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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공론장’ 참여,- 최경환

메르시어 2023. 5. 4. 22:20

한국교회의 ‘공론장’ 참여,- 최경환

2014-07-07 17:51:10


한국교회의 공론장 참여,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과 상황 2014 4월호 원고)

 

최경환_현대기독교연구원 연구원

 

 

예수는 언제나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설교했으며 논쟁을 벌였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찾아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해 주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는 공적인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서 투쟁, 저항, 인정, 배려, 긍휼의 사역을 해 오신 분이다. 그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18:20). 하나님의 말씀은 대중들에게 선포되었고, 그것은 언제나 사회정치적인 파급력을 가져왔다. 따라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처음부터 공적인 것이었고,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공적인 성격을 개인 내면의 신앙과 도덕으로 환원하려는 내성적 윤리’(introspective ethics)를 단호히 거부했다.

 

 

시민사회 형성과 공공신학의 문제의식

 

오랜 시간 신학은 세상과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연구해왔다. 후버(Wolfgang Huber)는 교회가 항상 사회와 정치라고 하는 환경으로부터 초연하게 떨어지려 하면서도 실제로는 얼마나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혀냈다. 성도라는 정체성은 동시에 시민이라는 존재양식과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든 모르든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법과 정의, 시민의 삶과 관련된 문제들, 생태적 삶, 소유와 빈곤으로부터 발생되는 이슈들, 노동자들의 투쟁과 저항에 대한 문제들, 전쟁과 평화, 교육과 지식, 학문과 과학, 보건위생과 사회보장제도, 문화와 언어로 말미암는 다양한 사회문제들 등등, 오늘날 우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교회가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보편적인 공적 삶 속에서 자신들의 진리를 증언했고, 자신들의 존재 양식을 정당화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신학적인 틀을 갖추게 된 것은 사회주의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전세계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시민사회’(civil society)라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연합체와 공론장이 형성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등장은 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들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시장의 중간영역으로 존재하는 시민사회는 견제와 감시를 통해 사회의 각 영역들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상호견제 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은 기존의 기독교사회윤리,’ ‘정치신학,’ 혹은 기독교세계관운동과 비슷한 내용과 주제를 다루면서도 교회와 국가,’ ‘개인과 국가라는 정형화된 도식에서 벗어서 공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영역을 보다 집중적으로 다룬다.

 

최근 공공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이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공공신학에 대한 개념 규정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신자유주의와 대기업의 독과점에 대해서 우호적인 북미의 보수적인 신학자들로부터 남미와 아프리카의 과격한 해방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공공신학은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떻게 벌거벗은 공론장에서 자신의 신앙 전통에 따라 모두가 납득할만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윤리적 본질을 선언할 수 있는가?

 교회는 비판적이고 합리적 담론을 통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공공성을 선포할 수 있는가? 또한 중첩적인 합의를 통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소수의 의견을 배제하지 않고 민주적인 공론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기독교신학은 투쟁의 상황 속에서 적절한 역할과 정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가?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해 이와 같은 이슈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다양한 질문에 직면해서 공공신학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출발해 나름대로의 대답을 제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공공신학이라는 커다란 우산 아래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공공성과 공론장

 

지난 30년간 민주주의 담론과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 속에서 공공성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이는 그만큼 이 대중적인 단어가 다원화되었다는 말이고, 이로 말미암아 그 개념과 의미가 모호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별히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공론장’(the public sphere)이라는 단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을 뜻하며, 이를 효과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규범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공적이라는 말은 사적이라는 말의 반대말이다. 삶의 한 측면은 분명 사적인 영역이고, 이 영역은 거의 대부분 은밀하고 친밀한 영역들이다. 이 영역은 일반적으로 공공선이나 보편적인 복지와 상관없는, 즉 타자와 관련되지 않는 영역을 뜻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삶이 공적인 견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그들의 개인적인 관심사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수용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공론장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얼마나 깊숙이 사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면 공공성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이중성을 알 수 있다.

 

흔히 공적인 것 국가적인 것과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때 공론장은 거리행진이라든가 촛불시위와 같이 광장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공적인 의견들을 함께 형성하고 표현하는 것, 그리고 국가의 정책이나 경제계획에 대한 저항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공적인 논쟁, 공적인 만남, 공적인 투표, 공적인 조직 등 공공성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실천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공적인 것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국가에 대한 책임이라든가 국가에 충성하고 봉사하기 위해 이러한 공적인 삶을 제공하고 내구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국가는 공적 서비스, 공중 보건, 공공 교통, 공적 사회복지, 공교육과 같은 것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 소위 국가가 주도하는 공공사업은 실재로 국가를 보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특정한 이념적인 선전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미디어와 언론의 친정부적 편향성은 시민들의 다양한 여론을 공정하게 보도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와 거대자본에 의한 일방적인 해석은 건강한 공론장의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다. 따라서 공공성을 둘러싼 이러한 다양한 의미의 층들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전유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용될 수 있고, 공공신학 역시 같은 이름 아래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는 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교회, 공론장 참여의 지혜가 필요하다

 

