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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혁모델의 다양성과 일치를 향한 신학적 모색- 신원하

메르시어 2023. 5. 4. 22:18

사회변혁모델의 다양성과 일치를 향한 신학적 모색- 신원하

2014-06-30 15:32:44


사회변혁모델의 다양성과 일치를 향한 신학적 모색: 복음주의 진보파와 급진적 좌파의 신학적 사회윤리 비교 연구

 

I. 서론: 현대 복음주의 교회와 사회윤리적 관심

 

A. 20세기 후반기 복음주의 사회윤리 운동

 

20세기 후반기 복음주의 교회에서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 중의 하나는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과 교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의 공공 광장에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는 이러한 운동이 절정기를 달하였고 실제 사회와 정치인들에게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제리 포웰(Jerry Falwell)을 중심으로 1979년에 조직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그룹과 1980년대 후반에 팻 로벗슨 목사(Pat Robertson)가 주도하는 기독교 연맹’(Christian Coalition)과 같은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행동주의는 진보적 교회의 정치활동을 능가했고,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법제화하기 위해 맹렬하게 운동하였다. 이 현상은 사회와 대중매체, 그리고 학계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대중 매체들은 이 현상을 보수적인 기독 교회가 정치적인 아젠다를 제시하면서 기독교적 도덕과 가치를 사회에 법제화하려고 한 행동으로 분석하면서, 이를 중생자들의 정치”(born-again politics)라고 표한 바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회의 사회 정치 참여 현상은 비록 미미하지만,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칼 헨리를 비롯한 일부의 복음주의 학자들과 단체들이 1950년대부터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을 사회에 반영하기 위해 기독교회가 책임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했고, 1960년대에는 실제로 다양한 교파와 신학적인 배경을 가진 젊은 복음주의 신학자와 기독 학자들이 대거 가담하였고 이에 관한 이론서들을 앞 다투어 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 참여 운동이 이론적으로나 행동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번성기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197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주의자들 협의회’(Conference of Evangelicals for Social Concern)를 결성하고, 이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시카고 선언(Chicago Declaration)문을 작성하는 열매를 맺었다.

 

B. 복음주의 사회 윤리의 다양성

 

이미 언급했지만 근본주의자들의 맹렬한 운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학적 정치사상과 견해를 가진 복음주의자교회들과 그룹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 각각의 그룹들은 교파와 신학적인 성격도 다양했고 또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방법에 대해서도 견해를 달리 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미국 문화와 사회, 정부의 기능과 한계, 무력사용과 전쟁, 경제체제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회개혁방법에 대한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어떤 문제에서는 생각이 완전히 대조적이기도 했다.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의 성향을 로버트 파울러(Robert Fowler) 교수는 보수적 입장,” “온건한 입장,” “개혁적 입장,” “급진 좌파적 입장”, 그리고 극 우파적 입장으로 분류했고, 헌터(John Hunter) 교수는 보수적 입장,” “온건한 입장,” 그리고 진보적 입장으로 분류했으며, 처릴로와 뎀스터(Cerillo, Jr. & Dempster) 보수적 복음주의”(Evangelical Conservative), “진보적 복음주의”(Evangelical Liberal), “급진적 복음주의”(Evangelical Radical), 그리고 신 우파 근본주의”(Fundamentalist New Right) 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필립 워가만(J. Philip Wogaman) 복음주의 우파”(Evangelical of the Right) “복음주의 좌파”(Evangelical of the Left)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유형화하고 있지만 거의 같은 그룹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처릴로와 뎀스트의 분류를 따르되, “급진적 복음주의"의 이름을 이 그룹의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내는 급진적 좌파 복음주의(Evangelical Radical Left)로 고쳐 사용할 것이다.

 

C. 두 사회변혁모델 연구와 필요성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교제하며 그리고 사회 정의를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야 복음주의 공동체들은 서로의 사회변혁을 위한 윤리적 전략과 모델을 살펴보면서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상대방의 모델을 통해 보완해 나갈 수 있고 또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새로운 모델이나 또는 방향에서 채워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깨닫고 함께 모색해 나갈 수 있는 동기와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비교적 신학적 뿌리와 틀에 기초한 사회 변혁 모델을 가진 그룹들이 서로 건설적인 대화를 도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사회적 영향력에서는 포웰과 로벗슨에 의해 주도된 신우파 운동과 그 모델이 가장 두드러졌지만, 이 그룹의 운동과 제시하는 사회변혁 모델은 신학적 토대와 천착되어 마련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포웰 자신이 인정하듯이, 다분히 도덕적 안건(moral agenda)에 의해 움직이는 애국적 도덕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모델은 애국주의적인 신앙과 도덕주의의 요소가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학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도 이 그룹 안에 함께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처릴로와 뎀스터가 분류한 진보적 복음주의 그룹과 급진적 좌파 복음주의 그룹의 운동은 종교개혁에서 시작되는 오랜 신학적 전통에서 말미암았고 이들이 제시하는 사회변혁모델은 튼튼한 신학적 뿌리와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운동은 결코 어떤 한시적인 운동이나 모델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 신학 전통이 계속되는 한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만 계속될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튼튼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면서도 대조적인 사회윤리 전략을 갖고 있는 두 그룹을 분석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고 특히 복음주의 윤리학의 건설적인 발전과 일치를 도모해 나가는 데에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젊은 지성인들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소위 기독교 세계관과 사회 변혁론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데, 본 논문은 이 진행되는 논쟁을 위해 발전적인 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어느 정도나나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II. 진보적 복음주의(Evangelical Liberal)의 신학과 사회윤리모델

