁하는 일에 관여하는 주요한 기독교 세력들(복음주의자, 정치적 행동가, 사회 개혁가)이 가진 3가지 작업가설을 압축해서 분석제시하고(pp.26~35), '그것들이 서로 달라 보이지만', 찰스 콜슨 등의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사람들이 변하면 문화도 변한다.'라는 근본적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p.36). 그러한 관점에는 '첫째, "문화 변혁은 개인적 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둘째...변화된 개인들의 결정이 합리적이고 일관되며, 그들의 선택이 의식적이고 사려 깊다면, 문화 변혁은 목적이 분명하고 계획적일 수 있다...셋째, 변화는...보통 사람들 속에서 아래로부터 발생한다.'(p.36)는 확신들이 깔려있는데, 헌터는 그런 주장들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남용되고 있다.'(p.37)는 단호한 부정적 평가를 내립니다.
6. 3장에서 헌터는 있을지도 모를 거센 반발을 예상한 듯, 자신이 내리는 부정적 평가가 '복음전도, 정치, 혹은 사회 개혁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런 전략들을 지탱하고...승인하는 기초 이론(working theory)'에 대한 것임을 해명한 뒤(p.40), 그런 평가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의 중요한 지적은, '문화가...가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이 내린 선택의 집적'이라는 주장이 (형식적이든 열정적이든) 기독교 신자들이 통계적으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문화가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며 '자주 다수의 의견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p.40~45). 헌터는 그 이유를, 기독교인 개개인들이 충분히 기독교적이지 않거나 하나님의 소명을 충분히 수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견해보다는, 기존 문화변혁이론이 플라톤에서 연원하여 근대 독일에서 완성된 '관념론(헤겔주의)'과 '기독교 경건주의’, 그리고 미국 특유의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나름의 분석에서 찾습니다. 관념론에 대한 그의 결론은, 그것이 ‘문화의 제도적 본성을 무시하고 또 문화가 권력구조 안에서 구체화되는 방식을 간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념론이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원론을 (도리어)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복음주의 내에서 앤디 크라우치 등이 문화를 ‘구체적, 문화적 생산물’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소개했으나, 그 역시 지배적 시각이 가지는 기초적 전제들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에 ‘문화 및 그것과 기독교와의 관계의 복잡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함을 지적한 헌터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7. 4장에서 헌터는 문화와 문화변혁에 대한 대안적 견해를 11가지(문화 자체 1~7, 문화 변혁 8~11) 명제로 제시하는데, 결국 문화변혁에 대한 명제가 중요합니다.(pp.61~77)
(1) 문화는 일종의 진리 주장과 도덕적 의무 체계다.
(2)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3) 문화는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다.
(4) 문화는 자원이며, 그 자체로 권력이다.
(5) 문화적 산물과 상징 자본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엄격한 구조 속에 층화되어 있다.
(6) 문화는 네트워크 내에서 생성된다.
(7) 문화는 자율적이지도, 충분히 일관적이지도 않다.
(8) 문화는 가끔 아래에서 위로 변하지만,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변한다.
(9) 변화는 대개 명성 밖에 있는 엘리트에게서 시작된다.
(10) 세계변혁의 집중력은 엘리트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이 주도하는 제도들이 중첩될 때 극대화된다.