참여정부 이후 시민사회운동이 활성화되고 자연스럽게 대중집회와 시위는 그 이전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덩달아 기독교도 이러저러한 정치적인 집회를 시청앞 광장에서 개최했다. 한기총의 대표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며 사학법개정 반대집회로부터 시작해서 차별금지법 반대집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교인들을 동원해가면서 공개적인 정치집회를 치뤄 냈다. 필자는 이러한 정치집회의 적실성을 논하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잠시 뒤로 하고, 그동안 한국교회의 사회적 아젠다가 얼마나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쳤는지, 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기독교의 공적 가치가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충분한 토론과 비판의 무게를 견디어낸 여론이었는지를 묻고 싶다. 오늘날 많은 공공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공적인 논쟁과 끊임없이 연결시키면서도 이를 가능한 기독교 전통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말한 것처럼 공론장에서 여론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대화 당사자들이 진정성 있는 대화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비판적 이성의 해방적인 능력을 함께 공유해야만 한다. 한국교회는 과연 이러한 공론장의 기본적인 토론의 규칙과 정서들을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했는지 묻고 싶다.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욕을 먹는 이유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집단,’ ‘상식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이익집단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물론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이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접근을 중요시 여김으로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욕구와 공동체적인 삶의 실재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한국교회는 우선 토의를 통해서 다양한 의견들을 비판, 견제, 혹은 수용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타자와 함께 의견을 조율해 가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배워야만 한다. 공론장에서 교회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방법으로 신앙의 확신을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논증이 정합성, 일관성, 논리적 합리성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해야만만 한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공공신학은 공론장의 합리적인 검증기준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위택과 실천을 포기하지 않는 균형의 지혜가 필요하다.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의견교화, 그리고 이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축적되면 정치는 자연스럽게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이러한 토론들은 정권에 정당성을 허락하기도 하고 철회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성숙한 시민들의 비지배적인 자유를 통해 더욱 강화되고 우리는 촛불을 통해 그 위력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흔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 메시지'라며 선포하고자 할 때는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 이후 다원화된 세속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예전처럼 하나의 가치관과 이념으로 현실을 재편하거나 변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사회에 건설하려는 신정국적 이상을 가진 '예언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교회의 투쟁과 헌신이 잘못하면 또 다른 콘스탄틴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공신학의 과제는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해방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내용을 사회에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정부를 향해서 예언자적 선포를 한답시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관철하려 한다면 오히려 정부의 어젠다에 흡수될 수 있는 또 다른 위험에 노출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동기부여와 기여에 대해서 다시금 우리의 기억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배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공론장

 

공론장의 형성 조건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강조하게 되면, 공공신학은 지나치게 로고스중심적이고, 의사소통과 합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갈등과 논쟁을 최소화하고 리얼한 삶의 투쟁과 모순을 간과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은 시민사회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대화의 당사자들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놓칠 수 있다. 프레이저(Nancy Frazer)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공론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마치 동등한 사람인 것처럼 토의에 참여하고 함께 여론을 형성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계급적 불평등과 신분적 위계질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된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 할 공론장이 특정한 권력에 의해서 조작되고 조율되고 있다. 공영방송과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와 행정기관들의 은밀한 무시와 배제의 시선은 모두가 누려야 할 공적 서비스를 가로막고 있으며, 공론장으로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최근 생활고에 시달린 가족들의 집단적인 자살은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의 기틀이 마련되고 재화의 분배가 제도적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한들 무시와 배제의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문제는 공정한 분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품위를 어떻게 회복시켜 줄 것인가 이고, ‘어떻게 이들의 수치심을 제거시켜 줄 것인가 이다.

 

진정한 공론장은 참여 당사자들이 비록 출신배경과 사회적 조건이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가 같은 시민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경제적 동료라는 연대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 공공복지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빈곤층,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한 여성,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소수자 등, 이들을 동등한 동료로 인정하고 공론장에 참여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하위주체들의 대항적인 공론장(subaltern counterpublics)을 통해 부르주아 공론장의 근본적인 특징들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이 무시와 배제의 사회적 차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공론장은 다양한 환경과 상황 가운데 있는 하위주체들의 목소리가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연하고도 넉넉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론장의 중요한 정치적 가치는 바로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 공론장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이며, 동시에 사회가 만들어 낸 은밀한 배제의 구조로부터 밀려난 자들을 위한 자리까지 마련해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공론장은 어떠한 문화적 표현의 형식도 용인 될 수 있고 수용될 수 있는 호혜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평등과 문화의 다양성,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여론이 결합될 때 공론장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대항 공론장에 대한 한 줄기 희망

 

프레이저는 흥미롭게도 대항적인 공론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브룩스-히긴보탐(Brooks-Higginbotham)의 연구를 소개하는데, 그녀는 1880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에서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공론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분석한다. 브룩스-히긴보탐에 의하면 그 시기에 흑인들은 투표권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백인들로부터 배제를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대안적인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흑인교회였다는 것이다. 공론장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흑인들은 교회에서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었고, 다양한 목소리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암울했던 미국의 공론장의 역사에서 교회가 한 줄기 희망을 제공했고, 흑인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공론장에서는 무엇보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고, 자신의 목소리가 무시되지 않고 있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어떤 외부의 권력에 의해 부여진 정체성과 필요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다시 해석하고 재설정하는 것이 대항공론장의 역할이다.

 

암울하고 우울한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이런 희망과 대안적인 장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자만의 상상을 해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그들이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새로운 상상력을 꿈꿀 수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고 밀려난 이들이 편하게 안식할 수 있는 교회,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 싸워주지 못할 때 그 짐을 대신 지고 함께 싸워 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를 마음 속에 그려본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배제에 눈을 감아 버리는 그리스도인은 가장 위선적인 바리새인이라고 비판한 본회퍼의 지적을 남겨본다.

 

 

공공연한 논쟁을 회피한 인간은 개인적 미덕이라는 피난처에 도달한다. 그는 도덕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힘을 다해 선을 행한다. 하지만 공공성을 임의로 포기한 그는 자신을 갈등에서 보호해 주는 한계선을 정확하게 지킬 줄 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 앞에서 눈과 귀를 닫을 수밖에 없다. 세상 안의 책임적 행동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순수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반드시 자기기만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록 그가 온갖 일을 행하더라도, 자신이 행하지 않은 일 때문에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안 때문에 파멸하거나, 가장 위선적인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본회퍼, 윤리학, 대한기독교서회, 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