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송제근

메르시어 2023. 4. 30. 10:43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송제근

2013-07-03 21:56:31


서문

   신학은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대화로 이루어지지만 그 대화의 실마리는 늘 본문에서 풀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대한 왜곡되고 피상적인 이해는 신학의 다른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현실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목회 현실에서는 큰 혼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경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관건은 언약(berith)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언약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혀 새로운 이해를 가지는 것이다. 언약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것이 하나님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명확히 알 때 구약의 근본인 오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경 전체와 그 각 부분이 명백하게 이해될 때 구약 전체를 서로 유기적인 역사로 이해하기가 쉬워지고 나아가 오래된 문제인 구약과 신약의 관계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1장 오경의 신학과 메시지

 

    오경 전체의 메시지는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가 적극적으로 전개되는 역사에 대한 것이다.  오경의 각 책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형성이다. 오경 연구에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구속의 관점이 오경에 있기는 하지만 오경의 근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고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신명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땅이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오경의 신학은 하나님나라가 씨와 땅과 뜻이라는 다양한  측면에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역사속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오경의 이런 신학적 기조를 알지 못하면 오경 각 권속에 있는 다양한 내용과 장르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구체적인 제도 혹은 수단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그러므로 오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상에서 구체적으로 이루는 제도인 언약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오경을 비롯한 구약 전체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나타나는 언약은 인격 당사자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사이에 공적인 관계가 법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적인 관계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오경에는 세가지 언약이 나오는데 창세기의 족장 언약, 출-레-민의 시내산 언약 그리고 신명기의 모압언약이다. 족장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을 준비하는 차원의 예비적 언약이고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을 나타내며 모압언약은 하나님나라의 땅이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세가지 언약으로 하나님나라는 준비되고 출발하여 완성에 이르게 된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언약과 율법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율법은 언약이라는 공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난 뒤에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은 율법의 상위개념이고 율법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다. 즉 구약의 법은 그 자체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체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울법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면 언약법인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택하여 구속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삼으신 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선택하여 가장 존귀한 자로 삼으신 뒤 그들이 아무렇게나 살게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존귀한 자 답게 살도록 주신 근본법이 십계명(출20장) 이고 구체적인 법이 시내산 언약법(출21-23장)인 것이다. 이어서 출애굽기 25장에서 민수기10장 까지 나타나는 율법은 시내산 언약법이 인간들의 실수로 깨어졌을 경우 그것을 회복할 방편으로 주신 제사법이다. 그리고 신명기에  나타나는 모압언약법은 시내산 언약법을 대체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오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있는 위치인 광야-모압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상 세가지 구조로 서술되었다. 창세기는 과거의 역사를, 출-레-민은 현재의 역사 그리고 신명기는 미래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창세기는 창조라는 주제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형성되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와 그 형성과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 이전인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죄로 얼룩지고 파괴되어 하나님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주제도 출애굽이라는 사건이라기 보다는 출애굽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씨가 공적으로 형성되는 시내산 언약이다. 성막에 대한 규례가 시내산 언약체결 직후에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왜냐하면 언약관계가 형성된 후에 언약의 당사자가 함께 사는 장소가 필요한데 이 장소가 바로 성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더 정확한 표현은 증거막이다. 왜냐하면 성막은 언약을 증거하는 장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막안의 법궤도 증거궤, 증거궤안에 있는 법판도 증거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용례들은 성막이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장소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수기는 오경의 근본 주제인 하나님나라 씨의 완성을 나타낸다. 민수기는 하나님나라의 씨는 숫자가 많아졌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현재적인 순종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신명기에 나타나는 모압언약은 출애굽 2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하여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모압에서는 모세가 언약의 법적인 요소를 준비하고 세겜에서는 여호수아가 언약의 제의적 요소를 완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압언약의 이런 이중적 구조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압 언약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압-세겜언약인 셈이다.

 

 

2장 구약의 근원으로서의 오경

 

   성경의 두 계시인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성경신학의 중대한 과제이다. 오경에 율법이 집중적으로 모여있고 이 울법이 구약의 나머지 책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는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율법과 복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율법을 말하는 구약은 소홀히 하고 복음을 말하는 신약에 집중하는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종교개혁이후 독일신학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이와는 반대로 구약과 신약을 동일한 차원에서 바라보는 신학적 입장도 있는데 구약에 나타난 제도적 영성에 관심을 가지는 로마카토릭이나 구약적 제도를 신약적 삶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청교도가 그런 경우이다.  이런 양 극단의 태도는 모두 구약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동시대의 르네상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특히 성경의 문헌학적 연구는 르네상스의 그리스적 고전해독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후 400년 동안 구약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구문학비평 혹은 저등비평과 고등비평의 해석학적 방법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왜곡된 해석학적 태도는 구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지난 400년 동안 성경학이 이런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데는 개신교 자체의 역사적 경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제도적인 로마교에 대항하였고 그 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체제에 치중하였고 이런 태도는 눈에 보이는 제도로 나타난 구약에 대한 편견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구약 해석의 근본적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에 대한 오해가 생기고 이것은 신약은 물론 신학 전체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오경에 나타난 역사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역사나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역사가 아니라 이 땅에 구체적으로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이다. 그리고 오경은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역사적인 수단인 언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경에는 세가지 언약인 족장언약, 시내산 언약 그리고 모압언약이 나타나는데 이 세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오경과 구약의 역사서들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사서 1부에 해당하는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까지의 약 800년의 기록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관건은 언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한가에 달려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보여준다. 이 책들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나라 역사의 진행원리는 언약 상대방을 향한 언약적 사랑과 신실함이었다. 역사서 2부에 해당하는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아, 에스더가 기록된 역사적 상황은 역사서 1부의 상황과 전혀 다르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이 지나가고 언약적 자비가 시작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때 대두된 질문이 옛날처럼 독립된 왕정체제로 돌아갈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였다. 역사서 2부의 책들은 바로 이 문제를 주제로 기록된 것인데 역대기는 과거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정리함으로써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현재의 역사진행을 기록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결국 역사서 2부의 책들도 모두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진행되는 구체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역사서들은 모두 오경에 나타나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생각할 점은 오경과 구약의 나머지 책들인 시가서 그리고 예언서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시편은 오랫동안 개인시로 읽혀졌지만 시편의 시인들이 사실은 공동체의 대표의 위치를 가진 사람인 것이 밝혀졌고 그래서 시편의 시들은 개인시가 아니라 공동체적 시인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편의 주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적 행위에 대한 다양한 언약적 반응인 것이다. 그것은 찬양, 감사, 고백, 탄원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이스라엘의 언약적 삶의 모습이었다. 지혜서(잠언, 욥기, 전도서)는 구약에서 오랫동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책들이었다. 폰 라드나 루터 등은 지혜서를 정경에서 이차적인 자료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지혜서와 오경과의 관계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지혜서에는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두려워함'이란 주제가 등장하는데 이 주제의 출처는 바로 오경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를 경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데 있다는 지혜서의 주제가 된 것이다. 예언서들은 예언자들의 활동시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정죄, 심판 소망이라는 세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모든 예언서에 예외없이 나타나는 이 세 요소는 모두 오경의 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죄란 언약법을 어김에 대한 정죄이고 예언자들이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는 언약적 저주가 적용된 것이며 소망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의 선포였다. 결국 예언서의 세 요소는 모두 언약을 중심으로한 메시지로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예언서는 모두 오경의 언약적 기초를 역사의 흐름에 적용하고 발전시킨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3장 창세기의 신학과 메시지

 

      창세기는 세상과 인류의 역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의 시작을 말할 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으며 메시야의 재림을 다루는 요한계시록과도 연결이 된다. 창세기는 이렇게 신약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므로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거쳐서 신명기에서 종합됨으로써 창세기는 그 자체로 독립된 책이 아니라 모세 오경의 서론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는 책의 제목과 달리 창조 자체에 대한 기록보다는 인간의 타락과 타락이후의 구속 역사에 집중되고 있다. 11장까지는 홍수와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나라를 악에서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소극적 사역방식이 나타난다면 12장 이후는 인류를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새로운 조처와 방법들이 나타난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더이상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며 이런 의미에서 창조와 구속은 별개의 사역이 아니다. 후일에 시내산 언약에서 창조 후의 안식이 모압언약에서는 구속 후의 안식으로 동일시되어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계시함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엘로힘(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여호와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엘로힘(하나님)이시란 의미이다. 하나님은 명확한 질서를 가지고 창조사역을 하셨고 인간은 특별하게도 하나님의 종류를 따라서,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다.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따라서 만들어졌다는 인간 존재의 탁월성에 대한 계시는 고대근동의 어떤 창조설화에서도 그 유례를 칮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였지만 하늘에 대한 묘사는 극히 제한적이고 주로 땅에 대한 묘사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창세기의 기록 목적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땅을 중심으로한 창조사역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간 창조의 중요성 때문에 창세기는 인간을 중심으로한 역사의 드라마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창조에 있어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본문에 대한 주석적 결론은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중요한 면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옳다면 인간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한 내용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인간 존재의 복수성이 하나님의 복수성의 반향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복수성과 하나됨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측면인 것 같이 인간 존재 역시 근본적으로 복수성을 가지며 그런 인간이 다시 하나됨을 이룬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러한 성경적 인간관은 서구를 지배한 개인 중심의 지극히 이기적이고 독재적인 안간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선악과의 존재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불완전성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인격과 자유의 완전성에 대한 증거이다.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자유를 가진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범죄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창세기는 11장에 이르기까지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타락은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수수방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지키시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역사가 진행될수록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는 분명하게 구분되어 갔다. 특이한 것은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대조되어 기록되고 있는데 가인계의 후손들은 생존연대가 나타나지 않지만 셋의 계보에서는 생존 연대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나타난다. 이는 가인의 계보는 그 삶이 무의미함을 암시한다.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세상의 문화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였지만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생애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노아의 홍수 사건은 타락한 세대를 향한 단호한 심판과 동시에 노아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보전이라는 하나님의 이중적 사역이었다. 홍수후에 나타난 바벨탑 사건은 인간들이 연합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여 인간의 자부심을 만족시키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홍수와 바벨탐 사건이후에 드디어 아브라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거의 무너져 가는듯한 하나님나라가 극적인 새출발을 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역사는 단순히 한 개인이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는 개인 역사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전혀 새로운 경륜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준비되고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언약맺음 그리고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받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엄청난 복이 약속되었는데 그 복은 아브라함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나아가 천한 만민에게 주어질 복이었다. 그러므로 후대에 사는 우리가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그 복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궁극적인 약속은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이 약속은 이미 가나안에 살고 있는 족속들의 제거를 전제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가나안 족속들을  쫒아 내시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가나안 땅의 약속은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가나안 족속에게는 심판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의 심판은 한 진리의 양면으로 언제나 구약 역사에 나타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서 하나님편에서의 서약행위를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할례를 명하심으로써 아브라함도 서약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대대로 지켜야 할 할례는 하나님편에서의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언약 준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부르는데 이 언약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을 본격적인 언약의 기초가 된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약속에서 출발하지만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할례가 요구되는 일종의 조건성이 부가되어 있다,이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이스라엘의 조건적인 반응이라는 구조적인 동일성을 가진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서 시작하여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으로 가라'는 명령으로 요약된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어갈 약속의 씨였다. 약속의 씨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였다.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은 사라가 죽었을 때 가나안 땅에 매장지를 돈을 주고 사는 행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나라 역사는 수동적이다. 장자 축복사건에서 나타나는 이삭의 수동성은 아브라함의 능동성과 대조된다. 야곱의 경우는 처음부터 아버지 이삭과 달랐다. 이삭과 달리 야곱은 인간적 능동성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치른 댓가는 지루하고도 비참한 것이었다. 결국 야곱의 모든 생애는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주제로 요약된다. 그러나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준비됨으로써 하나님나라 전체의 중요한 골격이 형성된다는 것이 야곱을 통한 하나님나라 역사의 의미이다. 요셉의 생애의 의미는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에 정착하여 민족으로 성장하는 것을 준비하는 사명을 다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동체 내부와 외부에서 오는 고난 그리고 자신의 작은 의를 주장하는데서 오는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었다. 요셉이 이런 고난들을 모두 통과하였을 때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 하나님나라의 일에 크게 사용하신 것이다. 요셉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70명의 식솔이 무수한 하나님나라의 씨들로 번성하게 되었다. 장차 그들이 출애굽하여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모압언약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땅이 완성될 것이다. 요셉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자기의 유골을 가지고 가라고 명함으로써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4장 창세기의 구조와 신학

 

 

  오경은 다섯권으로 된 하나의 책이라는 독특한 성격때문에 오경연구에는 하나인 다섯권의 책의 신학적 통일성과 다양성이 근본적인 주제가 된다. 오경의 신학은 궁극적 목적으로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합법적 역사적 방법으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다. 목적인 하나님나라와 수단인 언약은 다섯권의 책에 다양하게 분산되어 존재한다. 창세기에서는 족장언약 혹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의 준비가 완료되며 출-레-민에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되며 신명기에서는 모압/세겜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땅이 완성된다. 오경의 서론격인 창세기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시작되는가를 나타낸다. 창세기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구조는 창세기에서 10회나 사용된 톨레도트(toledoth)구조이다. 창조로 부터 시작되어 아담, 노아, 노아의 아들들, 셈, 데라, 이스마엘, 이삭, 에서, 야곱으로 이어지는 10가지 톨레도트는 출애굽을 거쳐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는 모압광야에 선 이스라엘의 근본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진다.  이 톨레도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출애굽하면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언약의 여호와이심을 알게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진행시키시는 분이심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창세기 1-11장의 원시역사는 교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12장-50장의 족장들의 역사는 동심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대적 구조를 가진 원시역사는 그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소극적, 부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반복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동심원적으로 나열된 족장들의 사이클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역사개입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전개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동심원적 구조는 그 중심에 핵심적 메시지가 있는데 아브라함 사이클의 중심에 아브라함 언약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창세기 15장과 17장은 그 시간적 간격때문에 하나의 사건임을 자각하지 못하였는데 이런 동심원적 구조를 통하여 이 사건이 아브라함 사이클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임을 밝혀진 것이다. 창세기는 1-11장의 원시역사와 12-50장의 족장 역사로 나누어진다. 원시역사가 대부분 실패로 이어진 반면에 족장 역사는 거의 성공과 성취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이 시공속에 하나님나라를 진행시키시는 계획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나라 진행의 역사초월적인 요소로서 우주와 역사는 인간들의 무의미한 행동의 연속으로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르는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섭리속에 진행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경륜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신학과 주석이 역사를 모두 인간의 행동과 책임으로만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하나님을 역사밖으로 밀어내려는 전통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경륜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원시역사에서 나타나는 소극적, 수동적, 부정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진행시키시는 1 경륜이고 다른 하나는 족장역사에서 나타나는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진행시키시는 2 경륜이다. 2경륜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이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시는 방식을 도입하셨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역사 개입의 의사표현이다. 그러면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 언약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현재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씨가 준비완료되었으며 사라와 자신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땅이 준비완료돤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두가지 위대한 행동은 모두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한 언약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모압 광야에 선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경륜이 지금 출애굽 세대에 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것이다.

