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위르겐 몰트만의 성령론- 김향경

메르시어 2023. 5. 3. 11:21

위르겐 몰트만의 성령론- 김향경

2014-02-21 02:29:44


Jürgen Moltmann의 성령론

 

 

  차 례

 

Ⅰ. 들어가는 글

Ⅱ. 몰트만의 생애

Ⅲ. 몰트만에게 영향을 끼친 학자들

   1. 바르트와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2. 오토 베버 (Otto Weber)

   3. 한스 요아힘 이반트 (Hans Joachim Iwand)

   4. 에른스트 볼프 (Ernst Wolf)

Ⅳ. 몰트만 신학의 특징

   1. 희망의 신학

   2. 십자가의 신학

   3. 정치신학

   4. 삼위일체론

Ⅴ. 몰트만의 성령 이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Ⅵ.『생명의 영』

   1. 성령의 경험들

     A. 삶의 경험-하나님 경험

     B. 성령의 역사적 경험

     C. 삼위일체적 영의 경험

   2. 성령 가운데서의 삶

     A. 삶의 영

     B. 삶에의 해방

     C. 삶의 칭의

     D. 삶으로 다시 태어남

     E. 삶의 성화

   3. 성령의 사귐과 인격

Ⅶ. 몰트만의 성령론과 칼빈의 성령론의 비교

   1. 몰트만의 성령론의 특징

   2. 칼빈의 성령론

   3. 비교

Ⅷ. 비판적 평가

Ⅸ. 나가는 글

 

참고 문헌

 

Jürgen Moltmann의 성령론

 

김향경전도사 (Ph.D.2학기 조직신학전공)

 

 

  차 례

 

Ⅰ. 들어가는 글

Ⅱ. 몰트만의 생애

Ⅲ. 몰트만에게 영향을 끼친 학자들

   1. 바르트와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2. 오토 베버 (Otto Weber)

   3. 한스 요아힘 이반트 (Hans Joachim Iwand)

   4. 에른스트 볼프 (Ernst Wolf)

Ⅳ. 몰트만 신학의 특징

   1. 희망의 신학

   2. 십자가의 신학

   3. 정치신학

   4. 삼위일체론

Ⅴ. 몰트만의 성령 이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Ⅵ.『생명의 영』

   1. 성령의 경험들

     A. 삶의 경험-하나님 경험

     B. 성령의 역사적 경험

     C. 삼위일체적 영의 경험

   2. 성령 가운데서의 삶

     A. 삶의 영

     B. 삶에의 해방

     C. 삶의 칭의

     D. 삶으로 다시 태어남

     E. 삶의 성화

   3. 성령의 사귐과 인격

Ⅶ. 몰트만의 성령론과 칼빈의 성령론의 비교

   1. 몰트만의 성령론의 특징

   2. 칼빈의 성령론

   3. 비교

Ⅷ. 비판적 평가

Ⅸ. 나가는 글

 

참고 문헌

 

 

Ⅰ. 들어가는 글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철학과 문화에 관련시켜 연구한 나머지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경향이었고, 교회의 세계선교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영미계통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과 선교활동은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을 강조했던 바 교회역사상 지대한 선교사적 의미를 갖는다. 20세기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활발해지고 국제선교대회가 거듭되고, WCC가 계속 개최되는 과정에서 교회의 사회참여는 2천년 교회역사를 통하여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첨예화되었다. 에큐메니칼한 교회의 사귐, 교회의 연합사업,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칼한 신학적 공통분모의 모색등은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다. 

WCC는 처음 총회개최 시부터 가난하고 압제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정의의 기관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노력해도 별 개선이 없자 사회구조을 바꾸는 혁명적 방식과 그런 세력을 적극 지지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방신학을 그들의 공식신학으로 채택하였다. 이런 해방식학의 기초는 1964년 소망의 신학을 낸 유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제공하였다. 이렇듯 WCC는 칼바르트, 본훼퍼, 물트만, 여성신학, 해방신학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몰트만의 저서에도 WCC의 영향에 동조하고 있는 용어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몰트만과 WCC는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가 있다. 몰트만은 종말론적인 삼위일체 신학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고, 시대적 요청에 따라 대화를 강조하고 있으며, 신학의 실천으로서 정치 신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WCC와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에큐메니칼 운동이 활발한 시대에 몰트만의 연구는 종말론이 그의 주된 사상이란 것보다 그의 사상중의 어느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의 성령론은 WCC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신학이고 한국의 진보적인 성향의 교단들은 그것을 따르고 있다. 

 

몰트만은 그의 많은 저서들 속에서 성령님에 관한 견해를 드러내고 있지만, 이 글은 그의 저서중 총체적인 성령론이라는 부제가 붙은『생명의 영』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그 내용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겠다. 

 

Ⅱ. 생애

 

몰트만(1926- )은 바르트 이후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이다. 그는 1964년 “기독교 종말론의 정초와 결론에 관한 논구”인 『소망의 신학』을 출판함으로써 현대 신학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함부르크의 교육자 가정에서 태어나 종교와 신학과는 동떨어져 자라나 본래 수학과 원자 물리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막스플랑크와 알베르트 아인쉬타인은 그의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다. 그는 2차 세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인간 실존의 한계 상황을 경험하였다. 1943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함부르크의 폭격이 있었을 때, 온 도시가 파괴되고 자기 옆에 있던 친구가 폭사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질문하였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 질문은 그의 신학에서 주요 관심이 되었다. 

 

1944년 만 18세의 나이로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하여 징병당하였다. 6개월 후 1945년 2월 그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약3년 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포로 수용소에서 그는 신학을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우쉬비츠와 히로시마는 나를 깊이 동요시켰다.” 몰트만은 이 동요속에서 하나님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 경험이 그로 하여금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실존을 지탱해주는 지식의 추구, 바로 신학수업을 결단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몰트만의 신학적 실존이 생겨난 것이다. 

 

몰트만은 1948년 괴팅겐에서 신학수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여기서 에른스트 볼프와 오토 베버의 지도하에서 학문적 연구를 하였다. 특히 바르트의 온건한 해석자인 개혁신학자 오토 베버는 박사학위 논문의 지도교수였고 친구로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문하에서 목사직을 위한 신학공부를 하면서 몰트만은 그의 아내 벤델을 만나 결혼하였고 같이 박사학위논문을 마쳤다. 그의 문하에서 몰트만은 개혁주의 전통에대한 사고를 배웠고 그것은 그의 초기의 두 논문, 박사학위 논문과 교수자격 논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53년 몰트만은 브레멘-바서호르스트 개혁교회를 맡아서 5년간 목회를 하였다. 몰트만은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서 옳고 그름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고백교회의 입장을 지지하고 따랐다. 1959년 몰트만은 그의 스승, 오토 베버의 간청으로 히틀러 정권에 대항하던 고백교회에 의해 설립된 부퍼탈 신학대에 교수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 후 첫 신학저서인 그리스도의 통치 지평안에 있는 공동체를 출판하였다.

 

몰트만은 1960년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어 “왜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의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원시 기독교의 소망의 영은 오늘의 기독교 어디에 남아 있는가?” 이것이 몰트만의 1964년 저서인 『소망의 신학』저술의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였다. 당시 신약학의 논재, 역사와 종말에 관한 논쟁에서 불트만은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고, 신앙 안에서 역사의 종말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서 케제만은 “역사의 종말이 아직 현재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트만을 반박하였다. 몰트만은 그의 저서에서 불트만의 현재적 종말론의 관점과 케제만의 묵시문학적 관점을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종말론적 소망 개념이다.

 

1963년 까지 부퍼탈 신과 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1967년까지 조직 신학과 기독교 사회윤리를 강의하다가 1967년 튀빙겐 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1991년 정년 퇴임하기 까지 이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다. 

 

몰트만이 기획한 소망의 신학은 당시 바젤의 바르트가 의심한 것처럼 희망의 원리에 기독교적 세례를 베풀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블로흐가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무신론의 근거위에서 희망의 원리를 전재한 것에 반대하면서,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의 근거 위에서 희망의 개념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책을 써 내려가면서 몰트만는 “희망이 점점 강하게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고 했다. 몰트만은 1999년의 그의 저서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여정』에서 “나는 삶이 확실성을 찾았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실존을 이끌고 갈 지식을 질문하였으며, 자연을 인식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지식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 당시 그리스도는 그의 열정속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나의 형제가 되었으며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통해서 나에게도 생동적 소망을 일깨워주었다.” 소망 신학의 착상은 바로 포로생활에서의 고난의 실존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포로의 실존적 경험, 즉 고난과 희망은 나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Ⅲ. 몰트만에게 영향을 끼친 학자들

 

몰트만의 신학의 결정적인 특징을 ‘화해의 변증법’으로 본다. 몰트만에서 이것은 ‘방법론적 동력’일 뿐만 아니라 신학의 자료선택을 위한 표준이라고 한다. 그의 신학에 나타나는 ‘희망, 종말론, 약속, 미래, 부활, 십자가’와 같은 개념에서 이와 같은 방법론이 발견된다고 한다. 몰트만의 ‘화해의 변증법’은 칼 바르트와 블로흐로부터 왔고 그의 종말론으로서의 신학의 비젼은 오토 베버, 이반트와 볼프에게서 왔다고 한다.

 

1. 바르트와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몰트만은 1960년대에 바르트의 역사부재 현상을 극복하고자 역사구조를 계시구조로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몰트만은 미래를 향해 열려진 그리스고 미래를 기다리는 역사속에서의 신학지평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 중심의 신학은 바르트의 기독론중심의 계시 신학의 영향과 함께 그것의 극복을 위한 작업이 였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기독교 윤리학을 그의 신학 체계속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몰트만은 더 나아가 기독교 윤리학이란 기독교의 신학적 성찰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종말론을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이론인 동시에 이 희망을 위한 행동의 이론이라고 이해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철저히 자유롭고 전적으로 초월적인 타자성’과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의  ‘화해의 변증법’이, 블로흐에게는 미래로부터의 인간의 ‘변혁시키는 타자성’과 역사와 자연 속에 있는 인간과의 ‘화해의 변증법’이 발견된다고 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로부터 도움을 얻어서 성경의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요소들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미래를 향한 혁명적 변혁의 실천 이론이다. 이렇듯 몰트만의 희망신학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아이디에서 나왔다. 블로흐는 막시스트적인 종말론을 거부하고 열린 미래를 향한 종말론을 발전시켰다. 이 세상에는 정체된 정수란 없고 단지 미래가 밝혀주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미래에 담겨져 있는 약속이야말로 현재에 희망을 주는 확실한 존재적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2. 오토 베버 (Otto Weber)

베버 교수를 통하여 몰트만의 신학이 받고 있는 영향은 첫째, 개혁교회의 칼빈주의이고, 둘째, 베버 교수의 종말론이다. 처음에 몰트만은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베버의 지도하에서 역사신학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베버는 칼빈의 개혁정신을 따라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개혁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개혁이라고 하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의 개혁정신을 강조했다. 둘째, 몰트만은 베버의 개혁전통의 종말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개혁전통의 종말론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지식은 현재에서 그 희망을 재현시키는 순종적 실천의 전제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마께 이미 시작하였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지금도 실현되어 가고 있다. 이와같은 변증법의 현존은 모든 신학적 주제를 종말론적이 되게 한다. 종말론적이고 선교적인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세상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실존한다는 것이다. 현재적, 현실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종말론은 아무 쓸데없는 하나의 추상적 이론에 불과하다.즉 그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세계의 종말이란 세계사의 마지막에 올 어떤 초자연적인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적인 것이다.

