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가?
2014-05-31 00:40:40
성경의 최고의 계시, 가장 근본 계시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디면 그것은 역시 기독교의 가장 큰 계시, 근본계시일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처음으로 시작되는 계시이다. 성경은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최고, 최대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계시는 바로 이 계시에서 훌러나온 것이고, 이 계시에서 츨발하기 때문이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인간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누구인지, 이 세계는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고 증거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인간을 지으신 분이요, 세계를 지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인간속에는 본능적으로 조물주에 대한 생각이 있고 만물을 보고 조물주가 계실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본능적 관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이 계시는 결코 단순한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성경은 간단히 창조주시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그 대답 앞에 서 있는 모든 존재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듣는 자에게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라는 요구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이 계시에서 당연히 따라 나오는 계시는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의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떠나버리신 분이 아니라 만물 위에서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당연히 이어져야 할 계시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것이다. 곧 창조목적이다,. 천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무 목적없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분명한 창조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으며 만드신 세계를 다스리심으로 그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니까 통치주도 되신다는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이신 것이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위대한 계시에 이어지는 성경의 모든 계시는 바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가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의 빛 아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최고의 계시의 빛 아래서 성경의 모든 계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 이후에 나타난 성경의 모든 사건들 ,역사들에는 바로 창조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루어가시는가? 그리고 어떻게 궁극적으로 이루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성경의 메시지의 모든 것이다. 이런 관점을 떠나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이고 파편적이 되며 결국 성경 계시를 왜곡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죽음, 부활 ,승천, 다시오심 ,교회를 세우심, 복음이 전파됨,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칭조목적의 성취라는 사싱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까 개인의 죄가 사함을 받고 심판을 면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도 아니고 성령이 오신 이유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의 방편이고 과정일 뿐이다.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목표없이 출애굽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듯이 죄사함과 구원 자체가 창조목적을 떠나사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성경을 대단히 오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분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구원은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 죽음, 부활, 재림, 성령의 오심,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행동이신 것이다. 따라서 종말이란 단순히 역사의 마지막이거나 파국이 아니라, 창조목적이 드디어 성취되는 순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종말은 창조목적이 완성되는 그 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지으셨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문화적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자기 형상을 따라서 지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이 문화명령을 감당할 자로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만물을 통치해야 하므로 인간을 자기 형상적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만물을 다스리시면 되지 왜 인간으로 하여금 대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는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알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질문한 이유가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고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대답이 필요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권한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지 피조물인 인간이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에세 왜 나를 낳았느냐고 묻는 것 보다도 더 어리석은 질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직접 만물을 다스리시려 했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 대신 만물을 다스리는 엄청난 권세를 주신 것에는 한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이 제멋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은 당연한 조건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통치권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은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선약과 금령이다. 하나님은 선약과 금령으로 인간의 지유를 억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다.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통치권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다시 요약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게 하시려고 천지를 지으셨고 인간을 지으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목적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 창조목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고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 목적을 이루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고,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고, 이 목적을 이루시려고 성령을 보내신 것이며, 때가 이르면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란 단순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대신 다스리는 나라인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나라이며 창조목적이다. 인간의 존재 이유, 역사의 존재 이유, 교회의 존재 이유가 모두 다 여기에 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창조 목적을 떠나서는 인간도, 역사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창조의 목적이라는 맥락에서 죄를 이해하여야 한다. 죄란 단순히 불순종이거나 도덕적 악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것이다. 선약과 금령을 범함으로 죄가 역사 가운데 들어온 것은 죄의 이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약과 금령을 거스린 것은 단순히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거스린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사망이 예고된 것은 사망이 단지 불순종에 따른 형벌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인간은 존재 이유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는 엄중한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죄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에게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죄의 출현을 창조시에 하나님이 미처 예상치 못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은 창조시에 미처 예상치 못한 죄의 출현으로 발생한 문제를 뒷처리하시느라고 전전긍긍하시는 분이신가? 우리는 이런 어줍잖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처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칭조행위는 우리의 논리나 생각으로 재단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이 죄의 출현을 미리 알고 계셨으며 깊은 뜻을 가지고 막지 않으셨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죄가 출현하여 창조목적을 거스렸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죄가 없었던 것 보다 더욱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충만하게 아름답게 이루신다. 그러므로 이 일에 우리는 마땅히 바울을 따라 다음과 같이 고백하여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 로마서 11:33-36)
하나님의 창조란 무엇인가?
