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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의 회심론 분석- 양낙홍
메르시어
2023. 5. 2. 10:07
에드워즈의 회심론 분석- 양낙홍
2014-01-08 05:33:19
에드워즈의 회심론 분석 양낙흥 교수 서론 두 가지 전도 방식 제임스 패커에 따르면 전도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대의 전도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청교도 전도 방식이다.1) 전자는 “구도자의 좌석들” (anxious seats), “제단의 부름”(altar call), “질의자의 방” (enquiry room) 등으로 상징된다. 거기서는 새로운 회심자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결단에 대한 공적 증언의 행위”로 앞으로 나오거나 손을 들거나 결신 카드를 작성함으로써 자기들의 “결정” (decision)을 분명히 표시한다. 현대의 전도자들은 자신의 교파적 소속과 상관없이 거의 누구나 전도 설교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요청함으로 구원이 개인의 결단이나 결심에 달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현대의 전도 집회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의식적, 결정적 믿음의 행위 (immediate, conscious, decisive act of faith)를 회심하지 않은 자들로부터 확보하는 데 직접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현대적 전도 방식의 원조는, 패커에 의하면, 19세기 초의 찰스 피니다. 현대의 복음 전도는 피니의 방식을 따른 것이요 피니의 인간론의 산물이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 전도를 특징짓는 것은 수정되고 응용된 피니의 방법이다.” 그런데 패커는 피니가 “명백한 펠라기안주의자”라고 단언한다. 피니는 “일단 사람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되기만 하면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힘주어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니는 어거스틴-개혁주의-청교도적 전적 무능력 (total inability)의 교리를 비웃었다는 것이다. 패커의 지적에 의하면, 청교도들에게는 “복음전도”(evangelism)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것은 20세기에 만들어진 단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도는 청교도들의 “주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뿐 아니라 그들은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설교자들로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리차드 백스터는 대표적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2)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회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설교자도 없었지만 그의 설교는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청교도 교리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회개하거나 믿을 수 없다고 패커는 지적한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없이 인간은 영적으로 선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3)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 때에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때 받을 수 있을 뿐 스스로 가지겠다고 결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로이드 존즈가 지적했듯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4) 패커는 청교도들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하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찾을” 의무를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죄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설교의 말미에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신다”고 말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지 않았다.5) 우리는 스스로 믿기로 “결심”할 수 없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나 로이드 존즈 같은 칼빈주의자들은 찰스 피니의 전도 방식을 비판한다. 피니가 구원을 인간 의지의 결단에 달린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회심과 관련해 성령이 하시는 일이란 “도덕적 설득”뿐이라는 피니의 주장은 교리적 오류이며6) 회심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단지 도덕적 설득만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 아래에서 행사되는 물리적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7) 칼빈주의적 구원론에서의 딜레마 칼빈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 만사와 모든 영역에 미치는 것이지만 특히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죄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시작된다. 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는 어떤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능력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였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첫 번째 작업은 “예정”이었다. 창세 전에 택정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때가 되면 복음으로 부르시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을 주신다. 인간 스스로는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즉 하나님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청교도들은 “회심” 혹은 “신생/중생”이라는 단어를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는 기술적 용어의 동의어로 사용했다.8)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으나 구원에 관심있는 죄인들은 자신들을 회심시키려 몸부림친다. 자기들의 마음을 믿는 상태로 만들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얻는 신뢰를 발휘하 려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 의뢰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를 믿겠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려 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자들에게서 이런 일이 아주 흔히 발견된다.9)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믿으면 되는 줄 알지만 인간 스스로는 믿을 수 없다. 단 자신이 택정된 자라면 하나님이 “자기 때”에 “자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완전히 일임하고 인간은 각자 자기 할 일이나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난센스가 될 것이다. 인간에게 전도의 여지는 사라질 것이다. A.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도론 (the doctrine of seeking) 그러면 전도자는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어떤 권면을 주어야 하는가? 믿으라고 말하거나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면 그들에게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 에드워즈는 구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즉 각성된 구도자들에게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찾으라(seek)고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을 가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시기까지 추구하고(seek) 몸부림칠(strive) 수는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믿는 칼빈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힘은 자연인에게 있다고 믿었다.10) “인간의 심령이 죽어 있고 태만하다 해서 [구원을 위해] 노력할(take pains)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11)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할 능력은 있다는 것이었다. “[구원받기가] 어렵다고 해서 사람이 이러한 일들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일들]을 하면서 몸부림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견해에 의하면 “추구함 없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히려 터무니없는 것이었다.12) 추구한다는 것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추구하는 방법”(The Manner in Which Salvation Is to Be Sought)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착수해서 성취해야만 하는 일(work) 혹은 과제(business)가 있다”는 교리를 제시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에서 지시하시는 모든 의무(duty)를 중단없이 수행하는 것”이었다("It is the work of seeking salvation in a way of constant observance of all the duty to which God directs in His Word").13)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은혜의 방편을 성실히 사용할 힘은 그에게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모든 규례를 지키는”(attend all ordinances) 일, “공사간에”(public and private) 모든 “종교적 의무” (duties of religion)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죄악에 대항해 싸우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는 일을 아주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행할 수 있다.14) 구도론의 성경적 근거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노아의 경우를 제시한다. 