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성령론 이해와 개혁신학적 비평 -박만규
몰트만의 성령론 이해와 개혁신학적 비평 -박만규
2014-02-21 02:26:33
[ 몰트만의 성령론 이해와 개혁신학적 비평 ]
I. 서론
구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는 기독론을 마친 다음 즉시 구원의 서정 첫 번째인 ‘소명’ 문제를 언급한다. 즉 과거에는 성령에 대해서는 신론에서 그것도 삼위일체와 더불어 논했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다루면서 성령론을 따로 논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대부분의 경우 구원론 부분에서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론을 논하기 이전에 성령에 대해 논한다. 문제는 성령론에 대한 오해이다.
오늘날 '성령론'이라고 말할 때, 성령의 은사에 관계된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이것은 성령론의 근거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령론의 근거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성령의 발원은 아버지로 부터 발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했고 또한 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론이 하나님과의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신론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기독론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삼위일체론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위에 세워진 교회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교회론이 된다. 이렇게 성령론은 신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로 체계적으로 다루어 지지 못하였음을 보게 된다.
동방교회에 있어는 성령이 예배 의식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신학적으로도 비교적 체계화 되었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성령론은 신론과 기독론에 밀려 뒷전으로 서자 취급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왜 성령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 졌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을 더 이상 간과할 수없는 현실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공동체로서의 성숙한 교회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세기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시각을 감안할 때 그 원인을 성령과 연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부족과 성령에 대한 회심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삶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비록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공동체적 생활에 지장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러나 교회 성장이 성령운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성령론은 현대 신앙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인 됨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하나님의 주된 일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 시키고 하나님의 자유에로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신앙인과 교회의 거듭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과 교회의 연합, 교회와 교회들 사이에 연합, 교회와 신학의 연합에도 이르게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인들에게 끊임없이 생수와 만나를 공급하여하고, 신앙인은 교회의 지체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의 ‘일면적인 이해’나 ‘삶과의 분리’에서 벗어난 통찰력 있는 성령론이 필요하다. 아니 개혁주의 성령론을 좀 더 교회의 현장에서 더욱 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필자가 몰트만을 연구함에 있어 흥미로운 발견한 사실 하나는 몰트만 역시 바르트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는 점이다. 추측컨대 몇 년 전 그의 한국 방문에서 기인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 온 몰트만은 그래도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 강연을 했고, 한 복음주의 신앙서적에 그와의 인터뷰 내용까지 나온 것을 보고 많은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복음주의자로 오해하는 대표적 이유는 몰트만의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늘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십자가, 부활 등을 말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복음주의 신학자도 더욱이 보수주의 신학자가 아닌, 한 자유주의 신학자에 불과함을 역설하고 싶다. 몰트만은 한국 민중신학의 사상적 배경 및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몰트만의 최근 저작인 「생명의 영」(Der Geist der Leben, 1991)을 중심으로 기타 다른 저작들 속에 나타나는 성령론을 비교하며 그의 주장을 정리하고, 비평하며 결론으로 개혁주의 성령론을 통한 바른 성령론에 대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몰트만의 생애 및 사상 발달 단계
1-1 몰트만의 생애
김영한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바르트 이후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라고 말한다. 또한 목창균은 오늘날 생종하고 있는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로 평가한다. 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독일 함부르크(Hamburg)의 자유스러운 세속적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튜빙겐 대학에 정교수로 초빙되어 1994년 2월 12일 은퇴 할 때까지 제직했다. 그는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전공하기를 원했다. 그의 우상은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성서보다 괴테, 쉴러의 문학 작품을 더 즐겨 읽었다. 하지만 17살이 되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 투입되어 전쟁을 수행하던 그는 영국의 '고모라(Gomora) 작전'에 의해 함부르크가 엄청난 화염 속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도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듬해에 전쟁 포로가 되어 벨기에와 스코틀랜드에서 3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삶의 확실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던 중에 한 군목이 건네준 성서를 읽어가던 그는 성서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절망과 자포자기를 이겨내는 생명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허락한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신학 공부의 문을 두드렸다.
이와 같은 전쟁 체험은 일평생 그의 신학이 연대적, 현실적 특징을 갖도록 방향을 지워 주었다. 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상황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집단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그는 자각하게 된 것이다. 찢기고 죽임을 당한 수많은 인간들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그는 결코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나 개인적 관심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석방된 후에 1952년 괴팅엔(Göttinge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새로운 신학 방향은 준 인물들은 오트 베버(Otto Weber), 한스 요아킴 이반트(Hans J.Iwand), 게르하르트 본 라트, 에른스트 볼트(Ernst Wolf), 케제만(Ernst Kasemann) 등이다.
몰트만은 논문 지도교수인 오토 베버로부터 칼빈주의와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오토베버의 종말론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것을 떠나 현실적이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지금도 실현되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적 배경을 통하여 몰트만의 종말론은 현실 세계를 바로 교시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아킴 이반트로부터 몰트만은 헤겔의 신학적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요아킴 이반트는 헤겔이 쓴 “신앙과 지식”에서 ‘하나님의 죽음’의 개념에서 신학적인 착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몰트만의 학문적 배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부재의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학적인 배후에는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현실 체험이 밑바탕이 된다. 그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가 될 수 있으며 다스리는 분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고 그것이 몰트만 신학의 출발점인 것이다.
헤겔의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받은 몰트만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흐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삼위일체성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바르트의 신학이 그의 지도교수였던 이반트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몰트만으로 이어진 것이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부터 1996년에 출판된『오시는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줄곧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우주적 선교의 종말론적인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종말론적 관점은 베버와 롤러(A. A. van Ruler)와 호켄딕(J. C. Hoekendijk)의 ‘묵시적 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본회퍼(Bonhoeffer)의 작품들과 울프를 통하여 세속사회 안에서의 교회와 사회 윤리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6년 동안 독일 브레먼(Bremen)부근에 있는 바서호르스트(Wasserhorst)교회와 브레먼 대학교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그는 한스 발터 볼프 교수의 노력으로 뷔페탈 신학대학의 교수가 된다. 여기서 그는 1960년대 종말론적 신학을 주도했던 또 한 사람인 ‘볼트 하르스트 펀넨베르크’만난다. 여기서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과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시작된다.
1959년 여름휴가 때 몰트만의 스위스에서 유대 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블로흐(Ernst Bloch)의『희망의 철학』을 읽고 싶은 감명을 받아 신학이 잃어버린 ‘희망’이라는 명제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3년 지금의 그의 명성을 얻게 한 저서 『희망의 신학』을 출판한다. 그 후에도 몰트만은 블로흐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그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유대전통과 막시즘(Marxianbad)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67년 몰트만은 마르엔바드(Marianbad)에서 열린 기독교 신학자들과 막시스트의 대화에 참여하여 카톨릭 신학자 메츠(J. B. Mestz)와 관계를 갖게 된다. 1961년 에른스트 볼트의 초빙으로 그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 연구지『개신교 신학』지의 편집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 후 뷔페탈(Wuppertal) 신과 대학교수로 1963년까지 기독교 교리사를 가르쳤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본(Bonn)대학교 신학부 초빙교수로 지냈다. 1967년 이후로 1994년 은퇴할 때까지 튀빙겐 대학교에서 봉직하였고, 1967년과 1968년 사이에 미국 듀크 대학교 초빙교수로 일하였으며 이때 그의 십자가 신학을 가지고 『희망의 신학』을 심화시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편찬한다.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이탈리아, 일본 등 세계 수 많은 대학의 초빙강사로 가르쳤다. 이러한 세계 각국의 상황 등에 대한 경험은 그의 저서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저작들은 저자 자신의 독일 상황 밖의 다른 전통과 신학들 (미국 혹인신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한국 민중 신학, 남아프리카의 카이로스 신학, 로마니아의 정교회 신학 등)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1970년 카톨릭 교회의 신학지 ‘Concilium'의 실행위원으로 한스 큉(H. kung)교수와 함께 연구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 신학』지의 책임 편집자로, 개신교 신학회 의장으로 활동한다. 『희망의 신학』이후 출간된 많은 저서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신학도 및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
1-2 몰트만 신학사상의 발달 단계
몰트만은 이 전의 많은 저서들이 있지만 특히 1964년 출판된 『희망의 신학』을 통해 그는 세계적으로 ‘희망의 신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희망의 신학』이래 몰트만은 계속해서 종말론적인 방향을 가지고 ‘희망’이라는 중심 주제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몰트만의 사상은 크게 세 단계의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첫째는 종말론을 재발견하게 된다. 이는 그의 대표적 저작 『희망의 신학』이 나오기까지의 시기로 구분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중심부, 곧 신학의 핵심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인간 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자유케하는 신적인 약속이다
그는 전통 신학에서 단지 부록 정도로 취급하던 종말론, 좀 더 구체적으로 종말론적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통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인 하나님을 증거한다. 몰트만은 종말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기대된 것과 그것에 의해 움직여진 희망을 포함한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부록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이다.
