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산둥 수용소 - 랭던 길키

메르시어 2023. 5. 5. 12:33

산둥 수용소 - 랭던 길키

2014-09-13 12:50:40


 

이 책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당시 중국 북부에 있던 외국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 있던 삶의 이야기이다.

이 수용소는 크고 복잡한 사회를 관찰 가능한 정도로 축소한 규모에다 삶의 엄청난 긴장감까지 더해져서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를 여실히 드러냈다.

 

 

147  만일 정의와 평화, 이 두가지 위대한 이상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거기에 헌신하고 그것을 위해 온 마음으로 싸우려 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현실적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진짜 역사적 상황이 가지는 모호성을 인식한다면 이 두가지 위대한 이상이 실제적 삶에 대하여 가지는 적합성에 대하여 냉소적이 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두 이상들에 헌신하는 것이 윤리적 실존이라면 현재 세상에서는 이런 실존이 불가능해 보였다. 

 

154  우리 모두가 가진 도덕적 결함은 이질이 돌고 빵 공급이 중단되는 것고 맞먹을 정도로 심각하게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했다. 이런 내적이고 도덕적인 위기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동안 온갖 노력을 기을여 건설한 이 작은 문명세계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도덕적인 건강함이 없다면 물질적인 공급이나 혜택이 결여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배운 가장 깊은 깨달음이었다. 이런 깨달음 이후로 학문에서든 일반적인 관찰에서든 크고 작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이 진리가 입증되는 것을 보아왔다.

 

180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고는 나중에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으려 한다.

 

184  위기에 처했다고 해서 인간이 더 선해지거나 더 악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하면 그 위기가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쳐서 그동안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실재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186  실제적 삶에서 인간은 나누어지지 않은 전체적 자아로서 자신의 복지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성은 이렇게 움직이는 자아의 도구다. 즉 지성은 위협을 받으면 지식을 동원해 자신의 지위를 변호하고 기회가 생가면 자신의 안전을 좀더 확보하려 한다. 적어도 수용소에서 감정에 치우치이 않기 위해 중요한 사안들에 자아의 개입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회 활동에서 합리적 행동이란 도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지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행동이다. 나는 이기심없는 도덕성이여 말로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필수 조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07  부란 절대로 공동체에 완전한 축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께달았다. 많은 경우에 부는 축복으로 간주된다. 하지만사실상 부는 운좋게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음식과 평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이 좋지 않아 부를 가지지 못한 공동체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든다. 부는 하나의 역동적인 힘으로 너무나 쉽게 악해질 수 있다. 부는 선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큰 해를 끼질 수 있다.
 
209  사회적 갈등을 막는 유일한 해답은 부와 물질적 소유를 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를 공평하게 나누어 사화적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도덕적 성품을 기르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부가 사회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하느냐 파괴적인 역할을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를 도덕적으로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217  도덕적 행위를 개인의 거룩함을 위한 도구 정도로 보는 그런 이론은 무엇보다 도덕적 행위가 공동체 사람들 간의 상호관계와 연관된다는 점을 무시한다. 사실상 현실에서 도덕적 행위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내 필요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비도덕적 행위란 자기 자신을 위해 이웃을 망각하는 행위이다. 반면에 도덕적 행위란 이웃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220  많은 경우 사람들은 매우 도덕적인 이상주의(하지만 행동은 거부하는) 뒤에 숨는다. 법적이거나 도덕적인 주장, 심지어 종교적인 주장조차 이기적인 자기 행위를 위장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더 심한 것은 이런 도덕적인 위장에 자기 자신도 속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도덕적 관심의 타당성에 의문이라도 제기하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놀라고 분노하는 것이다.
 
227  하지만 사람들의 실제적인 사회적 행동을 보면 이런 신학적 개념, 즉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의지에 있어서 악하다는 원리가 그 어떤 판단 기준보다 더 잘 우리의 경험을 설명해준다. 내가 수용소에서 본 것은 바로 원죄론이 말하는 것이었다. 
 
232  안정적인 정부 또는 법률 체계를 세우려면 반드시 최선을 다해 공의와 평등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정부는 결국 자신이 다스리는 공동체의 통합된 도덕적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통치 능력은 강압적인 권력에도 달려있다. 도덕성은 강압적인 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 힘은 강압적인 힘이 창조적으로 사용되도록 깊은 근간을 제공해야 한다.
 
264  어떤 집단이 정의를 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덕스럽기 때문이 아니며 결국 이기심 때문이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이기심도 마찬가지이다.
 
272  법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여 좀 더 창조적이고 평등한 방향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정의로워야 한다. 법이 정의롭지 않으면 끝없는 고통이 뒤띠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법은 통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적이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법이란 언제나 이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322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공동체가 가능하려면 인간은 자신의 안위뿐 아니라 이웃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 함께 또 분명한 것은 인간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웃에 책임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모순될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이런 모순을 극복할 수도 없다. 따라서 삶의 딜레마를 사고의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는 현실을왜곡시키는 결과만 낳게 된다. 삶의 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사고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존 차원에서다.
 
448  물질적 영역과 영적 영역,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 이것들은 창조적이고 유기적인 인간 삶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측면들을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달의 사회에는 화가 임하리라.
 
457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유일한 소망은 인간의 종교성이 수많은 우상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나누고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도 정직하며 공동체를 세울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러면 인간은 반드시 의미와 안정성을 제공하고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바칠 수 있는 영적 중심을 찾아야 한다. 가족, 나라, 전통, 인종, 교회 같은 중심은 물론 개인보다는 위대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으며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영적 중심이 되실 수 있다.
 
470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과 우리가 공동체를 이룰 이웃인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이 두가지 기반 위에서 종교적 뿌리를 가진 의미있는 소명은 역사적 운의 좋고 나쁨에 따라 사라질 수 없다. 이런 관점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도덕성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들의 도덕성에 대해 두려움없이 현실주의적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과 그 가치를 광신주의없이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고 지지하는 것들에 대해 헌신하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에 대하 깊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우리 문화에서 점점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472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 분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만 긍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단편화된 자아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 안에서만 궁극적인 중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삶의 의미가 오직 자신의 성취에만 집중된다면 삶의 의미는 역사의 굴곡을 따라 위태로워지고 우리의 삶은 늘 의미없이 타성에 젖어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인간의 궁극적인 헌신이 자신에게 집중된다면 우리의 삶은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불의와 잔인성을 일으키지 않는 궁극적인 헌신이 존재한다. 오직 하나님 아넹만 영원한 의미가 존재한다. 하늘이나 땅위의 어떤 것도 그 의미로 부터 우리를 떼어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