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중생- 바빙크 개혁교의학
소명과 중생- 바빙크 개혁교의학
2014-02-07 04:35:36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50장-소명과 중생
[433]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창조하고 또한 재창조했다.말씀으로 하나님은 만물이 무로부터 생겨나게 하고(창1장,시33:6;요1:3;히1:3,11:3),전능한 말씀으로 타락한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하나님은 아담(창3:9),아브람(창12:1;사51:2),이스라엘(사41:9,42:6,45:4;호11:1;렘31:3;겔16:6)을 부르고,자신의 종들을 통해 회개와 생명으로 초대한다(신30장;왕하17:13;사1:16ff;렘3장;겔18장,33장 등;롬8:28,29;고후5:20;살전2:12,5:24;살후2:14;벧전2:9,5:10 등). 하나님의 이 부르심(소명_은 성자 안에서 그리고 성자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구원은 특별히 그리스도에게 공로가 있다. 성부가 성자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했고 성자 자신도 만물의 창조자인 것처럼, 성자 자신은 또한 부르는 자이며(마11:28;막1:15,2:17;눅5:32,19:10),자신의 포도원에 품꾼들을 들여보내고(마20:1~7),혼인잔치에 초대하고(마22:2),암탉이 새끼들을 모으듯이 자녀들을 모으고(마23:37), 사도들과 교사들을 세우고(마10장,28:19;눅10장;엡4:11),그들의 음성이 온 땅에 퍼지게 한다(롬10:18). 그러므로 비록 부르심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할지라도, 이 맥락에서 성자는 사람들을 사용하는데, 단지 좁은 의미의 선지자들과 사도들, 목사들과 교사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부모와 친척들, 교사들과 친구들도 사용한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모든 작품들로부터,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우리 인생의 이끌림과 경험들로부터 하나의 음성을 듣는다. 만물이 하나님께 속한 경건한 자들에게 말한다. 비록 좁은 의미의 부르심이 복음의 말씀으로 발생할지라도, 복음의 말씀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부르심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은혜언약은 보편적인 자연언약에 의해 지지된다. 언약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만물을 창조했고 빛으로서 어두움 가운데 비치고 세상 가운데 오는 각 사람을 비추는 동일한 분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증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서 선을 행하며 음식과 기쁨으로 이방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한다(시19:1~4;마5:45;요1:5,9,10;롬1:19~21,2:14,15;행14:16,17,17:27).
그러므로 제일 먼저 ‘사물을 통한 소명[부르심]'(vocatio realis)이 구분될 수 있는데, 이 부르심은 자연, 역사,환경,이끌림, 경험을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으로 내용(res)만큼 그렇게 분명한 언어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 부르심은 복음이 아닌 율법의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이 율법을 통해 가정과 사회와 국가,종교와 도덕,마음과 양심에서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며 선행의 의무를 부과한다. 이 부르심은 구원에 대해 충분하지 못하다. 이 부르심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성부께 인도할 수 없다(요14:6;행4:12;롬1:16). 세상은 이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리석음과 어두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요1:5,10;롬1:21ff;고전1:21;엡2:1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르심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간섭이며, 로고스의 증거이며, 인류게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이 부르심으로 인해, 인류는 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을 존재할 수 있고, 가정들과 사회들과 국가들도 조직되었고, 여전히 종교적 의식과 도덕적 의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짐승같은 야수성에 빠지지 않았다. 만물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존해하는데,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골1:16;히1:13). 이 부르심은 또한 특별히 민족들의 삶과 특별한 사람들의 삶 가운데 복음을 통한 더 높고 더 나은 부르심의 길을 마련한다.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때가 차매[세상 가운데] 등장했다. 세사이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때,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했다(고전1:21). 복음은 단번에 모든 민족들에게 온 것이 아니라, 역사의 길을 따라 세상 가운데 계속 진행된다. 또한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 복음은 하나님 자신이 섭리 가운데 준비하고 결정한 순간에 다가온다.
그러나 이 ‘사물을 통한 소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계시된 율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복음을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말씀을 통한 소명’(vocatio verbalis)이 더 높은 차원의 부르심이다. 말씀을 통한 소명은 자연과 역사를 통한 부르심[사물을 통한 소명]을 제거하지 않고, 자기 안에 포함시키고 확정하지만, 진실로 그 부르심을 훨씬 초월한다. 결국 말씀을 통한 소명은 로고스가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 부르심은 율법보다는 복음을 참된 수단으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며, 또한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으로서 교회에 부으셨던 성령의 사역과 증거를 언제나 동반한다(요16:8·11;마12:31;행5:3,7:51;히6:4). 이 부르심은 옛날 루터파가 마태복음28장10절,요한복음3장16절, 로마서10장18절, 골로새서1장23절, 디모데전서2장4절에 호소함으로써 주장했던 의미의 보편적인 부르심이 아니다. 루터파는, 아담과 노아와 그리스도의 시대에 복음이 사실상 모든 민족에게 알려졌으나 그들의 허물로 인해 다시 상실되었다고 주장하며 이 복음은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으며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복음전도를 명백히 명령하고 있으며(마28:19), 게다가 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부름을 받았지만(마22:14;눅14:16~18) 복음을 저버렸기에(요3:36;행13:46;살후1:8), 불신앙의 끔찍한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마10:15,11:22,24;요3:36,16:8,9;살후1:8;요일5:10).
그러나 보편구원론자들(루터파)은 개혁파에 대항해 지적하기를, 개혁파 신학자들은 개혁파 입장에서 복음을 통한 그러한 보편적인 부르심을 수용할 수 없다고 제기한다. 개혁파신학자들에 의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택자들만을 위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속죄를 이루었으며, 당신의 죄는 속량되었으니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선포할 수 없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단지 율법의 요구만 설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개혁파 신학자들이 은혜의 보편적 수여[일반은총]을 견지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진심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며 게다가 무익하고 헛된 것이다.
