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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연구의 발자취와 전망- 톰 라이트

메르시어 2023. 5. 6. 11:26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발자취와 전망- 톰 라이트

2014-09-19 19:15:20


불트만과 그의 후계자들의 특징인 신칸트주의적 루터주의는 역사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들에게 역사는 철저하게 위험한 영역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기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역사는  은혜와 대립되는 실체가 되어버렸다. 이런 틀은 루터주의자들에게 종종 두 왕국신학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세상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분리하여 왔다. 그래서 불트만 진영은 역사비평에 입각하여 신학작업을  하면서도 그 목적은 대단히 반역사적이었다. 결국 그들의 작업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신앙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자료비평을 통해 자유주의 개신교의 '역사적 예수상'은 도출했지만 그것은 전체적인 예수상의 일부를 배제해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불트만의 양식비평도 역사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불트만이 탐구한 대상은 예수가 아니고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였고 그 결과 그는 복음서를 예수 자신이 아닌 교회의 신앙적 삶에 대한 증언으로 읽었다. 불트만은 예수는 실존적이고 무시간적 내용인 영성과 회심 그리고 구원을 말한 것이지 현세의 정치적, 사회적 실체를 침해하는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지한 역사 연구가 융성했던 이전 독일학계로 부터 퇴보한 입장이다. 

 

  이렇게 불트만을 위시한 독일 신약학계가 남긴 유산은 복음서는 우리가 예수 본인에게 접근하는 우회로만을 제공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에 관하여 믿었던 내용이 아니라 예수 본인에게로 향하는 접근통로를 제공하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예수 그 분이 누구였는지 알아야 한다. 신앙이 역사적 실제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 예수상은 언제나 자기 기만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가 정말로 누구였는지 알아야 한다. 수세대 동안 회의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위험한 망상임을 증명하려고 예수를 완전히 무시해왔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입맛에 따라 새로운 예수를 찍어내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역사가 없다면 교회가 계속해서 더 많은 예수상을 발명해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 예수상들은 이런 저런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혹은 구체화된 모습인 것으로 밝혀지곤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역사보다는 정경이나 전통에 호소하는 경향을 우려하는 이유이다. 교회가 정경을 그륵되게 해석할 수 있으며 전통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심지어 파괴적으로 표류할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예수를 이해하는 틀로서 전통과 교리에 호소하는 것은 '오직 성경으로'를 외쳤던 종교개혁이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벤 마아어는 "예수의 목적들"에서 1세기 자료들에 철학적으로 정교한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였는데 당시는 그는 그런 방식의 접근에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마이어에게서 "비판적 실재론"을 배웠다. 그동안 예수의 핵심 슬로건인 "하나님나라"는 보수적 복음주의자이건 급진적 불트만주의자이건 모두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우리가 1세기 유대자료들을 가지고 하던 역사적 연구방식을 복음서에는 적용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을까? 당연히 그런 이유는 없다. 예수도 역사속의 인물이었고 그가 주장한 내용도 그 역사속에서 의미가 통하는 말들이다. 우리가 마카베오로부터 세례요한에 이르는 유대역사를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읽을 수 있다면 그런 식의 작업을 동일한 1세기 문서인 복음서에는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가 "가까이 계신 신"이나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 가르쳤다는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동시대의 유대인들에게 훨씬 더 적실하고 절실했을 내용을 가르쳤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말이다. 나의 사고는 그런 식으로 움직었고 그 결과로 10년뒤에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가 나온 것이다. 나는 이런 역사 연구작업을 통하여 복음서가 처음부터 줄곧 이야기 하고 있던 예수의 모습, 하지만 서구 교회가 잘못된 해석전통에서 보지 못했고 심지어 보기를 거부했던 예수상을 발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수의 메시지는 개인 영성이나 개인 구원과 같은 사적인 내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역사속에서, 시공과 물질안에서 행동하신 일에 대한 공적인 내용이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대로 기독교 신앙은 공적진리이므로 기독교는 역사에 호소하고 역사로 향해야 한다. 기독교는 창조에 대한 것이므로 역사와 지상세계로 부터 탈출하는 영지주의의 형태가 아니라 창조신학의 형태를 띤다. 기독교 안에서는 사람뿐 아니라 역사와 땅, 공간, 시간, 물질도 구원의 대상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출범시키신 때가 바로 죽으시고 살아나시려고 사람이 되신 때라고 확신한다. 성경의 권위란 예수를 통하여 행사되고 성경을 통하여 구현되는 하나님의 권위이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행위뿐 아니라 예수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구체적 사건들은 고작해야 추상적인 신학을 설명해주는 사례들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되면 역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가 말하려는 하나님나라도 함께 잊혀지고 만다. 복음서를 진정 왜곡시키는 것은 예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복음서를 거룩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창조를 믿는 유일신론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시간, 공간,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안에서 행동하시를 갈망했던 것이지 특정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는지와 상관없이 어떤 특수한 의미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내러티브 세계를 창조하시기를 고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나라가 출범할 때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 뿐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도 예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림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반대하여 성경에 호소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범주오류로 보인다. 진정한 분열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 성경을, 다른 한쪽에는 교회의 일부 전통을 주장하는데 있는 것 같다. 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주장하는 바는 예수의 완전한 의미는 예수를 정경의 절정으로 볼 때, 즉 구약의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하나로 모여드는 지점으로 볼 때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경의 예수와 대립되는 역사적 예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정경의 예수가 역사적 예수라는 의미이다. 

