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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이창범

메르시어 2023. 5. 3. 11:19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이창범

2014-02-21 02:23:05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연구와 비판

 

과목명: 현대 신학자 연구

            교수명:  김길성 교수님

            과  정: 박사과정(조직신학)

            학  번:  2010311006

            이  름:   이   창   범

 

1. 들어가면서

 

2. 두 학자의 신학적 활동

 (1) 몰트만의 신학적 활동  

 (2)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활동

 

3. 삼위일체에 대한 관점들의 고찰 

 

 (1)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입장 연구

  A. 몰트만의 입장

  B. 판넨베르크의 입장 

  C. 두 입장들의 비교

 

 (2) 삼위일체 활동에 대한 입장 연구

  A. 몰트만의 입장

  B. 판넨베르크의 입장 

  C. 두 입장들의 비교

 

4. 신학적 입장들의 비판 

 

 (1) 몰트만에 대한 비판 

 (2) 판넨베르크에 대한 비판

 

 

5. 나가면서

 

 

 

 

 

1. 들어가면서

 

신학은 성경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신본주의적인 관점에서 구성된 학문이다. 개신교를 확립한 종교개혁자 칼빈(1509-1564)을 따르는 개혁주의는 그런 입장에서 신학을 추구하지만, 근대 신학(Modern Theology)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인간의 실존적 의미와 자율적 인식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초월성을 배제하고 내재성만을 강조하였다.

20C초 세계1차 대전의 발생으로 인하여 독일에서 중심적으로 연구되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주의적인 입장이 무너졌을 때, 칼 바르트(1886-1968)는 「로마서 주석」(1919년)을 통하여 성경에 관한 구원론적인 관점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학자들을 성경 중심의 연구로 전환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바르트도 실존주의 인식의 기반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무오류의 말씀으로 보지를 않았고, 성경을 읽거나 듣는 자에게 성령의 단회적인 역사로 말씀이 된다고 제시하였다. 성경을 계시 자체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바르트는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성령의 항존성(恒存性)도 인정하지를 않고 순간적으로 역사하시는 존재로 제시를 하였다. 성경에 근거해볼 때 바르트의 인간론적인 관점은 부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신학은 실존적 해석이 중시되는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살펴보는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도 신론적인 입장에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연구에서 우선적으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활동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신학적 인식들 중에서 삼위일체론에 관한 사항들을 살펴보고 난 후에,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비평할 것이다. 필자는 이 학자들의 신학적 관점들 중에서 삼위일체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입장들에 내포한 특성들을 살펴보고 난 후, 그 관점들에 내포된 신학적 문제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관점에서는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재)적 관계를 지니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제시하며, 기독론의 관점에서는 ‘케노시스(자기 비움)’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3위 간의 상호 내재성을 인정하지만 몰트만과는 달리 삼위 하나님간의 동등성이 결여된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독론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성육신하시어 자기 스스로 종속적인 존재의 입장을 취하셨다고 제시하고 있다. 

공통적인 면에서 이들은 구원의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에게 부여된 종말론적인 새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두 학자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한 입장에서 진화론적 창조론의 입장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성취하게 될 종말론적 승리의 개념을 현재화함으로써 희망의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 입장을 확립하고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올바른 지침을 제시할 때 잘못된 입장에 대하여 바르게 교정해 줄 수가 있다. 그런 신학적 기반위에서 성경의 바른 이해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이 실제적 삶에서 더욱 깊은 은혜를 받기 바란다.

2. 두 신학자들의 신학적 활동

 

(1) 몰트만의 신학적 활동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1926년에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는 수학이나 물리학 등을 연구하려는 마음이 강했으며, 플랑크(Max Planck)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숭상했다고 한다. 그는 불행스런 시대적 상황을 맞아서 세계 2차 대전에 참전을 하였고 그가 속한 독일의 패배로 인하여 3년(1945-1948)에 걸쳐서 벨기에와 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러한 전쟁의 고난을 거치면서 신-존재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 중에 긍정적인 사고로 인해 희망적 삶을 사는 자들이 생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신학을 하게 되었으며, 신정론에 대한 문제와 신앙에 있어서의 희망의 역할에 큰 관심을 지니고 연구하게 되었다.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전체적인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있어서는 ‘희망의 철학자’였던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자신의 신학적 정립에 있어서는 여러 신학자들로부터 복합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그가 1948년에 괴팅겐대학에서 신학을 배웠던 자들로서는 칼 바르트(K. Barth:1886-1968)가 제시했던 비평적 연구의 옹호자들이었던 한스 이반트(Hans J. Iwand:1899-1960), 오토 베버(Otto Weber:1902-1966), 에른스트 볼프(Ernst Wolf:1902-1971) 등이 있었다. 몰트만은 이러한 교수들로부터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의 많은 요소들을 도움 받았다. 

몰트만의 신학과 관련하여볼 때, 루터파 학자였던 이반트는 ‘헤겔의 신학적 철학’과 ‘신의 죽음의 개념’과 ‘신-존재에 대한 비판’에서 영향을 주었으며, 볼프는 사회윤리학과 종말론을 관련시키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베버는 현세적 사건과 무관한 내용의 종말론을 추상적 이론으로 취급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통찰과 종말론을 가르침으로써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몰트만은 지도 교수인 베버 아래에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박사과정을 연구하는 도중에 벤델(Elizabeth Wendel)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난후에, 1952년에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그의 모든 학습과정을 마쳤다.