2015-03-21 14:51:18
창세기 1-11장은 역사적 시기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원역사(primitive history)라고 부른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의 주도권을 지니고 그 뜻을 이루어가시는지,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시작된 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본문의 주된 관심은 인류의 기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 사건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인류의 기원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기원, 하나님의 약속 백성의 시작에 대해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원역사에 나타나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오경 전체의 서문적 선언으로 보인다. 칠일 구조 속에 천지 창조가 그려지고 있으며 제 칠일은 안식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안식일 규례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비로소 등장한다는 점에서 창조기사는 오경 전체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이 이르시되)-> 존재들의 형상(그대로 되니라)-> 평가(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시간적인 틀(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날이니라) 이라는 문학적 패턴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이 말씀의 권능으로 창조하셨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런 패턴의 반복이 의미하는 것은 이 본문의 의도가 창조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이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본문은 지극히 신학적인 의도로 쓰인 글로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1그리고 그렇게 조성된 만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을 선언하려는 것이다.2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그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학적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 본문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진술을 하고 있으며 그 신앙적 진술도 고대의 세계관에 따라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을 창조 과정에 대한 사실적 진술로 간주하고 본문을 과학적 증거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창조과학이다. 이것은 구약의 신학적 성격과 문학적 양식을 고려하지 않고 구약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기 때문이다.3 구약 본문은 해석되어야 한다. 과학과 신앙은 양립 불가능하지 않고 과학의 타당성 여부에 신앙의 존립이 달려있지 않다. 진화론을 바롯한 과학은 "어떻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창조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경은 "누가 " 그리고 "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범주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4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의 탐구는 창조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를 빛나게 하고 깊이 음미하게 한다. 어떤 사건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그 해석에 기반한 신앙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진화론이나 우주론이란 과학이 아니라 그런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잘못된해석이다. 예를 들면 진화론을 근거로 사화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경쟁과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세상의 질서로 당연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진화론 자체가 아니라 진화론에 근거한 잘못된 해석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우주나 세상의 기원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그렇다면 창조 신앙의 힘은 무엇일까? 구약 도처에서 창조신앙은 현실의 극심한 환난과 박해는 견디고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보여준다.5특별히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창조신앙은 자신들의 모든 환난속에서 참된 생명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케 하였을 것이다.6 그러므로 창조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단지 교리나 조직신학적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며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힘이다.
성경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의 통치자들은 자기 통치 구역 곳곳에 자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세워 자신의 통치권을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사람이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왕이신 하나님의 중재 역할을 감당하도록 사람이 임명되어 보내졌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가리키는 의미일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온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을 보아도 사람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7이를 일러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이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hood) 곧 왕이면서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의 존재와 결부시키고 있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진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혼자가 아닌 남녀가 함께 존재하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남자와 여자의 창조가 사람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나타난 구절 사이에 있다는 점은 그런 사명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협력하여 감당해야 할 일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람 관계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며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갈 사명을 받았다. 그렇다면 사람의 창조에서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셨다는 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갈 관계를 만드셨다는 말일 것이다.8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존재하시는 방식을 본받고 따르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관계 안에 거하시며 왕으로서 세상을 지으시고 질서를 잡으시고 보시기에 좋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함께 왕으로 일하는 존재이어야 할 것이다.9
고대 사람들이 신성시하고 숭배했던 일월성신 등 엄청난 존재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며, 사람에게 다스리도록 맡기셨다고 말하는 구약의 창조기사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철저하게 비신화화 하며 사람들이 피조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움을 상대화하게 만든다. 그 어떤 삶의 고난이나 억압 그리고 박해일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고백 앞에서 상대화되어 버린다. 고대 신화들에 공통된 것은 사람이 신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인데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대 중동의 창조이야기는 신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로 사람을 설정함으로써, 신의 대행자로서의 인간 왕 그리고 그 왕을 위해 일하는 하층민이라는 수직적 위계 질서를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성경은 왕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중동지방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며 새로운 가치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중동 신화에서 노동은 가능한 피해야 하며 하층민들의 일이지만 구약에서 노동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기본적인 사명이었다. 노동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것이며 사람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참여한다. 10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땅에 거하면서 그 땅의 청지기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사람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참여자임을 보여준다. 피조물을 숭배하고 피조물에 굴복하는 세상, 사람의 존귀함과 영광을 억압하고 훼손하는 세상에서 창세기는 사람이 얼마나 존귀하며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그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주 1
일월성신을 신으로 숭배하던 고대세계에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성경의 선언은 고대의 신화들을 비신화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2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고 비어있던 것들을 채우며 어둠을 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부여된 질서와 채워진 충만함이 그리고 어둠이 사라진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
각주 3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자들과 무신론자의 주장의 공통점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는 것과 과학적 사실로 성경을 판단하려는 태도이다.
각주 4
예를 들면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생명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각주 5
구약 외경인 제2마카베오서에는 창조신앙에 대한 고백이 박해와 순교의 장면에서 등장한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이 핍박과 박해에 직면한 하나님의 백성에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힘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시편74편에서도 끔찍한 박해의 상황속에서 시인이 의지하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온세상을 지으셨음을 고백하는 창조신앙이다.