 

복음서가 말하는 이야기는 성경속의 거대한 이야기 이다. 내가 내 머리속의 "거대한 내러티브"를 만들고 그것을 틀로 사용하여 복음서를 해석한다는 혐의를 받는다면 나는 네명의 복음서 저자들을 증인으로 요청하여 무죄를 주장할 것이다. 복음서가 진정으로 말하고 있던 내용은 하나님나라의 출범에 대한 것인데 교회의 전통이 이것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당신이 정경에 호소한다면 전통이 정경을 수정하게 하지 말고 정경이 전통을 스정하게 해야 한다. 또 다른 예수를 고안해 내고 그 예수를 정경에 투사하여 정경 자체가 말하려는 내용을 크게 약화시킨 장본인이 바로 전통 교회라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반복적으로 해온 일은 예수를 다른 내러티브, 즉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 어떻게 그의 신성을 계시하고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육체와 분리된 천국으로 구출했다는 이야기로 짜맞춘 일이다.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임한 하나님나라를 선언한 분이 바로 "정경의 예수"인데 전통은 아주 초기부터 이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배제해버렸다. 나는 서구 교회가 복음서가 존재하는 이유를 완전히 몰랐다고 생각한다.

 

신성과 인성

 

복음서들이 기록된 일차적 목적은 나사렛 예수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하늘에서 처럼 땅에서도 출범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전통속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그것은 칼게돈 신조로부터 우리 시대의 많은 교리신학에 이르는 사고의 노선이 증언하는 바이다. 하나님나라를 도래케하는 장본인으로서 예수는 교회의 교리적 선언으로부터 배제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이 채워넣으려고 노력했던 공백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이다. 예수의 세례 이야기는 예수가 신적 존재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사역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현존하고 활동하시며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그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전통은 이스라엘이 진정 고대했던 시대가 왔음을 가리키는 성경적인 의미의 반향을 듣지 못하고 신성의 증거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왔다. 그러나 전통이 붙들었던 신성도 유대의 신앙과 삶을 간직한 풍부한 세계에 속한 신성이 아니라 이신론이라는 건조한 세계에 속한 신성이다. 기적들의 일차적 강조점은 예수의 신성이기 이전에 이 세계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성에 대한 전통의 주장은 인간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자신안에 이스라엘을 집약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류 역사 전체를 집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해 버렸다.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논쟁을 신성과 인성의 언어로 단조롭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내가 믿기로는 복음서를 탈유대화시키는 심각한 경향을 반영한다. 칼게돈 신조는 정경에 나타난 야훼와 이스라엘의 그림을 탈유대화시켜서 사변적인 인성과 신성이라는 범주로 묶어버렸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서에는 매우 높은 기독론이 담겨져 있지만 그것은 사변적인 신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임재하여 활동하고 게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정경의 예수를 복원하는 일은 어렵다. 왜냐하면 교회 전체가 복음서가 말하는 그 예수의 모습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정경을 읽도록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신선한 역사 해석에 의해서만 교정될 수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말하는 내용은 실제 역사속의 한 시점에서 거대한 문이 열렸고 우주의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향하여 그 문이 열렸다고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는 현실 세계, 실제 시공간의 우주에 대한 공적인 이야기이지 특정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의 사적인 영적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역사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첫번째 문제는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그리고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을 가져오는 예수의 이야기를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신성과 인성의 범주로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나라와 십자가