 

A. 태동과 주요 인물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과학, 신학을 공부한 지성적 젊은 복음주의 학자와 신학자들이 1950, 60년대에 칼 헨리에 의해 결집된 보수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의 복음주의 사회윤리로서는 사회 변혁을 도모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세상과 사회를 개인의 변화를 통해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에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한 사회과학적인 분석에 근거하고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초창기의 주요 학자인 데이빗 모버그(David Moberg)교수는 사회악을 강조하면서 사회악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악을 후원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면서 개혁을 위한 강한 행동주의 노선을 천명했다. 이 입장은 70년대 젊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는데,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신학 사상을 계승하는 신칼빈주의 신학전통에 있는 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리폼드 저널(The Reformed Journal)의 편집인들, 칼빈대학 인문 사회과학 교수들, 그리고 미국개혁교단과 관련된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모버그(David Moberg),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루이스 스미즈(Lewis Smedes), 스티븐 몬스마(Stephen Monsma), 폴 헨리(Paul Henry), 그리고 공공 정의 연합회(Association of Public Justice)의 제임스 스킬런(James Skillen)과 카나다의 기독교 학문 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의 리차드 미들톤(Richard Middleton)과 브라이언 왈쉬(Brian Walsh), 그리고 폴 마샬(Paul Marshall)과 같은 학자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전향적이면서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소위 문화적 칼빈주의자(Cultural Calvinist)들과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B. 신학적 토대: 창조 중심적 신학(Creationcentric theology)

 

이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에 서있는 진보적 그룹의 신학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창조중심적 신학(Creationcentric theology)의 관점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비록 예수 안에 나타난 구원과 윤리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만, 피조물의 삶과 도덕을 위한 규범과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나님이 창조 시에 만든 창조의 질서와 법과 제도를 통해 드러내셨다고 보면서, 창조에 대한 긍정이란 시각에서 신학적 윤리적 전개를 해 나간다.

 

1. 사회윤리의 토대로서의 창조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창조계를 다스리라고 하신 명령(1:28)을 소위 문화적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이해하며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사회변혁과 건설을 위한 핵심적 도덕명령으로 이해한다. 폴 마샬(Paul Marshall)과 같은 학자는 이 문화적 명령은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게 하는 일을 하도록 한 계획 속에 들어가 있었다(1:26)고 주장하면서, 문화 명령은 창조 이후에 내려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인간의 문화는 이미 창조에 기초하고 있고 하나님의 일반은총 또는 보호하시는 은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인간의 문화와 문화건설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문화 건설의 일을 포함하는 이 땅을 다스리는 일의 기술을 정치라고 표현한다고 하면, 정치도 이미 창조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는 일종의 타락전 예정된 제도(prelabsarian order)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국가와 정부는 타락 후에 악을 제어하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 전에 사람들의 복지와 선을 도모하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본다. 만약 죄와 타락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이 정부는 완벽한 정치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존재했으리라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는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은 제도로 이해하기에 이 그룹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창조 세계

 

이 그룹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救贖)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그것의 인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의 구속 즉 인간과 창조 세계의 구속을 의미하는데, 특히 구속을 죄로 파괴되고 오염된 개인과 국가와 피조물 전체의 회복(回復)으로 이해한다. 이 말은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창조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어떤 새로운 실체나 내용을 창조세계에 가져오거나 첨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창조세계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에 대해 이 그룹의 대표적인 이론적인 기초를 놓아 주었다. 그는 예수의 구속과 창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당신이 의도하신 어떤 도덕 질서 아래서 만물을 다스리기를 의도하셨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신다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분이 창조의 그 순간에서부터 영원까지 하나의 동일한 확고한 도덕적 세게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하셨고 원하시고 원하실 그분이 마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분이 아닌 것처럼 일하시겠는가?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일은 인간의 죄악으로 야기된 창조의 본래질서를 뒤덮었던 먼지들을, 구속사역으로 완전히 쓸어 내셔서 그 본래의 광채로 다시 빛나도록 하신 일이다. 참으로 그리스도, 그 분만이 태초로부터 이 세계질서를 움직이시는 원리인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계질서를 확고하고도 비틀거리지 않는 걸음으로 이 세상의 질서와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더하여 오신 분이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 그 자체는 태초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 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질서는 믿는 자들 뿐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인간 관계들에게도 관여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예수의 구속 사역을 창조의 회복으로 보기 때문에, 비록 정사와 권세에 의한 악한 영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사회 질서와 제도들은 여전히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다분히 기독론은 창조론의 빛 안에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이 그룹은 현재 이 땅과 이 땅에서의 삶은 종말의 세계와 그곳에서의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닌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주장한다. 즉 종말은 창조세계의 완전한 회복과 완성으로서의 새로운 세계로 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은 종말론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계속될 것으로 본다 이런 신학에서 적극적 행동주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C. 사회변혁 모델과 전략