노아는 수백 년동안 방주를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그는 인정한다. 노아가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자비의 한 예”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노아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구원을 얻도록 한 가지 일을 지정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 일에 착수해서 그것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게 정하셨다”는 것이었다.15) 신약에서 에드워즈가 구도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 구절은 누가복음 16장 16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구절이었다. 이 본문의 “천국으로 침입한다”(Pressing into the Kingdom) 이라는 귀절을 에드워즈는 “대단한 노력”(greatness of endeavor) 혹은 “갈망의 힘”(strength of desire)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엄숙하고도 단호한 결단”(an earnestness and firmness of resolution)으로 “반대와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을 나타내었다.16) 한 마디로 그 구절의 의미는 “수단을 사용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또 신약 빌립보서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본문을 준비론의 근거로 제시했다.17)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인간이 행위에 의해 구원얻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함이 없이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yet they are not saved without works)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들(good wokrs)을 함이 없이는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셨다"18)는 것이었다.19) 윤리적 의무의 수행도 구도의 일환 에드워즈는 은혜의 수단의 범위를 아주 광범위하게 잡는다. 이를테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기에 포함시킨다. 그는 회심의 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그러한 일들을 모두 수행하면서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기에는 종교적 도덕적 모든 의무가 포함되었다. “구원얻는 회심을 획득하는 길은 당신의 삶을 철저히 개혁하고 율법의 두 돌판에 나타난 모든 의무를 다 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입니다.”20) 여기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주 앞에 나오라거나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식의 전도 집회식 초청은 발견되지 않는다. 회심의 은혜를 받으려면 심지어 이웃에 대한 도덕적 의무까지 다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자칫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우려될 정도이다. 만일 당신이 회심하고자 한다면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의무들을 다 수행해야 합니다. 당신의 부모에 대한 책임있는 행동, 당신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의무들, 당신의 남편, 아내, 자녀들에 대한 책임, 이웃들에 대한 온유, 정의 그리고 자비의 의무들을 수행하면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악의, 분쟁, 시기, 그리고 험담을 피해야 하며 사랑의 행위에 있어 풍성해야 하며 여러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려 애써야 합니다.21) 한 마디로,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얻으려면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일은 단지 몇몇 계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즉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지정된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22) 기도, 성경 읽기, 예배 참석 등의 일을 “공로”나 “행위”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들을 지키는 것도 역시 은혜를 받는 통로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평가들에 의해 행위 구원적 요소를 더욱 더 많이 가진 가르침이라고 지적당할 소지가 있는 교리이다. 이신칭의와 행위 구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배, 기도 등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속한 계명들 뿐 아니라 두 번째 돌판, 즉 인간들에 대한 의무에 관한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도 일종의 “은혜의 수단”에 해당한다는 것은 철저한 개혁주의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서 평생을 보냈던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대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건 에드워즈는 자신이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에 아랑곳없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하신 모든 명령들을 충실히 지키는 중에 신령한 은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23) 제 일차 대각성이 한참이던 1741년 에드워즈는 “자선 행위를 풍성히”(Much in Deeds of Charity)라는 설교를 통해 구제 행위를 풍성히 하는 것이 “영적 발견”(spiritual discovery)에 이르는 길들 중 하나라고 역설했다. 청교도들 사이에서 “영적 발견”이란 복음의 진리, 혹은 성경적 계시를 참으로 깨닫게 되는 상태를 의미했다. 그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나 구도의 과정에 있는 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회심의 은혜를 받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이미 회심된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풍성히 체험”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달콤한 교제”를 가지는 것일 수도 있다.24) 물론 에드워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인간의 “공로”가 되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이 영적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자선의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신령한 은혜의 유익을 “구입”하기 위해 하나님께 “값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영적 발견과 하나님의 현현의 축복은 너무나 무한히 위대한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을 주고 구입할 수는 없다”고 그는 되풀이 강조한다. “설령 우리가 가진 전부를 가난한 자들을 먹이기 위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보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선의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님은 종종 “영적 축복--심지어 당신 자신에 관한 은혜스러운 발견들”을 허락하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선 행위가 그러한 신령한 축복들을 받을 공로가 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25) 당시에도 어떤 이들은 에드워즈의 그러한 가르침이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는 길이 된다고 반대했다. 에드워즈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나타난 의무들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둘째 돌판에 나타난 의무들에 대한 강조보다 자연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을 기대를 더 많이 품게 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첫째 돌판의 의무들은 둘째 돌판의 의무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자기 의로 삼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의무를 소홀히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확신이었다.26) 자선이 은혜의 방편이라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들 자선을 행하는 것이 영적 진리들을 깨닫는 길이 된다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들을 에드워즈는 여러 군데서 제시한다. 여기서 다시 성경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깊은 이해가 엿보인다. 먼저 그는 고넬료의 예를 제시한다.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그에게 보내어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게 하셨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특히 “많이 구제하고”라는 부분을 강조한다. 자선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큰 유익을 얻으려면 단지 약간의 구제를 할 것이 아니라 관대하고 풍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제를 하면서도 아무런 특별한 유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적게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27) 에드워즈는 또 누가복음에 나오는 로마 백부장의 예를 제시한다. 그 백부장은 자기 주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괄목할만한 사랑과 자비의 행위를 베푸는 삶을 살았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해서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눅7:5).