 

 

5장 출애굽기의 신학과 메시지

 

    오경은 다섯권이 하나로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현현하는 시작과 전개 그리고 예상되는 발전과 그 결과까지를 모두 포괄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경은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모든 기초를 마련하고 그 이후에 그 나라의 역사를 평가하고 결론지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나타날 정경들의 의미도 결정짓는다. 오경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나라는 언약을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마련된 하나님나라의 기초는  출-레-민에서 실현되며 신명기에서 완성된다. 하나님나라라는 긍극적인 목적(ultimate purpose)은 언약(berith)이라는 합당한 역사적인 수단(propoer historical method)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경에는 서로 긴밀한 상호관계를가진 세가지 언약이 있는데 창세기에는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족장언약이, 출-레-민에는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을 나타내는 시내산 언약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명기에는 하나님나라의 땅의 완성을 나타내는 모압/세겜언약이 그것이다.

 

  이런 전체적인 윤곽을가지고 출애굽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창세기에서 이미 준비완료된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중에서 씨가 완성을 향한 실제적인 진행을 시작하는 것이 출애굽기이다. 창세기에서 완전수 70명으로 준비된 하나님나라의 씨가 애굽에 정착하였고 출애굽기는 이 완전수의 모목이 애굽에서 큰 나무로 성장한 후에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법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씨로 인정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주목할 것은 준비된 씨기 충만한 숫자로 놀랍게 번성하여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지만 그 씨가 숫자가 많아진다고 하나님나라의 씨가 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먼저 그 씨는 감옥과 같은 애굽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공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씨로 인정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이란 주제는 출애굽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레위기 민수기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레위기는 출애굽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나라의 씨로서 언약의 증거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언약적 삶을 규명하고 있다. 언약의 증거만 안에서 행해지는 제사행위는 언약관계의 회복, 유지, 발전을 위한 제사행위였으며 증거막 주의로 배치된 이스라엘 각 지파의 모습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삶을 나태낸다.  또 민수기는 그렇게 준비된 언약공동체가 진영을 이루어 일사분란하게 궁극적은 목표인 하나님나라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민수기에서 일어난 정탐꾼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궁극적인 목적 자체를 포기한 사건이었고 이것은 그 시대의 씨의 전멸을 초래할 위기의 시간이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나라의 땅을 포기하는 하나님나라의 씨는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하나님나라의 섬뜻한 진리를 보여준다.

 

  출애굽기의 주제는 책 제목처럼 출애굽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즉 하나님나라의 씨가 공적으로 형성되는 사건이 출애굽기의 핵심적인 내용이고 다른 것들은 이 주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신학의 두가지  중심주제인 하나님나라와 언약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쟁개념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주제는 궁극적인 목적과 합당한 역사적 수단이라는 상관관계를 가진다. 보통 하나님나라를 주제로 삼는 경우 그것을 추상적으로 다루기 쉽고 역사의 실제속에서 어떻게 현실화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의 중심주제는 언제나 언약이라는 역사적인 수단을 통하여 실현되어 왔다. 이 사실이 특히 출애굽기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17세기 이후의 정통신학에서 나타난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이나 삼위 하나님간의 약정 혹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규례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고대근동적 상황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뿌리를 박은 것이 아니었다.  정통신학의 이러한 언약 개념은 하나님나라와 언약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한 이유중의 하나였다. 오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공적인 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것을 가리킨다. 이 언약에서 맺는 공적인 관계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상호관계이다. 이 공적인 관계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는 모든 내용을 다 포괄한다.

 

  하나님나라의 요소중에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것은 하나님나라의 씨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씨가 언악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야 한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식솔 70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표현한다.(출1:7) 그러나 이렇게 준비된 하나님나라의 씨가 애굽의 노에상태로 부터 해방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바로의 종으로 살면서 하나님나라의 씨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는 주장은 족장언약을 통해서 형성된 법적이고 역사적인 권리였다.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로운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자의 오해와 같이 탈출과 해방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 하지만 최종목적은 그 공동체 자체가 아니라 '더불어 사시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를 긍극적으로 지향한다. 그러므로 탈출과 해방은 자유를 얻는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공적인 관계속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언약의 축제는 시작되었다.(출19장) 신랑되신 하나님은 아주 어린 신부인 이스라엘을 이미 시내산에세 기다라고 있었다. 어린 신부인 이스라엘은 중매자 인 모세의 인도하에 우여곡절끝에 축제의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존귀하고 보배로은 백성이란 타이틀을 얻기 원하는지  또 그런 백성다운 권위있고 차원높은 삶을 살 것인지를 물어보셨다.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응답하였고 드디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적인 대면이 이어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낮추어 보여주시는 최초의 역사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고 이스라엘은 위대하신 여호와를 직접 대면하는 최고의 긴장되고 두려운 순간울 경험하였다. 이 공적인 만남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원리인 십계명과 구체적인 법인 시내산 언약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 두가지 법적 문서가 하나가 되어 소위 언약의 책(seper ha berith)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모든 법적인 요소들이 주어졌으므로 언약 체결 예식을 치루는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졌다. 이 제사는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양 당사자 모두의 서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번제는 언약의 양 당사자의 서로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그리고 화목제는 양 당사자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때 제물에서 나온 피를 언약의 양 당사자에게 뿌리는 예식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언약을 생명을 건 심각한 언약임을 의미한다. 언약체결 예식의 앞 뒤로 언약의 책을 낭독한 것은 언약에서 법적인 요소가 매우 중요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언약체결의 공식적 절차가 끝난 후에 마지막으로 언약 체결을 축하하는 피로연이 베풀어진다.

 

  출애굽의 사건은 출애굽기의 주제가 아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출애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기 위한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시내산 언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두려우신 임재에 주목하여 이를 하나님의 나타남 즉 神顯(theo-phany)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맺은 언약관계속에서 이해한다면 신현은 독립주제가 아니라 다른 하나의 주제인 이스라엘의 나타남, 즉 人顯(anthro-phany)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 나타남은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만남(official meeting between the two covenant partners)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관련하여 성경학의 난제가 있는데 예를 들면 신약의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긴장관계,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속에 나타난 복음과 율법의 이원론, 로마교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잘못된 일원론, 그리고 신구약간의 피상적인 일원론과 이원론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율법과 언약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면 완벽히 해결할 수 있다. 모든 관계의 법들은 안격 당사자간의 공적인 관계에서 생겨난다. 즉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법은 그 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최종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게를 위하여 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는 힘은 법 자체에나 법을 지키는 댓가나 법을 어기는 형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 당사자가 은혜와 진실함(chesed we-emet)으로 맺은 언약(berith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segullah)로 삼으셨고 이스라엘은 이 관계의 깊이를 깨닫고 그 은혜와 사랑(chesed)때문에 언약관계의 법에 진실되게(emet)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도 중요하다. 이 관계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규범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존귀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를 향하여 자비를 배풀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존귀한 백성속의 하나로 인정하셨다면 다른 이스라엘 사람도 역시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도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이신지 말과 행동으로 계시하셨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계시(self-revelation)인 '여호와'는 구약 성경 전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자계시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자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자체와 근본적으로 관련된 표현임이 분명하다. '여호와'라는 자계시는 시내산 언약전에 모세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족장들에게 주어진 자계시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에 비하여 철학적이며 원리적이고 동시에 철저히 역사적인 근본적 자계시이다. 이제 언약을 맺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에게 존재의 근원이시며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원동력이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여호와' 란 하나님의 새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또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행하여 갖는 불타는 열심을 가지셨음을 나타낸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행동과 말로 계시하셨지만 그 뜻의 깊이를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고 역사가 흐른 뒤에야 바로서 알 수 있는 때가 대분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원리적인 법과 구체적인 세부법들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깊은 묵상과 연구를 거쳐서 행동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언약을 맺은 후에 만든 장막의 실제적이고 법적인 이름은 증거막이다. 이 장막의 이름이 증거막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여기서 만나고 같이 살아야 하며 언야관계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풀려야 한다. 언약관계의 유지 발전 회복이 모두 증거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제도가 바로 제사제도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분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이 전사이신 하나님이시다(God as a Warrior). 하나님의 이 모습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서 기원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열심이 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전쟁을 벌이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시며 동시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대하여서도 전쟁을 벌이신다. 언약에 열심이신 하나님은 언약공동체 밖을 향하여 그리고 동시에 언약공동체 안을 향하여 심판의 팔을 벌리실 것이다.

 

 

6장 출애굽기 1-18장의 신학과 메시지

 

<창세기와의 관련성>

창세기에서 애굽에 내려간 족장시대의 하나님나라 사람들의 숫자(46:27)였던 70인이 출애굽기의 초반에서 한번 더 확인 되고 있는데( 1:5), 이것은 창세기에서 70명으로 마감된 족장시대의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이제 출애굽기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는 오직 하나님나라의 씨에 대한 약속이 주된 관심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내려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씨가 가나안의 기근을 피하여 그곳에서 숫자가 충만하고 편만하게 되기 위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전제로 애굽에 들어간 것이다. 출애굽은 애굽이라는 외적인 세상성으로 부터의 탈출인 동시에 이 세상의 삶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안에 있는 세상성으로 부터의 탈출이다

 

<하나님나라의 지도자 모세’ >

이스라엘의 애굽 생활은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이제 출애굽을 해야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으로 대표되는 세상성을 끊어 버리는 고통이 따라야 했다.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도자를 일찍부터 역사의 과정속에 준비시키고 때가 되매 세우셨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된 지도자라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앞에 서는 것은,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서는 것이었다. 이 진리를 모세가 깨닫는 데는 쓰라린 경험과 좌절의 기나긴 세월들이 필요하였다. 이런 경험을 가진 모세였으므로 정작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을 때 그는 다섯번이나 소극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소명을 거부하며 네가지 질문을 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대답하시며 설득하신다. 모세의 첫 번 질문은 자신이 과연 지도자로 세워졌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당신이 모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인도하여 이 산에서의 섬김(abad)' 즉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게 될 것이하고 대답하신다.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누구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랴 할 것인가? 라는 모세의 두번 째 질문에 대하여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하나님의 자계시(self-revealation)를 주셨는데 그것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특이한 이름을 하나님 나라인 이스리엘에게 주신 것이다. 이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과거의 하나님의 이름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결합이 되었고 이 결합된 이름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기억될 하나님의 이름이며 표호로 선포되었다(3:15). 이렇게 하나님의 자계시의 완전함이 드러남으로써 시간 세계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완성될 근본적인 준비가 마련되었다. 세번째 모세의 질문은 자기를 지도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고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이적의 표징을 보여 주셨다. 모세의 네번째 의문은 자기에게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인 구변이 없다는 점이었고 이 질문에도 하나님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대답하여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만족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심중에는 근본적인 불순종과 완고함이 있었고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모세의 이러한 마음을 돌이키셨다. 그러나 지도자의 마음속에 지도자 의식이 한순간에 완성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지도자 의식은 조심스럽게 시작되었고 역사가 진행 될수록 자라났으며 절망과 회복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완전해져갔다. 모든 이적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힘있고 확신에 찬 태도를 취하였고 지도자 의식은 명확하게 성장하였다. (14:13-14) 이러한 모세의 태도는 그의 영적 지도력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지도력의 실체는 지도자 자신의 영적능력의 성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지도자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믿느냐에 달린 것임을 보게된다. 출애굽에서 보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여,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구하는 기초가 되었고 후대의 시편과 예언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엄청난 경험을 한 이스라엘 이후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로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런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면서 모세는 역사진행의 새로운 패턴을 학습했다. 그것은 자신이 미리 예상해서 하나님께 그 대책을 간구하거나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시는 역사진행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지도력이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현실을 통해서, 백성들의 타락의 근본원인이 자신의 지도력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범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새로운 차원의 지도자 의식을 배우게 되었다(16:8). 지도자로서의 이런 성장 이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중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스라엘’ >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준비는 백성의 숫자가 다 마련되었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 개개인의 내면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의식이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한 관건이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때를 작정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받는 학정과 그 고통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족장들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며 장차 놀라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언약을 이제 이루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족장들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새로운 자계시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이스라엘이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을 가진 구별된 백성으로 행동하기까지는 역사속에서 많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바로에게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현시적으로 나타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차원을 끌어 올리시려 하였다. 바로와 그 신하들의 마음을 하나님게서 강팍하게 하신 의도는 이스라엘을 세상인 애굽과 점차적으로, 결국에는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과는 더 깊고 완전한 관계를 이루어 가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하나님의 심판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데서 하나님의 행동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애굽과 세상의 심판은 동시에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이스라엘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예식인 유월절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출애굽의 과정과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의 불순종한 태도는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맺고 있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정함이 없으며 하나님을 불신하였으며 그 약속에 대한 인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고 나아가 이스라엘 속에 구속역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준비안된 백성들과 함께 해서라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려고 끝까지 인내하셨다.

 

 

<하나님나라의 대적 바로왕’ >

하나님나라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는 의외로 하나님 나라의 대적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민족으로 이루어질 이스라엘에게 이런 기능을 한 대적이 애굽의 바로왕이었다. 출애굽 역사에서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단순하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대적까지 간섭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지 않토록 하신 점이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는 것이 자신에게 정치적인 위협이 되므로 이것을 막으려고 하였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라고 요구할 때 바로의 이스라엘 박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의 강팍함은 열 재앙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본격적인 구속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역사에서 사건을 최후로 조정하시는 분은 역사의 뒤편에 계신 지존하신 하나님이신 셈이다. 그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깨었으며 드디어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재난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재난이 바로 애굽의 멸망이라는 사실을 애굽사람들은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이스라엘을 홍해까지 추격하였고 마지막 애굽의 파국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 애굽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굽사람들을 치는도다’(14:25)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구원하시고 건설하시는 것과 세상나라를 심판하시고 파멸에 이르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같은 사실임을 보여준다.

