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하나님나라 복음- 김세윤
신약의 하나님나라 복음- 김세윤
2014-04-06 23:14:28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
한국교회가 부패한 가장 크고 근본적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파편적이고 임의적으로 이해한 것이고 특별히 사도 바울이 가르친 칭의의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시킨 것이며 또한 하나님나라를 우리의 현재 실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단을 꺾으시고 성령과 교회를 통해 사단의 세력을 극복해 가시며 종말에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꺾으시고 온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묵시적 틀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구원론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바울은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의인으로 사는가 그리고 결국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는가" 라는 구도를 사용하되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가능해졌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을 전통신학에서는 칭의, 성화, 영화라는 구원의 서정상 서로 분리되는 단계들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것들의 통합성을 강조해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구원의 전 과정을 “의인되기”, “의인으로 살기”, “의인됨의 완성을 받기”로 표현하여 과정의 통합성을 존중하고 또 그것들을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각각 “하나님나라 백성되기”,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기”, “하나님나라 구원의 완성을 받기”로 이해할 수 있다.
(요약자주 :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창조목적을 향해 역사 가운데 나아가는 모습을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에볼 수가 있다. 하나님나라는 창조로 부터 시작하여 창조의 목적인 완성되는 종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 구약의 3대 절기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이런 관점을 지지한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런 관점을 하나님나라 백성의 관점에서는 하나님나라 백성됨-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삶)- 하나님나라 백성됨의 완성이라는 구조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왜곡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바울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전제를 가지고 구원론적 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한 것인데 바울이 가진 전제를 알지 못한채 바울을 읽으므로 개인 구원, 혹은 구원을 위한 구원의 관점으로 오독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구약적 맥락에서 일거야 하고 그것은 구약의 중심 사상인 하나님나라와 언약 사상을 가지고 읽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도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복음서도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바울 서신도 하나님나라를 말한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향하여 역사가운데 그 항해를 계속한다.)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 복음의 새로운 표현이다. 구약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해 통치하시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온 세상에 샬롬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숙어자체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구약의 중심사상을 하나님나라는 하나의 고정된 숙어로 활발하게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유대교의 “오는 세대”의 개념과 내용적으로 상응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를 이해하려면 구약과 유대교의 네 가지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창조사상, 타락사상, 언약사상, 그리고 종말사상이다. 창조사상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데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타락사상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여 사탄에게 자기 통치권을 내주고 사탄의 종이 되어 그래서 죄와 죽음의 통치아래 들어갔다는 것이다. 언약사상이란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한 무리의 사람을 선택하시어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 노릇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는 것이다. 종말사상은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다 멸하시고 자비와 공의로 통치하시는 오는 세대를 가져오시리라는 것이다.
(요약자주: 저자는 하나님나라를 창조-타락-언약-종말의 구조로 설명하는데, 언약사상을 타락 이후로 국한 시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언약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언약은 인간의 타락이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창조시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언약적 피조물로 창조하심으로 창조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언약적 관계로 출발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언약 관계를 통하여 청조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는 묵시문학적 전승을 이어받아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오는 세대를 여는 하나님나라가 곧 임할 것을 선포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하나님나라가 빨리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묘사하면서 묵시문학의 환상적인 언어와 랍비문학의 물질적인 언어를 피하셨는데 이는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신학적은 뜻에 집중하고저 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두 개의 기본적인 그림, 곧 잔치와 상속의 그림으로 비유하였는데 이 두 개의 그림이 말하고저 하는 바는 하나님이 백성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신적인 충만한 부요함 무한한 자원을 상속받음 또는 그 자원에 참여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아담의 타락을 염두에 두고 인간의 비참한 실존과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설명한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나라를 보다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탕자의 비유는 잔치와 상속의 그림을 합쳐서 포현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요약자주: 잔치와 상속이라는 그림으로 표현된 하나님나라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신적인 충만한 부요함 무한한 자원을 상속받음 또는 그 자원에 참여한다는 것이 역사 가운데 진행하는 하나님나라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는 놀라운 자기주장이 담겨있는데 그것은 그런 선포를 하는 자신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라는 은근한 주장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하나님나라로 초대하여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의와 화평의 관계를 누리게 하며 병자들도 치유하며 종말에 올 하나님나라가 아미 자신을 통해서 그 구원의 힘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때 새로운 계시와 소명을 체험했으며 당연히 그 계시와 소명을 구약에 비추어 해석하였는데 그 결정적 본문중 하나가 다니엘 7장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 곧 “사람 같은 이”는 구약의 숙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대권의 상속자, 대행자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 때 받은 하늘 계시를 이 본문에 의거하여 해석해서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 통치를 대행하고 실현하도록 세움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와 더불어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종말 백성을 창조하고 모아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소명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항상 인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니엘 7장에 나오는 그 천상적 존재인 그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약자주: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나라 사상을 이어받아서 자신의 임재로 인하여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말씀과 이적으로 중시하셨다. 그것은 하나님날의 도래의 증거이며 동시에 그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였다. 에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다.