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내러티브- 다니엘 하이드
성막 내러티브- 다니엘 하이드
2014-02-20 23:06:54
God in Our Midst: The Tabernacle and Our Relationship with God
© 2012 by Daniel R. Hyde
Published by Reformation Trust Publishing a division of Ligonier Ministries
421 Ligonier Court, Sanford, FL 32771
Ligonier.org ReformationTrust.com
Printed in Crawfordsville, Indiana
RR Donnelley and Sons
June 2012
First edition
추천사
“흔히 알레고리적 해석이 이 구약의 중요한 부분을 해석하는 ‘기독교적 방법론(Christianizing)’으로 여겨지곤 했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알레고리적 해석을 피하며 성막을 강해하는 모습은 신선하다 말할 수 있겠다. 대니얼 하이드 목사는 건전하게 본문을 주해하여, 우리가 오직 ‘신약의 눈으로 본문을 보고, 본문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와 신실한 자들을 위한 교훈적 역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 그레이엄 골즈워디 박사(DR. GRAEME GOLDSWORTHY)
호주, 무어신학교 방문교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건전한 주해, 유용한 통찰력, 예리한 적용, 애정어린 헌신 등등이 듬뿍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가구나 휘장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용서하시는 은혜에서 비롯하는 평강 안에서 그분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목회자들을 연구실에서 강단으로, 성도들을 서재에서 예배의 처소로 이끌어 줄 것이다.”
— 브라이언 보스 목사(REV. BRIAN VOS)
미시건, 삼위일체 연합개혁교회 담임목사
“대니얼 하이드 목사는 일관되게 개념들을 명료히 유지하는 능력.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 시의성있는 접근 등으로 자신의 역사적•신학적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각각의 장들은 성도들의 성장을 훌륭하게 돕는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 성막에 관한 책들에 관한 한, 이제 나는 먼저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 제럴드 빌크스 박사(DR. GERALD M. BILKES)
미시건, 청교도개혁신학교 신약 및 성경신학 교수
“이 책은 출애굽기 25-40의 강해를 통해 어떻게 성막이 그리스도를 예시하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구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원칙들도 제시해 주고 있다. 부록인 ‘모세오경을 설교하라’만으로도 이 책은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구약을 그처럼 설교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 리처드 벨처 2세 박사(DR. RICHARD P. BELCHER JR.)
노스 캐롤라이너, 개혁신학교 구약학 교수
“이 책에서, 대니얼 하이드 목사는 독자들에게 진실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주는 특정 본문 뿐만 아니라 전체 줄거리 측면에서 성경을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성막의 건립, 희생제사, 성막에서 봉사했던 사람들 등, 하이드 목사의 성막 연구는 광범위한 신학적 문제들과 풍부하고 영적인 적용점에 대한 설명을 논의하기 위한 출입구 역할을 한다. 성막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이 책은 신학과 경건에 충실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이 책에서 많은 내용들을 반복적으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적극 추천한다!”
— 마크 밴더 하트 목사(REV. MARK VANDER HART)
인디애나, 미드 아메리카 개혁신학교 구약학 협력교수
“마치 구체물로 아이들을 가르치듯이, 하나님은 성막 같은 물리적 상징들로 구약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수천년이 지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임시로 거하셨던 처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잊고 말았다. 대니얼 하이드 목사는 그 당시로 돌아가 신약의 렌즈로 하나님께서 예술적으로 보여주신 당신의 엄위하시고 구속하시는 임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셨을 때 그분을 가리키던 것들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성막으로 이전 보다 더한 광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헤베르 카를로스 드 캄포스 박사(DR. HEBER CARLOS DE CAMPOS JR.)
브라질, 맥캔지 장로교학회 조직신학 교수
“하나님의 말씀인 이 출애굽기 부분의 의미를 아주 명징하고 신실하게 풀이해 주는 책을 갖게 된다니 참으로 마음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니얼 하이드 목사는 우리에게 성막에 관한 헌신적이고 탁월한 연구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의 예도 제시해 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막의 내용들을 풀어내기 위한 열쇠로 알레고리, 상상력, 추측 등을 사용하였지만, 그 모든 방법들은 오히려 복잡하고 부적합한 해석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이 책은 그 기록한 의도대로 쉽게 우리가 성막 내러티브를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우리는 하이드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 즉 약속된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위대한 사역 등의 가르침을 듣게 된다. 성막 내러티브가 내포하는 신비, 곧 그 모든 비밀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누구의 도움없이 이 내용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이 소책자 앞부분을 읽자마자 독자들이 스스로 그 일정양식을 깨달아 더 많은 친숙한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연결해 볼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경이로움을 더 자세하게 아는 것보다 더한 흥미있는 일이 있을까? 하이드 목사의 책은 애석하게도 그동안 성경을 덮고 외면해 오던 수많은 성경연구그룹들과 모임들이 성경을 펴고 배울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다.”
— 데이빗 R. 잭슨 박사(DR. DAVID R. JACKSON)
호주, 윌리엄 캐리 기독학교 수석교사
서문
나처럼 독자들도 많은 구약 관련 서적들에 실망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표지는 아주 괜찮아 보이고, 제목은 마음에 쏙 들며, 추천사는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지만, 첫 번째 장을 읽고는 이내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책들은 너무나 따분하고, 학술적이며, 실제적이지 않고, “첫 장 읽기용(read-one-chapter)”으로 분류되기 딱 좋을 뿐이다.
그러면, 복된 삶을 사는데 유용한 구약 관련 책들을 되도록 바르게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적 교훈을 주는 구약 관련 책을 선택할 때, 내가 바라는 여섯가지 사항을 기술해 본다.
첫째, 숭앙심과 근면함을 가지고 성경의 본문을 다루는 책이기를 바란다. 장대한 분량의 구약성경은 일간 신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왔다. 구약은 공격과 조롱을 당하고, 무시받아왔다. 그런 행위를 일삼은 자들은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저자가 구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으로 여기고, 그 귀한 말씀 하나하나를 열심히 연구하여 그 속에서 최고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둘째, 해석을 그 본래의 맥락에서 시작하여, 거기에서 얼마 동안 머물러야 한다. 많은 책들이 구약을 21세기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최신판 간행물로 여기는 듯 보인다. 그 책들은 수천년 전,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최초의 청중들에게 전해진 본래 메시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오류에 빠져 다른 사람들마저 현혹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본래 메시지를 고려하지 못하는 책을 읽는 것이다.
셋째, 구약 관련 책이 하나님의 진리는 오랜 세월 동안 점진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설명을 할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 진리의 말씀이 하나의 확실하고 변함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끔씩, 어떤 저자들의 책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계획을 시작하셨다 실패하면 두 번째 계획을, 그것도 실패하면 그 다음 계획을 진행하신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마치 한 알의 씨앗이 점차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내어 꽃과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 은혜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죄인들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러한 책들의 저자들은 그같은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무한히 시작만 하신다는 주장, 즉 씨앗을 심고 다시 뽑기를 반복적으로 하신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넷째, 나는 구석을 해석하기 위해 신약을 사용할 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본을 따르는 책이면 좋겠다. 내가 아는 어떤 구약학 교수는 자기 강의시간에 일절 신약의 구절들을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경향은 마치 불을 끄고 공부를 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신약을 통해서만 구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분명히 했듯이, 구약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다섯째 사항은 이 넷째 조건에 연유한다. 구약 관련 책은 신구약 모든 성도들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받은 존재로 연합되어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구약 신자들과 신약 교회를 연결시켜야 한다. 구약의 믿음은 확실하거나 강했는가? 구약 신자들은 우리와 같은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가? 그들은 우리가 가진 성령의 능력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절대 아니다. 그러나, 구약 신자들은 오직 메시아 안에 있는 구원의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성령의 내적 사역이 없이는 중생, 성화, 보존됨 등의 소망을 품을 수 없었다.