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호의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었다.28) 이 외에도 에드워즈는 선행이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많은 성구들을 제시하면서 설명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강조를 볼 때 우리는 대단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가 행위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그는 마치 선행이 구원에 기여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교리적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행위주의가 아니고 단지 청교도들과 같은 선상에서 “은혜의 수단”의 열심있는 사용을 권면하는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에드워즈에 의하면, 실제로 열심히 추구한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었다. 추구하는 모든 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고 에드워즈는 첨언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열심히 찾는 자는 대부분 구원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최선을 다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단호한 결단으로 목표를 추구한 자들은 다 “회심의 은혜”를 얻었다.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한 구도자적 노력은 한 인간의 생에 있어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영원한 구원의 문제는 세상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문제에 최우선적인, 그리고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칠 용의가 있어야 했다. “단지 능력, 힘, 그리고 재산만이 아니라 시간, 그리고 생명까지도 이 일에 바쳐야 한다. 실로 우리는 전 생애를 그 일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도 에드워즈는 외쳤다.29) “당신의 남은 생애동안 그 일에 온전히 전념하시오.”30) 그들은 종교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들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수적인 문제로 여기는 자들 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그 문제와 경쟁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유일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 어야 합니다. 즐거움, 명예, 재산, 그리고 생명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31) B. 죄에 대한 깨달음(conviction of sins)의 필수성 패커가 잘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 회심론이 현대의 견해와 구별되는 결정적 지점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 믿음(fatih)에 선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죄책(guilt), 그것의 오염, 그 추악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해하심이라는 의미에 있어서의 죄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conviction)이 믿음(faith) 앞에 와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슨 죄들로부터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알기까지는 아무도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을 위한 청교도적 “준비론”(preparationism)으로 알려진 이 견해는 종종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길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오해되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고 패커는 주장한다.32) 청교도들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정확히 중세적 의미의 통회(contrition)가 절대필요함을 알았다. 그것은 자기의 죄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미워하여 그것들로부터 구조받기를 열망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통회가 없이는 아무도 “죄의 형벌로부터만이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도 구원받기 위해 참으로, 신실하게, 그리고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33) 청교도들의 회심론에 의하면 “준비” 단계는 “필수적”이었다. 패커는 현명한 청교도 설교자들과 상담자들이 절대로 그 과정을 생략하거나 단축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들은 구도자들이 참으로 죄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린 것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구도자의 양심에 그의 죄들의 죄악됨과 아울러 그들에게 단지 사죄뿐 아니라 거룩하게 될 필요성을 집요하게 제시했다.”34) 조나단 에드워즈도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획득하기 전에 원칙적으로--이 말은 예외도 있다는 의미다!-- 통과해야 하는 단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전에 그는 자신의 죄와 비참, 혹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전에 인간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35)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evil)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sense)을 주셔야만(should)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두 개의 극도로 다른 상태들을 거친다. 첫째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은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그러므로 구원받는 인간들이 이 두 상태 속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sensibly) 있어야만 한다(should) 는 것은 합리적이며 하나님의 지혜에도 부합되는 일이다.36)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woeful calamity and dreadful misery)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sensibly) 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sensible) 후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37)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 (ordinary) 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 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 한 후 다정하게 (comfortably)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정한 순서는 그들이 고뇌에 빠진 후 그들 자신의 무력과 하나님의 능력 및 은혜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보게 된 다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이루시는 위대한 구원을 보게 하는 것이다.38) 에드워즈는 인간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9) 그러므로 누군가가 정말 회심하기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리고 신속히 이 일에 착수해야 했다.40)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즈가 제시한 구절은 레위기 26:40-45이었다. 이 본문에 의지해서 그는,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굉장한 은혜를 주시기 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방식을 쓰신다고 주장했다.41) 이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초청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특별히 제공된다는 본문을 지적한다. 그 말씀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죄책과 위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42) 그러면 어느 정도로 죄를 깨달아야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자기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자기가 지옥에 합당한 존재임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죄책을 철저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43). “...또한 자기가 속수무책임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비참을 철저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44) 좀 더 리얼하게, 지옥의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은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다고 에드워즈는 확신했다. “영혼이 지옥 구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떨며 서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움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45) 그럴 때 복음은 그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고 그리스도는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 C.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 구도자는 언제까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가? 즉 자신이 회심의 은혜를 받았음을 어떻게 아는가? 