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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의 성령론 - 임종구

메르시어 2023. 5. 3. 11:00

로이드존스의 성령론 - 임종구

2014-02-21 02:14:19


로이드존스(D.M. Lliyd Jones)의 성령론

                                   

임 종 구(Ph. D. 4학기 교회사전공)

 

 

    목 차

 

   Ⅰ.서론

 

   Ⅱ.로이드 존스(D. M. Lliyd-Jones, 1899∼1981)에 대한 이해

     1.생애와 목회

       1)생애

       2)설교자 로이드 존스

     2.시대적 배경

       1)오순절 운동(Pentecostalism)

       2)개혁교회 상황(Reformed church)

     3.신학적 배경

       1)감리교도 로이드 존스

       2)청교도 로이드 존스

       3)개혁주의자 로이드 존스

 

   Ⅲ.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1.오순절 성령강림

       1)로이드 존스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이해

       2)다양한 견해들

       3)개혁주의의 입장

         ①존 스토트의 견해 (John R.W. Stott,1921-2011)

         ②리차드 게핀의 견해 (Richard B. Gaffin)

     2.성령세례

       1)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

       2)성화와 성령 세례

       3)성령 세례의 결과

       4)개혁주의의 입장

     3.성령의 은사

       1)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

       2)성령의 은사에 대한 두 입장

         ①연속주의자들의 입장

         ②종결론자들의 입장

 

   Ⅳ.결론

  

    참고문헌

 

 

Ⅰ.서론

 

 20세기 전반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을 받았고, 또 지성인들의 관심을 모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A. Toynbee, 1889-1975)가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을 남겼다. 20세기의 성령론의 논쟁도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 불릴만할 정도로 개혁파와 오순절파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이런 성령론의 문제는 1980년대 이후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도 성령 세례에 관한 문제가 토론되어지고 있다. 최갑종은 성령 세례의 논쟁이 심화된 원인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성령 세례와 성령 은사를 모든 크리스찬들이 지향하여야 할 필수적인 체험요소임을 주장하는 오순절 계열의 교회의 급격한 성장으로0 인해 충분한 신학적 비판없이 장로교단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목회현장에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의 가장 큰 장로교단의 직영 신학대학인 총신대에서 오랫동안 교의학을 담당했던 차영배 교수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문제와 중생과 성령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해석보다는 오순절 신학에서 강조되고 있는 해석과 유사한 주장을 가르치고 보급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1980년대 후반 이후 금세기 가장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진 로이드 존스목사의 성령론에 관한 많은 책들이 한국말로 번역되어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철저한 청교도 신학과 복음주의 신앙의 노선에 서 있다고 자처했던 로이드 존스는 1960년대 후반부터 중생과 성령 세례를 동일시하던 전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성령 세례를 능력 있는 복음전파와 사역을 위해 받아야 할 능력의 은사임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많은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환영을 받았다는 점이다.

 

 본 고에서는 이런 성령론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세부분으로 나누어 오순절의 주장에서부터 로이드 존스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의견들을 함께 청취하면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의 윤곽을 드러내어 로이드 존스가 주장하는 성령론의 대략을 파악하고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

 

 

Ⅱ.로이드 존스(D. M. Lliyd-Jones, 1899∼1981)에 대한 이해

 

1.생애와 목회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논하기에 앞서 간략하나마 그의 생애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1)생애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1899년 12월 20일 부친 헨리 로이드 존스와 모친 막달렌 사이에 둘째 아들로 웨일즈 지방 카르디프(Cardiff)주의 도날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06년 봄에 부모님과 형 해롤드(Harold), 동생 빈센트(Vincent)와 함께 랑게이토(Liangeitho) 마을로 이사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38년에 웨일즈를 떠나 런던으로 왔다. 마틴은 아버지를 곁에서 칼빈파 감리교회(Calvinistic Methodist)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당시 웨일즈 칼빈파 감리교회는 알미니안파 감리교회와는 전혀 다른 신앙적 형태였다.

 1913년 그에게 의미를 주었던 사건은 그의 교회가 칼빈파 감리교 소속 봉사단 단체를 랑게이토에 초대한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로이드 존스는 전에는 들어볼 수 없었던 폭넓은 설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한번은 토마스 윌리암스(T. C. Williams)박사와 존 윌리암스 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그들의 장엄한 설교뿐 아니라, 그들의 훌륭한 인품에 매료당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정치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역사와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은 일찍부터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1916년에 치룬 시험 결과는 그의 생애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 즉, 웨일즈 신문에 머리기사로, ‘랑게이토 소년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 런던대학교 고등부 시험에 6개 과목 통과, 그중 5개 과목은 최고득점’이라고 실렸던 것이다. 그런 결과로 비록 16세의 어린 나이지만 기초 시험과 학장과의 면접에서 당당히 통과하여 1916년 10월 6일에 82명의 학생과 함께 의학 학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1921년 의학공부의 첫 관문인 M.R.C.S.와 L.R.C.P 학위를 6월에 받았고 10월 M.B.B.S(의학박사)를 받았다. 당시 로이드 존스는 1923-1924년, 2년간 하더 병원의 제1의 임상의학조교로서 봉직하였다. 하더 경의 사상과 가르침 속에서 로이드 존스는 큰 영향을 받았다. 하더는 소크라테스적인 교육 전통으로 주도면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학생들이 정확하게 사고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도록 가르쳤다. 