 

이들은 현 사회의 악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차원에서 보아야 하기에 개인적인 개선의 노력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정부의 기능을 활용한 사회 구조적, 제도적 개혁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인문제, 장애자문제, 빈곤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나 가족 그리고 교회의 지원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국가적 차원에서 연금제도확충, 노약자, 장애자 특별지원법 등의 대책을 마련하여 구조적으로 간섭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갖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현실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각종 제도를 통해 사회를 개선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몬스마(Stephen Monsma)는 죄악된 현실이지만 악을 억제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보면서 기독교인은 이런 전향적 현실주의”(progressive realism)의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 실제로 교수에서 현실 정치에 뛰어 들어 미시간 주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라고 말한다. 역시 미시간 주 하원으로 정치활동을 했던 칼빈 대학 교수 폴 헨리(Paul Henry) 역시 죄로 인해 인간의 정치활동과 세상사는 갈등이 있지만 인간은 갈등을 넘을 합의를 서로 도출하고 평화와 정의를 제한적으로 구현해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그룹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현실의 정치의 영역에 많이 진출시키는 것이 사회를 공의롭게 변화시키는 중요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독교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독교 시민들이 정치 연합회를 만들고 또 이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사회를 위한 활동을 할 것을 강조한다. 첫째, 정치 연합회 활동을 통해 시민들에게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바른 시각을 심어주어야 하고, 둘째는 전문가 그룹을 형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책들에 대해 연구하여 제안하도록 하고, 셋째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 주요 사회문제에 대한 입장

 

1. 이 그룹에 따르면 미국은 구조적으로 다원적 사회이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로 구성된 국가이다. 그렇기에 이 그룹은 기독교적 가치가 미국사회에서 신장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국가나 정부에 강하게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공공의 정의를 추구해 나가는 것보다는 특정 이익단체와 그룹을 대변하는 정책을 펴 나가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비판하면서, 정부는 국민의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을 존중하여 평등하게 국민의 다양한 입장을 보장해야 한다는 다원주의(pluralism)적 입장을 견지한다. 정치인들은 어떤 특정한 종교, 인종, 계층의 의견이 비록 다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체의 의견으로 생각하여 정책과 법에 과도하게 반영해서는 안 되며, 다양한 소수 그룹의 소리도 존중하고 함께 반영하는 비례적 정의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있어서 공공의 삶에 군사적인 자세로 기독교적 도덕주의를 관철하려는 단체들과 그 주장을 비판하고 반대한다.

이 그룹은 자신의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주어진 사회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 다른 견해에 관용하고 인내하는 태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완전히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종말론적인 소망의 관점에서 인내하면서 다른 견해와 사람에 대해 정중함을 잊지 말고 점진적으로 정치적 절충과 대화를 통해 사회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이 그룹은 미국이 자국중심주의가 아니라 지구촌의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기에 기독교회도 편협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이 그룹은 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부의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고 견제해야 함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이들은 베트남전쟁과 같은 전쟁은 지구촌 전체와 베트남 국민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일으키지 말았어야 할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이 그룹은 현실 정치에 있어서 미국의 국내 문제는 다른 국가와 긴밀하게 얽혀 있기에 항상 다른 국가의 시각을 반영하는 태도로서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자유방임주의 경제제도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돕기 위해 복지제도를 정부가 관여하고 조정해 나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연방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의 삶에 관여하고 복지국가를 향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갈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케네디 정부가 추진했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의 프로그램에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룹에 속한 인물들과 그룹들은 정치적으로 어느 한 정당에 기울여지지 않으며 정책에 따라 다르게 정당을 선택하고 지지한다.