여기에 대해 에드워즈는 이미 자신의 청중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언급되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소망과 위로를 얻기까지”라는 것이다.46) 그것은 체험적적인 어떤 것, 혹은 지성보다는 감정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에드워즈는 그것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빛”(supernatural light)이 비칠 때 인간이 자기 “마음의 감각” (senstation of heart)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47) 성경적인 표현을 빌자면 “마음 눈이 열리는,” 혹은 “마음이 열리는” 체험을 그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한 체험적 믿음은 칼빈이 말한 바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확신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즈는 구원얻는 신앙에 있어 그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에 비취어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구원의 사역을 가르치는 말씀의 탁월성을 보게 된 적이 있습니까?”48) 혹은 좀 더 막연한 표현으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때가 오기까지 열심히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기다리는 것에 여러분은 만족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는 “때”에 대해서는 그의 기쁘신 주권적 뜻을 따를 것이라는 말이었다.49) 한 마디로 에드워즈는 “구원얻는 믿음”이 주어질 때까지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심으로 그에게 와서 그를 자신의 구주로 취하며 자신을 그에게 드림으로써 그의 백성들 중 하나가 되며 행복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50) “진정으로”(truly)--에드워즈는 이 말을 강조한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즉 구원얻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안다”(know)고 그는 주장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므로 그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하며 영광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선하고 사랑스러운지를 봅니다.”5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사실들과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도리의 탁월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온전히 확신합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가련한 피조물들임을 보며 이 비참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봅니다.52) 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단지 교리--유일신 교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의 구주라는 교리들--에 대한 지식과 동의다. 일종의 고백주의적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런 믿음은 있지만 예수를 “참으로” 믿지는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가짜 믿음만 가진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를 인정하고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죄인들의 구주임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53) 이처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즉 “참” 믿음이 아닌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겉으로는 훌륭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주일을 지키고 주초를 삼가며 도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54) 이처럼 믿음이란 것이 여러 종류이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 검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자기에게 정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성찰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보아야 합니다.”55) D. 신적 초자연적 빛 1734년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혼에 직접 수여된 신적 초자연적 빛이 성경적이고 이성적인 교리임을 증명함”("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Immediately Imparted to the Soul by the Spirit of God, Shown to be Both a Scriptural, Rational Doctrine")라는 중요한 설교를 한다. 이 설교에는 그의 회심론과 관련된 핵심적 사상이 담겨 있다. 이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인데 이 본문에 근거하여 그는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곧바로 전달된 것으로 자연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 어떤 것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교리를 제시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교리에 대한 지성적,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이 사실임을 믿고 확신하는 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지론인 영적 신적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탁월성(the divine excellency)에 대한 진정한 지각(a true sense),” 혹은 “이해”(apprehension),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a conviction of the truth and reality of them)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 더 좁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사역들”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얻는 확신들”(spiritual and saving conviction)은 그것들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에 대한 안목 (a sight of their divine excellency and glory)이 생겨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56)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쳐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보고”(see) “지각할”(sense)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sense)이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선(good)에 관한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사변적이거나 순이론적인(notional)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감각(the sense of the heart)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혹은 달콤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생각(idea)이 떠오를 때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전자에서는 단지 사변적 기능 혹은 이해력(understanding)이 활용된다. 후자에서는 의지 혹은 성향(inclination), 혹은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된다. 에드워즈는 견해(opinion)로서의 지식과 감각(sense)으로서의 지식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스러우시다는 사실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스러움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 꿀은 달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꿀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전자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 속에 꿀맛에 대한 관념(idea)이 없으면 후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복음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이 생긴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었다. 믿음의 전제 조건으로서 영적 빛 종교적 정서 제 2부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에드워즈는 인간은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의 발동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망 없이(without any spiritual light or sight)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press and urge) 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presumption)이다.” 에드워즈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lively excercise of grace),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sensible Christian experiences) 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living by faith)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생각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무조건 믿는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세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believing that he has faith)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believing that he believes)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 외에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체험을 가지는 것이 은혜를 가지는 것임을 인정했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 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러면서도 에드워즈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이 믿기 전이 아니라 믿은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들에 대한 그들의 분깃(interest in the promises)을 계시하시는 것이다.”57) 아직 믿음이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법은 없다. 