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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권연경

메르시어 2023. 4. 30. 10:44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권연경

2013-07-08 13:50:37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권연경 교수  2013. 7. 6 하나인 교회

 

  롬1:1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는 복음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점에 주목하라. 바울은 고전1:18에서도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사건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이 능력이라는 것이 바울의 가장 중요한 확신이었다. 구원은 과거라기보다는 미래적 개념이다. 구원이란 완성된 하나님나라에서 부활의 몸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인데 복음은 바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은 빌3장에서 이미 잡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간다고 하였다. 성경은 구원을 미래의 소망의 관점에서 이야기 한다. 구원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관건은 어떻게 복음이 우리를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믿음이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 믿음을 수동적, 무행위적 개념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믿음이나 은혜를 이야기 할 때 행위를 배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이방인 할례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바울은 창세기15:6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시점이 무할례시임을 지적하여 할례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대조시키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때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란 율법 전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할례나 정결법, 음식법 등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는 하나님을 상황과 관계없이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분으로 믿은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절대적 신뢰,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바울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에게도 의롭다함을 주신다고 말한다. 예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신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실체는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며 그런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에 관한 중요한 논점이다. 롬10:9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주님으로 선포된 것이며 부활 생명의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도 예수 부활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과거를 쓸어버리고 과거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의 마지막에 구원 곧 영생이 주어진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이것을 믿는 것이다. 결국 믿음은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후에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셨는데 아들을 보내신 것이나 아들의 영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한 행동의 두 동작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 개로 펼치신 것이다. 바울은 믿음, 십자가를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결국 성령을 주신 것이 구원의 열쇠이다. 구원은 미래적 전망이고 성령은 구원의 소망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신다. 바울은 갈5:5에서 성령과 더불어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갈2:16에 보면 율법의 행위와 믿음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믿음으로’를 ‘행위 없이’ 로 이해하면 안 된다. 갈2:15절과 연결해보면 율법의 행위란 유대인과 관련된 것 즉 할례나 음식법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은 소위 율법주의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유대인 이방인의 맥락에서 바울이 문제를 삼았던 율법의 행위는 오늘날 학벌, 외모, 재물 등 경쟁적 가치에 해당할 것이다. 오늘날 이런 비본질적인 가치로 자신을 남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이 1세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와 유사할 것이다.  은혜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은혜이다. 은혜는 세상 가치로부터 자유를 준다.  예수님은 믿는 자를 아무 차별 없이 받아주신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사심 없이 상대를 바라보게 되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 가치기준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죄의 핵심은 자아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아는 밑이 빠진 독이요 욕망 덩어리이다. 자아라는 독을 깨야 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말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에 맺히는 열매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경쟁적 가치를 버려야 한다.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것은 성령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대책이 없다. 이제 우리는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성령의 가치를 좇아야 한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 갈6;7은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복음은 이 원리를 거스른 것이 아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의 마지막이 영생이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는 조건이 없으므로 자격 없는 자에게도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면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존재를 바꾸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꾼다. 그러므로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말하고(롬5:21) 믿음으로 은혜 속으로 들어간다고(롬5:2) 그리고 은혜 아래에 있다(롬6:14)고 말한다. 은혜의 공간에서 은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받았다면 변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은혜가 우리를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복음은 행위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행위를 하여야 한다.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기독교 소망은 영지주의적이 아니다. 영혼과 몸이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개혁의 추진력은 평신도에게서 나와야 한다. 목회자들에게 기대할 수 없다, 여러분이 한국 교회를 개혁하는 그루터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