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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운동과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의 비교- 조엘 비키

메르시어 2023. 5. 2. 09:38

청교도운동과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의 비교- 조엘 비키

2014-01-03 01:33:14


  이 논문에서는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네델란드 제2 종교개혁운동의 신앙의 확신을 비교할 것이다. 청교도 운동과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운동(Nadere Reformatie)은 정의하기 어렵다. 호크스는 청교도 운동은 본질상 언약신학, 예정론, 개혁교회예배 등을 강조하는 신학운동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의 절대적 권리, 자의적인 사법권을 우선하는 자연법의 지배, 왕의 의회에의 예속, 국가권력의 시민적 기초들을 주장하는 정치적 문제가 핵심이었는가? 라고 질문하고 이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만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논문은 청교도를 영국 국교회를 개혁하고 순화시키기를 원하고 개혁파 은혜교리의 구현으로서 살아있는 경건한 삶에 관심을 둔 사람들로 간주함으로서 호크스의 견해에 동조한다. 

 

 나더러 레포르마치는 17세기 대부분과 18세기 초반에 네델란드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시기와 본질로 볼 때 영국의 청교도 운동에 비견할 만한 운동이었다. 나더러 레포르마치는 더 가까운, 더 긴밀한 ,더 엄격한 종교개혁을 의미하며 그 강조점은 삶과 교회의 예배와 사회속에 종교개혁의 결과를 더 엄밀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나더러 레포르마치는 영국의 청교도 운동에 대응하는 운동으로서 네델란드에서 일어났다. 이 두운동의 연계성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긴밀하다. 카이트 스프룽거는 17세기에 수많은 청교도 신념을 가진 영구과 스코틀랜드 신자들이 네델란드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네델란드 정부는 이들에게 네델란드 개혁파교회내에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회를 구성하도록 허락했다. 네델란드 개혁파 목사들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을 당시 그들 교회의 한 경향이 되었던 메마른 지성적 설교에 대한 건전한 개선책으로 보았다. 영국의 청교도와 나더러 레포르마치 지도자들은 개인과 교회와 국가 속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실천적 경건과 윤리적 엄밀성을 기르는 것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유사한 관념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나더러 레포르마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다른 특징을 따라 전개되었다. 나더러 레포르마치를 주도한 지도자들은 영국의 청교도들과 달리 정부와 교회를 개혁하는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신학적 강조점 역시 신앙의 확신과 같은 교리들로 다양했다. 또한 네델란드 지도자들은 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강조하는데 더 집중했으나 청교도들은 신학의 실천적 국면들에 더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의 본질은 영국 청교도 운동의 개혁파 영성의 강조점과 대립하지 않는다. 네델란드 제2 종교개혁에 대해 주도적 학자인 S.반데르 린데는 그 운동의 목표는 청교도 운동의 목표와 같이 교리를 일상생활 전체에 융합시키는데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제2종교개혁속에는 의식적으로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경건과 함께 이와 반대되는 불경건을 억제시키는데 총력을 다하는 열정이라는 엄숙주의의 근원적 요소가 있다고 결론짓는다. 제2 종교개혁의 정의에 대한 두가지 진술이 있는데 첫째는 1983년에 다음과 같이 주어진 것이다.[ 네델란드 개혁파 교회안에서 진행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지나친 악용과 오해들을 반대하고 그 확장과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한편, 예언적인 열정을 갖고 개혁파 교리의 내적 경험과 인격적 성화와 함께 삶의 모든 영역의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성화를 고수하고 힘쓴다. ]두번째 정의는 1995년에 주어진 것으로 더 세련된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은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네델란드 개혁파 교회 내에서, 살아있는 신앙의 쇠퇴나 결여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으로서 신앙과 경건에 대한 인격적 경험을 핵심목표로 삼은 운동이다. 이 관점에 따라 이 운동은 본질적 및 절차적 개혁의 요소들을 취하여 그 요소들을 적절히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에 적용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말과 행위에 있어서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더 진보된 개혁을 추구했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마찬가지로 제2종교개혁의 설교도 실천적 설교로서 잘 정돈된 기독교적 경험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M. 유진 오스터 헤이븐은 제2종교개혁의 신학을 " 교회의 신조들을 받아들이고 신자의 거듭남과 회심과 성화를 강조함으로써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애 대한 경험적 또는 인격적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개혁파 교회 가르침의 기본노선에 서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신앙과 확신의 관계는 영국 청교도 운동과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 모두 핵심 사안이었다. 당시 신학자들은 신앙과 확신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객관과 주관, 성경과 경험, 말씀과 성령 사이의 세밀한 균형이 요구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성경은 살아있는 신앙과 확신을 결여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통상적 신앙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있는 긴장이 목회의 배경 속에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 청교도와 제2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초기 종교개혁의 교리적 원리에 엄밀하게 덧붙여, 확신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단순하게 의지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경, 그리스도, 삼위일체의 맥락속에 적절히 둘 때 은혜의 내적 증거와 성령의 증언은 신자의 확신속에 이차적 근거로서 타당한 자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확신의 기초는 영국 청교도 운동과 네델란드 2차종교개혁의 신앙고백에 모두 성문화되어 있다. 네델란드 신학자들은 도르트 신조속(1619)에 포함시켰고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속에 포함시켰다. 그들은 확신의 이차적 기초들 즉 은혜의 내적증거와 성령의 증언의 중요성을 높임으로써 칼빈의 사상속에 비주류었던 사상을 주류로 돌려 놓았다. 흐라플란트가 주장하는 것 처럼 칼빈이 이미 신앙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표지로 인정하도록 열어놓은 구멍을 목회를 이유로 더 크게 뚫어놓은 것이다.