다시 말해서, 아직 믿지 않아 아무런 은총이나 그리스도 안의 분깃을 갖지 못한 불신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은혜의 약속에 참여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58) 특정인이 사죄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성경 본문은 없다.59)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 정도의 자격을 가진 자들(persons so qualified as he is)도 초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진실하여 거짓말할 수 없다.60)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convinced of the varacity of God)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신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61)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spiritual enlightening)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offer)를 “영적으로 적용”(spiritual application)하는 것은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offer)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 및 자기가 제안(offer)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혹은 미각(relish)”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offer)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title)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62)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일들--복음, 혹은 구원의 역사, 혹은 하나님의 계시--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the loveliness of the moral excellency of divine things)에 근거한다. 혹은 하나님의 일들을 그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때문에 사랑하는 것(a love to divine things for the beauty and sweetness of their moral excellency)이 모든 거룩한 감정의 최초의 시작이요 원천이다.63) 에드워즈에 의하면, “도덕적 탁월성”은 도덕적 완전과 같은 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덕”과 동의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거룩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의 이 도덕적 탁월성이 거룩이다. 고로 거룩은 모든 참된 도덕적 탁월성을 포함한다....진정한 거룩 외에 다른 참된 덕은 없다.”64) 그러면 “거룩”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그것을 “선한 사람이 가진 모든 참된 덕,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인간들에 대한 은혜로운 사랑, 정의, 자비, 동정심, 온유함과 유순함을 망라한다”고 본다. 기타 “모든 기독교적 미덕들이 거룩에 속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거룩”은 기독교의 본질에 닿아 있다. 참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에 의하면, 그의 거룩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사랑에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다.” 조금 더 좁혀서 말하자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직면한다. 그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 개념들 중 하나요 가장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 중 하나다. 앞에서 에드워즈는 새로운 영적 감각이 회심시에 주어진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그 영적 감각의 유무가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분수령이다. 그런데 이 영적 감각의 대상이 무엇인가? 즉 마음으로 무엇을 감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회심되는가? 그 대상은 거룩의 아름다움이다. 성결의 미를 감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회심의 순간이요, 구원의 은혜를 받는 순간이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가 회심을 아주 어렵게 정의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회심론은 독특하지만 전통 신학의 가르침과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후자에서는 “영적 감각” 같은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령한 지식 에드워즈에 의하면, 은혜스러운 정서는 정신이 “조명되어”(enlightened)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즉 거룩한 정서는 “빛없는 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보, 어떤 영적 가르침(instruction)에서 생겨 난다. 말하자면 “빛”을 받아 지식이 생겨야 거룩한 감정이 일어난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한 더 낫고 뚜렷한 이해가 가능해진다.65)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신학의 대주제에 도달했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love of divine things)이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신적인 것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e loveliness of divine things), 혹은 “이해”(understanding)이다.66)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 그러나 이 지식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 인간의 구원과 성화 여부는 모두 이 영적 지식을 획득 혹은 체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에드워즈의 회심론에는 독특하여 일반적 이해와 차이를 느끼게 하는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회심 시에 성령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영적 감각이 생겨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보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둘째, 그 결과 본성이 변화되어 회심 시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중생한 자의 성화가 아주 점진적으로 조금씩 이루어진다는 칼빈의 성화론과는 큰 차이가 있는 생각이다. 셋째, 에드워즈는 자연과 은총을 극단적으로 이원화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사변적, 관념적 지식과 영적 초자연적 지식을 극명하게 구분한다. 즉 자연적 이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교리적 지식은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반면 신적 초자연적 영적 빛에 의해 비로소 획득되는 영적 지식이 있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 지식과 마음의 지식을 확연히 나눈다. 그러나 여기서 지성적 지식과 영적 지식이 이론상이 아니라 실제상에 항상 그처럼 선명히 구분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있다. 넷째, 에드워즈에 의하면 마음의 지식은 영적 감각에 의해 획득된다. 머리 지식은 단지 견해만을 낳는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감각이 없이 견해만으로는 구원얻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감각적 지식을 중시한다. sense로 감지되지 않은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복음의 진리를 보고, 맛보고, 마음으로 영으로 감지하게 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지성적 이해와 의지적 수락은 감각적, 혹은 영적 이해를 결하고 있으므로 인간을 회심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적 영적 이해는 성령에 의해 영적 초자연적 빛이 영혼에 비칠 때 획득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구원에 있어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따라서 에드워즈는 칼빈주의의 중심 사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전통을 따른다.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 이해와 의지적 수락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그는 아마도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로 간주하고 거부한 것 같다. 그러한 회심에는 성령의 조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에드워즈의 준비론은 칼빈주의 예정론이 숙명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대답인 것으로 보인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만세 전에 계획하신 예정을 실현하는 과정이라면 그 과정에서 구원을 원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셈이 된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그의 때에 유효적 소명으로 부르신다. 즉 그에게 구원얻는 믿음을 주신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일이다. 이 일에 있어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만일 누가 “믿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산물인 것으로 생각하는 알미니안주의라고 비난받을 것이었다. 여기서 에드워즈 같은 청교도들은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온 힘을 다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구원의 은혜,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로 받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은혜를 찾는 것이다. 청교도 준비론은 칼빈주의 예정론의 테두리 안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인간, 즉 죄를 깨달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로서 청교도들에 의해 제시된 것이었다. 물론 많은 이들은 모든 믿음--자신의 결단에 의해 가지기 시작한 믿음까지도--의 이면에는 본인이 의식했든 못했든 성령의 역사, 즉 초자연적 조명이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누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배후에는 설사 본인이 감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 혹은 조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청교도 회심론의 중요한 일반적 강조점이었고 에드워즈도 종종 그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기 교회의 회심의 이야기들을 기록한 글(A Faithful Narrative on the Surprising Works of God on the Conversion of Some Hundred Souls....)