이는 볼트만의 실존적 신학과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의 차원을 재발견한 것이다. 희망의 개념은 우리의 현 삶에 대한 부푼 희망의 공감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란 인간과 역사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에 대하여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종말론적인 희망의 빛에 역조명 받아 현실 세계를 창조적으로 변혁시켜 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는 단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유토피아적 환상이 아니라 현재를 창조하는 역동적 능력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정말로 가능해진 미래이며 희망은 이에 대한 가능하고 개방적인 열정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경향을 그의 전 신학과정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낸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이해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특징은 주로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쓰여진 작품들 안에서 드러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3)에서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내포한 변증법적 신한과 삼위일체적 신 이해를 발전시킨다. 『희망의 신학』이 십자가에서의 부활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초점이 있다. 이 초점이 변화는 종말론적인 미래로 앞서가던 신학이 다시 죽음 속으로 퇴보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는 이 변화를『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 『희망의 신학』을 더 구체화시키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현실의 저항과 변혁으로 결부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눈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한, 수치 속에서 죽어간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계신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진리로 돌리게 할 수 있다고 몰트만은 확신했다.
몰트만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고난 받는 인격이다. 신적인 고난은 하나님의 자유라는 본성에 근거한다. 이 자유에 의해 하나님은 자기를 제한하며 자신 안에 유한함의 여지인 세계창조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과 그들이 만들어져가는 역사 안에서 함께 고난당한다. 그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해석했고, 정치적 권세의 우상, 율법주의적 교권 체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버림받은 상태를 폭로하고 죽어간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무감정한 하나님 대신에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격정(Passion), 하나님의 수난을 내세웠다. 그는 본회퍼처럼 "오직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아들의 고난을 통해 인류의 고난에 참여하시고 이에 항거하시는 사랑의 하나님만이 성서적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고난은 십자가상에서 나타나며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불리와 일치라는 변증법을 통하여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을 구성한다.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하나님의 어떤 영원한 내적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사건에 있을 뿐이다.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변증법적인 사랑, 고난, 연합으로 이해된다.
『성경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에서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에서 해명된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역할이 적절히 강조되지 못했음을 깨닫고, 늘 부차적으로 인식되었던 성령의 사역과 성령을 하나의 신적 주체로 인정함이다. 또한 성령론을 교회 갱신의 실천 이념과 결합하려고 했다. 교회의 전통과 제도가 점점 더 적합성을 상실하는 위기 속에서 교회갱신의 기회를 간파한 그는, 새로운 성령 체험이 없다면 교회 갱신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성령론의 관점에서 성례론, 예배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새롭게 제시했다. 그리고 교회의 미래는 제도적, 목회적 교회가 아니라 자기 결단과 능동적 참여에 근거한 자발적 공동체에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런 확신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공동체 운동에서 아래로부터 나오는 갱신의 힘을 발견한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몰트만은 성령의 사역은 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에 집중되지만 그 기본은 사랑 안에서 세상을 포용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 공동체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하나님 공동체의 기반으로서 교회는 개인적 삼위일체 경험에서 벗어나 사회와 관계한다.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정치적 상황 속에 처한 교회들과의 에큐메니칼한 운동에 불을 붙인다. 이는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파송된 성령의 경험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부, 성자와 동등한 신적 주체로서의 성령강조는 온전한 삼위일체 관계를 서술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에서 몰트만은 기독교적 신론을 고대의 실체론적 형의상학의 틀과 초월적 주체성의 근대 형이상학의 틀에서 해방시킨다. 그리고 사귐 과정과 관계성의 형이상학적 틀에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전개시킨다. 본 저서는 “신학을 위한 조직 산학적 기여”라는 커다란 집필 계획 하에 그는 더욱 상호일치적 사귐과 그 안에 존중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에 몰두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일련의 계획 하에 첫 작품,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삼위일체적 관계를 사회적 관계로 풀어간다. 사람들을 위한 아들의 희생에서 솟아나는 상호일치를 통한 하나됨을 의미한다.
마지막 단계는 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의 그의 저서를 포함한다. 이 단계는 삶 속에서 신적 주체인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몰트만의 관심은 두드러지게 성령론에 집중된다. 성령의 빛 안에서 현 지구상의 위기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철저하게 역사에 기초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에 대한 생태학적인 이해와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와 그의 살리는 영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내재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몰트만의 삶의 위기의식은 생태계(생태학적 창조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여『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은 그의 저서 가운데 조직신학에 기여한 작품으로 이 저서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던 과거 개신교 신학의 지평을 하나님 창조 전체를 향한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성령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는 분’이며 그의 영은 모든 피조몰들 ‘안에’있다. 몰트만은 머리말에서 본 저서가 ‘성령론적 창조론’ 혹은 ‘창조론적 성령론’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1990)에서 몰트만은 하나님과 세계 역사 과정 속에서 파악되는 역동적인 그리스도에 대해, 메시아적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론을 서술한다. 따라서 제목의 의미는 단순히 그리스도론의 범주에 속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의 범주에 속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행해야 할 윤리적인 범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어 신체성과 자연에 대한 의미에 중점을 둠으로 인간 역사를 자연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틀의 조건 속에 통합시킨다.
성령의 중요성과 실체에 대한 그의 사상은『생명의 영』이라는 저서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바르트, 부르너, 불트만, 고가르덴의 변증법적인 신학이 ‘위로부터’의 신학만을 추구했으므로 실패했다고 확신하고 ‘아래로부터’ 인간에게 다가오는 ‘생명의 영’을 이야기 한다. 그는 오늘날 위기 상황들, 특히 생태학적 위기를 바라보면서 성령론적 창조론을 절실히 요청한다. 성령을 모든 피조물 안에서 경험되는 관계적 사귐으로 이해한다면 피조물은 이미 ‘하나님의 흔적’들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과 억압당하던 신체성은 치아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랑의 삼위일체적 관계성 안으로 수용된다고 그는 말한다.
『오시는 하나님』(1995년)에서 몰트만은 전통적, 현대적 종말론을 정리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하였으며, 그 동안 간과되었던 개인의 종말론까지 방대하게 통합적 종말론을 다루었다. 여기서 그는 종말은 언제나 참된 시작임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우주적 내주(쉐히나)를 특별히 강조한다.『희망의 신학』으로부터 폭포수처럼 떨어진 그의 종말론적 신학은 수많은 신학의 들판을 적시며 도도히 흐르다가, 드디어 장엄한 대양 속에서 그 목표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밖에도 몰트만이 쓴 책으로는『정치신학. 정치윤리』,『과학과 지혜』,『신학의 방법과 형식』,『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생명의 샘』,『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등이 있다. 최근 단행본으로는『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환상』(G. Müller-Fahrenholz)과『몰트만의 신학』(R. Bauckham),『몰트만과 그의 신학』등이 출판되었다.
II. 몰트만의 성령론
1. 몰트만의 성령론 분류
몰트만의 성령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주된 자료는 그의 저서들이다. 그 중에서도 『생명의 영』(Der Geist des Lebens)이 주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는 이전 저서들의 조직신학적 관점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전의 저서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참고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성령론을 다음 세 가지 단계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는 삶(경험)의 이해이다. 경험은 몰트만 신학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둘째는 성령론의 내적 근거로 삼위일체론적 성령이해와 셋째는 외적 동인으로서 삶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는 생명의 영으로서의 성령이해이다.