 

서구 전통 전체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복음서가 당시에 기록된 목적을 알지 못했고 그 결과 예수의 나라 선언과 예수의 십자가로 향한 순례 사이를 분리시켰다. 나라와 십자가의 분리는 단순히  학자들이 가공해서 만들어낸 실체가 아니고 서구 전통에 존재하는 한가지 요소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이 분리는 수많은 전통들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교회의 삶과 생각을 형성하고 채색해왔다. 실제로 이 분리는 복음서와 바울사이의 분리로 이해되어 복음서는 나라 신학을 제시하고 바울은 십자가 신학을 제시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모범으로 제시된 예수의 행적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독특한 구속적 죽음에 관한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만약 후자라면 복음서 안의 초기 자료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복음서는 분명히 나라와 십자가가 서로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후대의 서구 교회는 이 결합이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종종 십자가 신학과 나라 신학을 서로 반목하는 입장에 두곤 했다. 그러나 정경에서도, 실제 역사에서도 나라와 십자가는 서로 만난다.

 

어떻게 나라와 십자가가 한데 어울릴 수 있는지 묻는 것은 정경이 질문일 뿐 아니라 역사의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역사는 정경 배후로 들어거거나 정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정경 자체가 제기하고 있지만 교회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에게 나라와 십자가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서 저자들에게 나라는 십자가에 의해 승인되고 성취되는 프로젝트이며 또한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설립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도래케 할 장본인이 그 나라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면 그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많은 나라 신학들 안에는 십자가를 위한 자리가 없었고 많은  속죄 신학(십자가 신학)들 안에는 하늘에서 처럼 땅에도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나라 사역과 속죄 사역을 분리하는 현대의 경향은 사회윤리 대 영혼 구원이라는 끝없는 논쟁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사회정의에 대한 비전과 영혼구원에 대한 비전은 잔인하게도 서로 멀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성경의 안내를 받아서 하나님나라 출범과 자신의 죽음을 서로 연관지어 해석함으로 자신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이야기한 장본인이 바로 예수라고 주장한다. 나는 복음서 저자들이 나사렛 예수의 믿음과 행위에 관련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은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대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를 개시함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런 두 믿음을 구현하여 자신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이방인들의 손에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나라와 부활

 

나라와 십자가를 결합하는게 문제가 된다면 나라와 부활를 결합하는 것 역시 문제이다. 나는 예수의 부활이 예수 이야기의 핵심적 순간이며 역사의 중심적 사실이며 나아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요소라고 믿는다. 부활은 바로 나라를 도래케 하는 자의 죽음의 목적이 성취된 사건이다. 부활은 그저 다시 살아난다는 정도가 아니라 승천 즉 세상의 주로서 예수의 새로운 지위가 선포된 사건이다. 다시 말하여 부활은 예수가 공생에 기간에 시작한 나라 강령이 성취로서 예수의 새로운 지위가 선포된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복음서 이야기의 결론으로 보았고 이것이 바로 예수가 처음에 선포했던 나라 강령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부활은 신성의 증거가 아니라 예수는 진정 하나님의 메시아이며 그로 말미암아 새 창조가 시작되고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부활은 하나님의 칭조세계와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이 처리되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인 것이 틀림없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제 예수는 이 세상의 참된 주로 즉위하신 것이며 이 사건의 증인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 일을 위임받고 준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전체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이스라엘 차원을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왜곡하게 되며 우리의 세계관이 복음서 이야기로 새롭게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백성을 새 창조의 백성으로, 새 창조의 증표로, 새 창조가 일어나는 수단으로 세운다. 새 창조의 과제중 하나가 바로 예수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기록한 행위는 새 창조에 참여, 하늘에서 처럼 땅에도 임한 하나님나라에 참여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출범되었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통해 이 세상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만약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였다면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 나라를 도래케한 사건이었다면  그의 부활의 의미는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새 창조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절정이요,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며, 세계가 구속되는 수단으로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전망

 