(11) 문화는 변한다. 하지만 투쟁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1~7번 명제들이 8~11번 명제들 도출의 근거라 볼 수 있으며, 특히 문화변혁과 관련된 8~11번 명제들은 일견 복음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가치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헌터는 사상이 역사 안에서 결과를 갖는 것은 ‘그 사상이 본래부터 진실하거나 명백하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강력한 제도와 네트워크, 상징 속에 담겨지는 방식 때문’(p.77)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개인과 문화 간의 운동은 양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아마도 후자의 방향(문화 → 개인)으로 훨씬 더 강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덧붙입니다. 문화와 문화변혁에 대한 그의 냉정한 결론은, 우리가 그에 관련된 지배적 견해에서 돌아서서 대안적으로 언급된 요인들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훌륭하고 의도가 좋아도’ ‘문화를 바꿀 희망은 고사하고 효과적으로 문화에 참여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8. 5장에서 헌터는 기독교가 세상(문화)을 변혁시킨 역사(기독교의 성장, 야만족 유럽의 개종, 카롤링 르네상스, 종교개혁, 각성 운동, 반노예제 개혁, 부흥)와 기독교의 범위를 넘어선 세상 변혁의 역사(계몽주의, 유럽 사회주의 등등)가 자신이 대안적으로 제시한 (특히 8~11번) 명제의 원리를 통해 이뤄졌음을 논증해 나갑니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가 역사를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논거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자기 이론의 약점도 여러 번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권력이 사용되는 방식에서 부패가 있었다.’(p.93), ‘교회가 후원자들의 선물에 의존한 것은 도덕적 긴장을 초래했다.’(p.100), ‘(야만족 귀족들은) 종교적 영감(inspiration)만큼이나 탐욕과 현실정치 때문에도 신앙을 받아들였다.’(p.100), ‘이것들 속에 온갖 종류의 야비한 일들이 뒤섞여 있었지만’(p.101) 등등과 같이 이후 페이지에도 더 나오는 논평들은 역사적 논거들에 대해 헌터 자신의 표현처럼 ‘양가감정’(p.101)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약점에 대해 추후 논의를 통해 보완할 것을 암시하며, 문화변혁의 실제적 방식을 규정짓습니다. 문화 생산의 중심지에서든 그렇지 않은 곳에서든 ‘엘리트’ ‘지도자들과 (문화)자원들의 중첩되는 네트워크들’을 통해 형성된 ‘강렬한 문화 경제’가, ‘기존의 사회적 환경에 도전하면서도 여전히 공명을 이루는 방식으로’ 작동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문화생활의 중심지에서 지위구조에 도전하고, 관통하고, (그것을) 재정의’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문화변혁의 실제입니다.(pp.124~125)
9. 6장은 헌터의 대안적 관점에서 본 미국의 ‘약한 문화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확인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의 진단은 ‘충분히 믿지 못하거나 충분히 노력하지 않거나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거나 충분히 기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바로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는 말로 압축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엄청나게 많은 자원을 갖고서 열심히 하긴 하는데, 그것들을 별 효과가 없는 곳에 소모해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이 말입니다. 성공했다는 예들은 대부분 예외적인 결과를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것이 헌터의 입장입니다.
10. 7장에서 헌터는 5장에서 조금씩 인정했던 대안적 관점의 약점을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이론의 핵심에 있는 ‘엘리트주의’가 마가복음 10:43-45을 중심으로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평등을 강조하는) ‘포퓰리즘’과 배치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의 논의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도달한 ‘핵심적 딜레마’는 ‘미국 기독교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기독교적 포퓰리즘이 ‘다른 한편에서...세상의 변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동력과 부조화를 이룬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탁월함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고민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권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는 질문을 유발하고, 결국 ‘권력 장악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해독제로서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추구하게 하는데, 거기에는 ‘문화 생산과 사회생활의 상층부에서 활동하는 대항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와 공동체)를 포함’합니다. 여기까지가 1부 내용의 요약입니다.
11. 이 책 1부에서 헌터가 제시한 주장에 공감하시는지요? 아직 2부와 3부를 더 읽어봐야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파고들면 더 나오겠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기에 발제 형식으로 세 가지만 정리하고 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1) 헌터는 4~5장에서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살펴 본 결과를 토대로 ‘문화변혁이 필연적 수반하게 되는 현실적 과정’을 제시했습니다. 헌터는 문화변혁의 방식이 기본적으로 중립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그것의 역사를 ‘세상의 구조적 악이 만들어낸 방식에 교회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말려들어간 역사’로 볼 여지는 없을까요?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역사적 자료는 어느 관점으로 추출해내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세계변혁(문화변혁)에 관한 기독교의 지배적 견해에 대한 헌터의 도전은 매우 용감합니다. 그 대상들이 결코 헌터가 내세우는 주장에서 부정적인 들러리에 만족할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하고 있는 노력들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 번 강조하지만, 제가 보기에 헌터의 실수(?)는 (지면관계 상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너무 일방적으로 병 주고 약 주고 해버린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규정은 목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느냐가 기본으로 중요합니다. 이렇게 질문해봅니다. 큰 틀에서, 성경(특히 신약성경)은 세계변혁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특히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변혁을 어느 정도까지 일으킬 것을 주문하고 있는지요? 작은 틀에서, 헌터가 비판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각각 성경이 제시하는 큰 틀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각자의 ‘현실적 목표’로 잡고 노력하기 시작했을까요? 이 두 가지 범주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서, 여러 사람들이나 단체들을 한 가지 잣대만으로 ‘실패했거나 실패하고 있다’ 단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우리는 실패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사례라도 헌터가 조금 제시하기만 했다면, 그의 비판근거는 좀 더 탄탄했을 것 같습니다.