마지막 사항은 현대 교회에게 진리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핵심만 언급할 뿐인 구약 관련 책은 부지기수이다. 어떤 저자들에게는 예배, 교제, 순종, 섬김 등은 하찮은 말인 것이다.
이쯤되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그런 사항들에 합한 구약 관련 책은 없지 않나요?” 유감스럽지만,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그같은 사항들에 합하는 책을 말할 수 있어서 마음이 너무 기쁘다. 바로 나와 친분이 있는 대니얼 하이드 목사가 쓴 성막에 대한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얼마나 진귀한 일인가!
하이드 목사는 본문을 숭앙심 넘치는 관심과 철저한 근면함으로 대하며, 그 본문 속에서 모든 얻을 수 있는 영적 양식을 찾아낸다. 그는 성막이 있던 당시에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본래의 맥락, 당대의 사람들과 상황 등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했다. 각 시대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계시를 존중하면서도, 그는 신구약 모두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계획의 언약적 통일성을 설명해 준다. 또한 신약적 이해를 구약 신자들에게 전가하는 위험을 피할 뿐만 아니라, 구약을 이해하기 위하여 은혜로이 받은 신약의 빛도 기꺼이 수용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드 목사는 이스라엘을 어딘가 불확실하고, 미신적이며, 율법주의적 우상숭배자들이 아닌 믿음의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구약에 대한 현대적 저작을 펴낸 것이다. 물론, 하이드 목사가 이전에 지은 9백만 권의 책들 중 하나를 읽은 독자라면(발행인에게 힘을 더해 주기 위한 우스갯소리다), 그가 머리와 마음, 손을 섬기는 책을 통해 교회에 복을 끼치는 열정의 사람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독자 여러분을 예배로 인도해 주고, 순종을 격려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거하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다시금 구약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의 관심을 갖게 된 목회자나 교사들, 특히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아직도 출애굽기나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서 “이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지?”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에게 하이드 목사는 답을 제시해 줄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크리스천이라면 하이드 목사의 책을 통해 다른 유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성경의 부분들을 찾게 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간절히 구하게 될 것이다.
- 데이빗 머리 박사(DR. DAVID MURRAY
미시간, 청교도개혁신학교 구약 및 실천신학 교수
2012년 1월
차 례 |
0 | 서론 (Introduction) 1 |
1 | 성막 건립을 위한 헌물 (The Contributions to Build the Tabernacle) 27 |
2 | 광야의 성막 (The Tabernacle in the Wilderness) 33 |
3 | 언약궤 (The Ark of the Covenant) 41 |
4 | 진설병 올려놓는 상 (The Table with Bread) 50 |
5 | 정금 등대 (The Lamp of Gold) 57 |
6 | 성막의 건립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64 |
7 | 놋단(The Altar of Bronze) 71 |
8 | 성막의 뜰 (The Lord’s Courtyard) 79 |
9 | 주님의 제사장직 (The Priesthood of the Lord) 87 |
10 | 제사장 직분의 유익 (The Benefits of the Priesthood) 95 |
11 | 제사장 위임식 (The Liturgy for Ordination) 102 |
12 | 왜 하나님의 명령대로 예배해야 하는가 (Why Worship God as He Commands?) 109 |
13 | 분향단 (The Alter of Incence) 115 |
14 | 구속의 대가(代價) (The Price of Redemptipn) 123 |
15 | 물두멍 (The Basin for Washing) 129 |
16 |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 (The Gifts Given by God) 135 |
17 | 새로운 시작 (A New Beginning) 141 |
18 | 결론 (Conclusion) 146 |
부록 | 모세오경을 설교하라 (Preaching Pentateuk) 148 |
A | 참고도서 (Bibliography) |
B | 저자 소개 (About the Author) |
0 | 서론 (Introduction) |
“성막과 그 성막이 수행하던 목적을 열심을 내어 기도하는 심정으로 연구할 때, 구속의 거대한 진리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더욱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위의 언급은 19세기 말엽에 활동했던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신학생들에게 구약의 성막 내러티브를 읽고 묵상하라고 권면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그 권면대로 행하는 크리스천들을 찾아보긴 힘든 것 같다. 나는 이것을 처음 사역을 시작하고 7년 정도를 지나며 배우게 되었다. 그 시기에 신약성경 중 상당한 부분들(요, 행, 롬, 골, 딛, 히, 벧전, 유, 계)을 설교하였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굳건한 성경적 교리의 기초를 놓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의 설교사역이 끝나갈 즈음, 성령님은 우리 교회 교인들이 구약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구약 개관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셨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고전 1:2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에 관한 개요를 담고 있는 설교 시리즈를 마무리지었는데, 그것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복음서의 그리스도 강림으로 이어지는 내용의 설교였다. 이 설교 시리즈는 신약성경의 설교로 돌아가기 전 그저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들로 되어있었지만, 나는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의 교인들이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아주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같은 개인적 경험은 많은 동료 목회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과 교회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다. 브라운(Brown)의 말대로, 우리 목회자들은 열심과 기도로 구약을 연구하여 교인들에게 그 내용들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그 내용들 속에는 400년 동안 구약적 신앙의 핵심이었던 성막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제공하고 싶은 내용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구약을 연구하는데 있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신약 자체에서 나타난다.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9:2-5, 강조 추가) |
이같은 신약의 기록을 보면서, 수세대에 걸쳐 많은 크리스천들과 설교가들은 히브리서를 저술한 사도가 성막과 성막 안의 가구들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해 놓치 않은 것을 아쉬워 했다. 하지만, 성경영감교리에는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벧후 1:21)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이끌려 원래 목적과 다른 내용을 저술했다(유 3)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런 측면에서 성령님은 성막의 가구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성막 기구들이 내포하는 상세한 내용들을 찾는 임무는 설교가들에게 떨어졌고, 그들은 그 구조와 가구들의 의미를 주해하고 적용시켜야 한다. 이제 휘장을 들추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하지만, 성막 안으로 뛰어들어 그 특징들을 살펴보기 전, 우리는 일반적인 사실들과 원리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막은 무엇이었는가. 성막이 어떻게 이스라엘 광야 여정 이야기 속에 들어갔는가.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주제 속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성막 내러티브를 잘 읽고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성막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와같은 내용을 먼저 숙지해야 할 것이다.
성막은 무엇이었는가(WHAT WAS THE TABERNACLE)
성막(Latin, tabernaculum, ‘tent’)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여정 때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 300년을 지내던 시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시적으로 거하시던 처소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건축물을 지으라 명하셨고(출 25:1-31:11), 그에게 영감을 주셔서 그 구조에 대한 설명을 기록하도록 하셨다(출 35:4-40:38).
