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신학의 부흥에 대한 고찰”- 백충현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에 대한 고찰”- 백충현
2013-12-14 14:30:49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에 대한 하나의 개혁신학적 고찰”
백충현 (경동제일교회 부목사, 장신대/숭실대 강사)
I. 서론
삼위일체론이 18세기와 19세기의 신학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것에 반하여, 20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의 현대 신학에서는 새롭게 재발견되고 있다.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재발견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조직신학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교회협의회의 현대삼위일체론 연구위원회는 1989년의 보고서에서 20세기 삼위일체론의 재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신학업적 셋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첫째는 개신교진영의 칼 바르트가 1932년부터 저술하기 시작한 『교회교의학』이며, 둘째는 동방정교회 진영의 블라디미르 로쓰키가 1944년에 저술한 『동방교회의 신비주의 신학』이며, 세번째는 로마 가톨릭 진영의 칼 라너가 1967년에 저술한 『삼위일체』이다. 테드 피터스는 그의 책 『삼위일체 하나님 - 신적 삶 안에 있는 관계성과 시간성』의 서문에서 20세기 후반기의 신학에서 삼위일체 신학은 으뜸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 중의 하나임을 입증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스탠리 그렌츠는 『현대신학의 재발견 -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삼위일체론 신학은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된 기독교적 주제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가장 인기있는 신학의 사조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크리스토퍼 슈뵈벨은 이러한 재발견과 논의들을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 또는 부흥(the renaissance or revival of Trinitarian theology)"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데이비드 커닝햄도 이 점을 확증해 준다.
이러한 부흥은 칼 바르트, 블라디미르 로쓰키, 칼 라너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로버트 젠슨, 레오나르드 보프, 노만 피턴저, 조셉 브라켄, 메조리 수코키, 캐써린 모우리 라쿠냐, 이정용 등등의 삼위일체 신학자들에 의하여 더욱 더 발전되고 심화되어 왔다. 이 논문은 현대적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에 대하여 하나의 개혁신학적인 고찰을 시도한다. 그러기 위하여, 현대 삼위일체 신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쟁점들 중의 하나인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를 중심으로 다룬다. 먼저, 이 쟁점에 관한 여러 입장들을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점에서 일곱 가지로 정리하며, 둘째, 이 쟁점에 관한 논의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를 밝히고, 셋째,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여러 입장들이 존재론과 인식론을 사용하는 잘못된 방식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에서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신비의 개념에 주목하여 각각의 입장들이 끌어들이는 신비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앞으로의 삼위일체 신학의 발전을 위하여 요구되는 세 가지 방향성을 간략하게 제안한다.
II.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현대의 일곱 가지 입장들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관계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구별을 강조하면서도 양자간의 일치를 확보하려고 시도한 신학자들의 논의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의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바르트의 상호상응(mutual correspondence)의 입장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론적 관문이며 내재적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원형이라고 이해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성부, 영원한 성자, 영원한 성령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와 우리의 성부,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영의 존재론적 기초, 방식, 이유이다. 바르트의 상호상응의 입장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와의 내용의 동일성과 일치성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내재적 삼위일체 의 존재론적 독립성 혹은 우선성을 암시하며 이것은또한 인식론적 긴장을 부득불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일차적 객관성(God’s primary objectivity)과 하나님의 이차적 객관성(God’s secondary objectivity)을 구별하며, 마지막으로는 "무지(ignoramus)"로서의 신비의 개념에 의존한다.
둘째, 라너의 동일성(identity)의 입장은, 경륜적 로고스가 내재적 로고스이며 그 역도 성립함을, 그리고 우리가 구원사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영이 삼위일체 내의 성령이며 그 역도 성립함을,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전달하심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초절적 경험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라너는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긴장 때문에, 라너는 또 다른 구별을 해야 한다. 즉, "내적인 상징(the inward symbol)"으로서의 내재적 로고스와 "외적인 상징(the outward symbol)"으로서의 경륜적 로고스를 존재론적 의미로서 구별하며, 신적인 자기-전달을 "절대적 근사치(absolute proximity)"로 간주한다. 존재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라너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해한 신비(the incomprehensible mystery of God)"를 자신의 전 신학의 전면에 위치시킨다.