(3) 헌터는 세계변혁에 대한 기독교의 지배적 견해의 사상적 배경으로 ‘관념론’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것이 타당한 분석일까요? 여러분들께서는 그가 비판한 구체적인 사람들의 책이나 활동, 단체들의 입장이나 활동을 접하시면서 ‘관념론’의 흔적을 강하게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그러한 개인이나 단체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나름 상당히 정교하게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들에 기반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요, 자칫 헌터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적어도 일부) 가르침을 ‘관념론’으로 치부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과 관련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몇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느꼈습니다. 얼마 전 클럽에 올린 ‘김선욱 교수님과 김회권 교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에 대해 보인 논거제시 방식의 차이’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글도 이런 개인적 느낌 때문에 올린 것입니다. 두 교수님 입장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 복음주의 내부에서도 어떤 분들은 ‘나는 가능한 한 철저히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나름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하고, 다른 분들은 ‘그 문제는 성경말씀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부족하고 현실에 대한 사유를 중점적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헌터의 ‘관념론 관련 비판’이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의 입장을 비판하는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제2부: “권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12. 2부 1장에서 헌터는, 창조 명령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순종의 결과가 주로 '권력에 대한 견해'에 따라 그 명암이 갈리기에, '교회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보다 명료하고 나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3. 그래서 그는 2장에서, 미국 기독교에서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세 진영(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의 목소리를 3~5장에서 가능한 한 ‘원음대로’ 담아내기 위한 사전작업을 합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적 이상과 원칙’이란 가치를 내세웠지만, 실상 공공생활(과 공공영역에서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까지도) 거의 모든 부분이 정치와 이념의 논리와 용어에 의존해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미국사회의 현실이며,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틀 속에서 니체가 ‘(타협이나 설득보다 법적, 정치적 수단을 통한 강요와 위협을 선택하는) 권력 의지’, ‘르상티망(분노ressentiment :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상처 의식 때문에 강하거나 재능을 가진 자에게 보복하려는 정치심리학적 상태)’이라 부른 현상들까지 나타나고 있는 상태가 지금 그 세 진영이 활동하는 배경이라는 것이 헌터의 판단입니다.
14. 3장에서 헌터는 먼저 기독교 우파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다룹니다. 요약하면, 그들은 미국이 유대-기독교적 유산 위에 세워졌다는 신화와, 그러기에 미국은 기독교적인(?) 이상적 질서를 유지할 때 가장 위대하게 된다는 신념을 지녀 왔습니다. 그들의 구체적 행보는 노예제 폐지 운동, 금주 운동, 1960년대 시민권 운동, 낙태나 동성애 등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이어져 왔는데, 최근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미국에서 약화시키는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반대를 위해 (겉으로는 비당파적이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당파적 운동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투표를 독려하며, 나아가 정치인들에게 협박성 압력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보수적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런 활동에 대한 소명감과 전투적 자세를 가지고 공화당과 협력함으로써 “공화당의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2004년에 오히려 일반 미국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적대감과 반감을 초래하고 또 이후 기독교 우파 내부적으로 ‘정치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훨씬 더 큰 문제는 “문화”라는 인식이’ 생김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하는데 힘을 쏟는 변화가 생겼지만, 바탕이 되는 신화와 신념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15. 4장에서는 헌터는 기독교 좌파를 다루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좌파와 우파를 대비시킨 글이 이 장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정치적 성향의 사회 운동을 통해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것에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것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신학과 국가적 이해와 정체성을 혼동하는 것에서 기독교 좌파(특히, 복음주의 좌파)는 기독교 우파를 흉내 낸다.’(p.225) 그는 보수적 기독교가 한동안 공화당에 이용당했던 것처럼, 진보적 기독교도 민주당의 권력추구 과정에서 이용당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파가 세속주의자들에 분노하듯, 좌파에게도 우파가 기독교 신앙을 말과 행동으로 왜곡하여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미국을 오도하고 있다는 판단과 우파에게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좌파가 우파와 다른 점은 성경에서 ‘부자들이 가난한자, 약한 자, 소외된 자를 남용했던 것에 대해 정죄한 예언자적 전통’에 의존하는 것과 조직 규모와 대중적 호소력의 정도 그리고 매체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헌터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에서는 기독교 좌파도 우파와 마찬가지입니다.