이러한 반대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중대한 사항이어서 개혁파 진영으로부터 다양한 답변들을 촉발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죄인들에게는 오직 율법만 설교하고, 복음은 이미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의 필요를 느낀 자들에게만 제시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은혜의 보편적 수여를 견지했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사람에게 충분했다고 말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지 않을 자들을 위해서도 많고 다양한 복들을 획득했다고 말하거나, 또는 복음이란 단지 믿음과 회개의 조건 아래에서만 그들에게 제시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보편적인 수여를 정당화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보편구원론자들의 입장에 근접하여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첫 번째 보편적 작정에 의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해싸도 가르치거나, 또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받게 될 법적 가능성을 획득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salvable state)에 이르게 했다고 가르치거나, 또는 심지어 구원의 획득은 보편적이지만 그 적용은 특정적이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선택과 제한속죄에 대한 고백이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을지라도, 개혁파는 일반적으로 은혜의 보편적 수여를 견지했다.
[434]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1) 왜냐하면 성경은 복음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설교할 수 있고 설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특정한 결과와 조화시킬 수 있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명령은 모든 반대를 종결시킨다. 우리의 행위의 규칙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된 뜻밖에 없다. 이러한 설교의 결과는 단지 예정을 고백하는 자들의 입장만이 아니라, 오직 예지만 인정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도 확고부동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속임을 당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 있어서 세상 역사의 결과는 기대에 어긋날 수 없다. 경외심을 갖고 말하자면, 이러한 결과를 구원의 보편적 수여와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직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다. 우리가 단지 아는 것은 그 결과가 바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우리에게 요구된 모든 수단과 방법들에 연관되었고, 이것들을 통해 획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들 가운데에는 모든 피조물들을 향한 복음의 설교도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복음은 택자들이나 유기자들로서가 아니라, 모두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작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은 오로지 그 제시에 있어서만 보편적일 수 있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잡듯이, 태양이 잡초와 보리에 동시에 비추듯이, 파종하는 자의 씨가 단지 좋은 땅에만 아니라 돌이 많고 메마른 땅에도 떨어지듯이, 마찬가지로 복음도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된다.
(2) “그리스도는 당신 대신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죄는 속량되었고 용서되었습니다”라는 복음의 설교를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보편구원론자들이 이것을 그 어떤 자세한 조건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할지라도,약간만 생각해 보면, 보편구원론자들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단지 용서와 구원의 가능성만을 획득했을 뿐이다. 이러한 용서와 구원은 오로지 사람이 믿고 계속 믿을 때만 실재적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복음의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이 설교할 수 있을 뿐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 죄가 사하여질 것이요 영생을 얻을 것이다”[cf.행16:31]. 이제 개혁파 설교자들도 이것을 말한다. 그들도 복음을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고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죄용서와 영원한 구원이 있지만, 이것들은 오로지 믿음의 길을 통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편구원론자들과 개혁파 사이에는 전적으로 개혁파에 유리한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그리스도는 오로지 구원의 가능성만을 획득했다. 이 구원이 실재적으로 어떤 사람의 실재적 구원으로 만더는 하나의 조건, 하나의 공로로서 실재적 구원을 항상, 죽을 때까지 불확실한 상태에 둔다. 하지만, 개혁파의 경우, 그리스도는 전체적이고 완전하며 실재적인 구원을 획득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공로나 조건,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죽었습니다”라는 선언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과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신뢰이며 보편구원론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한 살아있는 믿음으로서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약속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구원을 수반한다. 잘못은 언제나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뒤바꾸려는 경향을 지닌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방편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를 원하며,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확실히 보장한다.
(3) 그러므로 구원의 수여는 하나님 편에서도 중대하고 진지하게 의도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수여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지도 않고, 믿음을 줄 것인지 여부도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 우리가 해야 할 것, 겸손히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으라고 말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믿음과 구원을 주지 않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구원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것은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반대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하나님은 결국 자신이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틀림없이 알고 있는 자들, 즉 장차 믿지 않을 그러한 자들에게도 구원을 수여하기 때문이다. 단지 개혁파 견해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세상 역사의 결과는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확고하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개혁파는 이 결과가 하나님의 뜻과 의도와 일치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미덕들과 완전에 따라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발생하는지 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에 대해 실랑이를 벌일 상대가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4) 그러므로 더 나아가 복음설교 역시 헛된 것이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무지나 무능으로 인해 보편적인 수여를 통해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의도했다면, 복음설교는 진실로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목적이 실현되는 사람의 숫자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복음설교 자체는 해결을 찾기 위해 성경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이율배반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뜻과 의도, 만일 그리스도의 속죄가 전적으로 보편적이라면, 구원의 수여 역시 무조건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의 수여가 명백히 보편적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옛 루터파처럼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복음은 사도들에 의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었다고 믿거나, 많은 현대신학자들처럼 무덤 저 편에 여전히 복음설교가 있을 것으로 여기거나, 더 나쁘게는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처럼 자연법칙이나 내적 조명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는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역사와 모순되게 부르심을 더 멀리 확대할 수록, 부르심은 더 약해지고, 더 힘을 잃고 더 헛된 것이 된다. 양적 범위에서 획득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질적 강도에서는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의도와 그 결과 사이의 모순은 갈수록 더 커졌다.
(5) 모두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듯이 비록 구원이 부르심을 통해 단지 소수의 소유가 된다 할지라도, 부르심은 그 부르심을 거절한 자들에게도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부르심은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하며, 죄인이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씀[겔18:23,32]을 인 친다.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매우 풍성하고 강력하기에 아무도 버림받지 않을 것이며,그 어떤 율법의 요구도, 죄의 권세도, 사탄의 지배도 그 부르심의 적용을 가로막지 못한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다. 왜냐하면 은혜의 선물은 범죄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롬5:1]. 심지어 부르심은 자주 불신앙으로 강팍하게 된 자들에게도 온갖 복의 근원이다. 지성의 조명, 하늘의 은사, 성령의 교제,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는 것과 다가오는 세상의 능력들은 심지어 때때로 나중에 타락하여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의 소유이기도 했다(히6:4~6).