셋째, 몰트만, 판넨베르그, 젠슨은 종말론적 일치(eschatological unity)의 입장을 견지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종말론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송영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몰트만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삼위일체론 사이의 불가분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소급적 영향(the retroactive effect)"이라는 그의 개념은 전자가 후자에게 상응한다는 그의 견해와는 비양립적인 긴장을드러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경륜적 삼위일체 그 자체와 이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구별하며, 그리고 내재적 삼위일체 그 자체와이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구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존재론적 긴장을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송영적 종말론적 이해로 해소하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살아있는 신비와 대면할 수 있도록해준다.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미래주의적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활동은 종말(eschaton)에 완성되며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와의 일치는 종말론적으로 일어난다고 논증한다. 존재의 순서(ordo essendi)와 인식의순서(ordo cognoscendi)와의 친밀한 관계를 주장하는 그의 미래주의적 존재론은 어 떤 심각한긴장들이 없이 인식론과 존재론과 불가분적으로 잘 짜여진 삼위일체론을 표명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그는 신비를 거의 토론하지 않으며 신비라는 신적 개념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신약의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신비와 삼위일체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탐구하지는 않고 있다. 젠슨은 성경의내러티브 속에서의 하나님의 정체성의 확인을 통하여 주장하기를,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종말론적 실재라는 의미로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은 종말론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기획은 존재론적 긴장과 인식론적 긴장을 모두 노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긴장들은 그 자신의신학틀 안에서는 해소가 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정체성이라는 최종의 신비 혹은 심층의신비에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대한 충분한 토론을 하지 않는다.
넷째, 피턴저는 과정신학자이며 보프는 해방신학자이라는 현저한 신학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 보다 더 크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피턴저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로 최고로 표현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님을논증하며,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초점적으로 결정적으로 활동하시지만 그러나 이러한 신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성령은초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행동에 응답하도록 하는 신적 반응이지만 그러나이러한 반응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영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보프는 성자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의 경우에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역도 성립하지만 역사적 구원의 사건들 이외의 경우에서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훨씬 더 크다고 주장한다. 피턴저와 보프 모두 삼위일체의 신비에강한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영향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 넓은 간격을허용한다. 피턴저는 내재적삼위일체가 팔레스타인의 삼위일체보다 훨씬 더 크다고 간주하며, 마찬가지로 보프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우리에게 충분하게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드러난다고 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어렴풋이 드러내줄 뿐이라고 진술한다.
다섯째, 브라켄의 담금(immersing)의 입장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에로 흡수함을 의미한다. 그는 되어감의 형이상학과 공동체적 사회로서의 존재론을 개발하는 중에 경륜적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 속으로 담그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에 따르 면, 내재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의 방식이 경륜적 삼위일체의 활동들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전자는 후자를 자신의 활동들 속으로 통합시킨다. 그런데 브라켄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에 신비의 개념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에게 따르면, 항상적인 신비는 없으며 단지 잠정적인 무지(incognitio)만이 있다. 이러한 무지는 일어나리라고 이미 기대되어진 것이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수코키, 라쿠냐의 흡수(absorbing)의 입장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 안으로 흡수함을 의미한다. 이 둘은 관계적 존재론을 강하게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흡수의 방향으로 어쩔 수 없이 나아간다. 수하키에게 내재적 삼위일체는 세계-내에-내재하는 경륜적 삼위일체(the immanent-in-the world economic Trinity)이며 이것은이미 세상과 본질적으로 연관성을 맺고 있는 삼위일체이다. 반면에, 라쿠냐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두 차원의삼위일체를 가정하는 것에 대하여 확고하게 반대하면서, 성부로부터 성부에게로 나아가는(a Patre ad Patrem) 하나님의 외적인 엑스터시적 운동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테올로기아(theologia)의 구체적인 실현인 오이코노미아(oikonomia)만이 있다.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들의 감취어진 영역을 반성하는 거울이 아니며 테올로기아는 정적 무시간적 역사적인 영역이 아니다. 수코키는 하나님이 임재, 지혜, 권능의 삼위일체(the Trinity of Presence, Wisdom and Power)로 경험되어 짐을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하신 하나님(God for us)은 신비이시다. 이 신비는경험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우리의 내적인 관계적 존재론 속에 주어져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신비는 비록 현재는 모호하게 인식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분명하고 충분하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라쿠냐의 관계적 존재론은 그 안에 내재된 존재론적 긴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긴장은 형언할 수 없고 소진될 수 없는 신비로서의 인격(person as an ineffable and inexhaustible mystery)이라는 개념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은 하나님의 절대적 신비(the absolute mystery of God)에 궁극적으로 근거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마지막으로, 이정용의 상호포월(mutual inclusiveness)의 입장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있음과 그 역이 성립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자신의 신학적 관심사 때문에, 라너의 동일성의 규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측면인 경륜적 삼위일체를 온전히 확보하기 위하여 라너의 입 장을 비판적으로 이해한다. 바르트의 상응의 모델에도 비판적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일치의 근거를 음과 양의 이중적 상호적 포월성에 두어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궁극적 실재를 변화 그 자체로, 그래서 불가해하며 불가명한 신비로서 이해하는 변화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근거하고 있다.