16. 5장에서 헌터는 신-재세례파를 다룹니다. 원래 재세례파는 16세기 ‘급진적’ 종교개혁 당시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와 사도시대 교회의 사회 윤리’에서 영감을 받아, 로마 가톨릭교회와 주류 종교개혁 둘 다를 거절하고 ‘급진적 회중주의’를 선택했던 세력들입니다(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미 유아세례를 받은 성인신자에게 다시 세례를 준 것에서 이름이 유래). 신-재세례파는 역사적 재세례파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새로운 측면들을 가지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내부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으나 그들은 대개 신학적으로 현실정치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그러기에 우파와 좌파 및 교회와 국가권력의 콘스탄티누스적 결합 모두에 반대함) 그 정치적 역할을 교회의 기능에 포함시키기에 세속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폭력 평화주의와 불의한 권력에 대해 무저항으로 고난 받을 것을 강조하며, 검소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생활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헌터는 그들의 정체성이 국가와 후기현대사회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반대에서 형성되기에 그들이 정치 문화에 과도하게 편재해 있는 부정의 담론을 결과적으로 강화시키면서 분파주의를 낳을 수 있다는 것, 현실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거부하는 언어와 행동자체가 실제로는 그들 자신을 우파와 좌파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정치화시키는 것, 평화주의를 내세우기에 ‘타자’를 정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폐쇄된 집단으로서의 교회의 독특함과 분리됨을 유지하려는 (사회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표방한다는 것 등등을 지적합니다.
17. 6장에서 헌터는 2~5장에 걸쳐 다룬 내용을 꿰뚫으며 현재 미국 기독교의 정치참여가 가지는 비극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는 먼저 미국 기독교의 공적 정체성이 사실상 ‘정치적 정체성’이며 세 집단 모두 나름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이유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정치 관여 방식이 다른 신-재세례파를 일단 제외하고) 기독교 우파와 좌파가 다른 이익집단과 똑같이 기성 정치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자크 엘륄 등의 통찰력 있는 분석처럼 민주주의와 국가의 속성 상 대중적 주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국가를 이끌고 지도하는 대신 (불가피하게) 효율을 추구하는 국가의 관료적 필요성에 끌려가게 되고, 또한 우리 사회의 가치문제가 너무 복잡해져 국가가 그것을 해결할 실질적 능력이 없거나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한계를 갖게 된 점과
둘째, 정치를 권력에 종속되지 않게 해줘야 할 고상한 가치들(공정성, 자유, 평등, 정의, 도덕성, 가족, 희망 등등)이 이미 정치적 구호가 되어버렸고, 기독교인들이 정치를 무비판적으로 포용하면서 기독교 신앙마저 일종의 정치이념화 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로 투표와 같은 단편적 정치참여에만 몰두함으로써 실질적 해결을 위한 대가를 감당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가 나타난 점 그리고
셋째, (보다 근본적으로) 주도적인 미국 기독교 집단들의 정체성이 주로 분노와 적대감에 근거해 있기에 그들의 공적담론에서 사회의 좋은 점을 긍정하고, 창조의 아름다움이나 (교회 밖 사람들과 공유하는) 진리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드물다는 점 때문입니다(부정하는 성향에서는 세상을 혐오하는 신-재세례파도 마찬가지).