 

3. 한스 요아힘 이반트 (Hans Joachim Iwand)

몰트만이 그의 스승 이반트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영향은 하나님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헤겔의 신학적 철학이다. 헤겔은 “하나님의 죽음”을 통해 근대 사회의 무신성(無神性)과 그로인한 인간과 세계가 당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지 아니한 근대사회의 모습을 헤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재에 견주어 생각하여 이것을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였다. 이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몰트만의 신학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지금 존재하고 dLT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변혁시켜 나감으로써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시켜 나가고자 하는 헤겔 철학의 관심이 몰트만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몰트만 신학의 독특성의 가장 중요한 근원은 이반트의 ‘화해의 변증법’이다. 몰트만은 신학은 ‘자연신학’, ‘특수 계시신학’, ‘영광의 신학’으로 나누는 이반트의 견해를 따라 이 세 신학을 항상 상관시키는 신학적 사고를 한다. 몰트만은 자연인이 유추(analogia)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자연 신학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모순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건에 대한 선포’를 모든 것의 심판과 구원과 성취로 보는 바르트주의자인 이반트의 사상을 따른다. 몰트만은 이반트를 통해서 헤겔의 영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했다. 즉,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 것으로 보는데 십자가와 부활이 변증법적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과 이 세계의 모든 부정성을 아들로 하여금 걸머지게 하심으로써 아들을 버리셨으나 부활을 통하여 그를 다시 받아 들이셨기 때문이다. 이 변증법은 열려진 변증법으로서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부활은 궁극적인 영광의 나라를 그리고 십자가는 묵시적인 고난을 보여 주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은 변증법적 사건임과 동시에 종말론적 사건이다. 즉, 몰트만은 헤겔의 영향, 즉 신헤겔학파의 영향으로 십자가와 인자를 떠나서 이해하지 못하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고통 가운데 찾아오시는 기독론적인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4. 에른스트 볼프 (Ernst Wolf)

기독교의 종말론을 사회윤리학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몰트말의 신학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볼프 교수로부터 유래한다. 볼프는 하나님의 명령을 항상 사회와 관련시켰다. 그래서 몰트만은 기독교 신앙의 정치사회적 차원을 파헤쳤고 이것을 사회철학과 실천철학에 관련시켰다. 즉 교회와 신학은 낯선 곳에서 여행하는 존재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그가 속한 사회와 대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그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계될 수밖에 없으며 이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성취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볼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회의 선교를 사회적이고 공적인 영역에 관련시켰다. 몰트만은 볼프의 영향으로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을 극복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이 희망을 현재화시키는데서 윤리를 요청하고 있다. 즉, 볼프의 신학적 견해는 교회의 선교는 그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계될 수밖에 없으며, 이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 배경으로 말미암아 몰트만의신학은 실천신학 내지 사회철학과 대화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문제 삼는다.

 

몰트만이 하나의 새로운 종말론적 교회론을 발전시키는 동안에 1954년 에반스턴WCC의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세상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모인 이 WCC는 종말론과 윤리학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의 미래라고 하는 주제를 교회의 세계선교의 근거로 삼는 에큐메니컬 교회에서 비옥한 토양을 만났다. 그의 역사개념은 교회가 종말론적 비젼하에 이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새롭다. 이런 역사개념은 그의 신학이 세계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교회의 화해사역에 봉사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 밖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흐름들을 깨닫게 하는 것을 포함하는 교회의 세계선교(missio Dei)에 봉사한다.

 

Ⅳ. 몰트만 신학의 특징

 

몰트만은 칼 바르트이후로 현대 신학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시 활성화시키는데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기여를 했다.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신학을 총괄하는 종말론적 정향을 전개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도 새로운 방법들을 제공해 주었다.

 

1. 희망의 신학

몰트만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과함께 시작하였으며, “희망의 신학”이 그의 신학 전체의 기초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희망의 신학”은 종말론에대한 새로운 성찰과 함께 시작한다. 몰트만은 세계의 종말은 단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미 앞당겨 일어났다. 마지막 죽음의 세력이 그의 부활을 통하여 깨어졌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파멸과 소멸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 이것은 finis(끝남)가 아니라 목적 곧 telos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기독교의 한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형성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이다.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을 일으킨다. 약속과 희망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향한 “엑소더스” 곧 해방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희망이고 희망은 믿음의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이다. 세계의 종말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종말에 올 미래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역사의 현실을 변혁시키는 현재적 힘으로 나타난다. 즉,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처절한 역사적 실패 가운데, 역사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미래에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희망의 촛불을 꺼버리지 않고 살려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희망의 신학”의 주재는 미래와 희망이다. 현재를 강조하는 실존주의 신학과 달리, 희망의 신학은 미래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과거나 현재 보다는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신학과 신학적 관심사를 바라본다. 그리스도 과거와 현재는 단지 미래와 관련될 때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취급한다.

 

2. 십자가의 신학

몰트만은 그의 종말론적 입장을 십자가의 신학을 통하여 심화시킨다. 희망의 신학에서 그는 기독교의 종말론을 예수의 부활에 근거시켰다면 십자가의 신학에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한다.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질문하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초연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이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함께 당하였는가를 묻는다. 그는 연민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본직은 사랑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 가운데 예수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당한다. 이것이 신의 죽음의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죽음은 아니다. 십자가의 죽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성령 사이에 일어난 관계적 사건 곧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삼위일체적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의 거짓과 위선과 불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삼위일체적  구원의 나라를 세우신다. 사람들은 파토스를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며, 피조물들의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더 이상 있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기다리며 희망하게 된다. 

 

3. 정치신학

몰트만은 신학은 이 세계가 무엇인가를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기독교 신학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그의 현 상태에서 정지하거나 절대화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변화되고 전진하는 세계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가는 세계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 몰트만이 말하는 정치 신학의 근본 취지이다. 국가 종교로서 기독교는 그 사회의 힘없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지배계층의 편에 서서 사회적 특권을 누려왔다. 몰트만은 이러한 잘못된 정치적 기능을 중지하고 올바른 의미에서 정치적 기능을 기독교가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모든 불의한 질서와 상황들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과 대립하며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향한 변화를 요구한다. 이리하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인간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해방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①경제적 차원의 해방으로 의식주와 건강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노동의 결과인 소득이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는 사회적 의가 세워져야 한다. ②정치적 차원의 해방으로 정치적 억압의 악순환이 극복되고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어야 한다. ③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④자연세계의 해방으로 인간의 착취와 파괴에서 해방되야 한다. 자연 세게 없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자연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파트너”이다. ⑤삶의 무의미,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에서 해방이 일어나야 한다. 현대는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더 많은 소유와 소비와 향락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는다. 현대 사회가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속에 있다. 여기에 현대인의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이 세계의 중심이 되시며 “모든 것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 극복될 것이다.

 

4. 삼위일체론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터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특히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있으며 십자가의 죽음 속에 하나님의 궁극적 자기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안에서 서로의 존재에 참여하며 삶을 함께 나누는 친구의 관계, 공동체적 관계가 지배한다. 각 신적 인격은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사회성 안에 있으며 사회성 안에 있으면서 각자의 개체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안에는 각자의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결합하여한 몸을 이루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관계, 친구의 관계, 형제 자매의 관계가 있다. 소위 위에 있다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명령과 복종대신자발적 봉사와 헌신이 있어야하며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를 몰트만은 사회적 차원에서는 물론 범세계적 차원과 생태학적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모든 민족들이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인간과 자연도 위-아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평등한 파트너의 관계로 변화되어야 한다.

 

Ⅴ. 몰트만의 성령이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성령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몰트만은 한국에서의 그의 강연을 통하여 그가 이해하고 있는 성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에게 성령은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시는 “생명의 영”(GEIST 

   DES LEBENS)이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생기 넘치는 현존이다. 하나님의 영의 

   은사와 임재는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또는 우리의 인간 공동체가 모든 살아있는 

   존재 또 이 땅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성령 안에는 여러

   가지 선한 영 혹은 악한 영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영이 계시는 곳에는 하나님도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신다. 일반적인 편재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계시의 방식으로 

   현존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는 곳에서는 그 분이 자기 자신을 직접

   나누신다. 그 분의 영원한 생명의 창조적인 에너지는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관통하고 채우고 넘치며 우리의 생명을 속에서부터 완전히 소생시키신다. 

   하나님의 영을 느끼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우리는 마음의 새로운 영성이나 머리의 새로운 신학으로 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생명의 새로운 활력인 그 영을 체험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 우리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는 느끼고 맛보고 

   듣고 냄새 맡는다. 우리가 이 생명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이 생명의  

   영의 이름도 여러 가지다. 나에게 위로자와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몰트만은 그의 책에서 성령에 대한 견해를 “수많은 문헌들은 성령론의 개별적인 문제들만을 다루었으며, 성령론의 새로운 틀(패러다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연구들은 카톨릭 교회의 은혜론을 연장시키든 아니면 ‘말씀과 영’에 관한 개신교 신학의 구조를 확대시키든 지간에 전통적 이론들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와 더불어 “개신교 신학은 성령을 단지 구원의 영으로 파악하며 그 장소는 교회이고 이 성령은 인간에게 영혼의 영원한 축복을 확신시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원인은 제도화된 교회들이 근대세계의 종교적 자유정신에 대해서는 물론 비종교적 자유정신에 대해서도 불안을 가지고 있었고, 이 불안 때문에 제도화된 교회들은 성령론에 대하여 언제나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즉 새로운 자유의 정신 곧,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자발적 교회들의 정신을 거부하면서 은혜를 중재하는 제도교회와 영적 성직자의 선포와 결합되어 있는 영만이 거룩하다고 생각되었다. 라고 전통적인 성령론을 비판했다.