 로이드 존스는 1927년 1월에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54년이나 지속되었으며, 금술이 좋았고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결혼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그의 아내 베단은 신앙이 없는 명목적 그리스도인이었다. 허나 그녀의 할어버지 에반 필립스는 웨일즈 출신 중 가장 탁월한 목사님들 가운데 한 분이셨다.  그는 이미 목회자가 되라는 소명과 오랫동안 씨름했으며,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도 오랫동안 씨름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스펄전(Spurgeon)의 글에 매료되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 그것을 하십시오. 목회를 안 하고도 견뎌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십시오.” 라는 말에 로이드 존스는 소명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청교도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포윅(F. J. Powicke)이 쓴 『리차드 박스터의 생애』(The Autobiography of Richard Baxter)였다. 그 책은 로이드 존스에게 청교도에 관해 첫 지식을 주는 것이었지만, 박스터의 진지한 신앙심은 로이드 존스를 더욱 흔들어 놓았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10월 이스트 엔드에 있는 포플라 선교회에서 처음으로 강단에 섰고, 채링 크로스 교회에서의 설교는 10월 10일에 웨일즈에서는 11월 11일에 첫 설교를 하였지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927년 2월 4일 아베라본에서 로이드 존스는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로이드 존스는 1927년 2월 6일 주일에 아베라본의 샌드필드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목사로서 첫 설교를 하였다. 그의 첫 목회시절(1927-1938)의 설교는 전도설교(Evangelistic Sermons)였다. 그의 10년간의 목회기간동안 한 설교를 일주일 내내 몸소 손으로 쓰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고, 그 원고가 1981년에 그의 부인에 의해 발견되어 출판되었다. 그의 전도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양심을 향하여 선포되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사역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를 초대하기 원하는 단체들은 모두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1904-1905년 당시 영적 부흥 축복으로 가득 찼었던 웨일즈로 다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부흥기간 동안의 결과는 여러 교파가 혼합되었고 많은 곳에서 기성교회 내에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칼빈파 감리교회는 그런 흐름에서 탈출하려고 진통을 겪었으며 침례교와 플리머드 형제교회 Plymouth Breathren, 1820년대에 영국사람 존 다비가 창시한 칼빈파의 종파는 수적으로 증가하였고, 오순절파는 새로운 부흥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튀어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냉냉한 교회의 힘없는 예배로부터 많은 성도들을 끌고 나갔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는 1904년 이후에 웨일즈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당시의 설교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죄를 회개케 하는 것인데, 강단에서는 그런 면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해주고, 위로해 주며, 즐겁게 해주는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알고 있었다. 복음 앞에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 그것은 1892년 스펄전이 죽은 후 로이드 존스를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1932 당시 웨일즈에는 두 종류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는 두 운동 모두에 적대적이었다. 하나는, ‘옥스포드 그룹운동’(Oxford Group Movement) 이 운동은 후에 ‘도덕 재무장 운동’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미국에서 건너온 루터교 목사인 프랭크 부크맨(Frank Buchman)의 영향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옥스포드 그룹 운동’은 진리 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찾자는 것이다. 이 단체는 ‘성령’을 강조하며, 꿈이나 황홀경 같은 신비한 체험들을 중시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운동을 외롭게 저지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확신하는 것은 진리가 먼저이지, 경험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닥쳐온 두 번째의 논쟁거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가르침에 관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초자연주의와 개혁신앙을 요구하였다. 대서양의 양쪽에서 바르트를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목회자 모임 때마다 ‘왜 바르트주의는 정통 기독교가 아닌가’라는 사실을 논증하기 시작했다. 이어1937년 로이드 존스 목사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피츠버그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당시 장로교회 교단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그 흐름은 계속해서 성경주의자들을 공격했으며, 1936년 총회에서는 자유주의의 타도의 선봉이었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박사의 목회생활을 정지시키고 제명했던 사건이 있었다. 피츠버그의 근처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총회 순서중 4번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6월 3일 “장로교”(The Presbyterian)신문에서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총회 진행중에 초석(key note)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을 꺾고, 기독교의 진리를 바로 선포하였다. 특별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한 나머지 불편한 심기를 보인 사람도 있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초교파운동이었다. 그 운동들은 어느 교회의 통제도 받지 않는 초교파적인 운동이었다. 그것은 각 기구마다 조직이 되어 있고 도시마다 각각 책임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로이드 존스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IVF 정기집회에서 주강사의 역할을 했다.

 

 런던의 복음주의 도서관(Evangelical Library) 관장직은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1938년부터 그가 사망한 1981년까지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 분야도 다양했다. 그는 요약된 글을 싫어했고, 소설과 같은 종류의 글도 좋아하지 않았다. 19세기의 추기경 뉴만(Newman)의 전기를 애독하였고, 렉스함의 하이웰 존스(Hywel Jones)목사와 한스 큉(Hans Kung)의 책과 같은 변증학 책도 읽었으며, 특히 교회사와 전기를 사랑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경건주의자이지만, 감상적인 경건주의는 아주 싫어했다. 특별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는 로버트 머레이 맥케인(Robert Murray Mcheyne)의 매일 성경읽기표에 따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었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와 그의 부인 베단은 53년동안 읽어왔고 신양성경은 적어도 110번 정도 읽었다. 놀라운 사실은 1981년 3월 1일에 눈을 감았는데 2월 28일까지 고린도전서의 ‘부활’장을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어왔다는 것이다.

 

 1968년에 마틴 로이든 존스는 암으로 건강이 아주 나빠졌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하심이라는 믿음으로 교회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목회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로이든 존스가 이전에 했던 일들이 계속 되었다. 그는 은퇴한 교회의 웨스트 민스터 친교회에 참여하고, 교회의 상태와 부흥의 필요성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69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그의 설교 사역에 대한 명강의는 「목사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은퇴 후 또다른 사역은 1966년 자신들의 교단들을 떠났거나 미흡하지만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들에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1980년에 그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 예배를 드린 곳은 바르콤(Barcombe)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니 나를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아라.”

    

 그는 아베라본 베들레헴 교회에서 11년동안 그리고 30년동안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그중 5년은 켐벨 몰간과 협동사역을 했고 25년동안은 단독목회를 했다. 웨일즈에 있는 그의 무덤의 비석에는 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이 메시지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일생동안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2)설교자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의사였다. 그러나 의사직을 떠나 복음 설교자가 되려고 했을 때(1926년) 그는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에 대해 갈등하지만 마침내는 영광과 기쁨으로 수용한다. 로이든 존스는 토머스 호더 경 밑에서 활동하였던 것과 할리 가에 있는 그의 방들을 뒤로 하고 고향 남 웨일즈의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기로 결심하였다. 남 웨일즈에 있던 기간은 놀랍도록 열매가 풍성하였다. 그가 샌드필즈의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그를 맞이했던 교인은 80명이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교세가 열배나 증가하였다. 교인 수가 500명을 넘어섰고 하루 저녁에 40명이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1949년,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소위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다. 청교도들이 십자가의 성 요한을 따라서 명명한 이것은 낙담으로 설교자가 목을 조이는듯한 위협을 받는 것으로 로이드 존스는 이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더욱 경험신학을 강조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트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의 두 번째 후계자였던 켄달의 평가에 의하면 1949년의 기점으로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눈에 띄는 차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즉, 초기 몇 해 동안에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지적이었는데 반해 후기에는 더욱 단순하고 성경적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개인적인 세례가 한 번 이상 있음을 인정하는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에 아주 잘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시대적 배경