헌터는 특히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따른 분노와 적개심에 근거한 집단적 정체성이 서로를 동료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 안의 좋은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분노를 부추기고 타자에 대한 부정의 담론을 통해 분노를 유지하고, 그러면서 때로는 자신들의 권력 의지를 추구함으로써 기능적 니체주의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 기독교 우파가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고 언급합니다.
18. 그래서 헌터는 7장 앞부분에서 미국 기독교인들이 각자가 가진 정치 신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로서, 삶의 모든 범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그 자체의 유지가 목적이 되며 관계 속에서 비대칭적으로 존재하기에 저항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또 항상 의도하지 않는 결과까지 초래하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자신들은 자유롭다 주장하는 신-재세례파도 결국 마찬가지). 자신들이 현실에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신화적 이상과 현실적 실천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면서 ‘교회와 그 회원들이 소유한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미국 교회는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생활방식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된 상태를 탈피해야 하고, 특히 모든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공공선’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실천을 위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하는데, 헌터는 그것을 영적 권력이나 정치권력과 구별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친밀감과 복종, 특권의 거절, 자기 비움의 섬김, 비강제적 감화가 특징인) ‘사회 권력(=관계적 권력)’이라 규정하고, 3부에서 더 깊이 탐구할 것을 예고합니다. 여기까지가 2부의 요약입니다.
19. 2부 내용에 대해 몇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1) 2부에 나온 미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 실상에 대한 헌터의 구체적 분석은, 비록 그것이 미국의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한국 기독교인들 각자가 자신의 정치참여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데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타산지석’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비록 그럴만한 역사적이거나 현실적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권력의지’나 ‘특정 대상에 대한 분노 또는 부정’이 정치적 정체성의 주된 동기가 되는 것과 신앙적 정체성이 정치적 정체성과 무비판적으로 같게 되는 것 등등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깊이 살펴봐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2) 그러나 헌터의 논평이 지금에 있어서 얼마나 공평하고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 조금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헌터는 미국 기독교 좌파의 정치참여를 소저너스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짐 월리스를 중심으로 서술합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그의 책 <회심(1981년 초판, 2005년 개정판)>과 <하나님 편에 서라(2013년 초판)>를 읽은 바로는, <회심>은 어느 정도 보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지만, <하나님 편에 서라>는 그런 부분을 상당히 극복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 책에서 헌터가 한 비판처럼 월리스가 내리는 결론들이 미국 민주당의 정책과 많이 부합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런 결론을 내기까지 논증하는 과정에서는 거의 당파적이지 않은 실사구시의 정신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3부를 이미 읽으신 분들께서 ‘구체적이고 확실한 결론이 없다’고 하시는 것과 7장에서 헌터가 ‘공동선에 대한 추구’를 강조하는 것을 고려할 때) 월리스가 쓴 <하나님의 편에 서라>가 주로 이론적인 측면을 논한 이 책의 실전적용편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헌터가 사용한 논리(미국 기독교 세 진영 모두 상대의 부정적인 면에만 민감하다)가 그 자신이 세 진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아이러니가 보입니다. 2부까지의 글에서 그가 비판한 대상들과 대화하거나 그들의 장점을 충분히 인정해 준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게 좀 아쉽습니다.
(3) ‘각자가 성경과 교회사에서 선택한 신화를 근거로 현실 속에서 자신을 나름대로 정치화시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헌터의 관점은, 현실 문제에 기존 좌우의 구도를 벗어나 새로운 층위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같습니다. 헌터의 이런 접근이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어느 정도 호응을 얻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좌우의 구도를 극복하는 관점이 부상하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4) 3부를 읽기에 앞서 조금 우려되는 것은, (3부에 대한 다른 서평들 때문에도 그렇지만) 2부 마지막에 '예수의 사회 권력’을 중요하게 제시한 부분을 읽으면서, 혹시 헌터가 이어지는 논의에서 자신이 ‘관념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한 신앙의 자원들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든 것입니다. 저는 1부에서 헌터가 그런 예들로 언급한 복음주의자들이나 복음주의 단체들 ‘모두가’ 정말로 그런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아직 의구심이 풀리지 않습니다. 3부에서 그게 해소될 지 잘 모르겠네요.