   

 

<언약이 있기전에 주어진 법과 제도>

약속과 언약은 분명히 다르다. 약속은 한 당사자가 다른 당사자에게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일반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언약(berith)은 단순한 약속을 넘어서는 법적이고 공적인 것이고 두 당사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을 언약은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새로운 차원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언약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내용, 즉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이행하여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법정신과 법철학은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고대근동에서는 왕이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면 효력을 발휘하고 백성은 거기에 일방적으로 순종해야 했다. 이 경우 법은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진 법은 그 자체로 최종의 목적과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즉 법은 언약의 하위개념이고 종속개념이며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법을 언약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기 전 까지의 짧은 기간이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즉 법적인 삶을 연습하고 살아야 했다. 이 삶을 위하여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는 그 밤을 기점으로 하여 유월절 예식을 위한 법도를 배워야 했고(12:40-42) ‘마라라는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인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을 단련하셨다(15:25)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거두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안식일 법을 미리 주셨고 그들이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셨다.(16:21-30) 그리고 시내산에 이르기 전이라도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법과 행정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충만한 숫자의 출애굽한 백성이 준비되었고 또 그 백성의 구체적인 삶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한 법들과 행정제도들이 마련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시내산에서 맺어지는 것이다.   

 

 

7장 출애굽기 19-24장의 신학과 메시지

 

<출애굽의 목적인 시내산 언약>

츨애굽의 목적은 출애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출3:12에서 약속하신 대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것이었다. 이 언약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출애굽기를 단순히 민중이 현실의 억압에서 해방받는 역사를 기술한 책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 실제적인 사례가 출애굽기가 자신들의 신학의 완전한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여 1970년대에 열풍을 일으켰던 민중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들이었다. 러나 관건은 어디로 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누구를 향한 해방이었다. 즉 애굽에서의 해방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해방이라는 목적이 더 중요하였다. 애굽은 애굽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출애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는 정확한 명칭으로 시내산 言約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

 

 언약 당사자들의 관계성(19:3-6)

고대의 공적인 문서들은 대부분 언약 당사자의 관계와 역사성을 천명하는 서언(historical prologue)으로 시작된다. 그 이유는 현재 맺으려는 공적인 관계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시내산 언약의 서언으로서 출19:3-4 야곱족속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언약을 주도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언약의 당사자로 인정하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종주권조약(suzerainity treaty)에 흔히 나오는 용어로 우월한 언약 당사자가 약한 언약 당사자를 향하여 사용하는 말로서 보배로운 존재(segullah)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 단어를 보충 설명해주는 표현이 제사장 나라 혹은 구별된 백성인데, 이 의미는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로서 선택된 구분된 백성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언약 당사자간의 법적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주례자가 아니라 당사자 자신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는 나의 보배 백성이라고 선포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 이시라고 선언하였다(이 말은 생략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십계명 1계명의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라는 표현에서 이미 그 관계가 충분히 표현된 것이다)

 

 모세의 중재와 언약당사자의 만남(19:7-8, 19:9-25)

모세가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세는 언약의 중재자로서 언약 당사자들 사이에 언약의 조건들을 전달하고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19:5-8, 20:20-21, 24:1,12) 그러나 언약은 중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언약 당사자들이 대면하여야 한다. 첫 언약인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 당사자들의 대면에 대한 보고가 출19:10-25이다. 이 본문은 오랫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타나심(神顯)으로만 해석되었으나 장엄하고 탁월한 신현에 비해 보잘것 없지만 이스라엘의 나아감(人顯)도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19:17) 그러므로 이 장면은 단순한 신현이 아니라 언약당사자들의 만남 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만남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경험 중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놀라운 것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늘 회상되며 시편과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표현되는 주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언약적인 만남의 하나님을 회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 이스라엘의 범죄하여 언약을 깨뜨릴 때 이스라엘이 경험한 두려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언약적 저주가 임하게 되며, 반대로 언약에 진실한 이스라엘이 위태로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위하여 엄위롭게 임재하실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선지서와 시편에 언약적인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십계명의 해석에도 영향을 끼친다. 십계명을 위에서 권위적으로 내려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법으로 해석하는 배경에는 출19:10-25을 단순한 산현으로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상응된 행동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나아감을 생각한다면 이 십계명은 단순히 지켜지지 않으면 안되는 일방적인 법이 아니라 언약을 맺는 당사자간의 언약의 조건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언약의 조건(Covenant Law)- 20, 21-23

현대의 법 개념과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의 법 개념도 위에서 주어진 것이고 밑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으며,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신과 인간이 맺은 언약에 따른 법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독특한 법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법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법을 볼 때 법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은혜의 언약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언약의 당사자들이 대면하여 만나고 나서 결정할 사항은 언약의 조건들이다. 그런데 출 19:10-25을 신현으로만 해석하는 견해의 결정적 약점은, 이 본문이 이어서 나오는 십계명과 무슨 관련성이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언약 당사자의 만남으로 해석할 때 십계명은 언약당사자들이 대면하여 만나고(19:10-25)나서 결정한 언약의 조건들이며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적인 삶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지켜야 할 언약적인 조건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앞서 출19:4에 표현된 독수리 날개로 업어라는 표현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유일한 언약의 대상자로서 절대적인 보호와 섭리로 역사를 통하여 인도하실 것이며,  19:5 보배로운 존재로 이스라엘을 삼으신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누리는 절대적인 권리를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종주권 언약(suzerainity treaty)에서 약한 당사자가 우월한 당사자의 요구대로 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한편, 우월한 당사자는 약한 당사자에게 절대적인 보호의 의무를 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적 의무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언약적 관계규정에서 이미 충분히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언약조건으로서의 십계명은 언약당사자들이 직접 만났을 때 주어졌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서있는 것이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나머지 세부 언약법은 모세를 통하여 듣기를 청원하였고(20:18-19) 이후에 주어지는 언약의 세부법은(21-23)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어진 언약법인데 이것은 조약을 맺을 때 원칙적인 사항들만 당사자들이 정하고 나머지 세부사항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고대와 현대의 외교적 관습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출24:7의 언약의 책(한글 번역-언약서)은 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출21-23장의 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근거도 없이 해석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20장의 십계명과 21-24장의 법의 밀접한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본대로 20장은 언약법, 21-23장은 세부법이라는 연속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언약의 책이라는 명칭은 20-23장 전체 언약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 20-23장 전체는 언약의 조건, 규범들을 명시한 언약 문서로 보아야 한다.

 

 언약예식(24:3-8, 24:9-11)

이스라엘이 언약의 조건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들었고 이어서 나오는 것이 출24:3-11에 나오는 공적예식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유사한 예식이 두 번이나 나온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학자들은 무관한 다른 문서의 편집이나 혹은 같은 내용의 두 다른 전승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예식은 내용과 형식에서 명확하게 구분되나 서로 연관이 있는 예식으로서 전자(24:3-8)는 공적인 관계가 수립되는 언약 비준예식이고 후자(24:9-11)는 언약관계가 합법적으로 수립된 이후에 가지는 언약 축하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 속에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1.언약의 한 당사자인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24:4)

2.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개의 돌기둥(24:4)

3.언약제사의 두 구성요소인 번제와 화목제(24:5)

4.제단과 돌기둥에 반씩 뿌려진 생명을 담보하는 서약을 상징하는 피(24:6,8))

5.언약의 공적문서로서의 언약의 책(24:7)

6.거듭 확인된, 언약에 참여함에 대한 백성들의 동의 내지 승인(24:3, 7)

 

이런 요소들은 고대 근동에서 행해진 공적인 관계형성을 위한 비준예식에서 필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공적으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언약에 진실할 때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적)축복이 임할 것이고 언약을 깨어 버릴 때 이스라엘에게 (언약적)저주가 임할 것이다. 모압언약에 비해서 시내산언약에 축복과 저주의 요소가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하나님과 처음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축복과 저주의 요소가 명확하게 표시되게 된다. 엄숙한 공적관계 형성의 예식이 지나가면 형성된 관계를 축하하는 기쁨의 시간이 찾아오는데 이것은 보통 샬롬의 상태로 표시되는 먹고 마시는 시간이다.(24:11) 이제 하나님과의 언약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축제를 즐기는 것이 허용되었다. 첫 만남은 긴장되고 위험한 것이었으나 둘째 만남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것이다. 이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상태를 지속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막이다 

 

<성막(25-31, 34-40)>

성막은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이며 동시에 언약당사자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회막이었다. 언약체결 이후에 바로 성막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막에 대한 기록을 앞장(19-24)과는 무관한 제사장 문서라고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말하면 이제부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이 만남은 지속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자마자 즉시 모세를 불러서 성막을 준비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것은 언약을 유지할 수단으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날 공간적 장소를 마련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제 언약관계가 시작되었으므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처를 마련되어야 했다. 성막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십계명이 새겨진 증거판이 들어있는 언약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번제단에서 출발하여 물두멍을 거쳐서 성소로 들어가며 성소안에서 진설병과 등대 그리고 향단을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고 언약궤가 놓여 있는 지성소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성막에 대한 모든 구성은 레위기에서 민수기 10장까지 묘사된 언약유지와 발전을 위한 모든 세부 규범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

   

<언약의 파기와 언약의 갱신(32-34)>

그러나 인간은 언약을 맺은 시작부터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고 마는데 그것이 32장의 황금송아지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우상숭배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 다른 신과 언약을 맺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역사상의 모든 현실세대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언약의 파기는 바로 언약적인 저주를 의미하고 그것은 생명을 지불해야 하는 심판으로 결론이 났다. 심판의 도구는 언약에 열심인 레위인들 이었고, 그들은 빠르게 죄악에 전염되어 가는 언약공동체를 살리기 위하여 방자한 자들을 죽였다. 한편 이 범죄한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필사적 중보기도로(32:30-35, 33:12-16)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새롭게 하셨고 특기할 법들을 다시 주셨으며 성막이 조만간 식양대로 다 만들어질 것이고(35-40), 이어서 언약의 유지와 발전을 위하여, 성막 안에서 행해질 모든 제사규례와 규범들이 레위기에서 주어질 것이었다.

 

 

8장 출애굽기 25-31장, 35-40장의 신학과 메시지

 

<서론적 고찰>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에서 가장 깊고도 다양하게 형상화 된 것이 증거막(성막 혹은 회막)인데 그 유례없는 복잡성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의 전통 역시 다양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가지 전통적 해석은 19세기 후반부터 기승을 부린 자유주의적인 해석과 유대인들의 해석이다. 자유주의적 전통은 증거막과 그 안에서 행해지는 제의적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며 심지어는 이것을 신약시대의 바리새 종교의 근원으로 간주하여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종교가 언약적 사랑에 근거하여 형성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였으므로, 증거막과 그 안에서 행해지는 제의적 행동을 법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언약적인 것으로 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의 형상화인 증거막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저 한다. 장막안의 모든 물건들에 일관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증거라는 말이다. 증거막안에 증거궤가 있고 그안에 증거판이 있다. 그러므로 이 장막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표현은 증거막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조약에도 많이 표현되는 증거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막의 본질을 아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막은 단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막이거나 막연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을 위한 회막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하며 나아가 그 언약을 유지, 발전시키거나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증거막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 안의 내용물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증거막안의 지성소는 언약의 한 당사자인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성소는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은 그 방의 내용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성소의 유일한 물건인 증거궤와 증거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법을 나타내며 성소에 있는 진설병상, 등대, 향단은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서 드려야 하는 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방은 언약 당사자들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최초의 만남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 진 것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증거막은 언약당사자들이 만나는 장소이며 여기서 깨어진 언약관계가 회복되며 정상적인 언약관계가 더 깊이 발전되기도 한다. 33:7-11에는 회막이란 말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증거막이 완성되기 전에 여호와를 자원해서 찾는 자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임시변통의 막으로서 진밖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증거막이 완성되고 회막이 없어진 이후에도 회막이란 말이 나오는데(40), 이것은 회막이 계속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증거막을 증거막, 회막 혹은 성막으로 번갈아 가며 지칭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막의 내전의 내용>

이 증거막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드는 것이었다. 이 증거막은 언약에 대하여 증거하는 장막이므로 언약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쌍방의 언약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식양에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 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헌물을 드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전은 두개의 방인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진다. 내전의 첫 번째 방은 지성소인데 이 안에 있는 증거궤의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같은 증거막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접근하는 장소인 번제단과 대응한다. 증거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임재하는 장소이며, 번제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출발점이다. 증거궤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25:22)이란 표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며 언약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이제 동일한 말씀의 권위로 언약을 실행하시며 유지하신다는 의미이고 나아가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근본적인 속죄를 이루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 근본적인 속죄위에 이스라엘의 헌신이 기초하고 있다. 내전의 두 번 째 방인 성소는 언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성전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다섯가지 제사를 드려 자기의 죄를 해결한 정결한 상태에서 여기에 들어와 하나님께 참된 헌신과 봉사를 드리는 장소이다. 이것은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지성소에 임재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대응한다. 성소안의 진설병은 특이하게 얼굴의 떡(lechem panim)으로 표현된 12개의 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언약공동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을 떡과 포도주로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진설병과 포도주를 비추는 등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명을 상징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나와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완전한 생명이다. 이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사장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이 땅위에 완전히 나타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진력해야 할 것을 나타낸다. 성소안에서 향단의 위치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바로 다음에 놓여 있으며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이 향단에 향을 피우고 그것을 앞세워 들어간다.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에서 속죄소(증거궤)위에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나타나듯이 향단의 향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접근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우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올 때 내전 앞의 물두멍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내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성막의 외전의 내용>

외전, 곧 증거막의 뜰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증거막의 뜰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포함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개인적으로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외전 뜰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번제단(alter of burnt offering)은 이스라엘이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깨뜨렸을 경우에 그것을 회복하는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되었고, 유지되고 있는 언약관계를 발전시키는 제사(화목제, 서원제, 감사제)도 여기에서 드려졌다. 여기서 내전쪽으로 향하여 가면 물두멍이 있는데 제사장이 내전에 들어가기 전에 이 속의 물을 사용하여 자신을 제의적으로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증거막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과 그 행동원칙>

대제사장의 복장에 관한 규례의 목적은, 언약관계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암은 증거막의 제조 책임자로서 일하였는데, 이들은 성령이 창조시에 그러하였듯이 이 성막을 만드는데 있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하였다. 새 언약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기구와 조직도 이러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계속해서 만들어 질 것이다. 이러한 증거막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원칙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하는 것이었다. 증거막은 공간의 거룩을 보증하고 안식일은 시간의 거룩을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증거막을 만들기 위하여 안식일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더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새언약에서도 안식은 모든 것의 전제이다(11:28-30) 우리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 첫 번째 안식이라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두 번째 안식이다.

