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와 하나님의 뜻- 김근주
일제시대와 하나님의 뜻- 김근주
2014-09-03 15:02:36
[일제시대 그리고 하나님의 뜻]
▲ 김근주 교수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여 식민지 삼았던 36년은 조선에게는 치욕적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애써 부정되거나 모른 체 해서는 안될 역사이며,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살피고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문창극씨의 문제가 되는 강연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일제 시기를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 민족을 영글게 한 시기로 해석하고 있으며, 애석하지만 상심할 필요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던 시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일제와 분단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쓰시기 위해 허락하신 고난의 시기라는 식의 해석은 얼핏 들어 크게 문제가 될 것 없어 보인다. 사실 이런 식의 힘겨운 삶에 대한 해석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 임한 고난과 고초를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해석은 어쩌면 액면으로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이해 이면에 놓여 있는 것과 함께 고려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의 강연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고를 보여주는 것들에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게으른 조선’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에 비해 ‘일본은 참 깨끗하구나’ 라고 보았다는 미국 선교사들의 생각에 대한 언급,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승만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묘사,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공산주의이며 미국을 통해 도우시려고 분단과 625를 경험하게 하셨다는 식의 표현 등이 있는데, 이러한 언급들은 그의 생각이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몰상식, 노예근성, 그리고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사고로 일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창극씨의 발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에 대해 교계 내에 지지하는 소리들이 꽤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소리들에는 여러 신학자들과 유명하다는 목회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문창극씨의 발언은 단지 개인의 의견을 넘어서, 한국 기독교가 이제껏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난 4월 이래 온 국민의 슬픔의 근원이 된 세월호 참사 역시 종종 교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말로 언급되는 경우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험난한 시대 속에서 예수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살아온 삶을 신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시점에 오늘의 교회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망해 가는 나라에 살았던 예레미야는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는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다니엘은 그렇게 망해서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있으며, 역시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바벨론 신의 이름을 따라 불리게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아 보인다(단 4:8). 그들의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가? 우리 역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약탈에 대해 예레미야처럼 다니엘처럼 묵묵히 순종하여 섬겨야 하는가? 여기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해석학적인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의 행동을 평면적으로 오늘을 위한 규범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가령 우리는 구약의 곳곳에서 절기나 제의와 연관된 말씀을 만나게 되지만 오늘날에 그대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두 재료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규례를 보지만 오늘날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바울이 여성들은 교회에서 긴 머리이든지 머리에 무엇을 쓰든지 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해도(고전 11:1-16), 오늘의 교회는 전혀 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의 교회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은 그 때 그 시대의 의미를 깊이 드러내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심사숙고 되어야 한다.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지나간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예레미야와 다니엘 같은 이들을 제국주의 체제에 충성한 사람으로 그리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 시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그 모든 독립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그렇기에 이 땅의 지배 기득권 세력들은 일제에 영합했다. 그리고 일본이 망하자 즉각 새로운 지배세력인 미국에 영합했고, 문창극씨의 발언처럼 미국이 마치 구세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수 믿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주어진 말씀인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추구하는 신앙, 심사숙고의 신앙이어야 한다.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촉구한 예레미야
여호야김 4년(주전 605년) 느부갓네살이 애굽왕 느고를 갈그미스에서 쳐부순 이래(렘 46:2), 유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전역의 패권은 바벨론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 외치던(렘 3:1-4:4)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4년 이래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였다(렘25:1-11). 예레미야에 따르면 시드기야의 유다가 해야 할 일은 바벨론에 저항하고 국가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항복하고 느부갓네살을 섬기는 것이었다(렘 27:12-15).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다의 패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의 결과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 내내 하나님의 명령을 증거하며 여호와께 돌아오라 외쳤다.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렘 4:1-2)
예레미야가 촉구한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며, 다윗의 이름으로 일어날 의로운 가지의 통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추상적인 표현의 실제적인 의미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임을 알 수 있다. ‘시드기야’는 히브리어식 발음으로 “찌드키야후” 즉, ‘야훼는 나의 공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이나 선언은 의미가 없다. 야훼를 신뢰하고 그 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그럴 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다윗의 의로운 가지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 즉, “아도나이 찌드케누”라 불리게 된다. 이 이름은 시드기야의 이름에 대한 풍자가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야훼를 나와 우리의 공의라 고백하는 것은 야훼를 따르는 정의와 공의의 삶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순순히 항복할 것을 촉구(렘 21:8-10)한 예레미야는 곧바로 정의를 행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미슈파트”)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 21:11-12)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러나 언제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돌아간다는 것은 정의 즉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던 시절, 그야말로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뜻밖에 노예 해방을 단행하였다(렘 34:8-10). 적어도 예레미야 본문상으로 노예 해방에 대한 아무런 명시적인 명령이나 촉구가 없었는데도 시드기야와 귀족들은 이 일을 단행하였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의 조치를 가리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라 칭하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을 행한 것이라 평가하신다(렘 34:15).
