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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 손성은

메르시어 2023. 5. 2. 09:30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 손성은

배우는 자의 기도/서재

2013-12-25 18:31:44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

 

회심과 문화(Conversion in Culture)

 

    회심과 문화, 그리고 언약 이 세 가지는 나의 세 가지 신학적 주제이다. 지금까지 이 칼럼을 통해서 “회심”에 집중한 글을 썼다. 대략적이나마 회심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을 다뤘다. 다룬 각 장마다 더 깊이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제 “문화”에 대한 주제들을 다룰까 생각한다. 말 그대로 “대략적인 스케치”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스케치를 통해서 담임목사의 목회의 향방을 가늠할 수도 있으리라고 여긴다. 목회철학이 담겨진 글들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언약”을 다루게 될 것이다. 회심도 문화도 바로 이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회심과 문화의 관계를 살펴보자. 제목을 보면, 회심과 문화 사이에 “and”가 아니라 “in”을 넣어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과 문화를 and로 연결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리챠드 니버가 그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제시하는 마지막 모델인 “변혁적인 모델”조차도 그리스도와 문화, 곧 회심과 문화의 관계를 “and”로만 연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변혁적인 모델의 한계이다. 그런데도 소위 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리챠드 니버의 모델을 자신들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그의 변혁적인 모델이 더욱 변혁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회심과 문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and”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전폭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회심과 문화를 “in”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인간의 타락 이후에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한다. 좀 더 성경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타락 이전에 문화사명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죄로 인해서 변형되어졌기 때문에 회복되거나 변형되어졌기 때문에, 죄인의 회심과 중생으로 회복된 이후에 무언가 보태져야 할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회심“과” 문화이다. 회심에 “보태어질” 그 무엇이다. 그러나, 아니다. 문화는 바로 회심한 이후에 보태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고 회심 그 자체로서 시작되는 그 무엇이다. 바로 이 조그만 차이는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야기시킨다. 마치 조그만 쐐기 하나가 엄청난 거목을 갈라놓는 것과도 같다. 

 

    문화는 이미 에덴동산에 있었다. 아담이 타락 이후에 땅을 간 것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에덴의 동쪽 가인의 후예들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갈기로 명령(cultivation)을 받았던 아담의 일로부터 culture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땅을 가는 일은 에덴동산 밖에서가 아니라 바로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 아담은 타락 이전에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창2:15). 아니, 훨씬 그 이전에 생육하며 번성하며 땅에 번성하라는 복과 명령을 받는다(창1:28). 아니, 그보다 더 이전에 그는 명령을 받는다. 인간으로 지음받았다는 그 사실, 그 자체로서 그의 마음에는 일종의 법이 새겨진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 이전에 주어지는 명령이다. 소위 “생의 법칙으로서의 율법”이다. 

 

    그런데, 이 “생의 법칙으로서의 율법”이 무시되고 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서 분명해 질 것이다. 우선,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 두자. “창조”를 다루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4장의 2절을 보라. 선악과 금령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기 “전”에 주신 법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것을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the law of God written in their hearts)이라고 하고 있다. 

 

    문화는 바로 이 “법”을 가지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이 법을 따라서 살아가고 이 법으로 인하여 가지게 되는 하나님과의 “교제”(koinonia)가 바로 모든 문화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이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범하였을 때에 희미하게 되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땅을 여전히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가인의 후예들에게조차도 “문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문화, 회심이 없는 문화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가능케 된 문화였던 것이다. Culture without Christ이고, Culture without Conversion이었다. 나의 문화에는 그리스도가 계신가? 나의 문화는 참된 회심에 기초해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2)

 

문화(文化, culture)의 어의(語義)와 회심(回心)

 

    회심이 없는 문화는 거짓된 문화라고 하였고, 아예 문화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주장을 너무 극단적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단 약간 좀 강하게 주장해야겠다. 그래야 이 글을 통해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선 문화라는 말의 어의부터 살펴보자. 중국 고대어 사전이랄 수 있는 <설문해자>라는 책을 참고하면, “문화”라는 말은 “글월 문”과 “화할 화”의 합성어이다. “글이 化한다”는 뜻이다. “글이 化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문”(文)이라는 말은 “사람의 가슴을 열어, 거기에 입묵한 문양이 있는 모양”을 본뜻 상형문자이다. 사람가슴에 문양을 새긴 모습이다. “화”(化)라는 단어는 “좌우의 사람이 점대칭이 되도록 놓이어서 있는 형상”을 나타내는 지사문자이다. 시체가 2구 뉘어져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화한다”는 말이 “죽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의 상태에서 죽음의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바로 이 “화”(化)의 원래 의미이다. 그렇다면 “글, 곧 가슴의 문양이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이 뜻을 너무 지나치게 추측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누구도 이 말의 어의에 대해서 깊이 추적하고 있지 않다. 

 

    이런 문화라는 말의 “화”에서 “죽음”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때가 바로 주나라 때쯤이다. 이 당시쯤 되면, 문자(文字), 문장(文章), 문헌(文獻)을 포괄한 인문(人文)의 개념으로 전의(轉義)가 된다. 이런 뜻으로 우리들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문화”란 “사람의 지적 활동의 소산 내지는 그 결정체 즉, 사회질서와 생활양식, 그리고 도덕과 법률 등 인간 삶과 관련된 다양한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된다. 언어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렇게 항상 그 뜻이 변하는 것이다. “죽음”을 통과해서 형성되는 그 무엇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이 “죽음”도 없이 형성된 그 무엇이라는 의미로 변경되어졌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문화를 나타내는 “culture”라는 말은 어떨까? 이 말은 원래 라틴어 colere(경작하다)에서 온 말이다. 땅을 경작하는 것이 culture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땅을 뒤집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씨가 뿌려지고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렇게 땅을 뒤집는 것도, 씨가 뿌려져서 자라는 것도 모두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땅을 뒤집는 것이 없이 “colere”가 없고, 씨가 뿌려져서 썩는 것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곧 “죽음”이 없으면, “culture”, 곧, “문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영어에 있어서 culture라는 말에는 “죽음”이란 의미가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한 경작”이라는 의미만 있지, 그 열매를 맺기 위한 “죽음으로서의 씨뿌림”이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culture의 의미가 전화되고 있는 셈이다. 

 

    경작해야 할 땅은 히브리말로 <아다마>이다. 바로 이 말에서 <아담>이라는 말이 왔다. 모두 “붉은 색깔”과 관련된다. 땅도 붉고 아담도 붉다. 히브리말로 <담>은 피를 말한다. 그것도 붉은 색이다. 아담이 “땅”(아다마)을 갈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자기 자신(아담)을 갈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을 갈면서 자신을 갈아야 했었던 것이다. 땅을 갈면서 자신을 죽여야 했던 것이다. 이런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활동, 그것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한자어이든, 라틴어이든, 히브리어이든….모두 이렇게 <문화>는 <회심>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죽음이라는 공통적인 개념적 요인을 통해서 말이다. 죽음 없이는 회심이 없고, 또한 문화도 없다. 그래서 회심이 없으면 문화도 없는 셈이다. 거짓된 문화만 있게 되는 것이다. 