 

III. 급진적 좌파 복음주의 (Evangelical Radical Left)의 신학과 사회변혁모델

 

A. 태동과 주요 인물/그룹

 

1960년대는 청년들의 반전운동과 반문화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청년들이 미국 정치를 불신하고 기존질서나 문화,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에 도전하면서 사회와 정치에 대해 냉소하고 비판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 중 후반에 젊은 복음주의자들 중에 미국의 기본 경제, 정치 구조와 이것이 기초하고 있는 원리와 체계를 비판하고 동시에 교회들도 너무나 쉽게 이 세상의 방식, 각 영역에서 개인적 집단적 이익만을 우선하여 추구하는 미국적인 삶의 방식에 동화되어 갔음을 비판하는 그룹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 실현은 기존 질서와 제도를 통해서는 안 되고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쳐준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따라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대안적인 삶으로 증거하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수가 죄로 인해 왜곡된 질서와 가치를 좋으며 그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새로운 시대를 여시고 새로운 질서를 펼치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개종할 것"(conversion)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그런 공동체를 만드셨다고 주장한다. 짐 월리스(Jim Wallis), 존 알렉산더(John Alexander) 등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들은 기존 교회가 성경적 신앙과 정치가 아닌 이 세상과 타협하고 제도화된 기독교에 헌신하고 따르고 있음을 비판한다.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자냐 진보주의자냐, 칼빈주의자냐, 알미니안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기독교를 따르느냐 아니면 성경적 신앙을 따르고 행동하는 것이냐?’ 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철저히 성경적 신앙에 따라 그대로 살아나갈 것을 강조한다.

1971년 월리스를 중심으로 창간된 잡지 포스트 아메리카(Post-America) - 75년 이후 체류자들(Sojourners)로 개명 -  1965년 존 알렉산더(John Alexander)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디 아더 사이드(The Other Side)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이러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같은 학자의 신학과 윤리학은 이 운동의 든든한 받침목으로 작용하고 있고, 요더 못지 않는 이론적 지원과 월리스 못지 않는 실천 운동을 하고 있는 로날더 사이더 (Ronald Sider) 역시 이 그룹과 관계가 많다. 그리고 형제단 교파의 목사이며 평화 운동가인 아써 기쉬(Arthur Gish), 전쟁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평화주의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노력하는 형제단 교파의 데일 브라운(Dale Brown)과 체류자(Sojourners) 평화 사역에 깊이 관여한 형제단 교파의 데일 오커만(Dale Aukerman),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요 상원의원인 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 등 대부분 재세례파 신학 전통과 메노나이트 신학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이 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또 평화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형제단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도 이 그룹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B. 그리스도중심적 신학

 

이 그룹의 신학적 특징은 급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Christocentric theology), 또는 십자가 중심의 신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모든 도덕적 신학적 지식의 근원이고 중심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 천국 백성의 당위적인 삶의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사역과 가르침, 특히 그의 십자가로 대표되는 그의 삶은 제자들이 그대로 닮아가야 할 규범으로 사회윤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법, 기독교 현실주의, 등의 윤리적 접근법에 정면으로 도전을 가하는 것이고 철저한 성경적 현실주의에 기초하는 것이다.

 

1. 정사와 권세가 지배하는 타락한 창조

 

이들은 이 세상의 사회 질서, 특히 정부와 같은 제도들이 현실 사회 유지를 위해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선을 이룰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창조의 모든 것은 타락 이후 정사와 권세자들(principalities and powers)의 지배와 조종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세들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가시적인 실재와 구조들을 조정하는 기능을 맡은 자들로서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그들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반역하게 되어버린 존재를 의미한다. 죄로 인해 창조계가 타락했을 때, 권세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타락했으며 그 결과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타락한 권세들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 때에 부여한 목적, 곧 인간과 하나님을 중재하는 역할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우상의 위치로 들어 올렸다.

 

권세들은 창조질서에 순응하여 머물도록 허락된 적당한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절대적인 가치인 것처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인간과 역사를 노예화했다. 인간은 그들에게 매여 있다... 인간은 무엇에게 종속되어 있는가? 정확하게 말하면 삶과 사회에 필요한 가치들과 구조들이긴 하지만, 우상의 위치를 주장하며 마치 절대적인 가치들인 것처럼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섬기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그 가치들과 구조들에게 인간은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타락한 권세들이 자신들을 절대화시켰고, 개인과 사회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세들은 계속해서 사회 속에 있는 많은 다양한 구조들, 곧 지적인, 종교적인, 도덕적인, 정치적인 구조들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타락 이후, 세상에 있는 어떠한 사회구조 혹은 질서들도 권세들의 이러한 지배권 밖에 있는 것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사와 권세와 관련하여 창조세계와 각종 영역의 구조와 제도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 그룹은 국가와 정치를 포함한 타락이후 창조세계의 기능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이다. 즉 현재 정치를 주도하는 공공의 정책을 결정하는 강력한 힘은 바로 정사와 권세자들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에 교육, 상업, 산업, 노동 등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정책이란 것은 결국 이 권세 잡은 자의 목적과 의도대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룹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세력들 간의 역학관계의 구조 안에서 힘, , 관료조직을 통해 정치하는 정부는 결코 전쟁, 빈곤과 같은 악을 종식하는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2. 예수의 길: 하나님 나라 백성과 공동체의 규범

 

