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제자도와 대안적 성경읽기 -최경환
사회적제자도와 대안적 성경읽기 -최경환
2014-06-30 15:30:19
사회적제자도와 대안적 성경읽기
2009/05/21 대구 사제학 강의
최경환(현기아 연구원)
1. 손과 발로 성경 읽기
성경은 성경기자들이 경험하고 만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며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현재 글로 쓰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졌지만 그 이전에는 사건과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선이해로 인해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성경의 본래의 의미를 찾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행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배운 기독교교리에 의해 성경말씀이 왜곡되거나 오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와 신학은 체험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체험이 있고 난 이후 성경이 쓰여 졌고, 또 그 후에야 교리와 신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와 신학을 절대시하거나 하나의 고정된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무서운 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너무나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어떤 충격적인 말씀을 읽더라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강팍해져 왠만해선 충격을 받지도 않고 신앙의 모험을 떠나고자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경을 접할 때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어찌할꼬~”하면서 탄식하고 충격에 휩싸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기존의 우리의 삶을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믿음이 있으면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 이후 구원 받은 성도로서 착한 행실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먼저 착한 행실을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면 믿음과 행함의 구도가 역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고유한 유산인 이신칭의는 로마서 1장 17절인데 이는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것으로 사실 그 의미는 구원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본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칭의는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본래의 의미를 한 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때로는 충격적이고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버리는 무서운 말씀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충격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신앙의 도약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면서 저와 함께 모험을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2. 아는 것(Knowing)과 행하는 것(Doing)
2.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눅 24:13~35) : 우리는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원리가 있어야 응용이 있고, 믿음이 있어야 실천이 있다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이 행동하면 할수록, 우리의 행동의 의미에 관해 더욱 깊이 성찰하게 되고 기존의 지식을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것은 행동이며, 참여입니다.
출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나그네의 동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거든, 이전에 일어난 일을 알아야 한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 → 전환점: 나그네를 저녁 식사에 초대,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대신 구원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들이 빵을 나눌 때, 즉 말에서 행동으로 이행할 때 비로소 진리를 깨닫게 된다. → 예수의 사라짐: 진리는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행동은 계속 되어야 한다. → Return: 행동은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시 새로운 행동으로 연결된다. 그들은 살벌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순교자가 된다.
이야기의 끝에서 그들은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지만,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목숨을 구하려 문을 잠그고 숨어 지냈지만, 이제 그들은 매일처럼 목숨을 걸고, 로마제국 전역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려고 막 출발하려 합니다.
2.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렘 22:13~17)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흐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
결국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의와 의를 행하는 것이고, 가난한 자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호야김은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헌금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아직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은 멀리하면서 하나님에게만 가까이 가려할 때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 20절을 읽어 보세요.
2.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보통 사회봉사와 우리 주변에 강도만난 자와 같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씀으로 설교되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 율법에 뭐라? → 하나님사랑(신명기),이웃사랑(레위기) →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구원 ; 율법교사의 생각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OK, 그런데 이웃사랑은 잘 모르겠다... 구원을 받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누가 내 이웃? →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여주심
이웃사랑? → 누가 내 이웃? → 예수님: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자비를 베푼자입니다 → 너도 그렇게 하라...
이 대화의 깊은 의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질문을 뒤집어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즉,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멀리하고 멸시했었습니다. 지금 시대로 생각해보면,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 사회적 소수자들, 동성애자들을 이웃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레위기 19장 13~14절)
가난해서 품팔이 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런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품삯은 해가 지기 전에 줘야 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실업인들 모임을 보면, 오히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더 악랄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랜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한 돈으로 면죄부를 주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기업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윤리는 바로 노동자들의 임금입니다. 제일 먼저 지급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임금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기업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가장 나중에 줍니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의 인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미뤄지면 바로 인격이 파탄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비애는 임금으로 그의 인격이 비난받게 됩니다.
3. 대안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
우리들의 신앙의 출발은 창세기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기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해방되면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았고 동시에 자신의 신앙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창조가 아닌 해방의 경험이 먼저 선행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경험에서 창조를 읽었습니다. 구속을 통해 창조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경험은 무엇이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셨을까요?