1-1. 삶의 이해- 하나님 경험
몰트만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데, 먼저 경험에서 출발한다. 또한 그는 『생명의 영』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의 성령론을 선포의 객관적 말씀과 교회의 기관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성령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힘으로서 그의 성령론의 출발점 역시 경험으로부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성령의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귐과 친구관계와 사랑을 확신시키는 삶의 경험 안에서, 삶의 경험과 함께, 또 삶의 경험아래서,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경험’은 그리스도를 회상하는 일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미래를 기다리는 일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회상과 기다림의 조화 속에서 성령의 경험은 독특하고 그 무엇을 통하여 대치될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이리하여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을 전제하며 종말론을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으로 인도하며 종말론이 성령론을 완성시킨다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은 경험의 다양하고 상이한 차원들을 4가지로 다루고 있으며, 근대의 경험적 학문들이 경험의 방법화(Methodisierung)시키고 주관화(Subjektivierung) 시킨 것을 분석한다. 또한 몰트만은 ‘내재적 초월’ 이란 개념과 함께 모든 사물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그는 삶의 경험은 곧 하나님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1-2 경험의 차원들
몰트만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차원을 네 가지로 말한다. 그것은 첫째 경험의 개인적 차원, 둘째 경험의 사회적 차원, 셋째 경험의 집단적 차원, 넷째 경험의 종교적 차원들이다. 이 네 가지 차원의 경험들에 대하여 고찰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즉 ‘몰트만이 경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몰트만은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깊은 영향을 받은 ‘원초적 삶의 경험들(삶, 사랑, 죽음)’을 말한다. 몰트만은 “경험은 오성(Verstand)이 그의 활동을 실천함에 있어서 얻은 것의 전체를 포괄한다.” 라는 요수아(J. P. Jossua)의 견해를 반대한다. 몰트만 은 이렇게 비판한다.
“요수아는 인격의 핵 안에 있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지각을 경험이라 생각하며, 의식과 오성이 이 핵을 형성하며, 이 핵 속에서 특수한 지각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우리에 대한 경험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의 경우 의식이나 오성을 가지고 무엇을 경험하지 않으며, 의식적 의도에 따라 경험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리의 감각을 가지고 지각한다.
몰트만의 주장은 경험을 단지 ‘의식의 삶’과 ‘오성의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며, 이 관계들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너무 좁고 자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경험은 먼저 ‘감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모든 ‘감각적 지각’을 ‘경험’ 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즉 손을 씻거나 이를 닦는 일과 규칙적이고 습관적인 활동을 우리는 분명히 지각하고 실천하지만 그러한 것 모두가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몰트만은 오성과 의식의 차원이전에 ‘감각의 차원’에서 원초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깊은 영향을 주는 ‘심층적인 경험들’을 ‘경험’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만들었다(gemacht)’라고 말할 수 없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인데 첫째는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러한 경험들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그 경험들은 아직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몰트만은 이러한 “근원적 경험은 하나의 일어남(Widerfahrnis)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험의 차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1 경험의 개인적 차원
이러한 경험은 먼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삶의 역사는 우리에게 삶, 사랑, 죽음과 같은 원초적 경험들과 같은 감각적 종류의 지각들로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 경험들의 주체의 중심은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내가 이 경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이 나로부터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경험은 사건의 지각에 있어서 ‘외적 관련’을 가지며 자기 변화의 지각에 있어서 ‘내적 관련’을 가진다. 이처럼 개인적 차원의 자기경험은 외적 경험들에게 매우 의존한다는 것이다.
1-2-2 경험의 사회적 차원
우리의 자기 경험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 속에 얽혀 있으며 이 그물에 의존한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가지고 우리를 보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우리 자신을 경험한다. 따라서 우리의 자기경험은 우리의 경험적 자기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나의 중재된 의식이며 결코 “직접적 자기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의존하며,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에게 의존하는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은 오직 상호주체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1-2-3 경험의 집단적 차원
‘집단적 경험들’은 인격적 관계 속에 있는 공동의 경험과 세대적 경험을 넘어서서, 외적 기관들과 영적 태도에서 확실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이러한 경험들은 개인들의 자기경험을 대개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형성하며 한 사회의 집단적 태도와 집단적 자기이해들을 익명으로 조정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같은 집단적 경험들은 정상적인 시간에 있어서는 의식되지 않는다. 사회가 위협에 처해있거나 크게 변화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게 규정됨으로써 그것을 따랐던 이 모델들을 의식하게 되며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이처럼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의 이러한 집단적 모델들은 “밖에”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안에”있는 사람들에게 경험될 수 있고 의식되어진다고 본다.
1-2-3 경험의 종교적 차원
몰트만은 경험의 마지막 차원으로 종교적 차원을 말한다. 이것은 사물들, 사건들, 인간들을 넘어서서 개방된 미래를 지향하는 ‘넘치는 에너지’가 경험의 이 차원에 속한다. 우리가 종교적인 것을 사물과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경험들 안에서, 이 경험들과 함께, 이 경험들 아래에서 현존하는 그 무엇으로 이해할 경우, 우리는 경험의 이 마지막 차원을 삶의 경험의 ‘종교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차원 속에서 삶의 상이한 경험들에 대한 전제들이 포괄되어 있다. 그런데 이 종교적 차원은 그 자체로서 인지되지 않고 언제나 경험들 자체에서만 인지된다. 예를 들어 맘몬이 자기 하나님인 자는 하나님에게 자기의 마음을 둔 사람과는 다른 삶의 경험들을 가진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처럼 경험에 대하여 다차원적으로 분석함으로서 근대의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도식화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몰트만의 이러한 경험이해는 몰트만이 그의 성령론을 “삶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바, 그의 신학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삶의 경험”과 관련하여서 “내재적 초월”개념을 새롭게 제시 한다. 그의 내재적 초월 개념은 이후 그의 성령론의 두 가지 축이 되는 “삼위일체론적 신학”과 “생명신학”을 이끌어 가는 기둥이 된다.
1-3 내재적 초월
이제 몰트만은 모든 사물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경험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인가? 그는 경험의 근대적 구성의 도식에 의하면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들은 하나님은 대상적으로 인식될 수 없으며 경험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비대상적인 자기경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경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가능해진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즉 몰트만은 근대 주체성의 철학이 야기시킨 자연의 자연과학적-기술적 지배는 자연을 개방하기도 했지만 자연을 파괴했다고 주장하며 경험의 모든 대상들 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좁은 주객도식을 포기하고 상호 주체성의 사회적 도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즉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상호주체성의 도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의 내재 안에서도 초월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대의 자기의식과의 좁은 관계를 포기하고 초월을 자기경험 속에서만 발견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내재적 초월’의 개념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일어나거나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경험은 초월적인 내면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의 경험’은 인간 주체의 자기 경험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너의 경험과 공동체적 경험과 자연의 경험에 있어서도 구성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험은 모든 일상의 세계 경험 ‘안에서’, 그것과 ‘함께’, 그것 ‘아래에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자기의 방법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몰트만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내재적 초월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며, 모든 것들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창조의 능력과 삶의 원천으로 이해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이해에 따르면 이 하나님 경험은 그의 창조의 화려한 다양성 속에 있는 창조자 하나님의 현존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의 경험을 하나님 경험과 결합할 수 있고, “생명에의 경외”는 하나님 경외 안으로 수용되며, 자연의 경외는 하나님 경외의 한 부분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물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몰트만의 ‘내재적 초월’이란 개념은 인간의 자기의식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 했던 근대의 주객도식을 극복하고, 모든 삶과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1-4 성령의 역사적 경험
몰트만은 “역사적 하나님 경험”을 정의하기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한 역사라는 매개체 안에서 그리고 시간적 인지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현실을 이러한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생성하는 역사로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출애굽과 계약과 약속된 땅의 하나님은 역사적 회상을 통하여 세계의 창조자요, 인간을 위한 자유의 주님으로 현재를 결정하는 분으로 현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언제나 회상(Erinnerung)과 기다림(Erwartung) 사이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회상과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은 경험되는 하나님의 현재를 하나의 역사적 현재로 만든다. 여기서 현재란 ‘언제나 지금’(nunc stans) 곧 영원한 지금을 말하며, 영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1-4-1 영 - 하나님의 삶의 힘
몰트만은 구약성서의 ruah를 하나님의 삶의 힘으로 이해한다. ruah는 언제나 무언가 살아있는 것, 움직이는 것을 뜻하였고, 인간과 동물 속에 있는 생명의 숨과 생명의 힘을 뜻하였다.(전12:7, 3:21) 또한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ruah의 창조적 에너지로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하나님의 삶의 힘으로서의 ruah는 이스라엘 초기 사사들과 왕들에게 부어지며, 이는 선택받은 자의 지속적 은사가 됨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집단적 은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로 하여금 백성들 안에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집단적 영의 은사들 외에 개인적이며 ‘내적인 영의 경험’도 있다. 시편 51편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문헌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향하심으로 이해된다. 즉 하나님이 그의 영을 거두심은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돌리시며 숨기시는 것과 같고, 그것은 인간의 죽음을 뜻하는 동시에 피조물들의 죽음을 뜻한다. 이같이 하나님의 삶의 힘으로서 ruah는 개인적인 면이나 집단적인 면에서 그의 백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현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1-4-2 하나님의 영과 그의 쉐히나
기독교 신학자들은 ‘야훼의 루아하’를 “하나님의 현존의 사건”과 “신적 현존”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적인 사용과는 관계될 수 없다고 몰트만은 지적하며, 그것을 정말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쉐히나(Schechina), 곧 하나님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상에 있는 피조물들과 그들의 역사의 특수한 자리와 특수한 시간에 내려와서 거하신다는 표상에 해당한다고 이해한다. ‘쉐히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현존이다. 하나님이 원하였고 약속한 특수한 장소와 특수한 시간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특히 쉐히나는 이스라엘의 기쁨과 고난을 함께 나누며, 그것은 신적인 이스라엘의 고난의 동반자로 나타난다.