멸망은 확정된 것이로되, 그것이 지금 당장의 현실을 제약할 그 무엇이지 않다. 내일 예루살렘이 망한다 해도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 노예를 자유케 하는 일은 시행되어야 한다. 시드기야의 행동은 참으로 예레미야가 줄기차게 증거한 정의와 공의의 삶에 부합된다. 그것이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예배를 더 드리는 것이지 않고, 성전에 또 찾아가는 것이지 않고, 아침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압제하는 자의 손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건지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고 국가의 재건을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돌이킴이 없다면 시드기야가 추구하는 바벨론으로부터의 독립은 그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을 민족주의적 가치로 위장한 것일 따름이다. 예레미야의 멸망 예언에 비해,하나냐 같은 예언자는 줄기차게 민족의 회복과 바벨론으로부터의 놓여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렘 28:2-4,10-12).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는 것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냐는 민족의 죄악과 하나님을 떠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복과 구원, 은혜로운 미래를 전할 따름이다. 지난 잘못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반성이 없는, 영광스러운 민족의 앞날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든 없든 무의미한 탐욕의 소산일 뿐이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반성(렘 28:7-9)이 결정적이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까지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통치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예루살렘이 망하자 자유의 몸이 되었다(렘39:11-14). 다윗의 후예가 통치하는 동안 땅 없는 가난한 이들이 바벨론이 정복하게 되자 땅을 얻게 되었다(렘 39:10). 나라보다 다윗의 후예보다 훨씬 본질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각 사람들이 마땅히 누리게 되는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제국주의 패권국가의 신하로 살아간 다니엘
예레미야와 비슷한 모습을 다니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다니엘은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관리로 살아가게 된다. 다니엘서 9장은 포로로 끌려 온 민족의 현실을 두고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여기며 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보여준다. 그의 기도는 현재 민족의 참담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명백하게 고백한다. 멸망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 풀이하는 경향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구약 문헌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 반성이다. 이러한 예들은 에스라(스 9:6-15)와 느헤미야(느 9:5-38)를 비롯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니엘 역시 여호와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한 말씀과 율법을 이스라엘이 행치 않았음을 고백한다(단9:6-10). 스가랴도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한 말씀을 듣지 않았던 과거를 고발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미슈파트”)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슥 7:9-12)
스가랴가 외친 점은 다니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느부갓네살을 섬기는 바벨론의 관리였지만, 느부갓네살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 역시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충고하고 있는데 아래의 말씀은 포로기 이전 구약 예언자들과 포로기 이후 스가랴가 외친 말씀의 본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아람어 “찌드카”=히브리어 ”쩨다카”)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7)
이방왕을 향해 다니엘은 구약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공의를 적용하고 있으며, 그 공의는 ‘가난한 자 긍휼히 여기기’로 구체화된다. 놀라운 것은 이방왕의 가난한 자 긍휼히 여기기를 죄사함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지극히 이방적 현실로 풀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대한 이해: 시편 137편
다니엘의 삶이 바벨론에 대한 충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위에서 다루었거니와 구약 성경이 바벨론에 대해 일관되게 표현하는 바는 훨씬 강력하다. 특히 이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이 바벨론의 강변에서 유다 포로들이 불렀던 시편 137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멸망할 땅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37:8-9)
이러한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 대한 보복을 말하는 것이지 않다.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에 담긴 것은 강대국 바벨론이 약소국인 유다를 어떻게 짓밟았으며,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고발이다. 바벨론에 멸망하는 것이 유다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그것이 바벨론이 유다에 저지른 짓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이지 않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낯선 땅을 살아가면서 바벨론의 멸망을 기원하고 갈망한다. 그 점에서 이러한 표현은 원수를 향한 대적과 저주의 기도에 닿아 있다.