몰트만은 성령이해에 있어서 

첫째, 초월성을 강조한 성령이해를 출발점으로 해서 점차 내재성을 강조하는 성령이해로의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신론을 전개하는 가운데 초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점차 역사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창조 세계안에서 내주하는 창조자로서의 우주적 성령으로 그의 성령이해가 발전하게 되면서 성령이 창조세계 내주 개념이 강하게 들어나게 되었다. 

둘째, 저항과 약속, 약속과 엑소더스, 엑소더스와 해방과 같은 예언자적 구상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었으나, 인간의 역사와 땅의 자연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점으로 인해 상화간의 내주, 즉 공간들의 시간 속에 내주하는 내재성의 신학으로 변화하였다.

셋째, 개인적 차원의 성령이해에서부터 우주적 성령이해까지의 발전이다. 몰트만은 성령을 개인적 성령 이해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 영역으로 넓혀가면서 해방으로까지 성령의 경험 이해를 말한다. 즉, 해방을 위한 성령이해가 개인의 죄와 개인의 구속에만 갇혀 있던 전통적 이해에서 벗어나 공동체적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주적으로까지 넓혀 이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성령을 여성적 측면으로 이해해간다. 우주적 성령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창조자의 영으로서 내재성에 근거한 여성적 표상으로 대신하는데 이것은 몰트만이 성령을 지배적인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개념을 통해 성령이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섯째, 생태학적인 입장에서의 성령이해이다. 몰트만은 피조물속에 존재하는 성령을 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생태학의 입장에서 창조론은 전개하였다. 하나님을 성령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는 분이며 그의 영인 성령은 모든 피조물안에 있다는 이해를 통해 성령론적 창조론으로서의 생태학적 성령이해로까지 생각하였다.

 

Ⅵ.『생명의 영』

 

1. 성령의 경험들

A.삶의 경험 -하나님 경험

성령의 경험이란 개념은 회상되는 과거와 기다리는 미래 사이에 있는 역사적 경험의 중간상태를 적절하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의 경험과 삶과 사귐은 그리스도를 현재화시키며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를 앞당겨 일으키는 가운데서 일어난다. 성령의 경험은 그리스도를 회상하는 일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미래를 기다리는 일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을 전제하며 종말론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36) 몰트만은 자연과학의 인식대상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고, 인식의 주체 혹은 경험의 주체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인간 주체의 자기 확실성의 틀에서 수행하였다. 칸트는 하나님을 자유와 영혼 불멸과 함께 인간의 도덕적 자기경외의 틀에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 기술하였다. 슐아이에르 마허에 의하면 인간의 ‘직접적 자기의식’과 함께 ‘절대의존의 감정’이 언제나 이미 함께 주어져 있다.(53) 하나님이 일반적 세계경험과 삶의 경험의 대상으로 생각되지 않으므로, 하나님 경험은 이제 삶의 세계 중심에 서 있는 인간의 자기의식의 초월적 구성으로서 현존한다고 생각된다. 근대주의에 반대하여 자아의 경험을 포함한 모든 경험에서 신적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 초월을 내세운다.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혹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경험은 하나의 초월적이고 내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영의 경험은 인간주체의 자아에대한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경험, 사회성에 대한 경험과 자연에 대한 경험에서 구성적 요소다.(57) 하나님께서는 만유안에 계시고, 만유가 하나님 안에 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나름의 만유를 ‘경험’하신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초월을 전제하며, 이 초월은 귀납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 모든 사물안에 있는 내재적 초월은 유한한 것 안에 있는 무한한 것, 시간적인 것 안에 있는 영원한 것, 지나가는 것 속에 있는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59)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에 모든 것에 대한 일상적 경험 안에서 그것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의 근거는 창조의 힘과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의 영 혹은 창조자의 영이시다.

 

B. 성령의 역사적 경험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역사의 매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하나님 경험을 말한다. 거꾸로 현실을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온 역사로 인지하는 것도 하나님 경험이다.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언제나 회상과 기다림 사이에 있다. 하나님의 현재를 하나의 역사적 현재로 만든다. 역사적 현재는 회상을 통하여 규정되어 하나의 미래를 지향하는 길로 파악된다. 현재는 ‘언제나 지금’ 곧 영원한 지금을 말하며 영원의 범주에 속한다. 영원한 것은 단 하나의 시간 곧 현재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63) 

헬라어의 pneuma, 라틴어 spiritus, 독일어 Geist가 모두 비물질적인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초감정, 육체가 없는 그 무엇, 초지상의 것으로 이해한다. 히브리어 ‘여호와의 루아흐’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 안에 있는 태풍, 폭풍, 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살아 있는 것, 경직되어 있는 것에 반하여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65) 여호아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활동하는 현재의 사건을 말하고, 초월적 근원인 동시에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삶의 힘으로서 내재적으로 활동한다. 즉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 루아흐의 초월적 면이라면 살아 있는 것의 삶의 능력은 루아흐의 내재적 면이다. 루아흐는 인격으로 힘으로 또한 ‘넒음’이란 공간을 의미한다.(68)

구약에서 성령은 하나님 자신을 뜻하며 결코 그의 은사만을 뜻하지 않는다. 즉 영은 그의 은사 안에 있는 시여자이다. 성령이란 말은 이스라엘 적인 사용과 관계해서 ‘쉐히나’ 곧 하나님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상에 있는 피조물들과 그들의 역사의 특수한 자리와 특수한 시간에 내려 와서 거하신다는 표상에 해당한다. 몰트만은 무엇보다도 ‘쉐히나’ 개념에서 기독교적 성령이해를 도출해 낸다. 쉐히나는 성전 안에 자리를 치는 것과 거하는 것을 뜻하한다. 하나님은 성소 안에 현존한다. 쉐히나는 기도자들의 공동체 안에 현존한다. 이스라엘의 기쁨과 고난을 함께 나눈다. 즉 쉐히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현존이다. 몰트만은 쉐히나를 성령의 인격적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고, 영이신 하나님의 감수성을 일깨워 준다 즉, 함께 고통당하며 함께 기뻐한다. 또한 쉐히나는 성령의 케노시스를 가리킨다.(80)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간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기간동안에 메시야적 희망이 최전성기를 이룬다. 그것은 ‘재난의 이론’이며 귀향에 대한 희망이 포로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직 희망을 가질 때 실망을 당할 수 있다. 절망은 희망을 전제한다. 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은 ‘주의 날’에 대한 기다림을 그의 구성 요소로 가지고, ‘파루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그의 구성 요소로 가진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의 종교’였다.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은 메시야적이며 성령론적 희망들의 상이한 지평들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82)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에 있어서 ‘여호와 루아흐’의 기능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영이 임한 메시아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갱신으로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깨끗해질 때 성전이 재건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생각된다. 장차 올 메시야를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담지하고 있는 자로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자연의 새 창조는 땅 자체에 대한 창조자의 권리와 정의를 가져 올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은 장차 올 메시야적 구원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행위’로 기다려 진다. 또한, 메시야는 하나님의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에는 물론 자연 속에도 가져 올 것이다.(84) 둘째, 영으로부터 메시아적 백성의 중생을 말한다. 여호와 루아흐는 단순히 성전안에 거하시고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 여호와의 루아흐는 시온에 있는 제 밖에도 존재하는 여호와의 현존과 쉐히나를 나타내는 표현이 되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야적 대표자로 오심을 강조하기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다시 태어남에 대한 집단적 희망을 강조한다. 에스겔37장에서 성령은 죽은 자들을 부활 시키시는 영이시고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영이 새 마음을 창조하셔서 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룩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쉼에 도달하시고 거주하신다. 예레미야31:31에도 새 언약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의 부은바 됨은 모든 생명체의 부활과 땅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의 부활을 일으킨다. 영의 오심으로 기대되는 하나님의 경험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이며 지속적으로 영의 쉼과 거하심으로 나타나고 계시와 전통을 통하여 중재되지 않고 직접적이며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보는 것에 근거되어 있다.(87) 

 

C. 삼위일체적 영의 경험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의 특별한 구조를 말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살펴보겠다. 공관복음은 하나님의 영 기독론으로 시작하고 바울과 요한은 이것을 전제로 하면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기독론적 성령론을 강조하고 있다.  영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은 어떤 관계가 있나? 전자는 하나님의 메시아적 아이부터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이 영에 인도되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시키시는 분 곧 그리스도를 말한다. 후자(바울과 요한)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구속을 실현하시며 교회 안에 계신 기독론적 성령을 말한다. Filioque에 대한 에큐메니칼 논의에서 그것을 삼위일체론적 틀안에서 전개하려고 하였다. 어느 하나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 다음에 오는 것도 아니고 상호 해석의 관계라고 주장한다.(90)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하셨다. 그는 영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아들로 경험했다. 예수의 수난의 길에 대하여 성령이 예수를 인도한다면 성령은 또한 그를 동반한다. 성령이 그를 동반한다면 성령도 함께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으며 예수의 고난의 동반자가 된다. 따라서 아들의 수난의 길은 동시에 성령의 수난의 길이기도 하며 성령의 능력은 예수의 연약함 속에서 증명된다. 이것은 고난에 동참하시는 영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의 자기제약이고 자기 비하이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되신다면 이 영은 수난의 영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영이시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과 제물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된다면 그는 수난의 영이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영이기도하다. 곧,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신 영원하신 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바로 그를 부활시키시는 성령이시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외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령에 의하여’내적으로 경험하였고 또 그것을 긍정하였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그리스도안에서 활동하는 신적인 영을 통한 그리스도 자신이다. “희생의 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의 고난과 그의 죽음의 주체가 된다. 