 

    사족을 하나 달자. 영어의 conversion을 번역하면 "회심"(悔心)이 아니고 "회심"(回心)이다. 

 단순히 "후회하는 마음"이 아니고 "돌아오는 마음"이다. 단순히 뉘우치는 정도로는 conversion을 표현할 수가 없다.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사상을 나타내는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심(回心, conversion)이다. 죽었던 자가 살아남을 받아서 자신의 창조주요, 구속주되신 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이제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3)

 

죽음의 문화, 생명의 문화

 

    지난주에는 “문화”라는 말 속에 이미 “죽음”이 전제되고 있다고 했고, 그것을 현대문화가 잊어버렸다고 했다. 회심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문화인데, 회심과는 관계없는 것이 문화이고, 겨우 회심에 첨가해야 할 그 무엇으로서 “문화”를 생각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문화라고 하는 것조차도 말이다. 참된 기독교문화는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치장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죽음”을 통과한 자들이 “죽음”을 통과한 방식으로 그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죽음”을 통과한 문화가 바로 생명의 문화이고,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 문화는 죽음의 문화이다. 죽음의 문화란, 그 모든 활동 속에 “죽음”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문화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문화는 죽음의 문화이다. 이 점을 “양무리필독서” 중의 하나인 루커마허 교수의 <현대예술과 문화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예술(미술중심)의 역사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현대예술이 죽음의 외마디 고함들을 지르고 있다면서 그 대안으로서의 기독교 예술가들의 진정한 예술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의 “문화”에 적용될 수 있는 조언이다. 현대인들은 지금 죽음의 문화를 쌓아가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가야 할 요청이 있는 것이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롬8:19). 왜 그럴까?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8:21)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 없고 그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자유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피조물들이 부러워할 것도 없고 고대할 것도 없다. 이 “영광의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로마서의 문맥을 보자면, “양자될 것”과 “몸의 구속” 과 관련된다(롬8:23). “영의 구속”만이 아니라 “몸의 구속”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회심한 자들”이면 “양자된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양자될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되어있는 것일까? 여기에 생명의 문화가 차지하는 위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양자된 자들”이다.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있게 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서 의롭게 된 자들이다. 문제는, 이런 “양자된 것”은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는 너무나도 은밀한 것이다. 본인 외의 그 누구도 확신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양자된 것”이 이제 공개되고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때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때가 바로 “양자될 것”이다. 이미 양자된 자들이 양자되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우주적으로 모든 인생들 앞에서 모든 천사들 앞에서 드러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문화란 무엇인가? 이러한 때를 소망하면서 ‘탄식하는 것’이다. “몸의 구속”의 때, 온전한 구원의 때를 바라보면서 “탄식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문화이다. 

 

    탄식을 하면서 예술을 하고, 탄식을 하면서 정치를 하고, 탄식을 하면서 학문을 하고, 탄식을 하면서 목회를 한다. 탄식을 하면서 작업실에서 탄식을 하면서 기도실에서 탄식을 하면서 가정의 주방에서 탄식을 하면서 소망하는 모든 활동이 바로 “생명의 문화”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자들이기 때문에, “탄식”이 무엇인지도 안다. 짜증과 불만과 불평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죽음의 문화에 속한 것들이다. 생명의 문화에 속한 탄식은 “속으로” 하는 것이다(롬8:23). 영혼의 깊은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탄식이 있다. 죽음의 문화들을 보면서 아직도 그 유일한 대안이 되는 “생명의 문화”가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대조하면서 “속으로 속으로” 탄식하는 것이다. 그 탄식 자체가 “생명의 문화”인 것이다. 그렇게 탄식할 때에 “성령님도 탄식하신다”(롬8:26). 피조물의 탄식,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의 탄식, 그리고 하나님의 탄식…………탄식의 삼위일체이다. 이런 탄식들은 바로 생명의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산고의 탄식이다. 나에게 이런 탄식이 있는가? 나는 어떤 문화에 속해 있는가? 이것에 제대로 답하려면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를 좀 더 구조적으로 살펴보아야겠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4)

 

은총이 일반적일 수 있는가?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를 구조적으로 살펴보려면 우선 두 문화의 “상호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죽음의 문화가 과연 생명의 문화가 될 수 있는가? 생명의 문화가 “죽음”을 거친 후 “탄식하면서” 추구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행위라고 한다면, 아직 “죽음”을 건너지 못한 “죽음의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행한 어떤 예술적인 행위는 전혀 “생명의 문화”, 곧 기독교적 문화가 아닌가? 소위 비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수학”이라는 학문행위는 생명의 문화일 수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문화에 속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소위 개혁주의 신학이 개인의 구원에만 집착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에 새로운 대사회적 영향력을 추진하기 위해서 19세기 말엽에 활동했던 화란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서 고안된 개념이다. 그 논지는,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간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치자면,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일반적으로, 혹은 공통으로) 비를 주시기도 하고 햇살을 비춰주신다. 또한 구원받은 자나 구원받지 못한 자나 여전히 사고하고 지성과 잘잘못을 느낄 수 있는 양심과 미추를 구분하는 감정이나 정서를 가지고 있고, 1+1=2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옳은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들간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인간성과 능력을 “은총”(grace)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있는가? 없다! 성경에서의 은총이란, 그리고 은혜란,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과 관계된 베푸심을 일컫을 때에 그것을 “은혜, 혹은 은총”이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과 관계되지 않는 베푸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물론 죄의 권세와 저주 아래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영혼(전인적인 인간)의 구원을 말한다. 몸이 아프다가 나음을 입은 “구원”도 있고 빚에 쪼들리다가 급전을 얻을 수 있게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전쟁포로로 잡혔다가 석방이 되는 경우도 “구원”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구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의 구원”(전인적인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몸이 아프다가 나음을 입을 수도, 빚의 부담에서 해방되거나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은혜”가 아니다. 성경에서의 의미는 전적으로 죄의 저주와 권세로부터의 해방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몸의 구속과 전우주적인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죄”의 문제와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와 관계되지 않은 면에서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베푸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서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은총이나 은혜”라고 하지 않고, “섭리”(providence)라고 한다. 