[제3부: “새로운 도시 광장을 향해(신실한 현존의 신학에 대한 묵상)”
20. 3부 1장에서 헌터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청되는 '신실함'에 자기 시대에 대한 '적실함'의 의미도 있음을 강조합니다. 세상이 변함에 따라 '신실함'이 감당해야 할 도전들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는 '차이(다원주의)'입니다. (서양에서) 지배적이던 기독교가 단지 여러 종교 중 하나가 되면서 공적 위상이 추락했고, 세상에 적응하라는 저항하기 어려운 압력 속에 혼합주의가 생겨났으며,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약화된 상태입니다. 또 하나는 '해체(단어와 실재의 연결에 대한 합의가 상실된 상태)'입니다. 부분적으로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회의주의(회의주의의 순기능도 인정은 합니다)가 해체주의로 전환하여 여러 학문분야와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됨으로써, '단어'와 '세계 현실'의 연결이 정당성보다는 '(자신들만의 도덕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 욕망과 판단에 근거한 권력의지'에 의해 이뤄지게 됐습니다. 통신과 전자매체의 혁명은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 경험하게 함으로써 모든 것의 의미를 사소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물질세계보다 더 실제적인 영적 실재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단어'가 '저 밖의 실재'와 믿을 만하게 연결된다는 믿음이 '해체'되고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게 됐다는 것입니다. 헌터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제도들이 여기에 통찰력 있게 저항하지 못하고 있기에 두 가지 도전의 거대함과 복잡함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정직하게 대면할 것을 주장합니다.
21. 2장에서 헌터는 그 두 가지 도전에 대해 '신실함'을 지키려 해온 미국 기독교인들의 노력을 "~에 대한 방어", “~에 대한 적합성”, “~로부터의 정결”의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합니다. 두 가지 이상의 유형이 혼재하기도 하지만 각각 신학적/정치적 보수주의, 신학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 신-재세례파가 주로 갖는 입장들입니다. 자세한 소개가 있지만 그의 요약으로 표현하면, 세상에 대해 “방어적”이려는 욕망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적대적이면서 문화적으로 진부하게 표현되고, “적합”하려는 욕망은 ‘독특성’을 포기한 대가로 성취되며, “정결”하고 싶은 욕망은 ‘참여’ 대신 분리하고 철수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헌터는 세 가지 유형 모두 역사적/사회적 과정에서 ‘차이’와 ‘해체’의 도전에 대해 충분히 ‘신실함’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두 도전에 대해 ‘믿을 수 있는 능력, 즉 일관되게, 철저하게, 효과적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추구하려는 열망에 충분히 반응하기에 좀 더 적합한 대안적 비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22. 3장에서 헌터는 그가 결국 말하려는 ‘신실한 현존’의 바탕논리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형성의 비전”이란 용어를 도입합니다. 그는 그것을 “대위임령” 또는 “제자 삼기”로도 표현하는데, 이것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나 복음전도나 영성훈련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삶 속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거대한 도전들에 맞서 교회와 교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전략을 뜻합니다. 그 비전의 핵심은 바로 “교회공동체가 의도적으로 이뤄나가는 문화적 샬롬”입니다. “샬롬”의 비전은, 신구약성경을 통해 일관되게 제시된,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타인(신앙 공동체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해)을 위해 살며 질서와 조화, 풍성함과 풍요로움, 온전함, 아름다움, 즐거움, 복지를 이루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헌터는 상황과 소명 사이의 긴장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교회가 “긍정” 후 “대립”의 변증법을 통해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주장합니다. “긍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과 피조물들이 만든 세상’의 (비록 죄에 오염됐지만 완전히 무효화되지는 않은) 본질적 가치를 세심한 분별을 통해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기로 (기본적으로)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세계건설에 참여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뿐 아니라 모두의 번영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긍정’에 함의된 동기와 목적에 의해 모든 사회제도의 요구들(권력, 교제, 기쁨, 자유, 권위 등등)을, 현존하는 제도들 내에서 개발되었거나 완전히 새로운 대안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상대화시키는 “대립”을 필연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후기현대의 정신에 지나치게 적응해버린 교회내부에서부터 비평적 저항이 필요하기에, 결국 ‘대립’은 교회 자체의 구조와 그것과 세상의 관계가,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 속에서, 지속적이고 선택적이고 건설적으로 점검되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창조 명령의 취소가 아니라 재긍정을 뜻하기에, 이런 구속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역동적 인도 안에 지혜, 분별, 근면, 실천이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실천될 때 “형성의 비전”이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23. 그런 바탕설명 후 4장에서 헌터는 (드디어) ‘신실한 현존’의 신학을 말하는데, 그 핵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신 결과들이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이뤄지도록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그는 장황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말과 세상의 연결에 대한 신뢰가 소실된 ‘해체’와 다원주의적 ‘차이’에 대해 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입니다. 