 

<결론적 고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보이신 행동의 원리는 언약의 증거막을 만드실 때에 보이신 행동의 원리와 서로 상응한다. 그 이유는 창조에 있어서나 언약수립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뜻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이후에 곧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가 (1-11) 이제 언약의 증거막 형성이라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나 동일한 원리로 이 땅위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창조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9장 출애굽기 32장 1-6절의 주석적 신학적 연구

 

<들어가는 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도전은 두가지 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지금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있는 테러와 그것의 원인이 되고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인데, 사실 이것은 셰계의 문제라기 보다는 1400년동안 풀지 못하고 지속되어온 기독교의 문제이다. 또 하나는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세속주의이다. 공산주의라는 물질주의에 대하여 또 다른 물질주의인 자본주의의 승리이후 이 승리한 물질주의에 기초하는 세속주의는 세계 전역을 통하여 심지어 이슬람 사회에서 조차 가장 어려운 도전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이 세속주의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독교의 기초와 근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이제 기독교가 새로운 자체 개혁을 통해서 현대적 도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이전부터 믿음의 조상들이 가르쳐 준 비법이었다. 그런데 개혁은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한 것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자체가 말하는 개혁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의 기원이 되는 오경속에서 대표적인 개혁의 역사가 출32장이며 여기에 나타난 사건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과 언약을 새로 맺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32-34장의 통일성>

우리는 출32-34장 본문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 구조를 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 이 세 책의 통일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세 책의 근본적 구조는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숫자적으로 충만해지고(1) 노예된 상태에서 탈출하여(3-15)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후(19-24) 언약당사자들이 같이 거할 언약의 증거막을 만들며(25-31, 35-40) 언약을 회복, 유지, 발전시킬 제사제도를 만들고(레위기) 가나안 땅 앞까지의 여정을 보여준다.(민수기) 이런 거대한 신학적 구조속에서 출32-34장의 모든 요소들이 명확하게 자기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본문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32장의 언약파기(covenant braking)에 대해 출34장의 언약회복(covenent recovering)의 조처가 주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구조속에서 출32-34장 전체가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19-24장의 언약체결 이후 출25-31장은 증거막 건립의 규례를 말하고 있고, 갑자기 출32-34장의 충격적인 언약파기 및 회복의 사건이 벌어지며 이후 출35-40장은 증거막을 실제로 건조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24:3-8의 언약체결 예식에서 언약의 피를 언약의 양 당사자인 하나님(제단)과 백성들에게 직접 뿌리는 것은 이 언약을 깨는 경우에는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엄숙한 결의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출32-34장에 나타나는 심판행위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약적 저주의 실행이 되는 셈이다. 한편 출35-40장에 묘사되는 증거막 건조는 레위기1-25장의 제사제도와 계속 연결되어 있으며 레26장에 나타나는 축복과 저주의 목록은 츨32-34장에서 겪었던 언약파기의 충격적인 경험을 반영하는 언약적 축복과 저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2 1-6절의 주석>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긴 사건은 제2계명을 명백히 어긴 것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32:4)는 선언은 언약법의 기초를 형성하는, 20:2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익숙한 표현이다. 이 선언 속에는 이중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과, 둘째는 이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결국 출32:4의 선언은 바로 이 황금 송아지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은 황금 송아지에게 자신이 이루신 자비의 출애굽 역사를 빼앗기고 나아가 황금 송아지에게 이스라엘의 언약의 당사자의 자리를 빼앗긴 셈이된 것이다. 이 우상에 대해 아론이 취한 공적인 조처는 첫째 우상의 공적인 이름을 여호와로 불렀고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을 제거하고 황금 송아지로 완전히 대체한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어떤 것을 체결할 절기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고 우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 행사를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명백히 출24:3-8의 언약체결 예식을 모방한 것이다. 셋째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인데(32:6) 이것은 공적관계를 맺기 위해 언약의 당사자들끼리 드리던 제사이다. 그리고 넷째는 먹고 마시고 뛰놀은 것(32:6)인데 이것 역시 출24:9-11의 언약체결 피로연을 모방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이들이 하는 행위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언약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즉 언약의 본래 대상자인 여호와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언약의 파트너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언약을 체결하려고 한 것이다. 

 

<32 1-6절의 총체적인 신학적 의미>

32 1-6절의 신학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출19-24장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체결 과정과 황금송아지와의 언약체결의 차이를 주석하여 보야야 한다

 

 언약적 쌍방관계의 정의(19:3-8)

시내산 언약체결에서는 명확하게 쌍방관계가 정의되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배백성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선포되었음에 비해 황금 송아지와 언약 체결에서는 황금 송아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언약 당사자의 대면(19:16-19a)

시내산 언약에서와 마찬가지로 황금 송아지와 백성간의 공적인 대면의 모양이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은 인격체인데 반해 항금 송아지는 의인화된 물체에 불과하였다.그러므로 여기서는 언약 당사자간의 인격체로서의 대면이 없다. 거짓 종교의 비인격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언약법의 직접선포와 간접수여(20:1-17, 21-23)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대면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언약법을 수여하셨고 백성의 요청에 의해 세부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셨다. 그러나 황금 송아지의 경우는 언약법 수여가 없었다. 황금 송아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법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거짓 종교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약체결 예식(24:3-8)

언약법이 수여되고 난 다음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언약의 피를 쌍방에 뿌리고 언약서를 낭독하며 언약체결 예식을 행하였다. 황금 송아지의 언약도 비슷한 예식이 있지만 피뿌림의 예식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한쪽의 언약 당사자인 황금 송아지가 언약에 목슴을 걸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진정한 효력이 없는 것이다.

 

 언약체결 축하 피로연(24:9-11)

예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였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적인 긴장이 없어지고 공적으로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황금 송아지의 경우도 백성들이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피로연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출32:1-6의 사건이 단순히 우상을 숭배함으로 언약을 깨는 사건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방금 체결한 여호와와의 언약관계를 무효화 시키고, 여호와라는 이름과 그의 역사를 도적질하여 만들어낸 황금 송아지와 언약을 체결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법적인 언약파기를, 황금 송아지와는 새로운 언약체결이라는 중대한 죄를 지은 것이다. 그 결과 이 범죄는 다른 일반 범죄와 차원을 달리하는 심각한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다. 다른 일반 범죄들의 경우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죽게 되었으나 이 사건의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전멸시키시고 모세를 통하여 새롭게 시작하시려는 뜻을 정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언약에 근거한 것이므로 정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언약파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피뿌림 예식의 실제적인 적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이런 해석은 출32-34장 전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준다. 이렇게 파기된 언약은 반드시 회복되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34장의 사건을 언약갱신(covenant renewal)이 아니라 언약회복(covenant recovering)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언약 갱신이 아니라 회복이므로 새로운 예식은 불필요 하였고 단지 그 속의 법적, 불변적 요소(legal, invariable element)를 재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세의 중보자로서 역할이 부각되었으나 그것은 모세를 영웅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세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전진을 위한 중보자라는 도구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어서 기록된 레위기의 26장은 이 때의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을 반영하여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목록을 나열하게 된다. 21세기의 전무후무한 도전에 직면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자체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개혁의 가장 첨예한 요소는 결국 신론의 정립이다. 그러나 신론만으로 신학이 설 수 없고 인간론이 있어야 하는데, 신론과 인간론이 하나가 되는 현장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개혁의 가장 근본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출32-24장의 본문을 통해서 타락한 교회는 반드시 언약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도 있고 하나님의 사역도 있으나 실제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언약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될 때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의 자리를 어떤 우상이 차지하게 되며 영적 이스라엘은 이 우상과 언약을 맺고 살아가는 속임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고대처럼 자연물로 우상을 만들지는 않으나 돈과 권력과 같은 삶의 실제, 혹은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로 우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우상을 만드는 행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참 신이신 여호와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대신에 이런 우상과 언약을 맺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이루고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진실한 언약관계를 맺고 산다면, 우리를 보배로 여기시는 그 하나님이 언약적 원리를 따라서 당신이 보여주셨던 세상을 뒤흔드는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우리로 하여금 능히 정복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세속주의와 이슬람의 도전을 능히 이기도록 하실 것이다.

 

 

10장 레위기의 신학과 메시지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연속성>

출애굽기의 전반부(1-24)가 언약을 이루는 일이라면 출애굽기 후반부(25-40)의 성막을 짓는 일은 전반부에 맺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레위기는 출애굽기 후반부의 연속으로서 그 성막을 중심으로 언약을 유지하고 갱신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기록한 것이다. 출애굽기 후반부는 성막을 중심으로 기구를 준비하는 것이고 레위기는 준비된 기구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기록한 것이다. 즉 출애굽기가 성막의 건조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레위기는 성막에서의 행동에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 전체를 통하여 모든 명령은 증거막 혹은 회막에서 주어졌고 또 시행되었다. 시간적으로 보면 성막이 준공된 것이 출애굽 2 11(40:17) 이었고 민수기 기록의 시작이 출애굽 2 21일이므로 레위기의 모든 사건은 한달 동안에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레위기의 상황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수기 10 10절까지 이어진다. 실제로 민1:1-10:10의 기록은 그 이후의 민수기의 역사보다 레위기의 법에 더 관련되어 있고 그 내용도 레위기의 규범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민수기1;1-10:10은 레위기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오경의 실제적인 연속성을 깨닫게 되는데, 창세기가 언약을 맺음으로 이루게 될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라는 두 약속을 근간으로 이루어 졌다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언약이 어떻게 수립되며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어떻게 마련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는 하나님의 또 다른 약속인 땅에서 씨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레위기 전체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씨가 어떻게 언약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기록이다.

 

<레위기의 거룩의 의미>

성경에서 거룩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레위기이고 특히 레19-27장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이와같이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거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9:2)는 말씀은 논리적으로 우리의 거룩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로 나타나는 거룩으로서 세상의 모든 타락하고 더러운 것에서 분리되어 모든 부정적인 것에 완벽하게 대비된 깨끗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둘째는 언약관계속에서 나타나는 거룩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을 지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자신을 세상의 모든 악함과 타락에서 구분하여야 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지켜야 한다.이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레위기의 제사들>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제사인데 제사의 종류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번제(ohlah)는 제물이 완전히 불태워 지는 것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진노와 인간의 죄는 죽음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사람편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소제(minchah)는 곡물로 드려지는 것으로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작은 선물을 의미한다. 화목제(shelamin)는 제사 드리는 쪽과 받는 쪽의 상호관계가 완전한 평화로 유지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이 제사는 제물이 드려진 후 그 중의 일부가 다시 제사를 드리는 쪽으로 되돌려서 먹고 기쁨을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 속죄제(hattaht)는 죄가 남긴 오염과 타락을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는 것 (4:2,13,22,27)으로서 이 예식의 내용은 피를 바르거나 뿌리는 것이다. 신약에서 죄와 그것을 정결하게 하는 피에 대한 언급은 거의 이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벧전1:2, 요일1:7, 7:14, 9:12-14, 10:19-22) 속건제(asham)는 배상,혹은 보상의 의미를 가진 제사(5:15, 18)로서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동물이 그 형벌을 받음으로써 마땅히 치러야 할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속건제의 예는 이사야 53장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신약에서도 자주 설명된다. (12:38, 10:16, 8:17, 벧전 2:24-25, 22:37) 신약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제사들의 부정적인 의미 거의 대부분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면이 아닌 긍정적인 면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의 헌신적 노력과 관계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삶을 더 발전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면들도 제사에 포함되는데 죄와 관계없는 번제,화목제, 소제가 그것이다.

 

<축복과 저주>

레위기 26장에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레위기가 독립적인 책이 아니라 출애굽기의 연속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24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다 그러나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성막에 대한 명령이 완전히 주어지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타락하여 황금송아지와 언약을 새로 맺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회복을 하시게 되었고 계속헤서 성막에 대한 명령이 주어졌고 또 이행되었다. 성막의 근본적인 것이 어느정도 만들어 지고 난 뒤에(35-40, 1-25) 그동안 미루어 왔던 언약에 필수적인 축복과 저주의 말이 나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순서이다. 첫 언약(19-24)에서는 저주의 부분이 없고 축복과 같은 약속만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치명적인 실패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내용에서도 축복에 대한 것은 3-23절 정도이고 저주에 대한 것은 14-45절로 저주의 양이 많은 것이 충격적이다. 이것은 첫 언약에서 축복만 있던 것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며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레위기 26장은 시내산 언약의 축복과 저주의 목록인데 후일에신명기에서 나타나는 모압언약에서는 레26장보다 더 구체적이고 발전적이며 자세하게 언약적 축복과 언약적 저주가 주어지게 된다.

 

 

11장 현대인을 위한 레위기의 메시지

 

<선지자적 영성과 제사장적 영성>

구약의 유산 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유산인 모세의 윤리법, 선지자의 메시지나 다윗의 시편등이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유산도 있는데 이스라엘의 종교제도 특히 제사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내적인 유산은 현대의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데 반해 고대의 이스라엘에게 익숙했던 외적인 유산은 우리에게는 늘 낯설게 보인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레위기부터 민수기10장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제사제도는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다. 종교의 외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구약과 신약의 다양성 보다는 일치성에 역점을 두어 제의를 중시하는 로마교에 반대해 진리의 내적인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설교를 중심으로 예배를 발전시킨 종교개혁적 태도가 어느정도 여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내면성은 자연스럽게 외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므로 종교적 진리의 내면성과 외면성을 반드시 구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어떤 경우는 외적인 표현으로 종교적인 진리가 탁월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된다. 이런 면에서 오경 중에서 종교적 진리의 외면성을 가장 심오하게 나타내고 있는 책이 출애굽기 후반에서 민수기 전반까지의 기록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진리의 외면과 내면이 모두 성취된 것을 믿으며 구약진리의 내면성이 어떻게 성취되고 적용될 수 있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예언서를 읽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구약진리의 외면성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적용될 수 있는 가를 살피려면 출애굽기 후반에서 민수기 전반까지의 기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약진리의 내면성이 어떻게 신약적으로 완성되었는가를 알기위하여 계시의 점진성을 고려하듯이, 구약진리의 외면성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 구약진리의 외면적 내용은 그 제도들의 근본정신 혹은 법 정신을 추출하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그동안 로마교에 대한 반감으로 그 중요성이 망각되었던 구약진리의 외면성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얻는 또 다른 유익은 예언자적 영성과 제사장적 영성의 대립구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들 속에는 예언자적 영성이 지배적으로 나타나 왔다 그러나 제사장 제도는 이스라엘의 수립과 함께 시작된 원초적인 제도이고 예언자 제도는 후대에 왕 제도가 도입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적 영성은 대부분 비판적인 내용이고 일부분만이 소망과 관련되나 반면에 제사적적 영성은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언약 관계로의 회복과 발전을 추구한다. 이런 면에서 제사장적 영성이 신약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아는 것은 구약종교의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을 알게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에서는 구약의 제사제도의 의미를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만 제한되게 이해하여 왔고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제도가 왜 그렇게 다양한지, 각 제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계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우리는 레위기의 제사제도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풍성함을 생생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관련되지 않는 제사제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제사의 구체적인 면을 통해 엄청나게 풍성해 진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관련되지 않는 제사제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풍성함을 잘 소개해 준다. 이러한 지식은 특별히 제사제도의 중요함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만 연관지어 알고 있었던 개신교에 특별히 유익이 될 것이며 나아가 제사제도의 연구는 개신교에 전혀 새로운 차원의 혁명적인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레위기의 핵심 내용인 제사제도>