 

    만일, 해와 비를 선인과 악인, 중생자와 비중생자에게 모두 베푸시는 그 하나님의 “섭리”를 “은총”이라고 하면서 그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인 “은총”의 개념을 희석시키는 일이다. “일반은총”이라는 말은 개념적으로 모순이다. “은총”은 일반적일 수 없다. 일반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은혜”가 아니다. 차라리 “일반섭리”라고 하면 좋을 말이다.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 사이에 “일반은총”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카이퍼 라는 신학자는 “일반은총”이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일반섭리”라고 해야 할 것을 “일반은총”이라고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기독교”문화를 많은 면에서 오해하게 했고, 교회가 일반문화에 많은 면에서 타협하도록 작용하였다. 요즘에는 화란사회나 교회에서는 이런 “일반은총”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너무나 타협하고 변질되어 버린 셈이다. 동성연애를 인정하고 진리의 개념이 왜곡되어버리게 되었다. 개혁주의를 살리고자 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의도는 신학적으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 사이의 접촉점을 추구하다가 그만 생명의 문화를 변질시켜버리는 효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은총”의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유지시키지 못한 결과이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 가지고 있는 이런 변질의 효소작용을 우리는 약간 더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주를 기대하시라.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5)

 

은총은 중립적일 수 있는가?

 

    은총은 일반적(common)이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반은총”(common grace)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생받은 이와 중생받지 못한 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은총”이 아니고 “섭리”이다. 그래서 “일반섭리”라는 말이 더욱 적절하다. 대수롭지 않은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할까?

 

    우선, 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는 개념은, “은총”을 자칫 “중립적인 것”으로 오해케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물론, 일반은총이라는 개념과 함께 특별은총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이라는 개념의 그 특수성이 상당히 희석되어 버리고, 심지어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중생인)과 특별한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비중생인) 사이에 어떤 “중립지대”가 있다고 여길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가치중립적인 학문성립의 가능성”이다. “학문”이란 모름지기 어떤 “가치”의 판단 이전에 있는 “사실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인으로서의 가치관이나 비중생인으로서의 가치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두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벌거벗겨져 있는 그대로의 사실”(bare facts)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검증하는 것이 바로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서 이성의 역할이 강조되고 신앙의 기능은 한 켠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일반은총”을 강조함으로 인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을 어느 정도 촉진시킬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가치중립지대를 인정”하게 되고, 또한 신앙의 영역을 이차적인 것, 혹은 사적인 것으로 퇴행시켜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곧, “사실”의 추구와 발견은 이성을 통한 “과학과 학문”의 영역이고, “가치”는 신앙이나 예술의 영역이라는 식의 이원화를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반은총”이란 개념은 르네상스 이후의 계몽주의 철학이 강조해 왔던 모더니즘적 주장의 기독교적 변용인 셈이다. 모더니즘이야말로 바로 “가치”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을 구분하고 “가치”는 사적인 영역으로, “사실”은 공적인 영역으로 이원화시켜서, 과학과 학문만이 공적인 광장(public square)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신앙이나 예술은 개인의 취향이나 사적인 문제로 취급되도록 하였던 원흉이다. 현대사회는 이런 이원화의 폐단을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시리즈는 바로 이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은총은 중립적이지 않다.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생명의 문화가 어떻게 죽음의 문화에 그 문화의 생명성을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곧 다루겠거니와 그 이전에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은총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섭리”는 중립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은총이 은총이려면 결코 중립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뜻과 의지가 관련된 선택적인 것이요 특혜적인 것이요 선별적인 것이다. 은총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가짜은총이다. 거짓된 은혜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실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은총을 베푸실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절대주권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서 그렇게 베푸실 자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은총”이고 “은혜”이다. 은총을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불신이다. 은총에는 가치중립지대가 있을 수 없다. 은총을 받은 자와 은총을 받지 않은 자만 있을 뿐이지, 그 중간지대는 없다. 

 

    생명을 가진 자와 생명을 갖지 못한 자 사이에는 중립지대가 없다. 큰 간극이 놓여져 있다. 천국과 지옥의 간격이요, 생명과 죽음의 심연이 놓여져 있다. 이 큰 심연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짓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6)

 

“사실”이라는 신화(神話)

 

    은총은 중립적이지 않다고 했다. “사실”을 공적인 영역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가치”를 사적인 영역에서만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이원화시키는 것은, 계몽주의 철학의 “사실”이라는 신화에 기초한다. 이 철학에 의하면, “사실”은 객관적(혹은 이성적)으로 검증가능하고 관찰가능하며 예측가능한 것이다. 그 외의 것은, “거짓”은 아니라 하더라도 “비사실적”인 것이어서 이성의 기능으로는 확인 불가능한 것이어서 “지식”이 될 수가 없다고 한다. 될 수가 없다고 할 뿐만 아니라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실”이란 결국 “경험적 사실”에 국한된다. 그것도 “감각적 경험”이 강조된다. 다른 한면에서는 이런 감각 경험에 기초해서 판단하는 이성적 기능을 극대화시킨다. 이성의 판단기능에 제외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과 가치의 이원화”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귀납법적 방법론에 기초한다. 이 방법론이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사실”과 분리시켜 버리고 더욱이나 사적인 영역으로 퇴행시켜버렸을 때에, 문제는 심각해진다. 현대사회는 “가치중립”을 빙자하여 그 어떤 것도 허용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의미”를 따지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치중립사회에서는 금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라는 것 자체를 거세해 버린다. 오늘 글이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까? 이 분야에 대해서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말이 급해지는 모양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그 사실에 기초한 “지식”을 축적해 간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신화”(神話)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중립이라는 신화이고, 과학이라는 신화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무명의 한 목사가 이런 얘기를 하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것이다. 역시 목사니까 기독교 호교를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좀 유식한 척 폼을 잡자.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사실의 신화”는 네 방향에서 공격을 받는다. 첫째는, 막스 베버(Weber)의 사회학적 통찰에 기초해서 슈츠(Schutz)와 가핑클(Garfinkel)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철학에서 제기된 공격이 있다. 여기서는 합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둘째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으로 시작해서 윈치(Peter Winch), 쿡(J.W.Cook), 라우치(A.Louch) 등으로 이어지는 공격라인이다. 실험적이고 검증적이라고 믿어왔던 사회학적 통찰 자체가 가치판단적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이어받은 맥킨타이어(A.MacIntyre)와 타일러(C.Taylor)의 윤리학계에서의 공격이다. 이들은,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결코 보편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모순적이라고 비판한다. 네번째는, 과학철학계통에서의 폴라야니(M.Polanyi)와 쿤(T.Kuhn) 등의 비판이다.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축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종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해서 급격하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쿤의 지적과 모든 지식은 “인격적”(personal:”개인적”, 혹은 “주관적”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한 것으로 보는 폴라야니의 지적은 가히 과학사상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겠다. 아니, 과학사상계를 넘어서서 인문,사회,철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에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를 첨가하게 되면 인간인식의 상대성과 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고, 지금까지 객관적이요 검증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에 기초한다고 여겨왔던 “과학”은, 실상,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인간의 주관적 문화적 상대적 체험에 기초한 사상누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그래서 “신화”라는 것이다. 