1-4-3 성령의 메시아적 기다림
이러한 과거의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며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그 경험들은 우리에게 필연적인 현재의 기다림과 함께 희망되어 진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성전파괴에 대한 실망 때로부터 이스라엘 안에서 이같은 메시아적 희망이 생성되었다고 본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근거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은 두 가지 이유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장차 올 메시야적 구원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행위”로 기다려진다(사43:19)는 것과 둘째로 메시야는 하나님의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에는 물론 자연 속에도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은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명과 생명의 모든 사귐의 다시 태어남으로 인도하는데, 영의 오심으로부터 기대되는 하나님의 경험을 몰트만은 4가지로 제시한다.
1.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창조 안에 있는 “모든 육”과 관련된다.
2.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이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인간 실존의 깊이 안에서 활동한다.
3. 역사적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영의 “쉼”과 “거하심”으로 표상된다.
4. 더 이상 계시와 전통을 통하여 중재되지 않고 ‘직접적’이며,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보는 것에 근거되어 있다.
필자는 이제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역사적으로 일어난 영의 경험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제 필자는 신약성경의 증언들을 근거로 삼위일체적 영의 경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삼위일체론적 성령이해
몰트만은 그가 참혹한 포로생활을 경험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곧 하나님을 체험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고난 가운데 숨어계신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배경과 연관을 이룬다. 그 또한 이러한 삶의 현실체험이 그의 삼위일체론의 배경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은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콘스탄티노플 제 1차 공의회(381년) 이래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몰트만은 이러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접근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의 배후에 숨어있는 일신론과 군주신론의 이단성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삼위일체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초기에는 아리우스주의나 사벨리안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삼위일체의 교리에 철학적 개념들을 도입하였으나, 이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는 아들의 삼위일체적 사건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에 있었다. 즉 그는 철학적 사변으로 삼위일체론이 설명되는 것을 부정하였다. 초대교회가 기독론적 삼위일체론의 형성배경의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당시에 등장한 이단들의 양상은 잘못 이해된 기독론 때문이었다. 유대주의적 신관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었다. 이것을 일신론, 군주신론이라 부른다. 2세기 말엽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서 성부의 우선권을 강조하는 군주신론(monarchianism)이 나타났다. 이들의 주장은 한 하나님에 대한 세 위격을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이어서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고 사모사타 바울(Paul of Samosata)이 이론으로 정립한 동적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과 이와 유사한 양자설(Adoptionism)이 등장했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이들 이단들을 반응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그는 일신론과 군주신론이 한 사실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삼위일체론이 일신론적으로 흐르게 된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즉 한 로고스, 한 인류라고 하는 우주적인 단일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어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신론적 기독론은 오늘날 교회의 가장 강력한 내적 위험요소가 되었다.
몰트만은 신약성경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구조를 기술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역사’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의 역사’로 이야기 하며, 이 역사를 영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역사로서 선포하는 ‘영-그리스도론’을 기술한다. 몰트만은 신자들의 영의 경험을 기술하면서 그리스도와 영 사이의 ‘상호교환적 관계’를 말한다. 즉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의 삼위일체성을 말한다. 아울러 몰트만은 종말론적 성령론의 형식 하에 ‘영과 새 창조의 관계’를 말한다. 먼저 ‘영 그리스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2-1 영 그리스도 : 예수의 영성
몰트만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는 시간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예수 혼자 시작하지 않고 성령과 함께 시작한다. 예수의 세례사건에 있어서 성령이 예수 위에 “내려오심”, 그 위에 “머뭄” 등의 표현들은 하나님의 쉐히나로서의 영에 대한 이해를 시사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영원한 영의 자기제한과 자기 낮추심,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삶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심을 말한다. 이같은 하나님의 거하심은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예수 안에서 엄청나게 넘치도록 한다. 영의 힘 안에서, 또한 영의 힘 속에서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고, 죄인들을 영접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함께 ‘고난의 동반자’가 된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죽음 속으로 간다. 성령은 그의 ‘쉐히나’를 통하여 예수의 운명에 자기를 묶는다. 그러나 그는 예수와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골고다에서 성령은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고난당한다. 그러나 그는 아들과 함께 죽지는 않는다.
몰트만은 “성령론적 관점에서 보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지,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두 가지 상이한 행위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즉 성령론적 은유로 말할 때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성령의 출생과 고통’과 ‘출생의 기쁨’으로, 식물과 씨앗과 성장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 속에서 일어난 성령과 함께 고난당하심 속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넘어서 이미 그의 미래를 인식할 수 있다.
2-2 그리스도의 영 : 공동체의 영성
몰트만은 ‘예수의 성령 경험’으로서 그가 당한 죽음의 다른 면 곧 성령을 통한 그의 부활과 성령 가운데 있는 그의 생동적 현존을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예수의’ 인격적 ‘성령 경험’과 ‘공동체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의 경험’을 구분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원시 기독교의 증언들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성령의 종말적, 새롭게 창조하는 활동의 첫 열매로 인식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령으로부터, 성령 안에서 살며, 신적인 생명의 영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상호간의 이러한 내적 거하심의 순환은 그리스도께서 “살리는 영”이 되며,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는 귀결에 이른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고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롬 8:9), ‘아들의 영’(갈 4:6), ‘믿음의 영’(고후 4:13)이 되며, 그리스도가 성령의 주체가 되는 사실을 말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성령은 아들 위에 머물렀고, 그를 그의 수난 속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스스로 함께 고난당하는 관계로 이끌려 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연민이라면 영원한 아버지도 아들과 함께 말할 수 없이 고난당하는 관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에 까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고난당하심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능케 한다. 성령은 새로운 ‘죽은 자들로부터의 생명’을 아들에게 주기 위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끌기 때문에 이 끝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이 되며, 그리스도는 성령의 주체가 된다. 그가 성령을 보내며(요 16:7), 그가 성령을 내어 쉰다(요 20:22), 제자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 공동체가 경험한 성령은 그리스데 의하여 형성된다. 성령을 통하여 그들은 구원하며 살리는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요한복음의 고별사를 보면 이러한 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령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성령의 담지자에서 성령의 파송자로, 혹은 그리스도의 떠나심과 성령의 오심에로의 흡사 자동적 전환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오히려 이 과정은 삼위일체적이며 ‘아버지 하나님’을 통한 새로운 시작과 함께 일어난다. 요14:26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곧 협조자.” 요15:26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로부터’ 보낼 협조자. 아버지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면.” 따라서 성령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성령의 실존의 원인은 아버지요, 그의 오심의 원인은 아들에게 있다.