성막은 사실 성경의 내러티브 속에서 몇가지 히브리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모든 이름은 그 목적하는 바를 표식해 주는 것들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임재하시는 장소일 때, 성막은 “성소”(출 25:8, miqdash; 출 38:24, qodesh)라 불렸다.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틈에 임시적으로 거하시는 장소일 때, 성막은 “여호와의 장막”(출 25:9. mishkan; 출 26:7, ’ohel)이라 불렸다. 또한 히브리서에서 “장막”(히 8:5; 9:21, skēnē)이라 칭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당신의 은혜 언약을 증거하시는 장소일 때, 성막은 “증거막”(출 38:21; 민 9:15; cf. 행 7:44; ’ohel ha-edut)으로 불린다. 사실, 두 개의 율법석판 역시 “증거”(edut)라고 불렸다. 보수적인 루터교 주석가인 카일(C. F. Keil, 1807-1888)은 하나님의 율법은 증거막 안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증거”라고 묘사되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석판을 그렇게 부르는 까닭이 단순히 하나님의 의지와 특성을 증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 자신, 당신의 본질, 존재 등을 이스라엘 안에서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그저 여호와께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당신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사항을 담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호와는 어떤 분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분의 요구사항들을 담고 있는 것인데, 그 사항들이 석판 위에 10개의 문구로 새겨졌다. 옛 언약의 핵심과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증거인 것이다. |
넷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대표로 하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만나시는 장소일 때, 성막은 “회막”(출 27:21; 28:43; 30:20; 40:32; 민 8:24, ’ohel moed)으로 불렸다. 사실, 성막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막이라고 하던 또다른 장막에서 전체 백성들을 대표하는 모세만을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대면하여”(출 33:11) 만나셨다. 비록 일대일의 개인적인 국면은 축소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만남과 교제는 성막에서 더 큰 규모로 여호와 하나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그것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성막 내러티브의 줄거리(THE STORY LINE)
우리는 또한 출애굽기의 줄거리와 어떻게 성막이 그 이야기 속에 위치하는가에 익숙해져야 한다. 성막이 완성되기 전과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성막이 어떤 식으로 이 크나큰 이야기에서 흘러나와 그 속으로 흘러들어가는가?
지리적 측면
출애굽기의 줄거리는 세 개의 지리적 위치에서 펼쳐진다. 이야기의 시작점은 창세기의 종결점(즉, 애굽에 살게 된 이스라엘)이며, 1장-13장까지 이어진다(cf. 창 50:22-26). 어두운 밤중에 애굽을 떠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곧 시내 사막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은 14장부터 18장까지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출애굽”기, 그러니까 애굽 탈출기는 그 극적 사건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대신, 책의 대부분은 한 고정적인 장소, 다시 말해 시내산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룬다. 이곳에서 묘사되는 내러티브는 19장부터 40장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은 출애굽기의 장 중 반 이상을 차지하는 분량인 것이다.
출애굽기 내용의 절반 이상이 시내산에 집중되는 것은 놀라운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구속의 목적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하고,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기 위함임을 가르치고 계신다.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흑암같은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 임재의 광휘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그 기념비적인 가르침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 하기 위해”(Q&A 1) 존재한다. 다른 성경의 내용들을 묵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막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제공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b).
문학적 측면
우리는 출애굽기의 마지막 부분이자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내용들을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19장-24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유를 얻은 당신의 백성과 성스러운 언약적 관계로 진입하신다. 25장-40장에서, 하나님은 성막에서 그같은 자유함 속에서 당신을 예배할 수 있는 방편을 주신다. 성막에 대한 교훈과 건축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부분 중에서도 가장 많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성막에서 당신의 백성을 만나주시고, 백성들은 주님께 제사하며 기도를 올려드리는 곳이었다. 이같은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 17세기 위대한 화란 개혁신학자였던 헤르만 비치우스(Herman Witsius_1636-1708)는 그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셨지만, 모세에게 성막에 대해 가르치시기 위해서 40일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한 장(章) 이상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지만, 성막을 설명하시는데는 6일을 사용하셨다. |
분명코, 성령님은 성막이 옛 언약 백성들의 신앙과 삶에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과, 성막이 영감된 성경 말씀의 한 부분인 고로, 우리에게도 역시 중요한 것임을 깨닫기 원하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우리는 출애굽기의 가장 큰 내러티브를 항해해 나갈 수 있을까? 이 가장 큰 내러티브를 안고 있는 장들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문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첫째, 25:1에서 31:11,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 건축에 대한 지시를 내리신다. 둘째, 31:12에서 35:3, 이 부분은 하나의 삽입부로서 (본서에서 다루지 않을) 황금송아지 내러티브를 다루고 있다. 셋째, 35:4에서 40:38, 모세는 실제 성막 건축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이런 상세한 내용들이 지루하게 느껴질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령님이 출애굽기에 남겨놓으신 아름다운 구조를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이다(딤후 3:16). 하나님 말씀의 상세한 내용들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동사의 현재시제에 그 바탕을 두셨다(눅 20:37-38). 또한, 바울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후손임을 말할 때 단수명사에 그 바탕을 두었다(갈 3:16).
우리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말씀의 이 부분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하나님 말씀을 학구적이고, 사색적이며, 신앙적 방식으로 읽을 때, 우리는 교리라는 개개의 진주와 그 안에 내재된 적용점들을 보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진주들이 모여 목걸이가 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할 때도 그렇지만, 그것을 드러내 제시할 때도 아름답다.
실제성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인 본 필자는 이같은 논지를 펼치면서 여기에서 다루는 출애굽기의 장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이 기록된 내용 그대로 실제 일어났던 일들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내러티브들은 환타지가 아닌 실제 있었던 일들인 것이다. 그런데, 비판적인 학자들은 몇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이 내러티브들의 신뢰성을 받아드리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내러티브 속에 오류들이 내포되어 있고, 다양한 편집자들과 수정자들이 내용을 덧붙인 부분들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8:24-31에 등장하는 물품들을 광야에서 모으는 것도, 그것들을 옮기는 것도 불가능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성막을 건축하기 위한 기술들을 유랑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갖출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학자들은 성막은 하나의 신화라고 주장하면서, 후대 편집자들이 성전 건축을 위한 역사적 선례로 성경에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계 학자들과 크리스천 학자들은 매우 강력하게 출애굽기의 내용들을 문자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출애굽기의 이 내러티브들이 갖는 실제성을 받아드리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내용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언제 그같은 인정을 하셨는가? 부활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이 당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말씀하셨다.
이에 모세(즉, 창세기에서 신명기)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cf. 24:44) |
전승에 따르면, 초대교회의 최초 순교자인 스데반이 모세가 “광야 교회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생명의 도를 받았을 때” (행 7:38)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출애굽기 내러티브의 실제성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출애굽기 25장~31장과 35장~40장은 그와같은 “생명의 도” (logia zōnta)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어떻게 출애굽기의 내용들을 성취하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인용할 때(히 8~9),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코 성막 내러티브가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 말씀(히 4:12, zōn... kai energēs) 중 하나로서 정확하고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는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을 때,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히 8:5; cf. 출 25:9).
끝으로, 사도 바울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출애굽기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모세는...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썼다”(고후 3:7b, 13). 그러면서 바울은 구약을 읽는 것을 모세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4-15).