(6) 그리고 이 뿐만 아니라, 율법과 복음을 통한 외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이 염두에 둔 목적을 성취한다.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결코 헛되거나 무익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명하여 보낸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다[사55:11]. 하지만 이 목적은 단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만이 아니며 그리고 그것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부르심 가운데 자기 피조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죄인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는, 가장 심하게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도, 양도될 수 없고 파기될 수도 없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포기함으로써 매우 비참하게 될 수 있으나, 그는 여전히 피조물이며, 따라서 의존적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더 독립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의존적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 하인, 종, 무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그 손에서 놓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봉사에 대한, 마음과 뜻과 온 힘을 다하는 인간의 전적인 헌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 마음과 양심을 통해, 복과 심판을 통해, 율법과 복음을 통해, 인간을 부른다. 가장 넓은 의미의 부르심[소명]은 타락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설교이다.
(7) 그러한 것으로서 부르심은 사람과 인류의 의존성, 존경, 경외, 의무, 책임성 등의 모든 종교적 의식들과 도덕적 의식들을 주장하는데, 이것들 없이 인류는 존재할 수 없다. 종교, 도덕, 법, 예술, 학문, 가정, 사회, 국가,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 모든 사람을 향한 부르심에 그 뿌리와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부르심을 제거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일으키는 전쟁이 있을 것이며,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늑대가 될 것이다. 율법과 복음을 통한 부르심은 죄를 예방하며, 허물을 감소시키며, 인간의 부패와 비참을 저지한다. 부르심은 ‘억제하는 은혜’(gratia reprimens)다. 부르심은 하나님이 하나님이며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하지 않다는 증거이며, 단지 내세만이 아니라 현세도 하나님에게 귀하다는 증거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무능뒤에 숨거나, 펠라기우스와 칸트처럼 자신의 의무에서 자신의 능력을 추론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할지라도, 이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와 우리의 의무는 약화되지 않고 지속되며, 인간 자신은 변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8)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심은 단지 ‘억제하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예비적 은혜’(gratia praeparans)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심판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의]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상에 왔다(막4:12;눅2:34,8:10;요9:39,15:22;고후2:16;벧전2:7,8).율법과 복음을 통한 부르심의 목적은 또한 부르심이 제공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을 통해 인류와 개별적 인간 안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항변파적 의미의 그러한 예비적 은혜는 개혁파에 의해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중생 가운데 심겨진 영적 생명은 이 생명에 선행하는 자연적 생명과 도덕적 생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이나 진화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로 인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중생에 선행하는 활동들을 ‘예비적 행위들’(actus praeparatorii)이라기 보다는 차리라 ‘선행적 행위들’(actus antecedanei)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미에서 ‘예비적 은혜’를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심지어 자연적 생명을 무시하는 모든 감리교적 경향에 맞서 탁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비적 은혜를 고백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즉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열망하는 등, 적정공로(meritum de congruo)에 따라 중생의 은혜를 얻거나 혹은 잣니이 이 은혜를 획득할 수 있는 있게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백이 포함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 보존하고 통치하는 분이며, 심지어 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자신이 정한 때에 믿음의 은사를 줄 자들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째 날에 진화를 통해 더 낮은 피조물들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행위들을 통해 예비되었다고 일컬어질 수도 있다. 그리스도 자신은 위로부터 왔으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매우 오래전에 예비되었다. 자연과 은혜는 구별되고 혼동되거나 혼합되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은 이 둘을 연관시킨다. 창조와 구원과 성화는 경륜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돌려지지만, 이 삼위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며 함께 구원의 사역을 성취한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그리고 아들이 성령을 보낸 자외에는 아무도 성령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비적 은혜’가 존재한다. 하나님이 친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준비한다. 하나님은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를 보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고(눅19:3),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들 가운데 마음의 찔림을 느끼게 하고(행2:37), 바울이 땅에 엎드러지게 하며(행9:4),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당황하게 하고(행16:27), 이와 같이 자기 모든 자녀들이 중생하기 이전에 그리고 중생하는 시각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인도한다. 비록 그들이 아직 그들 편에서 속죄와 칭의를 소유하지 못하고, 아직 중생과 믿음을 갖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은혜로 그들을 성령께 인도하는데, 오직 성령만이 거듭나게 하고, 위로할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후속적인 것들과 교회로의 부르심과 연관된다. 잉태와 출산, 가정과 세대, 민족과 땅, 양육과 교육, 지적 발달과 마음의 성장, 끔직한 죄로부터의 보존, 무엇보다도 성령훼방죄로부터의 보존, 온갖 종류의 악과 불의에 대한 포기, 재앙과 심판들, 복과 유익들,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교, 심판에 대한 낙심과 두려움, 양심과 각성과 구원의 필요,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을 위한 예비적 은혜이며 신자가 나중에 교회에서 차지할 자리를 위한 예비적 은혜다. 물론 하늘에 이르는 길은 하나이지만, 이 여정에 들어서기 전에 그리고 이 도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다양하게 나타나며, 성령의 은혜는 풍부하고 값없는 것이다.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과 디모데는 므낫세 또는 바울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인도되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각각 다른 임무를 수행했다. 경건주의와 감리교는 이러한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며, 모든 것을 단 하나의 형태로 한정시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경탄한다.
[435] 그러나 성경과 경험은 이 모든 ‘외적 소명’의 활동들이 언제나 그리고 모든 사람을 참된 믿음과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문제는, ‘그러한 다양한 결과에 대한 가장 깊고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회는 주로 삼중적인 답변을 제시했다.