에서 그는 거기에 예외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통상적”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심의 은혜를 받은 뒤에 죄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는 경우들도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섯째, 선행도 은혜의 수단들 중에 포함된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은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로서는 아주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의 설교를 듣고 각성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구체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 둘째 돌판에 나타난 의무들, 특히 자선의 의무를 이행하라고 대답한 사실을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회개의 행위가 동반되지 않는 값싼 믿음을 해결책으로 추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자연인들이 이러한 의무를 “진심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고 함으로써 그 한계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의무들에 있어서와 같이 이 자선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회심을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다른 외적 의무들과 마찬가지로 자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도 그들이 구하는 “축복을 얻게 해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는 다음의 두 가지 주장 사이의 것이다. 선행에 대한 댓가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인가 아니면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이라는 것인가? 전자는 선행을 공로로 생각하고 은혜를 받기 위해 지불하는 값이라는 의미이므로 모든 개신교도들이 반대하는 행위 구원적 주장이다. 후자는 전자와는 다르다. 선행이 은혜를 받기 위한 길이요 수단이며 통로라는 의미요 거기에 댓가 사상이나 공로 사상은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것이 공로 사상으로 변질될 위험은 존재한다. 그것 없이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인간 편의 준비 여하에 상당 부분 달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드워즈의 준비론 내지 구도론은 다소 율법주의적 냄새가 있다. 기도와 성경 읽기나 규례에의 참여 외에 심지어 도덕적 의무들도 회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즈의 이 가르침은 개신교 주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교리적으로 위태위태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단 열매가 따르지 않는 말뿐인 회개나, “행함없는 믿음”의 문제점을 방지해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에드워즈의 회심론은 대단히 심오하다. 그의 회심의 표준은 일반적인 그것보다 훨씬 높다. 그것은 그의 비상한 영성과 심오한 체험의 산물일 것이다. 에드워즈가 높은 차원, 특히 피상적 영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인들의 기준에 비추어 범접할 수 없는 고매하고 심오한 영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 초자연적 빛의 조명을 받고서 하나님의 일들의 아름다움과 감미로움을 영적으로 감지하는 방식으로 회심된다면 그것은 단지 말씀을 "듣고 믿는" 방식의 회심보다 더 확실한 회심이 될 것이다. 신자들은 모두 그러한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처럼 높은 차원의 영성과 경건을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의 부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에드워즈의 묘사는 성화와 영적 성장을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유익과 도전을 제공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말하고 있는 회심의 본질이 과연 정말 회심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성화 혹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체험에 관한 것인지 의문이 있다. 그것이 회심의 조건이나 표준이며 누구나 그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회심된 것이라는 에드워즈의 주장이 과연 성경적으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에드워즈보다 한 세기 앞선 시대인 17세기 중엽에 Giles Firmin은 에드워즈의 직계 영적 조상인 토마스 세퍼드의 회심론의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지적하면서 세퍼드가 구원의 확신의 상태에 대한 묘사를 회심의 기준으로 제시함으로 사람들의 회심과 구원에 장애물을 놓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에드워즈의 회심론에도 비슷한 비판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에드워즈가 회심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내용들--거룩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지각하는 상태--은 이미 회심한 신자들이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이상이기는 하나 그것이 없다고 아직 회심하지 않은 상태라고 보는 것은 과도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단지 복음을 듣고 그 자리에서 믿는 방식으로 회심되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단순하고 간단한 방식의 회심에도 “구원얻는 믿음”이 작용한다고 보는 것 같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을 보고 놀란 청중들에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이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 대답했다. 그러자 삼천 명이 그 날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받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구원얻기 위해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무슨 감지되는 특별한 내적 성령의 조명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제자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극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슬픔, 그리고 성령의 초자연적 조명에 의한 영적 감각이 있었다는 말이 있는가? 빌립보의 간수도 특별한 죄의 깨달음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고 부르짖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권고했으며 그와 권속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간수는 그 날 즉시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었다.”(행16:30-34). 바울이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을 때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다”(행18:1-8). 단순히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듣고 믿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에드워즈가 말하는 것과 같은 “신적 초자연적 빛”에 대한 언급은 없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았다”(행8:12). 그들은 단지 빌립의 전도를 듣고 믿어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기까지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통회를 위한 긴 세월이 소요되지 않고 대신 거의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어감이 강하다. 그들 모두에게 깊이 죄를 깨닫는 기간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을 뿐 아니라 복음을 들은 것과 믿은 것 양자 사이의 시간에 어떤 초자연적 빛을 비췸받아 거룩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감지하는 체험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예루살렘 총회에서의 베드로의 발언 속에도 복음을 듣고 그냥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행15:7).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믿는 것이 인간의 일로서 묘사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그렇게 된다는 사실이 전제된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가르친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인간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 고린도 전서 1장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한다. 전도라는 외견상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을 통한 복음 선포를 듣고 단순히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또 갈라디아인들을 향해 바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냐?”(갈3:2)고 도전한다. 전도를 듣고 믿은 이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더욱 분명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5). 믿는 것이 사람의 일이요 책임으로 되어 있으며 구원은 그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스스로 믿은 것 같지만 사후적으로 돌아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때 성령이 역사하셨기에 그가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성립될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도 진리일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령의 감지되는 역사가 마음에 있어야만 비로소 믿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떤가? 