해석의 원리(HERMENUTICAL PRINCIPLES)
성막을 다루는 출애굽기 부분의 구조와 전체적인 줄거리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는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을 해석학적 작업이라고 하는데, 성경 텍스트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해석의 과정이다. 해석학적 작업을 위해, 우리는 주해(exegesis)를 사용해야 한다. 주해는 성경의 텍스트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내는 방식인데, 이는 자의적 해석(eisegesis)과는 반대적 개념이다. 즉, 자의적 해석은 성경의 텍스트에 자기식의 의미와 기대감을 부여하는 방식인 것이다. 고대 교부 푸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00-368)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논문, 삼위일체에 대하여(On the Trinity, 1.18)에서 해석학적 과정과 주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문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고유한 의미를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학자이다. 그는 의미를 문구에 집어넣지 않고 거기에서 더 많은 내용을 취하며, 억지로 그럴듯해 보이는 의미를 문구에 대응시키지 않는다. 그는 그 문구를 읽기 전에 옳은 결정을 한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말하려는 고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 당신께 맡겨드리고 경건한 숭앙심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통해서만 알려지시며, 그분이야말로 당신 자신을 증언하시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는, 성막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본 후, 성막의 참된 의미를 찾는데 도움을 줄 만한 기본적인 원리 몇가지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해석학의 역사
고대의 해석가들은 성막을 고도의 상징적이고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유대계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20 BC-AD 50)였다. 그는 성막을 우주의 모형으로 보았다. 성막을 지을 때 사용된 네 가지의 물질들이 자연의 네 요소라고 생각하여 이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으며, 에봇에 달려있는 보석을 황도12궁의 표지로 간주하여 이를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이같은 해석들을 바탕으로 성막을 우주의 모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또다른 예는 초기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장막들의 색깔 이면의 의미들을 연구했다. “자주색은 물에서, 세마포는 땅에서 나왔다. 또한 검푸른색은 대기에서 나왔으며, 주홍색은 불과 같다.” 그는 또한 분향단은 땅을 상징하고, 성막뜰은 하늘과 땅의 정중앙점을 나타내며, 성막의 덮개는 일반 불신세계를 나누는 경계를 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촛대는 일곱 행성을 상징하고, 두 그룹은 남반구와 북반구를 나타내며, 대제사장의 정금관은 여호와 하나님의 제왕적 능력을 뜻한다고 보았다.
특별히 중세기의 주석가들은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법으로 성막을 이해했다. 유대 랍비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5-1204)는 성막을 왕의 궁전으로 해석면서, 제사장들은 종교적 의식을 집전하여 왕에게 영예를 돌리는 종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베데(Bede the Venerable, 673-735)의 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베데의 성막에 대하여(De taberculo, on the Taberncle)는 성막 내러티브에 대한 최초의 기독교적 주해서이다. 그 책에서, 베데는 성경의 4중해석이라는 뜻의 ‘quadriga’라는 방식을 따랐다. 이 접근법은 역사적 의미(historical sense), 알레고리적 의미(allegorical sense), 비유적 의미(tropological sense), 영해적 의미(anagogical sense)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의미는 그 내용이 문자 그대로 일어났던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 알레고리적 의미는 그 내용들이 그리스도와 성례를 상징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셋째, 비유적 의미는 그 내용들이 도덕적 삶을 사는 방법을 나타낸다고 보는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영해적 의미는 그 내용들이 만물의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상태를 보여둔다고 보는 관점이다.
개혁주의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어떻게 접근하였는가? 17세기에 몇몇 학자들은 성막을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요하네스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는 성막 외부 뜰은 가시적 교회이며, 성막은 불가시적 교회라고 말했다. 또한 성소는 전투하는 교회를, 지성소는 승리한 교회였다고도 주장했다. 코케이우스와 동시대 사람이자 앞서 언급했던 비치우스는 성막이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성막은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고, 촛대는 빛을 밝히도록 교회에게 은혜를 주신 성령님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언약궤가 나무와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두가지 본성을 모형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세기, 브라운(Brown)은 성막의 세부사항들을 대단히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극단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법에 따른 설명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성막 벽면 널판에 연한 두 은촉은 믿음을 상징하고, 그 널판을 가로지르는 띠는 예수님께 의지하여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나타낸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해석이 갖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알레고리적,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주관성과 독단성이 문제점으로 나타난다. 비치우스는 목재와 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재료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고난과 영광스런 부활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옳은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에겐 올바른 해석을 위한 원리들이 필요하다. 그런 원리를 따르는데 있어, 성막 내러티브 해석을 위한 기본적인 핵심요소들을 말해보고자 한다. 완전하다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핵심요소들은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 성경으로 믿고 성막 내러티브 읽기
첫째, 우리는 성막 내러티브를 성경으로 믿고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모세오경)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으로 받아드리시고(마 11:33) 제자들에게 직접 그 율법서를 가르치셨다(눅 24:27, 44).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hiera grammata]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라고 말하며 이를 상기시켰다. 여기서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성경은 구약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약과 마찬가지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하는 것”(vv. 16-17)이다.
이것은, 첫째로 성막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둘째로는 우리 영혼에 유익과 복이 되기(cf. 계 1:3) 때문에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경은 높이 받들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즉,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굳건한 신념을 갖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문답 157).
※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막 내러티브 읽기
둘째, 우리는 성막 내러티브를 예배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지고의 목적은 성공적인 삶을 위한 원리나 신학적 증거구절을 찾는데 있지 않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드높여 노래하는 위대한 시편인 119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 찬양으로 인도해 주는지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v. 7)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v. 12)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v108) |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v. 137)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v. 164) |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글에서, 시편 119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의 접근법이 잘 요약되어 있다고 쓰고 있다. 시편 119편은 기도(oratio), 묵상(meditatio), 영적 전투(tentao)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시인 다윗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같이 신앙적이고, 묵상적이며, 변형적으로 읽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7-8, 10) |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지혜를 주며, 기쁨과 깨달음을 준다. 또한, 우리는 지고의 가치, 곧 주님 그분을 발견하게 된다.
제럴드 빌크스(Gerald Bilkes)는 교회가 마음을 다하여 성경을 읽는 자세를 되찾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 말씀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인식해야 함을 포함하는데 곧, 우리 존재 전체의 충성에 대한 요구, 은혜에 의지하여 우리 마음의 유익을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는 요구, 삼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말씀을 우리 마음에 기록해야 한다는 요구 등을 말함이다.
우리가 성막 내러티브를 읽을 때, 그 말씀의 권위로 살아야 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며, 우리 마음 속에 그 가르침을 새기실 하나님을 기대하여야 한다.
※ 신약적 관점으로 성막 내러티브 읽기
셋째, 우리는 성막 내러티비를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구약을 읽는데 있어서, 특히나 성막 내러티비를 읽는데 있어서, 신약성경을 해석을 위한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우리는 어거스틴(Augustine, 345-430)의 금언으로 이정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In Vetere Novum latet, et in Novo Vetus patet. 즉, “구약이 없다면 신약의 의미는 찾을 수 없고, 신약을 통해 구약의 의미는 드러난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구약의 불완전성을 인식해야 한다. 구약은 2권의 책 중 하나일 뿐이며, 그 나머지 책인 신약과 함께 읽어야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 말씀하셨지만,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하나님은 아들로 그 옛 계시를 완성하셨다(히 1:2).