위의 각각의 입장이 동기, 방향, 방식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구별성과 일치성을 동시에 확보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하나의 신학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III.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현대적 논의가 지니는 의의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깔뱅 등등의 개혁자들은 주로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경륜적삼위일체를 더 강조하며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사변적 논의들"을 경계한다. 루터는 "내적인 삼위일체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우리가 믿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기쁨으로 목도하고 있는 천사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 자체가불필요하다거나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이 경륜적 삼위일체의 근거로서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스웨덴 루터교 신학자인 구스타프 아울렌도 신앙에 관한 한 삼위일체론적 계시의 양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인 내재적 삼위일체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전제를 넘어서 그것에 관하여 사변을 꾀하는 일은 언제나신앙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 입장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의 필요성을 제거하며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구별을 비판하는 신학흐름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지난 20세기 후반에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부적당하며 그래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별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강력한 신학흐름이 있어 왔다. 예를 들면, 모리스 와일즈는 1957년도 논문인 "삼위일체론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성 찰"에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구별은 그리스사상과 포로기이후의 유대사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자의적인 분석일 뿐이며, 비록 기독교 사상과 경건에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경륜적 삼위일체 속에서 드러난 계시의 삼중적 특성을 근거로 우리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와일즈는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와일즈는 신학이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주장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활동의 효과들에만 집중할 것을 제안하였다.
다음으로, 씨릴 리차드슨은 1958년도에 출판한 『삼위일체론』이라는 책에서 삼위일체론은 "인위적인 구성물"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관한 전통적인 진술들은 "불명료하고 불가사의하며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필연적인 삼중성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찬가지로, 고든 카우프만은 1968년의 『조직신학』에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구별은 인간의 신지식이 지니는 관계론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사이비적 구별"이라고 여기면서, 신지식을 하나님의 외적 관계에로만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카우프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과의 외적 관계의 구조를 우리의 경험에서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내적인 심연의 존재 속에 있는 유사하면서도 좀더 근원적인 삼중구조를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반사하고 있다고 주장할 어떤 근거도 없다. 역사 혹은 계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연의 본질의 내적 구조에 접근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내적 구조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사변일 뿐이다.
그러므로 카우프만은 삼위일체의 내적인 관계들,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하여 진술하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기독론에 집중하면서 삼위일체론을 전적으로 기독론적 개념들에 비추어 접근하는 학자들의 흐름과 병행하여 왔다. 예를 들면, 피엣 슈넨베르그는 1969년도의 책에서 기독론을 다룬 후에, 1973년도의 논문에서는 앞서 다룬 기독론이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지니는 함의들을 설명하였다.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모든 사유는 세상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후에, 슈넨베르그는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구별은 동일한 실재의 다른 두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로서만 접근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결론으로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어떠한 질문들도 필연적으로 대답되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대답이 불가능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슈넨베르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로저 헤이트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받은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헤이트는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론은 기독론으로부터 파생된 교리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전달자로서의 예수를 경험하는 것에 완전히 의존한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기독론의 함수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내적인 구별들,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의 가정일 뿐이라고 헤이트는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너의 법칙은 인식론적인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고 헤이트는 지적하였다.