1.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다양한 결과는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는데, 이 의지는 선천적으로, 또는 로고스의 은혜를 통해, 또는 세례의 은혜를 통해, 또는 부르심의 은혜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충분한(sufficens) 소명과 효과적(efficax) 소명의 차이가 없다. 부르심은 내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언제나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부르심은 오로지 누군가가 부르심에 응답할 때, 그 결과에 따라 ‘효과적’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앞에서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 말했으므로, 이 답변은 더 이상 장황하게 반박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해답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실로 실제상 가장 가까운 원인에 머물러 서서 불신앙을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또한 진리를 따라 말한다(신30:19;수24:15;사65:12;마22:2,23:37;요7;17;롬9:32 등). 인간의 죄악된 의지가 그의 불신앙의 원인이다. 하지만 이미 실재적으로 모든 경건한 자들은 항상, 그리고 모든 학파들 가운데 그들의 믿음과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 그들을 구별되게 하는 것은 없다(고전4:7). 그러므로 이러한 구별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놓여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를 궁극적인 원인으로 주장한다면, 항상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 제기되었던 모든 심리학적, 윤리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반대들이 즉각적으로 제기될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 도입되고, 죄를 약화시키며, 세계 역사의 결과에 대한 결정을 인간의 손에 두고, 하나님에게서 만물의 통치를 빼앗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제거할 것이다. 비록 인간이 복음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능력을 은혜로 말미암은 회복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긴다 할지라도, 문제는 더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도입한 은혜는 오로지 의지의 선택을 회복시키는 것으로서, 성경은 이것에 대해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은혜는 사실상 중생을 이미 전제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좋은 선택을 한 후 비로소 중생이 반드시 일어나게 만든다. 이런 입장에서 사람은 또한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거나 혹은 어린 유아로서 죽었기에 그리스도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한 그 모든 수백만의 사람들로 인해 난감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앙과 불신앙의 궁극적 원인이 될 수 없다.
2. 그러므로 벨라미누스(Bellarminus)는 위의 문제에 대해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교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거부하고 중도노선을 추구했으며, 소명의 ‘효과’는 어떤 사람이 부르심을 들었을대 그 사람의 의지가 그 부르심에 따르려는 경향을 지닌 적합한 때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적합성,congruitas). 구원은 은혜의 방편들을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높게 발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파용(C.Pajon),클레만(Kleman), 그리고 쉐드(Shedd)의 견해가 이러한 적합성과 일칳나다. 하지만 이러한 답변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적합성 이론 가운데 중요한 진리가 들어있는데, 이 진리는 감리교에 의해 무시를 당하지만, 에비적 은혜에 대한 개혁파 교리에 의해 정당하게 취급된다. 하지만, 이 적합성 이론은 소명의 효과를 전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적합성은 그 자체로 다름 아닌 도덕적 권고(suasio moralis)로서, 당연히 성경이 말하는 중생에 의해 인간 안에 발생되는 영적 생명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적합성 이론은 인간이 은혜를 수용하는 때와 수용하지 못하는 때가 있기에, 죄를 환경에 두고, 인간 내부의 죄를 약화시킨다. 더 나아가, 이 적합성 이론은 결정을 인간의 의지에 둠으로써 위에서 언급되고 벨라미누스 자신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제기했던 모든 반대를 다시금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적합성 이론은 소명과 회개 사이에 오로지 적합성의 연관만을 두는데, 이 연관성은 도덕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계속 인간의 의지에 의해 깨어질 수 있고 따라서 소명의 효과를 보증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파와 토마스파와 개혁파는 소명이 어떤 사람에게는 결실을 맺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원인을 소명 자체의 성격에서 추구했다.
아우구스티누스파는 부르심이 효과적일때, 단지 능력(posse)만이 아니라, 의지(velle)도 주는 승리의 기쁨(delectatio victrix)이 있다고 말했다.
토마스파는 자연적 선결(physica praedeternimatio) 또한 하나님의 자연적 행위(actio Dei physica)를 말했는데, 이것은 충분한 소명(vocatio suffiecens)에 의해 제공된, 행할 능력(posse agere)를 실행하도록(agere) 했다.
하지만, 개혁파는 이러한 용어들에 대해 반대했고, 특히 회개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자연적으로 묘사하는데 반대하고, 오히려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을 선호했다. 이러한 묘사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타나고, 칼빈에 의해 전수되었으며, 그 뒤에 개혁신학 가운데 채용되었다. 처음에 이 이중적 소명과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의 소명, 공동의 소명과 개인적 소명, 보편적 소명과 특수한 소명 등으로 불렸으나,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어서 다른 명칭들을 점차 사라졌다.
4. 비록 이러한 구별이 문자적으로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구별은 성경에 근거한다.
[436] 바울이 언급하는 효과적 소명은 외적인 말씀을 통한 소명(vocatio verbalis externa)과 심지어 사물을 통한 소명(vocatio realis)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맥락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이 사역은 하나님 편에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설득을 통해 효과적으로 시행되는데, 이는 자연적 인간 안에 영적인 사람을 태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영적인 사람은 맨 처음 시작부터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소명은 일반적으로 중생이라는 명칭을 지닌 은혜언약의 다른 유익과 끊을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으며 자동적으로 이 유익으로 인도된다.