이 그룹에 속한 신학자들은 무엇보다 타락한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삶에 대한 당신의 뜻을 충만히 드러내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정사와 권세에 의해 운영되는 이 땅에 새로운 시대를 여시고 이 세상의 각종 제도와 구조, 가치, 질서와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질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러 오신 분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새로운 질서의 복음, 새창조의 복음, 그리고 새로운 세상,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복음을 예수가 이 땅에 가져 오셨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질서로 회개하고 돌아와 그러한 공동체를 이 땅에 확산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고, 그 자신 삶으로 본을 보이신 분이다. 이러한 천국백성의 독특한 삶의 윤리와 방식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 그룹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요더는 역사적 예수와 그의 지상 삶을 강조하면서 예수의 우주적 그리스도성(cosmic christology)을 강조하는 기독론을 강력히 비판한다. 왜냐하면 우주적 기독론이 예수의 삶을 실제 역사적 상황과 연결짓는데 소홀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오신 역사적 예수의 삶과 핵심적 사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론이 나사렛 예수의 삶을 형이상학화하거나 영지주의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요더는 예수는 다른 많은 종교적 영웅들과는 달리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셨던 실제 나사렛 사람으로 정치적 생을 살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사회적 삶은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삶으로 강조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이 정치적인 삶이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사역하시면서 자신을 구약 이사야 61장에서 예언된 메시야로, 희년의 해와 같은 새로운 진정한 해방과 평화가 구가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펼치는 메시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4:18, 19)고 주장한다. 즉 예수는 자신이 왜곡된 인간 관계를 변화시킴으로 사회 속에 정의를 가져올 것임을 사회-정치적 표현을 사용하여 희년의 해를 선포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가 기존 제도와는 근본적인 다른 질서와 가치가 주도하는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었고 약한 자들, 죄인들, 소외된 자들과 관계를 맺으신 것처럼, 이 사회에 새로운 가치가 주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 세상의 주도적인 가치와 문화와는 완전히 전도(顚倒, up-side down)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문화를 확산하고 그런 가치와 질서를 따라 사는 공동체를 더 건설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와 권세에 의해 지배되는 이 세대(this age)와 이 세대의 사회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세대(the age to come)와 새로운 질서를 주님은 가져오셨고, 이 두 세대(two aeons)는 마지막을 향해 함께 가다가 종국적으로 이 세대는 심판을 받아 사라질 것이나 예수가 여신 새로운 세대는 완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C. 사회변혁 모델과 전략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취할 사회개혁 방법은 현 정치적 구조와 사회 제도를 통해서는 결코 안되고 그것과는 다른 급진적인”(radical) 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가치, 삶의 방식, 사회 질서와는 철저하게 다른 가치와 질서를 가진 공동체를 건설하여 이를 확산하고, 그리고 이들의 삶의 방식을 사회에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따라 사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하나의 사회적 실재로서 이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다른 집단에 엄청난 선교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공동체적 접근이 개인적 접근과 구조적 접근을 모두 포괄하는 기독교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 일을 위해 우선적으로 기존의 교회들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제자도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회는 특별한 사회윤리정책과 전략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 자체가 사회윤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근본적인 잘못은 이 사회의 악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적 행동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작 교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에 있고 세상적인 방식과 이 세상의 조직 운영 방식에 타협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 본연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에 거주하는 이방인(Resident Aliens)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가치와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방식대로 행하고 그 방식을 증거(witness)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움과 앙갚음 대신 용서를, 저주 대신 사랑을, 폭력 대신 평화를, 군림과 조정 대신 자원적 섬김과 약함을 택하는 이러한 반문화적 덕목과 가치가 지배하는 가견적 공동체(visible community)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삶과 질서를 이 세상에 증거하면 이것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주장한다. 하우어워스는 교회는 전쟁, 기아 등 각종 비인간적인 형태의 악과 그것을 조장하는 정책을 반대하는 사회적인 운동에 참여할 수 있지만 이것은 교회가 이 사회에 선포하는 행동의 차원에서 행하는 일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가장 확실한 일은 증거와 선포이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그대로 따르고 살아내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의 삶을 통해 이 사회에 드러내고 증거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공동체의 증거와 이것의 확산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사회변화전략이라고 주장한다.

 

D. 주요 사회문제와 입장

 

1. 급진적 좌파의 입장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미국의 정치, 경제, 제반 영역에서의 현상은 성경이 제시하는 질서와는 동떨어져 있고 그와 배치되는 정치와 법과 제도가 횡행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별로 소망을 두지 아니한다. 미국은 물질주의, 자본주의적 경제, 개인주의에 의해 움직이면서 총체적으로 도덕적인 무능력과 타락으로 점철되어 있는 마치 성경의 바벨론과 방불한 이교국가라고 이해한다. 이는 미국 사회가 짜여 있는 체계에서 말미암는 다는 것이다. 즉 미국 사회 속에서 자행되는 불의, 빈곤, 도덕적 해이와 같은 문제는 특정한 사회 정책,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부의 방책과 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체계(system)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 체계는 표면적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적인 영역에서 힘있는 집단들에 의해 움직이는 강자들의 동맹주의(corporatism)에 좌지우지 되고 있으며, 주요 정책들은 이런 집단의 힘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궁극적으로 이들의 이익과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재의 미국의 모든 문제가 배태된다고 보고 있다.

