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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오해(What Luter Got Wrong) -David C.Steinmetz

메르시어 2023. 5. 1. 11:14

루터의 오해(What Luter Got Wrong) -David C.Steinmetz

2013-08-24 15:53:55


[ 다음은 저자의 기고문(2005년 8월 23일 Christian Century)을 본인이 번역해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종교개혁자들은 토마스의 신학을 잘 알고 있었지만 루터는 그렇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루터의 선생들은 프란시스파 신학자인 윌리엄 오캄의 제자들이었다. 오캄주의자들은 분명히 펠라기안 노선에 기울어진 은혜의 신학을 가르쳤다.  펠라기안주의는 인간 구원에 은혜의 역할을 축소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조한 신학을 약칭한 것이다. 루터가 잘 알고 있는 오캄주의 신학자인 가브리엘 비엘도 인간적 낙관주의를 표명하며 인간은 은혜의 도움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비엘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타락하였음을 인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완전히 손상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은혜의 도움없이도  뛰어나게 영웅적인 도덕적 행동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만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런 장미빛 견해는 바울이나 어거스틴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루터가 구원에 대한 오캄주의자들의 견해를 모두 배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세기초의 유명한 로마 가톨릭 역사가인 조셉 로츠는 은혜에 대한 비엘의 신학은 결코 가톨릭적 신학이 아니란 점에서 루터와 동의하였고 그것을 루터가 배척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로츠는 루터가 비엘의 펠라기안적 성향에 대해 가톨릭이 가진 해결책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알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로츠는 주장하길, 만일 루터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공부했더라면 비엘을 반대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료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는 가톨릭이 이단으로 간주하는 일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만일 루터가 에르프르트나 비텐베르크에서 오캄을 공부하는 대신  콜로뉴에서 아퀴나스를 공부했더라면 자신의 신학적 위기를 극복하는 더 좋은 길을 찾았을 것이며 종교개혁이라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로츠의 논지는 매우 유력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다. 로츠의 논지가 가진 주된 난점은 16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오직 한가지 견해만 있었다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토마스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가 있었다.  도미닉파 신학자인 존 카프레오루스 (1445)는 아퀴나스를 전적으로 어거스틴적 신학자로 묘사하였다. 그는 독자들에게 아퀴나스를 읽다가 모호한 구절이 나타날 때 이를 이해하는 가장 단순한 규칙은 어거스틴의 정신에 가장 근접한 쪽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이 토마스의 의중을 밝히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도미닉파 신학자인 토마스 드 비오 카디날 카제탄(1534)은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란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카제탄에 따르면 아퀴나스는 다른 스콜라 사상가들보다 성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범주를 기독교적으로 적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카제탄은 쉽지 않은 이 일을 토마스가 해냈다고 칭송하였다. 카페레오루스가 토마스를 어거스틴의 층실한 제자로 이해한 반면에 카제탄은 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뛰어난 기독교적 해석자로 이해하였다.

 

비엘(1495)은 아퀴나스에 대한 세번째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오캄학파의 펠라기안적 성향과 전적으로 일치하였다. 루터가 아퀴나스 신학에 대한 비엘의 해설을 읽었을 때 그는 죄와 은혜에 관한 교리가 자신이 경멸하는 오캄주의의 가르침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신학자로 아퀴나스를 만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로츠는 상황을 오도하였다. 문제는 루터가 아퀴나스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알았는데 있다. 루터가 아는 아퀴나스는 죄와 은혜에 대한 오캄주의의 해석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캄주의를 강화하는 신학자였던 것이다.

 

 카제탄이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아퀴나스도 역시 루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루터는 기독교 신학은 아리르스토텔레스와 결별할 때만이 새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루터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는 그가 세상의 영원성과 인간 영혼의 유한성을 믿었다는 것(그는 그랬다)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용어가 신학적으로 사용되기에 부적당하는 점이다. (루터에게) 은혜는 습관이나 행위로 이해할 수 없는데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선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은 바울의 신학을 뒤엎는 것이다.

 

루터의 생각은 신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가운데 하나님을 논하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신앙와 불신앙속에서 죄인을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적절한 용어는 형이상학적이라기 보다는 관계적이다. 루터는 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할 수 없고 그를 떠나야만 한다고 외쳤다.

 

시편에 대한 초기의 강해에서 루터는 성경에 나오는 본질이란 말은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 사물을 지지하는 기반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서있는 기반에 의하여 규정된다. 인간이 누구인가는 그가 무엇을 신뢰하며 그가 위급한 상황에서 기꺼이 목숨을 거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철학자들의 용어는  인간을 본체와 본질이 아니라그들의 믿음과 희망으로 규정하는 성경의 의도를 닥치는대로 모호하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가시적이고 측정가능한 것에 기반한 철학적 묘사는 불가시적 관계에 기반한 성경적 인간론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다. 루터에게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만사가 그렇듯이 그가 소망하는 것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루터는 대답하길 인간은 아퀴나스가 말하듯이 개별적 몸을 가진 이성적 영혼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우상을 신뢰하는 피조물이라고 하였다. 이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용한 통찰을 제시하지 못한다.