마가 복음은 예수의 역사를 예수와 함께하는 성령의 역사로 기술한다. 성령은 예수의 행위들과 고난에게 본래의 신적 능력을 부여한다.(94) 마가는 예수의 수난 곧 하나님의 숨어 계심에대한 경험과 함께 끝나는 예수의 수난을 성령론적으로 해석한다. 성령을 통한 그의 세례와 함께 시작한 것이 성령을 통한 그의 수난에서 끝난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죽음 속으로 간다. 또한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왔고 그 위에 머무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메시야적 아들이 당한 고난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의 고난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은 아들과 같은 방법으로 고난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골고다에서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고난당하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죽지는 않는다. 죽어가는 예수로부터 그의 숨을 내어쉼과 자기를 내어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부르짖음은 그의 감각이 따나가고 죽음 당했을 때 성령이 그를 돌보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과 함께 그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이다. 마가는 빌라도 앞에서의 공적 고백과 십자가의 처형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십자가의 명패에 이르는 예수의 성장하는 메시야 확신의 역사로 서술한다. 자기가 메시야라는 예수의 이 성장하는 확신은 아버지 하나님의 부재하심에 대한 경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현존에 대한 분명한 표징이다.(97)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은 세계를 대리하여 하나님의 버리심을 대신 당하며 이를 통하여 이 세계에 하나님의 가까우심을 즉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 세계에 가져 온다. 성령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은 하나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지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두 가지 상이한 행위들이 아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성령의 출생의 고통과 출생의 기쁨으로 식물의 씨앗과 성장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 속에서 일어난 성령의 함께 고난당하심속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넘어서 이미 그의 미래를 인식할 수 있다.(97)

우리는 예수의 인격적 성령 경험과 공동체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의 경험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성령이 생동케 하는 능력이 경험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인식케 하는 능력은 성령의 이 생동케 하는 능력이다. 롬6:4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부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프뉴마를 통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표상이 숨어있다. 이것은 능력에 대해서는 물론 ‘빛’에 대하서도 말한다. 그러므로 부활절 현현들을 빛의 비젼으로 표상할 수 있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예수의 변용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 할 수 있다.(99) 영원한 성령의 능력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연약하심 속에서 십자가에 달렸으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신다. (고후13:4) 고전15:45 바울은 새 인간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령으로부터 성령 안에서 살며 신적인 생명의 영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활동한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내적 거하심의 순환은 그리스도께서 살리는 영이 되며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는 것이다.(99) 칼빈은 “영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원인자이기 때문에 또한 영원한 생명의 은사 죽은 자들의 부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다시 태어남 모든 것들의 새 창조가 그에게서 기다려진다”고 했다. 십자가의 하나님 사건을 볼 때 우리는 고난당하며 시련을 당하며 죽어가는 예수 안에 있는 그의 쉐히나에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케노시스를 수용하였다. 또한 성령의 이 연약하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단순히 능력으로부터 출발할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자기희생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물에 대하여 성령은 단지 외적으로 활동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믿음의 영이 되며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성령의 주체가 된다. 그가 성령을 보내며 그가 성령을 내어쉰다. 제자들과 그의 공동체가 경험한 성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형성된다. 성령을 통하여 그들은 구원하며 살리는 그리스도의 사귐 속으로 들어온다. (101)

믿음에 해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귐에도 해당한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을 결합하는 것은 성령론이다. 성령에 대한 현재적 경험외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어떠한 다른 중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의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의 현존 속에 근원과 완성이 현존한다.(102)

성령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의 역사이다. 그의 하나님 경험과 그의 하나님의 성령 경험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이 필리오퀘(filioque)를 삽입함으로서 성령은 그의 근원에서부터 아들뒤에 오고 아들이 성령을 선행하는 것으로 위치된다. 이 구조는 구원사에 있어서 분명히 인식될 수 있지만 승천하신 주님을 통한 성령의 파송에 근거하는 공동체의 성령경험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105)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온다. 이 변형은 필리오퀘가 서방교회가 신앙고백에서 제거되고 성령이 오직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대로 두어 둘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영원한 말씀을 그의 영원한 영을 내어 쉬면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추론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현존 가운데서 영원한 성령을 내쉰다. 말씀과 내어 쉼의 상에 따라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동시에 나온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앞서는 일이 없다.(105)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나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들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면적 상호 작용 가운데 있는 성령과 아들 그리스도사이에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아들과 성령은 서로 병행하여 있거나 앞 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탄생할 때 성령이 아들의 탄생을 동반하며 아들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낸다. 아들 없는 성령은 생각될 수 없으며 성령 없는 아들은 생각될 수 없다.(106)

삼위일체의 구조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나 성령 중심주의에 반하여 하나님 중심주의를 보존한다. 성령과 그리스도는 물론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적 상호 활동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은 삼위일체의 구조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107)

성령의 기다림의 긍정적 차원은 성령의 경험 속에서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미 대리하여 미리 앞당겨지면서 경험된다. 성령의 체험속에서 몸과 영혼을 충만시키는 성령의 카리스마적 능력들은 초자연적 은사가 아니라 미래의 세계의 능력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경험은 참된 삶으로의 다시 태어남이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성령의 경험을 장차 올 추수의 ‘첫 열매’라고 말한다. 성령의 현재적 경험은 희망의 상들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시작의 경험으로 묘사된다. 희망이 그들을 지배하는 주요 원인은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이 이미 받은 것에 있다.(109) 부정적 차원은 억압과 박해 속에서 사람들이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될 때 사람들의 희망을 유지하는 것은 기도뿐이며 이리하여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게 된다. 성령의 함께 하심에 대한 부르짖음은 이미 성려의 부르짖음이다. 노예상태에 있는 피조물의 신음은 그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신음에 의하여 수납되고 하나님 앞에 전달된다. 예배의식에서 “성령의 부르심”곧 “epiklesis”라고 불리는 것은 이 세계의 현실에 있어서 ‘깊은 데로부터의“(시130:1) 부르짖음과 동일하다. 기독교가 예배드릴 때 말하는 성령을 향한 부르심은 깊은 데로부터 외치는 성령의 이 부르짖음과 관계되어 있으며 이 부르짖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2. 성령 가운데서의 삶

A. 삶의 영

영성이란 하나님의 영안에 있는 삶과 하나님의 영과의 살아 있는 교제를 뜻한다. 성령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창조적 삶의 ‘생동력’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심령화된 삶의 ‘영성’을 생각하게 되는데 ‘영성’이란 특별한 내적 하나님의 경험들은 금욕과 결부되었으며 길거나 짧은 기간의 금식 명상과 관조의 조용한 시간과 결부되있다. 이것은 일상생활로부터의 가시적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영적 정신성이 육적 감성보다 높은 것으로 오해된다. 이것은 영성이란 말과 함께 삶을 분열시키고 삶의 생동력을 마비시키는 대립이 삶 속에 들어온다. 하나님의 축복은 삶의 생동력을 높이지 그것을 마비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생동성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심령화된  삶의 영성을 말할 수 없다.(119) 

바울에 있어서 육이란 말은 a) 피조된 세계의 영역을 가리킨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원과 비교하여 육은 허무성 가운데 있는 피조된 유한성의 세계를 말한다. 육은 우주적 개념인 동시에 인간학적 개념이다. b) 육은 지나가 버리는 시간의 영역을 가리킨다. 바울은 육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는 육과 영안에 있는 삶을 대조시키며 묵시사상적으로 말한다. 육안에 있는 삶이란 거짓된 삶, 그르쳐진 삶, 살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삶을 말한다. 죄된 것과 죄로 죽음의 영역을 가리킨다. 존재론적으로 영이나 정신의 보다 높은 단계에 비하여 존재의 보다 낮은 단계가 아니라 몸과 영과 그의 온 사회적 세계와 함께 온 인간이 빠져 있는 죄와 죽음의 장을 가리킨다. c)육은 죄와 불의와 죽음의 시간을 뜻한다. 바울이 육, 죄, 죽음을 인간을 예속하며 그의 세계을 파괴하고 인간의 세계는 물론 온 피조물을 탄식하게 하는 초인격적 세력으로 표현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지상태에 있는 신화가 아니라 묵시사상적 현실주의이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구원을 받는다. 기독교의 성령 경험은 우리를 세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125)

후기 고대세계의 기독교는 몸을 영지주의적으로 멸시하고 피안지향적 구원을 동경하면서 영과 육의 플라톤적 이원론을 받아 들였다. 하 평생 육안에 갇힌 영은 이 감옥을 그가  그 속에 살고 싶어하는 본향으로 변화될 것을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을 동경한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형태를 가진 기독교의 희망은 육과 이 땅을 벗어나서 복된 영들이 사는 저 위의 하늘로 도피하게 되기 바란다. 그 결과 창조적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삶의 유대교적이며 기독교적인 근원적 생동력은 사라지고 그 대신 크든 작든 시체에 대하여 약간 적대적이며 초감각적이며 세계로부터 등을 돌렸으며 비 정치적이며 영지주의적인 영성이 등장한다. 서구의 영성을 아우구스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의 신학은 육체와 자연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하나님의 경험을 위한 인간의  내적이며 직접적인 자기 경험을 우대하며 감성적 사회경험과 자연의 경험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자기 인식이 셰계 인식보다 더욱 확실하다. (127)

인간의 자기 신격화는 교만으로부터 일어난다. 인간은 ‘호르스트 에버하르트 리히터’가 “하나님 콤플렉스”라고 부른 것에 의하여 지배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할 수 없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이지러지고 교만한 신들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피조성과 연약함과 사멸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128)

몰트만은 새로운 역동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a)성경의 이해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로부터 구별되는 개체 인간의 영혼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의 내적인 마음 창고나 고독한 영혼의  꼭대기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나 남자들 부모나 자녀들이 참 인간적인 사귐에서 인식한다. 그것은 신비적 자기 경험이 아니라 사회적 자기 경험과 인격적 사귐의 경험이 하나님 경험의 장소이다. 사귐의 신비 없는 영혼의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혜를 통하여 그는 그의 영혼과 그의 신체 안에서 완전히 하나님이 된다. 이와 상응하는 영성은 육체를 억압하고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시키는 일을 지향할 수 없다. b)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활동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내적 경험은 유한한 영혼을 하나님의 무한성 속에서 폐기하지 않고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본질적 영원을 지향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은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며 그것을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서둘러 가게 하지 않는다.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우리의 죽을 몸이 살아남이라 표현할 수 있다. 희망하는 몸의 변용이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삶으로의 부활에 있다면 몸의 변용은 몸과 영혼을 충만케 하며 모든 삶의 영들을 때우는 삶의 영들을 깨우는 삶의 영안에서 이미 지금 경험된다.(136)

 

