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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 구원논쟁- 임범진

메르시어 2023. 5. 2. 09:36

주재권 구원논쟁- 임범진

배우는 자의 기도/서재

2013-12-26 16:01:18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지금부터 몇 번의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1) 논쟁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주재권 구원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존 맥아더 목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촉발되어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논쟁을 예수가족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하려는 이유는 첫째, 비록 용어 자체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CCC 등 청년들에게 영향력이 큰 캠퍼스 선교 단체들과 많은 교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재권 구원에 반대하는 진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이 논쟁의 핵심 인물인 존 맥아더 목사를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출판사가 바로 부흥과 개혁사이기 때문에 그의 구원론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하는 우리나라의 주재권 구원 반대파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주장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독자들에게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주재권 논쟁에 대해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에 달라스 신학교의 창설자인 루이스 체이퍼 (Lewis S. Chafer)와 걸출한 칼빈주의 신학자인 워필드 (Benjamin B. Warfield) 사이에 벌어진 지상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자세한 역사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이 논쟁의 현대적 버전이 존 맥아더의 Gospel According to Jesus (1988)라는 책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겠다. 당시 미국의 교회에는 결단주의식 구원론, 즉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며, 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유행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과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구분된 단계라는 것이다. 맥아더는 이런 구원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구원 얻는 믿음은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중생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미국 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특히 달라스 신학교 출신의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위와 같은 구원론을 미국 교회에 유행시킨 장본인이 세대주의자들이었는데 존 맥아더 또한 세대주의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집안 식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모양새였다.

 

이에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인 핫지스 (Zane C. Hodges)가 Absolutely Free! (1989)라는 책을 통해 맥아더의 구원론이 믿음에 행위의 요소를 첨가한 행위구원론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세대주의 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주장이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구원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한 개혁주의자들이 논쟁에 가세하면서 이제는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존 맥아더 측을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강조한다고 하여 주재권 구원파라 부르게 되었고2) 달라스 측은 자신들을 값없는 은혜파 (Free Grace)라고 명명하였다. 이하의 글에서는 주재권 구원 찬성파를 LS, 반대파를 FG로 약해 표기하겠다.

 

주재권 구원 논쟁의 주요 논점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 몇 가지 항목에 대해 LS와 FG의 견해를 대조해 열거해 보겠다. 즉,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양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대체로 일관되게 인정하는 답변들을 열거해 보았다. 각 항목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다룰 내용이기 때문에 답변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FG 측의 모든 문구는 핫지스의 Absolutely Free!와 찰스 라이리 (Charles C. Ryrie)의 So Great Salvation (1989)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1)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FG : 믿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진리를 인정하는 의지적 결단이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 번 쳐다 본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원인인 믿음은 결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LS :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기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믿음 역시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2)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 구원은 값없이 얻으나 제자로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행위는 제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일 뿐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LS :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위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는 없다.

 

3)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FG : 회개 역시 행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일 뿐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행위구원론이다.

LS : 중생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회개한다. 믿음과 회개는 회심이라는 사건의 동전의 양면으로서 믿음이 중생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중생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구원 얻는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며, 참된 회개는 믿음에서 나오는 회개이다.

 

4)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FG :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설사 외적으로 배교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배교로 보시지 않는다.