레위기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책이 아니라 오경속의 한 책이며 오경신학의 근본적인 요소를 형성하고 있다, 오경은 언약이라는 본질적 도구(제도)를 통하여 이 땅위에 형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레위기의 규범들은 근본적으로 시내산 언약을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성도들은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씨로서 어떻게 계속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면 레위기는 어떻게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 나라의 씨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제사를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제사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피를 취하고 둘로 나누어서 한 부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에, 다른 한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렸다 (24:3-8) 이것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통하여 만약 언약의 한 당사자가 언약을 파기하면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예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완전함을 아시므로 언약이 파기되었을 때 그것을 회복하는 방법을 미리 마련하여 두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그러므로 제사제도에서 피가 흘려지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짐승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다. 결국 제사의 핵심은 진정한 언약관계의 회복이다 

 

<제사제도의 본질>

그런데 이 제사가 행해지는 장소가 출25-31장에서 명령되고 이어서 봉헌된 (35-40) 성막 혹은 회막, 증거막이다. 이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이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의 성막이다. 또 회막이라는 이름은 그곳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이름은 증거막(the tent of witness)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는 가장 중요한 물건인 법궤는 더 본질적인 용어인 증거궤라고 불린다.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예식이 끝나자 마자 하나님은 출25장에서 증거막을 만들 것을 명하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이 증거막에 늘 임재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시고 여기서 이스라엘을 만나사고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여 나가실 것이다. 레위기는 이 증거막에 영광스럽게 임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떻게 언약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막 사상은 신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사도 요한은 구약의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모습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1:14)하였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말로 성막에 가득한 영광이 이제 예수께 임한 것을 나타내었다. 또 사도 바울도 상당히 레위기적 용어를 사용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몸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6:19-20) 따라서 구약의 성전에 임재하셨던 성령께서 이제는 살아있는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에 임재하여 계신다(6:15, 7:55-56, 고후3, 5:18)고 가르친다. 레위기에는 이러한 증거막에서 행해지는 기본적인 제사가 다섯 가지나 나타나는데, 레위기의 이러한 다양한 제사제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고 이루는 언약관계가 얼마나 세밀하고 깊고 다양한가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피상적인 관계를 이루고 살기 쉬운 현대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시사한다. 우선 제물이 완전히 태워지는 번제(ohlah)는 죄와 관계되는 경우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진노를 나타내며 죄와 관계없는 경우는 성도들의 철저한 헌신을 의미한다. 화목제(shelamim)는 다른 제사가 단수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해 특이하게도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죄와 관계되는 화목제의 경우 당사자가 동시에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만 관계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죄와 관계없는 화목제는 출24:9-11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언약관계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떡을 떼며 현실의 생활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코이노니아로 생각할 수 있다. 소제(minchah)는 곡식으로 드리는 유일한 제사로서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에 있어서 소극적 요소인 죄사함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발전을 이루는 적극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렇게 우리는 성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과 행동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신 구약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삼하 7) 항상 죄와 관련되어 드리는 두 제사는 속죄제(chattat) 와 속건제(asham)이다. 이 두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속죄제에는 거룩과 청결의 개념이 지배적인데 이것은 죄 자체가 깨끗하게 처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제 사역은, 그것을 믿는 성도들이 스스로 죄를 멀리하고 삶에서 거룩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모든 말과 행동을 버려야함을 가르친다. 또한 속건제는 죄로 인한 결과를 보상 혹은 배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건제 사역은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를 배상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죄로 저주를 받은 만물이 그리스도의 속건 사역으로 말미암아 장차 우주적으로 회복될 것을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건 사역에 근거하여 만믈을 다스리고 회복시키는 제사장적 사역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제사의 현대적 의미>

이러한 제사의 기본이념은, 고독하면서 진정한 관계를 갈망하는 현대인에게 치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현대 예배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은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었던 시내산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하는 행위,  언약갱신 행위로서 그 현대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를 이룬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로 부르심을 받는다 (19:3-8)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19:9-25)

언약의 말씀의 선포를 듣고(20)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듣는다 (21-23)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생명 걸고 지키겠다는 결단을 한다(24:3-8)

언약을 갱신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떡을 떼며 피로연을 행한다 (24:9-11)

 

여기서 제사는 예배의 두 번째 순서인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는 차원과, 또 예배의 네 번째 순서인 말씀을 듣고 결단하는 차원의 두가지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예배속에 제사의 이런 두가지 차원의 모습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가? 죄의 고백과 용서의 차원에서의 제사로서 우리는 예배시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서 새롭게 나아가는가? 죄의 고백과 용서로서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단번에 이루셨지만 이것의 적용은 현재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사함의 긴장이 없어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되신 하나님의 흘리신 피를 지금 나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현재적 긴장이 있어야 한다. 또 결단과 결심의 차원의 제사로서 고대의 이스라엘이 언약법을 받고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피를 뿌렸듯이 현대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에 얼마나 생명을 걸고 언약법을 지키겠다는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는가? 그리고 예배후에 나와 공동체가 다시 죄를 지었을 때 그리스도의 보혈을 또 다시 의지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우리는 얼마나 의식하는가?

 

<거룩과 정결법>

레위기의 가장 지배적인 단어는 거룩과 정결일 것이다. 거룩의 정도를 증거막에서 나누어 보면 증거막 밖, 번제단이 있는 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로 구분할 수 있고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차례로 구분되어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처럼, 레위기에서 거룩(qadosh)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이스라엘이 이루어야 할 상태를 의미하였다.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과 늘 만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거룩은 실제에 있어 소극적 혹은 적극적 의미의 이중성을 가진다. 소극적 의미는 모든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조심하는 것이다. 레위기는 대부분 이런 의미의 내용을 다루며 이 오염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소개한다. 그러나 거룩의 적극적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즉 거룩한 것이 오염된 물체나 사람에게 접축했을 때 그것을 정복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경우로서 레위기6:18,27에서 거룩한 물건에 접촉한 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전7:14은 불신자인 배우자가 신자인 배우자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나아가 그 자녀까지도 거룩하게 되는 사실을 말하는데 이것도 거룩의 적극적 의미를 나타내는 예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수행할 때, 부엇 보다도 스스로 죄를 멀리하고 더러운 것에 오염되지 않토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거룩의 적극성을 확신하고 오염되고 타락한 곳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거룩으로 정복하여야 한다. 반면에 정결(taher)은 물건이나 짐승, 질병등 구체적인 사항을 나타낼 때에 쓰였다. 정결에 대해서는 먹을 수 있()는 동물(11), 자녀출산(12), 피부병(13-14), 유출병(15)의 네가지 구체적인 경우를 들고있다. 이 네가지 정결법의 원리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세상과 그 속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언약백성으로 구속하신 하나님이 그 창조와 구속의 질서룰 유지하는 것이 정결법의 근본 목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창조질서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언약백성의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구속질서를 따라서 이스라엘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죄일(16)을 중심으로 그 앞에서는 물건과 관련된 거룩과 정결을 말하고(11-15), 그 뒤에서는 인간관계의 윤리적인 삶의 거룩과 정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거룩과 정결을 요구하는 중심에(15) 대속일에 관한 규례가 놓여있다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속죄일 제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과 지도자 심지어 제사장들 조차도 일년동안 범죄하였고 심지어 증거막 조차도 오염되었으므로 그 모든 것을 씻어 낸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다양성과 포괄성이 레위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특히 대속죄일 의식을 통해서 깊이 있게 나타난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만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사역을 감당한 것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대속죄제의 제사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드리셨다. 그리하여 이제 신약의 성도들은 누구든지 담대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및 속건 사역을 세상에 적용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대속죄일 규례를 포함하여 그 앞의 거룩 및 정결 규례(11-16)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완전하게 하는 것과 관련되고 이어서 18-22장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수직적인 관계가 정리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간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어떻게 성결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레위기의 절기들>

절기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한 출애굽기(23)나 상세하게 설명한 신명기(16)에 비하여 레위기 23장에 표현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모두 추수와 관련되어 감사의 의미로 번제(23:12), 속죄제(23:19), 화목제(23:19)의 희생제물을 드렸다. 누룩없는 떡을 먹는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신 날짜는 정확하게 유월절에 일치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구속의 첫 열매 (고전15:23)가 되시고 그 대속 사역의 결과로 새 생명을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무교절과 유월절의 현대적 의미는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대속의 사역을 감사하고 적용하고 선포하는 데 있다. 현대의 성도들에게 이 절기는 과거적이며 이미 역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이루는 기초를 이 역사적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우주적 대속의 사역위에 든든히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오순절, 즉 칠칠절 혹은 맥추절은 첫 절기인 유월절 후 50일째에 지키는 절기이며 신약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이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게 하신다(8:23) 구약의 오순절의 현대적 의미는 이제 신약의 교회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속죄사역을 현재적으로 적용하실 것을 고대하며, 주신 성령의 은사(고전12-14)와 성령의 열매 (5)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력 7월은 절기로 가득찬 달이다. 1일은 그 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절이요. 10일은 대속죄일이며 15-21일은 초막절, 장막절, 혹은 수장절로 불려지는 이스라엘 3대 절기의 마지막 절기이며 그리고 22일은 절기를 마무리 하는 거룩한 대회이다. 대속죄일은 일년에 한번 이스라엘 전체의 속죄를 위한 날인데 이 날후에 비로서 셋째 절기인 초막절이 시작된다. 그런데 유월절과 오순절이 신약에서 역사적으로 완성되었다면 초막절은 신약의 성도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사건인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으로 시작되는 우주적 추수가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구약의 나팔절과 같이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될 우주의 추수가 있을 것이며(살전4:16) 구약의 대속죄일과 같이 죄의 우주적 청결인 심판이 있으며, 그 후에 초막절과 같이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세절기의 역사적인 완성은 우리에게 구속사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주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안식년과 희년>

자본주의 경제원리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제도가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제도이다. 안식년만 언급하는 출애굽기(23:10-11)나 신명기(15)에 비해 레위기는 두가지를 다 언급하고 특히 희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한다. 이 두 제도는 결국 이스라엘이 장차 완성할 하나님 나라의 또 하나의 측면인 땅의 완성과 관련된다. 언약으로 완성된 그 씨가 그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선포된 것이다.

 

 

12장 레위기 1-7장의 신학과 메시지

 

구약이 말하는 제사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구약의 제사는 이미 언약관계가 깨어졌을 경우에 회복시키거나 이미 있는 언약관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경에서 사실과 사건을 기록하는 순서에 있어서도 이 점이 명백해진다. 먼저 시내산에서 언약관계를 공적으로 체결한 후(19-24) 증거막이 준비되었고(25-31, 34-40) 이어서 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1-7), 이 사실은 제사가 독립적인, 하나의 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앞에서 맺은 언약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레위기에는 언약법을 어긴 죄를 회복하는 제사도 있지만 죄와 관계없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서원하며 자원하는 제사도 있다. 이런 제사는 이미 건전하게 유지되는 언약관계를 사랑으로 더 깊이 발전 시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레위기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완성되었다고 짐작하고 레위기를 건너뛰어 읽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와 관계없는 제사의 의미는 충격적일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지라도 적극적인 자기적용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언약관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나아가 언약관계를 사랑으로 더욱 발전시킬 책임은 결국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다윗이 자원하여 성전을 건축할 의도를 가진 것 자체를 기뻐하시고 영원한 다윗왕국을 이룰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언약관계의 깊은 발전을 나타내는(삼하7) 좋은 사례이다. 속죄와 관계없는 제사의 이러한 적극적인 면은 현대의 성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사 드리는 장소인 회막>

성막,혹은 회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이다. 신약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구약의 증거막이며, 이 증거막에서 공적으로 증거하는 내용은 신약의 교회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당사자인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체적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증거막이고 교회이다. 즉 장소가 관건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만나는 것이 교회의 증거막됨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4:24)

 

<안수의 의미>

제사에서 안수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죄의 전가(transfer of sin) 혹은 짐승이 사람을 대신함(substitute)의 두가지로 해석된다. 제사에서 안수하는 경우는 번제, 화목제, 속죄제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번제와 화목제는 죄와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7:12,16에는 화목제를 감사제, 서원제로 드릴 때 안수를 한다) 있으므로 안수의 의미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면 죄의 전가(transfer)보다는 대신함(substitute)의 개념으로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죄와 관련이 있는 제사에서 안수하는 경우는 안수한 짐승이 제사인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신약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죄와 관련이 없는 제사에서 안수하는 경우는 제사인의 감사와 서원의 표시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대신에 안수한 짐승을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안수는 제사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제사인 자신이 하는 것이다. 신약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내가 지은 죄를 대신하여 그가 죽으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나 공적인 예배에 임할 때마다 각자의 죄를 적극적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지하여 사죄를 확신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감사하여야 한다

 

<제사인과 제사장의 역할 분담>

구약의 제사인은 능동적으로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사인이 능동적이고 제사장은 제사인이 능동적으로 준비한 제물을 수동적으로 드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레위기 1-7장에서 각 제사가 두 번식 언급된 점이다.한번은 제사인의 관점에서( 1-5), 또 한번은 제사장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적극적으로 제사에 참여하는 제사인이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제사인의 관점에서 더 많이 기록되었다.예를 들어 속죄제를 설명할 때 제사장의 관점에서는 7절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6:24-30),제사인의 관점에서는 48절이나 할애된다(4:1-5:13)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가 언급된 6:19-23 에서는 제사장은 자신이 하나의 제사인이 되어 자신에게 해당하는 사항에 대해 제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사인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장은 오히려 그 준비된 것을 가지고 진행하는 모습은, 공동체 예배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현대의 예배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속죄의 중요성>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는 모두 다섯가지다. 이 가운데 죄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이고, 번제,소제,화목제는 죄와 관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다.어쨋든 제사는 죄와 관계된 것이 많은데,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서 죄의 처리가 중요한 문제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제사가 다섯가지인 것은 죄가 다섯가지 차원에서 처리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레위기가 얼마나 죄의 문제에 대해서 예민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제사들은 죄의 원인과 결과부터 완전한 회복과 치유까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선 번제와 소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를 돌이키며, 죄의 용서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헌신을 나타낸다. 화목제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에 막힌 담을 헐고 진정한 샬롬의 상태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 속죄제는 죄로 오염된 것을 씻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속건제는 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넘치도록 보상함으로써 완전한 원상복구를 목적으로 한다.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죄로 인한 모든 종류의 파괴와 파멸로부터 완전한 회복과 치유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때가 오기 까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전성과 전포괄성과 전능성을 믿으며 그것을 역사와 현실속에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제사의 종류 >

 

 번제(  1:1-17, 6:8-13)

번제(ohlah)가 죄와 관련된 경우는 주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1:9,13,17, 8:21, 15:24, 삼하24:25, 대상21:26,1:5, 42:8, 대하29:7-8) 그래서 작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번제의 신약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을 대신하여 완전히 태워지듯이 고난을 당하시고 지옥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한편 번제가 죄와 관련되지 않는 구체적인 예는 창22장에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인데, 이것은 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전적인 포기, 곧 헌신을 의미한다.또 언약제사에서 드려지는 번제(24;5, 27:6, 32:6 비교)도 이스라엘이 지은 죄와 무관한 것이고 언약당사자이신 여호와께 전적인 헌신을 나타낸다.그 밖에 죄와 관계없는 경우들(18:11-12,완상18:38-39, 삼상15:22, 40:7, 6:14, 15:3, 50,66:13-15)을 종합해 보면 번제는 전적 헌신,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조건없는 봉사와 관련되었다. 번제는 완전히 태워짐의 개념이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강조 되었고 이것이 죄와 관계된 경우는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를 돌이키는, 죄와 관계없는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제사였다.또 번제단의 불은 꺼뜨리지 않아야 하고(6:8-13) 또 번제는 매일제로 드려졌다(28)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지속적인 경각심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변함없는 헌신을 드려야 함을 나타낸다.

