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의 관계-성경해석학의 근본토대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경해석학의 근본토대
2014-07-20 23:51:05
1. 문제 제기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성경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동안 신학계에서는 구약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신약을 구약과 떼어서 해석함으로써 많은 해석학적 오류에 빠져왔다. 그러나 요즘은 신약의 계시가 구약계시의 연속선상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인식이 확신되면서 구약 내러티브의 연속으로서 신약을 내러티브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성경에는 그동안 몇가지 해석학적 단층이 존재하였는데 크게는 구약과 신약간에 존재하는 단층이고 작게는 첫째로 구약안에서 창세기 11장까지의 계시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 등장이후 이스라엘 역사간에 존재하는 단층이고 둘째는 신약안에서 복음서와 바울서신간에 존재하는 단층이다. 여기서 해석학적 단층이라고 표현한 것의 의미는 그들의 상관관계를 알지못함으로써 그들을 서로 분리하여 해석하려고 하였다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3개의 단층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단층들의 어느하나가 연결되지 못하면 그것은 다른 단층들의 상관관계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단층들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창세기 11장과 12장 이후 이스라엘 역사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11장의 계시는 성경전체의 메타네러티브의 열쇠로서 성경 전체 내러티브의 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2. 창세기 1-11장의 계시
그렇다면 창세기 1-11장에서 제시되는 성경전체 내러티브의 틀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대한 것이다. 창세기의 이 첫부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성경전체 내러티브의 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틀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는 관점이 된다는 것을 창세기 1-11장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창세기의 이 첫부분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사람은 누구이고 이 세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왜 세상와 사람을 지으셨는가? 라는 근본적이고 거대한 질문에 대하여 모두 대답하고 있다. 먼저 이 부분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계시는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엄청난 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누구이고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계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세계를 지으신 분이시라는 계시는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과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한 만물을 적극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두번째로 중요한 계시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계시이다. 성경은 사람에 대하여 두가지 계시를 제시하는데 첫째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은 사람이 누구이며 사람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존재와 일 양면에서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사람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또 특별한 사명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과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특별히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다스리고(그러므로 사람에게 순종이 요구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통치방식은 일종의 간접통치인 셈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고 만물을 지으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창세기 1-11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고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나라임을 창세기의 첫부분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전체의 메타 내러티브의 틀인 것이다.
3. 창세기 12장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장구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며 별과 같고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일까?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심중에 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천하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한 이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여호와의 도, 곧 의와 공도를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기 직전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사람이 여호와의 도, 곧 의와 공도를 행함으로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려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여 멸절시키신다는 것이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행위임을 의미한다. 특별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노아홍수 사건이후였는데 노아홍수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난 사람을 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날 때, 사람은 더이상 존재 의미가 없으며 심지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을 만물도 존재이유를 상실하다는 것을 노아홍수 사건은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땅과 씨를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여호와의 도, 곧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결국 창조목적을 떠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의 후손이 창조목적을 따라서 살게하시려는 것이었고 그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음으로 그들도 창조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으니 이로써 우리는 창세기 1-11장과 12장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상호관계를 알게되는 것이다.
3. 이스라엘 역사와 신약과의 관계
신약의 최고의 계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그 런데 에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했던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알려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들에게 약속되었던 메시야가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그 약속의 성취로서 오신 분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곧 천하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준비한 역사였던 것이다. 비로 역사적 이스라엘을 실패했지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오히려 실패한 역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목적이 천하만민이 그들로 인하여 복을 받아서 창조목적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듯이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창세기 1-11장과 이스라엘 역사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회복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니 이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스는 왕으로서 자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람의 죄사함에 국한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하는 것이다. 죄란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것이며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죄사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목적은 아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근본목적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것이지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심판을 면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신약의 복음서가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는 것이고 그것은 창조목적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4. 신약안의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관계
복음서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 되셨다는 것이라면 복음은 곧 이스라엘을 포함한 천하만민에게 이제 하나님께 순종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는 그 순종을 통하여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창조목적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목적은 바로 창조목적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그것이 기쁜소식, 복된 소식이 되는 것이다. 창조목적을 떠난 사람은 노아홍수 사건이 보여주듯이 그 존재의미를 상실함으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이제 그들이 창조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바로 복음서의 이 주제를 따라서 복음을 천하만민에게 선포한 사람이다. 그의 목적은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그들로 믿어 순종케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이신칭의' 의 교리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할 것인가 그래서 창조목적을 따라서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리키는 바 창조목적을 떠나서 바울이 단순히 죄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의 정신과 목적에 충실했던 사람이며 그가 복음을 이방에 전한 것은 바로 복음의 목적을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삶으로 창조목적을 따라서 살게하려는 것이었다. 비로 이것을 위하여 바울은 이신칭의를 이야기 하고 구원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서신을 읽을 때도 역시 성경의 단일한 메타 내러티브인 창조목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