그러니까 예수님은 장차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고 증거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하나님나라 선포를 이어받아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선포한 것이니 바울의 복음선포에는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나라가 전제되어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하나님나라는 늘 종말론적 관점에서만 토론이 되었는데 요하네스 바이스나 슈바이처가 주장한 철저종말론은 예수님이 유대묵시문학의 영향아래 하나님나라가 임박한 미래에 올 것으로 가르쳤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맞서 도드는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고 가르쳤다는 이른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부터는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을 통하여 이미 실현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고 합의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은 다수의 학자들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출범(inauguration)과 완성(consummation)의 구도로 설명한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오는가하는 도래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와 관련하여 “오다, 들어가다, 주다, 받다” 의 네 가지 언어를 사용하였다. 이 말로 강조하는 것은 두가지인데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초월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은혜로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힘을 모아서 이루어내는 내재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오다, 주다” 는 하나님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하는 언어이다. 또한 예수님이 많이 사용한 씨의 비유들은 하나님나라의 은닉성, 점진성, 필연성을 표현한 것이다.
(요약자주: 하나님나라의 초월성, 은혜성을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과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는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은 언제나 언약 백성을 통해서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경륜이다.
예수님은 결코 영적 진공상태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포로기 이후에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법에 신실한 언약백성으로 살고자하는 운동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바리새 운동, 에세네파 운동, 열혈당 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런 운동중 하나가 세례 요한 운동이고 예수님도 세례요한 운동에 동참하면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당시의 유대사회의 어떤 운동과도 같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언약백성이 사탄의 통치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 때 이 땅에 임하는 것, 곧 하나님나라는 언약백성이 하나님나라의 법을 지키며 살 때 임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먼 미래, 종말의 것도 아니고 하늘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실존의 매순간 사탄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갈림길에 놓이는데 오늘 나의 실존의 순간순간이 하나님과 사탄의 통치의 각축장이다. 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삶을 바울은 믿음의 순종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그 만큼 하나님나라의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약자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언약백성이 사탄의 통치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 때 이 땅에 임하는 것, 곧 하나님나라는 언약백성이 하나님나라의 법을 지키며 살 때 임한다는 가르침이었다. " 저자의 이런 언급은 하나님나라의 본질을 간파한 탁견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동치를받는 백성의 자발적 순종을 톻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는 그 백성을 창조하며 그 백성의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의도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 예수는 사탄의 나라에서 죄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이러 온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는 죄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약속하고 그 구원을 치유와 죄 용서로 시위하면서 죄인들을 하나님나라로 초대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예수님은 새로운 성진 짓기로도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 모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교회)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았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아서 새로운 성전을 짓는가? 첫 단계는 하나님나라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둘째 단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종말의 유월절 구원의 사건이며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임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와 그의 죽음과의 상관관계는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는 우리에게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님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였다면 그의 죽음은 이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이 약속을 성취하여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속죄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하나님나라 선포로 약속한 바를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 부활은 신적인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가 계심이 확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의 무대에 성큼 걸어오셔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스스로를 계시하신 사건이다. 부활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다고 한 주장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님이라는 사실이 부활사건으로 확인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상속받은 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라면 주는 그 대권을 대행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칭호로서 이 두 칭호는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분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요약자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와 그의 죽음과의 상관관계는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십자가 죽음을 약속과 성취로 본 것은 훌륭한 관점이다. 저자는 부활사건을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주장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부활은 십자가 죽음과 관련성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로 완성된 것이라고,,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죄의 삯인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다. 죽음으로 죄가 용서된 것이고 부활로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해방된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죄 사함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나라 복음의 선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촛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사건의 절정(봉우리)인데 예수는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 구원을 예고하고 약속하면서 선포하신 것이고 사도들은 그 봉우리를 되돌아보면서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결국 동일한 복음인데 사도들의 복음선포에서는 전자가 후자로 전환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글에서는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은 적게 나오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이심이 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후 성령 강림을 체험한 교회는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으신 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세상에 오시고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 자신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종말에 온전히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성령을 통한 현재적 통치로 실현되어간다고 본 것이다.