 

 로이드 존스가 사역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두 가지 강력한 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 하나는 교리를 강조하고 강해 설교를 강조하며 성경에 전적으로 집착하는 개혁주의 운동이고, 또 하나는 성령 세례와 은사, 성령의 개인적인 지도에 대한 강력한 인식과 예배의식의 대담한 독창성을 강조하는 은사운동이었다. 이 두가지 운동은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개혁교회들은 진지하게 입증된 건전한 교리에만 만족하였다. 그래서 전통 우선주의와 전도열의 결핍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교회회중들은 건전한 교리에는 배불러 있었지만 체험과 신앙의 표현 면에서는 막혀 있었다. 반면에 은사운동은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기는 했지만 자아도취와 체험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줄기는 일, 교리에 대한 흥미의 상실, 교회정치의 유치성들과 같은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1)오순절 운동

 

 20세기 오순절파의 등장과 급격한 성장, 그리고 그 뒤를 따른 은사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 오순절파 신자들은 학문 분야에서 별로 내놓은 것 없이 복음 전파의 열정만을 가지고 있었다. 개척자들 중에는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칼빈주의를 반복음적인 것으로 여겨 무시했으며, 선택과 제한적 속죄에 대한 말을 하나님의 사랑과 세계복음화에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순절파 신자들은 자기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에 비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결운동을 뒤따르면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두 단계 신학의 편안함을 느꼈다. A. B.심슨(A. B. Simpson)이 주장하여 성결운동의 기본 교리가 된 중생, 성화, 신유, 재림의 4중 복음의 성화가 차지하는 자리에 성령세례를 대치하여 중생, 성령세례,신유와 긴박한 재림의 4대교리를 순복음(Full Gospel)으로 세우므로 오순절 교단들과 신학이 세워지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세례에다 사도행전 2장 1-4절의 성령 강림시에 나타난 방언을 그 세례의 증거와 불변의 동반사항이라고 교리화하여 성결운동의 성령세례와 구분하였다. 오순절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 교리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신학에 의하여 20세기의 교회성장이 크게 융성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 은사운동은 은사의 부활에 대하여서는 오순절파의 주장과 동일하지만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지 않고 은사에 강조를 두는 면만 다르다. 그래서 은사운동은 은사의 부활에 대한 오순절파의 주장을 주요교파 속으로 퍼뜨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가운데 로이드 존스가 서 있다. 이런 두 운동의 발흥시기에 그의 사역이 이루어졌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염원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관심의 방관자로 남아 있지 못하게 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참된 부어주심의 기미를 보이는 어떤 보고에 대해서도 늘 객관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운동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반응했다.

 오순절파의 운동과 은사 운동은 성령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로이드 존스는이 두 운동의 성령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의 위치를 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편에 오순절파 운동과 은사운동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개혁교회 상황

 

 오순절파 운동 및 은사운동이 싹트는 것과 나란히 다른 움직임이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사람들은 청교도와 대각성 시기의 사람들에게 관시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자극하고 고무시킨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로이드 존스였다. 

 20세기 초의 상황은 스펄젼이 세속화 논쟁에서 패배하고, 케직대회의 가르침이 국교회의 칼빈주의를 침몰시키며, 자유주이와 사회복음이 웨일즈의 강단들을 점령한 상태여서 개혁주의 신학은 사실상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에 로이드 존스는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의 런던 사역은 풍성한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설교에 수 많은 청중들이 운집했으며, 현대생활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서 복음에 적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열정적으로 선포할 때 놀라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한 탁월하고 놀라운 사역이었다. 이후 로이드 존스는 수 많은 개혁주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바짝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1950년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설교자들에게 성령론을 주의 깊고 겸손하게 생각해 볼 것을 간청하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우리의 거룩이신 그리스도』 에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언급한 성령의 인침은 회심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기에 에베소서 강해설교를 통해 로이드 존스는 그의 견해를 바꾸었다. 그는 여전히 완전주의를 배격했고, 죽을 때까지 그랬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한 결과 성령의 인침은 회심과는 명백히 구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많은 청교도들의 저술을 읽고, 청교도들 역시 성령세례와 회심이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리고 성령론에 있어서, 왜곡 없이 성경을 다룰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사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새로운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노력을 통해서 개혁주의자들이 냉랭한 이론만의 신학자들이 아니라, 교리에 접근함에 있어서 경험적이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오순절주의자들만이 성령의 역동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파와 은사운동으로 성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에 런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강단 중 한 곳에 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역동성을 상실한 개혁교회를 깨우기 위해 성령론을 주의 깊고 겸손하게 살펴볼 것을 요청했다.

 

3.신학적 배경

 

  1)감리교도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을 항상 ‘18세기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은 자신이 18세기에 일어난 위대한 교리적, 체험적인 부흥에 강조점을 둔 사람들의 후계자임을 뜻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가 숭배했던 다니엘 로우랜드(Daniel Rowland)와 호웰 해리스(Howell Harris)가 설교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라났다. 랭 케이토는 1730년도에 다니엘 로우랜드가 그 교회를 관장하게 되기까지 웨일즈의 연감에 이름이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우랜드가 그 교회를 관리하기 시작하고 나서 그 명성은 웨일즈의 큰 지역까지 확산되고  급기야 칼빈주의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m) 의 탄생을 보게 하였던 일련의 복음적인 부흥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이곳에서 자라나면서 로이드 존스는 조지 휫필드와 호웰 해리스에게 특별히 영향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휫필드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꼽았다. 그리고 그의 동료인 해리스 역시 로이드 존스에게 위대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믿었으며,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인상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의 모델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에 대한 강의에서 ‘존 칼빈에게는 항상 조지 휫필드가 필요하다’고 의도적으로 말할 정도로 조지 휫필드를 높게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는 학문적인 칼빈주의가 남긴 것을 가리켜서 ‘죽은 정통’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없이는 죽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9세기 사람들과 방법을 싫어했는데 다만 스펄젼은 예외로 생각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 자신을 칼빈의 건전한 교리에 대한 사랑과 감리교 부흥의 불을 결합시킨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후예’로 불러 왔다.

 

  2)청교도 로이드 존스

 

 스펄젼은 자기 시대에 마지막 청교도라고 일컬어졌거니와, 이 칭호는 로마드 존스의 생전에도 그에게 붙어졌다. 로이드 존스는 18세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회의 역사를 읽으면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청교도의 글을 읽은 것을 관찰했다. 그래서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25년에 새로 출간된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우연히 읽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심을 더욱 분발시킨 요인은 1929년에 두 권으로 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발견하고부터이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청교도주의의 절정과 극치를 보게 된다.