 

개신교도들은 칸트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발견했지만 개신교 사상가들은 여전히 루터의 망령에 시달렸다. 그들에게 아퀴나스는 은혜를 거의 의존하지 않고 안간의 자유의지에 너무 경도된 펠라기안 신학자이거나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신적 계시는 별로 강조하지 않는 철학적 신학자였다. 비엘과 카제탄은 개신교도들의 상상력에서 아퀴나스에 대한 카프레오루스의 해석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예수회를 중심한 도미닉 교단밖의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 점증하는 아퀴나스의 명성도 (개신교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질상으로 개신교는 가톨릭 신학은 어거스틴에 층실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톨릭 신학자들이 그런 결핍을 구체화 시킨 신학자(아퀴나스)를 칭송하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떤 개신교 신학자는 아퀴나스는 오직 이성에 기초한 거대한 철학적 하부구조를 구축하고 그위에 신적계시에 기초한 얄팍한 상부구조를 추가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문제는 더 악화되었다.  칸트는 많은 개신교도를 위하여 형이상학적 추측을 종식시켰지만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는 칸트의 비판을 충분히 고려하여 새로운 종류의 자유주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19세기의 지유주의 개신교는 즉시 모든 그리스적인 것(형이상학적인 것)을 배제하고 하브리적인 것(윤리적인 것)을 포용하였다.

 

알버트 리츨로부터 아돌프 하르낙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에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윤리적 메시지였다. 예수는 새로운 윤리가 등장하는 하나님나라의 설교자였고 이것은 니케아나 칼게돈회의에서 알지 못하던 사실이었다. 고대의 종교회의는 그들의 형이상학적 범주로 인하여  그의 삶은 여전히 인간을  섬기라고 부르고 있는 "젊고 담대한 고대 갈릴리의 예언자에 대한 자유주의 개신교의 비젼을 놓쳤다.. 이런 특별한 신학적 여관에 아퀴나스를 위한 방이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교정한 20세기에 등장한 변증법적 신학도 아퀴나스에 대한 개신교의 접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칼 바르트, 루돌프 불투만, 프리드리히 고가텐 그리고 에밀 부르너는 영감에 대한 16세기 개혁자들의 가르침으로 회귀하였고 이른바 이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단순히 원상회복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스콜라 신학에 대한 개혁자들의 편견을 포기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바르트는 특별히 자연신학에 대한 아퀴나스의 주장을 적대하였다. 그는 칼빈은 자연신학을 반대하였다고(이것은 사실이다) 주장하고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자연적인 지식을 배척하였다(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바르트는 아퀴나스는 자연신학의 역할을 인정하였고(이것은 사실이다) 신학에서 자연신학을 과대평가하였다고(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장하였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대전 서문에서 자연신학의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하였다.

 

아퀴나스가 문제를 인식하였듯이 자연신학은 자연질서가 자연의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를 오직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으로 부터 도출할 여유와 지적인 능력을 모두 갖춘 훈련된 사람들만이 제대로 추구할 수 있다. 그럴 때 조차도 그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파편적이며 불가피하게 오류와 혼합된다. 더구나 이성은 자연으로부터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신비를 캐낼 수 없다. 실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없이 이성만으로는 결코 이성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 즉 하나님이 어떻게 완고하고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는지를 알 수 없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아퀴나스에 대한 전통적 개신교의 고장관념이 가장자리에서 부터 무너지는 듯한 징후가 있었다. 퍼 에릭 페르슨은 1957년에 "거룩한 교리 : 아퀴나스의 이성과 계시'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아퀴나스를 종교철학자가 아닌 신학자로 그리고  아퀴나스의 견해를 이성과 계시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의 중심적인 광범위한 신학적 이슈들을 호의적으로 다룬 유명한 책이다. 페르슨은 비엘과 카제탄을 제쳐놓고 직접 아퀴나스를 연구하였다.

 

그 때 이후로 다른 개신교 사상가들도 아퀴나스의 원전을 직접 연구하는 페르슨의 방법에 동조하였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인의 특징을 형성하는 일에 아퀴나스가 기본적이고 신학적인 덕목들이 하는 역할이 대해 쓴 것을 이용하였다. 계몽주의에 대한 칸트적 편견에서 자유롭게 된 다른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아퀴나스의 예민하고 미묘한 설명이 참신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로마서와 욥기에 대한 아퀴나스의 성경주석도 개신교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들은 그의 주석이 성경의 구원 드라마에 대한 지혜와 통찰을 제공하는 자료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요약하면 어거스틴적 신학자인 아퀴나스가 전통적인 개신교의 편견을 뒤로하고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는 루터가 결코 알지못했던 아퀴나스 곧 카프레오루스가 말한 아퀴나스를  재발견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그래왔듯이 아퀴나스가 개신교의 중심적 신학자가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스스로에게 부과하였던 신학적 빈곤을 끝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대화해야 할 신학자들의 반열에 아퀴나스를 포함시켰다. 이것은 진작 이루어 졌어야 했던 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