( 요약자주: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통합하여 설명한 탁견이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수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나라를 성취하셨는데 사도들은 하나님나라를 성취한 예수님의 그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사도들의 선포를 읽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나라가 아닌 개인의 구원의 관점에서 오독하게 된다. 예수님의 오심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지향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나라이다.
바울의 하나님나라 복음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에 상응한다. 정확히 말하면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틀로 이해해야한다. 지금까지 개신교 전통에서는 바울의 칭의복음을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무관하게 해석하다보니 칭의의 의미를 편향적으로 왜곡하여 해석하였다. 그 결과 칭의론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으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교리 심지어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교리로 전락하여 버렸다. 그래서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믿음을 윤리와 분리해서 이해하고 윤리는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자신들이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 비극의 가장 근본적 원인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약자주: 바울의 칭의 개념을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에 나오는 언약맺음 혹은 언약백성됨일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언약안에 머무르는 것, 곧 언약적 삶의 요구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언약적 개념으로 보면 복음을 믿음으로 언약을 맺는 것이고, 하나님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므로 믿음에는 언약적 삶 혹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의 삶이 포함된 것이다. 이런 원리는 구약적 맥락에서는 자명한 것이고 신약은 이런 구약적 맥락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다만 신약에서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구약보다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로마서 1장에는 복음에 대한 두가지 정의가 나오는데 2-4절과 16-17절에 나오는 것이 그것이다. 2-4절이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한 것이라면 16-17절은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로마서는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전개하기 보다는 구원론적으로 혹은 칭의론적으로 전개하지만 "다윗의 씨"라는 표현을 처음과 마지막에 두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구원의 사건임을 전제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성취한 종말론적 구원임을 밝한 것이다. 로마서 1장 3-4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무엘하 7장 12-14에 나오는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 신앙고백이다.이 나단 신탁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언제가는 약속대로 다시 한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 왕위에 앉히고 다윗왕조를 재건하며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를 주고 모든 열방을 굴복시키며 이스라엘을 패권국가로 만들어 번영을 누릴 것이라 믿었는데 이것이 당시 널리 유행하던 메시아 사상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의 뿌리인 나단의 신탁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기르치시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단의 신탁과 시편110편:1의 예언들을 성취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대권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가 되심을 깨닫고 선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말하는 복음이다. 바울은 복음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증거하는데 이것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1장 16-17절에는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동일한 복음을 1장 2-4절에서는 기독론적으로 , 1장 16-17절에서는 구원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약자주: 바울의 칭의 복음이 하나님나라 복음을 기독론적이나 구원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에수님이 선포하고 성취하신 하나님나라를 전제한 맥락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복음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복음선포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모든 죄와 죽음의 지배를 소탕하는 작업을 완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임하는 시점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로 본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 곧 만유의 주로 하나님 우편에 등극한 시점부터 그의 재림 때 까지의 기간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탄의 죄와 죽음의 지배를 소탕해가는 기간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바울의 복음 선포의 큰 틀이었으며 바울이 예수님을 "주"라 지칭할 때는 그는 항상 "하나님나라"의 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분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3-28절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 1장 3-4에 인용된 예루살렘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바울의 해설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주로 칭의론의 범주로 설명하지만 로마서의 첫부분(1장3-4)과 끝부분(15장 12)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의 복음을 말함으로써 칭의론의 복음을 기독론의 복음으로 에워싸고 있는데 이는 로마서에서 자신이 펼치는 칭의론의 복음이 기독론적 복음,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라는 묵시적 큰 틀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약자주: 저자는 현재적 하나님나라를 사탄의 죄와 죽음의 지배를 소탕하는 기간이라고 말하는데 왜 그러한 기간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역사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적 하나님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언약적 삶의 내용이며 나아가 교회의 사명이며 역사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3대 절기 사상에 의하면 이 기간은 첫 추수가 이루어진 후 나머지 추수를 위하여 일하는 기간이며 또 바울은 이 기간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순종이 온전해지는 기간이라고 말하였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하나님 왕국과 사탄세력의 우주적 영역에서의 투쟁이라는 묵시적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죄의 용서와 하나님나라의 백성되는 일에 촛점을 두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사탄의 통치를 쳐부수고 의와 생명의 통치를 이루신다는 묵시적 틀을 가지면서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설명하는 칭의론이나 구원론적 촛점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바울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개개 인간들의 구원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 선과 악의 우주적 스케일의 대결이라는 묵시적 틀안에서 생각하였으며 그 안에서 칭의의 복음을 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나라 복음은 사람이 회개함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나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로 들어가면 거기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상속과 잔치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 것을 구속, 죄사함, 칭의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구원론이나 칭의론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인간론적 측면에서 본 것이다. 