헬라어 단어, 중생(팔린게네시아 혹은 팔링게네시아)은 신약 성경에서 먼저 나타나지 않고, 문학작품의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다양한 의미들을 지녔다. 스토아철학에서 이 단어는 현세대가 종결된 이후 시작하게 될 세계의 갱신에 대해 사용되었다. 중생은 다른 용어로 ‘만유의 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 톤 판톤)에 대한 명칭이었으며, 이 회복은 한 번 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었다. 스토아학파는 만물의 주기적 회복(페리오디케이 팔링게네시아 톤 홀론)을 믿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영혼들의 죽음으로부터의 중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했다. 생명의 떠남(아포비오시스) 후에 소생(아나비오시스)이나 중생(팔링게네시아) 또는 다른 용어로 다시 육신을 입음(메텐소마토시스), 영혼의 윤회나 환생이 뒤따른다. 이 단어는 이러한 두 가지 종말론적인 의미 외에 자주 온갖 은유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필로는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중생의 선도자들과 두 번째 시긴의 창설자들’(팔링게네시아스 헤이게모네스 카이 듀테라스 아크케이게타이 페리오듀)이라고 부른다. 요세푸스는 바벨론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귀한한 것을 ‘조국의 회생’(팔링게네시아 테이스 파트리도스)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이전의 위엄과 존경으로의 회복을 소생(팔링게세시아)이라고 부른다. 올림피오도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은 이해의 회생이다’(팔링게네시아 테이스 그노세오스 에스틴 헤 아남네이시스).
중생의 개념은 점차적으로 신비 제식들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동방에서 유래된 이 신비제식들은 기독교의 초기 수 세기에 서방으로 침투했고 거기서 크게 확산되었다. 이것들 모두가 지닌 공통점은 신이나 여신이 죽었다가 다시 새롭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레우시스 제식)Eleusinsiche mysterien)에서 코레(Kore, 페르세포네[Persephone])는 먼저 플루토(Pluto)에 의해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끌려갔다가 다시금 빛을 보고 자기 어머니에게 되돌아간다. 그리고 동일한 사상이 프리지아(Phrygishce),페니키아, 그리고 이집트 제식의 근간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 사상은 교훈적으로 전개되거나 주장된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극적인 방식으로 입문자들에게 제시되었다. 로더(Rohde)의 표현에 의하면, 제식들은 거룩한 노래들과 엄숙한 선언들로 결합된 종교적인 판토마임이다. 일반적으로 다양한 계급들로 나뉜 입문자들은 오로지 온갖 의식들에 참여함으로, 다양한 정결의식을 행함으로, 제사장이 제공한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 신비들 가운데 들어갈 수 있었고 이러한 예배의식들 가운데 제공된 신적 생명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것은 특별히 미드라신예배(Mithradienst)에서 표현되었는데, 미드라신 에배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프리지아를 거쳐 로마에 전파되었고, 그리스도 이후 3세기 로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예배의 중심점은 젊은 신으로 표현된 미드라(Mithra)가 황소를 죽이는 것이다. 입문자는 이 황소의 피를 받아 자신의 머리, 입술, 눈, 귀, 얼굴에 뿌리고, 심지어 그 피를 마시기조차 하며 군중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 자신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는 피로 세례를 받아 정결하게 되며, 신과 같이 되며, 영원히 갱생되기(aeternum renatus) 때문이다. 이러한 제식들은 당연히 참가자들과 구경꾼들에게 매우 다양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제식들을 단지 생명력의 죽음과 갱생을 시각적으로 재현된 자연신화로 여겼다. 다른 사람들은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 각 사람과 온 인류와 온 세상이 불멸, 영생, 신적 존재에 참여하기 위하여 반드시 겪어야 할 죽음과 부활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최근에 종교사적 방법을 옹호하는 자들은 기독교는 혼합종교이며 단지 후기교리의 형성에만 아니라, 이미 초기교리의 발전에서도 이러한 이교도적 제식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는 여기서 취급될 수 없지만, 이 주장은 어쨌든 중생사상의 측면에서 근거가 부족하다. 가장 먼저 주목되는 사실은 ‘팔린게네시아’(중생)이란 용어가 신약성경에서 단지 두 번만 나타나고(마19:28;딛3:5),
마태복음 19장28절의 경우, 복음서 저자가 헬라어 ‘팔린게네시아’라고 번역했던 그 내용을 예수가 어떻게 아람어로 표현했는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신비제식들에서 중생의 사상은 의식들이나 심지어 성사행위들과도 계속 연관되지만, 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연관성없이 그 자체로 반복되어 언급된다(요3:3,5;약1:17;벧전1:2,23). 심지어 디도서 3장15절에서조차 세례와의 관련성이나 세례에 대한 암시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더 나아가, 신비제식들의 많은 관습들, 예를 들어 미드라가 황소를 죽이는 것에 대한 해설은 여전히 매우 불확실한 성격을 지닌다. 진실로 이 신비제식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대부분 로마제국에서 번성했던 그리스도 이후2~4세기의 증거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자기 진영에서 신비 제식들에 대한 해설에 영향을 미쳤다는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어쨌든, 만일 본래의 기독교가 신비제식들의 영향 아래에 형성되었다면, 이것은 이미 팔레스타인에서, 바울,요한,그리고 당시의 모든 교회에서 시작되었어야만 하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초기 기독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관되지만, 처음부터 모든 이방종교에 대해 대립했다.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은 일반적으로 당시의 사용되었던 평범한 헬라어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복음이 전해지고 수용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마만, 복음은 자주 그 단어들에 다른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점차적으로 인간의식의 내용으로 삼았다. 이것은 구원(소테리아) 생명(조에), 구속(아폴뤼트로시스) 등과 같은 단어들이 그러하며, 성경에서 단지 두 번만 중생(팔린게네시아)으로 표현되고, 그 외에는 다른 많은 용어들로 표현된 중생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437] 중생의 개념은 이미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생(팔린게네시아)이란 용어는 70인역에 나타나지 않으며, 오로지 욥이 14장14절에서 말한 것뿐이다. “나는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휘포메노 헤오스 안 팔린게네오마이). 하지만 내용적으로 우리는 중생을 이스라엘 종교에서 이미 분명하게 발견한다. 구약 성경 시대와 전적으로 일치하여 이것은 일차적으로 민족 전체의 일이다. 율법수여와 나중에 예언 가운데 이 용어는 제일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언역 가운데 포함한 민족 전체에게 향하고 있으며, 이 민족은 이 언약에 근거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라”(신11:13;수22:5)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역사에서 백성들의 배반, 불성실, 마음의 강팎함이 드러남에 따라, 선지자들이 더욱 강조했던 사실은 내적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며, 단지 전체로서의 민족뿐만 아니라, 또한 특히 민족 가운데 각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냐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이것을 행할 능력이 없었다(창6:6,8:21;욥14:4,15:16;사51:5). 구스인이 그 피부를, 또는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선을 행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악을 행하기에 익숙하고(렘13:23),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기 때문이다(렘17:9).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출생할 수 없는 것처럼, 우둔한 자가 지혜롭게 될 수 없다(욥11:12).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일으킬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미래에 행할 것이다. 하나님만이 홀로 정결한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시51:10~12). 하나님은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새로운 영을 줄 것이며,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율례 가운데 행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심은 가지와 하나님의 손의 만든 것이 되어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다(신10:16,30:1~6;사54:13,60:21;렘24:7,31:18,31ff.,32:8ff.;겔11:19,36:25ff.).