 패커는 로이드 존스의 사역에 나타난 청교도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로이드 존스는 영적인 경험을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풀이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는 확신의 체험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주로 청교도들의 시각을 받아들인다. 로이드 존스는 제1차 청교도 연구모임에서 직접적인 확신에 관한 청교도 교리를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모든 청교도들은 양자됨에 대한 지극히 분명한 체험적 확신을 구하고 남에게도 이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적 시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17세기 청교도의 가르침을 초월하였다.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소식을 수용하여, 주기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부흥 교리를 청교도들에게는 등장하지 않는다. 청교도들 모두가 종교개혁을 참된 신앙의 부흥으로 인식하였지만 로이드 존스는 웨일즈의 목회경험과 에드워즈의 부흥교리에 영향을 받아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의 가슴이 부흥에 대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었다면 로이드 존스의 머리는 청교도 신학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개혁주의자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건전한 강해 설교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기초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흥미를 소생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교리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칼빈주의자로서 흔들림이 없었다. 이는 주로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들의 작품과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같은 설교자를 숙독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적인 면에서는 웨필드의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로이드 존스는 1932년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워필드 전집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워필드의 신학에 심취했는데, 그것은 워필드의 신학이 성경에 기초했고 주해적으로 정확했을 뿐아니라 뜨거운 영성이 겸비되었기 때문이었다.로이드 존스는 워필드에게 크게 빚진 것을 인정하고 그의 교리를 공유했지만 그 전통과 전적으로 하나되지 못한 것은 부흥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에 대한 그의 지식 때문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칼빈주의의 교리와 감리교도의 열심을 조화시키길 원했고, 이 두 가지 요소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놀랄만큼 독자성이 강한 사상가였지만, 자신의 받은 유산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 유산에는 칼빈주의 감리교도, 비국교청교도, 그리고 개혁주의가 있었다.

 

 

Ⅲ.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1.오순절 성령강림

 

     1)로이드 존스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이해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사건에 대해서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없고, 오직 그의 설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들은 글을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글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견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을 한 전환점으로 보면서 두 가지 위험이 있다고 한다. 즉 오순절을 너무 강조하는 위험과 오순절을 너무 강조하지 못하는 위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어려움은 성경은 분명히 오순절 이전까지는 성령께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오순절 날 이전에도 성령의 강한 역사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진술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오순절에는  새로운 무엇, 특별하고 부가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즉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성령님의 사역과 작용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특별히 부활과 승청은 더 중요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 오순절의 결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오순절의 위대한 목적은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세주란 사실을 마지막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포되는 사건이 오순절성령강림사건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위대한 도입이다.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임하셨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을 때에 발생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설립이었다. 오순절 이전에도 신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리된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왕국의 시민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은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계시면서 자신들 따르는 자들을 가르치시는 동안에는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피로 사신 교회는 예수는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 앞에 가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오순절에 일어난 중요한 일은 승천 후 10일째 되는 날에 우리의 주님이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자신의 영을 자신의 몸에 채우기 위하여 그 안으로 그리고 그 위로 보내신 사건이다. 

 오순절날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공적으로 도입하는 날이다. 그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어떤 의미에서 구약에서도 교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오순절 날 이후의 교회와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새로운 통일성을 형성했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8장, 10장, 19장의 세 사건을 하나로 보기를 원한다. 이 세 사건에는 통일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거대한 연합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거대한 연합이 사마리아에서도,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의 연합이 발생한 것이다.

 

 셋째,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몸의 구성원으로 교회에 가입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2장의 내용을 살펴 볼 때, 강조점은 그 범위에 있는 것이다. 즉 성령의 부어주심이 더욱 일반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유형과 종류의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심이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넷째, 성령의 내주의 시작이다.구약에서는 성령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거나 혹은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오셨다. 성령께서는 그들 밖으로부터 역사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의미는 안에, 내부에 계신다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내부로부터 역사하시며 거하신다.

 다섯째,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의 성령 충만의 사건이었다. 이런 충만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은 성령 충만의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으로서의 세례, 즉 교회의 도입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들은 특별한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로이드 존스는 그의 다른 책에서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요한복음 20장에 대한 강해에서 개혁주의 교리를 언급하면서 그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즉 오순절에 교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20장의 다락방에 이미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의 목적은 이미 조직된 교회에 능력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순절 이전에 교회가 성립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론에 대해서 예수님의 승천 이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영광을 받으셨고,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져보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늘의 성소에 자신의 피를 드리신 것이라고 반박한다. 영광을 받으심을 예수님의 승천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전에 교회는 이미 형성되었고, 오순절 날은 이미 형성된 교회가 성령세례를 받은 날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옛 선교적 관점이라고 부르고 있다.이 관점에 의하면 오순절 날에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셨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교회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교회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성령 세례의 의미는 바로 능력과 불의 세례이다. 즉 한 사람의 깊은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역사하는 성령이 아니라, 모여 있는 교회에 내려와 그 위에 성령이 부어져서 교회가 능력과 권세와 확신과 영광으로 가득찬 사건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역사적으로 최초로 일어난 사건이므로 반복될 수 없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오순절은 반복될 수 있다.즉,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을 최초의 부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흥은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의 글에는 개혁주의 관점의 글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다른 글에서는 자신이 주장한 부분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가지게 됨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개혁주의적 틀 안에서 성령세레라는 체험을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 세례의 의미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령 세례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로이드 존스의 이런 면에선 그가 교회의 부흥을 간절히 바랬던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그리고 오순절 날의 사건은 교회에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세례의 사건으로서 부흥의 역사로 규정되어진다. 로이드 존스는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과 함께 공동체 차원에서의 오순절의 의미를 발견하고 성령 세례와 부흥을 부각시키려고 하고 있다.

 

 2)다양한 견해들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와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 구속역사(Historia Salutis)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역사적 개혁 교회, 특히 카이퍼, 워필드, 게핀 등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개인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관점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승천에 연결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들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 사건은 후대 사건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이 사건의 단회성(once-for-all action)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오순절 성령 강림을 해석함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오순절교회, 은사파교회, 특히 웨슬리, 피니, 르우벤 토리등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중생 이후의 신자에게 주어지는 개인적 체험으로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방언이 강조되었고, 이런 은사의 체험이 없으면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된다.