성육신은 특히 ‘해체’로 인해 무기력해진 ‘단어’에 얽매이지 않고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을, 항상 재연되는 방식으로, 하나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다르게 표현하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성육신적으로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속에 있는 그 자체나 그를 통해 일어나는 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해체’나 ‘차이’로 인한 혼란이 없이 ‘샬롬(하나님 나라)’을 인지하고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그 과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희생적 사랑으로 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속성을 그대로 본받음으로써 이뤄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관계가 단절된) ‘타자’였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강압적이지 않으셨다는 것에서 우리도 그 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하신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우리가 신실하게 ‘참여’하는 일이 신앙공동체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차별 없이, 모든 사명의 영역에서 그 사명들의 본질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서 소극적 순응이 아닌 ‘샬롬’을 위한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헌터는 2장에서 말한 미국 기독교인들 현실 참여의 세 가지 유형에 대해 적합성, 독특성, 현실성을 놓쳤음을 다시 지적한 뒤, 이번 장의 강조점을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적 현존에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샬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실현이 되어야만, 그 세 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우리가 서로와 세상에게 하는 말이 진정성 있고 신뢰할 수 있기에 ‘해체’와 ‘차이’의 도전을 극복하게 되고, 세상 속에 ‘샬롬’을 이루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점점 경험, 지식, 관계를 분화하고 파편화하는 흐름에 저항해 ‘현존의 집중력’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헌터는 이런 신학이 하나님의 샬롬을 반영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서 개인적/집단적/제도적 참여를 통해 진정성 있게 실천될 때 설득력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24. 5장에서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의 실천을 다루는데, 압축해서 말하면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드러나는 샬롬을 실현하기 위한 언약적 헌신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는 리더십의 문제를 다루면서 다시 한 번 그것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영향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리더십은 모든 사람이,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도 다양한 정도로 그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위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타자를 배제하기 위해 사용되기 싶습니다. 그래서 리더십과 엘리트주의 사이의 그러한 역설이 예수님과 바울의 사례처럼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책임 있게 다뤄져야 하지만, (특히 미국에서의) 현실에서는 리더십의 부패가 일반적이기에 ‘언약적 헌신에 의한 신실한 현존의 실천’이라는 대안이 요구됩니다. ‘언약적 헌신’이 뜻하는 것은 ‘주변 세계의 (진정한) 번영을 위해 모든 관계와 일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강력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개인 경건이나 특이한 기독교적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외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는 관계와 제도를 형성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된 의미를 가집니다. 헌터는 ‘왜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구속 이외의 것을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반발을 예상하며, (창조주로부터)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의 권리가 있음과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과 설득력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문화적 공유 가능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세상에 아직 선(the Good)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도구적으로만 대하는 근본주의와 후기현대사회의 허무주의는 일상의 곤란한 문제들에 대해 창조적, 건설적 제안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헌터는 그러한 실천을 일과 사업의 제도들로부터 시작하라 권고하며 미국에서의 다양한 실천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모든 교회가 모든 사회영역에서 모든 지적/경제적/경영적 자원들의 네트워크를 중첩하여, 때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도 협력하면서 만인의 복지향상을 주도’하는 형태로 이뤄져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 실천의 효용성 평가 기준은 ‘모든 사람(특히 아무런 특권과 이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이점들을 획득하면서 가시적 방식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물론 우리는‘샬롬’이 욕망의 실현인 ‘물질적 풍요’와 다르며, 결점이나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5. 6장에서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의 보다 철저한 적용을 논합니다. 그에 앞서 지금까지의 책 내용을 요약합니다.