그래서 그러한 내적 변화는 또한 먼저 세례요한에 의해, 그 다음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외적인 특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부패했다. 이스라엘은 할례에도 불구하고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필요로 했는데, 이 세례 가운데 다른 사람으로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기 위해 전적으로 잠겼다(마3:2ff.).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얻게 위해서는 과격한 방향전환, ‘회개’(메타노이아‘가 필요하다. 그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이전의 모든 삶과 셜별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고(마10;37~39,16:25;눅14:26), 모든 것을 버리고(눅14: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뒤따르며(마10:38,14:26), 자녀가 되고(마18:3), 죄를 고백함으로 아버지께 돌아가며(눅15:18), 좁은 문을 통해 협착한 길을 걸어야 한다(마7:14). 이것을 진실로 행하는 자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이 능력을 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성상 악하기 때문이다(마7:11).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불의뿐이다(마15:19). 나쁜 나무처럼 그들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7:17ff.).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나무가 먼저 좋아야 하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마19:26).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하늘의 아버지가 심은 나무와 같으며(마15:13), 성자는 그들에게 성부를, 성부는 그들에게 성자를 계시했다(마11:25~27,13:11,16:17). 그들이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반면, 이제는 참된 생명을 소유하고 영생을 기다린다(마8:22;눅15:24,18:30).
처음 세 복음서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이러한 전체적인 가르침 가운데 중생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 내용은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할 때(요3:3~6), 이는 다른 복음서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다른 곳에서 더 폭넓게 그리고 더 대중적인 형태로 설명했던 것을 선생 니고데모에게 단지 간단하고 날카롭게 요약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뛰어난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교사였고 산헤드린 회원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기적들에 대해 들었으며 이것에 기초하여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선생으로 여겼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가 메시야인지 여전히 의심하고 결국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밤에 예수를 찾아왔는데, 이는 예수와 친밀하게 대화함으로써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선생으로 여긴다고 인정함으로써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고 명백하게 질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질문을 제기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곧 바로 대답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이러한 대답으로써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로서의 인간의 모든 노력, 모든 바리새적 율법준수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또한 예수는 이러한 이유에서 문자적으로 다시(두번째,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출생의 필요(비록 중생이 당연히 그렇게 불릴 수 있을지라도(를 강조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니고데모에게 오로지 위로부터 (요3:3), 물과 성령으로(요3:5),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요3:8)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라고 밝히기를 원한다. 이러한 출생은 육으로 태어나는 것과 대립하는데,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이다(요3:6). 이러한 출생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으로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다(요1:13). 그러므로 이 출생이 바람처럼 그 근원과 방향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성려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요3:8). 예수는 먼저 일반적으로 이것이 물과 성령(둘 다 관사가 없음)으로의 출생이라고 말한 뒤에(요3:5), 요한복음3장7절과 8절에서 구체적으로 그 성령(관사가 있음)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이 성령이 하나님의 성령으로서 이렇게 위대한,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역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요한복음3장5절의 물을 말할 때, 예수는 세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의 속성을 묘사한다. 이 출생은 갱신과 정화의 성격을 지니는 출생이다(물은 갱신과 정화의 상징이다. 겔36:25;cf.성령과 불의 결함.마3:11). 그리고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런 성격은 위로부터의 출생이 초래할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출생은 그 성령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3:6~8).
[438] 사도들 역시 자주 중생을 말하지만 다양한 용어로 가리키며, 대로는 더 넓은 의미로, 대로는 더 좁은 의미로 이해한다.
1) 야고보(약1:18)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좇아 우리를 낳은(아페퀴에센) 것은(cf.약1:15에서 사용된 동일한 단어,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고 하여금 그 피조물 가운데 첫열매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낳음(아포퀴에인)의 원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 가운데 있는데, 이 하나님으로부터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내려오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낳음으로써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가장 잘 증거해준다. 이 낳음은 진리의 말씀(또는 단지 진리, 약3:14,5:19,또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 최고의 법,약1:25,2:8,12)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단지 그 진리를 듣기만 하도록 우리 밖에 머무르거나 우리와 대치하는 것이 아닐, 우리 안에 새겨졌으며, 히브리서 8장10절,9장16절에 따르면, 우리 마음의 비석에 새겨졌으며, 따라서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약1:21). 이 낳음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첫열매가 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민족이 구약성경시대에 그러한 존재였던 것처럼(출19:5;신7:6,14:2,26:18;시135:4;사43:21;말3:17;cf.벧전1:23,2:9).