B. 삶에의 해방

몰트만은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가지는 첫 경험은 삶에의 측량할 수 없는 해방의 경험이라고 한다. 내적으로 이 해방은 죄책의 바리케이드로부터 삶의 에너지가 해방되며, 외적으로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억압들의 강요가 파괴되어 해방되는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삶의 새로운 긍정이 일어나며, 외적으로는 새로운 삶의 영역들이 개방된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경험과 해방의 경험은 동일한 사건의 두 가지 면이 있다. 즉, 출애굽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그의 해방으로 경험하고 그의 자유를 경험하면서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성령 가운데 그리스도는 주님으로 나타나며 성령가운데서 자유가 경험된다.(138) 이스라엘은 그의 포로생활 속에서 ‘주’를 불렀고 하나님의 해방에 대한 내적 경험들과 외적 경험들은 하나님 경험으로 이해되었다. 신약성경의 증언들에 있어서 인간이 예수와 가까이 하고 사귀면서 가지는 하나님 경험들은 ‘자유의 경험들’이다. 그것은 곧 병과 사탄에 사로잡힘으로부터의 해방, 사회적 억압과 모욕으로부터의 해방, 이 세계의 무신 적 세력들로 부터의 해방에 대한 경험들이며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바와같이 죄의 굴레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험들이다.(140)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죽음을 향한 그리스도의 길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부활을 기억하며 성찬식 현장에서 현재화되는 그리스도의 미래 속에서 그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자유를 체험한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141) 몰트만은 해방하는 믿음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로잡는 믿음이라고 했다. 즉 나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는 전통이나 습관이 나를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해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동의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극복하는”(요16:33)자유의 시작이다. 이 믿음은 정말 한 번 사로잡은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 경험이다. 그것은 불안에서 신뢰로 해방되는 경험이요, 살아있는 희망으로의 다시 태어남의 경험이요, 삶에 대한 절대적 사랑의 경험이다.(158) 기독교 신앙의 참 자유는 우주적 필연성이나 세계사적 필연성에대한 통찰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소유에 대한 자율적 지배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신적 에너지에 의한 사로잡힘과 그것에의 참여에 있다.(159) 정치적으로 자유를 주권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본래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만을 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할 수도 있고 그만 둘 수도 있는 사람이 자유롭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는 자유를 주권으로 이해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주권으로 이해한다.(162) 사회의 역사로부터  자유를 사귐으로 정의한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 자연으로부터 인간 사회의 분리, 영혼과 육체의 분열, 결국 종교적 불안이 지양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과 하나님과 다시 함께 하난가 될 때 우리는 해방을 경험한다. 사귐으로서의 자유는 인간이 자유를 오직 주권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힘의 투쟁과 계급투쟁의 역사에 역행하는 운동이다. 사귐으로서의 이 자유만이 주권으로서의 자유가 남겼으며 지금도 남기고 있는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164) 몰트만은 기독교 신앙을 통한 자유에 대한 긍정은 사귐으로서의 자유를 할 걸음 더 넘어선다고 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부활의 희망이므로 기독교의 자유에는 미래적 차원이 있다. 장차올 하나님의 미래를 지향한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에 대한 참여로 이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종교적 경외가 메시야적 희망으로서 기독교를 지배하였기 때문이다.(165) 하나님 경험으로서의 자유의 경험에 대한 주요 본문으로서 주는 영이시다.(고후3:17) 그 속에서 인간이 그의 내적 해방과 외적 해방을 경험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라 불리운다. 그 능력은 그의 내재 속에서 초월적으로 근거된다. 출애굽 경험때 이스라엘은 성령안에 있는 자유를 경험한다. ‘주’는 모든 육위에 부어질 ‘영이시다’ 영 가운데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로 경험한다. 이것은 그들이 삶을 향한 그들의 해방을 경험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166)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후3:17) 바울은 이 표현과 함께 성령의 경험과 자유의 경험을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 성령 자신이 주가 아니요, 오히려 ‘영’자신은 ‘주’라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영이다. 주의 영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살게 하는 영이 되었으며 살게 하는 영으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자유의 경험은 두 가지 하나님의 경험을 포함한다. 즉 주는 영이시고 그 영은 주의 영이다. 해방은  영과 하나님의 그리스도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활동을 계시한다.(167) 그리스도께서 영가운데 경험되는 곳에 자유가 현존한다. 인간을 사로 잡는 하나님의 편에서 주권이라 불리우는 것은 사로 잡힌 인간의 편에서 ‘자유’를 뜻하며 이 자유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노예상태와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이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 자유로운 힘, 자유로운 영역, 자유로운 장소로 표현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자유에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과 이러한 신격화를 경험하는 삶은 이 세계의 모든 무신적 관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창조자가 그것을 통하여 그의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을 보존하는 다양한 관계속에 참여한다. 자유는 주권일 뿐아니라 교통이요 삶이 거기서부터 생성하며 생동케 되는 상호교통적 관계들 안에 있는 삶이다. 상호 교통적 자유안에 있는 삶은 ‘창조적 기다림’이다.(168)

이 세 가지 차원들은 믿음을 통하여, 사랑을 통하여, 상황 속에서 해방하며, 사귐을 나누며, 

장차 오실 하나님에게 상응한다.

 

C. 삶의 칭의

불의의 세계에 어떻게 하면 생명이 다시 찾아오는가? 하나님의 정의가 권리없는 사람들에게 권리를 회복하여 주고 불의한 자들을 바르게 만들며 양자를 의로운 자로 만들때에만 이것은 가능하다. 오직 정의만이 평화를 창출한다. 바울은 인간을 구원하고 의롭게하는 복음을 보편적으로 모든 죄인에게 와서 그들을 믿음으로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한 분 하나님이다. 죄의 현실적 보편성을 그 전제로하고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죄로부터 구원의 보편성을 그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의는 실질적으로 죄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의를 이루기위해 일하시는 창조적 영의 에너지를 통해서 죄의 보편적인 권세로부터의 신적인 해방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경제적 부정의, 정치적 억압, 문화적 소외와 개인적 실망으로부터의 해방을 합법화시킨다. 죄인들의 칭의에 대한 개신교 교리와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말하는 해방신학을 종합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교정하며 서로 풍요롭게 한다.(176)

권리 없는 사람에게 권리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의의 총괄개념이다.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권리를 세우는 자는 과부와 고아들에게 권리를 세워 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 자신이 권리없는 사람들의 권리요, 힘없는 사람들의 힘이다. 하나님 자신이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과 권리없는 사람들과 ‘연대하심’으로써 그에게 권리를 세운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이미지는 예수의 영혼속에 연대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의 고난이기도 하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디트리히 본회퍼는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의 희생물에 불과하다면 그의 고난은 아무 특별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 세상의 희생물들의 하나님과의 동일화가 일어나며 이리하여 희생물들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서게 된다.(180)

죄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간에 범법자에게 머물러 있으며 그의 자긍심을 파괴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자기 정당화이거나 아니면 자기파괴이다. 사람은 불의와 폭력의 죄와 함께 살 수 없다. 속죄없이 죄로부터의 해방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범법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인 속죄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볼 때 세상 죄에 대해서 속죄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바로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며 그의 죽음이 성령을 통해 죄인들을 위한 죽음이 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에 십자가는 속죄 사건이 될 수 있으며 속죄하시는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애정이 넘치는 하나님의 계시를 피조물에게 나타낸다. 인간의 부정의와 폭력에 의해서 손상을 입은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을 참으시는 사랑이 되며 그의 진노는 피조물에 대한 애정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속죄가 어떻게 불의와 폭력을 행하는 자들에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버지의 자비로 말미암아, 아들이 대리하여 당한 하나님의 버림받음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짐을 벗게 하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일어난다. 아버지의 고통으로부터 속죄가 생성되며, 아들의 고난을 통해 속죄가 드러나며, 삶의 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의 의는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한다. 서방교회의 전통이 속죄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두고 그의 부활에 있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것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속죄개념을 통해 독일의 무거운 짐이 되는 아우슈비츠 범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189)

불의한 세상 속에서는 피해자들과 가해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드는 사회 구조적인 죄가 있다. 이러한 구조적 죄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며 일종의 초인격적 죄의 세력이라 불리울 수 있는 세계 경제질서가 생성하였다. 이러한 불의의 체제들을 ‘악의 순환들’이라 부른다. 더 이상 인간의 행위가 아닌 인간을 객관적으로 강요하는 세력으로 죄가 등장한다. 불의한 악의 구조는 인간이 악을 행하도록 강요한다.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고문과 죽음의 위협을 당한다. 구조적 죄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의 의는 창조적인 권리를 세우며 의롭게 하는 의로 경험된다. 하나님은 권리없는 사람들에게 권리를 세우며 불의한 사람들을 바로 세우기 때문에 의롭다. 그는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법을 세우며 그의 의를 통하여 구원한다. 이 의를 통하여 하나님은 참된 삶을 뜻하는 공동의 평화 곧 ‘샬롬’을 세운다. 몰트만은 의의 개념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분여적인 의 곧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는 것이라 정의한다. 각자는 그가 줄 수 있는 바를 주며, 각자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다. 둘째, 인간적 개념으로서 인간 상호간의 인정과 다른 사람들의 수납에 있다. 이 인격적 개념은 계약과 의회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대 연방주의적 개념들의 기초를 형성한다. 셋째, 자비의 법으로서 자난한 자들을 편드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인간의 법질서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평화로 인도하는 모든 법질서에 대하여 법을 창조하는 원천이다. 이것은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의 정의이다.(194)

지금까지의 칭의와 관련하여 성령은 누구신가? 부정적 의미에서 성령은 폭력자들의 부끄러운 양심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정의의 영이다. 폭력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내적 정체성을 잃어버렸으며 이러한 비인간적 행위들을 통하여 이 정체성을 보상받으려 한다. 불의한 구조는 평화를 파괴한다. 그러나 세계 역사속에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은폐되어서 인간의 불의한 구조체제를 흔들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도록 지킨다. 긍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영은 폭력의 희생자들 가운데 그들 안에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하나님의영은 범법자들 가운데 또 그들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의 속죄의 힘이다. 성령은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힘이다. 또한 권리를 세우며 의롭게하며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의이다.

 

D. 삶으로 다시 태어남

성령으로 말미암은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남’이 근대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의 중심 개념이다. 성경적 해석으로 피타고라스 학파를 통하여 구라파의 고대세계에 들어온 동양의 우주론으로부터 유래하며 세속의 시간의 다시 태어남 즉 윤회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을 뜻한다.(198) 그러나 유대교의 묵시사상을 통하여 이 개념은 변형되었다. 다시 태어남은 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을 뜻하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보여주듯 ‘새로운 삶이 시작한다’ 는 뜻이다. 다시 태어남을 우주적 새로운 탄생이라는 우주적 묵시적 사상적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시 태어남을 어제나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파악하였지 고난당하며 죽어가는 온 세계를 위한 기다림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다시 태어남의 영원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이며 다시 태어남의 수단은 풍성하게 부어지는 성령이다. 디도서 3:5-7, 벧전1:3은 그리스도론적으로 근거되어 있으며 성령론적으로 전재되고 종말론적인 지향성을 가진다고 했다. 즉, 성령의 경험은 그리스도를 현재화시키며 그 분과 함께 종말론적 미래를 현재화시킨다. 이 점에서 성령의 경험은 영원의 현재의 경험이다. 다시 태어남은 이 사멸하며 허무한 삶으로부터 사멸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다시 태어남의 순간은 영원과 시간이 만나는 순간이다.(201)