 

현대문화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문화상황적이기 때문에, 절대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혹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나만의 가치이고 너만의 가치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까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상구” 없다고 여기는 외침이 높아지다가, 이젠 이런 단발마조차도 사라지고, 그저 “꼴리는” 대로 살아가자고 타협을 본 세대가 바로 현대이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사사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시대에 비상구는 없을까? 도대체 없을까?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7)

 

이빨 빠진 진리(Teethless Truth)

 

    진리가 이상해 졌다. 아주 이상해 졌다. 이전에 “진리”란 죽고 사는 것과 관계되었다. 이젠 “진리”가 개인의 취향과 관계된 것이었다. 취미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 진리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 유희의 대상이 되었다. 이빨이 빠져 버렸다. 물어도 아플 것이 없다. 아예 물지도 않는다. 무력해진 진리이다. 공자도 말하길 아침에 도를 발견하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젠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침에 도를 발견하는데 저녁에 왜 죽어? 오히려 공자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진리가 공적인 광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진리도 사적 영역에 속한 “가치”의 한 가지에 속할 뿐이다. 그래서, “사실”과는 무관할 수가 있기에 우리 모두의 삶에 보편적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없게 되었다. 진리는 우리의 공적 삶에서 추방되어 버린 것이다. “나”의 진리, “너”의 진리는 있을 지라도 “우리 모두”의 진리는 없는 것이다. 있다면, 그것은 서로의 “진리”를 인정해주고 그것을 관용하는 것이다. 이 관용을 허용하지 않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비진리”이고 “거짓”이며 사회에 “위험”을 야기시키는 짓이 된다. 그래서 “전도”도 있을 수 없고, “변론”도 없다. 단지, “대화”만 있을 뿐이다. 차 한 잔 주고 받고 나누는 대화, 그 대화에 뭔가 긴장이 있다면 겨우 찻잔 위의 부는 바람일 뿐이다. 

 

    상대적인 진리만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사회 – 바로 포스트모던 사회이다. 우리들의 사회이다.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진리”는 소외 당하고 있는 사회이다. “절대적 진리”를 부끄러워한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복음의 옛 진리들이 희석되고 있다. 

 

    “회심”의 개념이 희석되는 것이 어쩜 당연한지 모르겠다. “문화”의 개념도 그렇다. 심지어 “나”(self)라는 개념조차 그렇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진(socially constructed) 것이기 때문이란다. 진리(truth) 자체가 그렇고, 실제(reality)라는 것이 그렇다고 한다.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진리”도, “실제”도, 그 무엇도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성립되기 때문이란다. 그 “언어”는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ion)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문화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부모가 나에 대해서 전해 준 “이야기”(story)들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나라는 존재가 달라진다고 한다. 담론(narration)들이 유행하는 이유들이 여기에 있다. “성의 담론”, “정치의 담론”, “패션의 담론”, “속담의 담론”…….가는 곳마다 “담론”이다. 

 

    이런 모든 “담론”들 뒤에 무엇이 깔려 있는 지를 눈치 채어야 한다. 곧 “권력투쟁”(power struggle)이 깔려 있다. 진리를 왜 상대화시키는 정신들이 유행하는가? 진리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바로 인간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진리를 왜 공적 광장으로 추방시켜 버렸는가? 진리의 간섭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이 세상 천지만물의 저자(author)를 추방시키기 위해서 “신의 죽음”을 외치고, 최근에는 “저자의 죽음”을, 더 나아가서 “의미의 죽음”을 외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author-ity(권위)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모든 권세로부터 해방되어서 누리는 그 자유가 자신들을 또 다른 굴레로 인도하는 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무의미의 굴레요, 허무의 억압이다. 생명의 의무를 벗어 던지니, 죽음의 큰 아가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진리의 멍에를 내팽개쳐버리자 마자, 자유의 공기를 마셨다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무의미의 무의미”이다.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그 “헤벨”(hebel)이다. 죄를 지은 인생이 기대하는 모든 기대는 처음부터 바로 이 “헤벨”(창4:1,아벨)이었다. 얻었다(“가인”) 하나, 곧 “허망함”(아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과연 비상구는 없는가?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8)

 

“말씀”으로 거듭나는 “말”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죽음의 문화는 사실(과학)의 신화에 지배되어 중립의 환상에 의해서 진리는 이빨이 빠진 채 사적 영역으로 숨어서 자기를 찾아오는 자에게나 몸을 파는 창녀짓을 하고 있는 문화이다. 절대의 권세를 휘두르던 그 거짓된 위용이 벌겨 벗겨진 채, 진리는 이제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자기를 찾아오는 자들을 위해서 몸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에는 “말(언어)의 문화상대성” 때문이라고 했다. “진리”가 “진리”인 것은, “말”을 통하여 형성된 문화와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말”이란 그야말로 현대사회의 문화와 가치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가 “나”인 것은, 내가 어린 시절로부터 들어왔던 “말”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의 가문과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가 형성된다. 어느 누구도 아닌 “나”만의 그 고유하고 절대적인 “자아”란 없다.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을 통하여 확신하게 된 바로 그런 자아란 “환상”이다. 모든 것이 “말”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이 말을 매개로 한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일 뿐이다.

 

    “절대”의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환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현대문화는 그래서 자유하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스스로 자신을 “창조”한다. “상대적”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상대적”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어느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말들이 갖고 있는 의미의 다양성을 즐기면서 카니발에 열중한다. 

 

    아뿔싸! 죽음인 것을. 죽음의 불나방들이 그 카니발의 횃불 속에 어른거리는 것을. 허무와 무의미의 광란을 껴안고 축제의 춤들을 흔들어대는 군상들. 토할 것만 같은 존재의 이 가벼움. 의미고 나발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 오직 순간만이 영원하다. 영원은 없다. 속이는 것도 없고 속는 것도 없다. 오직 오직 오직 지금 나의 온 감각을 통해서 전율로 다가오는 쾌감만이 있다.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불안감을 담배꽁초 짓누르듯이 눌러대고는 죽음의 문화를 이들은 즐기고 있다. “나”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문제이다 – 이 “말”이 거듭나야 한다. “담론”들이 새로워지고, “스토리”들이 다시 구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 말을 거듭나게 하고, 담론들을 새롭게 하고 스토리들을 다시 구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말씀”이다. “말”이 “말씀”을 만나야 거듭나게 된다. “담론”이 “말씀”과 부닥쳐야 새로워진다. “스토리”들이 “말씀”을 만나야 다시 구성된다. 왜 그런가?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신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1). “말”이 거짓된 세계를 만들고 “환상”을 만들고 죽음의 문화를 양산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으로부터 이탈되어졌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바로 “생명”이기에 이 “생명의 말씀”을 떠나면 오직 “죽음”뿐이다. “말”이 “말씀”을 떠났기에 “죽음의 문화”를 양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말씀”을 만나게 되면 “생명의 문화”를 창출한다.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문화의 “근원”이요 “과정”이며, 또한 “목적”인 것이다.

