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

메르시어 2023. 5. 2. 10:15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

2014-01-12 23:21:34

 


이미 살펴본 중생(Regeneration)과 칭의(Justification)의 관계에 이어서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를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요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대두되고 있다. 

한국 교회에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 문제점을  칭의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있다. 

칭의론 자체가 왜곡되어 성화를 이루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칭의론은 옳은데 그것이 바르게 가르쳐 지지 않아서 성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배경에는 칭의를 성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신학적 전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칭의는 성화를 이루기 위한 기초이거나 성화의 출발점인가? 

 

먼저  

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법정적 선언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죄인이 자기 죄에 대하여 마땅에 책임을 져야 하는 죄책을 면제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라는 은혜를 통하여 심판을 피하고 형별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칭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인가?

카톨릭의 칭의 교리의 질곡에서 (인간의 실제적 의로움을 보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사람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의 위대한 슬로건이 이신칭의이다.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 이신칭의 교리이다.

그러니까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 동의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순종히 위에서 부터 부어주시는 신적 은혜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선물로 주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거듭남 중생을 통하여 주어진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회심을 통하여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다.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하게되고

이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니까

중생없이 믿음이 없고

믿음없이 그리스도와 연합없으며

그리스도와 연합없이

칭의도 없는 것이니

결국 중생없이는 칭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화란 무엇인가? 칭의가 법정적 의라면 성화는 실제적 의이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의롭다 인정하신 자를

실제적으로 의롭게 하신다.

그러나  이 말이 칭의가 성화의 시작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덧입혀진 것이 칭의라면 

성화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인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동일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붙든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니까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는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죄인이 동시적으로 누리는

이중적 은혜(duplex gratia) 이다.

칭의로 죄인의 죄책이 제거되며

성화로 죄인의 죄성이 씻겨진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지만 구별되어야 한다..

칭의는 성화로 보충되거나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성화로 부터 자유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칭의없는 성화가 없듯이

성화없는 칭의도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누리는 

이중적 은혜이기 때문이다.

 

성화(Sanctification)

2014-10-17 14:49:44


  칭의에 대한 두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칭의가 과거 일회적인 구원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칭의로 모든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를 이렇게 오해하면 구원은 과거에 일회적인 과정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 된다. 그러나 칭의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점 그리고 칭의는 구원의 한 측면으로서 죄의 용서를 묘사한 것이지 구원의 총제적인 묘사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한 것이다.(빌립보 2:12) 중생과 마찬가지로 칭의도 구원과정의 시작점이지 완성점이 아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칭의가 구원의 과거적 측면 혹은 출발적 측면을 좀 더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구원의 현재적 차원이나 과정적 차원을 좀 더 강조하는 것이 성화이다. 구원에서 칭의가 죄의 용서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성화는 거룩한 삶이란 측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중생으로 새생명을 얻었고 칭의로 법정적 의로움을 받았지만 아직 내면적으로 거룩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의롭다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로 성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화이다. 그러니 성화의 과정을 등한시 여기면서 칭의에만 안주한다면 구원을 시작하였다가 중단하는 것과 같고 씨를 뿌렸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성화는 칭의와 함께 구원을 이루는데 필수적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존재적 측면의 거룩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측면의 거룩이다. 전자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거룩인데 이것은 신분의 변화로서의 거룩으로서 칭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후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서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성화에 해당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종교적 영역뿐 아니라 일상적 차원을 더욱 강조한다. 사람의 내면적 인격과 일상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거룩함의 표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제시하는 성령의 열매는 일상적 삶에서 나타나는 인격적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성화는 전인격적 차원에서 총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적, 감성적, 행동적 차원 모두에서 성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삶은 언제나 전인격적이고 총제적이기 때문이다.

 

  성화가 전인격적이고 총제적이라는 것은 성화를 이루는 일에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화의 과정은 일종의 고된 훈련 과정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그 부르심의 목표인 거룩한 자로 성장하기 위하여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의 훈련이 모든 면에 유익하며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준다고 말한다.(딤전 4:8)  이 성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능동적으로 자기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성화는 우리의 노력없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화가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특별히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이처럼 성화는 우리가 애써야 하는 과제이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필요한 도움을 넉넉히 공급하여 주신다.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특히 힘써야 하는 일이 말씀과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이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더욱 깊어지고 튼튼하게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 성장을 원하다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 성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으시고 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공동체는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체화하면서 거룩하게 변화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교제하고 자극하고 권면하고 경책하면서 성화의 훈련을 체화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거룩함을 체현하듯이 또한 우리는 공동체속에서 이루는 관계속에서 거룩함을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화의 훈련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역동적인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 충만 없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거룩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신비 체험이나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 충만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어도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말씀에 따른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변화가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성품과 삶에서 나타나는 인격적열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전적인 지배를 받아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이 말씀과 기도임을 언급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이 말씀과 기도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말씀에 착념하며 말씀의 기초위에 기도에 열심을 내야 한다. 다른 왕도는 없다. 그 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에 대한 갈급함과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고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여야 한다. 성령충만은 일회적인 사건도 아니며 한번 충문하면 그 효력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성령 충만의 경험이 현재의 충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든지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하기를 소원하고 노력해야 한다.  성령 충만에 완성이란 없다.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갈구하고 애써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더욱 성령 충만하여 지기를 노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