그는 모든 학습을 마친 후에 브레멘-바서호르스트(Bremen-Wasserhorst) 교회에서 목회자로서 5년간의 사역을 하였다. 그는 5년간의 사역을 한 이후로는 신학교에서 교수로서 활동을 하였다. 그는 고백교회로부터 설립되어졌던 부퍼탈(Wuppertal) 신학교의 교수로서 1957년에 임용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교리사를 가르쳤으며, 1963년부터는 조직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1967년부터는 조직신학 교수로서 자신의 신학적 틀을 형성하면서 가르쳐 왔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특성을 제시해주는 저서가 되는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을 1964년에 저술하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희망의 철학자인 블로흐가 모든 문제들을 개인적 체험과 성경에 제시된 희망과 약속에 대하여 미래에 대답할 수 있다는 사상을 자신의 틀로 삼아서 신학적 입장에 접목시켰다. 반면에 그는 블로흐가 취하였던 유물론적 사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기독교적 입장을 제시하여 미래를 존재의 특성으로 지니고 계신 신에 대하여 희망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학 전체를 이전의 개념과 다른 새로운 종말론적 관점에 맞추어서 사고하는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인식하였는데, 그 계시는 본질적으로 약속을 통한 종말론적인 제시라고 보았다. 

그 저술 이후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과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를 저술하였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찬 절망에 빠진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희망의 열정과 기쁨으로 전환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실존적 신앙의 체험은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도 언급하였다. 그는 그 이후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 생명의 영(1991) 등을 저술하였다.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제시한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1964)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모든 저술들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며 구성하였다. 종말론에 관련한 그의 신학적 재구성은 구원을 기독교 사상에 끼친 요소로 인식하였던 헬라적인 사고인 시간으로부터의 탈출로 보는 개념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몰트만과 함께 ‘희망의 신학’의 입장을 취하였던 자들로는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가톨릭 학자 메츠(Johannes Metz), 미국의 브라텐(Carl Braaten) 등이었다. 그들의 세부적 사항에는 다소의 차이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희망적인 종말론을 예수님의 선포와 신약 성경 전체의 중심적 요소이며 신약의 전체적 특성을 제시한다고 인식하였다. 

몰트만은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현대에 사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희생적 사랑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모든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그의 삶에 있어서 젊은 시기에 겪었던 부정적이며 어려운 상황에서 인식하였던 긍정적 사고로의 전환은 그에게 있어서 희망의 신학은 그의 신학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긍정적 인식의 전환으로 인하여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의미와 역할은 기존의 신학적 입장에 비하여 크게 부각되어졌다. 

그는 신-인식에 있어서의 시발점을 인간 실존에 긍정적 의미와 역할을 부여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둔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을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 창조된 인간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나라를 성취하여 가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만물을 창조된 상태에 그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통하여 만물이 새롭게 창조됨으로써 진화적 창조를 하고 있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통한 새 창조의 대상을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 연관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함에 있어서 만유재신론인 특성도 내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실존적 이해에 입각한 신학적 해석을 함으로써 계시의 관점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삼위일체의 관점과 기독론적인 인식에서 문제를 보여주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신학적 인식에서 중심적 요소로 인식하였던 인간의 실존적 의미와 역할에 대한 견해에서 커다란 문제를 나았다. 몰트만은 그러한 인간론적인 인식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중시하는 입장을 추구하는 현대의 기독교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관련하여 인간의 적극적 활동을 제시하며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구성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2)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활동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1928년에 독일 동북부 지역의 포머른(Pommern)주에 있는 슈테틴(Stettin)에서 한 공무원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청소년기까지는 신앙을 지니지 못하였다고 진술되고 있다. 그는 청소년기에 니체의 저서를 읽고서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해 세계의 비참한 상황을 치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한지 머지않은 후에 해질 무렵 숲을 지나서 집으로 오다가 멀리서 비추어지는 석양의 분위기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고 그때에 자기의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그 두 차례에 걸친 내면적인 신앙적 의식을 통하여 신학 연구에 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철학을 하면서 초기에는 유물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매료되었지만, 그에 대한 지성적 검토를 하고 난 후에 반론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국가인 독일의 2차 대전에 의한 만행을 보고 난 후에는 정치적 체계를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반영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하면서 보편적 실재(Reality)들의 의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지녔으며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철학적 사고도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였다. 그는 신학적 연구를 하면서 기독교를 최고의 철학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러한 결론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와 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바르트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실재가 존재한다는 관념에 있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의 근본적 입장을 기독교의 보편성과 모든 학문과의 개연성에 대하여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는 신학의 인식에 있어서의 보편적 역사를 제시하면서 과학적인 인식에 대하여 개방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1947년에는 괴팅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그 당시에 그곳에는 몰트만도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1950년에 바젤 대학에서 바르트(K. Barth)와 야스퍼스(K. Jaspers)에게 신학의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여러 가지 점에서 도움을 받았던 바르트에게 교육을 받는 과정에 ‘자연적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 계시 간의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판넨베르크는 창조와 구속 간의 연속성을 통하여 모든 종류의 세속적인 경험들 안에서 신앙적인 암시를 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는 그 다음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조직신학자 슐링크(Edmund Schlinck), 교회사 학자 폰 캄펜하우젠(Hans von Campenhausen), 구약 신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 철학 교수 뢰비트(Karl Löwith) 등에게 신학을 배웠다. 판넨베르크는 그들에게 학습을 하면서 역사가 지닌 중요성과 본질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속사건에 관한 폰 라드의 전승사의 개념을 수용했지만, 그 구속사건에 관련된 전승사에 대하여 자신의 해석을 보다 더 넓은 보편사적 맥락으로 확장시켜서 적용을 하였다.     