화란의 주석가인 빌렘 헨드리크 기스펜(Willem Hendrik Gispen, 1900-1986)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진리를 성막 내러티브에 적용하였다. “크리스천으로서 [성막]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에 머물러야만 하고, 성막의 모든 고리, 걸쇠, 빗장 등의 ‘세세한(deeper)’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 전체 성막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을 이해하기 위하여 상당 부분을 신약에 의존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성령님의 위격과 사역 때문이다. 로버트 스트림플(Robert Strimple)이 “성령님은 당신의 영감으로 신약성경을 기록하시고 이를 교회에게 주셨는데, 부활 이후, 오순절 이후에 주신 이 성경은 절대 권위를 갖고 있으며 교회의 신앙과 삶이 갖는 모든 문제에 있어 인도하는데 오류가 없는 계시이다”라고 쓰고 있듯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롬 8:1-27; 고전 1:18-2:16)과 우리의 구속의 현실(고후 3-4)를 밝히 보여주신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2-18) |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만이 불신하는 마음의 눈을 덮은 이 수건을 제거하실 수 있다. 신약을 기술하게 하신 성령님은 우리가 구약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적 관점에서 성막 내러티비 읽기
넷째, 우리는 성막 내러티브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며 그 내용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며 하신 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주님은 애매모호한 세부내용들을 가지고 “심층”적인 성경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으시고. 오히려, 성경연구의 핵심은 바로 주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비치우스는 예수님이 “지식의 핵심이시며... 주님이 아니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이것을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부활하시고 난 후, 주님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친히 가르치시며 인도해 주셨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후에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셔서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
어거스틴의 말도 인용했지만, 구약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은 고대 기독교적 해석법 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교개혁의 선조들이 구약을 읽는 방법이기도 했다. 17세기 가장 위대한 영국 청교도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존 오웬(John Owe, 1616-1683)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을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지혜로 성막과 옛 성전의 모든 거룩한 제도가 온전하게 나타난다. 그것들을 덮고 있던 수건이 걷어지고, 하늘의 것들에 대한 불분명한 상징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 나타난다. 참으로, 복음이 엄청난 정도로 베풀어짐으로써 이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중보자적 직분을 수행하셔서 성막과 옛 성전이 예시했던 것의 본질을 성취하신 것이다. 또한 복음의 계시로 그 예시들의 본질과 목적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수건으로 덮여있던 물건들의 의미도 확장시킨다. 즉, 하늘의 성소에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는 말이다(히 9:24). 따라서, 그 안에 포함된 신비의 깊이를 이해하도록 해 줄 빛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직분을 성소에서 수행하신 후에야 그것들이 온전히 성취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내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시고, 모든 이들에게 명확한 증거로 삼아주신 일정한 양식의 영광이었다. 특별이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모형적인 성막과 옛 성전의 목적과 형태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그 모형들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갖는 다양한 모습들을 본 것이다. |
※ 말씀 그대로로 성막 내러티브 읽기
다섯째, 앞서 살펴본 알레고리적이고 대단히 상징주의적 접근법과 달리, 우리는 성막 내러티브를 뭔가 심오한 것을 찾으려 듯한 태도가 아닌 있는 그대로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성막이 상징적임을 인정해야 하지만, 상징이란 터무니 없이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모양, 크기, 위치, 색깔 등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 숨겨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어떻게 말씀을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는데, 곧 말씀을 이루고 있는 어휘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성경이 성경의 해석자)”라는 말로 이를 나타내어 주었다. 말씀이 우리의 지각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상징과 알레고리 사이를 구분할 수 있다. 상징에는 하나의 단순한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고, 알레고리는 한번에 여러 개의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막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우리가 신학적으로 읽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렇게 읽을 때, 성막의 고리, 장대, 널판 등이나 제사장의 에봇에 달린 보석들 같은 소소한 세부사항들 속의 숨겨진 의미를 궁금해하지 않게 된다. 대신, “이 말씀이 하나님과 나의 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법에 대해 무엇을 교훈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하게 될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진지하게 다루는 세부사항들(minutiae)들을 정리하여 모으는 것는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걸이와 고리에 어떤 신비한 내용을 담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부분에서 신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누구도 자신의 감각으로 받아드릴 수 없을 것이다. 경솔한 억측에 탐닉하느니 차라리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편이 더 나은 모습이다. 이러한 절제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 역시 우리의 적절한 선생 역할을 해준다. 비록 히브리서 기자가 열의를 다해 율법의 그림자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진리 사이를 분석해 보여주었지만, 몇몇 중요한 점들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적절한 태도는 우리가 너무나 호기심에 찬 연구와 지나친 추측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준다. |
※ 도덕적 교훈으로 성막 내러티브 읽기
여섯째, 우리는 성막 내러티브를 도덕적 교훈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의 목적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딤후 3:16)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구약 읽기를 이용하였다.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는 구약의 이야기를 도덕적 교리교수법으로 이용하였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통해서, 그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과 새 언약의 크리스천들의 삶을 어떻게 대구시기키는지 주목해 보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1-5) |
사도 바울은 여기서 새 언약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은혜 언약의 연속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이 “우리 조상”들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그 “조상들”이 그리스도께 속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세대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vv. 6-11) |
구약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tupoi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일정한 양식 혹은 모형이라고 말해준다. 어떤 식으로 바울이 권고를 하며 관련한 예를 드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악을 즐겨” 하지 말아야 한다(v. 6), 우리는 “저희 중 어떤 이들과 같이 우상 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v. 7). 우리는 “저희 중 어떤 이들처럼 간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v. 8). 우리는 “저희 중 어떤 이들처럼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v. 9). 우리는 “저희 중 어떤 이들처럼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v. 10).
성막 내러티브가 위와 같은 분명한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속에 내포된 도덕적 교훈을 염두해 두고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께서 거룩하시듯이 거룩한 존재가 되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구약의 권고(레 11:44)일 뿐만 아니며, 또한 신약의 명령이기도 하다(벧전 1:16).
성막 중의 성막(THE TABERNACLE AMONG THE TABERNACLES)
성막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법의 핵심 중 마지막은 성막 자체가 보여주는 진가에 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첫 번째 장소가 아니며, 궁극적인 장소도 아니다. 필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신다는 것” (거하심)이라는 주제를 추적해 볼 것이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진중에서 성막이 갖는 전반적인 맥락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같은 연구를 통해 우리는 마치 성경이 장미와도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장미는 위대한 나라의 건립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에덴동산에 세우심으로 구약의 앞부분에 봉오리를 내밀었다. 사단이 이 나라를 넘어뜨리기 위해 아담을 사용했을 때조차, 하나님은 그 나라를 다시 세우시며 그 장미꽃은 멈추지 않고 봉오리를 벌렸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장소적 개념의 한 나라에서 사는 새 나라의 백성들의 선조로 삼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여호수아 시대에 그 약속하신 나라로 이끌어 들이셨던 것이다. 비록 사사 시대에 그 나라가 망가졌지만,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그 교회를 개혁시키시고, 당신을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이라는 그 장미꽃은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만개하게 된다(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마 1:23).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장막을 치심)”이다.
※ 종말에서 시작하다 -요한계시록 21-22
우리는 성경의 맨 끝부분,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현대 신약성경학자인 G. K. 빌(G. K. Beale)은, “종말론은 곧 시원론(protology)이다. 모든 구속사의 목표는 인류가 타락한 창조의 처음 조건으로 되돌아가, 그 처음 창조 때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고양된 상태로 뛰어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낙원에서 우리 첫부모 아담과 하와 타락하여 불순종한“ 이후의 삶을 살기 때문에, 태초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연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종말에 하실 일을 연구하는 것이며,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22장은 창조, 구원, 인간역사 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최고점을 확실하게 묘사해 준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최종적 선언 등의 성경적·신학적 주제들을 사용하며 이 하나님 계획의 최고점을 환상으로 그림처럼 보여준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레 26:12; 렘 7:23; 11:4; 24:7; 30:22, 겔 11:20; 14:11; 36:28; 37:27).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며 의도했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언어와 생각의 한계”를 확장시켜는 참으로 놀라운 용어들을 사용하여 여기에 묘사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창조의 절정을 묘사해 주는데, 태초에 만들어진(창 1-2)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계 21:1)이 새로워지고 변형되며 정결케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동일한 하늘과 땅이지만 영광스럽게 활기를 되찾아 잡초, 가시, 엉컹퀴 등등이 없는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전멸시키시고 처음 것을 무에서(ex nihilo) 창조하신 것처럼 또다른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으실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서 37항은 창조의 절정을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것과 동일한 모습, 곧 육체를 입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큰 영광과 위엄으로 오실 것이며, 친히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새 창조를 본 후, 요한은 자신이 본 환상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 21:2)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 거룩한 성은 땅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그 기원이 하늘에 있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이 새 예루살렘 환상은 새로이 개생된 하늘과 땅이 하늘의 실재와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 예루살렘은 상징적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화를 입은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담고 있는 그림이며, 바울이 묘사한 정결해지고 순결해진 교회의 실재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은유로 묘사된다. 계시록 3:12은 이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 기둥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그들이 “문자 그대로” 성전이 된다는 뜻이다. 계시록 19:7-8절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묘사하면서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그 아내가 “예비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마포의 이미지가 설명이 되는데, 그것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아내는 교회를 말함이다. 이 말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아내로 준비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계시록 21:2를 반영해 준다. 21:9-27에서,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계속해서 좀더 상세히 묘사가 된다. 한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 (v. 9)를 보여준다. 그 천사는 그를 높은 산 위로 이끌고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v. 10)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시 한번 새 예루살렘과 병행을 이룬다. 히브리서 12:23에서는, 우리가 받을 하늘의 예루살렘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라고 말씀한다.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교회를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내려오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계시록 21-22장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언약관계가 절정에 이른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언약 관계는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계시록 21:3-4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갖는 본질과, 살아숨쉬는 역사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구속사적 과정의 성취를 발견하게 된다. 사도 요한은 이 절정의 사건을 선포하는 “보좌에서 나오는 큰 음성”을 듣는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혹은 그들과 같이 거하시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하나님으로써 그들 중에, 혹은 그들과 같이 계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이 시온의 회복(사 35:10; 65:19)을 말해주고 있듯이, 이것은 분명코 지상에 새로운 하나님의 거할 처소가 생길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본 환상 속 절정의 장막은 하나의 구조물이 아니다. 계시록 21:22은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는 것의 특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약속이 갖는 특징은 당신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주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가운데 온전한 충만함으로 영원히 그 교제(출 3:12; 레 26:11-12; 사 7:14)와 개인적인 관계(cf. 출 6:7; 신 14:2; 26:18-19)가 깨지지 않고 영원할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즉, “그분을 영원히 온전하게 즐거워 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답).