인간이 삶으로 다시 태어남과 함께 가지는 경험들은 인간의 삶이 다양한 것처럼 다양하다. 성령의 첫째 경험으로 ‘기쁨’의 경험을 말한다. 폭력과 죄책, 실수와 상처 죽음의 그늘로부터 삶의 새로운 태어남은 ‘삶의 긍정’이다. 성령안에 있는 삶은 언제나 예수의 뒤를 따름이다. 이러한 기쁨의 경험들을 우리는 성령의 경험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영이 부활의 영이라면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그 앞에 가진 희망에 의하여 사로잡힌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의 유한하고 제한된 삶은 무한한 의미를 얻는다. 하나님의 영의 초월적 깊이 와 부활의 영의 종말론적 넓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다시 태어남 즉 새롭게 되는 경험을 계속하게 된다. 박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삶과 살아 있는 희망으로 다시 태어남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경험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라질 수 없는 것인가? 그 답변은 ‘완성에 까지 이르는 성도들의 인내’로 말한다. 성령 가운데 다시 태어남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실하심 속에 존속하며 신자들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성령의 씨앗 곧 믿음이 그것으로부터 마음속에 생성하며 믿음의 모든 느낌들과 모든 확신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언제나 현존하는 성령의 씨앗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확실성이요 이 확실성은 성령의 경험에 속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경험이다.(213)

성령의 경험들은 중생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성령에 대한 독특한 이미지 곧 어머니 이미지를 암시하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 자녀들의 어머니이며 이 어머니는 여자 성령이라 불리워질 수 있다. 성령이 위로자라면 그는 어머니가 위로하는 것처럼 위로한다. 다시 태어남 혹은 새로 태어남의 은유는 아이를 낳는 신성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은 ‘해방하는 주’로 경험되지 않고 ‘삶의 원천’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위로하고 사랑의 공명과 연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현한다. 신적 가족의 삼위일체론적 이미지는 성령을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아들 앞에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삼위일체가 하나의 사귐을 형성한다면 남자들과 여자들의 참 인간적 사귐이 삼위일체에 상응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이미지는 남성 중심적 성격을 상실하며 교회의 탈남성화와 탈계급화를 가져 올 수 있다.(218)

 

E. 삶의 성화

성령의 근원적 경험이 ‘다시 태어남’이라 불릴 때 이 은유는 믿음과 인식과 지혜에 있어서의 성장을 내포한다. 믿음에 있어서의 성장은 우리의 안과 밖의 상호작용 속에 있는 삶을 경험한다. 세 가지 면에서 믿음에 있어서의 성장을 말할 수 있는데, 첫째, 성령 가운데서 영위되는 삶은 자기 편에서 삶의 연령에 따라 성령의 경험들에 대하여 영향을 준다. 기독교적 삶은 본질적으로 믿음의 표상들과 삶의 경험들이 서로 주고 받는 영향으로 형성된다. 둘째,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종말론적 지향성을 가지며 성령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미래의 위대한 동인이 되신다. 성령은 미래를 가지고 현재를 규정하며 현재 속에서 미래를 기다리게 하며 현재 속에서 미래를 약속한다. 바울은 성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일어날 것임을 보증하는 선금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은 ‘미래 세계의 능력들’이다(히6:5) 셋째, 믿음에 있어서의 성장은 양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질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삶은 자신을 표현함으로서 성장한다. 성령 가운데서의 삶도 ‘생동적으로 자기를 발전시키는 형성된 형식’이다. 기독교적 삶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언제나 그 시대와 관계되어 있고 상황적이다.(222)

성령의 종말론적 지형에서 성화의 개념도 시대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질문되고 답변되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그분에게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성화는 우리들 자신을 생명의 망 속으로 재편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화는 먼저 생태계와 제 3세계를 전제해서 생명이 거룩함과 경외를 인식해야 한다. 생명의 거룩함과 경외는 생명의 인위적인 조작과 자연의 세속화와 인간의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에 인간도 하나님에게 상응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피조세계를 거룩하게 해야하며 경외심을 갖고 땅을 대해야 한다. 오늘의 성화는 생명의 치유를 포함할 뿐 아니라 인간 생명의 자연적 연약함과 사멸성을 받아 들이는 것도 포함한다.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며 삶의 한 부분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죽음만큼 강한 사랑 속에서 죽음의 충동은 소멸한다.(236)

성화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에 있다.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다. 따라서 성화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선택하며 자기의 소유로 삼고 그것을 자기의 존재에 참여케 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성화는 칭의와 소명과 같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이다. 속되고 죄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거룩하다고 선언되며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성화되는 인간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의 형태의 새로운 주체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예수의 뒤를 따르고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생동케 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 새로운 삶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특성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함이 발전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며 이미 거룩하게 하신 사람의 마음에서 생성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통해 성화를 볼 때 그 목적을 찾을 수 있다. 그 목적은 인간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238)

하나님에 의하여 성화된 삶, 거룩한 것으로 인식되는 삶,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삶, 자신의 성화의 경험으로부터 성령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의 성화의 이 경험으로부터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자기의 이름을 가진다. 우리는 살리는 영을 느끼며 초자연적 신앙의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영을 느낀다. 거룩한 영은 삶을 거룩하게 하는 영이며,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삶에 대한 창조자의 정열을 가지고 삶을 파괴하고자 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한 그의 분노와 함께 삶을 성화한다. 창조의 보존과 삶에의 다시 태어남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성화하는 영은 살리는 영으로 경험된다. 둘째, 우리는 새로운 삶속에서 넓은 영역으로, 우리의 자유를 위한 자유스러운 장소로, 우리의 삶을 위한 삶의 영역으로, 삶의 발견을 위하여 초대하는 지평으로 경험한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면으로부터 우리가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삶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의 내재적 삶의 힘이요,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초월적 삶의 영역이다.(243)

 

3.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경험을 표현하는 은유들로 첫째, 인격적 은유들 : 주님과 어머니와 심판자로서의 성령을 설명하고 있다.(359) 성령은 주라고 다시 살리는 자, 부활의 영 즉 죄의 강요와 죽음의 폭력에서 해방됨을 말한다. 주를 해방의 경험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이름이라면 그를 남성적 지배의 특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잘못이다. 이 이름을 생명을 주는 것과 생동하게 하는 것의 이름으로 보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경험을 시리아의 교부들과 친천도르프와 같이 ‘생명의 어머니’라는 은유로 파악하였다. 살리는 성령을 ‘삶의 원천’과 ‘살리는 생명’으로 나타낸 중세 신학의 표현들은 자유와 생명은 신적인 영의 경험들에 대한 기본 요소이다. 새 생명없는 자유는 공허하고 자유없는 생명은 죽은 것이다. 자유와 새 생명은 공의와 정의로써만 유지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한 해방과 중생은 의를 창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경험과 연결된다. 구약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은 심판자에의해서 수행되는 적극적 기능들이다. 둘째, 구성적 은유들 : 에너지와 공간과 형태로서의 성령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은유들은 인격적 은유들보다 그 자체로서 신적인 영의 활동을 표현하기는 훨씬 더 부족하다. 몰트만은 히브리어의 루아흐를 가지고 에너지와 생명력으로서의 성령경험을 설명했다. 이 성령경험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몸과 영혼 모두를 새로운 생명력으로 전적으로 채운다. 이 생명력은 생명체들의 다양성 속에서 느껴지고 이 다양한 생명체들을 하나의위대한 생명 공동체 안에서 통일시킨다. 하나님 경험은 인간관계 속엥 lT는 생명에 대한 경험과 맞물려 있다. 성령에 접촉된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모든 생명체는 해당하는 삶의 공간을 갖고 있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께서 삶의 공간을 먼저 만드시고 그 안에 생명체들을 두셨다고 한다. 하늘과 땅 공기 물이 그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착취하여 인간의 공간속으로 가져왔다. 이것이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진다.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자유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의 형태는 하나님 경험 안에서 삶을 경험함으로써 형성된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의 성령으로 이미 지금 여기에서 그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369) 셋째, 활동의 은유들 : 세찬 바람과 불과 사랑으로 성령을 설명한다. 그것이 압도적으로 힘있는 그 무엇에 의해서 사로잡히고 소유되는 느낌과 우리안에서 새로운 운동의 시작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것을 활동, 운동은유라고 한다. 몰트만은 강한 바람의 근원적 의미를 구약의 여호와의 루아흐로 본다. 구약의 불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초자연적 비젼들을 동반한다. 불은 우리는 따뜻하게 하고 따뜻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본성 그 자체를 ‘소멸하는 불’로 묘사한다. 그는 불처럼 질투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이 불은 정화의 불로써 새 창조를 위한 정화를 말한다. 강한 바람과 불의이미지들은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체안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영원한 사랑에대한 경험이다. 인간적 사랑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실재적인’ 상징이 될 수 있다. (372) 넷째, 신비적 은유들 : 빛과 물과 생육을 들수 있다. 이것은 신비적 경험을 담고 있는 개념들이고 신적인 영과 인간적인 영 사이의 긴밀한 연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복음과 삶을 통해서 복음을 증언하는 삶도 빛이다. 성령도 이와 동일한 빛이시다. 빛의 신적인 원천이 창조세계 전체에 비추사 우리가 만물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인식한다. 이 빛을 ‘하나님의 이성’으로 보면서 인간의 이성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이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성령에 관하여 유출적 본성을 인정한다. 빛은 위로부터의 성령역사를 근원과 원천과 우물은 아래로부터 오는 것을 묘사한다. 빛과 물의 연합은 생명의 필연성이다. 구약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 혹은 생명의 원천이라고 부른다. 몰트만은 세례야말로 물 이미지와 성령을 잘 연결시킨다고 한다. 다산의 이미지가 빛과 물의 연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온다. 따라서 몰트만에게서 죄로 인한 환경파괴는 곧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에 대한 경험은 새로운 생명력에대한 경험이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그것의 진리성을 나타낸다. 몰트만은 빛, 물과 다산의 은유들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유기적으로 합체됨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당신안에 있는 상호 침투적 사랑의 관계를 경험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다고 한다.(378)

 

기독교의 성령 경험의 실천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삼중기도를 성립시켰다:

1. 성령의 부름(Epiklese): 대부분의 오순절 찬송가들처럼 기도는 “성령의 오심”즉 파루시아를 그의 포괄적 현존을 지향한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Veni Creator Spiritus) 이것은 마라나타 기도이다 성령의 현존에 대한 이 간구 속에서 기도자는 그의 에너지의 유입에 대하여 새로운 마음과 땅의 표면의 쇄신에 대하여 자기를 연다. 생동케하는 성령을 향한 마음 깊은 데로부터의 부름은 이미 성령의 탄식 자체이며 그 삶의 첫 표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2. 고대 기독교 질서에 의하면 성령 가운데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가 불리워 진다. 성령은 기도를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가져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짖는 자들과 감사드리는 자들이 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땅 위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다. 그들 속에서 부르며 그들의 침묵속에서 그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함께 그들을 대리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382)

3. 성령의 경험된 현존 속에서 성령에 대한 그의 은사들의 부으심과 그의 카리스마적 삶의 시여에 대한 개별적이며 특수한 간구들이 생성한다.