그의 신학적인 주된 관심사는 교회의 일치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를 포함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그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기능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인간들의 모든 제도들을 한시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간에서와 인간들 상호간에서의 교제들을 성만찬 안에서 표현을 하므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인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전조라고 제시되었다.

그는 1953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론”(Die Prädestinationslehre des Duns Skotus)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이후 그는 1955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 자격시험으로 헬라 철학부터 아퀴나스까지의 신과 세계의 유비 개념의 역사에 관한 ‘유비와 계시’(Analogie und Offenbarung)를 보고 합격한 후에 그곳에서 1958년까지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 이후 그는 부퍼탈(Wuppertal)의 교회에 연결된 대학에서 가르쳤고, 1961년부터는 마인츠(Mainz)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최종적으로 그는 뮌헨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가르치면서 ‘기초신학과 에큐메니컬 연구소(Institut für Fundamentaltheologie und Ökumene)’를 운영하면서 활동하다가 1996년에 은퇴를 하였다. 

판넨베르크의 저서들로는 「역사로서의 계시」(Offenfbarung und Geschichte)(1963), 「신학의 기반」(Grundzüge der Christologie)(1964), 「지식론과 신학」(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1964), 「사도신경 해설」(Das Glaubensbekenntnis)(1972),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1976), 「윤리와 교회」(Ethik und Ekklesiologie)(1977), 많은 논문들과 글들을 모아놓은 「조직신학의 근본적 문제」(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1967), 「조직신학」(Systematische Theologie)(1988), 그리고 보편사적 입장에서 신학을 제시한 「신학과 철학」(Theologie und Philosophie: Ihr Verhaltnis im Lichte ihrer gemeinsamen)(1996) 등이 언급될 수 있다. 

그는 신학적 인식을 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을 신학적 방법으로서의 보편성에 두었다. 그는 신학의 과제를 ‘모든 실재들에 대한 연관아래서 하나님을 대한 이해’라고 보았으며 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하나님과 관련한 모든 대상을 강조하였다. 그가 지신의 신학적 인식에서 일관적인 관심을 보였던 사항은 보편적인 학문으로서 신학이 지니는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학을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모든 실재들을 취급하는 보편성을 지닌 학문이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초월성과 보편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신학의 인식에서 그 기반을 개연성과 보편성을 중시하는 과학적 인식 방법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우연성(Contingency)을 내포한 것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의 토대에 기반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신학적인 전체적 구조에 있어서 조직 신학을 본질적인 면에서 신론이라고 인식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신학에 있어서 모든 대상들을 포함하는 총괄적인 대상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모든 유한한 실재들이 의존하는 힘(Power)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짓는 대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기본적 전제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피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리와 관련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만을 신-존재에 관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점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신학은 많은 현대 신학적 입장들과 ‘희망의 철학’의 입장을 수용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였다. 그도 몰트만과 같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희망의 신학’의 입장에서 추구하였다.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신-인식에 있어서 ‘위로부터의 이해’와는 달리, 그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실체들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아래로부터의 인식’을 추구하였다. 

 

3. 두 학자들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고찰 

 

(1)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입장 연구

 

A. 몰트만의 입장

 

몰트만은 삼위일체에 관련하여 동일한 본질(ousia)과 실체(substantia)를 지니신 분으로 제시하는 개혁주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삼위 하나님을 개별적인 존재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간의 내재 속에서 타자(他者)로서 제시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전승’이라는 기반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역사적인 제시를 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개방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관계와 사귐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사회적 삼위일체’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성에 관련하여 헬라어 용어인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재)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처리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차원에서 신적 위격들의 절대적 동등 내에서 영원히 평등하며 각 위격들로서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의 힘이며 각 위격은 그 사랑의 능력을 통해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내에 현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에 대한 ‘삶의 공간들(Lebensräume)’로서 상호들 간에 자기를 거주할 수 있게 해주며 다른 두 위격들에게 더욱 넓은 공간과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상호간의 희생적 사랑의 능력에 의하여 각 위격들이 서로의 안에서 자기를 취하는 것이다.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취하시듯이 성자와 성령도 다른 두 위격 안에서 자기를 취하며 의식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재)적인 형태를 ‘하나님의 통일성에 관련하여 삼위일체의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페리코레시스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그러한 관계가 삼위일체 상호간에서 위축되지를 않도록 결합시켜줌으로써 삼신론과 양태론의 위험을 극복하도록 해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 위격들이 지닌 공동의 본성, 공동의 의식, 그리고 공동의 의지는 그들 각자의 특유한 인격성과 의식과 의지를 통하여 상호 주체적으로 형성된다고 제시되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경험을 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시작하여 성령 안에서의 삶이 지니는 삼위일체적인 구조에 이르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는 입구이며 그를 믿는 신앙을 통해 삼위일체 안에 있는 자들의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묘사가 된다. 그는 신앙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는 그리스도에 관련된 부활의 요소를 역사라는 매체 속에 진입시킴으로써 희망의 실체를 제공하는 발판을 제공하였다. 그는 그 희망에 궁극적인 지평으로서 인간의 삶과 역사 그 자체를 위한 희망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과의 사귐이 회복된다고 제시한다. 그는 인간을 성령 안에서 실제적 참여자로서 인격화된 존재로 제시하며 삼위일체론의 십자가 신학에서 성령을 통한 경험과 관련된 상황에서 만유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기반을 두고 인간을 위해 펼쳐진 종말론적 과정을 전개해 간다.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을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들어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해방의 역사에 통합되어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완전한 신-인 양성을 포기한 상태로 성육신하신 분으로 성령의 동참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받은 대속자로서의 사역을 담당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 제시되는 예수님을 신적 능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로 성부 하나님께 버리심을 당하여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상태에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자기-제한의 의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서술에는 기독론적인 인식에 있어서 ‘케노시스(kenosis) 입장’이 깔려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칭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특별한 용도를 부여한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적 칭호’, ‘존귀의 칭호’, ‘직분의 표시’가 아니라 ‘아버지’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제시를 한다.