3.1. 하나님의 창조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을 때 당시 바벨론 신화의 창조이해는 폭력을 통해 구원계획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문화에서의 창조는 폭력의 행위에 의한 것이었고, 인간은 살해된 신의 피로 만들어진 존재였습니다. 이런 고대 역사적인 종교의 중심에는 전쟁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war), 힘을 통한 안보(security through strength)가 확신으로 도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처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뽀빠이는 왜 시금치를 일찍 먹지 않을까? 헐리우드에는 왜 온갖 기형아들이 판을 칠까?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헬보이, 네오콘과 부쉬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입니다. 성경은 폭력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하거나 힘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분 선한 하나님이 좋은 피조물들을 창조합니다. 선한 것이 악한 것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합니다. 따라서 악이나 폭력은 창조된 부분이 아니고,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악이란 이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 그것을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고 그 분의 선하심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3.2. 노아와 아브라함의 의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영혼의 구원이나 내적인 평안이 아니라 하나의 대안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6장에 보면 인간들의 타락이 묘사됩니다. 12절에 보면 ‘땅이 패괴하였고, 땅에 강포가 충만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죄가 아닌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죄가 팽배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은 단지 그의 의로움에 대한 구원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인 악과 삶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사건을 통해서도 그 시대의 포악한 죄 속에서 그를 구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창세기 18장 18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창 18:19)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는 의와 공도를 택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곧 사회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그가 사는 사회 속의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부르심은 개인적인 삶의 지침만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3.3. 하나님의 대안사회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로운 언약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출애굽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제국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대안적 삶을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삶의 질서와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따라 움직이며 서로를 존중해야 했습니다. 출애굽의 대상은 ‘히브리’ 즉, ‘합비루’라는 용어인데 이는 노예들과 그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을 가리키는 계층적 용어입니다. 이들을 불러내어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회를 향해 자유와 해방의 행진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리와 구별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제의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때에는 씨를 뿌리는 방식에서부터 음식을 먹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윤리적인 방식에 있어서도 다른 것을 요구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과 정황이 비슷한 사회적 밑바닥의 사람들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시간에 대한 성화이고 사회보장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쉼과 휴식을 법적으로 보호한 것입니다.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쉴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23장 10~13절)
하우워와스에 의하면 십계명은 모든 인간이 다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지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상숭배의 금지는 단지 종교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요구도 담겨 있습니다. 단지 이방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 백성들이 섬기고 있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방식을 닮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일상적으로 섬기고 있는 신은 모두 따로 있습니다. 명품 핸드백이나 부동산에 모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거기에 뛰어들 때 함께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금지는 항상 그 사회적 정신과 우상숭배에 담겨져 있는 삶의 질서까지 금지합니다. 여호와를 섬긴다는 의미는 단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죠. 가난한 자를 섬기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와 메추라기에는 하나님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먹을 것만 챙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이 만나의 결론입니다. 이 말은 서로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훈련을 하기 위해서 40년이 걸린 것입니다. 사실은 직선거리로 보름이면 가능한 거리지만 나눔의 훈련을 광야에서 한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심성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바로 40년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의 준비가 바로 하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나눔은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나눠주려면 내일도 하나님께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나눠 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래서 나눠 줄 수 없습니다. 노후의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눠 줄 수 없습니다. 예금 통장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기의 미래를 자기 손으로 쥐려고 하기 때문에 악인입니다. 보이는 대로 쌓아 놓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내일은 하나님께서 또 주신다는 사실을 무식하게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또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믿음의 훈련의 장입니다.