 

    죽음의 문화에 사는 사람이 생명의 문화로 들어오는 것은, 썩어질 말(혹은 씨)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다(벧전1:23). 이렇게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들의 “말”이 거듭난다. 야고보 선생이 “참된 믿음”을 설명한 뒤에 바로 “말”에 대해서 교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약2:14-3:12). 거듭난 자가 죽음의 말이 아니고 생명의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의 문화가 죽음의 말에 의해서 생산되듯이, 생명의 문화는 생명의 말에 의해서 창조된다. 

 

    “말”은 “맘”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맘”을 계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맘”을 드러낸다.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맘의 변화”이다. 변화된 맘은 변화된 말을 동반한다. 생명의 문화가 “회심”(맘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또한 말로 드러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말씀”으로 거듭난 그 사람들의 “말”이 생명의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생명의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말들을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9)

 

언약을 맺었습니까?

 

    “말”이 “말씀”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말”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맘”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말씀”이란 그런 사람이 통과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왜 그리스도가, 왜 제 2위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요1:1)되었을까? 그 뜻이 있을 것이다. 세계는 “말”과 “말씀”을 통해서 형성된다. “말”을 통해서 형성된 세계는 관념세계일 뿐이다. “허깨비”라는 “말”을 통해서 “허깨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서는 실제세계가 창조된다(요1: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말씀”대로 세계가 존재하였다. 이 “말씀”을 통과한 “말”들이 기록된 것이 바로 “성경”이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말”이다. 

 

    이 “말씀”을 통과한 “말”의 기록 중에서 “언약”이란 말이 참으로 의미가 깊다. 언약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시리즈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언약의 중요성만을 생각해 보자. 언약(covenant, 베리트)이란 말은, 일종의 “묶음”(binding bond)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約束”이라는 말의 “束”이라는 것이 바로 이 “묶음”을 의미한다. 땔나무 등을 하나처럼 묶어놓은 형상을 묘사하는 말이 바로 이 “束”(묶음)이다. “약”(約)이란 말도 재밌다. 실 사(絲)변에 구기 작(勺)을 합성한 글자이다. 술, 국 따위를 퍼는 국자를 실로 연결시켜 놓은 모양이다. 낚시와 낚시줄을 연상하면 좋겠다. “약속”이란 낚시줄로 꿰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꿰이는 것이다. 땔나무들이 한 동아리로 묶여지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묶는 것이다.

 

    생명의 문화는 무엇인가?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과 한 묶음이 되어서 이루는 삶의 모든 것이다. 죽음의 문화는 무엇인가?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과 한 묶음이 되지 않은 채로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서 행하는 모든 삶의 모양과 스타일이다. 그래서 “약속”은 죽음의 문화에 속했던 자가 생명의 문화에 속하게 되는 일종의 통로이다. 그 “약속”을 “말”로 맺는 것, 마음의 말로 맺는 것이 바로 “언약”이다. “마음의 말”이 무엇인가? “피”이다. 마음은 인간존재의 근원이고 그 존재의 근원인 생명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피”이다. “아담”(인간)이란 말은 “담”(피)에서 왔다. 모두 다 “붉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늘 天 따 地 검을 玄 누를 黃이다. 하늘은 현묘하고 땅은 붉다. 인간도 붉고 피도 붉다. 피는 그래서 인간과 땅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이다. 그래서, 언약이란 피를 토하듯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말로 맺게 된 약속이다. 말로서 서로를 묶어서 일심과 동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의 피를 토하시고, 그의 상대가 되는 인간이 피를 토하고 그 피가 섞인다. 그것이 언약이다. 현묘한 하늘과 붉은 땅이 섞인다. 그것이 언약이다. 그것으로 새로운 집 宇 집 宙를 창조한다. 곧 새로운 우주(宇宙, 코스모스)이다. 생명의 문화가 죽음의 문화를 깨부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우주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피의 언약을 맺었는가? 맺었다면 그 새 우주를 지향하고 있는가?

 

    회심은 나 개인의 변혁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언약은 한 사회의 문화가 변혁되는 출발점이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말씀)로부터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죄인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는 것이다(고후13:13).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의 문화로 변혁되는 “복”도 바로 삼위 하나님의 일이시다. 이 일을 “맘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시되, 그 맘에서 나오는 “말의 변혁”을 통해서이다. 

 

    언약의 말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과 나(우리)와의 관계, 나(우리)와 나(우리)와의 관계, 나와 이웃(세계)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언약관계에서의 말이 그것들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고려해야 할 언약의 말들이 바로 예배의 언어들이다. 나와 나와의 관계에서 고려해야 할 언약의 말들은 바로 나의 정체성과 인격에 관한 언어들이다.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고려해야 할 언약의 말들은 바로 (개인윤리이든 사회윤리이든) 윤리에 관한 말이다. 이 모든 영역의 “말”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참으로 “말씀”을 통과하였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 과정이 바로 문화이다. 생명의 문화를 향한 문화행위인 것이다. 과거의 말들을 검토하는 현재의 행위를 통해서 나온 말들을 통해서 변혁의 미래는 바로 지금 조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0)

 

생명문화의 주체로서의 나

 

    생명문화의 시작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으로 시작되고, 문화의 변혁은 그 언약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갱신해 가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과 피의 언약관계를 맺는 것이 회심과 중생이고, 이 회심과 중생에 기초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각각에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변혁을 시도해 가는 것이 문화변혁, 혹은 문화갱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문화변혁과 갱신이 없으면 생명의 문화도 부패할 수 있다. 생명의 문화가 부패하면 죽음의 문화가 부패할 때보다 더욱 추하다.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썩을 때보다 더욱 추한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의무에 태만해 질 때 이런 일이 생긴다. 