LS :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5)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FG :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가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으나 아직 육신에 속한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LS :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영적이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나 오직 중생한 자와 불신자가 있을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성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적절치 못한 작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중생(거듭남, regeneration)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FG파에게 있어서 중생은 인간이 믿음이라는 의지적 결단으로 예수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 결과 획득하는 사건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발휘해 의지적 결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의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두 번째 결단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LS파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생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중생한 자는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거룩을 향해 변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는 모두 중생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이 입장차가 주재권 구원 논쟁의 배경이다. 이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 혹은 펠라기우스/반(半)펠라기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구원론 사이의 논쟁이다. FG가 가장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개혁주의적 교리는 중생과 제한속죄 (limited atonement)의 교리이다. 이 두 교리가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FG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FG파의 저자들이 이 사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재권 구원 논쟁을 세대주의 내부에서 벌어진 집안 싸움으로서 FG를 은혜 구원론으로,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글들을 통해 그 근거를 보여주도록 하겠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나는 개혁주의적 구원론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주로 FG파의 글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위에 언급한 핫지스와 라이리의 작품들 뿐 아니라 FG파의 인물들이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다룬 책과 논문들은 거의 모두 수집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글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을 다룬 출판물은 장두만 교수라는 분이 영문으로 기고하고 후에 일반 성도를 위해 우리말로 축약하여 번역한 논문3)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에 우리나라 사람이 작성한 FG 입장의 글들은 거의 항상 장두만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삼고 있다. 장두만 교수가 FG파의 일반적 성향에 비해 매우 온건한 입장을 보이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 자신 달라스 신학교 출신으로서 라이리나 핫지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의 글만으로 이 논쟁을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다.)

 

예수가족교회 성도가 아닌 분이 이 글을 읽을 경우에 대비해 글의 성격에 대해 미리 밝혀둘 것이 있다. 이 글은 개혁교회에 속한 필자가 같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쓴 글로서, 개혁주의 신앙이 다른 신앙 체계들보다 성경의 진리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신념을 독자들과 공유한 가운데 작성한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중요한 흐름을 판단하면서 오로지 개혁주의 신앙을 근거로 삼는 것에 불편함이 느껴지더라도 감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FG를 비판하고 LS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믿어 의심하지 않는 주류 신앙이 실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소중하게 지켜 온 참신앙으로부터 이탈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 년 전 필자가 개혁주의 구원론을 접하였을 때 느꼈던 충격을, 부족한 이 글을 읽는 몇몇 사람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기를 감히 소망해본다.

 

  

 주-------------------------

 

1) Lordship salvation을 우리말로는 주재권 구원, 주권 구원, 주되심 구원 등 다양하게 번역하였다. 이 글에서는 주재권 구원으로 통일한다.

 

2) 누가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말은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반대파가 자신들을 Free Grace라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신들은 값없는 은혜,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상대방은 율법주의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려는 계산이 깔린 작명이다.

 

3) Chang AD, The nature of saving faith: Another look at the Lordship salvation debate. Korea Journal of Theology 2004;4:153-91.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주재권 구원 논쟁은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반복된 주제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발생한 좁은 의미의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루이스 체이퍼 (Lewis S. Chafer)는 스코필드 (Cyrus I. Scofield, 스코필드 주석 성경의 저자)와 더불어 미국 세대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는 세대주의적 관점의 조직신학 교과서를 집필한 것과 현재까지도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는 달라스 신학교를 설립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후에 주재권 구원 논쟁을 촉발시키고 지속시킨 주요 주제들이 20세기 초에 출판된 그의 저작들에 거의 모두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주재권 구원 논쟁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1918년에 출판된 He That Is Spiritual 1)이다.

 

이 책에서 체이퍼는 고전2:9~3:4을 근거로 사람을 1) 자연인 (natural man), 2) 육적인 사람 (carnal man), 3) 신령한 사람 (spiritual man)의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자연인은 불신자를 말한다. 문제는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점인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구원을 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도달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 하에 체이퍼는 신자가 신령한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는 비결을 기술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사람을 오직 육적인 사람(불신자)과 신령한 사람(신자, 중생한 사람)의 두 가지로 분류했던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개혁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워필드 (Benjamin B. Warfield)가 서평2)을 통해 체이퍼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워필드의 설명에 의하면 체이퍼의 주장의 핵심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결단이 있은 후, 성화의 삶에 도달하기 위한 두 번째 결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번째 결단의 유무에 따라 신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며 각자가 구원 받는 것은 스스로의 결단 여부에 달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적 구원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인 성화를 구원 이후 이차적인 헌신 혹은 특별한 결단을 한 일부의 신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부가적인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더 높은 삶 운동 (higher life movement)3)에 동조한 것이다.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이퍼의 가르침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 인기를 얻었고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빌리 그래엄 (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대중전도집회와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1951년 창립)를 위시한 선교단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빌리 그래엄은 찰스 피니 (Charles G. Finney)와 빌리 선데이 (Billy Sunday)의 기법을 계승하여 ‘내 모습 이대로’ 등의 찬양을 배경으로 감정적, 심리적 반응을 자극하여 전도자의 초청에 응해 강단으로 걸어 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흔들고, 특정한 기도문 (영접기도)을 따라 하도록 하고는 이것을 구원 얻는 믿음과 동일시하는 결단주의적 전도를 행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4).