2. 이들은 정부가 사회 기금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을 비롯한 약한 자들에게 복지혜택을 베풀고 또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나가는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인 강제력과 정부 주도의 행동을 통하여 결코 정의로운 사회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힘과 강제력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는 정부는 기본적으로 힘을 극대화하려고하고 또 이것은 인간의 부패로 인해 또 정사와 권세자의 조종을 받기에 결국 전제적인 힘을 행사하고 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정부는 부패하고 전제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국가는 결코 가치와 법의 궁극적인 출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출처임을 명심하면서, 정부의 힘을 최소화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진정한 방법은 이 사회의 삶의 방식과 다른 대안적 삶의 방식을 가진 공동체를 이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하고도 궁극적인 기독교적 사회변혁방법이라고 주장한다.

3. 이들은 성경의 예언자 전통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평화주의 이외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늘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야말로 미국 사회가 전혀 성경이 말하는 규범과 가치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던 증거라고 비판하였다. 사랑과 섬김, 인권이 아니라 철저한 힘과 자국 이해에 지배당하고 있는 정부의 문제를 그대로 노출한 것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철저한 전쟁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이들은 기독교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현실에서 살아내는 성경적 현실주의(biblical realism)를 주장한다. 이들은 기독교회는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의 평화, 정의, 자유와 인권을 추구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약한 자, 소외된 자의 편에 서야 함을 주장한다. 이 그룹은 여권신장, 가난한 자, 흑인,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그리고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국가의 이익이 아닌 인권옹호에 더 가치를 두도록 그리스도인이 앞장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V. 복음주의 사회윤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향한 신학적 제언

 

A. 비교 분석적 정리: 두 사회변혁 모델과 현실적합성

 

1. 사회의 점진적 변혁과 대안적 사회 건설

 

두 그룹은 사회 질서, 정치, 정부의 기능, 하나님의 뜻 인식방법 등에 대한 극복하기 쉽지 않은 신학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이 두 신학적 입장 즉 창조중심적 신학과 윤리(creationcentric theology)와 그리스도중심적(christocentric theology)신학에서 대조적인 두 사회변혁 모델이 말미암는 것이다. 전자가 창조, 십계명, 자연법, , 지배와 같은 것을 강조하고, 후자는 십자가, 산상수훈, 예수를 본받음, 섬김, 희생과 같은 것을 강조한다. 이에서 사회 윤리와 변혁 모델의 근본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진보파 그룹은 인간의 문화 건설의 사명은 이미 창조 시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속과 계시와는 상대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오염되었지만 사회 질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현 제도의 개혁을 통해 정의와 평화,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일에 그리스도인은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그 일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일종의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따라야 할 거룩한 소명으로 본다.

급진적인 좌파에 속하는 그룹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새로운 가치와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하고 그것은 이 세상의 방식과 충돌을 일으킨다고 본다. 그래서 경제적 개혁과 구조 개선을 통해 사회 질서를 기독교적인 가치로 개혁해 나아가려는 입장에 대해 소극적이고 또 이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이런 것은 콘스탄틴 교회가 범해온 실수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콘스탄틴 교회 교회와 세상을 혼동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의 독특한 정체성과 사명을 희석시켜 버렸음을 이들은 비판한다. 교회의 사명은 결코 이 사회의 질서를 기독교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들여온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가치와 규범,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 그대로 사는 제자들의 공동체 즉 대안적 사회를 확산시키고 그것을 통해 사회에 선교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2. 현실적합성

 

첫째, 진보적 복음주의의 입장은 예수의 구속과 하나님의 일반은혜의 작용으로 이 땅의 질서와 제도는 여전히 선한 열매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인들과 함께 현 정치제도와 과정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어깨를 맞대고 일해 갈 수 있다고 보고 또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로 주장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 사회에서 복지사회를 향해 정부와 의회와 각 영역에 들어가서 힘껏 봉사하고 법제화하는 일에 책임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복지국가제도가 국가의 재정적자, 관료조직의 비대화, 그리고 노동자들의 노동의욕 감소, 국민의 조세 부담증가, 그리고 국가 경쟁력 약화와 같은 문제를 발생할 소지가 있고 실제로 20세기 중 후반 서구 사회의 역사가 이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 땅의 사회질서 즉 정치, 경제의 각종 구조가 결국 부패하고 타락하여 힘있는 그룹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체계 안에 있기 때문은 아닌지 한번 새겨볼 만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쩌면 정사와 권세에 의해 움직이는 철저한 부패한 현 사회 구조와 질서가 지니는 본질적인 한계 때문은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지혜를 모아 구조를 개선해 나가면 될 문제인가? 아니면 이러한 작업에 참여하되 한편으로 대안적 공동체를 확산하여 그것을 통한 선교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방법이 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사회변화 방법이라는 주장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 아닌지?