2) 베드로는 일상적인 헬라어에서 사용되지 않는 ‘아나겐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비록 필로가 때때로 팔리게네시아를 아나게네이시스로 교체하고 포르피리우스(Porphrius)가 형용사 아나게네이티코스를 한 번 사용할지라도)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다’, ‘거듭나게 하다’를 의미한다. 베드로 역시 이러한 중생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긍휼의 덕분으로 여기고(벧전1:3),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것으로 말하는데, 이 말씀은 자신의 독자들 가운데 선포된 복음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벧전1:23,25). 하지만 베드로는 이러한 중생을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산소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야고보와 다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히 하나님이 산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거듭나게 한 중간원인이다(벧전1:3).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도록 하기 위해 발생했다(벧전1:21). 신자들은 산 돌과 같으며, 모퉁잇돌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고(벧전2:4~5),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살아간다(벧전5:14). 그들은 하늘로서 보냄을 받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 가운데 선포된 복음의 말씀을 통해(벧전1:12,23,25), 그리스도의 이러한 부활을 알았으며,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다(벧전1:23).
이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썩지 아니할 씨와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 구별되는 것인지 결정하기 힘들다. 다른 전치사들을 사용하는 것, 즉 ‘씨로’(에크 스포라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디아 로구)로 표현하는 것은 전자를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베드로가 먼저 그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나중에는 상징없이 표현한다는 사실로 충분히 설명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장9절과 비교해 보아도 구별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베드로는 ‘씨’를 ‘스포라’라는 단어로, 요한은 ‘씨’를 스페르마‘라는 단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요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 방식 혹은 수단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고, 문맥상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과 범죄하는 것은 서로 전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죄를 지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 즉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그 마음에 심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그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난 자들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며 거짓없는 형제사랑으로 피차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고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한다(벧전1:22). 삶 가운데 그렇게 강력하게 나타나야만 하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또한 반드시 살아있고 항상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다. 그러므로 문맥은 씨와 말씀이 동일한 것을 지시한다는 것을 추측하게 하며, 이러한 추측은 베드로전서1장24절, 25절이 더 이상 씨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고, 풀과 같이 썩기 쉬운 육체를 오로지 말씀과 대조시킴으로써 강화된다. 이제 이러한 중생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있는 말씀의 수단을 통해 초래한 것이므로 살이있는 소망을 위한 중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말하자면 하나의 개념이다. 새로운 생명은 소망을 그 내용으로 한다. 신자들의 생명 전체는 소망에 의해 지탣되고 인도된다. 소망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특징짓는다. 어쨌든 소망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활동하며, 강력한 것이다. 소망은 하늘의 기업을 향해 손을 내밀고 신자들을 거기에 매어둔다(벧전1:4~13). 소망은 그들로 하여금 또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능력을 입혀 준다(벧전1:14ff.). 산 소망을 위한 중생은 동시에 새로운, 거룩한 삶을 위한 중생이다.
3) 바울의 경우, 중생은 이미 바울이 계속 효과적 의미로 말하는 부르심 가운데 포한되어 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단어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단지 한 번만 나타나는데, 디도서3장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만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디아 루트루 팔링게네시아스 카이 아나카이노쉬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갱신의 씻음의 수단을 통해 구원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세례에 대한 암시 또는 직접적인 언급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은 사도가 성령을 통한 중생과 갱신을 씻음의 이미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인해 문제는 변하지 않으며, 첫 번째 생각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적이다. 로마서 6장이 이것을 증명한다. 바울자신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이 시간 속에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리고 사도가 다르게 표현하듯이(빌3:12)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붙잡힌 바 되었을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믿음에 이르고, 이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입고 자녀로 입양되며(롬3:22,24,4:5,5:1;갈3:26,4:5 등), 성령의 증거를 통해 양자됨을 확신한다(롬8:15,16;갈4:6;고후1:22;엡1:13,4:30). 하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일어난 유일한 변화가 아니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또한 믿음을 통해 곧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포함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일으킴을 받았으며(롬6:3ff), 살리심을 얻었고(엡2:1,5),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변했다(롬8:29,30;고전4:15;고후3:18;갈4:19).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살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갈2:20).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신의 부활로 살리는 영이 되었기 때문에(고전15:45;고후3:17),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으며(롬5:5,8:15;고전2:12;고후11:4;갈3:2,4:6,5:18),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롬8:11), 그들이 성령 안에 살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롬8:2,4,5,9 등)고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영은 믿음을 통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의 새로운 삶의 주와 근원이기에(갈3:2,4:6),이제 그들은 전혀 다른 새로운 영적인 사람들이다. 옛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5:17).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엡2:5,5:14;골3:2). 그들은 육신과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다(갈5:24,6:14).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산다(갈2:20).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5:17), 하나님이 만든 작품이다(엡2:10). 그들은 새로운 삶 가운데 행하고, 성령의 전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롬6:4,8:14;고전6:19;갈5:25 등). 이러한 전체적인 변화는 그들의 세례 가운데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세례는 그들의 삶의 커다란 방향전환이고, 이전에 살아왔던 모든 행위와의 결별이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전적인 포기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때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들어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들을 소유했다는 인침이기도 했다(롬6:3ff.;갈6:17). 그러므로 ‘중생’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 있어서 단 한 번 나타난다 할지라도, 내용적으로 효과적 소명[부르심]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부르심으로 미리 아신자들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자신과 연합하여 한 나무가 되게 했다(롬6:5).
