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악에 대하여
죄와 악에 대하여
2014-01-05 20:22:25
우리는 흔히 일상에서 죄와 악을 구별하지 않고 죄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외 악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선이라는 실체의 결핍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둠이 빛의 결핍이지 어둠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선과 악의 이원론을 용납하지 않는다. 악은 선에 대랍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선의 결핍으로 나나타는 상대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먼저 선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무엇인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를 하신후에 창조하신 만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선이다. 하나님이 뜻하신대로 존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선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선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개념이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든 것이 다 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선한 선생님아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선이시고 그의 뜻 역시 선하시다. 하나님게서는 선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거나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 바로 악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정도에 따라서 그 악의 정도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두움이라도 빛의 존재 정도에 따라서 그 어둠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다면 성경에 최초로 등장한 악은 당연히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뜨린 뱀일 것이다. 뱀은 비유하자면 칠흑과 같은 어둠처럼 가장 악한 존재일 것이다. 왜 뱀과 같은 악이 존재하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면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몰이라는 것 그리고 가장 간교한 존재라는 언급을 통하서 볼때 악은 하나님의 영적인 창조물이 자기 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거스림으로 발생하였음을 알게한다.
이 뱀이 사람을 거짓으로 속여서 넘어뜨리는데 여기서 죄라는 개념이 발생한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에 속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죄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것 그 자체는 죄라기 보다는 죄의 결과로 나타난 악이다. 그렇다면 죄란 악으로 기우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악이란 죄의 결과이고 죄는 악이란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좌와 악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 일생에서 죄와 악은 하나로 통칭되어 죄악이라고 사용된 것 같다.
결국 악으로 기우는 성향은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존재 의미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는 인간을 죄에서 건져내는 구속의 역사이고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구속사적 관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것이 매우 중요하게 나타나지만 죄의 문제 해결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란 악으로 기우는 성향이고 그래서 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죄를 해결하려는 것이지 죄의 문제 해결 그 자체가 종국적 목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죄에서 벗어난 인간이 선을 이루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틀린 시각은 아니지만 편협한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하나님의 뜻인 선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것이 구속사보다 더 합당한 관점일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죄의 확산
2015-03-27 00:18:54
뱀과 여자의 대화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데 있다. 그리고 남자 역시 침묵을 통해 이런 왜곡에 동조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왜곡이 사람이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동산에는 생명나무와1 각종 열매맺는 나무가 있었고 하와에게는 아무런 결핍이 없는 풍요가 주어졌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을 보면 욕망은 사람의 타락 이전에 이미 있었음을 보여준다.2 이런 것을 보면 성경은 욕망 자체를 죄로 간주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욕망은 인간 삶의 원동력이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심어주신 욕망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왕적 직무를 감당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문제는 뱀의 말에서 암시되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할 정도의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욕망을 제어하고 교정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선악과 금령이라고 볼 수 있다. 욕망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 그것은 탐심이 되고 죄가 된다.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것, 주어진 말씀을 왜곡하는 것, 이것이 죄의 출발이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때 그 욕망은 탐욕이 되고 죄를 낳는다. 3
선악과 금령은4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자기 욕망을 통제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참된 가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이 지으신 땅위에 존재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하나님은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나무를 볼때 마다 사람은 자신들이 책임과 한계를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은 바로 그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티락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자기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왜곡하고 거부해온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 욕망을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선 결과는 관계의 파괴였다. 파괴된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이 아벨은 죽인 사건이었다. 분노한 가인은 결국 아벨을 제거하고 배제함을 통해 자신의 갈등과 고통을 해결해 버린다. 이후 창세기의 원역사는 이러한 죄의 확장을 보여주는데 문명을 만들어 가는 가인의 후예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인과 그 후예들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다. 그들은 자기 욕망을 위하여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또한 힘에 기반을 두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계급과 계층 구조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로 시작된 죄는 마침내 노아 당시에는 온 땅이 부패한 지경에 이른다. 그 부패의 실체는 바로 포악함인데 이것은 힘센 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폭력이고 그로 말미암은 피흘림을 의미한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땅위에 가득한 폭력이야 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까닭임을 보여준다.
원래 바벨은 하나님의 문이란 말인데 하늘에 이르는 문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바벨탑 사건은 사람의 욕망이 더이상 통제되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처럼 되려던 아담과 하와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가시화된 것이 바벨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바벨을 가리키는 바벨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권력과 문명은 인간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있다. 사람들이 연합하여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한 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지배하기 위해 자국의 언어를 금지하고 제국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각 민족들의 언어가 달라져 각가 자기 민족의 말을 쓰게 되었다는 성경의 진술은 제국과 지배를 해체하는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런 점에서 성경은 끊임없이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항하여 대안적인 세상을 그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은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모이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셨다.
각주 1
창세기에서 생명나무의 이야기느 아주 주변적이다. 사람의 범죄이후에 즉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으므로 생명나무는 잃어버린 질서, 잃어버린 복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중동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구약에서 영생에 대한 관심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구약의 관심은 영생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과 ..
각주 2
타락 이후에 탐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 이미 여자의 마음에 탐심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를 보면 하나님은 순진무구하여 아무런 탐심도 유혹도 없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욕망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는데 이 욕망이 왜곡되면서 탐심으로 변질하고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순결한 백지의 상태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얼..
각주 3
탐욕의 근원은 자기애이다. 사실 원죄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첫 사람이 그랬듯이, 오날날에 도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자기 탐심의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자기애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원죄일 것이다.
각주 4
아담은 참으로 지혜로운 존재로 지어졌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은 인간의 또 다른 지혜를 점검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제한된 영역이 있음을 스스로 돌아보게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참된 존엄함을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제약속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다. 문..
- 창세기에서 생명나무의 이야기느 아주 주변적이다. 사람의 범죄이후에 즉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으므로 생명나무는 잃어버린 질서, 잃어버린 복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중동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구약에서 영생에 대한 관심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구약의 관심은 영생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더라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그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 구약은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다만 창세기는 왜 인간이 유한한 존재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준다. 창세기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는 곳은 구약이 아니라 신약의 요한계시록이다. 이것은 창세기 첫머리에 등장하고 사라졌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한 것으로서 생명나무는 신구약 전체를 인클루지오처럼 감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던 백성들 그리고 다시 생명나무에 참여하게 될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신구약 성경의 이야기이다. [본문으로]
- 타락 이후에 탐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 이미 여자의 마음에 탐심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를 보면 하나님은 순진무구하여 아무런 탐심도 유혹도 없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욕망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는데 이 욕망이 왜곡되면서 탐심으로 변질하고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순결한 백지의 상태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악용될 소지가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과 세계를 만드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자유가 주어졌다. [본문으로]
- 탐욕의 근원은 자기애이다. 사실 원죄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첫 사람이 그랬듯이, 오날날에 도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자기 탐심의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자기애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원죄일 것이다. [본문으로]
- 아담은 참으로 지혜로운 존재로 지어졌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은 인간의 또 다른 지혜를 점검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제한된 영역이 있음을 스스로 돌아보게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참된 존엄함을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제약속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의 지경을 넘어서 자기 욕망의 충죽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데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