이리하여 성령의 인격성의 정의는‘성령 하나님의 인격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신적 생명의 사랑이며 자기를 나누어 주며, 자기를 전개하며 자기를 부어주는 현존이다.’라고 할 수 있다.(383)

우리는 성령의 활동으로부터 그의 본질을 추리할 수 있는 반명 그의 구성적 관계들로부터 그의 본질을 인식할 수도 있다. 행위로부터 출발하여 행위자에게로 역소급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인간의 경험들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초월적 근원으로 소급한다. 성령이 작용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의 에너지만을 인식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 안에 존속하는 성령의 본질 자체가 무엇인가는 인식할 수 없다. 성령의 활동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할 때, 우리는 성령의 특유의 신격성을 현존과 대칭이라고 기술하였다. (385)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구상을 살펴보면 이 구상은 무엇보다 서방교회에서 형성되었는데 그 의미는 구언의 경류적인 것이다. 그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단 한분 하나님의 자기계시 혹은 자기 전달이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성령 가운데서 일어나며 창조 안에 있는 성령의 다양한 에너지들을 통하여 확장된다. 모든 활동성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들은 언제나 중재자이고 성령은 중재이다. 아버지는 계시자이고 아들은 계시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될 수 있음이다.성령은 직접적으로 ‘아들의 영’으로 나타나며 ‘아버지의 영’으로 아들을 통하여 중재한다. 성령은 은사이지 은사의 시여자는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신적 에너지는 성령으로부터 세계속으로 흘러 나온다.(387) 필리오퀘의 개념에 의하면 성령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그는 구원사에 있어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파송되고 인간에 의하여 이렇게 경험되며 “내재적 삼위일체”에 있어서 그의 영원한 ‘나옴’은 초월적 근원으로서 인간이 경험하는 그의 ‘파송’에 상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리오퀘와 함께 성령은 단일회적으로 삼위일체의 제 3의 자리에 세워지며 아들 다음의 위치에 정립된다. 그러나 구원하는 이로써 충분히 파악될 수 없다. 이 질서는 부활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파송에 대해서는 해당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적 역사 자체에 대해서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었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에너지의 힘으로 활동한다면 그리스도는 성령을 전제하고 있으며 성령은 그리스도를 선행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성령 가운데서 온다. 이것이 공관 복음서의 영 그리스도론의 진리인데 이 진리는 역사상 바울과 요한의 그리스도론 적 성령론을 통하여 배제되어 버렸다.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질서에 있어서 “아버지-아들-성령”의 질서만을 인지하는 것을 옳지 않다. 우리는 “아버지-성령-말씀”의 질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초월적 근원”속에 있는 아들과 필리오퀘의 첨가물을 통하여 성령의 위치를 일방적으로 고정시키는 일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근원적 삼위일체’의 표상은 성령으로부터 아들이 나온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구원사에 상응하기 때문이다.(390)

몰트만은 ‘필리오퀘’를 삽입하고 아들을 통하여 성령을 고정시킨 일에 대한 비신학적 요인은 ‘교권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성령은 성직자들, 그들이 교직을 통하여 베푸는 은혜, 그들의 선포와 사목과 성례전 집행의 활동성에 불과하게 된다.(391)

공동체는 교회가 중재하는 성령의 은사를 수동적으로 받는 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고유한 주체들로 만들지 못하며 그들 자신의 삶의 주체들로 만들지도 못한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파송은 신적인 인격들 서로간의 관계들과 세계에 대한 그들의 공동관계의 총괄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오직 파송하는 자인데 그는 아들은 물론 성령도 파송한다. 아들은 단지 아버지로부터 파송될 수 있는 반면 그는 자기의 편에서 단지 성령만을 파송할 수 있으며 끝으로 성령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파송될 수 있을 뿐이다. 근원의 삼위일체는 영원부터 열려져 있는 삼위일체이다. 그들을 자기 자신과 연합하고자 한다. 창조의 구원을 위한 아들의 파송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들과의 연합을 위한 성령의 파송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392)

삼위일체의 역사적 구상을 살펴보면 수직적인 영원과 시간의 관계를 아버지의 시대 아들의 시대 성령의 시대로 구성되는 구원사적 시간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창조의 사역은 아버지에게, 세계 화해의 사역은 아들에게, 세계 성화의 사역은 성령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구원사적 관련속에 있는데, 이것은 성화의 사역은 화해의 사역을 전제하고, 두 사역들은 창조의 사역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한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를 함께 종말론적으로 지향한다. 구원사의 역사적 시대 구분과 구원사의 완성에 대한 종말론적 비젼으로 말미암아 서구의 특히 근대의 역사이해가 형성되었다.(393)

삼위일체의 성만찬적 구상은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형태의 논리적 귀결이다. 은혜가 경험될 때 감사가 시작되며 그의 사역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인식될 때 창조의 찬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구상이 복음의 선포와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종을 위한 ‘파송’에 뿌리를 내리고 있듯이 삼위일체의 이 다른 구상에 대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성만찬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하나의 잔치로 변하는 은혜받았고 행복한 삶에서 발견될 수 있다.(396)

 

Ⅶ. 몰트만의 성령론과 칼빈의 성령론의 비교

 

1. 몰트만의 성령론의 특징

첫째, 성령론은 성령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하는 경험들은 스스로 만든 것이 없고 경험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 사회적 차원, 집단적 차원, 종교적 차원을 포괄한다. 

개인적 차원의 경험으로 어느 경험이 개인적 차원에서 현재적 사건에까지 영향을 주는 경험에 대해 현재를 살아가는 삶에게 지속적인 현재가 되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적 차원으로 직접적 자기의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한 중재된 의식으로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경험은 시간적 차이를 넘어 공동체를 계속 유지시켜 나갈 수 있게 한다. 집단적 차원의 경험으로 사회가 위험에 처하거나 크게 변화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변화되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종교적 차원의 경험으로 인간이 지상의 삶과 관계하면서 자신을 개방하고 그것을 통하여 얻게 되는 모든 성취와 실망을 넘어서 개방된 미래를 지향하는 경험을 종교적 차원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여러 차원의 경험은 획일적이고 고정된 틀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다차원적으로 경험이해를 해석하여 삶의 경험으로부터 그의 성령론의 특징을 이룬다. 그래서 몰트만은 삶의 경험은 성령의 경험이며 그것이 하나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몰트만의 성령론은 내재적 초월을 강조한다. 몰트만은 내재적 초월의 개념을 통하여 삶의 경험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경험과 성령의 경험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해 나갔다. 내재적 초월의 개념은 종래의 신학이 예수의 인격성과 그의 역사적, 사회적 관계성에만 집중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경험의 우주보편적 특성을 생태계의 문제와 함께 관심을 갖으면서 확장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또 다른 방법적 측면을 제시한 것이다. 

 

2. 칼빈의 성령론

칼빈은 신앙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그 성경의 권위의 기원을 하나님께 귀속시킨다. 그러한 하나님의 기원의 근거는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시며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이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는 성경이시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기원에 대한 권위를 성령께 두며 말씀의 효력 유무에 관한 권위도 성령께로 귀속시키고 있다. 칼빈은 “그의 말씀을 성령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절대로 신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Ⅲ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에서 성취한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사역이 성령 사역의 핵심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은 자연스럽게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교회를 하나의 영적인 공동체로서 결합시키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는 일이 성령의 핵심적 사역이다. 성령의 핵심적 역할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분을 우리와 연합시키며 그리스도에게 모든 믿는 자들을 참여하게 하는 일이다. 김길성교수도 그의 책에서 개혁주의 성령론을 칼빈에게서 찾으며, 중생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택함 받은 개인에게 효력있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교의학적으로 논하는 학문이 구원론이라고 설명하며 그것이 성령론이기도 하다고 했다. 

 

3. 비교 

몰트만은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칼빈의 우주적 성령론을 주목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칼빈이 성령 안에서 창조라는 신학적 구상을 받아들인 학자중 하나라고 언급한다. “생기 있게 하는”성령은 칼빈에게 있어서 “삶의 원천”이다. 이러한 개념을 토대로 몰트만은 창조 ‘안에’ 있는 신적인 영의 임재를 우주적 거하심과 화해하는 거하심과 구원하신 거하심으로부터 구별하였다. 그는 우주적 성령론을 인간과 자연을 통합한 미래의 “하나의 세계‘를 위한 본질적인 토대로 삼으려 한다. 이러한 우주적 성령론은 성령이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사역과 성령의 구원론적 성격을 통합하여 우주 질서의 성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몰트만이 말하는 성령의 우주적 사역의 관점은 칼빈의 성령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Ⅷ. 비판적 평가

 

몰트만 신학을 발전시킬 때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이 대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신학에서 그는 고백교회에 속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독일 교회는 고백교회가 아니였기에 많은 교인들이 죄책에 시달릴 수 밖에 없음으로 이를 해결할 방법과 독일 교회가 하나되기 위한 접촉점으로 시대의 상황적 배경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은 초월적으로 오신 하나님이 그 시작임에 비해 칼 바르트는 역사 가운데 오신 성육신을 이해하는 사고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잘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종교적 경험을 그 접촉점으로해서 거꾸로된 성령론을 주장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진리를 고수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성령론에 나타난 내용을 평가해 보겠다.

 

첫째, 몰트만은 여성신학을 지지하고 있다. 여성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아버지로 성령님을 어머니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몰트만도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교부들(오리게네스등)도 동일한 주장을 한 학자들도 있었지만 개혁주의에서는 받아들여 지지 않는 내용이다. 그 신학은 매우 상황적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 반영을 삶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상황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상황적으로 생각한다.