우주적으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해 사탄을 무찔러 가시는데 그것이 사람에서는 사탄을 섬겼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칭의이다. 이렇게 바울의 칭의론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비록 칭의, 화목, 입양 등의 언어로 다르게 표현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같은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자주: 결국 바울이 사용한 다양한 그림 언어들인 칭의, 화목, 입양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것은 바로 구약이 말하는 언약 사상에서 언약 맺은 혹은 언약 회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언약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4절에 나타난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대속의 제사로 내어주셨고 또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키심으로 그가 과연 자신이 보낸 메시아임을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자신의 우편에 높이시어 대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아들로 선언하셨다" 이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기본적으로 관계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의"의 기본 의미는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그 관계속에 있는 자들에게 상대에 대한 의무를 지우는데 이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의"이다. 그러니까 "의"는 "관계에 신실함"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신실함으로 관계가 원만한 것이 바로 샬롬이다. 그러니까 의가 샬롬을 낳는 것이다. 거꾸로 불의는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히지 않는 것이고 불의는 관계의 갈등과 깨어짐을 낳는 것이다. (요약자주: 불의가 바로 죄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바로 관계적 의무를 다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관계적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인간은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행위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라는 언약관계를 내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을 다 해주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 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이야기인데 바로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노릇을 해주시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의하였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의로우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하나님노릇을 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을 영접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우리를 끝까지 정죄하지 않은시고 우리에게 창조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셨으니 이처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의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은혜는 다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이 복음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의가 효력을 발생하여 그의 죄가 용서되고 의인으로 칭함을 받게되는 것이다. (요약자주 :결국 믿음이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반응하는 것이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의미일 것이고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신다는 말도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이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근본의미이며 이 복음을 믿으면 이 복음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효력을 발생해 구원을 받게 된다. 즉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칭의는 하나님에 의해 "무죄 선언됨, 죄사함" 또는 "칭의, 의롭다 칭해짐" 이라는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가 구원을 부정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면 후자는 긍정적용어로 표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에는 법정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의미"가 있다. 칭의의 법정적 의미가 "죄사함, 의롭다함을 얻음"이라면 관계론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화목, 양자됨" 일 것이다. 전통신학에서는 칭의를 법정적 의미로만 해석하였지만 칭의는 법정적 의미와 더불어 관계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칭의가 법정적 의미뿐 아니라 관계론적 의미도 포함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관계론적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의 이전, 곧 주권의 전이(Lordship-transfer)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표현한 초대교회의 세례식인 침례는 이런 주권의 전이를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주권의 전이를 나타내는 그림언어는 칭의외에 몇가지 범주들이 더 있느데 그중에 하나가 "성화" 이다. 이때의 성화는 구원의 서정에서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는 "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짐" 곧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칭의, 성화, 화해, 입양, 새로운 피조물 등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 창조주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받는 존재됨, 화목을 누림, 신적 생명인 영생을 누림들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된 바울의 구원론적 그림 언어들이다. 이런 그림 언어들중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칭의인데 그것은 칭의가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고 다른 것들은 칭의에서 나오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가 출범과 완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받는 구원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이미 출범한 하나님나라의 혜택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종말까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의 종말론적 유보라고 한다. 구원의 첫 열매를 이미 받았으나 아직 마지막 열매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세단계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 부활로 이미 출범한 과거의 하나님나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임재함으로 교회를 일꾼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펼쳐가는 현재의 하나님나라,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미래의 하나님나라가 그것이다.(요약자주: 이것은 구약의 삼대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한다) 이 구조에 맞추어 바울도 구원을 이미 받은 구원, 지금 이루고 있는 구원,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시제로 가르친다. 이렇게 세가지 시제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이 종말론적 유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칭의의 범주로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이것이 구원의 과거이며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간 자로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구원의 현재이며 종말에 칭의의 완성을 얻게되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될 것이니 이것이 구원의 미래이다.