(1)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좋은 의도와 동기에서 세계를 더 나아지게 하려(결과가 때로 복합적이거나 나빴지만) 노력해왔다.
(2) 그러나 주로 ‘개인변혁을 통한 사회변혁’을 추구한 그들의 이론은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3) 세계(문화)변혁을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문화적 제도들의 중심부에서 엘리트 수준으로 긴밀한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4) 그러나 합법적이더라도 권력의지와 분노에 의해 부정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적 문화와 연대하면 결과적으로 허무주의는 영속되고 복음의 메시지가 방해된다.
(5) “~에 대한 방어”, “~에 대한 적합성”, “~로부터의 정결”의 문화 참여유형들은 세상에서 가장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각각 ‘세속화’, ‘사람과 환경에 대한 착취’, ‘국가와 시장에 근거한 폭력’으로 보고 있으나 실상 “차이”와 “해체”가 보다 더 핵심문제이며, 이것을 인식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다른 문제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이어서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실현을 “새로운 도시 광장”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다원주의적 세계에서 인간의 번영이라는 최고의 이상과 실천에 기독교 공동체가 헌신하는 것’입니다. ‘새로운’은 ‘자율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다양한 개인’이 아닌 ‘다중적 전통과 공동체에 의한 집단’이 공적 다양성을 결정한다는 뜻이며, 기독교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사이에 불일치와 긴장과 갈등이 있을 때조차도 공동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유다말기 예레미야의 예언과 신약의 가르침을 통해 예증합니다.
다원주의적 세계에 필연적인 긴장과 갈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헌터는 교회 공동체 자신과 관련해 ‘정복과 장악과 지배’의 개념이 담긴 용어와 담론들을 버리고, 정치적 방법으로 신앙을 표현하기보다는 잠시(?) 침묵하며 샬롬의 행동을 통해 신앙을 공적으로 실천하라고 제안합니다. 특히 자신이 제안한 비전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믿음과 관행을 일치시키고 서로간의 사랑을 장려함으로써 교회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예상합니다. 세상과 관련해서는 이미 말한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을 재차 언급하는데, 가족이나 개인들은 역부족이기에 교회 전체 차원에서 주도해나가야 한다 강조합니다.
한 무명의 제자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실한 현존의 신학에 근거한 새로운 도시 광장의 추구’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교회사에서 전례가 있는 것임을 보여 준 헌터는, 자신의 제안이 ‘세상을 바꾸는 틀림없는 효과적인 공식’과 같은 게 아님을, 역사 속에서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는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강력한 불확실성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표현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여기까지가 3부 요약입니다.
26. 3부 내용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1) 헌터는 (미국의 현재 상황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해야 할 가장 핵심 도전이 ‘세속화’, ‘사람과 환경에 대한 착취’, ‘국가와 시장에 근거한 폭력’이 아니라 ‘차이’와 ‘해체’에 의한 ‘(특히 공적 영역에서) 약화된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각자나 한국의 교회 공동체들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에 따라 이 책에 대한 각자의 반응이 다르리라 봅니다.
(2) 헌터가 제안하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에 근거한 새로운 도시 광장의 추구’의 강조점이 우리 각자나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가져왔던 세계 변화의 강조점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의 말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해왔던 것을 단순히 살짝 다르게 정리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정말 중요하고 새로운 어떤 전환이 있다고 보십니까?
(3) 과거든 현재든 한국기독교회사에서 헌터가 제안하는 것에 부합되는 어떤 구체적 실례들을 알고 계시나요? 그런 예가 있다면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4)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도 미국 기독교 우파, 좌파, 신-재세례파, 그리고 헌터가 참여해서 <역사적 예수 논쟁>,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등과 같은 형식의 책을 만든다면, 각각에 대한 비교파악이 좀 더 흥미롭고 실질적으로 이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계요? 글쎄요, 우리에게 그런 책 만들 정도로 축적되고 정리된 입장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