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이신칭의와 하나님나라.

메르시어 2023. 5. 4. 21:38

이신칭의와 하나님나라.

2014-04-16 23:10:45


 

1. 이신칭의란 무엇인가?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의 핵심교리이다.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신칭의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내용인 "믿음" , 그리고 "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이란 무엇이며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의"의 개념인데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의" 이다. 의에 대한 두가지 신학적 설명이 있는데 하나는 의를 법정적 범주로 설명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를 관계적 범주로 설명하는 것이다. 법정적 범주란 전통적 해석으로서 의란 하나님의 법적 요구에 합치하는 것이고 그 반대가 불의함 곧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고 불의한 자를 형벌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정적 범주에서 칭의란  죄의 용서를 받아서 형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 관계적 범주란 새로운 해석으로서 의란 관계를 가진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그 반대가 불의함 혹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를 행하면 관계가 유지되지만 불의를 행하면 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적 범주에서 칭의란 죄의 용서를 받아서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의를 설명하는 이 두가지 범주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먼저 법정적 범주에서 의를 판정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법적 요구인데 이 법적 요구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간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과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적 요구는 바로 이런 관계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관계가 없었다면 사람에게 법적 요구가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법적 요구는 창조시 부터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법적 요구가 준수되어야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결국 법적 요구를 준수하는 것은 관계를 가진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되는 셈이므로 법정적 범주와 관계적 범주는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믿음"의 개념이다. 칭의를 얻는 수단은 믿음인데 무엇을 믿는 믿음인가 하면 바로 복음을 믿는 믿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믿어야 할 대상이나 내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복음이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의"의 개념에 의하면 하나님편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마련하신 방편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복음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언약적 의 "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표현하면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미신 "화해의 손"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복음은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편에서 행하신 언약적 행동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한 사람편에서의 언약적 응답이 바로 믿음인 셈이다. 그렇다면 복음이 "하나님의 의" 라면 믿음은 "사람의 의" 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목표는 관계회복인데 복음을 믿는 믿음이 바로 복음이 요구하는 관계회복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편에서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될 때 믿음 자체에 어떤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지 복음에 대한 정당한 반응일 뿐이지 믿음이 관계 회복에 직접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사람간에 이미 존재하는 언약 관계로 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율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법적 요구이며 그 요구는 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간의 언약관계 유지는 율법준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외에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 사람편에서 율법 준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관계 회복을 하는 길이 제시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의 의미인 것이다.

 

 

2. 하나님나라란 무엇인가?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인 하나님나라는 창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나라는 창조시에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시에 시작된 하나님나라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세계와 만물을 지으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만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은 다른 만물에는 없는 특별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언약적 피조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언약적 피조물로 지으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계와 만물을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창조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주어진 권세는 위임된 권세이다. 그러므로 그 권세는 사람의 뜻대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즉 사람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그 권세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준 계시가 바로 선악과 금령이다. 선악과 금령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할 존재이며 그렇지 않을 때 사람은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이 악임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는 이름은 보여준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목적이고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의어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이다. 창조목적이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창조경륜이며 이것이 이루어진 나락 하나님나라이다.

 

  그런데 사람은 선약과 금령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 관계는 사람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의무를 어김으로써 깨어지게 되었다. 관계 깨어짐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부른다. 사람의 범죄이후에 이미 경고한대로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러니까 사람의 죽음은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 즉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불의함으로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이다.

 

 

3. 이신칭의와 하나님나라의 관계

   그렇다면 창조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간의 깨어진 관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사람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순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 회복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회복은 사람 편에는 이루어질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있으며 죄의 종이되어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편에서 관계 회복의 길을 마련하신 것이 바로 복음이다.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 길을 여셨기 때문에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은 어둠에 빛이 비추인 것이고 사망에  앉은 자에게 생명이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고 복음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이신칭의란 곧 사람이 믿음으로 복음에 반응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는 하나님나라의 선결조건인 것이다.  이신칭의가 없이는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창조목적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신칭의가 곧 하나님나라는 아닌 것이며 또 자동적으로 하나님나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출발일 뿐이며 하나님나라의 기초일 뿐이며 또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수단일 뿐이다.

 

  이신 칭의는 하나님과 언약관계가 회복된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제 보다 중요한 것은 회복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 나라를 이루는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시에 주어진 원리와 동일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따라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고 이것이 바로 언약적 삶인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이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창조시로 부터 만고불변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를 이루기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없는 이신칭의는 무의미한 것이고  성경은 그런 이신칭의를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