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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

메르시어 2023. 5. 5. 12:38

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

2014-09-17 14:39:06


 

  기독교는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으나 유대교는 주후 90년경에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축출하고 기독교도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그들의 공식 기도문에 포함시킨다. 기독교의 이단성을 공적으로 선언하고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는 초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고 기독교가 유대교와 분리되면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로마 그리스는 전부 다신교를 믿었는데 유독 히브리민족만이 유일신을 믿었으며 다신교의 종교들은 전부 소멸했지만 2000년이 지나도 살아남아 있는 종교는 유대교가 유일하다 이것만 보아도 히브리 민족이 얼마나 주변 민족들과 다른 세계관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대교의 분파였던 기독교는 다신교 사회에 전파된 유일신교였다. 그러니까 기독교 선교는 대단하 어려운 의사전달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헬라 사회에 어떻게 전달했을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문화, 풍습을 이용하여 전달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하려는 메시지와 그들의 문화, 언어가 화학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며 또한 듣는 자들이 가진 선이해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아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머리속에는 다른 하나님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헬라인에게 히브리에서 기원한  종교가 전달될 때 이런 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진다. 특히 헬라의 이원론은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가 던진  씨앗이 각 문화세계라는 토양에서 자란 종교이며 그래서 기독교는 완성된 적이 없고 계속 진행중인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의 문화와 융합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로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같은 면과 다른 면이 있게 된다. 이렇게 기독교는 계속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교적 요소의 첨가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첨가가 정당하지 여부를 판단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기독교도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헬라와 그리스 문화 철학을 빌려왔다. 하브리 사상을 헬라식으로 설명한 것이고 이 과정에서 헬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고 더구나 이 당시에 신학이 정립된 것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도 강조점과 각도가 틀린데 하물며 기독교가 이방세계에 전파되면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겠는가?  바울 당시에도 바울 서신외에 수많은 서신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외경으로 남아있다. 결국 초기 기독교안에는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이 공존했던 것이고 이것이 교회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교리 분열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로마 제국 통일의 통치적 이념으로 사용하려면 교리의 통일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교리적 통일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종교회의에서 논란이 된 주제가 아리우스 논쟁에서 촉발된 그리스도가 누구인신가? 라는 것이었다. 300년 동안 믿어온 그리스도를 지금와서 누가신가> 라고 묻고 그 신앙을 다시 통일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이 시대에는 통일된 신학이 없었는데 결국 니케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어서 431년에는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터치는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에 반대하여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주장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에 그리스도의 양성론 논쟁이 일어나고 네스토리우스는 정치싸움에서 이단으로 몰려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된다. 이 논쟁은 결국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원래 네스토리우스가 처음부터 주장하던 것이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당시의 유력한 교회들(시리아의 안디옥교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로마교회, 콘스탄니노플 교회)의 주도권 싸움에서 희생된 것이다. 이런 권력다툼에서 로마 제국의 중심에 있던 로마교회가 주도권을 잡게된다. 

 

  5세기로 가면 삼위일체 논쟁이 일어나는데 이 당시 초대교회의 고민이 사도신경에 나타난다. 초대 교회의 신학적 이슈는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영지주의자들도 인정한 것이고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이런 영지주의에 반대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나 인성을 부인했고 에비온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정하나 신성을 부인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에비온파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정통교리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길을 택했고 이것이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교회안의 신학적 분쟁으로 정통과 이단이 갈렸는데 제일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교리를 택한 쪽이 종통이 된 것이 신기하다. 

 

[추기]

초기 교회에서 최초의 교리논쟁은 아라우스 논쟁이었다. 이 논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가 확립된다. 그 다음에 일어난 논쟁이 네스토르우스 논쟁인데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강조하였다. 이 논쟁을 통해 그리스도는 한 인격에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진 분이라는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가 확립된다. 이렇게 초기 교리 논쟁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라는 기독론에 집중되었다.

 

 기독론 논쟁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자 자연스럽게 등장한 논쟁이 삼위일체 논쟁이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기독론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이냐는 질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렇게 처럼에는 아들과 아버지라는 이위일체로 시작되었지만 성령을 신성을 주장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성공적인 논증으로 이 논쟁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삼위일체 논쟁으로 확대된다. 이 논쟁에서 하나님은 한 본질을 공유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된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은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차이를 보이는데 동방교화는 세 위격에서 출발하며 세 위격이 어떻게 한 본질을 공유하는가를 설명하려고 한 반면에 서방 교회는 한 본질에서 출발하여 한 본질이 어떻게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가는 설명하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