저주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137편의 표현 역시 철저하게 비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람을 짓밟는 세력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도리어 축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고 죄책감까지 느끼게 만들곤 한다.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며 약자를 짓밟는 이들이 바벨론이니, 그들을 향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라.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힘이 있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힘 없는 포로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뿐이다.
대적에 대한 저주의 말과 기도는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적과 저주임도 명심해야 한다. 약자를 짓밟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히브리 노예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약자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모든 지배 세력들에 대한 대적과 거부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주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 사고에 기인할 수 있다. 그들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 표현할 때, 우리는 자칫 그들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조차 하나님의 뜻인 양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뜻에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야만적 지배를 당연시하는 노예 근성이 몸에 배어 있는 데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죄악과는 별개로, 약소민족에 대한 바벨론의 처사는 명백한 악이며 불의이다. 그리고 모든 불의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고 거역이며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기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며 단호한 거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바벨론에 대한 시편 기자의 표현은 시편 기자의 참담함의 원인을 무조건 내부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대적에게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비참하고 참담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종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곤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을 위해 꼭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의 어떤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오늘과 같은 고통을 가져왔다고 여기며 자책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한 이들일수록 세상에서 뒤쳐지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못난 탓에 이러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점에서도, 반성과 자신 탓하는 자책은 구별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가 바벨론에 관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바벨론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을 반영한다. 이것은 까닭 없는 저주가 아니라, 바벨론이 저질렀던 짓에 대해 그들도 동일한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점에서 시편 기자는 바벨론이라는 대적 세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모든 문제가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나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에서 기인한 것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그들이 게으르고 부족한 탓 때문이 아니라, 그들 바깥에 있는 잘못되고 불의한 사회경제적 틀로 인한 부분도 크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 공동체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만 여기기 쉽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바깥이 아니라 오직 내부로만 시선을 돌리게 만들기도 한다. 시편의 기도와 저주의 기도는 우리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을 명확히 인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제시대와 하나님의 뜻
문창극씨의 발언은 일제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의 시간을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 자체야 문제 될 것이 없을 수 있다. 정작 문제는 그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이며 어떻게 돌이킬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의 발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그저 조선 민족의 게으름, 일하기 싫어함, 더럽고 지저분함에 대한 지적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역사를 반성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지극히 천박한 이해를 반영할 뿐, 선교사들의 저술에 담긴 일방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반복한 사대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오히려 그의 발언에 있던 바, 구한말 양반 세력들의 게으름과 무능함에 대한 지적이 의미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은 현재에 기득권 세력들이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개인의 이런 저런 삶의 고초나 곤경을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은 어느새 우리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의 독특한 언어 습관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마치 기독교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 같이 유명한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든지 하나님의 뜻 같은 말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네 교회는 내용의 타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치 그것이 우리네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여기곤 해왔다. 그러나 고백이 기독교 신앙을 입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참으로 보여주는 것은 고백에 기반한 기독교적 가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빛과 소금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의 고백과 동의어이지 않다는 것이 산상수훈의 명료한 결론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않는다는 비유 역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증거하는 가치에 기반한 행실과 삶을 가리키는 것이지, 입술의 고백이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에 대해 아무 내용이 없는 채 우리 역사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고 말하면 기독교적인 것인가? 