몰트만은 성령에 관하여 ‘삼위일체의 구성’과 인간의 실존적 삶에서 구성되는 ‘삼위일체의 내적 상태’를 구분되는 것으로 제시하면서 성령의 신적 실재와 본질을 성부에게 존재하는 신성의 원천에서 나온다고 제시한다. 성부는 성령이 발출하는 근원이시며 성자의 아버지이시므로, 성령은 삼위일체의 셋째 본체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본다. 성령의 출현은 성자의 태동과 실재와 성부와의 관계를 전제하며, 성자는 성령과의 관계에서 성부로부터 성령의 발출함에 대한 논리적 전제이며 실제적 조건이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완전한 신적 실재를 지니며 성자로부터 관계적 형태를 받는다고 제시된다. 

삼위일체는 세 신적 주체로서 상호간의 관계에서 공존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하나님은 항상 상호간에서 스스로를 개방하면서 세상을 자신 안에 내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명은 피조 세상의 섞음으로부터 해방되고 공동체의 삶 안에서 약속대로 성취된 것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그는 종말론적 영광의 나라를 모든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형성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할 것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해 역사 내에 동참하기를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시되어 진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구속의 사건에 관련하여 최종적 단계인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미정된 상태로서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성자의 성육신에 대한 이유로 인간의 화해를 위한 필연적인 요소임을 제시한다. 성자의 성육신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세계의 창조를 성자의 성육신을 위한 외적 틀과 준비로 제시한다. 성육신은 세계의 관념과 조화되는 것으로서 관념과의 관계에서 앞선 것으로 제시된다. 몰트만은 기독론의 내용을 구원론에 대한 필연적 전제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육신을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완성된 것으로 표현한다. 

그는 영원한 나라를 모든 창조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거하심으로 표현한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과 그 주변과 환경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피조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현존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삶과 열락에 참여케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고 찬양하기 위한 안식일을 위해서 창조되어진 존재이기도 하다. 구원의 역사를 통한 새 창조된 인간은 보내심을 받은 아들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을 통하여 시작된다고 제시한다.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새 창조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들(고후 5:17)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처음 받았던 형태의 모습을 닮는 자들로 제시되고 있다. 

B. 판넨베르크의 입장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유한한 피조세계와는 달리 불변하시며 영원하시며 편재하신 분으로서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필연적 존재이시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개혁주의 관점에 대하여 기독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관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살아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에 대한 명시적인 지식을 무한자에 대한 통찰 그 자체에 두지를 않으면서 삼위일체에서 상부 하나님을 아들 예수님의 선포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와 구별되는 것으로 제시되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성부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기의 활동에서 아버지와의 밀접한 연결을 보여주셨다고 진술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서술에서의 출발점을 예수님 안에서의 자기-계시(Self-Disclosure)에 두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적인 자기 구별을 구체적 형태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도 또한 기독론에 그 출발점을 두고서 구성되어 있다고 제시된다. 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자기 계시의 사건과 동일한 의미로 보면서 기독론적인 이해를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개념은 하나님과 예수의 본질적 일치를 증명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과 아들 간의 구별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계시자와 계시되어지는 자에 대해서도 동일시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의 완정을 위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메시아이시다. 그 아들은 이미 영원부터 하나님 편에 속한 존재이시다. 그는 예수님을 선재하는 존재라고 보는 주장을 종말론적으로 계시될 모든 것들이 숨겨진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미 현재이라는 사실을 묵시문학적 표현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선재사상을 반드시 완전한 신성을 지닌 아들로서의 인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제시한다. 이러한 선재 사상은 피조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하실 뿐 아니라 자신을 일반적 인간들과 동일한 종속된 존재로 제시하셨다고 설명된다. 

그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부활과 승천이라는 기반위에서만 그에게 돌려진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다윗의 후손’이나 ‘하나님의 아들’의 명칭은 부활이전의 예수와 부활이후의 예수와의 관계를 특징짓기 위하여 상호 간에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과 같은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되었던 다른 단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러한 아들 됨(Adoption)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진술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주권을 맡기심으로써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고 주권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의 왕이 됨을 이루시게 된다. 성자로부터 성부의 자기 구별은 성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셨으며 자신의 왕국과 자기의 ‘신성’이 현재에는 성자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적인 인식에 있어서 성육신하신 예수는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종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예기(豫期)함이다.  