결국 성서를 만들어낸 사건은 출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최초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억압받는 고난과 정의를 향한 해방의 의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고통의 기억과 이러한 고통에서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은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구전되고, 기억되고, 독특하게 참여하는 이야기 덕분에 이 공동체는 약자들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공의와 긍휼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3.4. 예언자들의 정의 :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우상숭배로부터 돌아설 것과 정의를 실현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아는 것은 곧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천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된 우상으로부터의 결별이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시대를 향한 예언자들의 호된 비판은 모두 오경의 법에 근거한 비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약자와 과부와 고아를 함부로 대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정의를 외친 것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호세 미란다가 쓴 <마르크스와 성서>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절판되어 아쉽지만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이 책에 보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의 중언법적 표현을 연구하면서 성서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매우 중요시했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의 성서해석의 맹점은 성서의 사회적 맥락을 모두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설명할 때에도 단지 그의 믿음만을 이야기하지 사회적 정의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를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칭의’를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칭의’는 righteousness라는 의미와 social justice라는 의미가 동시에 있습니다. 그동안 개신교에서는 칭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것에만 강조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전통에 의하면 이는 ‘의화’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디카이오쉬네’는 사실 사회적 행위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죄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행한 모든 죄를 다 거론합니다. 의는 바로 여기에 맞서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의’의 개념은 구약에서 바로 ‘정의’입니다. 일용노동자의 품삯을 그날 지급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모두 성경이 말하는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와 사회적 의를 통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칭의론이 가지고 있는 균열을 우리는 치유해야 합니다.
4. 함께 아파하는 예수님의 사랑(compassion)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바로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은 예언자적 동정심이었습니다. 그저 마음 아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통의 사회적, 신학적 원인을 꿰뚫어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에서 우러나온 동정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함을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 치료하셨습니다.
4.1. 예수님의 동정심(누가복음 4장 18~19절) :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개막설교는 예수님의 선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성경의 가장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면서 생태적인 ‘희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선교의 출발점입니다. 트로크메라는 학자는 여기서 예수의 희년은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자발적인 희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물질을 나누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단지 한 개인의 영혼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였고, 이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질서를 상대화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병든 자에 대한 치유는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선교는 당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이는 상당히 대항적인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가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예수는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대항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선포 역시 예수의 사역과 비슷합니다. 세례요한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상당히 사회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불의하고 정의롭지 못한 모든 이웃관계와 사회관계를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의 구원사를 미리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 역시 배고픈 자들을 채워주는 사회적 성격이 강합니다. 이는 상대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강렬한 연민이면서 동고(with suffering)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데 이는 선교의 대상이 누구이고 선교의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선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성의 측면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헤세드)는 나중에 정의(쩨데카)로 바뀌게 됩니다. 이 두 본성이 모두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의 선교는 단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만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킨 것입니다. 예수의 선교는 말로써 선포하면서 동시에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 사회변혁을 위한 예수님의 꿈 : 마가복음 3장 1~6절에 보면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나옵니다. 보통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면 무엇이 관심이 되어야겠습니까? 보통 사람의 관심이라면 예수님께서 “손을 펼 수 있는가 없는가?” 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손을 고치는지 주목했다고 나옵니다. 그들의 관심을 아시고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불러냅니다. 그리고 자칭 율법의 전문가들에게 초등학생도 알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마가복음 3장 4절)
예수님의 질문은 사실 청중을 무시하는 질문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쉬운 질문에 아무도 답변을 할 수 없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질병은 사실 목숨이 오가는 심각한 질병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보내서 내일 와서 치료받으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란 듯이 병자의 손을 고쳐 주었습니다. 사실 그 치유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손을 펴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행위로 안식일이 정말로 무엇을 위한 날인지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라기보다는 악법인줄 알면서도 이에 주눅이 들어 꼼짝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된 병자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는 그에게 자기 침상을 들고 걸아가라고 명령했고, 공교롭게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병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안식일의 규율을 깨뜨리도록 하셨는데, 이는 ‘연못에 먼저 온 자가 치료 받는 것이 아닌 힘 있는 자가 치료 받는’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해 도전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이 행하고 있는 치료와 사역은 사회로부터 즉각적인 반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활동들이 진정한 문제의 핵심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유하신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질문,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그 부모오니이까?” → 질문의 의도, “선생님, 바라건대 우리가 이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하였던 사실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좋은 핑계거리를 하나 만들어 주시기 않으시겠습니까?” 실제로 그가 거지가 된 이유는 그가 장님이었기 때문이거나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자녀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스라엘 사회가 그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거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회제도에 대해 불복종하심으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만들어 소경의 눈에 발라 실로암까지 걸어가 씻게 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이는 직접 안식일의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사실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 굳이 이런 복잡한 방법을 택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행동이 율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예수도 모를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 당국에 대한 공공연한 항의요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목적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유대 당국의 눈 먼 것을 폭로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꾸짖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비는 단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눈 먼 사회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진정한 동정심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상황을 개혁해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회가 단 한 명의 장님 거지라도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진리에 대해 눈 먼 사회입니다.