2-3 성령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의 성령의 삼위일체적 상관성
몰트만은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의 삼중관계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삼위일체적 상호활동에 대하여 말한다. 먼저, 몰트만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신앙고백이 필리오크베(filioque)를 삽입함으로서, 성령은 그의 근원에서부터 아들 뒤에 오고 아들이 성령을 선행하는 것으로 위치되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성령의 경험을 고려하면서, 그 속에서 인식되는 삼위일체의 구조를 질문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을 규정하며, 아들 위에 머물며 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성령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그리고 성령으로부터’(a patre spirituque)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다면적 상호작용 가운데 있는 성령과 아들 그리스도 사이에 상호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이리하여 아들과 성령은 서로 병행하여 있거나 앞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아들 없는 성령은 생각될 수 없으며 성령 없는 아들은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론과 그리스도론의 상호관계는 기독교 신학의 기본 원칙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는 다음과같은 조건하에 충족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us)이 포기되고, ‘열광주의적 성령론’이 회피되며, 그리스도론은 물론 성령론도 양자를 포괄하는 삼위일체의 구조의 틀 안에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삼위일체의 구조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나 성령 중심주의에 반하여 하나님 중심주의를 보존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몰트만은 서방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몰트만은 “서방교회의 전통은 공관복음서의 성령론적 그리스도론과 바울과 요한의 그리스도론적 성령론 사이의 상호관계를 인정하는 것을 오랫동안 무시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전통은 카파도기아 신학자들 이후 성령론적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의 '상호교환성‘(Wechseitigkeit)을 강조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벌콥(Hendrikus Berkhof)의 저서『성령론』(1964)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벌콥은 “우리는 신약에서 말하는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 있음을 쉽게 이해한다. 첫 번째 방법은 공관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성령을 예수보다 더 신성한 우선권을 가진 분으로 그리고 예수는 성령의 사자로 표현한다...그러나 요한과 바울에서는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의 또 다른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는 성령을 지닌 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령을 보내신 분이다. 심지어 바울은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두 관점이 서로 상반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호 보완적이다.
몰트만은 벌콥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지만 그곳에서 머물러있지 않고 더 발전시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벌콥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은 영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영 사이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기능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단순한 상호 관계가 아니라 삼위일체적 상관성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생명의 영으로서의 성령 이해
3-1 성령 안에서의 삶
몰트만은 “개신교 신학은 물론 카톨릭 신학과 경건성은 성령을 단지 ‘구원의 영’으로 파악하며, 그 장소는 교회이며, 이 성령은 인간에게 영혼의 축복을 확산시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런 개인주의적인 경향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는 기독교의 플라톤화이고 둘째는 ‘필리오케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경향과는 달리 몰트만은 ‘삶의 해방’, ‘칭의’, ‘다시 태어남’, ‘삶의 성화’, ‘삶의 카리스마적 힘들’을 ‘성령 안에 있는 삶’으로 총체적인 의미에서 언급하고 있다.
3-1-1 삶에의 해방
몰트만은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가지는 첫 경험은 삶으로의 측량할 수 없는 해방의 경험이다.”라고 말한다. 내적으로 이 해방은 죄책의 바리케이트로부터 삶의 에너지가 해방되며, 외적으로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억압들의 강요가 파괴되는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자. 또한 내적으로는 삶의 새로운 긍정이 일어나며, 외적으로는 새로운 삶의 영역들이 개방된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 경험과 해방의 경험은 동일한 사건의 두 가지 면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그의 해방으로 경험하며 그의 자유를 경험하면서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출애굽에 있어서 모세가 호렙산에서 가진 하나님 경험은(출3:1이하) 그의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그들을 노예생활과 불안의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의 자유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경험들과 기독교의 경험들에 의하면, 하나님 경험과 자유의 경험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양자는 거의 동의어로 들린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몰트만은 또 하나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증언들에 있어서의 하나님 경험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증언들에 있어서도 인간이 예수의 가까우심과 사귐 속에서 가지는 하나님 경험들은 자유의 경험들이다. 곧 병과 사탄에 사로잡힘으로부터의 해방, 사회적 억압과 모욕으로부터의 해방, “이 세계의 무신적 세력들”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경험들이며,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바와 같이 죄의 굴레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험들(롬 7,8장)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해방자”이다.라고 몰트만은 말한다. 요컨데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은 역사적 독재자 파라오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자이고, 신약성서에서 그는 역사의 독재, 곧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자이다. 전자에서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위한 해방자이고, 후자에서 그는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사람들의 새 창조를 위한 해방자이다. 전자에서 하나님 경험은 엑소두스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부활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억압과 체념으로부터 일어나서 자기의 자유를 쟁취하며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경험을 더 넓은 지평들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은 해방하는 성령의 경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기 않으며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요한복음의 예수는 말하며, 따라서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께서 성령 가운데 함께 활동하심으로 생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몰트만은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린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거운 짐과 억압들로부터 분명히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만, 그것과 결부된 희생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은 독립적이기를 원하지만 이로써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짊어질 수밖에 없는 책임을 두려워한다. 즉 그들은 자유를 찾지만 그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책임을 가지기에 위험성을 가지며 부자유도 위험성은 자신의 삶에 대한 체념과 포기의 위험성을 가지는 것으로 말한다.
자유롭게 되는 대신 위험하게 있느냐 아니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대신 부자유하게 되느냐의 양자택일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 경험에 대한 성서의 증언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결단은 명백하다 : 삶을 사랑하는 자는 자유를 사랑하며, 자유를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경악과 모든 내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3-1-2 삶으로 해방하는 성령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기독교의 경험의 세 가지 차원에서 삶의 참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한다. 그것은 첫째 해방시키는 믿음 : 주체성으로의 자유, 둘째 해방시키는 사랑 : 사귐으로의 자유, 셋째 해방시키는 희망 : 미래로의 자유이다.
첫째 ‘해방하는 믿음’이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로잡는 믿음이다.” 즉 나를 자유케하는 진리는 전통이나 습관이 나를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해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동의하는 진리이다. 인격적 신앙으로서의 믿음으로 인한 경험은 불안에서 신뢰로 해방되는 경험이요, 살아 있는 희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요, 삶에 절대적 사랑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에 있어서 ‘자유에로의 해방’이 경험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해방시키는 사랑 : 사귐으로의 자유’는 자유를 주권으로 이해하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만을 알며, 예로부터 알려진 통치의 원리였다. 이같이 자유가 ‘주권’을 뜻하는 한, 모든 것은 분리되고 고립되어야 하며 개체화되고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가 ‘사귐’을 뜻할 때, 우리는 모든 분리된 사물들의 결합을 경험한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과 하나님과 다시 함께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사귐으로서의 자유는 인간이 자유를 오직 주권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힘의 투쟁과 계급투쟁의 역사에 역행하는 운동인 것이다. 이처럼 해방하는 자유는 사귐으로서의 자유이다.
셋째로 ‘해방시키는 희망 : 미래로의 자유’는 사귐으로서의 자유를 한 걸음 더 넘어선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부활의 희망인데, 이 희망의 빛 속에 있는 자유는 ‘가능한 것에 대한 창조적 정열’이다. 이것은 사랑과 같이 단지 현존하는 사람들의 사귐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를, 장차 올 하나님의 미래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예기치 못한 가능성들을 실현하고자 하며 앞을 향하여 정열적으로 나아간다. 이같은 자유의 미래적 차원은 오랫동안 간과되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에 대한 참여로 이해되지 않았고, 단순히 메시야적 희망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믿음 가운데 있는 자유는 가능한 것이 실현되는 영역 속에서 한계를 깨뜨리는 창조성이다. 몰트만은 이제 우리의 눈을 확대하기를 바란다. 과거보다 더 큰 미래, 인간의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단지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보다 더 큰 자신의 세계 안에 있는 자유! 이처럼 역사 안에서 우리를 언제나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은 보다 더 큰 미래에 대한 희망인 것이다. 이것은 삶 속에 있는 희망의 넘침이요 역사 안에 있는 미래의 잉여가치이다.