세계의 현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통치권은 이미 내재적 삼위일체의 모습에 나타난다. 아버지의 통치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아들과 순종하는 아들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위임시키는 아버지 간의 관계가 나타나는 상호연관성에 각 위격의 자리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성부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자에게 내어 맡기시며 성자께서 성부에게 그 나라를 돌려드리는 과정에 있어서 상호간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심과 그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을 성취함에 있어서 상호 배타적인 단독적 행위가 아니라 상호간에 침투되어 있는 상태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인식되어야 할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친밀한 연합을 통해 하나가 되려고 하는 분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위격적인 존재를 각 위격 내에 현상에서 등장하는 실재(Reality)로서 독자적인 존재라고 제시를 한다. 세 위격의 성질은 신적인 사랑의 사유에서 포괄적인 단일성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의 사건에서 나타나며 상호 관계하는 형태와 방식에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성령의 발출에 관련하여 아버지와 아들로부터의 이중발출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성령을 성부로부터 나왔으며 성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제시한다. 신자들은 그러한 성령을 받아서 예수의 ‘아들 됨’에 동참하게 된다고 제시한다.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이 성취해야 할 목표이며 종착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현 상태의 인식과 미래에 성취될 목표 간의 연결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안에서의 인간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운명에서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 형상의 특성이라는 인식과 관련시킨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실현에 있어서 그 목표이며 출발점으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진정성은 미래성과 연관되어질 때 하나님 통치 내에서의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제시된다.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의 목적론적 대상을 계시함을 통해 모든 것들에 대한 각개의 특별한 의미와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처한 공간적 요소로서의 ‘자연’과 시간적 요소로서의 ‘역사’는 미래의 힘에 따라서 재규정이 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통일성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제시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간의 관계를 상호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전적으로 근원적인 관계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위격들의 상호 내적 교통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삼위일체의 단일성에 대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언급된다. 하지만 그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한 면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하여 한정시키게 되므로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본다.

 

C. 두 입장들의 비교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종말론적인 신학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초로 희망의 중심적 내용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입장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존재에 대한 입장에서 이들 간의 몇 가지 공통점들을 먼저 제시하고 난 후 다음으로 몇 가지 차이점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이들은 삼위일체의 존재에 관한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점들을 지닌다. 삼위일체의 실체는 상호간의 관계를 지닌 다른 존재들로 인식된다. 이들은 신-존재의 인식을 미래의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종말론적 희망으로 인식하게 만드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인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성령의 이중발출을 동일하게 부인하면서 성부 하나님만을 성령을 보내셨던 분이시며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동일한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제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실 때 신적 능력과 권세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아서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재림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개방되어 있으며 현 존재에 살고 있는 인간은 새 생명을 지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얻도록 성령의 도우심 아래서 힘써야 할 것으로 언급한다. 이들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을 종말론적 의미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서의 개념적 성취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에게 새 생명과 새 희망을 주는 것으로서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힘을 주는 것으로 제시된다.

반면에 이들의 입장에서 삼위일체 관계에 있어서 몇 가지의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 몰트만은 삼위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상호간의 내재들을 지니고 있는 각 위격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상호간에 차이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에 자유롭게 인간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는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역사를 구성하려는 사랑과 은혜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안에 있는 유한한 존재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제한을 통하여 이 세상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상호내재(perichoresis)의 관계 속에서 자기-제한을 내포하신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함께 보존하고자 했다.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의 근거를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 말씀 속에 나타난 구원의 계획에 들어있다고 제시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첫 번째 문제를 예수님의 죽음을 아들과 아버지로서의 공동 사역임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을 포함하며 화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유지하며 이 상호 관계를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계한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그가 아버지로부터 차별화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내려진 현신에 순종함으로써 아들이 되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성육신의 교리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실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의 토대로 삼고 있다. 그는 신론의 근거를 구원의 경륜에 들어 있으며 내재적 삼위일체의 이해와 함께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하나님과 세계 간의 관계 내에 들어있는 미래적 정향으로 인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역사의 유한한 사건들에 의미를 제공하시는 전체로서 역사하시는 존재로 제시된다. 그는 신적 존재의 통일성의 계시의 초점을 그리스도를 통해 펼쳐진 종말론적 완성에 두었다.   

(2) 삼위일체 활동에 대한 입장 연구

 

A. 몰트만의 입장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활동을 상호 내재의 상태에서 사랑과 협력에 의해 역사되어지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상호 내재(perichoresis)의 단일성을 신학적 개념인 동시에 구원론적인 개념으로 제시를 한다.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관계는 생동적이며 삶을 촉진시키는 하나님의 모든 규정들은 자기 계시에 의한 것이며 상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세계의 창조, 성육신, 세계의 변용’이라는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용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라는 내부를 향한 삼위일체의 작용에 있어서 상호간의 내적인 교류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몰트만은 창조를 하나님의 신적인 겸손의 사역으로 제시하며 사랑의 고난을 가장 높은 신적 행위라고 제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의 미래를 열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 위에 존재하시는 분인 동시에 자신이 길이 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하였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세계에서 존재하면서 세계와 함께 새 창조를 동경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 간에 존재하는 이 ‘중간 기간’에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의 통치와 우리들의 영을 생동케 하시는 성령님의 경험을 통하여 채워진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그의 통치가 시작을 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행하시는 예수님의 통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며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통치의 목적인 동시에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자기 제한을 통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당하시고 죽음을 겪으신 것으로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이며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신 것을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아들로서 예수님은 심판을 받은 자들과 저주를 받은 자들에게 형제가 되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적극적 고난(passio activa)이며 의식적으로 시작하신 고난이며 자신이 긍정하신 죽음으로서 당하신 것이다. 그러한 고난을 담당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제 2위의 하나님으로서 계획되었던 구원의 사역을 담당하신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로서 세계 고난의 역사에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신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인간을 종말론적 역사에 참여시켜서 구원의 목적을 완성하시는 분으로 제시한다. 성령의 나라에 제시되는 특징은 창조의 능력으로서 새 생명이 부여된 새 창조에 있어서 인간이 함께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대상들의 회개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고뇌에 함께 참여할 수가 있으며 그 고통에 대하여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미래는 역사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그 영원하심은 모든 역사적 시간에 대한 그 분의 미래의 힘이다. ‘오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은 인간의 새로운 형성의 역사를 만든다. 그런 형성은 지나감이 없는 ‘새로운 형성’이며 하나님의 ‘오시는 현재 속에서 머무는 존재’로 됨이다. 