결국 문제는 복음을 들을 때 어떤 초자연적 체험이 발생하든 않든 그냥 믿어야 하느냐,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도 구원얻는 믿음이 되느냐 아니면 어떤 감지되는 “신적 조명”이 감지되는 방식으로 체험되기 전에 믿는다는 것은 “주제넘은” 믿음이며 거짓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기 의지를 발동하여 믿는 것은 거짓 믿음인가? 믿기 위해 어떤 전제 조건이 필요한가 아니면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믿을 수 있으며 믿으면 되는가? 현대의 전도가 구원을 쉬운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영리 한번 듣고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식의 전도는 너무 피상적이고 안일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사영리 한 번 듣고 예수를 영접하거나 전도 집회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의 결단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도 잘못일지 모른다. 청교도 시대와 달리 종교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세속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한 사람의 결심이 비록 즉석에서 이루어진 결단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접의 행위를 한 이상 적어도 그는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무시할 것인가? 실제로 사영리 식 전도나 전도 집회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된 후 신실한 제자의 길을 걷게 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전도 방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가? 실제 패커도 결국은 피니식 전도 방법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논문의 중반 이후에서 그는 전반부에서의 자신의 강경하고 극단적인 입장을 상당 부분 철회하는 변화를 보인다. 그 방향 전환이 너무 급격해서 좀 실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피니식 방식이 온전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만은 아니며 “비록 오류가 조금 있는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마저 자비롭게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피니의 방식을 계속 사용하셔서” 이전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거나 친구들의 전도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결정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인도하셨다”고 인정한다. 일급의 신학자에게는 같은 글 속에서 자신의 판단을 거의 뒤집다시피 하는 것이 이례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패커는 완전히 발을 뺀다. 비록 피니의 집회에서 거짓 회심한 많은 자들이 나중에 신앙에서 탈락했지만 피니의 ‘연장 집회’는 “전 세계에 걸쳐 충분한 영적 열매를 거두었”으며 “피니 방식의 수정판을 사용하는 빌리 그래함은 근년에 세계 기독교 무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추켜 세우는 것이다. 67) 패커의 결론은 타협적이다. 그는 청교도식 전도와 피니식 전도가 상호보완적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현대의 전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항상” 청중들이 청교도식 전도에 노출된 경험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청교도식 전도란, 그에 의하면, “오랜 시간을 두고 깊이있게 파들어가는 전도, 교회-공동체-친구중심적이며, 여흥지향적이라기보다는 예배지향적인” 전도이다. 즉 “청교도 전도가 먼저 씨를 뿌리면 현대 전도가 수확을 거둔다”는 것이 패커의 견해였다. 패커는 구도자들(enquirers)을 교리문답 교육반, 양육반, 교회 예배 등의 “통회와 헌신의 신실함을 표현하는 적당한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장한다.68) 어쨋든 그는 청교도식 전도가 항상 필요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복음을 충실히 설교하고 가르치는” 청교도식 전도는 “언제 어디서나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요컨데 평생 아무런 종교적 관심이 없던 사람이 어느날 집회에서나 개인 전도를 받고 갑자기 믿기로 결단하는 것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오래동안 들으면서 구도자로서의 일정한 세월을 거친 후 예수를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요컨데, 에드워즈의 주장은 신자가 좀더 높은 차원의 믿음과 성화로 나아가는 것에 관한 논의로서 적합하지 불신자가 회심되는 과정에 대한 논의로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그것은 회심의 기준을 너무 높임으로 대다수의 평범한 신자들을 아직 회심되지 않은 자들로 간주하는 우로 보인다.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따른다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아직 회심되지 않은 불신자들로 간주된다. 그것은 회심의 기준과 조건을 너무나 높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처음 회심된 자의 상태가 아니라 상당한 성화의 수준에 도달한 신자의 상태에 가깝다. 성경이 말하는 회심은 훨씬 더 단순하고 용이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초자연적, 영적 체험이 없더라도 단순히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는 것,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를 주님으로 받아 그 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 즉 회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 회심의 조건, 즉 구원의 조건인 것으로 성경은 말하는 듯하다. 재언하거니와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의 회심론은 무사안일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분발해서 개인 영혼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목표의 제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본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처럼 보다 높고 확실한 신앙의 수준을 향해 분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가 도달한 영성의 수준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미달된 모든 사람들이 아직 불신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주장은 과도히 높은 기준의 제시일 것이다. 참고문헌 The Sermons of Jonathan Edwards, A Reader, ed., Wilson H. Kimnach, Kenneth P. Minkema, &Douglas A. Sweeney (Yale University Press, 1999).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Yale Univ. Press), Jonathan Edwards,, Pressing into the Kingdom of God (Soli Deo Gloria Publications, Morgan, PA, 1998) James I. Packer, 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Crossway Books, Wheaton, Ill., 1990) D. M. Lloyd-Jones, Preaching and Preachers 서문 강 역 ?목사와 설교?(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3) Sidney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Yale University Press, 1972). Doctrine of Conversion in Jonathan Edwards Nak Heong Yang Professor of Historical Theology Korea Theological Seminary Jonathan Edwards' Doctrine of conversion is very different from that which are preval!!ent in modern times. Edwards thought that sinners should seek the grace of conversion by using all the means of grace with all their might until they experience the converting grace. In Edwards, as such scholars as J. I. Packer and D. M. Loyd Jones points out, there isnot much room for "decision for Christ" which are universal in modern churches. Decision to believe in Christ was strange concept for Edwards, which must have been due to the Calvinistic emphasis on total inability of natural men and the God's sovereignty in human salvation. Edwards' taught that the means of grace includes even the works of charity and all the ethical duties toward one's neighbors. In this respect, he is vulnerable to the accusation that he teaches salvation by works at least partly. Edwards has a very high view of conversion. He thought that sinners could be assured of their conversion only when they received the supernatural light and that when that was given to them, it was sensible. In other words, the reception of the divine light, for Edwards was a sensible experience. Therefore, without the sensible experience, Edwards thought, there is no saving faith, nor works of grace in one's heart. The idea that one is saved simply by believing God's promise in His Words is rare in him. Essential experience for conversion, according to Edwards, also included the experience of conviction of sins. one has to pass through the state of despair for oneself and then that of humiliation. Humiliation was the state that sinners feel that God is just even though God throws them to hell eternally. Edwards also argued that the spiritual sense of beauty of divine excellency is essential for true conversion. The moment for him to see or taste the beauty or loveliness of divine holiness was the moment of conversion. On the whole, Edwards gives an impression that he made the conversion more difficult a task than the Scripture teaches for the latter teaches that one is converted simply by receiving Jesus Christ as one's Lord and Savior, hearing and believing the gospel, or by believing the promise of grace in God's words. Edwards thought too highly of sensible dimension in conversion. It is understandable that as a Puritan he tried to avoid the error of false faith, but in doing so he seems to have gone to the opposite extreme. 