3-2 삶의 칭의
몰트만에 의하면 부인될 수 있고 그러므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특질이다. 그리고 부인되고 거부되는 삶은 죽음이다. 그런데 한편의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기며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몰트만은 하나님의 정의가 권리 없는 사람들에게 권리를 회복하여 주고 불의한 자들을 바르게 만들며 양자를 의로운 자로 만들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즉 몰트만의 삶의 칭의라고 하는 것은 두 편의 사람들을 그들의 방법으로 바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다.
몰트만은 종교개혁의 전통적 칭의론의 몇 가지 문제점을 성령론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바울의 칭의론에 근거한다. 바울의 칭의론에 전제는 죄의 '보편성'(Universalitat)에 있다. 이러한 보편적 죄의 개념은 너무도 확산되어 죄 개념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은 이제까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죄 개념의 다른 면은 공관복음서에 아주 분명히 나타난다. 공관복음서는 “죄인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불의 속에서 사는 “죄인들과 세리들”을 말한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그러므로 율법의 테두리 밖에서 권리없이 살아가는 자들, 가난한 자들, 고향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다른 한편의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을 나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소유”이다. 이 소유는 돈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다.
바울과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전제하는 보편적 죄 개념의 문제점은 집단적 죄의 개념은 구체적 죄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며, 구체적인 죄를 변명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와같은 칭의론이 오늘날 억압된 사람들의 해방의 신학과 대립될 필요는 없다고 몰트만은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수정하고 풍요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완전한 종교개혁적 칭의론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권리 없는 자들과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해방의 신학이다. 이제까지의 개신교는 희생자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택”을 보지 못했다. 개신교는 시선을 언제나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구조적 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하였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먼저 ‘희생자들을 위하여 권리를 세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몰트만은 개신교 신학이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와 “권리를 세우는” 의의 아나로기아를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엄격히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몰트만은 지적한다. 바울에게 죄인의 칭의가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의의 계시로 되는 것처럼, 구약성서에서는 ‘권리 없는 사람에게 권리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 나타난다. 이같은 권리를 세우는 의도 ‘확정하는 의’가 아니고 ‘창조적 의’이다.
몰트만은 또한 이사야 53장에서 ‘연대성의 그리스도론’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저항할 수 없어서 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편에 서시며, 약한 자들과 상처를 당할 수 있는 자들을 그의 신적 보호 아래 두신다. 이같은 하나님의 편드심을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골 1:24)은 가난한 사람들과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고난, 민중과 연약한 피조물들의 고난이기도 하다.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운명 속에서 그들 자신의 운명을 발견한다. 고난당하며, 괴롭힘을 당하며, 살해된 그리스도는 범죄자들의 편에 있지 않고 희생자들의 편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수많은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을 우리의 형제와 자매로 삼아야 한다. 글의 말미에 몰트만은 이 땅의 저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세계심판에 있어서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몰트만은 ‘범법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 에 대하여 말한다. 몰트만은 폭력은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의 삶 역시 파괴한다고 이야기 한다. 즉 폭력을 행하는 자는 비인간적이며 불의하게 되고, 희생물은 비인간화되고 권리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근거로 전통적 칭의론을 ‘불의한 자들의 칭의’로 발전시켜 나간다. 몰트만에 의하면 죄는 그것이 개인적이든 아니면 집단적이든 간에 범법자에게 머물러 있으며 그의 자긍심을 파괴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자기 정당화이거나 아니면 자기 파괴이다. 비록 그가 벌을 당하지 않는다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부정한 자기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자기의 삶을 망치게 된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속죄하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자로 나타난다. 속죄 없이는 죄로부터의 해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난 그 자신이 죄인이 아닌 자만이 속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속죄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신적 가능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책을 하나님의 고난으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인간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실현된다. 몰트만은 이러한 신적 속죄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신적 고난이요, 그의 죽음은 죽음에 속한 모든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대리하여 당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위하여 속죄하는 ‘하나님의 대리인 행위’는 ”영원한 사랑의 힘”이다. 따라서 불의와 폭력을 행하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속죄는 아버지의 자비로 말미암아 아들이 대리하여 당한 하나님의 버림받음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짐을 벗게 하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일어난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 된다. 그의 의는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한다.
이제 몰트만은 ‘구조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희생자들과 범법자들을 만드는 불의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상황들과 경제적 구조들에 관심을 갖는다. 몰트만의 주장에 의하면 “구조적 죄”는 독립되어진 죄이면, 더 이상 인상의 행위로서의 죄가 아니라 흡사 인간을 객관적으로 강요하는 세력으로서의 죄이다. 구조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 구조에 의하여 인간이 결정된다.
이러한 “구조적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는 범법자들과 향유자들을 불의한 자로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회개하는 믿음으로 해방한다. 자기의 의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을 속에서 인식하는 사람은 이 불의한 세계에 대하여 죽기 시작한다. 그는 억압하는 체계의 요구와 상에 대하여 “죽은”것과 같다. 그는 더 이상 구조적 폭력행위의 범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편에 서며 범법자들과 작별을 고한다.
위의 전제들을 바탕으로 몰트만은 ‘성령을 심판자로(심판자 성령)’서 이야기한다. 즉 성령은, ‘폭력자들의 부끄러운 양심’속에서 자기를 드러 내는 정의의 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폭력의 희생자들 가운데,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사귐을 자기 자신도 파괴하는 인간의 공동체를 고치기 위하여 그들을 유지하는 ‘신적 사랑’이 된다. 결국 성령은 귄리를 세우며 의롭게 하며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의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자연과의 지속적인 사귐이 가능하다. 몰트만은 이런 관점에서 성령을 ‘삶의 칭의’라고 부른다.
결론적으로 성령 안에서 삶은 다시 사랑받을 가치를 얻으며 성령 안에서 사람들은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령 안에서 삶의 관련들은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 세우는 성령은 이쪽 편의 사람들과 저쪽 편의 사람들, 그들 모두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긍정이다.
3-3 삶으로 다시 태어남
몰트만 종교개혁자들이 크게 생각지 않았던 중세의 문제를 성령의 경험 속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다시 태어남”의 개념은 여기서 “다시 태어나다”라는 말은 윤회설이 아니다. 옛 세계로의 “회복”이나 “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삶으로부터의 ‘새로운’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칭의가 “죄의 용서”,“하나님 없는 자들의 칭”와 같이 과거의 극복을 지향한 것이라면, “다시 태어남”의 표상들은 새로운 삶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즉 이 표상들은 형성되어 가는 삶, 자연 속의 봄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 말은 우주적-묵시사상적 성격을 가진다. 묵시사상가들은 세계의 이러한 우주적 새로운 탄생은 사람의 아들의 오심과 그의 영원한 의로부터 온다고 기다린다(단7장). 몰트만은 이러한 우주적-묵시사상적 성격을 종교개혁자들도 유의하지 않았고 경건주의 부흥운동의 신학자들도 유의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다시 태어남’을 언제나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파악하여 단지 영혼의 내적인 자기경험으로 파악하였지, 고난당하며 죽어가는 온 세계를 위한 기다림으로는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의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 없는 자의 ‘칭의’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상속권을 얻게 됨으로 말미암은 살아있는 희망으로 ‘다시 태어남’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의 칭의는 성령의 첫 사역이다. 딛 3:5-7에 의하면 다시 태어남은 성령의 경험에 근거하며, 하나님 없는 자의 칭의와 영원한 삶에 대한 상속권을 얻게 되는 것보다 앞선다. 벧전 1:3에 의하면 다시 태어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오며 인간의 희망으로 하여금 영원한 삶을 지향케 한다. 성령의 경험은 그리스도를, 실로 부활하신 그 분을 현재화시키며, 그분과 함께 종말론적 미래를 현재화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성령의 경험은 영원의 현재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남”은 이 사멸하며 허무한 삶으로부터 사멸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몰트만은 다시 태어남 속에 일어나는 성령의 첫째 경험은 ‘기쁨’의 경험이라 말한다. 삶의 새로운 태어남은 엄청난 삶의 긍정이다. 우리의 삶의 영들은 새롭게 깨어난다. 우리는 그의 영 가운데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다시 삶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우리를 철저히 관통하며 우리에게 영적으로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평화를 준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를 구약성경 적으로 ‘샬롬’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또한 둘째로, 몰트만은 이러한 성령의 경험들이 “태어남”과 “새로-태어남”으로 파악될 때, 성령은 초기 기독교의 남성 중심의 상을 버리고 ‘어머니의 상’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성령은 하나님 자녀들의 “어머니”이며, 따라서 이 어머니는 “여자 성령”이라 불리워 질 수 있다. 성령이 “위로자”라면, 그는 “어머니가 위로하는” 것처럼 위로한다. 다시 ‘태어남’ 혹은 ‘새로 태어남’의 은유는 아이를 낳는 신성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해방하는 주”로 경험되지 않고 “삶의 원천”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아이를 낳다, 양육하다, 보호하다, 위로하다, 사랑의 공명과 연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들이라 말할 수 있다.