게다가, 지오프리 램프는 1977년도에 출판한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영기독론"을 제안하였다. "영기독론"은 예수가 영으로 충만하다는 점에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간주한다. 램프에 따르면, 영으로서의 한 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시듯이, 한 분 하나님이 오늘 여기에서도 현존하신다. 이러한 시각에서 램프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말할 것도 없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근본경험을 분명히 드러내는 데에는 램프 자신이 주창하는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개념보다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기에 램프에게는 하나님 안의 내적인 구별들은, 자신의 책의 중심주제이었던 "‘어떤 의미에서 예수가 오늘날에도 살아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대답하려는 시도를 오히려 혼돈케 하는 경향이 있다" 고 보았다.
이와 같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의 필요성을 제거하며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구별을 비판하는 신학흐름에 관해서는 우리는 개혁신학의 본래의 취지를 다시금 잘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양자의 구별성과 일치성을 함께 확보하면서도, 내재적 삼위일체로의 사변적 논의에 빠지지 않고 동시에 성경 속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확고히 붙드는 일이 필요하다. 이 점에 관하여 "깔뱅의 삼위일체적 함께 하심의 원리(Calvin’s Principle of Triune Togetherness)"가 소중한 모범을 제시한다. 깔뱅은『기독교강요(최종판)』I권 13장에서 성경에 철저히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18절에서 삼위간의 구별을 논의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별이 성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그가 관찰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삼위간의 구별을 묵과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삼위간의 구별에 관하여 깔뱅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일의 시초(beginning)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fountain)와 원천(wellspring)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wisdom)요 계획(counsel)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ordered dispensation)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에게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power)과 효력(efficacy)이 돌려진다.
깔뱅의 위의 진술의 본래의 의도가 삼위간의 구별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 진술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이 일의 시초이고 성자 하나님이 일의 계획이며 성령 하나님이 일의 효력이시기에,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 위격의 동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어느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의 역할들을 배제하면서 단독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각 위격이 연대기적 시간순서로 교대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에, 삼위 모두가 항상 함께 활동하신다. 삼위 모두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한다. 성부 하나님은 일의 시초와 기초와 원천으로서 참여하시며, 성자 하나님은 일의 지혜와 계획과 배열로서 참여하시며,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일의 능력과 효력으로서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의 시초가 없이는 성자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사역을 시작하실 수가 없다. 성자 하나님의 지혜가 없이는 성부 하나님의 기초도 성령 하나님의 능력도 맹목적이 된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효력이 없이는 성부 하나님의 원천도 성자 하나님의 배열도 공허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깔뱅의 위의 진술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항상 함께 사역하시며, 그리고 항상 함께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열려진 삼위일체이다. 깔뱅은 성경에 철저히 근거하여 경륜 속에서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 되,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내적 관계와 대외적 관계를 포함하여 논의하고 있다.