 이 경우 오순절 성령 강림은 마땅히 제2축복(the second blessing)에 속하며, 중생 때 없던 것 또는 모자라는 것이 채워지는 체험이다. 그러나 이 해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체험은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방언의 은사 또는 기타 각양 은사들이 수반되며, 대체로 순간적인 체험인 동시에 상당기간 준비단계를 필요로 하는 체험이요 또는 위기 체험을 수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최근 개혁교회 내에서 구속사적 관점과 구원의 서정의 관점을 통합 또는 두 관점의 균형을 찾아보려는 움직임이 대두하였으며, 오순절 또는 신 오순절 교회에서 강조하는 성령운동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용하려고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종래 역사적 개혁교회에서 취하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로이드 존스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누구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중요한 논점이 있다. 일반적인 것은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구원서정의 관점에 맞추면 제자들, 혹은 신자들이 된다.이 경우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고 중생한 자들이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이 두 그룹은 사도행전 2장에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 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 3000명은 120명과 같은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한 것 같지 않다.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확증에 의하면, 그들은 같은 약속을 받았고 같은 선물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그리고 그 일은 전혀 기다릴 필요 없이, 그들이 회개하고 믿은 즉시 일어났다. 이렇게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누가 오늘날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존 스토트는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을 오늘날 신자들의 모델로 제시한다. 120명의 경험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단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전에는 오순절의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대한 묘사로부터 성령에 대한 교리를 추출할 수 없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여기에서 제자들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의 경험을 성령세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해석에는 두 차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곧 구속사적 아원과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이다.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오순절은 단회적이고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일방적인 구속사적 관점이나 구원의 서정적 관점 둘 다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날도 지속되므로 오순절 사건은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로이드 존스는 120명의 제자들의 경험을 오늘날의 모델로서 제시하고 있다.

 

   3)개혁주의자들의 입장

 

     ①존 스토트의 견해

 

  존 스토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3가지의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어서 발생한,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성령의 부어주심음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사역중 마지막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은 새 시대, 메시아의 시대, 또는 성령의 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완결하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 축복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오순절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없이 이 새 시대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마련해 주신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둘째, 오순절 성령 강림은 좀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사건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구약 성경의 일반적인 기대의 성취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일차적으로 사도들에게 주신 특별한 약속의 성취였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권위 있는 사도들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도들을 구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는 오순절이 최초의 부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최초로 그분의 능력을 풍성히 나타내셔서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죄에 대한 찔림을 받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런 부흥 또는 성령의 능력이 이례적으로 나타남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을 표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존 스토트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성령세례로 보지만 성령세례는 성령의 선물과 같은 것으로 새 언약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며 또한 시초적 축복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며 그 복의 수여자이신 주 예수님은 그 분의 언약에 들어오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②리차드 게핀의 견해

 

 게핀은 신약의 성령의 사역이 오순절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인 전환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약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기본관점은 역사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럼로 우리가 고찰해야 하는 것은 오순절 사건의 역사적 의의라는 것이다. 즉 성령세례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기독론적 차원과 교회론적 차원과 신자의 경험적 차원에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기독론적 차원이다.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베푸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요약하면 성령의 선물을 확보하신 다음 그것을 오순절에 교회에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역 전체는 메시야 세례를 베푸시기 위해 친히 종말심판을 당하신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은 그리스도의 획기적, 결정적 사건들, 특히 부활 및 승천과 직결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전체적인 구조속에서 예수님 자신이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사건과 오순절 사건이 병행하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요단강 사건은 예수님에 놓여 있는 메시야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을 주시는 것, 즉 교회의 구원의 성취를 위해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받은 성령을 성부의 약속된 선물로 교회에 주심, 이것은 이미 완성된 구원사역에 대한 보상으로서 받으신 선물이다. 즉 오순절 성령은 부활,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둘째, 교회론적인 차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항상 교회의 유익을 위한 메시야의 공적인 사역이기 때문에  기독론적 관점과 교회론적 관점은 상호보완적인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오순절 성령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은 그 몸 속으로 연합되어 들어가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의 선물을 누린다. 교회 전체가 성령선물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물이 개인별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다.

 

 셋째는 신자의 경험적 차원이다. 오순절 사건은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오순절 성령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 역사상의 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구원의 서정이 구속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둘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대적 충분성과 통전성을 위태롭게 한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구속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 특이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근본적으로 120명 신자들의 특수한 경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이 중생 후 제2의 축복으로 받게 되는 성령체험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매 시대마다 추구해야 할 표본적 성령의 체험도 아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회심이 곧 오순절 경험이다. 즉 모든 신자들은 예외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됨으로써 성령선물을 받았고 교회에 쏟아 부어진 오순절의 갈증 해소의 강물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로이드 존스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견해와 그 의미를 살펴보았고, 또한 그와 함께 개혁주의자로서 존 스토트와 리차드 게핀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어떤 한 가지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들은 어떤 방식으로 신학화하는가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성령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성령 세례의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성령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2.성령세례

       1)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를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중생과 성령 세례를 분리시킨다. 즉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 하신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신자이고,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세례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즉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성령의 내주와 분리시킨다.

 그러면서 성령 세례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원초적으로 성령의 어떤 사역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곧 주 예수께서 특수하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므로 성령세례는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성령세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받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혼란은 단순히 ‘세례받다’라는 말이 사용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를 부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중요한 것은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믿는 것이 먼저이고, 성령의 세례를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같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두 사건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은 분명하게 구별되고 분리 되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없이 자동적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믿음과 확신을 구분한다. 성령 세례를 구원에 대한 위대하고 충만한 확신으로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는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는 사람에게와 이 사람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생은 무의식적인 것이며 비체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와는 동일시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체험적인 어떤 것이다. 비록 화려한 표적들을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인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체험적이고 의식적인 면에서 받은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명백한 영적 체험의 사건”으로 정의한다.

 

       2)성화와 성령 세례

 

 성령께서는 진리를 따라 우리를 성화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확신과 보증 그리고 증거와 증언 및 봉사와 사역에 있어서 위대한 활동을 하신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이처럼 성령의 사역에 대한 바른 구별이 없이는 혼란만 야기된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과 성령의 특수한 사역을 구분한다. 성령께서 수단을 통하여 통상적으로 사역하시는 것을 성령의 간접적 사역이며,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이다. 또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그의 뜻을 밝히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보이시며 우리를 가르치는 자나 전파자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특수사역은 성령께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시며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성령의 특수 사역이 성령 세례의 근원이 된다. 성령 세례는 예외적이며 직접적인 범주에 속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간접적인 방식 즉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언제나 우선적으로 특별히 증거와 증언과 예배에 관계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를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인 성화 사역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주로 도덕적 특성과 성격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주로 증거와 증언과 역사에 있어서 효율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의 첫 번째 결과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한 체험적 증거이다.