 

이렇게 하여 양산된 새로운 유형의 ‘회심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진정 구원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체이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CCC는 다음의 모식도5)를 이용해 체이퍼의 가르침을 대중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체이퍼의 가르침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 즈음하여 다시 한 번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던 사람이 바로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이다. 1959년에 Eternity 지에서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되어야 하는가? (Must Christ Be Lord to Be Savior?)”라는 제목의 지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에버렛 해리슨 (Everett F. Harrison)은 “아니다”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는 “그렇다”의 입장에서 글을 기고하였다6). 대체로 이때부터 주재권 구원론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되었다. 논의의 초점이 구주(Savior)로서의 그리스도와 주님(Lord)로서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체이퍼 식으로 말하자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으나 아직 주님으로 모시지는 않은 사람이며,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까지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태이지만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구주이자 주님이지 그 둘이 분리될 수는 없으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칭의 뿐 아니라 반드시 성화의 과정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94년에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서도 존 스토트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그 안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완전하고 거리낌 없는 헌신을 기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으면서도 구주로는 영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7)

 

Eternity에서의 논쟁과 비슷한 시기에 로이드 존스 또한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줬다. 

“아마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모시면서도 수 년 동안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혹은 수년간은 그분을 당신의 주님으로 믿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을 것입니다....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가 당신의 주님이심은 알지 못한 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을 구주로만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당신을 사심으로써 당신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심을 즉각 알아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위험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화 없는 칭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위험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정도는 시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도 구주로 모실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이단입니다.”8)

 

그러나 체이퍼식 구원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인지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존 맥아더의 공이다. 1988년에 출판된 그의 책 Gospel According to Jesus9)에 의해 미국 교계에서 소위 주재권 구원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등장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국 교회 안에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신학자나 설교자들을 주재권 구원에 대해 취하는 입장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LS (Lordship salvation)파10)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 (James I. Packer)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James Montgomery Boice)

존 맥아더

존 파이퍼 (John Piper)

R. C. 스프룰 (Robert C. Sproul)

존 거스너 (John Gerstner)

케네스 젠트리 (Kenneth L. Gentry)

아더 핑크 (Arthur W. Pink)

마이클 호튼 (Michael S. Horton)

 

FG (Free grace)파11)

루이스 체이퍼 (Lewis S. Chafer)

제인 핫지스 (Zane Hodges)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J. Dwight Pentecost)

찰스 라이리 (Charles C. Ryrie)

로버트 라이트너 (Robert Lightner)

워렌 위어스비 (Warren W. Wiersbe)

 

Google에서 'Lordship salvation'을 검색해 보면 즉각 알 수 있듯 미국교회의 주류는 FG파를 지지하기 때문에 FG파의 인물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Amazon.com에서 맥아더의 책에 달려있는 부정적인 서평들을 읽어보면 그들이 LS파에 대해 얼마나 큰 적대감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지만,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폄하하는 내용이다. 주재권 구원 ‘논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논쟁에는 항상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려 하는 측과 기존의 견해를 반박하고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는 측이 있는 법이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서는 누가 수성을 하고 누가 공격을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LS파가 새로운 이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이후 현대 복음주의의 배경 속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야를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로 확장해 보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개혁 교회가 일관되게 고수했던 구원관에 더 가까운 것은 LS파이며 FG파가 오히려 변종에 해당한다. 실제로 FG파의 수장격인 핫지스는 LS파를 ‘현대판 청교도주의’라고 지칭하며 그들이 이미 사장되어버린 과거 개혁주의 교리를 현대에 다시 살려내려 한다고 말하였다12). LS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LS파와 FG파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