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2013-06-08 19:14:27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기원은 성경에 따르면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유래한다. 바나바와 바울이 인디옥에서 일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많아졌는데 사람들이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므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호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 존재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갖게된 사람들이다. 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운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 그들에게 전파되었던 그리스도는 누구이셨는가?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하였고 특별히 부활 사건을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신적인 증거로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사실 전달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형성된 하나님의 계시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떠나서는 그 개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최초의 복음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시가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였지만 정작 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여 바울의 말을 믿었다. 바울의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 예수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는 다는 메시지는 특별히 이방인들의 마음에 닿았을 것이다. 이 복음을 믿은 이방인들이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운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의 기록중 특별히 인간 창조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계시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인데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이 자동적으로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선약과 금령은 어긴 인간존재의 비참함은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이 무능과 무가치를 보여준다. 이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장구하게 이어진 이스라엘의 역사 역시 인간 존재와 인간 역사의 의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임을 역사를 통하여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출애굽 1세대의 멸망,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멸망의 역사는 인간 존재란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할 책임을가진 존재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비록 피조물이지만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일방적인 관계도 아니었으며 더구나 개인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창세기 이후의 구약 계시는 분명히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만물과 동일하지만 다른 만물과는 달리 만물을 다스리는 피조물이라고 계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순종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순종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스스로 순종하길 기뻐하신 것이고 그런 존재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고 그런 인간의 슨종이라여만 참된 순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며 수동적인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다. 순종라는 말 자체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관계에서는 순종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한 것이나 아담으로 부터 하와를 지으신 사실,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신 것, 생육하고 번성하여 다스리라고 하신 것, 이런 모든 계시에는 하나님 앞에 인간 존재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존재 자체도 개인적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할 창조목적을 이루는 일에서도 개인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앞에서 쌍방적이며 능동적인 존재로 그리고 공동체적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어진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창조질서는 왜곡되었는데 먼저 친밀하여야 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대신 자기의 뜻을 주장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인간 상호간의 공동체적 관계가 깨어져서 상호 불신하고 원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인간이 다스려야 할 만물이 더 이상 인간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땅도 저주를 받았고 만물은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바로 인간의 불순종인 것이다. 죄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창조목적을 거스리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훼손하였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 그리고 창조질서가 변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범죄이후에도 그것은 동일하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아담이 이루었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게 하시려고 역사 가운데 뛰어 들어오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대단히 쌍방적이고 능동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의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란 존재를 언약백성으로 세우심으로써 인간 존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쌍방적, 능동적 그리고 공동체적 존재인가를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그리고 모압 언약들은 이런 사실을 잘 드러낸다. 언약의 형식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보아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그런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항상 제기되는 것은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율법을 행하는 외적인 차원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고 신뢰하는 마음 그리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순종,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었다. 인간의 순종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질 수없음을 이스라엘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실패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준비하심으로 자신의 창조 경륜을 이루어 가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의 실패 이후에 아니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며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갑자기 준비된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준비되었던 분이시며 하나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장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실 그리스도가 준비되는 시간이었던 것이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역사적 인물인 예수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등장은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이루시려는 창조목적을 이루는 일에 동역자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인 것이다. 사실 최초의 창조의 동역자는 아담과 하와였을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의 동역자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역사 가운데 오신 것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장구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필요했듯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까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장구한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경륜이 전개되는 역사였듯이 그리스인들이 만들어가는 역사 또한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는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는 사람이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이루는 협동사역이다.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시어 그리스도인에게 내주케 하셨으니 이로써 성령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고 종말이 오기까지 모든 세대의 역사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 순종의 문제이다. 성령의 내주가 자동적으로 순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본질적으로 쌍방적이며 능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태초부터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고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세상이 오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도 대단히 쌍방적이고 능동적이었다. 자신을 낮추어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도 그렇고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순종의 극치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마지 못해서 하신 것이 없고 태어남에서 죽기까지 전 생애가 전적인 자발성에 기초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종이 어던 것인가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처음으로 새언약이란 계시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이스라엘과 새언약을 맺으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그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다른 언약이 될 것이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법을 돌판이 아닌 인간의 마음에 기록하여 맺는 언약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서는 예수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첫 언약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하신다고 증거한다. 새 언약은 이렇게 옛 언약과 차원이 다른 것이지만 옛 언약에서 나타났던 창조질서는 여전히 새언약에서도 동일하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쌍방적이며 능동적이라는 창조질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새 언약에서도 동일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게를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이해하려는 잘못을 범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창조실서를 세우는 일이지 그 질서를 거스리시는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분투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예수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그리스도인은 그저 예수가 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면 사도행전 이후로 이어지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분투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발적이고 쌍방적인 존재로 책임있게 서야할 것인가를 말하였다. 구약에 나타난 언약이 자발적이고 쌍방적이며 공동체적인 관계를 보여주듯이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에도 동일한 창조질서가 나타나 있다. 우선 새 언약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순종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이므로 새 언약을 세우는 일이 예수님은 절대 수동적이거나 일방적인 입장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 언약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피, 곧 죽음으로 세워진 것이란 의미는 새 언약은 언약의 당사자인 예수의 절대적인 순종으로 세워진 것이란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는 언약의 당사자가 된 것은 그리스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과도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새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여 새 언약의 당사자로 피를 흘리신 것이고 여기에 나타난 예수의 순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쌍방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서 그리스도가 보이신 순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창조의 동역자임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