 

 성령 세례는 성령의 성화 사역과는 다른 차원의 사역인 것이다. 성령 세례는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의 충만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5장 18절과 관련해서 사람이 성령 충만할 수는 있지만,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세례를 구별한다. 성령 충만은 성화와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에 명령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그렇게 명령되어질 수 없는 독특한 체험이다. 성령 세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 다른 방면에서 쓰여진다고 주장한다.

 

 첫째,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이 있다. 이것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재능과 능력 차원에서의 성령 충만을 입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미 성령 충만해 있음에도 특수한 환경과 위태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다시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생활상의 성령 충만이다. 이것은 주로 에베소서 5장 18절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관한 것으로, 권능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철저히 인격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즉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가 감화와 영향을 받는 것이다.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 세례는 이 두가지의 성령 충만과 동일 시 될 수 없다. 특히 두 번째 의미의 성령 충만과는 구별이 필요하다. 또한 첫 번째 의미에서의 성령 충만과도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한다. 첫 번째 의미의 성령 충만은 신약에서뿐만 아니라 구약의 인물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성령 세례는 오직 오순절 이후의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독특한 선물이다. 성령 세례는 첫 번째 의미의 성령 충만을 가져 올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의 의미의 성령 충만이 곧 성령 세례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령 세례는 영광의 초기 체험이며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실재와 사랑이다” 로이드 존스는 그 이상의 체험을 할 수 있지만, 처음 체험이 바로 성령의 세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와 성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와 성화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성령 세례가 곧 완전히 죄에서 깨끗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성령 세례가 성화를 촉진시킨다고 말한다. 성령 세례가 곧 성화는 아니지만, 성화는 진정한 성령 체험을 판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3)성령 세례의 결과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존재에 대한 자각에 필연으로 수반되는 경외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이라고 말한다. 한편 성령 세례는 가장 높은 형태의 확신을 가져다주는데 로이드 존스는 세 가지의 유형의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성경에서 추론하여 얻는 확신, 둘째는 성경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표준들을 우리의 삶과 체험에 적용시켜서 얻는 확신, 세 번째는 성령께서 친히 주시는 확신이라고 한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의 외적 증거를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는 놀라움, 둘째는 인간의 말에서 증거되어진다고 한다.

 

        4)개혁주의의 입장과 비교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고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성령 세례라는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신학자들이 동일하게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성령 세례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존 스토트는 오순절날 성령 세례가 임했고,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날 성령 세례가 임했고, 신약교회 성도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동일하게 말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그리고 있는 성령 세례는 다르다. 성령 세례에 어떤 현상이 드러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생각하는 성령 세례의 본질적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인의 시초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또한 보편적인 경험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을 받는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성령의 선물은 성령 세례와 동의어이다. 세례라는 말 자체가 입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시초의 경험이다. 그리고 죄사람의 축복과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참하는 보편적인 축복이다. 

 이러한 성령 세례에 대한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성령 세례를 단순히 신자의 구원 서정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은 반드시 중생과 성령 세례 사이의 관계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중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성경에서 사용하는 중생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구원의 서정적 관점에서 정의한다면 성령 세례를 살핌에 있어서도 구원의 서정에 대한 직선적 모델이 가지는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정의함에 있어서 신자의 경험적인 차원에서 정의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의 정의가 보충되어야 한다. 즉 성령 세례는 오순절 날에 일어난 성령 강림을 설명하는데 사용된 용어이기도 하다. 즉 오순절에 성령 강림의 사건이 성령 세례의 사건이다. 오순절의 구속사적 의미는 곧 성령 세례에 있다. 그리고 오순절의 다양한 의미들이 곧 성령 세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의 많은 의미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독특한 구속사적 의미만을 성령 세례로 정의해야 한다.

 

 신약에 성령 세례가 처음 등장한 것은 세례 요한의 메시야 선포에서 비롯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곧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선포되고,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위해서 먼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 담지자가 되셨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위해서, 먼저 구속사역을 이루고 아버지 앞에 나타나사 그 사역을 완성하셔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세례를 주는 일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다.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였을 때, 성령 세례보다 성령 충만과 성령 받음으로 표현되었고, 성령 세례라는 표현은 사라진 것이다.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야 임직에 적용되고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충만으로 표기 되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을 약속하였다.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 세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성령 받음과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의 마심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성령 받음,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의 마심과 마구 혼동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령 세례라는 용어는 오직 오순절 사건의 구속사적 독특성을 나타내는데만 사용해햐 할 것이다. 즉, 오순절날 성령 강림은 그 뒤에 오는 성령의 오심과는 그 특성이 다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성령이 인류에게 처음 오시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반복적인 강림이 아니라 성령의 주거를 확장하심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 세례라는 의미에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로이드 존스가 성령 세례를 통해서 말하고자 한 체험의 실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체험을 성령 세례라는 단어로 신학화하는 것은 많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3.성령의 은사

 

      1)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  

 로이드 존스는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 은사에 대한 몇가지 원칙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성령은 의사들은 자연적인 은사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둘째,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이 주권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신다.

 셋째, 모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교회가 몸이라는 것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특별한 기능이 있다는 개념을 가진다. 몸의 모든 부분이 한 몸 안에 자신의 위치를 갖고 성령님에 의해서 역할을 수행한다.

 넷째, 은사들의 중요성에는 차이가 없다.