 

 소제(  2:1-16, 6:14-23)

소제(minchah)는 제사중에서 유일하게 짐승의 희생, 곧 피와 관계없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소제는 일종의 선물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인간이 드리는 감사의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소제는 단독적으로 드려지지 않고 항상 다른 제사와 동반하여 드려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소제는 인간 편에서의 반응, 즉 감사와 찬양, 헌신과 봉사를 표시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약적으로 소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하신 모든 행동, 즉 구속과 사죄와 회복 그리고 열매, 능력주심, 사랑과 관심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나타낸다. 소제를 드리는 방법은 굽거나, 부치거나, 삶거나(2:4-7) 다양한데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로 반응하는 것은 사람의 여건과 재능에 따라 다양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제에는 소금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며(2:13 언약의 소금) 누룩과 꿀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되며(2:11) 기름과 유황은 없어도 되지만 들어가면 좋은 것이었다. 여기서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소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가 영원한 것임을 재천명하는 것이다.(18:19, 대하13:5) 반대로 들어가면 안되는 누룩과 꿀은 언약관계를 부패시키는 요소를 경계하는 것이고 기름과 유황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편에서 자원하는 마음과 순전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화목제(  3:1-17, 7:11-21)

화목제(shelamim)는 죄와 관련된 경우,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가 파괴되었을 때 이것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제사로서 쌍방적 관계의 평안(shalom)이라는 의미를 명백히 가지고 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샬롬을 제의히신 것이고 사람이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관계회복의 길을 따르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화목제가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세가지 경우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감사제(7:12),자원제(7:16),서원제(7:16,7:14 비교)가 그것이다. 감사제(todah, thanksgiving)로 드리는 화목제는 이루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로서 (35:29, 1:4, 8:28, 54:6) 드리는 것으므로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과거와 관계된 제사인 셈이다. 자원제(free-will offering)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요구에 내가 부응키로 작정하고 자발적아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제사이다.이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현재적 관계를 더 깊게 이어 나가는 제사이다. 서원제(vow)로서의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혹은 과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하여 약속했던 서원을 미리 혹은 이제야 갚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계된 제사인 셈이다. 이렇게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화목제는 그야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쌍방의 깊은 이해와 사랑속에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신약적으로도 화목제는 하나님의 과거의 은혜에 대함 감사, 혹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아 드림 혹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역사속에서 인간의 활동이 사용되기를 서원하는 인간편에서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적용하여 볼 수 있다. 이것으로 언약관계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으로 더 깊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모름지기 언약은 인격당사자 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쌍방의 노력에 의해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번제는 모든 것이 채워지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만 태우고 가슴과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제사인이 먹을 수 있는 것이 화목제이다.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렸지만 다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특별한 제사로서 이것은 언약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거나 더 깊이 발전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기쁨 가운데 다시 되돌려 주시는 선물인 셈이다. 이 공동식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스라엘 서로 간의 관계가 샬롬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발전하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했을 것이다.

 

 속죄제(  4:1-5, 6:24-30)

속죄제(chatat)는 근본적으로 죄 자체를 처리함으로써 오염과 부패와 타락을 적극적으로 막아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속죄제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죄 자체를 처리하여 죄의 근본을 없애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역사를 이루셨다. 인간 세계에서 죄의 오염을 없애고 죄에서 자유케 한 것이다. 신약의 세례(baptizo)에 정결케 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의미가 표현된 것이라면(6) 이 의미를 구약의 속죄제외에 다른 제사에서는 찾을 수 없다. 주목할 점은 레위기에서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비의도적으로(4:2,13,22,27) 범한 것 만을 가리킨다. 만약 의도적으로 지은 죄가 있다면 그것은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은 구체적인 법의 발원지이시며 언약의 주체이신 여호와의 권위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므로 언약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속건제(  5:14-6:7, 7:1-10)

구약에서 죄를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제사에 속죄제만이 아니라 속건제도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에게는 충격적이다. 속건제(asham)는 죄 때문에 생긴 손해를 처리하는, 즉 보상하는 제사의 의미이다. 이 제사는 죄가 지어졌을 경우에 만족할 만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고, 갚아야 할 죄의 빚이 처리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가 속건제에 있다, 이사야 53장은 속건제의 의미를 가장 적극적이며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구절로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값을 대신 치르는(substitution)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것을 나타낸다.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두가지 경우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죄를 범한 것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법정에서 그릇 맹세되었을 경우이다.

 

 

 

13장 민수기의 신학과 메시지

 

 

<민수기의 구조와 신학>

민수기는 레위기와 또 그 앞의 출애굽기와 함께 한 단위의 책을 이루어 하나의 궁극적 목적,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역사속에서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레위기의 뒷부분( 17-26)과 민수기의 앞부분(1-10)은 하나의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거룩이 이제 성막을 중심으로 어떻게 이스라엘 삶의 전반에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수기의 내용을 시간적 관점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고 뒤바뀌어 있는데, 1:1에서 출애굽 2 21일을 먼저 언급하고 다시 7:1 9:15에서 한달전인 출애굽 2 11일로 소급하여 기록하고 다시 10:11에서는 출애굽 2 2 20일로 환원된다. 민수기를 지리적 관점에서 구분하면 1:1-10:10은 출애굽1-2년후인 시내산에서, 10:11-12:16은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이고 13:1-19:22은 광야, 20:1-22:1은 가데스에서 모압까지, 10:11-22:1은 출애굽 제 3-39년까지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시기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22:2-36:13은 출애굽 제40년의 모압에서의 기록이다. 또한 민수기를 모병조사를 중심으로 보면 첫 단락인 1-10장은 제1차 모병조사의 기록이고 ,둘째 단락인 11-25장은 광야에서의 파멸의 기록이며, 셋째 단락인 26-36장은 제2차 모병조사 기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 단락은 광야여행이 시작될 때의 상황이고 셋째 단락은 38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의 상황인데 민수기에서는 동일한 주제가 첫단락과 셋째 단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민수기가 둘째 단락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구조(concentric pattern)를 가지는 복합적인 구조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민수기는 광야에서의 불순종을 가운데 두고 앞 뒤로 시내산과 모압에서의 이스라엘의 순종을 위치함으로써 시내산과 모압에서 이스라엘의 순종은 축복으로 보상을 받았지만 광야에서의 그들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하였음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결국 동심원적 구조를 가진 민수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가운데에 위치한 둘째 단락인, 광야에서의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다.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순종과 그에 따른 언약적 저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그 중심에 놓은 것은 정당한 것이다. 민수기는 이렇게 부정적인 역사관 혹은 역사비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부정적인 역사관은 세겜에서의 2차 언약갱신에서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여호수아 24장에, 그리고 이후의 신명기에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오경 속에서 민수기의 신학적 내용의 의미>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四經(tetrateuch)은 시간의 진행과 내용에 있어 서로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면 이런 구조를 가진 민수기는 오경 전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오경은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형성 역사를 그리는데 창세기에는 그 형성의 준비로서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씨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이며 신명기는 땅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보이고 있다. 씨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나타내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의 기록중에서 출애굽기는 그 나라가 어떻게 70명의 조상에서 출발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에서는 하나님과 언약백성으로서 어떻게 그 언약을 유지,발전하며 살 것인가를 소개한다. 이제 민수기는 이런 가운데 그 씨가 어떻게 완전한게 마련되는가를 두 번의(1-4, 26) 모병조사 사건을 통하여 보여준다. 이 사실이 가르치는 진리는 아무리 정해진 혈통을 따라 사람의 숫자가 준비되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13-14)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고 새롭게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은 혈통을 따라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1:12-13). 민수기는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현재 언약적인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그 세대가 전멸되는, 하나님나라의 삶의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 다음의 책인 신명기는 하나님 나라의 땅의 완성을 주제로 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현재적으로 그 땅에서 언약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저주를 미래에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수기와 신명기의 신학적인 의미는 동일하다. 즉 두 책은 모두,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언약에 현재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머무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이 출애굽 1세대를 전멸하게 만들었던가?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직후에,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다른 신인 황금송아지와 언약을 맺는 행동을 했다. 이때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진멸하려고 했으나 모세의 헌신적 중재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일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범죄하였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심판하셨다. 그러나 민수기 13-14장에서 행한 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를 진멸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그들의 행동이 이런 중대한 심판을 받을 만한 행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경의 주제인 하나님나라의 형성과정에서 민수기는 하나님 나라의 씨가 완성되고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나라의 땅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나서 낙심하여 하나님 나라의 땅의 완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잃어 버렸다. 이러한 불순종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나라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 나라의 씨인 그들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출애굽1세대를 전멸시키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대신 2세대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형성하는데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민수기의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언약의 역사가 진행되는한 변함없는 진리로서 새 언약의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현대의 하나님 나라의 씨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모병조사와 부족들의 배치: 1-2,26>

모병조사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셨다. 이것은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씨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미 본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숫자의 과다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순종하는 데 있다. 한편 모병조사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20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만한 남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투진영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가 진행하는 것을 증거막이 좌우했다.(9:15-23) 이렇게 증거막을 중심한 이스라엘의 행동의 결정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행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증거막이 거두어 지고 가장 먼저 증거궤가 떠날 때에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10:35), 궤가 쉴 때에 여호와여 돌아오소서’(10:36)라고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훗날 여호와의 전쟁(Yahweh as a warrior)의 모티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즉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그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전쟁을 완수하셔야 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그 하나님이 돌아오셔야 하는 것이다.

 

<현재적 순종과 불순종: 언약백성됨의 관건: 11-25>

이스라엘이 영광의 출애굽을 경험하고 더 영광스러운 언약백성이 되는 예식을 올렸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물과 고기의 문제로 범죄하였지만(16-17) 그 때는 아직 언약백성이 되기 전이므로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언약백성이 되고 난 후에는 예외 없이 모든 범죄를 심판하셨다. 이렇게 참다운 언약백성이 되는 길은 실제적인 삶의 엄청난 난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언약이후의 범죄들, 고기의 문제(11:33), 고라당의 반란(16), 미리암과 아론의 도전(12), 모세의 불순종(20) 등 이런 범죄들을 하나님은 개별사건을 개별적으로 심판하셨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 세대가 거역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룩함(qadosh) 언약적 의미는 언약의 당사자에 대해 충실하다는 의미이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언약적인 사랑으로 행동함에 대하여 이스라엘도 동일한 언약적 사랑으로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이점에서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에게는 내부의 싸움, 즉 자신과의 싸움이 외부와의 전쟁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14장 민수기 1-10장의 현대적 의미

 

민수기 1-10장의 규례와 내용들은 그 앞의 책들인 출애굽기 후반이나 레위기의 내용과 함께 현대인에게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갖는 종교적인 가치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선지서나 시편보다 훨씬 더 풍부한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 민수기에 나타나는 종교적 제도의 법들이 현대 개신교인 들에게 생소한 이유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예언자적 영성을 제사장적 영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으며 또한 제사장적 영성을 로마교의 것과 동일시 하여 그 내용을 다루는 본문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언자는 일종의 개혁가로서 개혁이 팔요할 때에 등장했던 인물인 반면에 제사장은 항상 있는 직분으로서 종교의 전통과 맥락을 이어가는 중요한 기구였다. 에언자는 후대에 왕 제도와 함께 이스라엘 무대에 등장하였으나 제사장은 처음부터 계속 있어 왔고 심지어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유일한 기회로서 주어졌던 제도였다.