우리가 이제 1세기 유대교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에 비추어보면 복음서 연구에서 새롭고 거대한 주제들을 탐구해 볼 것이 간절히 요청되고 있다. 우리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비평이다. 하지만 불트만은 양식비평에서 신앙의 가장 초기형태가 기본적으로 비유대적이라는 가설에 기초했고 도미닉 크로산을 포함한 예수 세미나 역시 이 가망없는 길을 따라갔다. 그러나 신앙의 초기형태는 전적으로 유대적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복음서는 새롭게 읽는다는 것은 변증학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의 문제라고 믿는다. 나라, 십자가, 부활이라는 이 복합체는 복음에 근거를 둔 온전한 의미의 선교로 적용되어야 한다. 온전한 의미의 선교란 사회복음식 선교도 아니고 속죄 복음식 선교도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처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과 씨름할 때, 나에게 거대한 변혁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20:21의 말씀이 내게 다가왔을 때였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되면 예수 자신의 선교가 그의 제자들의 선교를 위한 원천이자 본보기 역할을 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바로 이 관계를 깨닫게 되면서 나의 해석학적 세계 전체가 급작스럽게 개방되었다. 요한복음 20:21의 본문은 교회 선교의 형태와 내용을 다시 정돈하여 선교를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가 예수의 역사적 선교를 반복적으로 연구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 자신의 선교는 교회가 시행하여야 할 모든 선교의 본보기요 원동력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맡았던 역할을 이제 우리가 세상을 위해 맡아야 한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감당하며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며 궁극적으로 카이사르의 코 앞에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의 숨을 들이 마시고 교회가 밖으로 나아가 이 세계 앞에 예수가 주시라고 말할 때 벌어질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교회는 지속적으로 진정한 예수, 즉 정경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동안 심각하게 오해해 온  예수와 다시 접속되어야 한다. 세상은 나라와 십자가를 분리시켜 우리를 사회사업이나 영혼구원을 양자택일하는 작은 세계로 유인할 것이다. 나는 역사학적 탐구가 신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진정한 역사적 탐구는 회의적인 논의들이 그 몸을 숨기고 있는 덤불들을 제거하고 그 논의들이 무가치함을 폭로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이 과정은 기독교 메시지의 궁극적인 도전을 더 예리하게 구체화하여 제기함으로써 진정한 복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닫힌 이야기, 배타적인 내용이 되고말며 "외부에서 보면 당신들은 착각속의 작은 세계에서 사는 것으로 보인다"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의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는 복음은 없지만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부활에 덧붙여진 배경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부활을 십자가에 못박히고 하나님나라를 도래케 한 분의 부활로 이해할 때, 우리는 복음서가 말하는 방식으로 부활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와 십자가가 결합되는 의미에서 볼 때만 부활의 의미를,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계몽주의 인식론이라는 축소된 세계 내부에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역사적 방법론, 과거에 대한 진정한 앎에 개방되어 있는 역사적 방법론, 그래서 본문밖의 현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짜 근거를 가지고 과거에 대한 진정한 앎을 일축해 버리지 않는 역사적 방법론을 신선하게 진술하는 작업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예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는 갈릴리 거리의 먼지를 발바닥에 묻히고 우리의 신발과 영혼에 묻은 오늘날의 먼지를, 우리의 어깨에 지워진 염려와 세상의 짐들을, 우리 가정과 마음에 자리잡은 두려움과 의심과 선입관과 오해를 몸소 뒤집어 쓰고 먼지나는 우리네 세상속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 현실속의 예수이다.

 

복음서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내용을 찾아내기 위한 적절한 역사적 탐구를 통하여 우리가 알게되는 것은 실제의 예수, 역사적 예수이다. 바로 이 진정한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설립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교회, 학자, 회의주의자들 그리고 온 세계에 도전을 던진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지만 그가 오늘날 누구이신지에 대해 우리는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경의 배후에서 찾아낼 수 있는 혹은 정경과 대립되는 기발한 개념의 예수가 아니라 진정으로 정경을 따른 예수, 진정으로 역사적인 예수이다. 이 진정한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우리에게 요청하며 하나님이 주가 되신 세상으로 나가라고 요청한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며 예수가 주이시며 마침내 그 만물을 바로 잡으시려고 다시 오실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