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언약
하나님나라와 언약
2011-12-03 21:07:51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 아브라함은 성경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경륜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를 놓는 하나님나라 역사의 출발이었는데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자손과 가나안 땅의 약속을 하셨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나라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면서 고대 근동의 종주권 조약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을 맹세하셨다. 사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인데 이 일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거신 셈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을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언약의 징표로서 할례를 명하셨다. 언약을 지키라고 명하시면서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피를 흘리는 할례를 요구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히 언약의 상대방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생명을 거신 것 처럼 아브라함과 그 후손 곧 이스라엘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약속을 수납하라는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건 순종과 믿음을 통하며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이지만 그 약속의 성취는 인간편의 순종과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위대한 진리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을 통하여 계시된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고대 근동의 종주권 조약이 그렇듯이 대등한 상대의 언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인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창조시에 부터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아담에게 가르치시려고 했던 진리와 동일하다. 하나님은 아담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그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그런 권세를 실제로 누리고 행사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주신 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시작하셨는데 하나님이 결국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신 진리는 창조시에 아담에게 가르치시려고 했던 바로 그 진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나라를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생명을 건 순종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순종에 좌우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지만 인간 없이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시길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시되 특별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순종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약속하신 것처럼 아브라함도 동일하게 자신의 생명을 거는 순종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에서 잘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얻은 이삭은 단순한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이며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자신의 모든 소망이 다 걸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삭을 하나님이 번제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의도 이상인 것이다. 그 진정한 의도는 하나님이 생명을 걸고 하신 언약에 아브라함도 생명을 걸고 참여하라는 언약적 요구였던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비로서 성립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한 직후에 하나님은 자신이 이미 하신 약속을 다시 반복하시면 맹세하신 것이다. 이렇게 그 언약은 생명을 건 피의 언약이었으며 죽음보다 더 강한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언약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였으니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란 하나님과 인간이 생명을 걸고 참여한 일생일대의 과업이며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거셨고 인간에게도 모든 것을 걸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시작기에 주어진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나라와 언약의 관계를 선명하게 계시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나라가 하나님과 인간이 생명을 건 피의 언약을 통하여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 언약은 본격적인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태동기에 나타난 예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예비적이지만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언약의 본질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이 하나님나라의 예비적인 언약이었다면 본격적인 언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언약일 것이다. 그것이 새 언약인 이유는 옛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과 다른 언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비적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서의 본격적 언약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자신이 생명을 건 피의 서약을 하셨으며 아브라함에도 동일하게 생명을 건 피의 서약을 요구하셨다. 그렇다면 예비적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이 그러하였듯이 본격적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 언약도 동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사건은 분명히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햇불을 지나가게 하신면서 맹세를 하신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들어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 것이니 이것은 이미 오래전 아브라함 언약의 충만한 성취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셨듯이 이제는 이제 만민에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나라의 언약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아브라함 언약과 동일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맹세하신 피의 서약인 것이며 예수의 부활사건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나팔 소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셨듯이 인간편에서 하나님의 피의 서약에 생명을 걸고 참여하라는 심각한 요구인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생명을 건 언약적 행동이며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생명을 걸고 이 언약에 참여하길 요구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완전히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라를 홀로 이루시려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에 생명걸고 참여한 자들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시길 기뻐하시는 것이다.
신약의 세례의 의미가 구약의 할례에 해당한다면 세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새언약에 참여하는 피의 서약인 셈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바로 아브라함이 그렜듯이자신의 생명을 건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순종을 요구하셨는데 이 순종의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바로 이런 순종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런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란 바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참여하는 언약백성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약 시대에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구약시대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적 교리를 억지로 구약에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비적 예언이 나타난 것이 허다하지만 구약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감추어진 계시였으며 그들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들의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으며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다. 구약 백성들은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하여 언약백성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믿음의 성격을 오해하는데 기인한다고 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과 매우 다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공히 언약적 성격인 것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을 맹세하는 피의 서약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믿음은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며 믿음의 결과인 구원은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라면 이 언약의 지향점은 언제나 하나님나라의 도래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성취였던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래하였다. 복음은 바로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로 들어오라는 엄숙한 초대인 것이며 이 초대에 응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언약 그리고 언약법
2013-07-20 16:57:36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대주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는 당연히 성경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나아가 우리의 구원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정당한 이해도 어려운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란 무엇인가? 우린 하나님나라란 말을 사용할 때 하나님에 방점을 찍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 혹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소유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란 그렇지 않다. 이 주제를 생각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최초의 계시이면서 근본계시인 창세기 1-1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최초의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무이한 피조물이다. 최초의 계시는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려고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어떻게 피조세계를 다스려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계시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최초의 계시가 말하는 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피조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다. 이 창조목적을 떠나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의 계시는 모두 이 근본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란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나라, 즉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시고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 이루고 다스리는 나라인 셈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 역사를 떠난 하나님나라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제멋대로 다스려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통치의 명령이후에 즉시 선악과 금령이 주어진 것이다.