우리가 겪은 식민지 시절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특징을 보여주거나 담보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 예레미야와 다니엘 본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정의와 공의’에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점에서 문창극씨의 발언이나 그의 발언을 지지하는 교계 인사들의 소리에 크게 실망하게 되는 것은, 정작 불의한 독재 정권이 판을 치던 시절 이러한 교계 인사들이 그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반대도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문창극씨의 발언이 실제로는‘부패관리의 수탈’을 가리킨다며 그의 발언을 옹호한 샬롬나비라는 단체의 성명서는 정권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연관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말뿐이라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다. 정작 그 끔찍하던 군사 독재 정권이 횡포를 부리던 힘겹던 시대에는 정의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이들이 일제 시대를 가리켜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빛과 소금은 커녕 악취나는 신앙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성명서를 발표한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이 제시하는 “샬롬”은 ‘정의’에 대한 이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참된 샬롬이지 않으며,정의를 외치지 않는 이들이 “나비” 즉 ‘예언자’일 수 없고,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는 그 시절에 불의한 정권을 향해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목사들이 이제 와서 새삼 ‘정의’를 외치는 이들을 향해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을 가리켜 그저 제국주의에 봉사한 관리로 여기는 것은 부당하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멸망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때문이라 여겼다. 다니엘을 오늘날 적용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 역시 죄악의 역사임을 고백하고 기억하는 데 있다. 과거를 미화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역사로 풀이하는 데 있다.그리고 그 율법을 떠남을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았다’식으로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올바른 재판을 하지 않았으며 압제 가득한 현실을 방치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난 날을 올바르게 반성할 때 우리 역사에 가득했던 지배 세력들의 수탈과 착취에 주목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나 몰라라 하고 각자의 안일만을 도모했던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돌아봄을 오늘에 적용할 때, 이승만 시절과 박정희 시절을 그저 좋았던 시절로 여기는 교계 일각의 이해는 도무지 성경과 거리가 멀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장기 독재를 시도한 이승만의 시대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 독재 시절이 우리 민족을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리와 정의와 공의로 돌아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인 유영익 같은 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후진국에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여기는 것은 역사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돌아봄도 찾아볼 수 없는 노예근성에 기반한 이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힘으로 지배하고 힘으로 군림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반성한 것이 아니다. 질서와 통제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심지어 박정희 시대를 하나님께서 교회 성장을 위해 주신 시대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박정희 독재와 결탁한 몇몇 기독교 세력들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위해 만들어 낸 궤변이거니와, 그 시대에 변화가 있었다면 독재정권 때문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눈물이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덧 우리네 교회는 꿩 잡는 것이 매가 되었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지배적인 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 점에서 식민지 사관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네 안에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선에 들어오게 된 문물을 통해 조선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이 망한 것은 힘이 약해서였다고 여기고, 부국강병이 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이 쇄국정책을 펴서 서양 문물에 뒤쳐진 까닭에 조선의 패망이 있었다 여긴다. 그러나 조선의 쇄국 정책의 근본은 조선 지배층의 기득권 수호가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수의 이익 수호를 위해 문물과 교류를 차단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위주의 사관은 철저하게 기득권 중심이다.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권과 정부와 나라라면 망해야 한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진리이다.
힘겨웠던 일제 시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힘썼던 이회영선생 같은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일제를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에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어떻게 돌이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필수적이다. 나라가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 심판이라면 고치고 바로잡으라. 예레미야는 멸망을 외치며 정의와 공의를 전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 땅에 살면서 바벨론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였고, 이방왕을 향해 공의의 통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정말 죄로 인한 심판인 줄 안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전의 불의를 고치고 기득권의 이익 도모를 철폐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