※ 에덴의 상징, 성막
계시록 21장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당신 백성들 중에서 거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당신 백성들 사이에서 거하셨기 때문에 그같은 묘사가 가능한 것이다. 특별히 이 모습을 에덴 동산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창 2:9-14). 우리가 에덴동산과 그 동산에서 흐르는 강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읽어보면 정금, 베델리엄, 호마노 등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v. 12). 에덴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최초의 참된 거룩한 땅으로서 지극히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으며, 그 후로 나타날 이스라엘 성막과 성전을 기대케 한다(출 25:3, 7; 왕상 6:20-22, 28, 30, 32, 35).
하나님은 우주와 하늘, 땅과 바다 등의 광대한 영역들을 만들어 주심으로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으며, 또한 그것들의 모양을 채우시는 지극히 지혜롭고 창조적인 예술가의 모습도 보여주셨다. 창세기 1:1-2:3에 나오는 창조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건설계획이었다. 하나님은 처음 상태의 어둠과 깊음을 정리하시고 땅을 피조물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바꾸셨다. 첫째날부터 셋째날까지, 하나님은 땅의 모양을 이루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전과 궁전에 대한 용어들로 이를 묘사하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시 104:1-3, 13) |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런 시각에 대해 응대한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사 40:22).
넷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하나님께서는 땅에 형태를 만드셨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한번 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시 104:24-25) |
그 이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작업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이러한 형태들과 충만함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가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분의 임재를 즐거워하였다.
※ 다윗의 집
창조 이야기를 읽고 났다면, 계속해서 방주 안에서 노아 가족들과 함께 거하신 하나님(창 6-9), 족장들의 여정 속에서 함께 거하신 하나님, 성막에서 뿐만 아니라(출 25-40), 애굽(출 2:23-25)과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모습으로(출 13:21-22; 시 78:14)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 하나님을 읽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다윗 시대에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 또다른 구조물을 읽을 것이다. 다윗이 마침내 유다 족속과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올라선 이후(삼하 5), 그는 모든 대적들을 파하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을 즐거이 누리며 왕궁에 거하였다(삼하 7:1).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자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집을 건축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심을 다윗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어떤 신이 자기의 왕을 통해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면, 그 왕은 집을 지어 자신의 신에게 헌물로 바쳤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당신의 대적들을 퇴패시키고 이스라엘 땅에 안식을 가져다 주시는 신적 전사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을 따르기 원했던 것이다. 그가 집에 거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이동용 천막에 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신들을 상대로 승리하셨을 때, 하나님의 성소는 백성들의 일시적인 생활방식에 적합한 형태로 존재했다. 백성들이 유랑하는 사람들인 까닭에 그것은 임시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다윗의 왕권이 굳건히 세워지자 좀더 상설적인 성소가 필요로 했다.
성소 건축에 대해 공개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열망을 막으셨다(삼하 7:4-17).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에게 역으로 말씀을 하셨다. 곧, 다윗이 여호와를 위한 집을 짓지 않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집을 받으리라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다윗을 위한 “집”을 주시겠다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양의법(double entendre)이라는 문학기법을 사용하였다. 다윗이 지상의 방식을 염두해 두면서 여호와를 위한 집을 지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윗 가계를 위한 집을 지으실 계획을 갖고 계셨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나를 위한 집을 지으려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한 한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같은 계획을 말씀하시는가? 신명기 12장에서, 주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드릴 예배의 중추적 장소에 대해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다. 여섯 번이나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할 장소를 “선택”하리라 말씀하셨으며(신 12:5; 11, 14, 18, 21, 26), 아홉 번이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기 위해 선택한 “그곳”에 대해 언급하셨다(vv. 5에서 2회; 6, 7, 11에서 2회; 14에서 2회; 21).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당신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분께서 장소와 건축자를 선택하시는 것이다. 다윗은 그 역할을 맡을 자가 아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같은 말을 사용하셨다. 이 말은 단독적이고 언약적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누차 “내가...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다윗의 이름을 존귀케 하시고(v. 10), 당신 백성을 위한 한 장소를 지정하실 것(v. 10)이며, 다윗에게 평안을 주시고(v. 11), 그의 집을 일으키시며(v. 11), 다윗의 아들을 주실 것(v. 12)이라고 약속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나라를 견고케 하시고(v. 12), 그 아들의 위를 견고케 하며(v. 13), 그 아들에게 아비가 되시고(v. 14), 그 아들을 훈육하실 것(v. 14)도 약속하셨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지상의 왕은 하늘의 왕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것이 전형적인 양식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를 반대로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은혜의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지어드리는 집을 받지 않으시고, 그에게 그것을 주신다(v. 11). 심지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범죄할지라도 그를 언약에서 배제하지 않고, 아들처럼 훈육하시겠다는 약속까지도 하셨다.
“나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를 떠나지 않으리라”(v.15). 여기서 “변함없는 사랑(steadfast love)"란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chesed)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 중에 거하심이 은혜의 문제요, 어마어마한 특권임을 배우게 된다.
※ 솔로몬 성전
다윗의 열망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취된다(왕하 7:51). 열왕기상 6장은 성전이 그 영구성으로 인해 하나의 더 큰 성막이었음을 알려준다.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은 이동식 천막에 거하시지 않고, 영구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에 거하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전의 장대함이 그 크기에 대한 계시를 통해 성막을 초월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막은 길이 30규빗, 너비 10규빗이었다(출 2:15-30). 성전은 길이가 60규빗, 너비가 20규빗, 높이가 30규빗이었는데(왕상 6:2), 성막의 2배 크기였다. 이러한 확장성은 지성소의 크기에도 적용된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성막의 지성소 크기는 길이와 너비 모두 10규빗이었다고 하는데, 성전은 길이와 너비가 모두 20규빗이었다(왕상 6:20). 이 성전의 영광에 대하여 시편에서는 이렇게 송축한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시 76:1-2).