선악과 사건은 죄의 기원을 말하여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순종이었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하면 불순종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불순종하였다고 해서 다른 피조물과 동일한 지위로 떨어져버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여전히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능력을 구유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지 않고 자기 멋대로 다스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인간 역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나라를 떠난 사건이며 결국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죽음이 선고된 것이니 죽음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을 좌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한 심판 사건이 아니라 노아의 순종을 통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적 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 역사는 바로 성경의 이 최초 계시에서 출발하고 진행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 곧 구약은 창조목적에 대한 역사적 계시인 것이며 동시에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나라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 개념이다. 언약 개념은 하나님나라 주제와 더불어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그것은 구약에서는 대표적으로 시내산 언약으로 나타나며 신약에서는 새언약으로 나타난다. 사실 성경을 부르는 구약과 신약이란 말로 옛언약, 새 언약의 한자말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견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구약 시대에 이런 관계는 이스라엘 역사에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인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이래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백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의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 언약이 란 개념은 이미 최초계시에 나타난 바 인간 존재의 근본의 역사적 반영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닮을 꼴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 존재는 전적으로 하나님 존재에 의존하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은 미치 천륜으로 연결된 부모와 자식처럼 뗄랴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언약 개념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가진 긴밀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의미인 것이다.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심을 기억하게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나라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유일한 언약백성이기 때문이다. 이미 밝혔듯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이루는,,, 혹은 순종하는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유일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떠나서 하나님나라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떠나서 창조목적을 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핵심 사상인 언약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계시의 역사적 반영인 것이다. 그 다음에 생각할 점은 구약 성경에 충만한 율법의 의미이다.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이라고 오해할 만큼 구약은 십계명을 비롯한 수많은 율법으로 가득하다. 신학자들은 이 율법은 언약법이라고 정당하게 설명한다. 즉 율법은 단순히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즉 언약법은 언약관계로 부터 나왔으므로 언약법을 준수하는 동기는 언약에 대한 충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법 준수여부에 따라서 언약관계를 유지 혹은 발전되기도 하도 퇴보 혹은 파기되기도 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이스라엘 역사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율법을 언약으로 부터 나온 언약법에 국한 시키는 것은 율법의 의미를 제한시킬 우려가 있다. 우리는 다시 최초의 계시로 돌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언약이란 개념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관계의 역사적 반영이었듯이 율법은 선악과 금령의 계시에 대한 역사적 반영인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금령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은 그 금령이 하나님과 인간간에 이미 존재하는 특별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은 그 관계를 규제하는 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을 언약법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다스림의 차원으로 확대하여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단순히 언약관계의 유지를 위해 주신 것이라기 보다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순종하여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나라를 역사가운데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계시에 나타난 바, 창조목적이 역사 가운데 정확하게 반영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의 실패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역사의 실패는 하나님의 무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말하고 있다. 창조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에(이 말은 인간이 없이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통하여 창조목적을 이루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이다.이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경륜이다. )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인내하며 순종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역사가 보존되는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는 것이었듯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도래할 역사의 종말도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창조목적이 완성되는 창조적 종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신약의 역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의 영혼구원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그 분의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 모두가 다 창조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을 이어서 오신 성령 역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어받아 창조목적을 이루시 위하여 오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란 바로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이니 성경은 창조목적을 떠난 하나님나라를 말하지 않는다.
아담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관건은 언제나 인간의 순종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바로 인간의 순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범죄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적 존재로서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범죄후에 변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자기의 뜻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죄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경륜의 반영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인간들에게 부어진 오순절 사건 역시 그 의미는 동일하다. 이미 예레미야의 새언약 예언에서 계시되었듯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관건은 불순종하는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수술하여 근본적으로 고칠 것인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표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며 만유의 주로 세우신 사건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으며 인간의 불순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마음수술을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인간창조 이것이 바로 예수님 사역의 중심이었으니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 비역사적인 영혼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순종으로 역사 가운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였음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