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형성과 박해
기독교의 형성과 박해
2014-09-03 17:04:29
일세기 초에 로마제국은 유대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기독교를 유대교의 분파로 생각했기 때문에
AD 50년을 전후해서는 복음을 용이하게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1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역전되어 교회는 30년에 걸친 로마제국의 노골적인 폭력을 견뎌야 했다. 기독교회가 박해를 당하기 시작한데는 두가지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AD 64년 로마 대화재 사건으로 사나워진 민심을 잠재우려 네로 황제는 화재의 책임을 소수집단인 기독교회에 뒤집어 씌워 기독교인을 가혹하게 박해하지 시작했는데 이것이로마제국 최초의 박해였다. 이 박해 때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하였다.
당시 크리스천들이 로마인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 한 분만을 믿었는데 이런 믿음이 로마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일으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다신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로마의 안녕과 제국의 번영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크리스천들의 예배의식인 성만찬이나 형제 자매라는 호칭도 로마인들에게는 기독교가 사교집단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뿐 아니라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이 차별이 없이 하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좇아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을 환대하고 모든 사람의 생명을 귀하여 여겼는데 이것은 노예제도와 계급구조를 기반으로 한 로마의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이때 까지도 유대인과 크리스천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지만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함락을 계기로 유대인들은 유사한 비극을 다기 겪지 않기 위하여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로마의 미움을 살 우려가 있는 모든 비주류 무리를 회당에서 내쳤는데 이때 유대교와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64년의 네로의 박해이후 81년까지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도미티안이 황제가 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사후에 신으로 숭배되던 다른 황제들과 달리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에 "주와 하나님"이란 호칭을 강요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로마제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새 황제 트라얀이 즉위한 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는데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잃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었다. 이 박해 당시에 크리스천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들이 로마의 다신 숭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박해 가운데 100년 즈음에는 일단의 크리스천 학자들이 로마의 박해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증하여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 당시 가장 유명한 변증가는 저스틴이었는데 그는 변증을 위하여 그리스 철학을 포용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하여 당시에 널리 받아들여진 그리스 철학을 통하여 이교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접촉점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스틴은 성경적 개념을 그리스적 세계관에 적용해보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기독교 신앙을 이교 신앙과 타협하지는 않았고 결국 165년에 순교하였으니 이가 바로 순교자 저스틴이다.
1세기에 모든 개교회는 일단의 장로(감독)이 이끌었고 크리스천들은 주로 집에서 모였고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3세기 무렵에는 교회가 조직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 무렵 기독교의 왜곡된 변형으로 영지주의 운동이 등장하여 교회를 위협했고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교회는 자체적으로 강력한 감독과 통일된 집회장소 그리고 신중한 신앙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모두 사악하며 열등하고 오직 영적인 것만이 순수하다고 생각하여 특정한 사람만이 하나님에 관한 비밀스런 지식(영지)을 소유할 수 있는데 이 지식이 그들을 평범한 인간 세상 너머에 있는 더 높은 세상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를 혐오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였고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의 몸을 일시적으로 소유했던 영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의 유력한 분파는 140년경 어떤 설교자의 아들인 말시온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말시온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구약에 나타난 물질을 창조한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므로 육체를 부활시키거나 육체적으로 징벌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뿐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지만 진짜 인간은 아니고 하나의 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이 사상이 가현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말시온은 추종자들은 물질세계와 육체가 악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욕망과 욕구를 부정했다. 말시온은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권을 포함한 성경목록을 만들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바울 서신에서는 구약 인용부분을 삭제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지주의자들이 점차 교회에서 빠져나갔지만 알락산드리아 교회의 오리겐은 영지주의에 기울어 하나님의 창조가 원래 영적이었는데 인간의 타락 이후에 물질적 육체적 세상을 만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죄없는 영적 상태로 회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의 도전으로 2세기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심각한 질문을 하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정경이라는 저작들과 신앙의 규칙이라는 문서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의 독보적 권위를 갖게된 감독에게서 그 답을 찾게 된다.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을 통하여 교회내에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말시온이 로마 교회를 떠난 뒤 "신앙의 규칙" 이라는 세례와 관련된 일련의 상세한 질문서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교회의 신앙과 말시온의 거짓 교훈을 분별하기 위해서였다. 이 신앙의 규칙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오늘가지 전해내려온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교회의 감독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의; 근거와 권위의 출처를 모두 사도들에게 두었고 이로써 감독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소유한 공식적인 수탁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소수의 감독들이 사도에 버금가는 독보적 권웨를 갖게되었음을 의미했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감독들의 권위가 빠르게 신장되었는데 강력한 힘을 가진 대도시 감독들의 등장은 기독교의 진리를 보존하는데 큰 힘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확대된 권력은 문제를 낳게 마련이다. 부활절기 논쟁을 계기로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의 감독은 더 강력한 영향력을 다른 지역에도 미치게 된다. 감독들은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을 지키기 위하여 일련의 명령을 만들어 냈는데 어떤 감독들을 그 명령을 남용하여 본질적이지 않은 교리에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켰다.