 

    끊임없는 문화변혁과 갱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변혁과 갱신이 요청된다. 이것은 회심과 중생으로 시작된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앞으로 간단없이 되돌아가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언약의 한 당사자가 되는 “나”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내가 나인 것은 “말” 때문이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인임을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역사, 나의 가문, 나의 나됨은 부모나 나에게 영향을 미쳐온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이다. 내가 크리스챤이 된 것도, 내가 거듭나서 새로운 존재로 창조된 것,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도 “말”에 의해서이다. 그 말을 우리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 때문에 생겨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 곧 자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말”로 인해서 잘못 되어질 수가 있다. 우로나 좌로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로 치우친 것이 “절대적” 자아관이다. 이것은 나라는 자아가 말에 의해서 영향받고 말을 통한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통해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도 에르고 섬(Cogito Ergo Sum)의 입장이 이것이다. 그 실재함을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 보아도 의심할 수 없는 실재로의 그 의심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게 되는 이 견해는, 타인과 관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나의 존재를 기본적으로 상정한다. 개인주의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좌로 치우친 견해도 있다. 나라는 것이 말에 의해서, 그리고 말을 통한 인간관계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 자아라는 것은, 결국 상대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 속에만 있는 것이기에, 결국은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견해이다. 쉬운 예는 불교적인 자아관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런 견해가 현대 철학계에 팽배해 있다. 자아란 언어와 상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나 자신을 스스로 조형해가고 창조해 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양한 문화상황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취향에 맞는 요소들을 취해 와서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을 형성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물과도 (섹스만 아니라) 결혼하는 것이 가능하고, 장난감을 자기의 친자처럼 여겨서 재산을 상속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다중인격이라는 것이 질병이 아니라 어쩜 당연한 현상쯤으로 여겨지는 포스트모던의 자아관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예수님에게 답변했던 광인의 대답, 곧 “군대 니이다”고 하였던 것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이런 “말”에 의해서 형성된 좌우로 치우친 자아관에 대해서 “말씀”에 의해서 형성된 자아관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로서의 자아관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서의 나야말로 생명문화의 주체가 된다. 절대적 자아관이 빚어낸 자아를 대표하는 것이 존 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사탄이라고 한다면, 상대적 자아관이 빚어낸 자아를 대표하는 것이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아관이 빚어낸 자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아담이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다음 주에 이것에 대해서 답이 주어질 것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1)

 

삼위일체 하나님(1): 아담과 나의 원주소

 

    자아관은 한 문화의 핵이다. 그래서 생명의 문화를 위해서 참된 성경적 자아관이 세워져야 한다. 개인주의를 낳는 절대적 자아관도 아니고 허무주의에 이르는 상대적 자아관도 아니라고 하였다. 사탄도, 프랑켄슈타인도 아니라, 바로 아담에게서 참된 성경적 자아관의 전형(prototype)이 있다고 하였다.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나 자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고백하면서도 바로 나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원론에만 그치고 각론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다(골1:15,히1:3).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그 형상이 파괴되었다. 나의 이상적 자아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내가 나 자신의 이상을 설정해 둔 그 어떤 자아상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세워두신 이상적 자아상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원죄와 자범죄로 그 자아상이 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러한 나의 자아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이다. 나의 자아상이 회복된 때가 바로 “회심과 중생”의 순간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지속적인 성화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가 바로 “나”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는 참된 나를 참으로 찾았는가? 그리스도 밖에서는 절대로 나를 찾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을 반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의논하셨다. 그렇게 인간을 만드셨다. 그 만드신 결과가 “남자와 여자”였다(창1:26-27). 하나님께서 남자, 혹은 여자라는 성(性, gender)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왜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자고 하시고는 인간을 성적 존재로 만드셨는가? 성은 관계적 개념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라는 “두” 존재가 어떻게 “삼위”의 “한” 하나님을 반영하는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삼위 하나님 한 분이 인간의 삼위를 형성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될 때에 그것이야말로 삼위 하나님을 온전하게 반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야말로 남자와 여자 관계 속에 보이지 않는 끈이고 존재의 기초이며 근원이다. 삼위 하나님 없이 남자와 여자의 그 어떤 관계에도 답이 없다. 게다가 남자 없이 여자가 없고 여자가 없이 남자가 없다. 인간(人間)은 개체적인 존재가 아니고 관계적인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말에 사이 간(間)을 쓰는 이유도, 인(人)이라는 말 자체도 그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도 관계적 존재이다. 나라는 어떤 “실체”는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관계”가 있기도 전에 어떤 “실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와가 있음으로 인해서 아담이 아담이 되었고 아담이 있음으로 인해서 하와가 하와가 되었다. 그 긴밀함이 “이쉬”(남자)와 “이솨”(여자)라는 히브리어에 나타난다.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김용옥씨가 “여자는 무엇인가”에서 한글(혹은 한자어)의 “남자”와 대립되는 “여자”의 독립적 개별성을 강조하는 것은(그러면서 동양적 사유방식에 우월감을 보이는 것은), 절대적 자아관의 흔적이다. 개인주의의 질병을 앓고 있는 흔적이다. 

 

    절대적 자아관은 “한 하나님”을 “삼위”를 약화시키면서까지 강조할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이다. 상대적 자아관은 “한 하나님”을 약화시키면서까지 “삼위”를 강조해서 삼신론에 이르게 되는 병리현상과 동반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왜곡되게 생각하는 것과 나 자신을 왜곡되게 생각하는 것과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한 분 하나님의 삼위관계(성부,성자, 성령)가 온전한 “윤무”(상호내재, perichoresis)가 될 때 그것에 기초한 신학이 생명의 신학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삼위관계(남자, 여자, 그리고 삼위 하나님)가 “윤무적”(perichoretic)이 될 때(완전한 윤무가 아닐찌라도)에 그것에 기초하여 생명의 문화가 건설된다. 내 안에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갈 때에 나는 참된 나를 발견하고 또한 이루어가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감정과 정서의 표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2)

 

삼위일체 하나님(2): 파편화된 진선미의 통합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나눠지고 쪼개지고 분열되어 있다. 진리도 상대화되었고, 통일되고 절대적인, 그래서 모든 것을 통괄하는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제 우습게 되어버렸다. 현대화(modernization)의 결과로 노동의 분업이 가속화되었고, 전문화된 직종들이 그 모습을 지금도 드러내고 있다. 그 분화는 계속될 것이다. 학문들도 이 추세에 맞춰서 전문화되고 있다.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전문목회가 유행이다. 목회자는 그래서 이젠 행정적 테크노크라트(기술자)가 되었다. 그렇지 못한 목회자는 도태하게 된다. 어린이전문, 노인전문, 청년전문, 음악전문, 대중문화전문목사들이 나온다. 

 

    “가치”와 “사실”이 귀납법의 논리를 따라서 분리되더니, “이상”과 “현상”이 각각 분열되어지고, 나아가서, “진”과 “선”과 “미”가 분열되어 버렸다. 그 각각이 또한 분열되어지고 있다. 파편화되어지고(fragmented)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개인주의화되었고,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증후이다. “박사”가 된다는 것은, 이제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된다는 것이다. 신학박사는 목회에 대해서, 목회는 신학에 대해서 할 말들이 없고,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지구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본향”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이 우주는 “진화”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무한한 “핵”들로서의 끊임없는 분열과 분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인 것일까?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남”과 “남”으로서 고슴도치 가시를 찌르는 그 우주의 끝모습이 바로 “천국”인 것일까?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한다. “세속도시”의 익명성과 기동성이야말로 자유와 해방의 “천국”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이 장망성, 이 세속도시와 함께 망하라!