 

  청교도와 제2종교개혁 지도자들이 불건전한 내성과 인간중심주의로 흘렀다고 바난하는 사람들은 잘못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칼빈과 초기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확신의 결과로서 목회적이고 신학적으로 더 발전된 교리를 기독론적 구조에서 삼위일체 구조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속에서 삼위하나님의 손길을 유심히 살폈기 때문에 인격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그리하여 택하시는 성부, 구속하시는  성자, 적용하시는 성령께 모든 영광을 돌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신자의 지성과 의지를 포함한 전인격에 연루된 문제였다. 인간의 의지는 자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지도자들은 확신교리를 명확하게 전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떤 면에서 확신은 종교개혁이후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 교회는 확신에 따라 유익이 결정되었다. 그들의 확신에 대한 견해는 비성경적 신비주의로 전락되지 않는 한 교회의 영적 건강에 크게 기여하였다. 건전한 신앙적 경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고 진실하게 믿음으로써 그들은 객관적인 복음을 경험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영국 청교도와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 지도자들은 다양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믿었다. 그들은 개인적 구원에 대한 충분한 확신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신앙의 열매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확신은 성경적, 삼위일체적, 기독론적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영국 청교도와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 지도자들은일반적으로 확신에 대하여 몇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영국 청교도들은 은혜의 표지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 지도자들은 은혜의 단계들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영국 청교도가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큰 것 처럼 보인다. 청교도가 은혜의 단계를 높이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것과 달리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도식화하는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은 확신은 주권적인 은사로 받는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영국 청교도는 확신은 엄숙한 의무로서 추구해야 할 것으로 강조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는 자주 논문을 통해 확신을 얻는 법과 신자가 확신을 추구해야하는 이유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청교도의 강조점은 신앙의 행위(actus)에 있었고,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의 강조점은 신앙의 원리 혹은 습성(habitus)에 있었다. 그러나 두 운동의 지도자가 신앙의 습성과 신앙의 행위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습성이 무시되면 주의주의가 조장될 수 있고 행위가 무시되면 신앙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으로 보는 율법폐기론의 횃불이 다시 타오를 수 있음을 그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영국 청교도와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 지도자들의 다양한 강조점은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나오는 공통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확신은 신앙의 정수로서 각각의 신앙의 행사와 불가분리적이다.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에 의해, 은혜의 내적 증거에 의해, 그리고 성령의 증언에 의해 자란다. 이들 각각의 수단은 부지런히 기도하고 추구되어야 하며 가기 다른 수단들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느 한쪽 수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다른 쪽 수단들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신자는 신자들 각자에 대한 성령의 적용에 의존한다.

 

  결론적으로 영국 청교도와 네델란드 제2종교개혁이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이 두 운동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중심진리에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찾아냈다. 그들은 성경에서 포괄적이고 전충족적이고 강력한 흡인력이 있는 교리체계와 예배지침과 교회질서 등이 있었다. 그들은 엄위하시지만 자비로우신 자신의 속성들을 강력히 계시하실 때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점을 소중히 여겼다.

2. 그들은 죄를 죽이는 훈련과 영광스러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들과 영원토록 풍성하게 교제를 경험하는 것에 대해 각별히 가르쳤다.

3. 성화교리가 부득불 칭의교리에세 흘러나오는 것 처럼 영국 청교도 운동과 네델란드 제2 종교개혁 운동도 종교개혁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칭의의 교리적 엄밀성과 성화의 성경적 경건의 균형을 추구하며 이 둘 사이의 불가분의 연합관게를 인정하였다.

4.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주어진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쓴 것 처럼 이 두운동의 지도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심화시킨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돌아가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5.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에 유익이 되는 신학적 학문을 구비하는데 힘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