4.3.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hesed)과 열정(phatos) : 성서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과 예수님의 동정심이 가득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언약적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phatos)는 우리의 절망적 위기를 보고 안타까워하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 하시며 출구 없는 상황 속에 개입하십니다. 창조주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에는 열정이 있습니다. 또한 창조주와 창조 세계의 관계는 ‘언약’으로 묶여 있습니다. 성서의 언약은 철저히 쌍방적으로 인간의 주권을 이양시키는 근대적 계약관계와 다르게 영원성과 지속성을 제공하는 사랑의 언약(hesed)입니다. 무지개를 통해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 분 스스로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심으로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심으로 또한 우리들에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5. 철저한 제자도와 대안공동체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전혀 다른 방법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당황하게 하는 이질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비전은 개인적인 회심이 아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운명의 선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계는 필연적으로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위험한 사회적 위치 이동”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러티브 세계에서는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포기함 없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운명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사회적 경험에 대한 강력한 선례와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는 공동체 내의 독자들은 예수의 언행을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격려 받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예수의 사명을 수행하며 그분이 세상에서 겪었던 것과 동일한 세상의 거절에 맞서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예수의 운명에 맞추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 제자들은 ‘세상에 속한’자들이었고 또 계속해서 ‘세상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선택받은 자들로 존재합니다.
초대교회는 분명 주위에 놀라움과 당혹스럼움을 경험하게 해주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왜 당신들은 꼭 그런 방식으로 사는가? 왜 당신들은 자기의 소유를 서로 나누는가? 왜 당신들은 가이사에게 절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게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물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우리의 교회를 향해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아예 교회에 그런 희망을 저버린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양식은 이제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질투감을 갖게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면서도 이 보다 더 슬픈 말은 없습니다. 예수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분화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교회를 보더라도 예수를 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더라도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저는 복음의 급진적인 사회적 파급 효과를 상실한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리스가 지적한대로, 복음전도의 효과중 하나는 사회적 일탈을 파급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우선순위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가정들과 구조들과 불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 왕국에 대한 신실한 선포가 새로운 경제 구조를 창출하고 정치적 반역으로 위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고자 할 때, 항상 교회는 주류문화 안에서 자의식적으로 주변이 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복음을 삶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게 될 때 교회는 세상의 가치 위에, 그리고 그것을 능가하여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교회가 언제나 추구해야 할 것은 비연속성과 갈등 안에서 살았던 삶의 은혜스러움입니다. 항상 그리스도와 동일화가 강렬해지면 질수록 세상과의 갈등은 깊어지고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이상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거나 기류를 따르는 순응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교회의 독특한 맛과 향을 발휘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보여주었던 급진적인 제자도의 삶을 예수가 요구하고 있으며,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우리보다 더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입니다. 세상의 문화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자신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세상 속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 배우는 교회의 모습이고, 교회가 사회에 대해 취해야할 입장입니다.
<추천도서>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
쉐인 클레어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규장 *
질 월리스, [회심], IVP *
U. 두흐로/G. 리드케, [샬롬], 한국신학연구소 **
로버트 M. 브라운, [뜻밖의 소식], 한국신학연구소 *
김경호, [야훼 신앙의 맥], [새 역사를 위한 순례],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 평화나무 *
존 디어, [예수의 평화 영성], 한국기독교연구소 *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국기독교연구소 ***
리처드 헤이스,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 **
U. 두흐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한울 ***
스탠리 하우어워스,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십계명], 복있는 사람 *
호세 미란다, [마르크스와 성서], 일월서각 ***
존 하워드 요더, [예수의 정치학], IVP ***
<성경연구 workshop>
겨자씨와 제국주의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 아래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1-32)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말해주십시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그것은> 모든 씨들보다 더 작다. 그러나 그것이 경작지에 떨어지면, 그것은 큰 가지를 내고 하늘의 (그) 새들에게 안식처가 된다” (도마 20)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모든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들 위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들 위에 깃들였느니라” (눅 13:18-20)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놓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겔 17:22-24)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단 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