 

    “천국”은 결코 이 분열과 분화의 “세속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의 “자유와 해방”은 위장된 것이다.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죽음의 문화이다. 이 죽음의 문화 가운데서 “탄식”(롬8:18-27)하는 우리들은 “순례자들”이다. 순례자가 바라보는 “본향”은 생명의 문화가 있는 하나님의 도시이다. 이곳은, 무한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다양성을 하나로 꿰는 통일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는 그 곳, 그 때(엡1:10)가 바로 “천국”이다. 이 천국을 어떤 사람은 “제국”이라고 오해했었다. 그 하나님을 “절대폭군”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오해였다. 그의 왕관을 벗기고 옷을 벗겨서 그들은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4). 

 

    하나님은 공동체이다. 하지만, 아주 특이한 공동체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각자가 하나님이시면서도 “한 분”으로만 존재하시는 아주 독특한 공동체이시다. 각각이 하나님이시면서 어떻게 한 하나님이실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일 것이다. 인생들은 단지 그 신비를 경외하고 예배할 뿐이다. 옷깃을 여미고 신발을 벗고 두려워할 뿐이다.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경외와 두려움과 찬양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물을 해석하고 연구하며 분석하여 또한 “활용”하고 “이용”해야 한다. 그저 하나님으로만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미지들을 그의 창조물들 속에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문화도 그렇다. 하나님의 문화는, 바로 삼위 하나님의 반영이다. 분화되어가는 이 죽음의 문화조차도 하나님의 “다양성”이 역사하고 있다. “빛도 어둠도 창조하신”(사45:7)이가 바로 삼위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께서 좌로도 우로도, 끊임없는 개인주의적 분화도 아니고, 홀로 지고지선을 주장하는 전체적 제국주의도 아닌, 생명의 공동체를 지향하신다. 하나님 당신의 본성이시기 때문이다. 삼위 안에서 춤추시는(페리코로우시스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온 존재가 자신과 더불어서 춤추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문화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이다. 이 문화는 “똥”과 “섹스”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것을 다음 주일에 생각해 볼 것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3)

 

성(性, Sexuality)과 성(聖, Holiness)

 

                    -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았을까?

    생명의 문화에서는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이다. 원래 “性”이라는 것은, 사람의 본바탕이나 성질을 일컫는데 사용되었다. 그것을 “마음”(心)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性”이라는 글자는 마음 심(忄)부에 살 생(生)이라는 글자로 형성된다. 중국 유학 중에서 성리학(性理學)이 “마음”을 그 근본으로 다룬 것도 이와 연관된다. 이 단어가 후대에 와서는 사람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의 본바탕이나 성질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데 사용하는 의미로서도 성(性,gender)과 남녀/자웅 사이의 생물학적 욕망을 나타내는 의미로서의 성(性, sex)의 의미도 담게 되었다. 언어란 이렇게 변천된다. 

 

    여기서 말하는 성(聖)스러운 성(性)이란, 마음의 본성도, 사물의 본바탕도, gender도, 또한 sex도 모두 포함하면서 그것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성(性, sexuality)이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그 차이면서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적인 욕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그 무엇이 바로 이 “섹슈엘리티”이다. 남자와 여자가, 타락한 죽음의 문화에 의해서 형성된 계급적 구조와 차별에 의해서 싸움을 벌이기 전에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섹슈엘리티”이다. 성적 흥분이 서로를 공격하고 정복하는 수단이거나 자기 자신의 욕구발산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있었던 그 무엇이 바로 “섹슈엘리티”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또한 “좋았다”고 선언하셨던 바로 그것이 바로 이 “섹슈엘리티”이다. 이런 “섹슈엘리티”는 인간이 타락하기도 전에 이미 있었고, 만물이 회복될 천국에도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혼이나 성교는 없어져도 남아 있게 될 그 무엇이다. 

 

    쉬운 예를, 하지만 어쩌면 어려울 수 있는 예를 생각해 보자. 에덴동산의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성적으로 흥분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홀로 있을 때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을까 흥분을 조금이라도 했을까?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외쳤을 때, 성적인 흥분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흐음……쉽지 않은 질문이다(뭐라구요? 쓸데없는 질문이라구요?). 어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전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한다(예: AD 4, 히에로니무스). 이와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AD 9, 에리우게나). 타락하지 않았던 의지를 가졌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아담은 자신의 남근을 발기시킬 수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떤 생각이 옳은 것일까? 이런 질문들과 이에 대한 답변들은 “성”(sexuality)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들을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성적 흥분 자체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그 흥분을 “사랑”이라고 혼동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 문제에 답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도 아직 이 죽음의 문화에 젖어서 이 “섹슈엘리티”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천국에서도 이 “섹슈엘리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성교(sexual intercourse)가 없어지고, 결혼관계가 없어져도, 여전히 남아있게 될 이 “섹슈엘리티”는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크게 활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교의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될 것이다. 

 

    성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화가 죽음의 문화에 의해서 너무나도 오염되고 타락해 버렸다. 성(性)이 성(聖)스럽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부부성생활”이란 “개념”조차 형성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셨던 것을 사탄이 더럽다고 부추겨서 “섹스”로 변질시켜 버렸다. “sexless”해야만 “거룩”하다고 여기도록 부추겼다. 사탄의 유혹은, 이 “섹스”의 유혹에 현혹되게 하는 것만 아니고(그것은 분명히 사탄의 유혹이다), 바로 하나님의 것을 더럽다고 여기게 하는 바로 이것도 있음을 유념할 일이다. 생명의 문화는 이렇게 양극으로 오염된, “섹스”와 “섹스레스”의 중간, 곧 “섹슈엘리티”의 아름다움과 선함과 참됨(진선미)을 추구한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바로 그 “섹슈엘리티”에서만 가능하다. 만물을 흥분시키시고, 만물을 낳으시고, 또한 기르시며 보호하시고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의 성(性, Sexuality)가 바로 나의 “섹슈엘리티”의 원형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聖스러우면서도 性)스러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사랑하시되 죄를 “결코” 짓지 아니하셨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4)

 

신학과 유모어: 예수님의 똥

 

    섹스와 함께 똥이라는 주제는 다루기가 참 힘겹다. 하지만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고 여겨진다. 이 주제가 가지고 있는 무게를 의식한 밀란 쿤데라라는 사람은 그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똥은 악보다도 더 다루기 힘든 신학적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인간을 창조한 분이 진다”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내가 똥을 싸는 존재가 된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책임이다.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탓하라.

 

    사실, 이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이 없다. 탓할 필요를 느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탓한다면 하나님께서 웃으실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무슨 잔소리냐고 하실 것이다. 그러고는 그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의 똥구멍을 막아버리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한 달을 버텨낼 사람이 있을까? 아니 일주일을? 한 달을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똥을 누지 않은 채로 일 주일을 살아 버티는 사람이 있을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 눈치로 “싸는” 문제가 “먹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상수도만이 아니라 하수도도 중요하다. 배설의 문제는, 어쩜, 그러기에 참으로 중요한 문화의 문제이고, 또한 신학의 문제이다. 신학적 문화를 다루는 이 시론에서 그렇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오해할 사람이 있을까 해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서 이 주제를 다루게 된다. 