질문 1
유일신을 섬기며 황제숭배를 거절했을 유대교가 로마제국에서 합법화된 이유는 무엇이며 당시 유대교가 합법화되었다면 유대교 분파로 알려진 기독교회를 왜 네로는 화재의 주범으로 몰아간 것인지요? 그리고 네로의 박해이후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 유대교외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는데 이 때 유대인들도 크리스천과 똑 같이 피해를 입었는지요?
질문 2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면서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기독교 신앙에 그리스 철학이 유입되어 기독교 신앙의 헬라화가 이루어진 계기가 된 것인가요? 그리고 교회 안에 영지주의가 등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초기 교회는 영지주의의 도전을 제대로 극복한 것이며 이후의 교회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지주의의 도전은 근본적으로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지요?
[추기]
기독교의 박해는 주후 64년경 네로황제때 시작된다. 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게되었는가? 두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당시에는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신의 진노로 생각했고 다신교 사회에서는 로마의 신들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로마는 각 지역의 종교에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모든 제국에서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죽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게 하였는데 기독교는 이런 정책에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황제숭배를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시민으로서 공중목욕탕이나 검투경기, 군징집을 거부하였는데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그 싹을 잘라버리려고 한 것이다.
박해로 인하여 전도는 거의 불가능하였고 기신자들이 비밀집회를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검증받고 세례를 받는데만 3년이 걸릴 정도였으니 교회에 새신자가 들어오는 오는 것은 극소수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멸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국가 권력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핍박이 없었을 것이다. 초기부터 기독교는 국가 권력에 저항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로마를 바빌론이나 붉은 용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 팝박의 시대, 곧 순교자의 시대 400년이 기독교 2000년 역사의 황금기였고 신앙의 모범으로 우뚝 서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후 교회는 국가권력아래 들어갔고 타락하기 사작한다. 박해받던 교회가 박해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이후 1700년 동안 교회는 유대인을 핍박하였다. 암브로시우스, 십자군 전쟁, 마틴루터, 히틀러는 교회내의 뿐리깊은 반 유대인 정서를 보여준다.
박해 기간동안 배교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성직자들이 많았다. 박해후에 배교한 자들을 어떻게 교회에서 받아들일까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특히 성직자의 경우 그들이 인도하는 예배와 성례가 유효한가하는 논쟁이 발생한다. 이것을 도나투스 논쟁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신학적 논쟁으로 발전한다. 이 논쟁은 평신도와 성직자의 권력다툼으로 비화되고 결국 성직자들이 승리하여 교회의 정체성이 주교의 존재여부로 결정되고 교회의 결정권을 성직자가 독점하게 됨으로 결국 이 논쟁은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권한이 강화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이때 어거스틴은 예배의 가치가 성직자의 영적 순결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배교한 성직자 편을 들었다.
가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공인을 환영하였고 콘스탄티을 해방자로 반겼다. 이 순간이 교회가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콘스탄틴은 전폭적으로 교회를 지원하였고 이교의 성전을 기독교에 넘겨주어 이교 예배당을 기독교가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후 이교의 예배 의식이 기독교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성작자는 국가 공무원처럼 정치 권력화하게 되며 교회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의 길을 걷게된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는 신학적 논쟁을 황제가 해결을 주도하여 정치적 압력으로 결론을 낸것이다. 교회문제에 국가가 개입하고 신학에 정치적 영향력이 행사된 것이다. 특히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만들었고 교회는 로마 제국을 지상의 하나님나라로 간주하여 교회는 종말의 긴장감을 상실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교회의 고유 영역을 상실하고 국가 권력에 예속되었는데 이 기간이 소위 크리스텐돔으로 불리는 중세 천년의 기간이다.
이것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깨달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도피한 시막교부들이었고 이들로 부터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다. 이후 수도원은 부패한 교회를 갱신하는 개혁운동의 주체가 되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원의 재산이 증가하면서 수도원도 부패하가 시작한다. 교회에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의 말기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