3-4 삶의 성화
몰트만은 성령의 근원적 경험이 “다시 태어남”이라 불리올 때, 이 은유는 믿음과 인식과 지혜에 있어서의 “성장”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이 “성장”을 개인주의적으로 또 직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와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 적용해 나가고자 한다. 우리는 안과 밖의 상호작용 속에 있는 삶을 경험한다.
몰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성화에 대하여 루터는 칭의와 성화는 내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루터에 반하여 웨슬리는 우리의 삶의 결험에 있어서 성화를 칭의의 필연적 결과로 보았다. 하지만 몰트만에게 있어서 “오늘의 성화”는 먼저 ‘생명의 거룩함’과 창조의 신적 비밀을 회복하고 생명의 인위적 조작과 자연의 세속화와 인간의 폭력을 통한 세계의 파괴에 반하여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땅은 “주인 없는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창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땅을 대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여야하며 “오늘의 성화”는 현대 사회가 인간을 그것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더욱 더 분리시키는 생명의 체계 속에 자기를 통합시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몰트만에게 있어서 ‘오늘의 성화’는 ‘생명의 일치와 조화’이다. 그것은 인간 생명의 자연적 연약함과 사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음으로 몰트만은 성화의 근거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그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선택하며 자기의 소유로 삼고 그것을 자기의 존재에 참여케 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리는 말씀에 대한 삶의 답변에 있어서 신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성화의 수동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삶의 형태의 새로운 ‘주체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속한 사회의 에토스에 따라 살지 않고, 언제나 더 강하게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성화는 ‘예수의 뒤를 따름’이요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생동케 됨을 말한다. 따라서 성화의 목적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있다.
하지만 몰트만에게 있어서 삶의 성화는 삶의 종교적-도덕적 조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되고 의롭게 되며, 사랑받고 긍정되고 더욱 더 생동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전체적인 의미에서 영성은 새로운 생동성을 말하여, 삶을 종교적-인륜적으로 제한하고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있는 삶의 즐거움을 뜻한다. 따라서 성화하는 영은 살리는 영으로 경험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에 맡겨지는 삶, 성령을 오게 하는 삶을 말한다.
정리하자면, “거룩한 영”은 삶을 거룩하게 하는 영이며,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삶에 대한 창조자의 정열을 가지고, 삶을 파괴하고자 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한 그의 분노와 함께 삶을 성화한다. 멸망의 변두리에서 창조의 보존과 삶에의 다시 태어남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성화하는 영은 살리는 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3-5 성령의 사귐
3-5-1 성령의 경험 - 사귐의 경험
고대 기독교의 축복 양식에 보면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고후13:13). 왜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그의 사귐에 있다고 생각되는가? 이에 대해 몰트만은 “사귐”이 성령 자신의 본질로 표현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이나 저것을 나누어 줄 뿐 아니라 신앙하는 사람들과의 사귐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준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의 특질이라면, 성령의 “사귐”은 성령의 “은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자기 자신과의 사귐을 회복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으로부터 나오며, 그 속에서 그가 신자들에게 등장하는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그의 사귐에 상응하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삼위일체적 사귐’이다. 성령의 사귐은 ‘인격적 사귐’으로서 삼위일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성령과 기독교’ 라는 표제를 통하여 성령과 “사귐”의 결합은 인간들과 다른 피조물들 속에 일어나는 사귐의 경험 속에 성령의 경험을 가져온다“ 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사귐의 경험은 삶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성령의 사귐”은 “살리는 영”에 대한 하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성령 하나님은 자신과의 사귐 속에서 그의 창조적 에너지를 통하여 사귐의 관계들의 그물을 형성하는데, 이 관계들 속에서 삶이 생성하고 꽃 피며, 열매 맺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성령의 사귐”은 사귐을 세우는 성령의 활동성이다. 즉 삶의 사귐이 생성하는 곳에, 하나님의 살리는 영과의 사귐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귐”은 해당하는 피조물들에 의하여 결합시키는 ‘사랑’으로 경험되는 동시에, 모든 것을 그의 특징과 함께 자기 자신으로 오게 하는 ‘자유’로 경험된다. 사랑은 사귐을 세우고, 자유는 자신의 특징을 가진 개체들의 활동영역을 열어 준다. 살리는 성령의 사귐을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을 유의해야 한다. 자유 없는 사랑은 개체의 다양성을 질식시키고, 사랑 없는 자유는 공동의 것과 결합하는 것을 파괴한다. 이것은 개체들을 통합시키는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형성하며, 이와 동시에 통합되어 있는 것을 세분화시키고 ‘통일성 안에서 다양성’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귐’이라 부를 수 있다.
3-5-1 사귐의 과정
몰트만은 ‘사귐의 과정’을 기술하면서 “성령의 사귐”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인간의 인격들과 인간의 사귐들을 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사귐들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사귐들은 자연의 사귐들의 생태적 체계 안에 자리 잡혀 있으며 그들과 함께 에너지를 교환함으로써 살기 때문이다. 부분들의 모임에서 새로운 공동체들이 생성하며, 이 공동체들은 새로운 교통의 구조와 자신의 조직화 원리를 가진 또다시 새로운 전체들을 이룬다. 전체는 부분들의 공동체와의 총화보다 언제나 더 크다. 여기서는 활동의 영역들이 세분화된다. 이 과정은 언제나 더 풍요로운 개체성의 형성을 가져오며, 언제나 더 풍요로운 사회적 관계들이 형성되고, 자유로운 행동을 위한 활동영역이 꾸준히 확대되는 것이다. 이같은 확대는 더 복합적인 삶의 체계들의 형성과 세분화와 함께 교통의 관계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공동체화는 단일화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성들이 더 풍요롭게 되며 세분화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창조자가 아니라 우주의 영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의 창조적 영은 우주의 역동성이요 살아 움직이는 것의 세분화되는 관계들 안에서 사귐을 형성하는 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삶을 창조하는 성령은 ‘공동체적 영’이라고 우리는 앞에서 말하였다. 이 영을 통하여 의식과 육체는 인간의 형태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 이 영을 통하여 인간의 문화 체계들은 땅의 자연적 생명의 체계들과 결합되어 있다. 삶의 이 다양한 사귐의 형식들은 그의 의식 속에서 서로 관계될 수 있다. 즉 개인의 의식을 사회적 의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생태계적 의식으로, 지상적 의식을 우주적 의식으로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하나의 새로운, 상대적으로 총체적인 삶의 조직형식이 된다. 이리하여 인간의 의식은 삶을 위하여 봉사하며, 삶을 상승시킨다.
