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공인과 니케아 신조
기독교 공인과 니케아 신조
2014-09-16 12:24:45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는 임종을 앞둔 311년에 누구든지 공공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한 공공연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해고 좋다는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기독교는 드디어 로마제국에서 합법화되었으며 이어서 313년 콘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장려하게 되었다. 아마도 콘스탄틴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통합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박해는 끝나게 되었는데 박해중에 배교한 사람들을 교회로 복귀시키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순교를 피한 사람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며 박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협력한 감독은 어떤 유효한 예배나 성만찬도 세례도 집행할 수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나타났는데 이들을 도나투스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도나티스트라고 불렀다. 312년에 도나티스트들이 누가 감독에게 안수할 것인가하는 논쟁을 해결해 달라고 콘스탄틴에게 요청을 하였는데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음을 시사하는 의미깊은 사건으로서 교회와 국가가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틴 시대에 아리우스 논쟁이 교회내에 발생하였다.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첫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들인 하나님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단언하였는데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다. 기독교를 이용하여 제국의 통합을 의도한 콘스탄틴은 교회가 교리적 논쟁으로 분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325년에 모든 감독들을 소아시아 북쪽 니케아라는 소도시로 소집을 하고 자신을 사도이자 감독이라 천명한 뒤에 최초의 공의회를 주관하였다. 여기서 아리우스는 탄핵되었고 니케아 신조가 채택된다.
교회가 정치권력과 연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사막으로 도피하였고 사막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유명한 수도사들이 안토니우스, 제롬인데 제롬은 405년에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번역 작업을 완료한다.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됵교는 이전에 없었던 평화와 힘을 소유했고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도굑인들은 세상의 인정을 반겼고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보이지 않는 신자들의 공동체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제도와 동일시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교회의 제도적 측면이 지나치게 중시되고 복음은 상대적으로 흐려지게 된다.
질문 1
313년 밀라노 칙령은 교회와 국가의 연합, 즉 정교일치의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정교일치가 교회에 가져온 부정적인 혹은 긍정적인 영향은 무엇인지요? 나아가 이런 정교일치가 오늘날 정교분리로 확립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오늘날 정교분리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지요?
질문 2
기독교 공인으로 인한 교회와 국가의 연합에 반발하여 사막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런 수도원 운동이 이후의 교회 역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