성전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지속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전은 새 에덴동산이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첫째, 성전의 묘사는 창조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열왕기상 6-7장에서 성전 건축을 언급할 때, ‘마치다(finished)'라는 단어를 7회 사용한다. 창세기에서 사용된 동일한 용어는 아니지만, 창조 주제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왕상 6:9a). “솔로몬이 전 건축하기를 마치고”(왕상 6:14). “그 설계와 식양대로 전이 다 필역되었으니”(왕상 6:38).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왕상 7:1). 솔로몬의 궁전은 성전 건물의 일부였다.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 (왕상 7:22). “히람이 또 물두멍과 부삽과 대접들을 만들었더라 이와 같이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왕상 7:40).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왕상 7:51).
또한 성전의 모양과 건축에 쓰인 재료들도 창조, 에덴과 연관된 용어들임을 알 수 있다. 성전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그 안과 밖을 감쌌다. 시편 104편은 창조의 6일을 계수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한다.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v. 16). 성전 안쪽 벽면에는 박과 핀 꽃, 종려나무 등을 새겼다(왕상 6:18, 29). 그리고 정금을 사용하여 목재의 안팎을 감쌌는데(왕상 6:20-22), 이것을 창세기 2:11-12의 에덴동산처럼 묘사한다.
성전을 새 에덴으로 묘사하는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 외양이라 할 수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산, 높은 곳 등으로 말하면서 에덴의 외양을 상기시켰다. 그 산을 기원으로 하여 네 강이 땅을 적신다. 선지자 에스겔은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겔 28:13-14) 등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어떤 산이 성전, 곧 건물이어야만 하는가? 성전을 어떻게 건축했는지 생각해 보라. 열왕기상 6:5-6에서, 우리는 성전에 연접하여 만들어진 3층짜리 다락골방이 윗층으로 갈수록 점덤 더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성전 부속건물이 성전을 마치 뒤집힌 피라미드나 지구라트, 혹은 높은 산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지구라트는 마치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듯이 하나님을 향해 있던 구조물이었는데, 이와는 달리 성전은 아래 방향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상에 당신 집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에덴, 성막, 성전의 공통적인 목적은 피조물이 창조자와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은 그 거룩한 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룹들을 세우시고 지키게 하셨다(창 3:24). 성전 주의 벽면에는 그룹들이 새겨져 있었다(왕상 6:23-28). 하지만, 그 그룹들에게 칼이 쥐어져 있다는 설명을 볼 수 없다. 성전은 지상의 천국이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이 돌아와 맛볼 처음 낙원을 미리 느끼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이 완공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지성소에 옮겨 놓았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옮겨놓는 것을 마치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왕상 8:10). 이 구름은 바로 성령 하나님으로서, 그분께서는 첫 창조 때에 “수면 위” (창 1:2)와 성막의 봉헌식 (출 40:34) 에 운행하시던 분이셨다.
※ 선지자들
우리는 이제 선지자들이 해석한대로, 성전 건축이라는 최고의 시점에서 그 멸망의 최악의 시점으로 시선을 돌려볼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에스겔 10장은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에서 최악의 시점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여러 다른 민족들 가운데 창조해 내신 백성들이, 마치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호 6:7), 언약을 파기하였다. 아담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의 형상에게 예배할 자유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담처럼, 하나님의 임재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열왕기하 24-25장은 남왕국 말기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 그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포위하고 있었다. 바벨론은 세 차례의 연속적인 파상공격을 해왔다(B.C. 605, 597, 586). 신명기 28장에서 말하는 언약의 저주에 따라,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고,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백성들은 타국으로 흩어졌다. 열왕기하 25:9은 여호와의 집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말씀하고, 25:21b는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28:68은 이런 흩어짐을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배에 태워 보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고자 했던 마지막 나라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성전의 파괴를 선포하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열왕기하 24:3은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라고 말씀하며, 열왕기하 24:20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라고 말씀한다.
에스겔 10장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온 이 모든 내용들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묘사들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는 바벨론 침공이 주는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신학적 교육과정이 나타난다. 그것은 그룹들이 떠받친 전차 형상을 한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이다(v. 1). 이 환상에서 에스겔은 숯불을 취해 예루살렘에 던지는 “사람”을 보게 된다(v. 2).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시는 이야기에서 불은 주님의 심판과 연관된다(창 19:23-28). 유다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신세가 된다(사 1:10). 교회는 이미 세상과 같아졌고, 하나님은 이런 세속적 교회를 더 이상 두고 보실 수 없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을 보자.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6).
이제 언약의 저주 중 최악의 모습이 묘사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황폐화시키신다. 에스겔 10:18은 여호와의 영광, ‘채봇(chabod)’이 성전을 떠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성령님의 시각적 표현이었다. 이 성령님은 깊음 위에서 운행하시던 분(창 19:23-28)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던 분(출 13)이었으며, 성막을 충만케 하시고(출 40) 솔로몬 성전을 충만케 하시던 분(왕상 8:10)이었다.
에스겔 10:19은 그룹들이 여호와의 전차를 타고 그분의 영광을 여기저기에서 취하고는 성전의 동문에 가서 머물렀다고 말씀한다. 성전은 에덴과 하나님의 임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그러므로, 동쪽으로 가 머물렀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아담과 하와의 발걸음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인 것이다(창 3:23-24). 에스겔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셔서(ichabod) 그 영광이 사라졌다는 것은 에덴을 떠나 그 동쪽으로 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cf. 삼상 4:19-22).
그러나, 국가 전체에게 내려진 저주이지만, 은혜를 입어 선택받은 남은 자에게는 그것이 복음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도 동쪽으로 옮겨갔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 포로생활로 이끄셨다. 그분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셨지만 당신의 백성들은 남겨두셨다. 좀더 이야기를 진전시켜보면, 하나님이 우리 손을 놓아버리신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주님은 남은 자들과 함께 낯선 땅에서 외인이 되셨다. 에스겔은 11:16에서 이것을 말한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또한 여호와의 영광인 채봇(chabod)이 되돌아 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학개 1:1-15은 여호와의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임을 말씀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사 제국을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패망시키셨다. BC 538년, 바사의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렸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 하였더라(시 104:24-25) |
그리고 에스라 2장에서 우리는 오만명의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토로 돌아가는 자들은 약 5,000kg의 금과 약 270kg의 은을 내놓고서(스 2), 즉시 무너진 제단과 성전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스 3).
학개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중단하고선(스 4:24) 자기들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학 1:1-11)고 말한다. BC 520년, 여호와 하나님은 학개를 불러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마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1:2-4).
첫째, 학개는 백성들이 자기 만족에 빠져 성전 건축을 등한시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1:1-4).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율법의 꾸짖음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명칭은 학개에서 14회 등장한다. 다른 성경 부분에서 200회 이상 나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만군의 여호와”는 주님의 분노, 심판, 당신 백성들을 향한 꾸짖는 왕의 권리 등을 설명하는 의도를 갖고 있을 때 등장한다. 여호와는 천군의 주이시며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내려올 것임이 선포되었다.
하나님은 기대와 달리 “내 백성”이 아닌 이스라엘을 “이 백성”(v. 2a)이라고 칭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로서, “이 백성”이 말하길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v. 2b)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이 백성”은 자기 만족에 빠져 여호와의 일을 등한시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v. 4)고 물으셨다. 그들이 그렇게 자기 만족에 빠진 것은 자신들의 우선권이 낳은 결과였고, 그것은 이기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것들이었다.