성경 해석에서 유리한 것은 하나님은 아버지 이미지 갖을 때이고 그렇게 이해할 때 성경을 해석하기 좋은 부분이 많다. 여성 신학자의 주장은 계시의 통로가 남성이라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하고 구전으로 전달한 자들은 모두 남성이였다. 이런 점에서 여성 신학자들은 그들이 남자 계시 전달 차원에서 성경을 왜곡 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여성들을 통해 계시하면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라 주장하는데 그것은 ‘계시 수용자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성을 갖아야 될 분은 아니지만 아버지 하나님 칭호와 이미지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또한 여성 신학자들은 하나님에게 남성성 부여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부활하고 완성된 후에는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부모님이라 한다라고 하지만 개혁주의 성경계시는 그러한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을 떠나서 충분성을 갖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지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남성성을 갖는 부분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같은 또 다른 문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몰트만은 유출설을 성령론으로 끌어 들여 주장하고 있다. 몰트만은 성령을 관계론적 이기 보다는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치 주사기로 성령님을 주입함으로 주입이 가능한 것처럼 성령을 보고 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고 ‘영’이시다. 우리가 만약 성령님을 관계론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와 만나시는 성령의 통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인간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도의 견인이 되는 것이다. 몰트만은 에너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에너지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 아니라고 개혁주의는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능력을 받는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과 인간안에 ‘에너지가 채워진다’는 것은 성령을 수단화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몰트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인기를 끌 수 있는 것는 한국 교회가 선호하는 성령이해에서 몰트만의 것과 서로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경험주의적 문제점과 존재론적 이해를 갖는 점에서 몰트만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을 물질로 이해할 때 인파테이션이나 영성 개발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몰트만적 성령론에서 나올 수 있는 주장이고 올바른 개혁주의 성령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몰트만은 경험한 것만 믿고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주관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 성령하나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 아들의 뜻에 따라 행하시는 분 곧 행동자이시다. 하지만 개혁주의 입장은 행동하시는 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계신 분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은 감추어진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것이 아닌 성부와 성자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시다. 개혁주의는 성경과 계시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성령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인간의 경험이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성령론을 주장하고 성경과 계시는 상대적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종교 개혁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고 개혁주의와 정반대 방향의 주장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성경과 계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몰트만의 잘못된 성령론의 영향으로 주권성과 대표성을 성부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성령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부 성자가 감추어지고 성령님을 드러내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깨지는 것이고 오순절 교회의 문제가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하나님은 그 위치에 계신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신데 오순절 교회의 예배에서는 성령하나님을 초청(Epiklese)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성부없이 성령만 말하는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몰트만은 성령님을 종말의 영으로 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관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은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성령 강림을 경험하고 그러한 구속사적 우주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으로 성령이 오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몰트만과 개혁주의 입장은 그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단어는 같을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경험을 기준으로 보는 것은 결국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몰트만은 만인구원론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었다. 몰트만은 성령을 교회에 제한하지 않고 많은 비기독교적 인권과 사회운동도 역시 성령의 구원사역으로 이해하는 문제점을 낳고 있다. 칼빈의 예정론에 따르면 미리 택할 자과 그렇지 않을 자를 예정하셨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개혁주의 입장의 주장에 반대 될 뿐아니라 만인구원론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반대되는 주장인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을 하신다.

 

일곱째, 몰트만은 성령님을 에너지로 생각하며 많은 부분에서 에너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성령님은 신기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체이시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전2:10)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롬8:26) 우리안에 거룩한 뜻을 두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시려 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빌1:6) 성령께서는 이 처럼 지정의의 활동을 하시는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몰트만같이 성령을 특별한 물건이나 에너지처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덟째, 총체적인 성령론을 강조하다보니 개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에 있어 성령님의 개입에 관한 부분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변화된다 할지라도 개인의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세계는 이 땅위에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최상의 세계질서가 형성된다고 하여도 이 세계가 곧 하나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없다. 

 

아홉째, 몰트만은 죄가 보편화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하여 구원도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편적 칭의론을 설명하고 있다. 

 

열째, 몰트만은 성령사역으로서의 성화를 말하며도, 교회가 감당해야할 개인의 변화와 경건 훈련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Ⅸ. 나가는 글

 

WCC는 1차 제네바 회의에서 칼 바르트의 기조연설을 통하여 칼바르트의 신학을 채택하고 본훼퍼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과 같은 사회참여의 신학을 본받아 그것을 이어받아 몰트만이 그것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WCC는 제국주의 선교의 반성으로 생겨 선교의 일치를 위해 우리의 전할 것은 원시복음 즉 ‘예수는 그리스도다’로 돌아가서 각 교파를 나누는 원인이 된 교리를 제거한 것으로 교리 없는 기독교로 하나가 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기독교의 복음 메시지를 하나로 하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세계교회 협의회 선교의 목적이다. 선교지에 교파를 심지 말고 하나의 기독교를 추구하자는 취지하에 선교지에서의 교파전쟁을 없애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첫 WCC(1948)에서 바르트가 기조연설을 하고 바르트 신학을 채택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바르트신학은 보수적이고 개혁주의 입장을 취한 것일지 몰라도,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신학은 상황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몰트만도 역시 독일개혁파 소속이므로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현대의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기위해 투쟁이론을 적용하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신학은 완전히 반기독교적인 내용이다. 몰트만의 성령론은 더욱 왜곡되어 있는데, 그의 성령론은 주관주의적이고 개인 경험을 강조 한다. 즉, 자신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은 성령이 임하신 것이라고 강조한다. 몰트만 신학이 모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몰트만의 성령론은 많은 부분이 정통 교리에 어긋나 있다. 즉, 성령하나님을 에너지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며, 그 에너지에 인격을 부여한 것과 경험 중심으로 성령론을 바라봄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삼위일체가 부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편향적인 성향 때문에 깨진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와 전혀 다른 의미의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있다. 용어가 같다고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다. 또한 재림이 이미 성령을 통해 이루어 졌다고 부정하고 경험적 성령론을 주장함으로서 성령 주입설과 같은 신사도 운동과 임파테이션과 같은 은사주의 운동이 나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몰트만을 연구하면서 한국교회가 얼마나 몰트만식 종교 경험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우리의 토착 신앙과 맞물려 믿음의 뿌리부터 잘못된 성령론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결과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으로 우리자신을 비추어 보며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심에 따라 죄짓는 일을 버리고 회개하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을 무시하고 종교 경험에서 구원을 찾는 것에 집중하는 잘못된 성령론과 구원관을 갖게 되었다. 진정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성령을 기다리며, 우리를 위해 해주실 것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일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을 바로 알고,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올바른 성령론의 정립이 시급하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실히 느낀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개혁주의 전통에 있는 교회들이 성령론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칼빈의 성령론으로 그 기초를 다진 후 새롭게 창조적으로 세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1. 단행본

Moltmann, 『희망의 신학』, 전경연, 박봉랑 역, 대한기독교서회.

성령은 미래의 종말론적인 영으로 부활의 생명을 가능케하는 영이며 고난과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과 희망의 미래로 인도하는 약속의 성령이라고 주장함

 

-------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성령의 파송이 기인된다고 보고 성령의 중재 기능은 아버지와 아들사이을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까지도 감당하며 사랑을 통하여 버림받은 인류의 미래까지 개방되어진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게 한다고 주장

 

-------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전경연, 박봉랑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직접적으로 성령을 교회와 관련하여 많은 부분들을 저서 안에서 할애하였기 때문에 성령에대해 폭넓게 다루었다고 평가받는 책

 

-------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성부와 성자와의 삼위일체론적 교제 가운데 계신 성령을 소개하고 칼바르트의 삼위일체적 군주론과 칼 라너의 유일신론적인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전달을 비판한다.

 

-------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김균진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성령을 창조에 있어서 힘과 생명으로 보고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영으로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함 즉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우주적 영을 통해 그의 피조물들과 그의 창조의 사귐안에 임재하여 있다고 본 책

 

------- 『예수 그리스도의 길』,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성령을 로고수 기독론을 보충하는 성령 기독론을 이야기 하면서 분리속에서 결합시키는 자로 보았다. 성령을 예수의 삶의 역사 안에서 그의 수난 역사에까지 동참한 신적인 주체로 보고 설명한 책

 

------- 『오시는 하나님』,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종말론에 관한 내용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양하게 서술한 책

 

------- 『생명의 샘』, 이신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에 무관심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또한 저자 몰트만의 경험을 통해 설명한 책

 

------- 『생명의 영』, 김균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성령을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구분하면서 그 속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독자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 책

 

-------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여정』, 김균진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과 몰트만이 주장하는 희망신학과 해방신학, 여성신학의 내용들을 정리하며 서술한 책

 

간하배. 『현대신학 해설』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8. 

해방신학, 소망신학, 존재의 신학등 현대 신학의 주요 운동들을 설명하는 안내서

 

김길성. 『개혁신앙과 교회』.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1.

교회와 개혁신앙에 대해 10개의 단원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 박형룡박사와 박아론박사의 신학과 메이천의 신학에 대해 소개한 책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현대 독일신학의 종교개혁신학적 조명』.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현대 주요 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한 도서

 

김의환. 『현대신학 개설』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5.

유럽신학과 미국신학, 비구미신학으로 나누어서 현대신학을 정리한 도서

 

김명용. 『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 사상』.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교회의 문제와 세상과 역사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결방안 제시하는 책

 

----- 『현대의 도전과 오늘의 조직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바르트의 신학을 소개하며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를 설명하는 책

 

이형기.『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비추어 본 몰트만의 신학』.서울: 한들출판사, 2006. 

모더니즘시대와 포스트모더니즘시대를 설명하고 그 시대의 기독교신학의 대응할 내용들을 설명한 책

 

----- “세계교회협의회와 한국개신교 신학전통에 나타난 성령이해에 대한 비교연구”. 『신학사상. 76집』. 한국신학연구소, 1992.

 

----- 『알기 쉽게 간추린 몰트만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몰트만 신학을 소개하고 그의 저서들을 알기 쉽게 요약한 책

 

맹용길. 『현대신학 사상』서울: 성광문화사, 1988.

쉴라이에르 마허나 바르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주요 사상을 살펴본 글들을 모아 놓은 책

 

현요한. 『성령, 그 다양한 얼굴』.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5.

부제는 ‘하나의 통전적 패러다임을 향하여’ 성령의 다양한 모습과 건저하고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를 살펴본 저서

 

2. 논문집

김도훈. “만유구원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만유구원론의 출발점과 성서적 근거에 대한 비판.” 『장신논단』 제30집 (2007. 12)

김명용. “몰트만의 만유구원론과 구원론의 새로운 지평.”『장신논단』 제20집 (2000. 12)

______. “몰트만 신학의 공헌과 논쟁점.”『장신논단』 제20집 (2003. 12)

______. “몰트만의 영성신학” 『장신논단』 제18집 (2002.12)

이문균. “성령과 생명: 생태학적 성령 이해.”『생명의 영성: 조직신학논총』 제11집 (2004. 4)

라준석. “몰트만의 성령론.” 장신대학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1993.

하용수. “몰트만의 생명의 성령론 연구.” 한신대학교 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1997.

 

 

3. 학술논문

송재천. “몰트만의 성령론으로 본 이 시대의 성령이해.” 미간행 신학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2005.

조남정. “생태 위기 극복을 위한 몰트만의 성령론 연구.” 미간행 신학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2006.

서철원. “세계교회 협의회의 신학의 근본 문제-2010 가을 학술대회 논문집” (서울: 개혁주의협회, 2010), 62.

박현국. “칼빈의 성령론” 석사학위 논문, 총신대학교대학원, 2005.

 

4. 인터넷 자료

http://www.sul9191.com/imrti/2003-5

www.veritas.kr.

 

 

“기독신문” 제1797(통권2117호) 2010년12월1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