진보적 그룹의 입장은 현 사회질서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적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에 이곳의 제도와 문화건설 활동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인 경향은 자칫 기존질서와 문화의 죄성을 간과하게 될 우려가 있고 순진한 낙관적 시각에 빠지게 될 유혹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사회적 문화적 제반 영역에서 보수적인 경향을 낳게 될 개연성을 안고 있다. 특히 이 땅에서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는 일을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로 생각하고 종말론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자칫 이러한 태도는 승리주의적 (triumphalistic) 삶의 태도와 동시에 현실 체제유지적(staus-quo) 보수주의 성향을 조장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점도 이 입장이 되돌아보아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급진적 좌파 복음주의 입장은 정사와 권세론에 입각하여 이 세상의 제도와 질서를 통한 사회 변혁에는 별 소망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가 가져온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가진 대안적 공동체의 확산과 그 증거를 통해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이들의 방식은 분명히 급진적이고 독특한 기독교적인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사회 변혁 모델과 전략이 과연 얼마나 그들이 예상하고 바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힘을 가진 정부와 기득권자들이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삶의 모습에 의해 감화를 받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포기하고 기독교인의 공동체의 가치와 질서에 영향을 받고 변화된 삶을 살려고 할 것인가? 역사의 교훈은 오히려 이 질문에 부정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 세상의 정부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가치와 질서에 역행하는 구조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는 방법에 호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말 것인가? 이러한 점은 이 세상의 구조와 정치는 부패한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넗히기 위한 궁극적 채널이 아니라는 신학을 갖고 있는 이 입장이 지니는 구조적인 어려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이 그룹은 현실 정치와 정치 권력, 정당인의 역할 등에 대해 생산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또 않는다는 인식을 주게 된다는 비판은 한번 새겨볼 만하다.

 

B. 두 그룹의 상호존중과 열린 대화

 

지난 30여 년 동안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은 정의, 평화, 자유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신앙고백과 신학전통에 따라 다양한 사회변혁모델들을 제시하여 왔다. 그 중에서 위의 두 모델은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신학적인 토대가 확고한 대표적인 모델로 간주되어 왔다. 비록 개혁주의 그룹의 진보적 사회 윤리 모델이 급진적 좌파 모델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모델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러나 그 사실로 인해 이 모델이 복음주의 교회의 절대적 혹은 주도적인 모델아리 말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한 유형의 모델이 독점적으로 진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나름대로의 진리의 편린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이 세상 각 나라와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의 그 원래 형상의 반영 결과이고 그렇기에 그것들을 모두 참고하면 하나님 형상을 더 온전히 풍성히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양 그룹은 각자의 모델에서 서로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신학적인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전통과 모델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의식을 갖고 상호 조언과 비판을 통해서 보다 온전한 사회변혁 모델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을 함께 기울어 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두 그룹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고양하고 세워나가야 할 동반자로서 교회 역사적으로 서로 비판하고 정죄했던 옛 역사를 넘어서 서로의 입장에 귀 기울이고 상대방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겸손한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각 모델이 지닌 신학적 시각의 차이를 분석하고, 나아가 그 차이가 바른 성경해석과 신학에서 나온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문제점에 대한 바른 인식의 바탕 위에서 나아가 보다 온전한 모델을 향해 함께 연구해 보아야 할 신학적 접촉점을 모색하기 위해 신학적 대화를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마지막으로 두 모델 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 삼위일체적인 접근법을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C. 두 모델의 건설적 대화를 향한 신학적 과제: 삼위 일체적 접근법

 

1. 그리스도와 창조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

 