4. 정리 및 평가
4-1 정리
몰트만은 성령의 중개하시는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내재적 초월성"(immanent transcendenc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모든 피조물 안에 성령의 현존은 "사물 안에 내재하는 초월성이요, 유한한 것 속에 무한한 것이요, 변화하는 것 속에 영원한 것이요, 유변적인 것 속에 항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 체험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상호 침투(reciprocal perichoresis)을 경험한다. 그것은 서로 안에 상호 내재하는 교제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 체험은 인간 영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과 온 누리의 생명의 체험과도 관련된다." 그는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 상황 속에서 신학은 전통적인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우주적 넓이로까지 그 지평을 확장시키는 포괄적인 신학으로 나가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한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이란 저서에서 그는 창조계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이란 관점에서 출발하는 성령론적 창조론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였다. 몰트만은 이러한 창조에 대한 성령론적인 개념만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통합 할 수 있다고 확신했는데, 이는 성령을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에 상호 내재하는 중재 원리로 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하나님과 세상사이의 "상호 침투적 관계" (the perichoretic relationship)를 강조하며, 이 관계는 "삼위 하나님 안의 원형적인 상호 내재와 침투"와 상응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상호 내재는 창조의 종말론적 목표이며 운명이다. 종말은 곧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그의 만유안의 완전한 내재하심과 함께 도래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몰트만은 삼위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긴밀하게 상호작용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화해와 갱신 사역을 통하여 온 우주를 당신에게 이끄시는 종말론적 삼위일체론의 역동적인 비전을 실현해 보려 하였다. 곧 몰트만은 성령론적인 종말론의 구조 속에서 삼위일체론을 우주적 해방을 향하여 끊임없이 진행되는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틀에 엮어 보려 한 것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중재 원리로서 성령의 개념을 도입함으로 한편으로는 바르트의 초월주의적 경향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창조 안에 내재하심을 부각시켰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르트의 신학에 대한 반발로 "초월적 하나님의 죽음" 을 외치는 세속 신학의 극단적 내재 주의에 대처하여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새롭고 창조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공간적인 축이 아니라 시간적인 축에 위치시켜 초월하신 하나님을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앞서 계신 하나님"으로 새롭게 이해하였으며, 더 나아가 성령론을 미래와 현재를 중재하는 원리로 도입함으로 미래의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면서도 현재의 하나님의 내재성을 동시에 강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론으로 재조정된 그의 미래 중심적 신학은 이제 초월하신 하나님을 "우리 앞서 계신 하나님"으로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몰트만은 그의 신학의 성령론적 전환을 통하여 세상 속의 하나님의 내재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종말적인 갱신 사역을 부각시킴으로 바르트의 경직된 기독론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성령론적 신학으로의 도약을 꾀한 것이다.
4-2 평가
몰트만은 종말론적 성령론에 대한 기발한 착상과 혁신적인 접근법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미래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신약 종말론의 "이미"(already) 와 "아직도"(Not-yet)의 아름다운 조화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몰트만의 신학은 "우리 앞서 계신 하나님", "아직(not-yet) 오실 하나님"에 대한 결정적인 편향성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이미(already) 계신 하나님"의 본질론 적인 확실성에 대한 신학적 선언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곧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확실성이 "이미" 오신 하나님의 계시보다 우선적으로 "아직도" 오실 하나님의 종말적 계시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봄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을 약화시킨 것이다.
목창균의 말처럼 신약성경의 종말론은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실존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몰트만은 미래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사이의 긴장을, 균형을 깨뜨렸다 할 수 있다. 미래적인 종말론이 동시에 현재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현재적 종말론이 동시에 미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온 우주가 성령의 갱신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종말론적 연합으로 이끌림을 받는 종말론적 삼위일체론의 비전을 실현하려던 몰트만의 노력은 점차 하나님의 만유내재적관념(Panentheism)으로 치우침으로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현대 신학 지속적인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학이 안고 있는 취약점으로 인해 바르트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말씀의 신학"을 너머 "세계의 신학"으로 나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던 몰트만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몰트만에 있어서 ‘우주의 영’으로서의 성령에 대한 사고는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사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미래의 현존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신론은 ‘종말론적이며, 삼위일체적인 만유재신론’의 성경을 갖는다. 결국 몰트만에 있어서 ’새 창조‘는 인간과 자연을 포괄하는 피조물 전체에서 일어나므로 ’만유구원론‘이라는 종말론적 지평을 열수 있게 된 것이다. 과연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사역은 믿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자연과 더불어, 모든 인간에게도 일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필자는 몰트만이 고전적인 유신론으로부터 한층 더 멀어지게 되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융해되어 있다고 보는 범신론으로 더 나아가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몰트만의 삼위일체의 교리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의 축소판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 하나의 질문은 몰트만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고이다. 그는 성령은 교회의 범주를 넘어선다. 성령은 묶이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의 뉘앙스가 마치 ‘기독교적인 사귐’을 위해서 노력하는 많은 사회운동단체의 활동도 성령의 사역의 한 부분으로 간주 될 수 있다는 인상이다. 실제로 몰트만은 공동체에 이르는 길에는 말씀과 성례전과 사귐을 통하여 중재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길과, 공동체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협동을 통한 길이라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성령께서 기독교적인 ‘사귐의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는 그런 사역에 관여한다면 그들은 라너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III. 결론과 적용
몰트만의 성령론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개혁주의 성령론의 가치와 중요성가 부각되지 못한 아쉬움이 들었다. 몰트만의 성령론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마도 성령론의 범위의 확장일 것이다. 물론 몰트만 자신도 자신의 성령론을 ‘총체적 성령론’이라 칭한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 교의학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논의가 ‘구원론’이나 ‘교회론’의 범주를 넘지 못한데서 즉 성령의 활동을 개인구원 및 교회의 범주를 넘지 못한 데서 오는 평가일 것이다. 반면에 몰트만은 ‘세계사적’ ‘우주적 차원’이라는 용어를 동원 하여 그의 이론을 확대 전개함으로서 ‘총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의 성령론의 이론을 ‘생태학적 파괴’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한다거나 하나님의 영의 개념을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계까지 확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확장은 몰트만에 의해서 처음 시도 된 것은 아니다. 실천적인 부분에서 좀 덜 적용되었지만 이미 칼빈이나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서 주장되어 온 이론이다.
칼빈의 신학을 이어 받은 개혁파 교회에는 성령과 말씀이 매우 잘 조화되어 있다. 칼빈의 성령론은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 비정적으로 된 인간을 회복시키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초점이 놓여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초자연적인 은사를 주어 별난 종교 경험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목표하신 그 원래의 기능을 발휘하기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성령과 말씀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다음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은사들을 잘 연마하여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하는데 사용될 수 있도록 하며,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성령 안에서 기독교 문화를 이룩하도록 만든다. 이런 교회는 이 세상에 재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단순한 정(政) 종(宗) 분리를 주장하여 이원론적인 삶을 영위하지 않고 정치권에 바른 의견을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녀, 대중문화 측면에서도 세속문화와 타협하거나 수도원적인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젊은 세대들이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창달한다.
요컨대, 개혁파 신학은 종교개혁신학의 구원론을 전제하고 자연만물까지 시야를 넓혀 우주론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장하고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 허무에 빠진 자연만물의 구원까지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개혁주의 성령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벌코프는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부여하며, 창조사역을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성령은 창조물을 장식하며 그 모든 요소들이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령론 안에 몰트만의 일그러진 성령론이 아니라 바른 총체적 성령론이 제시되어 있다. 성도들의 신앙의 삶에 적용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필자가 몰트만의 성령론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점은 아무리 이론이 좋고 논리가 좋아도 그 배경과 출발이 ‘성경적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이 추구해야 할 성령론은 성경에 근거하고, 삼위일체적 구조 속에 기독론과 성령론적 관점의 균형을 보존하며, 우선적으로 교회론적이며 구원론적이나,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을 갱신하며 종말을 향해 뻗어 가는 성령 사역의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신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대 신학 속에 나타나는 성령론은 성경적 관점과 조화될 수 없는 철학적 범주들로부터 도출된 보편적 사상 체계를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이든 간에 이 시대의 모든 신학을 개혁주의 관점으로 성령론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언급하고 싶다. 신학의 모든 분야 - 삼위일체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 성화론, 선교론, 종말론 등에 새로운 성령의 활력소가 주입되어 우리 신학이 좀 더 다이내믹하고 역동적인 삼위일체적 신학으로 새로워 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바탕 위에 세워진 바른 개혁 신학으로의 발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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