그는 인간을 창조의 사귐 안에 있는 피조물로 언급하면서 세계의 형상(imago mundi)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그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하며 상호간의 사귐 속에서 실존하며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제시한다. 그는 ‘사랑’을 희망을 통해 역사의 개방된 가능성을 측정하게 되는 것이며 ‘희망’을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신학에 있어서 ‘희망’과 ‘사랑’은 모든 신학적 인식의 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현재화시키면서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미래의 세계에 존재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그것을 통하여 신앙인 각자의 지평을 세계의 종말적 지평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B. 판넨베르크의 입장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총체로서의 역사를 신학의 전체적 지평이며 계시를 역사로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과 그 나라의 미래성의 개념을 미래적 요소로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랜 과거를 지배하시는 것으로 제시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미래를 영원에 관한 생각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관련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서 영원하신 분이라고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미래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모든 각개의 사건들에 대하여 실제적인 역사에서의 미래를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관련성 안에서 끊임없이 종말론적인 미래의 존재로서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는 Jesus-God and Man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가정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부활의 의미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➀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➁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그것을 확인하셨을 것이며, ➂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승천하실 것이며, ➃ 이방 선교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제시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자기실현’으로 보면서 영원한 아들인 예수 자신을 직접 사람과 동일시하게 된다고 언급한다. 우리가 그 인격을 그 인격의 역사와 구별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구별할 수가 없다. 부활절 사건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인격을 결정하였지만, 그 사건적인 면에서는 그가 그 성육신으로서의 과정의 그 시발점으로부터와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것을 계획적인 사건으로서 성부로부터 성자의 구별이 모든 피조적인 실체의 가능성의 기초가 되며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의 근원도 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하여 언급하기를, 그에 대한 의미는 성격상 이방인들의 회개의 종말론적인 의미에 관련되며, 절대로 원시 기독교에서 제시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언급 내용은 자연과학의 지식이나 실재의 인식 간에서의 그 상호간의 차이로 인해 동일하게 이해되지를 말아야 하며, 죽은 자들의 부활은 바울의 개념으로 이해되지를 말아야 하며,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역사적인 문제와 같은 것이라고 제시를 한다. 그는 신학의 전체 구조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하나님 자신에 의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미래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임박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현존하는 나라로 제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기독교 신학 전체의 중심적 사항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역사적 정의를 내리려 한다면 이러한 회복은 필수적일 뿐 아니라 현대의 기독교 사상에서 불편한 문제들에 대한 더욱 적합한 접근들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의 신성을 인식하기 바라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자기의 모든 활동을 그 활동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제시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겸손함을 통해 아버지의 신성에 자기를 종속시키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에 있어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 됨을 증명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으로서 아들과 아버지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매개체이며 예수님에게 참여함에 있어서의 중재자로서 전제된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는(롬 1:4) 상황에서 역사하신 존재로 제시된다. 성령의 활동은 아들로 인정되는데 있어서의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기반이 된다(롬 8:14). 성령에 관련하여 언급하는 상태에서만 아들인 예수와 아버지인 하나님 간의 연계성이 언급할 수가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안에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희망의 내용인 성령을 부어주심을 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혜는 예수님의 약속을 통하여 형상화 되었고 지속되는 선물로 표현되는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인 형태에서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성령의 통해서만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연계성을 지닐 수가 있다. 

하나님의 신적인 인식은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를 하는데, 삼위는 개별적으로 다른 위격들과 관계를 지니며 다른 위격들로부터 구별이 된다고 제시된다. 하나님의 세 위격적인 자기 구별은 동일하게 신성과 연결이 된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에 대하여 자기를 구별하는 행위의 주체와 핵심이다. 성자는 홀로 선하신 하나님이신 성부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신다. 성자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봉사하는데 사용한다. 성령은 그 성자를 그의 아버지께 복종하는데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자로 인정한다. 성부는 아들에게 자기의 왕국을 위임함으로 인하여 성자만이 하나님의 힘이며 지혜라고 칭할 수 있다고 진술된다. 판넨베르크는 삼위 하나님 간의 자기 구별을 통하여 종말론적 성취를 이루는데 각기 다른 영역에서의 활동을 통해 상호 협력하신다고 제시한다.  

C. 두 입장들의 비교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종말론적 관점에 기준하여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적인 사역을 해석하여 가고 있다. 하나님의 미래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 영원한 상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하여 다가오는 ‘의미적인 미래’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심판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날에 분명하게 성취될 것으로 제시하지를 않고 개방적인 입장에서 미정의 상태로 제시하면서 심판의 역사를 확언하지 않는다. 

몰트만은 성경 계시의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중요한 요소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부활의 대상을 보편적이며 종말론적인 죽은 자들의 부활이 아니라 특별하고 메시아적인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 이러한 부활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로 세계의 종말 전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적 입장에서 예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역사를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성자가 성부를 영화롭게 하시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운동으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화로서의 목적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삶 속에서 참여함으로써 창조 세계를 영화롭게 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구하는 사랑의 안에서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 사랑 안에서 창조 세계를 모아서 자신과 연합시키신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연합은 종말론적이며 삼위일체론적인 만유재신론의 안에서 모든 창조 세계를 포함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계시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아직 구성되지 않은 상태이며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성취될 것으로 보았다. 대속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속은 포괄적 사건으로서 인간을 자발적 복종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창조를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이며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필연적인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께 있어서 이 세계의 창조를 자신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내재에 초점을 두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이 창조에 내재하는 원리이며 신적 생명에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원리이다. 창조의 완전한 성취는 신적인 본질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종말에 성취되어질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서 영원하신 분으로 언급되며, 그의 통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 다스림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이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그 사역 기간 중에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로 인하여 믿음을 통한 영생이 주어졌으며 성령께서 항상 그와 함께 하시며 보살펴 주신다. 그래서 영적인 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세에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항상 불완전하며 예수님의 재림 후의 심판을 통하여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서의 모습도 완전하게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에 가깝게 닮아가도록 노력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역사는 시간적인 과정을 통하여 불명확하고 끝이 없는 과정이 아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종말을 향해 가는 실제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다.