4) 요한에게 있어서 중생은 바울보다 더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며(요3:6), 하나님과 원수다[롬8:7]. 오로지 자연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자들은(요1:13) 세상에서 왔으며(요8:23,15:19), 세상에 속하고(요14:17,19,22 등), 아래서 났으며(요8:23), 마귀에게서 태어났고(요8:44), 로고스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요1:5), 그를 영접하지 않으며(요1:11),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요3:19,20),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요8:47),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요8:19:15:21),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며(요3:3), 어두움 가운데 다니며(요12:35), 빛을 미워하며(요3:20),죄의 종이다(요8:34).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요3:3), 믿거나(요5:44,12:39),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요8:43), 그리스도께 나아오거나(요6:44), 성령을 받거나 할 수 없다(요14:17). 그러므로 거듭남이 필요하다. 이러한 거듭남은 위로부터 나는 것(겐네이떼이나이 아노센,요3:3,cf.요3:31,8:23,19:11,23)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에크 쎄우, 요1:13;요일2:20,3:9 등)이며,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요3:5), 즉 성령으로 나는 것(요3:6,8)으로, 성령의 정결하게 하는 사역은 물로서 상징되고(cf. 겔36:25~27;마3:11), 신비롭고 놀라와서 그 누구도 이러한 사역의 기원과 본질을 알지 못한다(요3:8). 그러므로 요한의 경우, 이러한 중생은 바울의 경우처럼 직접적으로 부르심과 연계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먼저 그리스도에게 주고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성부의 사역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이미 성육신 전에도 사역했다(요1:1~13). 그리스도는 세상 가운데 빛으로 나타났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요1:5,9,10).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왔으나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요1:11).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이 전적으로 헛된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었다(요1:12,13,cf.요일5:1).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와서 그를 믿기 전에,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속했으며(요8:47), 진리에 속했다(요1*:37). 그들은 성부가 성자에게 준 자들이다(요6:37,39,17:2,9). 성부는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끈다(요6:44).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오는 자들을 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영생을 위해 보존한다(요6:39,10:28,17:12). 그리스도는 성부가 자기에게 주었던 자기 양떼를 모으고(요10:27), 그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고 따르며 한 무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왔다(요10:16,11:52). 그리도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들에게(요11:52) 하나님의 자녀(테크나 투 세우)가 되는 권세(엣수시아), 권리와 능력을 주고[요1:12), 그들이 그와 같은 자들로서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임을 나타내고, 특히 형제 사랑 가운데, 즉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에 대한 사랑 가운데(요일5:1)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임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왔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의 이러한 가르침을 영지주의적 이원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은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본래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요1:3). 온 세상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요3:16).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준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다(요3:17,12:47). 그러나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빛을 미워하는 세상에 속하는데, 이는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요3:19,20).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생을 받는 자는 믿음에 달려 있다(요3:15,16,36). 이 믿음은 일(에르곤,요6:29)이고, 오는 것이며(요5:40,6:35,37,44,7:37), 영접하는 것이며(요1:11,12,3:11ff.,5:43), 목마름과 마시는 것, 배고픔과 먹는 것이다(요4:13~15,6:35,50ff.,7:37). 이것은 지성과 의지에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만이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그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안다(요7:17). 그러므로 불신앙은 또한 사람의 고집에서 비롯된 것으로(요5:40,8:44), 이것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요3:19,9:41,12:43,15:22,24).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3:16,36,6:47,20:31). 그러므로 사람은 믿음을 통해 영생을 받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요일3:14), 흉악한 자와 세상을 이겼으며(요일2:14,5:4),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요일2:20,27). 멸망이란 더 이상 언급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보존하며(요10:28,29), 하나님의 씨가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요일3:9). 하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는 권면과(요15:4~10, 요일2:24), 의를 행하며(요일2:29), 자기를 깨끗이 하고(요일3:3), 자신을 지키며(요일5:18),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하나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 가운데(요일4:7,8,5:1), 자신들에게 주어진 새생명을 나타내라는 권면을 받는다. 왜냐하면 죄는 신자들이 사는 모든 날 동안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요일1:8).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단지 미래에 가서야 성취될 것이다(요일3:2).
5) 그러므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물론 언어와 표현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 자체는 완전히 일치한다. 중생이 마음의 할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정신의 부여, 효과적인 부르심, 성부의 이끄심,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 등으로 일컬어지지만, 중생은 언제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내적으로 변하고 새롭게 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중생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 궁극적인 원인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며, 말씀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발생하고, 거룩한 생활 가운데 드러난다. 중생은 때때로 요한의 경우처럼 새생명의 원리로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신실하게 듣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강조되고, 때로는 이 새생명의 전개와 발전의 다른 측면이 더 전면에 부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매우 긴밀하고 연관되고, 분리할 수 없이 중생의 단일한 개념에 속한다(Sometimes, as in John, the words stress that it is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whose consequence is the faithful hearing and reception of Jesus' words. Sometimes the other side comes more clearly to the fore. Then it is the unfolding and development of that new life that stands out. The two are most intimately interwined, however, and belong inseparably to the one concept of regeneration.).
6) 그러나 중생이라는 용어에 훨씬 더 넓은 의미가 주어진 하나의 구절이 있다. 예수는 마태복음19장28절에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장차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자세한 설명이 모두 없다는 것은 예수가 아람어로 말했던 단어가 잘 알려진 것을 가리켰음을 증명한다. 이것 역시 그러한 경우였다. 구약의 예언은 이미 종말에 하늘과 땅의 갱신을 기대했으며(사11:1~9,65:17~25,66:22 등), 이러한 기대는 묵시문학과 유대 온 민족의 믿음 가운데 옮겨졌다. 메시야의 왕국은 또한 자연과 지상의 모든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기대를 확증하고, 나중에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확증하고(벧후3:10~13;계21:1,50, 이러한 변화를 ‘거듭남’으로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의미를 위에 언급한 것들과 연계시킨다면, 성경은 중생을 주로 세 가지 의미로 말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1) 인간이 믿음을 갖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 안에 심겨진 새로운 생명의 원리, (2) 거룩한 삶 가운데 나타나는 인간이 도덕적 갱신, (3)마지막으로 온 세상의 원래 완전한 상태로의 회복, 그래서 중생은 첫 번째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새하늘과 새당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재창조의 모든 사역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