각주 6
구약의 도처에는 창조신앙이 나타나는데 특히 욥기나 아사야 40장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고백이 강조된다. 이스라엘에게 창조신앙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 니시고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가 바로 천지의 창조주이시라는 고백일 것이며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각주 7
고대 근동의 왕과는 달리 구약에 등장하는 왕은 모든 사람의 기준 혹은 모범으로서 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점에서 다윗은 가장 훌륭한 왕이면서 신실한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 왕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8
최초의 인간 관계인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부부관계로 설정하고 하나님이 가정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창세기 문맥을 거스리는 해석이다. 최초의 인간관게는 부부가 아니라 하나님 통치르 대행하는 일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공동체적 존재라고 보아야 하고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이진 것과 직접 연관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각주 9
이런 점에서 경제적인 관계속에서 사람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는 사람이 왕적 공동체적 존재인 것을 부인하는 악한 제도로 보인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한, 자본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각주 10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의 세상 통치는 노동을 통해 현실화되고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기지만 성경은노동은 인간의 기본 사명이며 존엄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 곧 개발과 보존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사명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믿는다는 것은 노동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다. 관계를 지으신 하나님은 ..
- 일월성신을 신으로 숭배하던 고대세계에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성경의 선언은 고대의 신화들을 비신화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고 비어있던 것들을 채우며 어둠을 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부여된 질서와 채워진 충만함이 그리고 어둠이 사라진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 [본문으로]
-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자들과 무신론자의 주장의 공통점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는 것과 과학적 사실로 성경을 판단하려는 태도이다. [본문으로]
- 예를 들면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생명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 구약 외경인 제2마카베오서에는 창조신앙에 대한 고백이 박해와 순교의 장면에서 등장한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이 핍박과 박해에 직면한 하나님의 백성에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힘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시편74편에서도 끔찍한 박해의 상황속에서 시인이 의지하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온세상을 지으셨음을 고백하는 창조신앙이다. [본문으로]
- 구약의 도처에는 창조신앙이 나타나는데 특히 욥기나 아사야 40장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고백이 강조된다. 이스라엘에게 창조신앙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 니시고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가 바로 천지의 창조주이시라는 고백일 것이며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본문으로]
- 고대 근동의 왕과는 달리 구약에 등장하는 왕은 모든 사람의 기준 혹은 모범으로서 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점에서 다윗은 가장 훌륭한 왕이면서 신실한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 왕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최초의 인간 관계인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부부관계로 설정하고 하나님이 가정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창세기 문맥을 거스리는 해석이다. 최초의 인간관게는 부부가 아니라 하나님 통치르 대행하는 일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공동체적 존재라고 보아야 하고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이진 것과 직접 연관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본문으로]
- 이런 점에서 경제적인 관계속에서 사람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는 사람이 왕적 공동체적 존재인 것을 부인하는 악한 제도로 보인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한, 자본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본문으로]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의 세상 통치는 노동을 통해 현실화되고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기지만 성경은노동은 인간의 기본 사명이며 존엄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 곧 개발과 보존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사명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믿는다는 것은 노동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다. 관계를 지으신 하나님은 노동을 통해 왕으로서 인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본문으로]
하나님의 인간창조 이야기
2015-04-26 17:44:09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세 번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이야기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다.
첫번째 이야기 창세기 1장 26-29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 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점을 보아도 분명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과 남자와 여자라는 말이 상응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가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인데 사람은 남자와 여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남자로만 존재하거나 혹은 여자로만 존재하지 않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는 이유는 그저 음양의 원리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통치가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 창세기 2장 7-19
두번째 이야기는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여기에 사람의 보잘것 없음과 사람의 특별함이 동시에 나타난다. 사람이 한갓 흙의 먼지로 저어졌다는 것은 사람이란 존재의 보잘것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그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 존재의 고귀함을 보여준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숨결이 존재하며 바로 하나님의 이 숨결로 인하여 사람은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된 것이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숨결이 존재한다는 바로 이 점이 사람이 다른 존재와 전적으로 구별되는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 두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이라는 특별한 장소를 만드시고 거기에 서 살게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일은 에덴에서 시작하였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통치가 에덴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으로 퍼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에덴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가 나게하셨는데 그 나무들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나무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먹을 거리로 주신 것이고 그러므로 그 나무들은 모두 셍명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무중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금지되었다.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거리로 주신 것이지만 유독 그 나무만은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인간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함으로 대리통치의 일을 하여야 함을 가리치는 것이었다.
세번째 이야기 창세기 2장 20-25
세번째 이야기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어진 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을 돕는 배필을 지으실 것을 작정하신다. 그런데 돕는 배필을 짓는 이야기 중간에 아담이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의 이름을 짓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담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아담이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다스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아담을 돕는 일이란 바로 아담과 함께 다스리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돕는 배필이란 바로 아담과 함께 하나님의 대리통치 행위에 참여하는 동역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볼때 여자란 바로 남자를 도와 남자와 함께 다스리는 일을 하는 동역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자를 짓는 방식은 남자를 짓는 방식과 전혀 달랐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따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남자를 짓고 남자로 부터 여자를 지으신 것이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은 남자따로 그리고 여자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함께 통치하는 동역자로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두 사람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남자와 여자는 창조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지어진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통치의 일을 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