1). 이 부분의 논의는 James I. Packer, 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Crossway Books, Wheaton, Ill., 1990)의 18장 “Puritan Evangelism," 291-308에 근거한다. 2). Ibid., 291. 패커는 Richard Baxter의 Call to the Unconverted와 Joseph Allein의 Alarm to the Unconverted를 예로 든다. 3). Ibid., 293. 4). D. M. Lloyd-Jones, Preaching and Preachers 서문 강 역 ?목사와 설교?(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3), 365-6. 5). Packer, 299. 6). Packer, 292-3. 7). Ibid., 295. 회심과 관련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성경이 “그가 우리를 새롭게하셨다”거나 “그가 자기 뜻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식으로 능동태로 말하나, 우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피조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거듭난다”는 식의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음을 패커는 지적한다. 8). Packer, 294. 유효적 소명에 대한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31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the work of God's Spirit whereby convincing us of our sin and misery, enlightening our minds in the knowledge of Christ, and renewing our wills, he doth persuade and enable us to embrace Jesus Christ, freely offered to us in the gospel. 9). “God makes men sensible of their misery," in Pressing into the Kingdom of God (Soli Deo Gloria Publications, Morgan, PA, 1998), 166. 10). 시드니 알스트롬은 에드워즈를 “개혁주의 신학의 기념비적 재건”을 이룬 사람으로 묘사한다. Sidney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Yale University Press, 1972). 11). "Pressing into the Kingdom of God," in Pressing into the Kingdom of God,(이하 PKG로 표기함) 17. 12). Ibid., 42. 13). "The manner in which the salvation of the soul is to be sought," in PKG, 223. 14). "Pressing into the Kingdom of God," in PKG, 17. 15). Ibid., 226. 16). "Pressing into...," 7, 5, 6, 9. 17). Ibid. 226. 그러나 이 본문은 이미 회심한 신자가 최종적 구원을 향해 나아갈 때 해이나 안일에 빠지지 말고 근신해서 계속 충성되이 자기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므로 에드워즈의 준비론적 주장을 위한 적절한 성경적 근거는 아니라 할 것이다. 18). "The Manner in Which...," 226. 19). 때로 에드워즈는, 본의는 아니겠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얻을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He himself is capable of it [salvation]." "...there is no want either of sufficiency in God or capacity in the sinner in order for this [salvation]." "Pressing into...," 14. 20). "The Reality of Conversion," in the Sermons of Jonathan Edwards (Yale University Press, 1999), 97. 21). Ibid., 97-98. 22). "The manner in which...," 223. 23) Edwards, "Much in Deeds of Charity," The Sermons of Jonathan Edwards (Yale University Press, 1999), 203, 24) Ibid., 206. 25) Ibid., 202. 26) Ibid., 208-9. 27) Ibid., 198-99. 28). "Reality of Conversion," 98.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 준 것은 꼭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그의 많은 선행 때문이었다기보다는 (그것은 백부장이 보낸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께서 그의 부탁을 들어 주어야 하는 이유로서 제시했던 말이고)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독해라고 본다. 물론 그 백부장이 그처럼 선하고 이스라엘에 기여가 많은 사람이라는 장로들의 지적이 예수의 발걸음을 그의 집으로 옮겨 놓게 한 시발점이 되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미 예수는 하인의 병을 고쳐 줄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29). "The manner in which...," 225. 30). "Pressing into the kingdom of God," 26. 31). Ibid., 224. 32). Packer, 298. 33). Ibid., 298. 34). Ibid., 298. 35). "God makes men sensible of their misery," in PKG., 145. 36). Ibid., 152 37). Ibid., 152 38). JE., Religious Affections (Yale Univ. Press), 152. 회심의 전제 조건이 죄에 대한 깨달음(conviction)이라는 청교도들의 주장,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대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심한 공포를 체험한다는 경험적 관찰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오해하게 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여기서 그러한 오해를 시정하면서 회심론의 핵심들 중 하나를 지적한다. 즉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convictions of conscience) 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convictions of conscience does not consist in terror).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마음과 삶의 죄악됨,”(sinfulness of heart and practice) “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dreadfulness of sin, as committed against a God of terrible majesty, infinite holiness), “죄에 대한 증오” (hatred of sin)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strict justice in punishing of it)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Ibid., 155-56 39). Ibid., 165. 40). Ibid., 178. 41). Ibid., 149. 42). Ibid., 157. 43). Ibid., 160. 44). Ibid., 165. 45). Ibid., 176. 46). "The manner in which...," 225. 47).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in The Sermons of JE, 121-140을 보라. 48). He That Believeth Shall Be Saved" in Sermons of JE., 118. 49). "Pressing into...," 24. 50). 보다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이 중요한 구절의 본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For a man to believe in Christ is to come to him with all the heart, to take him for his Savior and give himself to him, to be one of his people and to have all his dependence on Christ to make him happy." "He That Believeth...." in Sermons of JE, 112 51). Ibid., 113. 52). Ibid., 113. 53). Ibid., 113. 54). Ibid., 118. 55). Ibid., 118. 그러나 어떤 때는 참된 성도들도 구원의 확신이 없을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즉 진정한 신자도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속주임을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커다란 두려움과 슬픔 속에 살았다....그들은 임종 시에 두려워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분깃인 많은 유익을 누리지 못했다....그들이 죽기까지 충분한 위로를 누리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속주이심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기들의 구속주이시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they did not know that Christ was their redeemer. They hoped he was, but were not assured of it). "I Know My Redeemer Lives," in Sermons of JE., 153. 56) The Sermons of Jonathan Edwards, A Reader, ed., Wilson H. Kimnach, Kenneth P. Minkema, &Douglas A. Sweeney (Yale University Press, 1999)., 12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