학개는 이스라엘의 자기 만족에 대하여 만약 성전 건축을 마치지 않으면 저주가 내리리라는 선언을 하게 된다(vv. 5-6, 9-11). “이 백성”이 “아직 성전 건축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siymu levavchem al-darecheychem; cf. 학 1:7]” (v. 5)시며 응수하신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과 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의 자기 만족적이고 이기적이며 우상숭배적인 마음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의 옛 언약의 저주를 내리셨다.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v. 6). 주님은 빈약한 수확(신 38-40), 부족한 먹거리(신 28:48), 가뭄(28:23-24) 등의 언약적 심판을 내리셨다. 유대인들의 자기 만족감은 그들을 소비주의로 전략시켰다. 일하는데 보다 노는데 더 열심을 낸 까닭에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학개 1:9과 1:11은 저주를 선포하고 요약하는데 언어유희적 표현을 사용한다. 여호와의 집은 “황무함(charav)” 중에 놓여 있고, 이스라엘 땅은 “가뭄(chorev)"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와중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학개는 성전 건축의 명을 전했다(vv. 7-8). “이 백성”은 율법으로 낮아지고 이제 회개의 요구를 받았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니라”. 그들은 자기 만족에서 실행하는 마음과 태도로 바꿔야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수년 전에 시작했던 그 일을 해야했다. 8절에 등장하는 동사들에 주목해 보라. “올라가서... 가져다가... 건축하라”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거나 일종의 참회 행위가 될 수는 없으나, 적합한 질서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즉, 종 이스라엘은 자신의 왕에게 영예를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여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회개는 선한 일로 이어지고, 학개는 성전의 재건축에 대한 이스라엘의 청종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였고”, “여호와를 경외하였다.”(1:12). 그리고 그들 모두가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다.”(v. 14).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의 순종을 이끌어낸다.”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참된 회개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개는 성전을 재건축할 동안의 평안을 선포한다. 백성들이 율법으로 낮아지고, 회개하여 순종의 삶을 살게 된 후, 그들은 여호와의 전 역사를 진행했다. 주님은 그들에게 평안의 말씀, 곧 복음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v. 13)는 말씀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건축할 때, 그들이 짓고 있는 것은 다가올 성전의 아동용 모델 같은 것일 뿐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실 때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v. 2:9) 때이다.
※ 주의 강림
당신 백성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주의 강림으로 인격적인 것이 되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dwelt)” (요 1:14a)고 말한다. 여기서 “거하였다”로 번역된 'skēnē'란 단어와 구약의 성막 사이의 관계는 명확하다. 70인역에서 그 동일한 단어를 ‘장막’, ‘천막’ 등으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b)라고 진술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갖은 성전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인격적인 실재이다.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주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성전의 실재라고 분명히 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그후에 주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1, 23). 예수님께서 성전이시므로, 이 참된 예배는 주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행해지고(마 18:20), 땅의 열방들 가운데 거하는 백성들은 어디에서든 이를 행하는 것이다(슥 2:11b; 말 1:11).
※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여전히 당신 백성들 중에 거하신다. 승천하셨지만, 주님은 교회에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 중에 여전히 거하시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이제 하나님의 권속이(엡 2:19)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퉁이돌 되셨으며, 그것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산 돌로 여기신다(vv. 20-22; 벧전 2:5)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 세상 속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하심이 한때 성령을 통해 생명없는 나무, 돌, 금속 등 안에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산 백성들 안에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이 되기 위해 구속을 받았다고도 묘사한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신들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셔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것(출 12:12)과 당신의 백성 중에 거하신 것과 비견하여, 사도는 출애굽, 승리,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노래”가 지닌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 구속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계 15:3-4).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협동적이고(고전 3:9-17; cf. 고후 6:16-18), 개별적인(고전 6:19) 형태로 교회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막이요, 성전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다. 베드로전서 2:4-10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기 위해 사용한 산 돌이라고 말씀한다. 산 돌들의 모임이란 지역교회 회중들이 예배의 성전임을 뜻하는 것이며(v. 5), 주님의 증거들이 세상에 대하여 전파되는 장소를 의미한다(v. 10).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 성전으로 모이는 제사장들(vv. 5, 9)이기도 하다(v. 5; cf. 롬 12:2; 히 13:15). 이 모든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사역 위에서 참된 것인데, 그리스도는 이 시대에 당신의 성령을 교회에 보내주셨다. 따라서, 성전과 거기서 드리는 제사는 이제 “영적”이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의 반응(OUR RESPONSE)
성막 이야기를 위에서 언급한 관점으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가 나타내야 할 첫 번째 반응은, 누가복음 24장에서 성령님께서 엠마오 가는 두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먼저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푸아티에의 힐러리의 기도문에서 우리는 이같은 반응의 좋은 본보기를 볼 수 있다.
우리의 지성은 어리석음과 가려진 눈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연약한 이해력은 신성한 것에 대하여 감각하지 못하는 무지의 장벽에 감금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의 계시를 배울 때, 우리의 영혼은 거룩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상승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믿음에 복종하는 것은 분명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
16세기 역사적 개혁파 예전에서, “깨달음을 위한 기도”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였다. 예를 들어, 1539년 마르틴 부서의 스트라스부르크 예전(Martin Bucer's Strassburg Liturgy of 1539)에서, 부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전능하시고 은혜로운 아버지, 우리의 모든 구원이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달려 있는 까닭에, 세상의 일들로부터 자유를 얻은 마음 속에 부지런함과 믿음을 지니고 우리 모두가 주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바르게 은혜로우신 뜻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고 전력을 다해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화란개혁교회의 페트루스 다데누스(Petrus Dathenus)는 1556년에 처음으로 예전용 시편찬송을 발행하였는데,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오, 하늘의 아버지여, 아버지 말씀은 완전하고 영혼을 소생시키며, 우둔한 자들을 현명하게 만들고, 눈먼 자들을 보게 하나이다. 또한 그것은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오나, 우리는 본성적으로 눈 먼 자들이며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상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지닌 자들과 말씀에 역행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구합니다. 성령님께서 어둔 마음을 밝혀주시고, 주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잘 이해하여 그에 따라 삶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우리의 거만함과 육신적 지혜를 벗기시고 겸손함을 주시옵소서 |
성막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이처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여야 할 두 번째 반응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에 나오는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순전히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 말씀을 정결한 심정으로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옵소서. 선하신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바울은 불신적인 방식으로 구약을 읽는 눈먼 자들과 눈이 열린 자들을 대조시켰다(고후 3:16). 이 눈이 열리는 역사는 주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일어나는데, 성령님은 우리를 점점 더 변화시키실 것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우리가 보여야 할 세 번째 반응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저 어떤 정보나 얻으려는 태도로 말씀을 읽지 말고, 언약의 교제로 단단히 묶여 주님과 함께 점점 더 가까이, 얼굴을 서로 보듯이 말씀을 대해야 한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당신 안에 거하며 당신의 말씀 안에 거하라 하시면서 이 점을 강조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내 안에” 있다는 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인데, 이는 주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공존하는 것이다. 주님 말씀을 아는 것이 주님을 아는 길이다.
우리가 보여야 할 마지막 반응은 성막 이야기를 읽고 묵상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길 구하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한 내용이 우리가 할 기도의 내용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
우리 함께 성막 내러티브를 읽고 묵상할 때, 필자는 여러분이 이 내러티브를 수천년 전에 있었던 불확실한 어떤 사건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대신 이 성막 내러티브가 여러분의 가족 이야기로 읽기를 기도할 것이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자들에게 이같은 방식으로 강권하였는데, 이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은 시간적으로 주님의 사역이 있은지 십수년이 지난 1세기 중엽에, 공간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사도는 성령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고 가르쳤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내러티브, 가족 이야기를 묵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섬겼던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하리라”(출 25:8)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2). 옛 선조들에게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 중에 거하시며, 당신의 놀라우신 은혜를 기초로 우리와 교제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