4. 신학적 입장들의 평가 

 

(1) 몰트만에 대한 평가

 

몰트만은 성경의 ‘특별 계시로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사랑과 연합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일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만 세 위격을 동일한 한 실체(substantia)에 대해서는 달리한다. 그는 하나님을 상호간의 내재와 사랑 안에서의 배타적 관계 내에서 그 일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제시를 하는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삼위 하나님을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재)의 개념에 관련하여 그 의미를 적용해 간다. 그는 상호 내재하는 세 위격들은 상호간의 연합 속에서 완전한 그 사랑의 힘과 능력을 통하여 각 위격이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내에 현존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는 창조와 주권의 하나님 성부, 구원의 하나님 성자, 그리고 보호자 하나님 성령으로 삼위일체를 상호 내재의 관계에서 경륜적인 사역을 통하여 고난과 고통을 지닌 인간에게 사랑과 희망을 내려주시는 분으로 서술한다. 그는 아들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기독교적 전승을 기반으로 사용하여 역사라는 형식의 안에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동일한 주체나 본질로부터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라는 매체를 통하여 제시되어진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인식되어지는 인식의 과정이 제시된다.

몰트만이 취한 경륜적인 관점에 따라 이해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아들을 제물로서 자기에게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못 박으시는 존재이시며,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는 존재이시며, 성령은 패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힘으로서 새로운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영이시다. 그는 예수님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고 희망을 주기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에서 맺으신 약속에 따라 무조건적 사랑으로 인해 자기를 제한하시어 하나님의 신적 주권과 통치권을 포기하시고 세상에 오셨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담당하실 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으신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본질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지니셨던 분임을 제시할 뿐이며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 나셨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시기 이전부터 2위 하나님으로서 지니셨던 신성을 인성과 함께 취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위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도 함께 계시면서 신적 능력을 행하지 않으심으로써 자신의 대속 사역의 목적을 담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위격은 신성과 인성의 교류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성을 초월하신 자유로우신 신성과 함께 인성을 지니시면서 구원의 대속 사역을 담당하신 것이다. 몰트만의 입장에 있어서의 기독론적인 관점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그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하지를 못한 것이다.    

그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특성으로 제시한다. 외적으로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분리되어 구분될 때만이 이해될 수 있다고 제시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삼위일체에 관한 서술을 통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를 찬미의 총괄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에 속한 것임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원과 역사와 경험이 완전히 성취되어질 때 내재적인 삼위일체로서 완성이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을 동일한 실체(substantia)가 아닌 다른 세 위격을 제시하며 새 창조의 종말론적 목적에 따라 변증적(Dialectic)이며 목적론적(Teleological)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는 성부를 근원으로, 성자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담당하신 구원의 중심적 존재로, 성령을 새로운 힘이며 부활의 능력으로 각각의 존재 위치를 만물의 근원이신 성부의 ‘단일체제’안에 둔다. 그는 삼위의 성부 하나님으로 부터만 성령의 발출이 발생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성령의 신적 실존과 신적 본질은 아버지 되신 ‘신성의 원천’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으로서 제시되어 진다. 성령의 발출은 아들의 태동, 아들의 실존,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발출함에 있어서 논리적 전제이며 실제적인 조건이라고 제시된다. 

그는 삼위일체의 삶에 ‘상호 인격적인 친교의 삶’이라는 의미와 ‘그 삶에 참여함’을 함께 내포시키고 있다. 그는 새 창조된 인간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성령께서 내주하며 생명과 능력을 지닌 자로 제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역사의 새 창조에 함께 요청받은 자이며 삼위일체의 관계를 인간관계의 외적인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진술은 진화론적 과정의 창조론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간에서의 ‘존재적 유비’를 조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서 성경적 진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의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종말론적 요소로서 변증적 해석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그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완전한 반립(Antithesis)의 위치라는 것을 의미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게 되는 사건으로 통한다. 세상에서의 곤경과 고난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부활로 사라지고 실재의 새 창조로서 살아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적 방법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변증법적인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적 인식의 근본토대로서 죽음과 부활의 이원론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종말론을 현재의 실재로부터 전개시키지 못한다. 이 종말론은 세상의 악과 고통에 모순되는 것으로서 세상을 그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이해가 된다. 종말론적인 이원론에 대한 변증은 십자가와 부활의 이분법에 대한 이해로부터 항상 중심적 요소가 된다. 그의 종말론적 해석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새 창조의 첫 열매로서 부활의 새 생명을 실재를 특성인 고통과 죽음의 희생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은 부활과 새 창조를 통하여 모든 악과 고통을 제거할 뿐 아니라 죽음의 초월을 이루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그의 점진적인 진보의 과정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의 종말론적 재구성은 이원론적인 변증적 기반위에서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구성된 것이다. 몰트만이 지나치게 강조했던 종말론은 희망에 따른 신학적 관점에서 그에 속한 내용을 변형시킴으로 인하여 신학적 입장을 주관적으로 다르게 정립하였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질 종말론의 진리를 우리가 미래에 맞이할 기대를 지니면서 각자의 현 삶에 있어서 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성실하게 적응하면서 신앙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판넨베르크에 대한 평가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유한한 모든 존재들의 의존 대상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시다. 피조물들에게 주어지는 최종적 구원만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증명할 수 있다고 제시된다. 최종적 구원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므로 역사의 전 과정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기 증명이라고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에 관련하여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제시한다. 그에게서 종말론적 인식의 중요한 기반적인 사항은 예수님의 역사적 실체와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이해에 따라 예수님을 인식할 때, 예수님의 역사적 운명의 사건을 통해 발생하는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가 있다고 본다.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명칭이 제시됨을 통해 고유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그 명칭 속에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며 신적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제시한다. 예수님의 선포에 있어서 창조주 아버지의 돌보심은 항상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종말론과의 연관성 속에 다가온다. 그는 예수님을 선포와 행동을 위해 본질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였다고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통해서만이 활동하신다고 본다. 