 

<민수기 1-10장의 구성> 출애굽기, 레위기의 연속으로서의 민수기

민수기의 첫 부분(1-10)은 내용적으로 바로 앞의 레위기와 직접 이어져서 시내산에서의 사건과 준비가 연속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레위기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성막, 즉 증거막의 내부와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소개하였으나, 민수기의 첫 부분은 그 증거막 주위의 상황, 즉 이스라엘이 어떻게 조직적인 진을 형성하여 증거막을 둘러싸고 행진할 것인가를 소개한다. 이렇게 민수기 전체는 출애굽기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제도적으로 완벽히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가운데 현실화되는 과정은 씨가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수기는 그 씨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인도로 완벽하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준다. 애굽에 내려간 70명의 야곱 족속이 충만하게 불어나는 과정과 (1-2) 그 백성이 질곡을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3-15)을 거쳐서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예식을 행할 시내산에 이르러서 언약을 맺었다(19-24)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의 삶을 보장하는 증거막을 중심으로한 삶의 규례를 다방면으로 다루면서 하나님 나라의 씨의 완전한 면모를 갖추었고(25-10) 이제는 가나안을 향해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서 약속된 그 땅을 유업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함으로 그 씨인 출애굽 1세대는 그 땅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세대가 전멸되기를 기다리는 38년이라는 잔인한 세월과 출애굽 2세대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인내의 세월이 남았을 뿐이었다(11-25). 이어서 형성된 출애굽 2세대가 철저한 순종을 바탕으로 약속의 땅 언저리까지 인도되는 과정을 보게된다(26-36) 

 

<민수기 1-4> 증거막을 중심으로 한 언약백성의 진배치와 행진

민수기의 인구조사는 일반적인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투병력 조사였다. 즉 전쟁에 나갈만한 자를 그 군대대로 계수하였으므로 여자가 아닌 남자만 계산되었고(1:2), 20세이상으로 싸울수 있는 자를 모두 계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전투적 모습을 본다. 불의와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것들을 파괴하며(광야여행 중의 전투),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주신 것들을 정복(가나안 정복)하는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모습인 것이다. 창세기부터 레위기까지는 하나님나라는 수동적, 수세적이었거나 (1-11) 형성기를 거치는 과정(12-레위기)이었다면 민수기에서는 드디어 철저하게 조직되고 무장된 하나님 나라의 군대의 윤곽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이 군대는 두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언약의 마지막 요소인 땅을 차지하는 기능과,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참으시기 어려울 정도로 된 가나안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기능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질서없이 조직된 것이 아니었다. 먼저 각 지파를 다스릴 족장들이 선정되었고 이들이 각 지파의 군인들을 계수하였다(1:1-19), 각 지파도 아무렇게나 언급된 것이 아니라 증거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맡을 네 지파군으로 구성되고 각 지파군은 유사한 성격의 지파들끼리 모여있다. 증거막과 함께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순서는 유다 지파군- 르우벤 지파군- 에브라임 지파군- 단 지파군으로 이어지고 증거막은 모든 지파의 가운데서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증거막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큰 것이다. 이것은 행진을 하지 않고 포진할 때에도 증거막이 중심에 있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하나님의 증거막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지키시고 오히려 제사장과 레위인이 증거막 주위에 포진하여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증거막과 함부로 접촉하여 죽는 것을 막았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계수할 때에 레위지파를 그 속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1:47-54) 레위지파의 역할이 다른 지파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각 지파의 인구조사의 목적은 전쟁을 위한 모병이었으나 레위지파의 인구조사는 직접적인 전쟁이 아닌 증거막의 모든 기구들을 관리하고(1:50-51), 증거막과 이스라엘 사이에 포진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1:53) 그러므로 다른 지파와 달리, 레위지파는 20세 이상이 아니라, 태어나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판단되는 생후 일개월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다 계수하였다.(3:39). 다른 지파가 하나님 나라의 직접적인 전투에 임하여 외부의 적과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레위지파와 같이 내부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를 위하여 언약관계의 법칙을 따라 살게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이것은 공동체 외부와의 전쟁과 함께, 공동체 내부를 청결하게 하고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나타낸다.

 

<민수기 5-6> 여호와께 구분된 백성의 삶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분되었다.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향하여 구분되어야 한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여호와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는 언약적 표현의 실제적 의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서 이런 여호와를 만날 수 없는 세가지 경우(5:1-4)를 들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완전하지 못하거나 죽음과 상관이 있는, 즉 생명과 완전한 창조의 하나님의 속성과 배치되는 현상을 경험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일시적으로 격리되어 진 밖에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서약과 관련된 네가지 법규를 소개하는데 (5:5-6:27)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입을 사용하는 영역에서도 하나님께 구분되어야 하는 것을 나타낸다. 먼저 타인의 소유물에 대하여 손해를 입히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거짓 증거한 경우를 들고 있다(5:5-10) 이것은 속건제로 알려진 보상제 혹은 배상죄에 해당한다. 이런 죄는 두 단계로 처리되는데, 먼저 죄 지었음을 고백하고 또한 죄값을 충분히 보상하되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덧붙여야 한다. 둘째로 의심받는 아내 (5:11-13)는 고대 근동에서 흔히 있었던 시련을 통한 진위 확인 관습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구약법이 고대 근동의 관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의심을 받는 사람이 위험한 과정을 통과하는 일이 없고, 의심하는 남편과 의심받는 아내를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나실인의 규례이다(6:1-21) 이 본문에서 나타난 것은 나실인의 서약을 어떻게 완벽하게 시행할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나실인의 규례는 제사장의 그것과 유사하게 포도주나 강한 술을 금지하는 것이고 시체와 접촉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 규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제사장은 레위인중 남자만 할 수 있으나, 나실인은 모든 지파중에서 누구나, 그 중에서도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나실인으로 있을 기간도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점이다. 구약의 제도를 철저히 수동적이고 하향적으로 주어지는 명령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여성의 하나님을 향한 자빌성을 인정한 나실인 제도는 충격적일 것이다. 나실인은 여호와게 구분된 (거룩한)자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구분된 삶을(어떤 의미에서는 제사장보다 더) 살아야 한다. 로마서 12:1-2은 그리스도인이 신약적 의미의 나실인적인 삶을 살 것을 명령한 것이다. 넷째는 대제사장적 축복, 소위 Barucha이다(6:22-27). 거의 조화로운 tricolon형식으로(6:24-26) 이루어진 본문의 주제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임이 엄청나게 강조되었음으로 보게된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각 colon에서 정확히 두 번째 위치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또 대 제사장적인 축복이 끝나고 나서도 하나님의 이름(내이름-6:27)의 권위가 다시 강조된 것으로 알 수 있다. 6장에 이어서 7장에서 증거막이 봉헌될 때에 지파장들의 예물드림이 기록된 것은 6장 마지막의 대제사장적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서 지파장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나타낸다. 이들의 예물은 12지파 언약 공동체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12마리의 소와 두 지파에서 한대씩 마련한 수레이다. 이러한 수레는 12개의 진설병이 두열로 배열된 것과 동일하다. 이어서 레위자손의 헌신법(8:5-26)이 나오는데 그 과정은 나실인의 그것과 명확히 대조된다. 나실인의 경우는 특별한 예식이 없으나 여기서는 명확한 예식이 있고, 나실인은 삭도를 대지 않으나 여기서는 오히려 전신을 삭도로 밀며 옷을 빨고 정결케 한다. 또 나실인은 기간이 끝났을 째 번제제, 속죄제, 화목제, 소제의 4가지 제사를 드리는데 비해 여기서는 시작할 때에 번제, 소제, 속죄제의 3가지를 드린다.

 

<민수기 9-10> 두번째 유월절과 행진의 준비완료

이제 이스라엘의 군대와 그 제도형성의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고 그 땅으로 행진하는 일만 남았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사항이 여기에 기록되었다. 우선 두 번째 유월절 행사(9:1-14)를 기록한 것은 이것이 시기적으로 이 때의 당면과제였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하셨던 대로 유월절 예식을 행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특히한 예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 참여하는 유월절에 참여하라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 있지 않으면서도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백성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를 받았다. 그러므로 백성이 하나되어 언약공동체가 출발한 과거를 회상하고 즐기는 곳에는 한 개인이 비윤리적인 허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보다 공동체적 차원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중요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타국인이 유월절에 참여하기 원하면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엄청난 자비가 베풀어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자비의 공동체로서의 적극적인 측면을 형성 초기부터 보인 것이다. 증거막 위의 구름의 신호(9:15-23)와 두개의 은나팔(10:1-10)의 내용은 서로 상관되는 것이다. 즉 구름이 일어나거나 머무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막을 떠나게 하시거나 멈추게 하심을 주권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인간들이 해야할 일은 은나팔을 만들어서 구름의 움직임의 신호를 따라서 부는 것이었다. 이 은나팔 소리는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기도였다. 은나팔을 한번 불 때는 지도자가 모이고, 두 번 불 때는 백성 전체가 모였다. 그러나 울려서 불 때는 전투대형으로 한 지파씩 행진하였다. 이때 각 지파는 예상했던 대로 분해된 증거막을 중심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떠나는 상황을 여호와의 산을 떠난다(10:33)고 표현하였다. 즉 출애굽기 31, 185절의 하나님의 산이라는 목표점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된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스라엘이 떠날 때, 즉 궤가 떠날 때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qumah Yahweh)라고 기도하였고 궤가 쉴 때 여호와여 돌아오소서(shubah Yahweh)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철저히 이스라엘의 행동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행동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15장 신명기의 신학과 메시지

 

우리는 신명기에 나타난 다음 3가지 성경신학적 관점에 근거하여 신명기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다루려고 한다. (1) 신명기는 통일성을 가진 실체이며, 그 통일성의 근본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갱신하는 언약인 모압(세겜)언약이다. (2)신명기의 핵심인 모압(세겜)언약은 최초의 근본적 언약인 시내산 언약과 쌍을 이룬다. (3)시내산 언약과 모압(세겜)언약은 구약의 나머지 책들의 형성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성경신학의 핵심으로서의 언약신학>

 

 언약신학에 대한 재평가

언약이 성경신학의 핵심이라는 생각과 그것으로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의 근본을 형성해 보려는 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언약신학은 두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자유주의 언약신학의 한계인데 이 신학은 언약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제도가 아니라, 어떤 신학자나 학파가 만들어낸 신학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보수주의 언약신학의 한계이다. 이 신학은 전통적으로 언약신학에 대하여 주석적인 근거를 약하게 가지거나 아예 가지지도 않았던 경우도 많고, 심지어는 단순히 조직신학적 요청으로 언약신학이 만들어지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런 두가지 신학적 전통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구약의 언약을 해석하기 위하여는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정교하게 정의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신학적 요청으로 성경학에서 언약신학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철저한 주석적인 연구를 통해 언약의 실제적인 내용이 그 시대의 삶의 상황 속에서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언약이 과연 고대 근동의 유사한 제도와 어떻게 관련되며 또 성경의 언약의 독창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하여야 한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은 인격 당사자간에 공적인 관계를 법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이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종교제도였다. 이것과 유사한 제도가 고대근동의 입양제도나 국가간의 조약제도 이었다. 고대 근동의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조약은 성경의 언약과 아주 유사하며 특히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존재했던 헷제국과 애굽간에 맺은 조약은 성경의 언약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은 신학계에서 거의 상식이 되었다. 이런 지리적, 역사적 상관성 속에서 조약개념과 유사한 구약의 언약개념이 창조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공적관계를 맺는 고대근동의 제도와 유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공적으로 규정하는 언약 체결의 구체적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약 당사자간의 공적관계의 쌍방정의. 언약 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언약관계법의 제시와 수납  언약체결 비준, 제사 및 언약문서 작성  언약체결후의 피로연

 

<오경을 중심한 언약신학의 수립>

 

 모압(세겜)언약

오경에서 언약이라고 표현한 곳은 여러 군데이다. 아담언약이나 노아언약은 언약이란 말은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규정하는 언약의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므로 이것들은 단순한 명령이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언약의 결과로서 생기는 것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 구성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이다. 오경은 이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완전하게 형성되는가를 보이는 책이다. 주권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여호와께 있다. 창세기에서는 족장언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 되었고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 씨가 완성되었으며 이제 신명기에서는 모압언약을 통해 땅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명기의 핵심주제인 모압언약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모압언약이란 말이 나오는 신29:1절의 앞부분인 신5-28장에서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구체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다 발견할 수 있다.

 

시내산 언약 모압(세겜)언약

 언약 당사자간의 공적관계의 쌍방정의 출19:5-6 26:17-19

 언약 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출19:9-25 5:2-3

 언약법의 제시와 수납 출20:1-17 5:7-21

 언약 세부법의 수납 출20:22-23:33 6-11, 12-26

 언약체결 비준, 제사 및 언약문서 출24:3-8 27

 언약체결후의 피로연 출24:9-11 27:7

 

모압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다른 점은 축복과 저주가 있다는 점이고 고대 근동의 다른 제도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용서가 있는 것 인데 이런 차이점들은 모압(세겜)언약이 최초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새로운 상황에서 갱신한 언약이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오경의 언약과 구약의 다른 책들과의 성경신학적인 관계

19세기 말부터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종교의 유일성을 윤리적 유일신론(ethical monotheism)에서 찾았다. 그 결과 그들은 예언자가 종교의 출발점이고 오경은 가장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오경의 언약신학이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언서 메시지의 세가지 축인 정죄-심판-소망의 근거가 오경의 언약신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정죄는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책망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상에게 선 이해된 법의식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경에서 이미 주어진 언약법에 근거한 것임이 명확하다.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심판은 이미 오경에서 언약체결시 선포된 언약적 저주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언서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소망의 메시지( 31:31-34의 새언약, 36-37장의 화평의 언약)의 근거는 바로 모압(세겜)언약의 마지막 부분인 신30:6에서 발견할수 있다. 에레미아와 에스겔은 그들의 메시지에서 새로운 언약에 궁극적으로 소망을 걸고 있는데 이것은 신30:6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마음의 할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경의 언약신학, 특히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은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30:6절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베푸신다는 메시지는 신명기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책임을 끝까지 강조하는 가운데 주어졌다. 이것은 게으른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자동적을 해결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지 못하도록 하며 인간편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여 회개하며 노력해야 할 것과, 최종적으로 인간의 역사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서의 첫 번째 시리즈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예언서에서 처럼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가 나타나며 그속에 일단의 소망의 요소가 보인다는 점에서 신명기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열왕기상 8장의 솔로몬의 기도의 내용들은 신명시 28장이나 레위기 26장의 저주 목록과 유사하다. 이 첫 번째 역사서 시리즈의 촛점은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의 멸망이다. 그러므로 그 핵심 메시지는 언약적 원리에 따라 이스라엘의 범죄로 심판이 임하였으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언약적 원리에 따라 회개함으로써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서의 두 번째 시리즈인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지나고 회복의 시기가 도래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 기록된 책들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시리즈의 메시지의 핵심은 오랫동안 소망을 잃고 살아온 이스라엘이 이제는 진정으로 언약법으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근본적으로 갱신함으로써 (7-9)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시가서에도 언약과 관련된 수 많은 주제들이 있는데 토라와 그 법에 관한 관심을 나타낸 시편들 (1,19,119,15,24)이나 언약갱신과 직접 관련된 시편 (24,50) 그리고 참된 예배나 제사등과 관련된 관심들이 그것이다. 특히 시가서의 많은 내용들은 신31:9 이하에 주어진 매7년 마다 정기 초막절에 공적으로 치루어야 하는 언약갱신 축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타 다른 주제들도 오경의 언약을 기초로 하여 주어진 것이며 발전된 형태의 것이다. 서구의 구약신학, 특히 독일신학에서는 지혜서를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인간의 자기성찰의 산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이다. 지혜서의 근본 주제가 여호와를 두려워 함이고 토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지혜서의 이 두가지 주제가 바로 오경의 언약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두려워함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을 만날 때 경험한 것이고 토라를 준수하는 것은 언약조건인 언약법을 제시히고 수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토라를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오경의 언약신학은 지혜서 신학의 근간을 형성한다. 오경, 그 중에서도 특히 신명기를 연구하거나 설교함으로써 가지는 장점은 이런 성경신학의 핵심과 정점을 다루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구약의 다른 책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초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모압(세겜)언약의 성경신학적인 특이성>

 

 땅의 신학인 모압언약

신명기의 신학적 특성의 하나가 이라는 점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신명기가 그 앞의 책인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와 관련되는지를 잘 밝히지 못했다.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근본적으로 시내산 언약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형성에 기여한다. 즉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에 모압언약은 하나님나라의 땅의 완성에 관련된다. 시내산 언약이 기록된 출19-24장과 언약후의 역사가 기록된 출25-36장은 이제 이스라엘이 완성된 씨로서 모압땅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모압언약은 준비된 그 씨가 어떻게 준비된 땅에 들어가서 살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모압언약은 그 땅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면들을 시내산 언약보다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이 씨의 신학이라면 모압 언약은 땅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게 이 두 신학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씨와 땅이 준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씨가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 그 씨와 그 땅도 존재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총이지만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언약적 삶을 살지 않을 때는 오히려 그 언약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이 언약적 심판의 원리는 구약 이해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모압(세겜)언약의 언약법으로서의 토라(torah)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을 살펴볼 때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토라(torah)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시내산 언약의 언약문서를 언약의 책’ (sept haberith, 24:7)라고 지칭한 것과 같이 신명기는 스스로를 가르켜, 구체적으로는 모압(세겜)언약을 가르켜 토라(torah)라고 지칭하였다. 토라라는 말은 모압언약을 마무리하는 신명기29-31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토라가 막연하게 법을 가르키는 용어가 아니라 모압(세겜)언약을 가르키는 용어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토라는 단순한 법이 아니라 언약을 세우신후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신 언약법인 것이다. 이러한 토라에 대한 이해는 유대교의 토라 이해나 혹은 고대 근동의 강압적인 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토라를 대부분 법 그 자체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토라속에서 언약적인 요소를 빼어 버리게 되면 구약의 신학적인 내용은 유대교의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구약법의 독특성은 그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존재 기반인 언약에 있다. 즉 법 자체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제도속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물과 떡의 문제로 범죄하였을 때 언약전에는 심판을 받지 않았으나 (15-18) 언약후에는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심판을 하셨다(10장 이하)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또 언약은 법적인 행동의 동기를 제시한다. 법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저주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하신 언약의 상대방인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의 언약에 근거하여서 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구약 법 철학의 기초이다.