전통신학에서는 바울의 구원론의 세 시제를 칭의,성화, 영화라는 구원의 서정의 세 단계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구원론적 언어사용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며 바로 여기에 전통신학의 구원론이 문제가 있다. 바울은 칭의나 성화같은 구원론적 그림 언어들을 구원의 전과정에 적용한다. 그래서 칭의도 이미 의롭다함을 얻은 과거적 칭의, 회복된 관계를 유지하는 현재적 칭의,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미래적 칭의로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성화라는 말도 믿음/세례로 하나님께 바쳐진 과거적 성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현재적 성화 그리고 최후의 심판때 완성될 미래의 성화가 그것이다. 바울은 이와같이 칭의와 성화라는 언어를 동의어로 쓰면서 구원의 세단계(과거, 현재,미래)에 공히 적용하였다.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칭의와 성화는 같은 실재를 가리키는 다른 그림언어이다. 칭의와 성화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칭의와 성화는 세례 때 함께 일어나는데 관계의 회복의 관점에서는 칭의라 하고 죄사함을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바쳐짐의 관점에서는 성화라고 한 것이다. 성화는 칭의의 구조속에 현재적 삶을 지칭하는 또하나의 동의어이지 칭의와 구조적으로 분리되어 칭의 다음에 오는 구원의 단계가 아니다.
칭의를 이렇게 구원의 전 과정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론에 따라서 믿는 자된 순간에만 적용하고 그 후에 성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칭의의 현재적 과정(전통신학이 말하는 성화)이 등한시 되어 윤리가 없는 칭의론이 되고 만다. 이런 칭의론에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까지 합세하면 구원파적 안일함에 빠지게 된다. 물론 진지한 신자들은 칭의후에 성화를 강조하면서 거룩한 삶에 열심을 내지만 그러한 삶을 칭의의 현재적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미 칭의된 자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성화를 상급신학의 구도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에 만연한 구원론의 구도이다. 이런 왜곡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하나님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전통신학의 구원의 서정론에 근거하여 구원을 칭의와 성화의 두 단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칭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삶, 하나님나라 구원을 완성 받음"이라는 구원의 전과정을 총칭하는 하나의 범주로 이해하면 윤리적 요구 즉 의로운 삶에 대한 요구가 칭의에 구조적으로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칭의를 하나님나라의 범주로 이해하면 윤리적 요구가 개인적인 경건만이 아니라 사회윤리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칭의를 하나님나라의 범주로 이해하면 자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실현되는 것에 관심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칭의론을 하나님나라 복음의 인간론적, 구원론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개인의 삶뿐 아니라 전 사회적, 세계적, 우주적인 하나님나라 실현에 관심을 갖게된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의인으로 사는 것은 이 사회에 하나님의 의와 살롬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 온 피조세계가 갱신되도록 노력해야 함도 내포한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의인이 된사람 곧 하나님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이제 하나님나라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에 진입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즉 그의 아들의 주권아래서 날마다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탈락할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 경고하며(고전 10:1-12) 로마서 11:17-24에서도 똑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그를 통해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를 믿지않고 거부하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언약관계에서 자신의 언약적 의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며, 그 언약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줄기에서 잘려진 가지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로 의인된 우리도 그 의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즉 우리의 언약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내쳐지게 될 것을 경고한다. 우리가 현재적 실존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순종하지 않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헛된 믿음이고 헛된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덕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구원/칭의는 종말에 얻는 것으로 유보된 상태에서 우리는 오늘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실존의 순간순간 마다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우리의 신앙을 실재화하여 주 예수가 대행하는 하나님나라의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고 한번 칭의되면 최후심판에서 그 칭의가 자동적으로 확인된다고 믿는 것은 실로 구원파적 신앙관이다. 특히 장로교 전통에서 그것을 예정론과 결부시켜 강조하는데 문제는 성경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놓았는데 종말에 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그 회복된 관계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은혜에서 탈락한다고 가르친다. 종교개혁의 대원칙 중 하나가 "오직 성경으로" 이다.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세카톨릭의 신학방법에 빠져 중세신학자들이 아퀴나스의 신학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한 것처럼 칼빈 혹은 이른바 칼빈주의 신학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칼빈이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그가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터득한 것은 아니다. 칼빈 이후 500년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상당한 진리들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우리는 "오직 성경"의 원칙에 굳게 서서 종교개혁이후 500년 동안 신학자들이 산고 끝에 찾아낸 신학적 진리들을 겸허하게 경청하고 수용하여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전적인 구원의 확실성과 아울러 타락의 가능성이라는 두가지 가르침을 가르쳤는데 이 둘이 일으키는 논리적 긴장을 의식하며, 이 둘을 함께 견지할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이성적이나 합리적으로 이 둘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어느 한쪽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