IV.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논의 분석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구별성과 일치성을 모두 주창하는 신학흐름 아래에는 상보관계에 있는 두 가지 저류가 흐르고 있다. 루터교 신학자인 피터스는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세상과 맺으시는 하나님의 심원하고 철저한 관계"와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의 확보."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하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구별성과 일치성을 동시에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핵심적 요소들을 인식한 피터스의 지적은 현대의 삼위일체 논의들을 분석한 그렌츠의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그렌츠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의 삼위일체 논의들을 관통하는 황금실(golden thread)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경륜적 삼위일체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고려하면서도,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로 와해시키지 않고 혹은 영원한 하나님의 자유를 타협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성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와 관련된 질문이다. 그렌츠의 분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황금실은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하고 있는데,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하여 경륜적 삼위일체가 중요하다는 점,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로 와해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을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피터스의 두 가지 핵심적 요소들과 그렌츠의 세 가지 범주들을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개의 입장들에 적용하여 보면, 어떤 입장들은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프와 피턴저는 경륜적 삼위일체 보다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더 많이 강조하였고 , 그럼으로써 둘 사이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브라켄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 속으로 담그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반면에, 수코키와 라쿠냐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 안으로 흡수하는 쪽으로 엄연히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신학자들과는 달리, 몰트만, 판넨베르그, 젠슨은 종말론적 일치의 입장을 견지하는데, 피터스도 이러한 입장에 있다. 그렌츠도 종말론적 일치의 입장이 지니는 방향성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며, 더 나아가서 어떠한 존재론이 그렌츠 자신의 세 범주들에 일치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렌츠가 현대의 삼위일체 논의들이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하여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였다고 언급하였을 때에, 그 합의점이 지향하는 "신학적 목표"는 내재적 삼위일체에는 "존재론적 우선성"을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에는 "인식론적 우선성"을 동시에 확보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렌츠는 그의 책 『기독교신학의 모체』의 제2권에서 그러한 신학적 목표를 탐색하고, "삼위일체적 존재론(Trinitarian ontology)," 혹은 "신-존재론(theo-ontology)"이라고 명명한 존재론을 발전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 그렌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존재(being)라는 틀에 맞추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여왔고, 그 결과 "존재-신학(onto-theology)"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어 하나님을 본체론적 존재론(substantialist ontology)이라는 틀 안에서 획일적으로 재단하여 종국적으로는 "존재-신학" 그 자체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젠슨의 신학방법론인 성서이야기를 통한 하나님의 정체성 파악이라는 방법에 큰 영향을 받은 그렌츠는 성서이야기 안에서 삼위일체 하 나님의 자기명명이 전개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모세에게 계시된 "나는 스스로 있는 자"(Exodus 3:14)라는 이름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나는-이다"(John 6:35, 8:12, 10:9, 10:11-14, 11:25, 14:6, 15:1)라는 이름을 거쳐서, 성령 안에서 존귀함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는--이다"(Revelation 1:8, 1:17, 21:6)라는 이름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명명이 전개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렌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명명의 사건이 존재론 탐구에 어떤 함의들을 지니는지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렌츠가 철저한 비판적 분석작업과 건설적 주석적 창조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위 "신-존재론"이라는 기획은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대하여 충분한 통합성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그렌츠의 "신-존재론"은 하나님의 자기명명에 출발점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존재론은 그렌츠 자신이 원래 의도하였던 "신학적 목표,"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는 존재론적 우선성을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에는 "인식론적 우선성"을 동시에 확보해주는 것에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그렌츠의 "신-존재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 속으로 담그는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브라켄의 입장과 유사한 것이다. 그렌츠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기명명이라는 사건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구성원은 상호명명하는 과정 속에 개입되어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이 세상으로 확대되어, 모든 창조물을 하나님의 자기명명의 역동적 사건 속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렌츠는 인식론적 측면을 충분하게 탐색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동방교회의 전통인 "부정의 신학(apophatic theology)"에 너무나 서슴없이 의존하고 있다. "부정의 신학은 계시에 개방적이며, 그리고 세상도 함께 포괄하는 타자성의 범주를 실재의 중심적 특징의 위치로 고양시킨다"라고 말하면서 부정의 신학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신학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그가 간주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다루는 해석방식은 자신의 기대에 결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즉, 그렌츠는 동방교회가 본질(ousia)과 작용(energeia)을 구별한 덕택에, 그리스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내적 존재, 즉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의 경륜에 드러난 하나님의 활동들, 즉 경륜적 삼위일체에 정확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렌츠의 "신-존재론"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틈을 부지불식중에 벌려놓고 말았다.
사실, 그렌츠의 황금실(golden thread) 분석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즉, 현대의 삼위일체 논의들에 대한 그렌츠의 분석은 존재론이라는 스킬라와 인식론이라는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이러한 결함은 위에서 언급한 일곱 입장들 모두에 해당이 되는데, 특히 불균형을 보이고 있는 세 입장들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입장들, 즉 상호대응, 동일, 종말론적 일치, 상호포월의 입장들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각각의 입장들은 존재론적 긴장, 혹은 인식론적 긴장, 혹은 양자 모두를 드러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긴장들은 존재론과 인식론 그 자체들에 의해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처음부터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점에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은 삼위일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실제로 각각의 입장들은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 긴장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비록 획일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비의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신비의 개념을 사용하지만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현대적 논의들은 신비의 개념을 부차적인 위치로 격하시켜서 단지 존재론과 인식론의 함수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풍성한 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먼저 다룰 것이 아니라, 신비의 개념을 먼저 다루는 순서상의 발상의 전환이 요청된다. 다시 말하면, 신비의 개념을 단지 인식론적 혹은 존재론적 긴장들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로서 배경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전면에 두어 부각시키는 것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신비의 개념이 나름대로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결정짓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논의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어떤 존재론과 인식론을 전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개념의 신비를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며 그 다음으로 여기에 적합한 존재론과 인식론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관해서이다.