 

모압(세겜)언약의 이중성

신명기의 언약은 모압과 세겜의 두 장소에서 현재와 미래의 두 시간에 걸쳐 모세와 여호수아의 두 지도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특이한 언약이다. 신명기의 언약이 쉽게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명기 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것이다 언약갱신은 언약당사자가 바뀌었거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이루어진다. 우선 이스라엘이 세대교체를 마무리 하고 새로운 세대가 이스라엘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에서 언약을 갱신해야 한다. 또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자로 세대교체를 해야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언약을 갱신한 것이 신명기 언약이었으므로 모세는 언약갱신에 필요한 모든 것(언약관계 선언, 언약당사자 만남, 언약법 선포)을 모압에서 자기가 다 완료해 놓고 나머지 언약예식(언약준비예식, 축복과 저주, 언약 피로연)만 여호수아에게 남겨두고 그가 약속의 땅(세겜)에 들어가서 행하도록 마련해두었다. 모세가 모압에서 완료해 놓은 것은 모두 법적인 부분들(5-11, 12-26)이고 여호수아가 미래에 세겜에서 할 일(11:26-30, 27-28)은 모두 제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둘이 합하여 하나의 언약이 되게 하였으므로 신명기 언약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압(세겜)언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신명기의 언약은 모압의 측면에서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이나 세겜의 측면에서 보면 미완성이다. 즉 완성된 것이자 동시에 미완성된 언약이다. 이루어 졌으나 앞으로 이루어 져야할, 이 상태는 신명기 신학의 중요한 긴장을 조성하며 구약의 다음 책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언약관계의 근본적인 선언

고대근동의 조약문서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부르는 전문용어인 segullah가 바로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는데 동일하게 사용되었다(19:5, 26:18)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강대국-약소국의 관계에 유비(analogy)시켜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배로운 자로 선언하였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선언은 생략되어 있으나 신명기 언약에서는 여호와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26:17) 그리고 너는 나의 보배로운 백성이다(26:18)라고 완벽하게 쌍방의 선언으로 표현되었다.그런데 시내산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두번째 선언은 제사장 나라인데 이것에 대응하는 모압언약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언은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에서 말하는 제사장 나라의 의미를 모압언약에서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제사장 나라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제사장으로 기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대사회의 제사장 같이 최고의 지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글로 뛰어나게 라고 평범하게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호와의 지고하심을 나타내는 데만 사용되는 elyion이란 단어이다. 이것은 신28:1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향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이 용어는 가히 신명기의 혁명적인 용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서 지고지존 하신 것 같이 이스라엘도 세상을 향해서 지고지존 하다는 의미이다.

 

<신명기의 구조와 그 특이성>

신명기는 핵심인 모압(세겜)언약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구조와 핵심자체의 내부구조(4:44-29:1)로 나누어진다. 외부구조는 핵심을 중심으로 앞에는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1:1-4:43)가 뒤에는 이스라엘의 미래의 역사(29:2-34:12)가 놓여 있으면서 가까운 과거(1:1-3:29)와 먼 과거(4:1-43) 그리고 먼 미래(29:2-30:20)와 가까운미래(31:1-34:12)가 서로 대응되는 동심원적 평행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핵심 자체의 내부구조는 첫째 법적요소(4:44-11:25)와 첫째 제의적 요소(11:26-32) 그리고 둘째 법적요소(12:1-26:15)와 둘째 제의적 요소( 26:16-28:68)로 구성되는 정상적 평행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신명기는 모압언약을 중심으로 내부구조와 외부구조가 다양한 평행법(parallelism)을 사용하고 있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아름다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책임을 알 수 있다. 신명기 신학의 핵심인 모압언약이 구조적으로는 가운데에 위치하고 시간적으로는 현재에 놓여있으며 이것을 보좌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역사 서술이 앞뒤로 놓여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것은 신명기 전체의 구조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의 흐름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모압(세겜)언약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구조에서 1-3장의 산문적인 역사 서술은 31-34장의 운문적인 미래 서술과 대응하며, 4장의 설교적인 과거회상은 29-30장의 설교적인 미래예견과 탁월하게 일치한다. 이런점에서 과거(1-4)와 미래(29-34)를 염두에 두고 현재의 모압(세겜)언약을 대할 때에 우리는 신명기를 긴장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명기의 법의 특이성: 6-11, 12-26>

시내산 언약의 세부법(21-23)이나 모압(세겜)언약의 세부법(12-26)은 모두십계명의 순서대로 배열되었다 이것은 두 언약 모두 십계명을 가장 중요한 법적인근거로 삼고 그것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의 십계명에 특이한 법 2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신명기는 제4계명 안식일 계명에 있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시내산 언약에서 제시한 창조라는 주제 대신에 구속의 주제를 사용한다. 신명기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주제가 구속인데 내가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므로 다음의 행동을 하라(15:15)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아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일 계명을 지킴에 있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속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이민족과 구별되어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추측하여 볼 수 있다. 둘째, 탐심에 관한 10계명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웃의 집이 먼저 언급되면서 그것이 이웃의 소유를 포괄적으로 나타낸 반면에 모압언약에서는 이웃의 아내가 먼저 언급되고 나머지 이웃의 소유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가서 살 때 그곳의 음란한 성 풍습과 일부다처제를 경계하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신명기법의 체계는 시내산 언약의 법체계와 다른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시내산 언약법의 체계는 십계명(20)과 세부법(21-23)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신명기법은 십계명(5), 주요법(6-11) 그리고 세부법(12-26)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명기법에서 새로운 요소로 주어진 주요법은 주로 십계명의 1계명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며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서 이스라엘의 순종을 설득하는 내용으로 따라서 매우 설교적이다. 또 신명기법의 세부법은 시내산 언약 세부법에 비해서 엄청나게 그 길이가 늘어났는데 이유는 모압언약에는 각 명령과 규례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설명과 함께 동기절(motive clause)이 붙어 있어서 그 명령을 행하도록 설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압(세겜)언약법은 시내산 언약법에 비하여 삶의 현실적인 상황을 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동정적으로 고려하며 현실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신명기 1-3장 과 31-34, 그리고 신명기 4장 과 25-30>

신명기 1-3장과 31-34장은 서로 상응한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까운 과거를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까운 미래를 말한다. 또한 신명기 4장과 25-30장도 서로 대응하는데 4장은 먼 과거를 말하며 열조시대를 거쳐 세상 창조까지 시간적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렇게 먼 과거로 시간을 소급해 가는 이유는 먼저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특권을 가진 나라가 패역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클 것을 경고한다. 반대로 25-30장은 가장 먼 미래까지 시간이 흘러 내려가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가 쌓일 때 궁극적으로 그들은 해체되고 열국중에 끌려갈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들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어떻게 열리는가를 보여주며 새로운 전망을 앞으로 올 세대를 향하여 열어 놓고있다.

 

<결어>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이 질문은 오경이 어떻게 성경신학적으로 구약의 다른 책과 관련되는가를 알아야하는 문제이다. 오경은 구약의 출발점이자 신학에 있어서도 구약전체의 핵심을 제공한다. 이제 신명기를 성경신학적으로 설교하기 위하여 이상 논의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신학의 근본은 오경이다.

 오경의 언약은 구약의 다른 책들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오경의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모압(세겜)언약으로 구성된다

 오경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족장언약으로 준비되었고 시내산 언약을 통해 그 씨가 완성되었으며 모압(세겜)언약을 통해 그 땅이 완성되었다.

 모압(세겜)언약은 두 지도자, 두 시간, 두 장소라는 이중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 결과로 모압(세겜)언약은 완성되었으나 동시에 완성을 향해서 가야하는 특이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신명기는 자신을 토라(torah)라고 부른다. 토라는 단순한 법이 아니라 법이 기능한 언약의 공적문서를 가리킨다.

 오경의 법은 언약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 제도를 완성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 로 이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언약에 봉사하는 언약법이다.

 신명기의 법은 시내산 언약과 동일하게 십계명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법들이 (12-26) 나오기 전에 제1계명을 근거로 긴 설교를(6-11) 기술하고 있는 점이 특이 하다.

 신명기의 십계명이 출애굽기의 십계명과 구별되는 것은 제4계명(구속 주제)과 제10계명 (아내의 위치)에 있다.

 모압(세겜)언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명기의 완벽한 구조는 신명기의 신학적 목적에 봉사한다. 즉 현재에 성취되어야 할 모압(세겜)언약을 위하여(5-28) 앞에서 과거의 사건을 반성하고(1-4), 미래의 일을 예견하고 있다(29-34)

 신명기 30:6에는 신명기 신학의 신비한 역사철학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이킬 책임을 끝까지 강조하지만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인간의 마음에 할례 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이 약속은 구약의 역사철학의 근거가 되며, 앞으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주어질 언약인 새 언약(31:31-34)과 화평의 언약(36-37)의 기초를 형성한다.

 

우리가 현재까지 모든 신학적인 노력을 다 기울여서 구약을 전체로 본 관점이 언약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것은 되지 못할 것이고 성경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성경을 완전하게 전체로 보는 것은 영원한 미래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은 부분적으로 보나 완전히 알게 될 그 때를 기대한다 (고전13:9-12)

 

 

 

16장 신명기의 통일성에 관한 연구

 

<신명기 연구역사>

지난 세기 이후 신명기에 대한 연구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되어 왔다. 그 이유는 구약의 다른 책들과의 상관성에서 신명기가 그 어떤 책 보다도 깊고 또 신약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명기 자체의 여러 문제도 다른 책과의 관련성 속에서 설명되어야 하기때문에 더욱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런 복합성을 지닌 신명기의 여러 난제들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쉽게 접근하는 길은 현재 우리 손에 주어진 신명기 자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이 말은 본문 속의 언어학적, 문학적, 주석적, 구조적, 신학적 내용이 현재 표현된 상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연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최근의 신명기 연구는 현재의 본문을 역사적으로 누적된 것으로 보던 지난날의 자세에서 벗어나 현재 본문의 모습 그 자체가 신학적인 의미를 충분히 지닐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1970년대 부터 성경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새 문학비평(new literary criticism)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고전적 역사적 문학비평(old literary and historical criticism)과 양식사적 연구들이 신명기 뿐아니라 구약전체의 이론들을 세워왔기 때문에 짧은 시기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없어서 다른 책들에 비해 연구가 늦어 지고 있지만 그런 중에 조금씩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의 통일성에 관한 연구>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의 통일성을 연구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현재 우리 손에 들려진 신명기의 특징적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지적하는 것이다. 신명기 연구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출발점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은 신명기에서 언급된(29:1) 소위 모압언약의 실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29:1이 표제어인가 혹은 결어인가라는 논쟁이 있어 왔다. 이것이 표제어라면 모압언약의 실체를 29장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만일 결어라면 그 앞의 단원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은 29 1절에 언급된 두 언약, 즉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이 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29:1에서 모압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다르며 모압언약이 시내산 언약이 그랬던 것처럼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체라고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9:1을 표제어로 생각하면 우리는 모압언약의 실체를 그 이후 단원에서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결어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고 29:1에 표현된 두 언약,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모압언약은 시내산 언약에 대한 언약갱신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하나 구체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언약에는 불변요소(invariable element)가 있고 또한 가변요소(variable element)가 있다. 불변요소는 언약당사자에 대한 규정(definition of the covenant relationship) 언약규범(stipulations)과 같은 것이고 가변요소는 언약체결에 필요한 제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변요소를 법적 요소(legal element)라고 할 수 있고 가변요소를 제의적 요소(cultic element)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을 맺은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함으로 새로운 시간(27:2)과 장소(11:29, 27:12-13)에서 다른 주체(27:1,11 비교 11:29, 8:33)에 의해 언약의 제의적 요소가 변하였으므로 언약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모압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것이다. 29:1은 독자가 이미 시내산 언약의 신적 권위를 받아 들이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과 모압 언약이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모압언약의 권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신5:2-3에서 시내산에서 그 당대의 사람들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오늘 모압언덕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그 언약에 동참한 것이라는 특이한 주장을 한다. 이것은 이제 모압언덕에 집결하여 있는 현재의 세대가 언약을 갱신하는데, 이 언약이 근본적으로 그 전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의 기초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과거와 현재의 시대를 동일시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최초의 언약수립이 현재의 세대에도 유효하며 툭히 현재와 미래를 거쳐 완성될 모압언약이 바로 시내산 언약에 기초룰 두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이 둘째 언약은 이제 모압언덕에서 시작되지만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므로 그곳에서 언약갱신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압 땅에서의 언약갱신은 가나안 땅에서의 완성을 기대하는 잠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족장 때부터 약속된 그 땅에서 매듭짓는 언약갱신이야 말로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9:1은 앞에서 언급한(모압언약의 시작은 4:45) 모압언약의 내용을 정리하여 요약한 결어에 해당하고 신명기의 구조적, 신학적 통일성을 분명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