 다섯째, 모든 은사들은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과는 다르게 성령의 예외적인 사역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령 세례와 관련해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면서 성령 세례와 성령 세례에 동반하는 특별하고 부수적인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령 세례란 반드시 특별한 은사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의 지속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결코 어떤 종착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겸손하라고 제안한다. 로이드 존스는 절대적인 종결론자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어떤 기록들은 기초적인 것이며 따라서 반복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가장 명백한 실례는 사도들의 예이다.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2장 20절을 근거로 사도와 선지자들은 계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 히브리서2장 3-4절을 근거로 특별한 은사들의 기능이 그들의 사도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므로 더 이상 사도들의 그런 은사들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어떤 일시적인 은사들이 있지만, 영속적인 은사들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시적인 은사에는 사도직의 은사.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등을 제시한다. 하지만 항존하는 은사들도 있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교육의 능력, 섬김과 돕는 은사, 집행과 통치의 은사, 집사와 장로 그리고 다른 직분자들이 소유한 능력, 복음 전파의 능력, 목회를 위한 능력, 권면의 은사, 믿음의 은사등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성령 세례와 관련해서 은사를 주장할 때는 과격해진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께서 특이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절대적인 종결론자들을 비판하고 과도한 연속주의자들의 주장에 경고를 가한다. 로이드 존슨는 즉, 오늘날 복음 전파에 있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확증을 무시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단호히 거부한다 그렇다고 로이드 존스가 모든 은사들이 계속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는 성령의 주권성을 높이고자 하고 있다. 즉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항상 교회에 나타나야 하면, 그러한 은사를 소유하지 못한 것은 믿음의 결핍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2)성령의 은사에 대한 두 입장

 

        ①연속주의자들의 입장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두 가지의 입장이 있다.먼저는 연속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사도 시대에는 표적과 기사들이 초대 교회의 증거에 수반되었다. 병 고침, 예언, 귀신을 쫓아내는 일, 그 밖의 특별한 현상들이 사도행전에 언급되어 있다. 이런 시기로부터 얼마 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점차 교회 생활의 주된 흐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에, 예언과 방언과 병 고침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뒹구는 것과 같은 특이한 현상에 대한 경험들이 카토릭과 개신교 양진영에 속한 수 많은 개인과 단체에 의하여 널리 주장되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소속된 단체에서 이런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체험이 이를 확증한다고 믿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근본적인 확신은 “신약은 한 세대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매 세대마다 일어나야 할 것의 청사진이다”라는 것이다.

 

 연속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첫째, 현대인들이 체험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어떻게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되거나 오도될 수 있겠는가?

 둘째, 신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어떤 것이 폐기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셋째, 종결론자들의 견해는 새 시대에는 두 가지 구별되는 혹은 구별 가능한 세대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사도 시대와 속사도 시대라는 구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오직 한 시대, 즉 종말론적 성령에 의해서 시작된 한 시대를 알고 있을 뿐이다.

 넷째, 바울은 예언이 궁극적으로 종결될 것을 인식하면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것들이 폐하리라”(고전13:10)고 지적하고 있다. 불완전한 것은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사라지는 때는 최종적인 종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예언이나 다른 은사들은 지속될 것이다.

 

        ②종결론자들의 입장

 

 종결론자들은 예언, 방언, 신유, 기적등의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 창설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정경적 성경 계시의 종료 면에서 중지된 은사들이라고 말한다.리차드 게핀은 성령의 은사들을 말씀 은사와 행위은사로 나눌 수 있는데, 예언과 방언과 같은 말씀 은사는 정경 계시와 더불어 중지된 것들이고, 행위 은사들 중에 신유, 기적은 사도들의 말씀을 확증하는 은사들이었으므로 정경 계시의 종료와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종결론자들은 은사의 기능적인 면을 고려한다. 기적들은 그 특성상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변호하고 확정하는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또 사도의 은사들, 부르심 그리고 직책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초석을 놓는 시대의 특징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도직의 독특성을 생각해야 한다. 종결론자들은 정경 계시 종결과 함께 계시 은사들의 종경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예언과 방언과 계시를 확증하는 신유나 기적의 종결을 말한다. 하지만 기도 응답 차원에서의 신유나 기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 사도적 표적들이 중단되었지만 모든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종결론자들이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특이한 은사들이 사도적 복음과 사역의 확증적인 증거로서 독특한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은사들의 최우선적 기능 자체가 한시적인 성격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또 다른 엄청난 기적적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사에 대한 이러한 입장들은 모두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연속주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20세기와 그 이전의 교회사 시대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그리고 종결론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이 병을 고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의 체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퍼거슨은 현상 자체는 그대로 인정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체험을 좀더 성경적인 범주에 따라 규정하는 방법이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절대적인 종결론자들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지만, 은사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견해는 오히려 온건한 종결론자들과 유사하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연속론자들이 광신적으로 될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영적인 체험들을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새롭게 신학화할 때,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과격한 측면이 있다. 이것은 그가 성령의 주권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라 볼 수 있다.

 

   Ⅳ.결론

 

 로이드 존스는 신학자라기보다는 목회자요 설교가였다. 로이드 존스가 기독교 전체 교리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는 교리를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그 어떤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전개함에 있어 이런 전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조차도 사안에 따라서 강조점의 무게가 달리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먼저 설교자로서 성령에 접근했다. 그의 성령론도 그런 접근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불타는 부흥에 대한 열망이 개혁주의에서 오순절주의의 성령론으로 내다본 원인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그의 목회현장에서 그가 경험한 목회적 부흥이 그의 성령론에 깊은 영향을 주는 태생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로이드 존스의 주저이기도 한 “목사와 설교”를 보면 그의 성령론의 한 단면을 보게 해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설교자의 모델로 보았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제자들이 설교자로서 어떻게 준비되어가는가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관심은 중생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성령의 역사를 요구하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자체가 은사였지만, 특별히 설교자를 진정한 설교자로 만드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훈련이 아니라 바로 성령 세례였다. 그리고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은 설교자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복음 전도자로서 복음 전도 방식에 대한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틀에 박인 20세기식 복음전도는 세가지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지성적 설득을 대신하는 조작적인 감정주의는 거짓 회심을 격려하는 일종의 세뇌이고, 둘째는 설교자가 마치 성령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결신의 촉구도 역시 좋지 못한 경향을 가지며, 셋째로 회심과 관련해서 언제나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를 역설하지 못하므로 진정한 회심자들은 믿은 후에도 영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얕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문다고 했다. 물론 이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가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 체험과는 격리된 성경적 전통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전통으로, 기쁨이 결여된 칼빈주의적 경건주의자들에게는 영적인 벌레들에게 먹혀가면서 고통하는 사람들로, 지나치게 은사주의로 나가는 감정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암적인 광신주의자들로 보았고 자신의 성령론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목회적으로 치유하기를 원했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을 최초의 부흥으로 강조했고, 오늘날의 교회가 돌아가야 할 모델로 보았다. 즉 오순절은 교회가 성령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연합, 중생, 성령의 내주와 분리시켜서 능력의 세례로 정의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 은사, 부흥은 성령의 특별하고 직접적인 사역이다.