그는 성령님을 예수님과 아버지 간의 관계에 대한 매개체이시며 신자들이 예수님에게 참여함에서도 중재자로서 전제된다고 한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아들로 인정되셨고, 그의 성령을 통하여 신앙인들의 죽을 몸을 영원한 삶으로 옮기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들로 인정되는 모든 것을 성령의 활동위에 근거를 두고 이루시는 것이다.  

그는 성자를 성부와의 자기 구별을 제시하며 자기를 통하여 성부를 창조자로 활동하심을 제시함으로써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본질과 실체를 구별하여 놓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자기 구별의 인식위에서 그 존재에 대한 위격적인 기반을 마련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의에 의해 구별하는 성자의 행동은 영원한 아들 됨에 대한 그 인식론적 근거이며 창조의 존재에 대한 그 존재론적 근거로 제시한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 관점에서의 문제점은 세 위격의 존재 형태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각 위격의 상호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각 위격(Person)의 실체(Substance)도 다른 존재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모든 신적인 능력에 관련하여 자기 제한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 낮아지셔서 종속적인 존재로 자기 구별하고 있다고 제시한다. 그는 성령을 신적 본질을 인식할 수 없는 무한한 장으로서 동적인 영의 뜻으로 제시함으로써 더 잘 묘사될 수 있다고 한다. 창조적인 성령의 존재가 신자의 삶과 교회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주장을 한다. 성령은 피조세계에서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은 본질적으로 자기 외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개념을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미래의 보증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한 진술은 실재(Reality)이신 하나님을 개념화시키는 잘못된 진술이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유대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된 것이며 예수님에 관한 동정녀 탄생, 부활 사건,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사항들은 사실의 기록이 아닌 전설의 변화된 내용이다. 로고스의 신성과 관련시켜서 해설을 한 것은 교리적으로 불합리적인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ousia)과 실체(substantia)를 지니고 계시는 세 위격(Person)의 하나님이시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항상 동일하게 함께 행하시며 모든 역사의 활동에 있어서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을 지니고 인성을 지니신 제2위의 하나님으로서 세상을 지내셨던 분이시다. 예수님은 로고스로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2위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하나님과 본질과 실체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요1:1-3).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동정녀 탄생을 하셨으며 3년간의 사역에서는 신성이 함께 작용하셨지만, 십자가의 대속에서는 신성이 활동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대속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굴욕을 참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역에 성령을 함께 하셨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 후에 약속의 말씀과 같이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에게 영혼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보혜사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이해할 수가 없는 신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으로 이루어졌지만 본질과 실체가 동일한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신비적 사실로서 믿음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이다. 

5. 나오면서 

 

지금까지 필자는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희망의 신학의 기반위에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연구를 제시하였던 자들이다.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관련하여 그 상호간에 지니는 사랑의 교제 안에서 그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구원론적인 사역의 기반위에서 성취되어진 만물의 새 창조를 제시함으로써 만물의 새로워진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 

현대 신학은 실존주의의 기반위에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해석학적 요소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 신학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에 많은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학의 그 존재론적 의미를 인간에 관련하여 적용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연구의 대상인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어느 학자들보다도 인간의 실존적 의미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와 역할에 있어서 개념을 구원론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새 희망을 주는 하나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 계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으로 인식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계시로 인식하지를 않는다. 

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실존주의적인 이해에 따라서 상호간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몰트만은 삼위 하나님을 상호 내재(perichoresis)를 이루시는 상태를 유지하며 세 위격 상호간에서 자유롭게 함께하시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상호 내재와 사랑의 협력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몰트만과는 달리 삼위 간에 있어서의 동등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기반을 성육신하신 성자에 두고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와 성령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독론의 입장에서 볼 때 두 학자의 관점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으나 차이점도 지니고 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구원론적인 사역을 위한 ‘자기 제한’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케노시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에 대한 자기 부인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 안에서의 종속적 존재로 임하면서 자기 존재에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다고 제시한다. 판넨베르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인간의 원형(Urbild)으로서 구원사역을 담당하신 분이다. 

삼위일체의 관계에 있어서 두 학자들은 성육신하신 아들의 인식으로부터 삼위일체의 인식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삼위일체 인식을 본질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위로부터의 인식’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되는 ‘아래로부터의 인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을 새 창조된 존재로서 제시하는데 있어서 성경의 진술을 넘어서 인간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의 창조에 참여하는 자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완성될 나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대속과 부활에 의하여 현존하는 사회에서 그 미래의 성취를 이룬 것으로 개념화한다. 이들은 인간을 희망의 상태 내에서 사회에 복음을 전파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힘써야 할 존재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들의 신학적 입장들은 현대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구성되어진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신학적 입장에 그 기반을 제공해주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들은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으며, 인간이 속한 사회의 실제적 문제에만 관심을 지님으로 인하여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