V. 제안적 결론
신양성경에서 신비 혹은 비밀을 뜻하는 뮈스테리온(μυστ?ριον)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는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되며 28번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신비 혹은 비밀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1장 25-2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비밀(μυστ?ριον)을 온전히 알려주기 위한 일군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μυστ?ριον)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 자신의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천명하고 있는데, 즉 골로새의 성도들이 "원만한 이해의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μυστ?ριον)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 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을 읽음으로써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비밀(μυστ?ριον)을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비 혹은 비밀이라는 개념은 용이하게 계시(로마서 16장 25절, 에베소서 3장 3절, 골로새서 1장 26절)와 연관되며 경륜(oikonomia)(에베소서 1장 9-10절, 3장 2절, 3장 9절)과도 연결된다.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를 다루는 대부분의 현대적 논의들은 신비 혹은 비밀의 일차적인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 혹은 성부 하나님에게 두고 있는데, 이것은 신비 혹은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성서적 의미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보프와 피턴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그를 통한 우리의 하나님의 신비경험을 아주 강조하여 이것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수코키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삼중적인 경험, 즉 현존, 지혜, 권능으로서의 삼중적인 경험 그 자체를 신비로 간주하였다. 라쿠냐는 자신이 제안하는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을 그녀의 인격 개념, 즉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다함이 없는 신비(an ineffable and inexhaustible mystery)"로서의 인격 개념에 근거시키고 있고, 또한 이러한 인격 개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신비(the Absolute Mystery of God)"에 기반하고 있다. 이정용은 출애굽기 3장 1-15절의 주석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불가지하고 불가명한 신비(the unknowable and unnameable mystery)이 라고 강조하였다.
게다가, 라너는 성부 하나님의 불가해한 신비를 확고하게 견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절대적 근사치(the absolute proximity)로 간주하였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의 신비와 하나님의 신적 신비를 모두 인정하고 있지만, 후자가 더 우세하기 때문에 종국에는 신비를 불가지한 것(mystery as ignoramus)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젠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하였기에, 이러한 출발점으로 인하여 젠슨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이 신약에서 성부 하나님이라는 한 위격으로 전환되는 것을 최종의 신비 혹은 최심의 신비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학자들에 비하면, 몰트만과 판넨베르그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즉 십자가와 부활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은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이 둘의 입장은 나름대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신비의 개념을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그의 논의의 말미에서 다루었고, 판넨베르그는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신비의 개념을 삼위일체론과는 분리된 별도의 신론에서 다루었다.
지금까지 논의하였던 바들을 종합하여 볼 때에, 이 논문은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에 관한 현대신학적 논의를 한층 더 진전시키기 위하여 세 가지 방향성을 제안한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하심과 하나님이 세상과 맺으시는 심원한 관계성 양자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구별성과 일치성을 동시에 주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신학의 주된 전통과 일치하는 길이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사변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였던 개혁신학자들의 선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더 충분한 통합적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비의 개념을 인식론적 긴장 혹은 존재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미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전면에서 다루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신비 혹은 비밀이라는 개념의 성서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러한 성서적 개념은 신비의 개념을 하나님에게 혹은 성부 하나님에게 두는 신학적 입장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세째, 하나님의 신비의 개념이 그 나름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결정하여야 하며, 그 역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존재론적 차원들을 전제하는 본체론적 존재론(a substantialist ontology)과 그 변형된 존재론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신학방법을 확보할 수 있다. 더우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정적인 종류의 인식론(a static kind of epistemology)을 배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대면하면서 겪게 되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해할 수 있는 영성적 인식론(a spiritual epistemology)을 확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