 

 로이드 존스는 영적인 체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성령론을 통해 신학화했다. 로이드 존슨가 죽은 전통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해가면서까지 개혁주의를 향해 던지는 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의 신학작업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수가 많다. 그는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성령 세례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중생과 성령 세례를 분리하는 그의 성령 세례의 개념도 의도적인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게 한다. 또 성령 세례를 능력 세례라고 함으로써 새 언약의 본질인 구원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구원의 근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그가 주시는 복에 더 집중하는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이 체험이라는 강조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이라는 측면을 축소시키고 있다.로이드 존스는 개혁주의 성령론에 대해서 신자들의 현재의 체험에 대한 해석의 틀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면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이 부흥과 성령의 능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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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수.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1989.

권성수. 『종말과 영성』 서울:도서출판 횃불,1997.

김광열. 『구원과 성화』 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2000.

김길성. 『개혁신학과 교회』 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1996.

김남준. 『거룩한 부흥』 서울:생명의 말씀사,1999.

박영선. 『성령론』 서울:크리스챤서적,1986.

박영호. 『로이드 존스의 생애』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85.

이한수. 『신약의 성령론』 서울:충신대학출판부,1994.

정근두. 『로이드 존스의 설교론』 서울:여수룬,1991.

차영배. 『성령론』 서울:경향문화사,1987.

최갑종. 『성령과 율법』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94.

 

Ferguson, Sinclair. The Holy Spirt. 김재성 역 『성령』  서울:IVP, 1999. 

Gaffin, Richard B. Perspectives on Pentecost.권성수 역,『성령은사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Grudem, Wayne. Systematic theology.노진준 역.『조직신학(중)』 서울:은성, 1996. 

Berkhof, Hendrikus. The Doctrine o Holy Spirit. 황성룡 역,『성령론』 서울:성광문화사, 1985.      

 

 

 

 

 

 

 

 

 

 

 

 

 

 

 

 

 

 

 

 

 

 

 

 

 

 

 

 

 

 

 

 

 

 

 

Annotated Bibliography

 

 

Gaffin, Richard B. Perspectives on Pentecost.권성수 역,『성령은사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3. 

 

   저자인 리처드 개핀 2세(Richard B. Gaffin Jr.)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PC)의 목사이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 및 조직 신학의 찰스 크라헤 석좌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개핀은 리덜보스의 견해를 적극 수용하여 미국에 알리는 자이고, 한국교회에서는 개핀의 신학적 주장을 가장 무난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또한 개핀은 워필드의 신학을 이어받은 신약학자로 “신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보면 예언과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중지되도록 된 것이며 사실 이미 중지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개핀의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 약속과 부탁 2장 성령의 선물, 제3장 성령의 은사 개요, 제4장 예언과 방언, 제5장 제6장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Ferguson, Sinclair. The Holy Spirt. 김재성 역 『성령』  서울:IVP, 1999. 

 

 싱클레어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포함한 세 개의 학위과정을 마치고, 스코틀랜드 교회 소속 목사로 글래스고에 있는 세인트 조지 트론 교회St. George’s Tron Church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다. 현재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콜롬비아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의 수석목사이며, 달라스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수석객원교수로 섬기고 있다. 이 책은 현대의 성령론에 대한 수많은 조류와 사조를 각주에서 일일이 참고하고 논평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순절과 성령의 은사 이해에서 이미 주목할 만한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Jr.)도 이 책이야말로 개혁신학의 발전을 보여 주는 놀라운 책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성경적 안목으로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경험이나 전통, 혹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관행에서 성령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교회의 문서들과 신학자들의 설명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정리된 본서의 내용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Grudem, Wayne. Systematic theology.노진준 역.『조직신학(중)』 서울:은성, 1996. 

 

 웨인 그루뎀은 미국 에리조나의 스콧데일에 소재한 피닉스신학교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중이다.그는 하버드대학(B.A.)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M.Div.)와 영국의 캐브리지대학교(Ph.D.)를 졸업했다. 저자인 웨인 그루뎀 박사는 "신학은 모름지기 삶과 기도와 찬양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그의 서언에 밝히고 있다. 그러기 이전에 신학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각 장서두에 신학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분명히 정의한 후 시작한다. 그런 후 개인의 삶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이는 개인 및 교회 생활과 관련되는 신학적인 질문이다.

세례, 성령의 은사, 가정과 교회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 최후 심한에 대한 것 등 논쟁적인 문제들은 충분히 다루었다. 저자 그루뎀 박사의 특징이라면 분명하면서도 예절바르다는 것이다.

각 장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영적인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 줌으로써, 저자의 따뜻하고 목회적이며 실천적인 접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조직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주고 있다.

 

 

Lliyd-Jones, D. M. God The Holy Spirit 이순태 역.『성령 하나님』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1899년 12월 20일 웨일즈 지방 카르디프(Cardiff)주의 도날드에서 태어났다.그리고 1938년에 웨일즈를 떠나 런던으로 왔다.그는 1921년 의학공부의 첫 관문인 M.R.C.S.와 L.R.C.P 학위를 6월에 받았고 10월 M.B.B.S(의학박사)를 받았다. 당시 로이드 존스는 1923-1924년, 2년간 하더 병원의 제1의 임상의학조교로서 봉직하였다.그 후 로이드 존스는 1924년과 1925년에 문학토론협회의 금요집회에서 “영적 각성”에 대한 연설을 두 번하였다. 그 후 로이든 존스는 1927년 2월 6일 주일에 아베라본의 샌드필드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목사로서 첫 설교를 하였다. 그의 첫 목회시절(1927-1938)의 설교는 전도설교(Evangelistic Sermons)였다. 그의 10년간의 목회기간동안 한 설교를 일주일 내내 몸소 손으로 쓰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고, 그 원고가 1981년에 그의 부인에 의해 발견되어 출판되었다. 그의 전도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양심을 향하여 선포되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본서는 그가 목회현장에서 영국의 위기와 강단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느낀 부흥에의 갈등이 로이드 존스만의 독특한 성령론을 낳게 만들었으며 그의 성령세례에 관한 주장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저자는 본서에서 “성령 세례가 중생할 때 모든 사람에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을 부인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분명히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중생은 무의식적이며 비체험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근본적으로 체험적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성령 세례와 성화의 관계에 대하여 “성화는 궁극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아무도 그가 자신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시기까지 그 자신 스스로가 성화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중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되며 성화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