카이퍼와 개혁파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부패한 창조 세계의 회복으로 이해하고 부패로 인해 발생한 세계질서를 뒤덮고 있던 먼지들을 쓸어버리고 창조의 본래의 광채를 회복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적 그룹은 이 입장을 따라 왔다. 그러나 최근 여기에 대해 이 그룹 내부에서부터 조심스런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마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또 그리스도인이 사회 윤리적인 삶에 의미있는 모형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카이퍼의 주장은 지나친 창조중심적 이해라는 견해를 표한 바 있다. 그리고 존 볼트도 카이퍼와 그의 전통에 속한 그룹의 이러한 입장이 자뭇 승리주의(triumphalism)적 신학으로 흐르게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지상 사역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극소화하는 문제는 낳는다는 다는 것이다. 예수가 산상에서 가르치신 산상보훈의 내용, 열심당원들이 무력사용 방법을 거부하신 주님의 행동과 선택,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사회 윤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어떤 지침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마우는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는 인간의 약해진 인식능력으로 인해 쉽게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마우는 비록 개혁주의 윤리학과 인식론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제시와 설명을 전개하지는 않지만 이런 주장을 통해 보다 온전한 대안의 가능성을 위해 성경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게 하는 중재적인 입장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는 예수의 정치학과 오늘의 사회윤리의 상관관계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이 이전보다 열린 태도로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창조 중심주의적인 입장은 본래의 창조세계와 창조질서로부터 신학적 지침을 직접 유추하거나 연역적으로 끌어오기에 다소 사변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비신학적 또는 철학적인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과연 창조의 먼지를 떨어낸 것일까? 그리스도의 구속이 자연법적 인식과 창조질서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행해나가는 것에 대한 재인준 내지 재확인 사건인가?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이해하고 제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것에 대해 전향적인 연구가 앞으로의 주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중심주의적인 입장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편향적으로 이해하고 제한하는 유사한 문제를 보인다. 그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신자를 위한 사회 윤리의 모델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의 사건으로 해석하고 강조하는 문제가 있다. 예수의 지상 사역과 구속의 의미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규범으로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below)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폭력을 거부하고 혁명적인 복종의 윤리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은 인간관계의 새로운 패턴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의 회복과 구속의 사건으로 성경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기독론의 핵심은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머리”(1:22)이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1:23; 4:10)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만물을 회복케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당신의 죽음으로 죄로 왜곡되었고 정사와 권세에 의해 지배를 받은 우주 만물을 회복하시고 악한 영들을 제압하시고 우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일 즉 통합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중요한 메시지이다.

이런 점에서 급진적 좌파의 기독론의 시각은 편향적인 문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역을 우주 만물의 회복과 통합 역사의 시작 사역은 애써 간과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새 윤리와 새 질서를 제시해 주신 인간 메시야와 그 사역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쳐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승귀해서 지금도 충만케 하는 일 즉 만물의 통합 역사를 계속해 나가신다. 그런데 이 회복과 통합의 사역을 승귀하신 주로부터 말미암은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계속하고 있다. 이 점에서 과거의 예수 중심주의적 기독론은 과거에만 머물지 말고 오늘의 성령론적 기독론으로 발전되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2.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연구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성령 사역인 가장 근본적인 성격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의 구속 사역의 열매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완성시켜 나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십자가 사건으로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가 이루어졌고, 세상은 비로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승리와 변화의 사건을 역사 속에서 주관적으로 성취시켜 나가면서 오늘도 개인의 갱신과 성화뿐만 아니라 우주의 변혁과 갱신에 계속적으로 관여한다. 즉 그리스도가 이루신 회복과 통합의 역사를 온 창조세계에 전달하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승리와 새창조가 인간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세상 속에서 실제적인 효력이 있게 한다. 성령은 예수께서 구속하신 이 세상의 현실을 효과 있게 만드시고 그 가운데 있는 도덕질서에 대해 교회와 신자가 바로 분별하고 자유롭게 그것에 참여하도록 도우신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은 세상 속에서 성도 공동체를 조명하셔서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판단을 하도록 도우신다. 이런 사역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명확한 성경적 가르침이 없는 도덕적인 난제들을 만날 때,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현 상황에서 분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14:26; 6:13).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완전히 이루어질 종말 때까지 계속 되어간다.

창조세계와 관련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은 위의 두 접근법을 이을 수 있는 방법으로 최근 학자들은 연구하고 있다. 몰트만은 창조중심적인 신학과 구원중심적인 신학 사이의 존재하는 갈등을 우주론적 지평으로 확대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성령을 성자의 구원사역, 곧 전체로서의 창조세계의 해방과 구원 뿐 아니라, 성부의 본래의 창조세계에 관여하시는 영으로 이해하면서, 성부의 창조의 사역과 성자의 구원의 사역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성령의 현재적인 사역을 전 창조세계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그 사역의 지평을 넓힌다. 존 볼트도 이와 관련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의 완전한 교제 가운데 세계를 거룩하게 하시고 동시에 인간의 내적 성화를 완성하실 뿐 아니라, 전 창조세계를 거룩하게 해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의 교제의 최종적인 완성을 이루심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성령께서는 지금도 세계 속의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연구는 주제의 중요성에 비춰 볼 때 아직도 그 연구가 미미한 형편이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관련한 것이라든지 교회와 신자의 삶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든지 이것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성령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재 사역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어떤 규칙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중심주의의 예수의 정치나 창조중심주의의 창조의 질서 자연 법과 같은 법이나 규범으로 기독교인의 삶을 다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시면서 오늘도 신자 개인과 신자공동체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깊이 조명하면, 두 신학적 사회 윤리학이 지니는 한계와 문제점을 어느 정도 보완하거나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계는 이제 쉽지 않으나 가치 있는 이 과제에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