 

    예수님은 지상생활 중에 똥을 누셨을까 누지 않으셨을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똥을 누었을까 누지 않았을까? 신자들이 살게 될 “천국”에서의 “영적 몸”은 “똥”을 눌까 아니면 누지 않을까? 만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똥을 누었다면 그 똥은 지금과 같이 냄새가 흉할까? 그 냄새가 “흉한 것”은, 그 똥에서 나온 그 냄새 때문일까 아니면 그 “냄새”를 인식하는 나의 감각기능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아담의 타락으로 그 똥은 흉해진 것일까? 원래부터 그렇게 흉했던 것일까? 만일, 영적 몸을 가진 사람들이 천국에서 “똥”을 누지 않게 된다면, 그들의 원래 몸에 있었던 “똥구멍”들은 모두 퇴화되어 버리게 되는 것일까? 

 

    정말 엉뚱한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엉뚱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유모어를 상상해 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두고선 하나님께서 껄껄 웃으시고 계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답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그런 주제들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은 어쩜 여백의 공간을 일부러 남겨두셨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을 다 계시하시지 않고 일부러 어떤 부분을 감춰두신 하나님. 참으로 유모어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신학도 그러기에 이런 유모어를 가져야 한다는 지론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의 문화에 대한 시론도 유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잘못일까? “아디아포라”라는 개념을 이런 신학적 여백과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까? 

 

    사람들은 수세식 화장실로 똥의 현실을 생각해 볼 기회가 적어졌다. 그래서 자신들이 똥을 누는 존재들임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생들을 하나님은 웃고 계신다. 하나님의 웃으심은 그의 심판이다(시2:1-2). 하나님의 유모어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 아직도 여전히 사탄이 활동하도록 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여유.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똥구멍을 손으로 빚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수 천년이 지난 후에 바로 지금 성은이란 불리워지는 내가 그 똥구멍을 만드신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 할 것을 내다보시면서 껄껄 웃으셨을 것이다. 그 웃음으로 천지가 진동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똥냄새가 향기였을 것이다. 나도 그와 같이 똥냄새를 향기로 맡을 수가 있다면….그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시론(15)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나의 도시냐 하나님의 도시냐)

 

    아직 다뤄야 할 주제들이 산더미지만, 이제 이 글도 마쳐야겠다. 예술과 문예, 철학의 각론들은 전혀 다루지도 못했다. 일반섭리(일반“은총”이 아니고)에 기초한 각 학문영역들에 대해서 언급할 것도 남겨둔다. 교회나 교회개혁에 관한 것은 물론이다. 기회가 있으면 이런 주제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갔으면 한다. 

 

    겨우 시론(試論)이었다. 논의를 위한 요리였을 뿐이다. 회심에 기초한 문화는,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문화라고 하였다. 나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의 하나님께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에 기초한 모든 삶이 바로 생명의 문화이다. 이 문화는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섹스와 똥까지도. 상수도만 아니고 하수도도.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문화의 가장 선하지 못한 것(선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이 죽음의 문화의 최선의 것보다 낫다. 두 문화 간에는 그만큼 간극이 넓다. 깊은 심연이 그 둘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인간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아니, 나의 도시와 하나님의 도시의 차이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만이 있다. “나”라는 종교와 “하나님”이라는 종교이다. 나라는 종교는 “나의 도시”를 형성해 간다. 바로 지옥이다. 하나님이라는 종교는 “하나님의 도시”를 소망한다. 천국이다. 가인이 건설한 “에녹”(창4:17)은 “나의 도시”였다. 타락한 인간들의 문화 활동, 곧 죽음의 문화를 대표한다.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시작”(에녹)을 선언했던 것이다. 모든 도시가 바로 그러한 죽음의 도시이고 “나의 도시”이다. 바벨론도, 두로도, 예루살렘도, 런던도, 서울도, 모두 이런 “나의 도시”이고, 죽음의 도시이다. T. S. 엘리어트가 얘기한 “유령의 도시”이고 “황무지”이다. 하비 콕스가 뽐내는 “세속도시”이며, G. 스타이너가 언급한 "이차적 도시"이다. 도시는 인간의 문화 활동의 총집결체이다.

 

    이런 도시에 대하여 성경은 심판을 선언한다(계 18장). 이런 죽음의 도시 대신에 생명의 도시를 건설한다. 생명나무와 생명수가 있고, 생명 그 자체가 충만한 곳이다. 바로 “새 예루살렘”이 그것이다. “에덴”에서 시작해서 타락과 구속의 과정을 거쳐 이르게 되는 “새 예루살렘”이 그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만 아니라, 모든 도시는 바로 메시야를 죽인 “옛 예루살렘”이다. 그렇기에 이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야 한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서….장차 올 것을 찾아야 한다(히13:13-14). 바로 “나의 도시”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이다. 바로 “유령”이었던 내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마귀새끼)였던 내가,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이다. 이제 그 죽음의 도시, 유령의 도시, 황무지에서 나와야 한다.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가 아니고 “하나님”이다. 우리의 모든 삶에 이 원리를 적용할 때에 바로 그 삶이 바로 생명의 문화이다. 진리와 자유의 “새 생명 공동체”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가 이런 공동체의 시작이고, 또한 이런 도시를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에클레시아: 아~!! 이것에 대해서 할 말이 참으로 많은데….). 이런 도시, 이런 공동체는, 내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게 하시고 또한 살리신 성령의 감동과 은혜로 내 속에 일어나는 소원(빌2:13)으로만 그것이 가능하다. 내가 이루어 가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성취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도시이고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 도시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면서 또한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구속의 첫 열매이면서도 아직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몸의 구속으로(롬8:23), 지금껏 나와 내 얼굴이 분명치 않았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그 순간, 나의 얼굴에 붙어있던 그 모든 흉한 가면(persona)들이 벗겨지고, 참된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봄으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하신 그것이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 또한 하나님을 알며,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문화란,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모든 활동이다. 나를 알 때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 때에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나의 얼굴을 가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는 법.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나의 얼굴을 내가 가질 수 없는 법. 그러니, 나의 삶으로, 나의 노동으로 오늘도 기도할 뿐이다. 성령께서 나의 탄식을 도우실 줄을 믿고…기도하는 것이다. 

 

    주여, 주의 성산(도시)에서 주의 얼굴을 나에게 향하시고, 주의 얼굴빛을 나에게 오늘도 비취소서! (참고, 민6:24-27). 주의 성산을 소망하고 있는 바로 이곳은 런던이란 유령도시이다.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